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 영 소 3개국 외상회의는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정했다. 이 결정은 해방정국에 메가톤급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모스크바 삼상(三相)회의의 결정 내용이 국내에 알려지기 전, ‘한국의 독립문제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논의될 수 있다’는 미국 워싱턴발(發) 외신기사(12월 25일 발신)가 합동통신을 통해 국내에 전해졌다. 이 외신은 ‘소련은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제의한 반면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한다’는 내용이었다. 해방 후 독립국가 수립에 대한 열망이 불꽃처럼 타오르던 당시 이 외신기사는 국내 언론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동아일보는 이 외신기사를 12월 27일자(26일 오후 배포) 1면 4단 머리기사로 실었다. 1
동아일보 1945년 12월 27일자 1면
동아일보에 비판적인 세력들은 “국내에 반탁(反託)운동 열기를 몰고 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삼상회의의 한국 관련 내용을 보도한 동아일보의 1945년 12월 27일자 머리기사” 2라며 이 기사를 “반탁운동을 격화시켜 남북 분단의 빌미를 제공한 대표적인 왜곡 보도” 3라고 주장하고 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이 신탁통치가 주가 아닌 임시민주정부의 수립에 있었음에도 외신을 빙자한 허위 추측보도로 반탁의 분위기를 조성하였고, 그 내용이 소상히 알려진 다음에도 이를 무시하거나 희석시키며 신탁통치에 방점을 찍고 반탁운동을 지속적으로 선동하였다”는 주장 4도 있다.
심지어는 “한민당 대표 송진우가 사장으로 있던 동아일보의 조작 기사”라며 “동아일보가 아직도 살아있는 신문이라면 해마다 12월 27일에는 1945년 12월 27일에 내보낸 이 기사에 대한 사과문과 반성문을 실어야 한다. 언론이 사회에 해악을 끼친 사례로 한국언론사에서 가장 극악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5라고 터무니없는 공격을 하고 있다.
KBS ‘미디어포커스’는 2003년과 2004년, 당시 동아일보가 국내 언론 중에서 유일하게 이 외신기사를 대서특필한 것처럼 묘사하면서 이 동아일보 보도가 “당장 독립을 원했던 한국 국민을 자극해 격렬한 반탁운동을 일으켰고 그 반탁운동은 결국 남북분단으로 이어졌다”고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소련은 신탁통치를,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는 이 외신기사가 12월 27일자 조선일보, 자유신문, 신조선보, 서울신문, 중앙신문에도 일제히 보도된 것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1945년 12월 27일자 1면
신조선보 1945년 12월 27일자 1면
중앙신문 1945년 12월 27일자 1면
이 외신기사가 동아일보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 서울신문, 중앙신문, 신조선보(新朝鮮報)에도 일제히 보도됐음을 밝힌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동아일보와 한민당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과를 의도적으로 오보하여 민족이냐 반민족이냐 하던 당시 구도를 찬반탁 국면으로 전환시키면서 분단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제기됐다. 그러나 동아일보 외에 다른 신문들에도 보도되었으므로 위와 같은 고의성이나 의도성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의도는 원래의 소스원인 통신사나 미국의 정책 담당자가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6고 했다.
동아일보는 이 외신기사가 보도된 다음날자인 1945년 12월 28일자 1면 사설 ‘민족적 모독’에서 “(삼상)회의로부터 발표된 정식공보(正式公報)가 아니매 그 진부(眞否)는 속단키 어려우며 따라서 비판의 정곡(正鵠)도 기하기 어려운 터…”, “아직 진상(眞相)의 전모가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이후의 진전을 주시하는 동시에 이 이상의 비판을 보류하거니와…”라고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정했다는 최종소식은 이틀이 지난 12월 29일자 모든 언론에 일제히 실렸다.
신탁통치설이 나돌 때부터 반탁의 입장을 명백히 해온 동아일보는 신탁통치 발표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적인 반탁운동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 대표적인 것이 12월 30일자 1면에 실린 ‘와전(瓦全·아무 보람도 없이 신명을 보전함 )보다 옥쇄(玉碎)로 자력(自力)의 승리를 믿자’는 사설이다. 7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자 1면 사설
좌익이고 우익이고 가릴 것 없이 거족적(擧族的)으로 반탁의 횃불을 들던 1946년 새해 벽두 좌익계열은 돌연히 반탁에서 찬탁(贊託)으로 표변하여 1월 3일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 절대지지’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까지 벌였다.
결국 해방정국은 ‘반탁’의 우익과 ‘찬탁’의 좌익간의 극심한 대립, 그리고 좌우익 내부의 노선 차이 등으로 혼미(昏迷)를 거듭하였고 급기야 한국문제는 유엔에 상정(上程)되어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를 거쳐 그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Notes:
-
동아일보 12월 27일자 1면 머리기사
외상회의에 논의된 조선 독립문제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화성돈(워싱턴)25일발 합동지급보】막사과(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 외상회의를 계기로 조선 독립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하여 가고 있다. 즉 반즈 미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는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3국간에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지역을 일괄한 1국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38도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 정용욱, 역사비평 통권62호, 2003년, 290쪽
- KBS ‘미디어포커스’, 2003년 12월 13일과 2004년 1월 10일 두 차례 방영
- 김동민, ‘동아일보의 신탁통치 왜곡보도 연구’, 한국언론정보학보 통권52호, 2010년, 151쪽
- 김기협, 해방일기2, 너머북스, 2011년, 294~295쪽
- 이완범, ‘조선공산당의 탁치노선 변화과정’, 한국근현대사연구 제35집, 2005년
-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자 사설 ‘와전보다 옥쇄로 자력의 승리를 믿자’
一
이른바 외상회의는 끝났다. 국제 신의를 배반하고 조선민족을 모욕하는 ‘신탁통치’를 결정하였다. 도대체 ‘탁치(託治)’의 주창자는 어느 나라의 그 누구이냐? 미, 영, 소 3국의 어느 나라가 우리에게 불공대천(不共戴天)할 이 치명적 모욕을 던지려 하였느냐? 자기의 자유를 주장하려는 자는 남의 자유도 존중하여야 하며 자가(自家)의 주권을 옹호하려는 자는 남의 주권도 시인하여야 한다. 이것이 문명사회의 이상이요 문명인의 통념이다. 이 명백한 공리(公理)를 모를 리 없거늘 어찌하여서 이 같은 비행(非行)을 감행하였는가? 강도의 약탈을 당하야 적수공권이 되었다고 인권을 무시할 것인가? 조선이 일시 강도의 침해를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하여 만신창이로 피폐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속담에 이른바 ‘물어도 준치요 썩어도 생치(生雉)다.’ 5천년의 역사와 문화를 가졌고 3천만의 두뇌와 생혈(生血)을 가졌다. 자립여부를 운운함도 무지와 불손이려든 하물며 모략적 의도로 자작한 38선을 구실삼아 투표불능을 운운함과 같음은 교활한 지능범의 일종이니 이 지능범이 삼국 중에 어느 국이냐?
二
수범(首犯)을 추궁하여 문(文)이 여기에 이르렀으나 나타난 결과를 일별할 때 우리의 받은 상처는 오직 하나다. ‘탁치’라는 문구에 일격된 심각한 모욕 하나뿐이다. 이 국욕(國辱)을, 이 민욕(民辱)을 어떻게 설치(雪恥)할 것인가? 타력의존(他力依存)이란 원래 이러한 것임을 3천만 형제는 알았는가? 조력자의 조력은 순수(順受)해 무방하리라. 그러나 조력은 어디까지 조력이요 주력은─동력(動力)은 철두철미 자력의 여하에 있는 것이니 천(天)은 자조자(自助者)를 돕는다 함이 그것이다. 자력으로 이 상처를 회복하자! 갱생의 험로를 이 자력으로 타개하자. 광복의 거역(巨役)을 이 자력으로 건설하자. 피만 가지고 결전하였든 기미 당년(當年)을 회고하라. 원자탄이 없더라도 이 생혈(生血)이면 족하다. ‘와전(瓦全)보다는 차라리 옥쇄를─’이 기백이면 족하다. ‘외모(外侮)의 극복은 내부적 결속!’ 이 노력이면 족하다. 연면(連綿) 5천년 유구한 우리의 긍지를 다시금 가다듬고 망국 40년, 뼈에 사무친 통한을 그대로 폭탄삼아 38장벽에 부딪쳐 보자! 탁치정권에 부딪쳐 보자! 빛은 동방에서! 정의의 승리는 필경 우리에게 있으리라.
제목은 마치 왜곡보도가 아니라는 것처럼 해놔서 무슨 말인가 하고 봤더니
우리만 한거 아니고 “쟤네들도 했데요…”라고 일러 주고 싶었던 거네..
그렇게 억울하셨쎄요?
“그래 니들만 한거 아니고 조중동이 예나지금이나 똑같다.”
이제좀 들억울하냐?
반성이라는 말을 잊고 사는 족속들 같으니.
카~~~악, 퉤~!!!
Comment by 이정우 — 2013/12/24 @ 12:45 오전
휴일 전날 좋은 날 나쁜 글을 남기셨네요.
이 글의 취지는, 왜곡이 아니라 오보이며 오보가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보가 잘했다는 것은 아닙니다.그러나 왜곡과 오보는 전혀 다릅니다.
외신의 오보를 그대로 전한 국내외 언론의 보도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D-storyⅡ19~23 모스크바 삼상회의 보도의 진실 (1)~(5)도 참고해주십시오.
UP(UPI의 전신)가 왜 오보를 했고, 왜 일부 미국 신문만 이 기사를 전재했는지는 추후 소개할 예정입니다.
이같은 오보가 있어서는 안되기에 진실규명은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Comment by 신이 — 2013/12/25 @ 10:48 오후
동아일보 오보사건 찾아보던 중에 들어왔습니다.
한번 씨익 비웃고 갑니다~ 재밌네요. ㅋㅋ
나무위키에 따르면
“한국판 엠스 전보 사건.
다된 밥에 재를 뿌렸다간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는 사건.
기레기의 최종보스 어떤 기레기도 상대가 안된다.
당시 동아일보를 비롯한 국내신문사들로부터 오보된 초특급 대형 사건.
그리고 오늘날까지의 한반도의 비극적인 현대사와 정체성을 만들게 해준 결정적인 계기이자 분기점” 라죠. ㅋㅋㅋㅋ
뉘예 뉘예 동아일보 뿐만 아니라 다른 신문도 오보를 냈다고요? 자알~ 알겠습니다. 캄사캄사 자랑 캄사
Comment by 조중동 — 2017/07/10 @ 6:43 오후
1945년 모스코바 3상회의에 대한 결과 발표를 앞둔 상황에서의 오보사건은
우리 동아일보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라는 점에서
고의적으로 왜곡할 의도가 없었다 라는 취지의 기사로 읽혔고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기사내용에서 “위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라고 뭉뜽그려서 쓰여있는데
“위 오보에 대한 주장은 사실이며 언론사로서 사과해야할 부분이지만 왜곡에 대한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라고 정정하는 게 맞습니다.
사과할 부분이 있다면 사과를 하고 (오보부분)
소명해야할 부분이 있다면 소명을 하는 게 그렇게 힘든건가요(왜곡부분)
댓글들을 보면 알겠지만 독자들이 지적하는 부분은
오보를 냈지만 왜곡이 아니니 별 일 아니다 라고 마치 조롱하는 듯한 태도입니다.
개인적으로 오보는 언론폐간의 사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중대차한 문제고
기사를 쓰는 쪽에서는 그렇게 중요하게까지 느끼질 못하는 것 같아서 슬픕니다
그런 자세로 작성된 기사들이 돌아다니는 세상에서 우리 아이들이 살길 원하지 않는 1인이 남깁니다.
Comment by 언론에 박수를 보내보고 싶은 1인 — 2019/05/22 @ 2:46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