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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4 : 복간의 꿈

Posted by 신이 On 5월 - 4 - 2012



 해방 직후 동아일보 사옥 2층 편집국으로 쓰던 방에 옛 동아일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당시 서울시내에는 새롭게 발간되는 신문으로 홍수를 이뤘으나 동아일보는 나올 수 없었다. 1940년 8월, 강제폐간을 당할 때 총독부는 동아일보가 다시는 신문을 내지 못하도록 윤전기까지 매각토록 했기 때문이다.


 

 송진우 사장은 복간을 서둘렀다. 주간에는 설의식, 편집국장에 고재욱, 총무국장에 김동섭, 업무국장에 김승문, 공장장에 이언진으로 간부진을 구성했으나 인쇄시설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급선무였다.





송진우 사장


















                                  설의식 주간   




                                           이언진 공장장  


                                                                               김동섭 총무국장


고재욱 편집국장                                                       김승문 영업국장




















“내가 알기에는 고 고하 송진우 선생은 우선 경성일보사 윤전기를 사용할 것을 생각했던 모양으로 현 중앙대 총장인 임영신 박사가 이 관계로 미군정당국과의 교섭을 맡았었다. 임 박사는 미군사령관「하지」중장을 방문하고 이 일을 간청하였던 바, 힘껏 노력하겠다는 쾌락은 받았으나 좀처럼「사인」이 나오지를 않았다.” (곽복산 씨 회고, ‘동아일보의 중간(重刊)’, 1965년 4월 13일자 동아일보) 1 




 윤전기 사용 ‘사인’은 11월 중순에야 나왔다. 2 경성일보사가 군정청의 관리 하에 들어간 뒤였다. 3




“경성방직, 남만방적 등을 거쳐 동아일보가 복간되면서 공무국장으로 온 이언진 씨는 최두선 사장(송진우 사장이 사장에 피살된 뒤 김성수 사장을 거쳐 1947년 취임)으로부터 절대 신임을 받은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다. 공무뿐만 아니라 편집 쪽 공부도 많이 했다. 홍종인 씨와는 사촌 간으로 고재욱 당시 편집국장에게도 제 말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김진섭 당시 동아일보 기자 회고, 2007년 11월 19일 인터뷰)




 서울공인사 사옥정면에 동아일보사의 간판이 뚜렷이 걸리자 시민들은 환호했다. 동아일보의 보관지도 보전 도서관에서 옮겨와 조사부의 준비도 착착 진행됐다. 정치부장은 백남교, 사회부장은 곽복산, 조사부장 김삼규, 편집부장 이유근, 사업부장 이길용 등이었다.




 동아일보는 복간소식을 호외로 알렸다. 동아일보 제호가 담긴 호외를 일제시기 지국 명부에 따라 전국에 한 뭉치씩 우송했다. 각 지국과 보급소로부터 환호의 소리와 함께 계약금이 쇄도했다. 4




 이 호외의 제목은 ‘해방된 강산에 부활된 동아일보, 언론진영에 불일(不日)간 재진군(再進軍)’이었다.


 “천도(天道)一무심치 않아, 이 강토에 해방의 서기(瑞氣)를 베푸시고 성조(聖祖)의 신의(神意) 무궁하시어 이 천민에게 자유의 활력을 다시 주시니, 이는 오로지 국사에 순절한 선열의 공덕을 갸륵타 하심이오. 동아에 빛난 십자군의 무훈을 거룩타 하심이라. 세계사적 변국(變局)의 숙명적 일면이라 한들 이 하등의 감격이며 이 하등의 장관입니까?…뿌리 깊은 나무는 잘려도잘려도 움이 돋거니 5천년의 전통을 뿌리삼아 3천만의 심혼에 깊이깊이 심어 두었든 조선의 동아일보가 그대로 자진(自盡)할 이치가 없어서 새 건설의 새 직능을 자부하고 대업의 일역을 위하여 일보(一步)를 떼려는 것입니다.” (동아일보사사 제2권, 1978년, 41쪽) 5 













Notes:

  1.  


    곽복산 씨 회고, ‘동아일보의 중간(重刊)’, 1965년 4월 13일자 동아일보


     내가 알기에는 고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선생은 우선 경성일보사(현 대한공론사) 윤전기를 사용할 것을 생각했던 모양으로 현 중앙대 총장인 임영신(任永信)박사가 이 관계로 미군정당국과의 교섭을 맡았었다。임 박사는 미군사령관「하지」중장을 방문하고 이 일을 간청하였던 바、힘껏 노력하겠다는 쾌락은 받았으나 좀처럼「사인」이 나오지를 않았다。

     여기저기에서 작은 규모의 새로운 신문이 터져 나왔다。 좌익계지들도 등장했다。 우리 동인들은 상당히 초조한 느낌을 금치 못하였다。 이렇게「東亞」중간을 서두르는 한편、송진우(宋鎭禹)·김성수(金性洙) 두 선생은 어지러워지는 국내외 정국 앞에서 여러 동지들과 국민대회 소집을 준비하다가 한국민주당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실로 혼돈하고 착잡만 해가는 해방된 조국、앞길이 결코 평탄치 않을 국내의 정세를 그날그날 바라만보면서 어느덧 수개월이 지났다。

     11월도 중순경 어느 날、드디어「사인」이 나왔다。 이때 고하 선생은 각 부서의 책임자될 사람을 구두로 발령했다。 대기 중인 동인들은 아연 활기를 띠고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윤전기 사용은 해결을 보았으나、정작 우리글의 활자시설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또 하나 일거리가 생겼다。현 공무국장인 이언진씨와 나는「택시」를 잡아타고 당시 보성전문학교(현 고대)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도서관창고에 보관되었던 동아(東亞)전용의 한글자모(字母)는 실로 5개 성상만에 다시 햇볕을 보게 되었다。 이 국장은 이날로부터 경성일보사 공장 한편에 문선(文選) 시설을 하는 한편 활자주조를 밤낮으로 하는 등 초창기의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편집국과 업무국도「경일(京日)」사옥에 차리고 사옥정면에는「동아일보사」의 간판이 뚜렷이 걸리어 시민들의 환성을 자아내곤 하였다。「동아」보관지도 보전도서관에서 옮겨와 조사부의 준비도 착착 집행이 되고 각부서「스텝」은 옛날동인들을 중추로 하여 새 동인들을 맞이했다。

     업무국에서는「동아」중간의 호외를 발행하였다。 전국의 전(前) 지국、보급소로부터 환호의 소리와 함께 계약금이 쇄도하였다。 이리하여「동아」는 1945년 12월 1일자「타블로이드」형 4면 석간으로 우리민족 앞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2. 이진섭 코리아헤럴드 상임 편집위원, ‘조국해방과 군정하의 언론’, 한국의 언론, 1968년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인쇄시설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 신문사 및 인쇄소의 쟁탈싸움이다. 이미 지적했듯이 국문지 발행에 완비된 시설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당시 매일신보사 밖에는 없었다. 그것은 군국 일본이 1940년 8월 10일 민간 양대지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강제 폐간시켰을 때 윤전기 및 기타 시설을 분산시켜 버렸기 때문이었다.


     


  3. 고하선생전기편찬위원회 편, 독립에의 집념-고하 송진우 전기, 동아일보사, 1990년


    이와 같은 정세 아래에서 고하는 그해 11월 중순 하지와 회견하는 자리에서 동아일보의 복간을 요청하여 협조를 얻었다. 강제 폐간된 지 5년 만에 중간을 본 동아일보사는 흡사 적전상륙이나 다름이 없었다.

    동아일보가 이렇게 복간이 늦은 것은 인쇄시설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서울시내의 신문인쇄시설들은 좌익계가 독점하여 버렸고, 그들은 동아일보의 중간을 방해하고자 직접 간접적으로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활판으로 만들어 낼 수도 없었다. 늦게나마 나오게 된 것도 경성일보사가 군정청의 관리 하에 들어간 후 그 일부 시설을 빌어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하가 하지와 아놀드에게 경성일보 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교섭한 결과였다. 


     다음은 한글로 된 활자가 문제였다. 동아일보 전용의 자모(字母)는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도서관 창고에 그대로 보관돼 있었다. 이언진 공무국장은 곽복산 사회부장과 함께 달려갔다.

     택시로 옮겨온 한글자모로 경성일보사(서울공인사) 공장 한편에 문선(文選) 시설을 하고 활자를 주조하기 시작했다. 태평통 1정목 32번지, 지금의 서울시청 그 자리에서였다. 여기에 편집국도 차렸다. 이언진 국장의 역할이 컸다.



  4. 곽복산 씨 증언, ‘반세기 쌓인 일화’, 1970년 4월 1일자 동아일보


     11월 동아일보는 사옥을 국민대회 준비회 사무실로 빌려주고 인쇄시설이 있는 서울공인사로 옮겨 20일경에는「동아일보가 12월 1일부터 발행된다」는 내용에「동아일보」제호가 찍힌 호외쪽지를 영업국에 비치된 일제 때의 지국명부에 따라 전국에 한 뭉치씩 우송했다. 호외가 배달되자 전국 각지의 구(舊)지국들이 서로『내가「동아일보」지국을 하겠다』고 돈보따리를 싸지고 떼지어 몰려들어 기금 없이 시작된「동아」의 재정적 뒷받침이 되었다.


  5.  


    동아일보 복간호외, 동아일보사사 제2권, 1978년


     천도(天道)一무심치 않아, 이 강토에 해방의 서기(瑞氣)를 베푸시고 성조(聖祖)의 신의(神意) 무궁하시어 이 천민에게 자유의 활력을 다시 주시니, 이는 오로지 국사에 순절한 선열의 공덕을 갸륵타 하심이오. 동아에 빛난 십자군의 무훈을 거룩타 하심이라. 세계사적 변국(變局)의 숙명적 일면이라 한들 이 하등의 감격이며 이 하등의 장관입니까?


     일장기말살사건으로 정간의 중형을 당한 이래 버티다 버티다 못하여 필경위정(畢竟爲政)의 제물이 되였든 여러분의 동아일보는 해방된 이 강산에 다시금 나옵니다.


     짓밟히고 시달리어 혹은 시정(市井)에 구르고 혹은 초택(草澤)에 묻히어 상담(嘗膽)의 고행을 겪는 동아일보 동인 일동은 이제 맥맥생혈(脈脈生血)에 뛰는 고동을 그대로 품고 언론 진두에 다시금 나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잘려도 잘려도 움이 돋거니 5천년의 전통을 뿌리삼아 3천만의 심혼에 깊이깊이 심어 두었든 조선의 동아일보가 그대로 자진(自盡)할 이치가 없어서 새 건설의 새 직능을 자부하고 대업의 일역을 위하여 일보(一步)를 떼려는 것입니다.


     창간 이래로 압수의 난장(亂杖)이 천도(千度)를 넘었으며 정간의 악형이 4차에 이르러 만신이 혈흔이었으나 그러나 민족의 면목을 고수고수(固守苦守)하기에 최후의 뇌장(腦漿)을 다하든 우리 동인 일동은 모욕과 박해로 일관한 과거를 회상하면서 3천만 형제와 다시금 대면케 되는 오늘에 이르러 이 일문을 초(草)하려 하매 눈물이 저절로 쏟아지며 가슴이 그대로 찢어지는 충격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압력이 일시에 제각(除却)되매 반발이 두서(頭緖)를 차리지 못하고 추진이 선후(先後)를 가리지 못하여 바야흐로 군의(群議.중론)가 분분한지라 자칫하면 대의와 명분을 잃기가 쉽고 대도(大道)와 정론을 그릇 치기 쉬운 현하의 실정에 있어서 창간이래 민족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하였든 동아일보의 재 출진은 그 의의와 직무 진실로 거대한 바가 있음을 자인합니다.


     새로운 강산에 다시금 진군하는 동아일보의 풍모는 과연 어떠한가? 방향은 어떠하며 결의는 과연 어떠한가? 청컨대 잠깐만 기다리소서! 울거나 웃거나 간에 3천만 형제와 더불어 존재한 동아일보의 일관한 정신은 예나 이제나 다름이 없습니다.


     군정 당국의 호의로 경성일보사의 일부 시설을 이용케 되여 방금 준비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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