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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3 : 8월 15일, 그날(2)

Posted by 신이 On 4월 - 30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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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815일 해방과 동시에 내 집 뒤주 밑바닥에 깔아 감추었던 옛날의 태극기를 성북 산촌의 내 초가 대문에 올릴 때의 감격”  (이길용, 신문기자수첩, 모던출판사, 1948년) 1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역 이길용 기자는 1945815일, 집안에 감춰두었던 태극기를 꺼내 대문에 달았다. 이길용은 19368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투옥됐다 출감하면서 강제로 일체의 사회활동을 않는다는 서약서를 써 해방될 때까지 동아일보에 복직할 수 없었다. 당시에도 창씨개명 반대와 조기회(早起會) 결성, 그리고 독립운동 관련 죄목으로 일경에 체포돼 세 번 더 복역하다 해방 4, 5일전 출감한 상태였다.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 월간 신동아 199611월호)


 


 다른 기자들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일보가 폐간되는 바람에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에 들어가 ‘요시찰기자’로 있다가 그만 둔 우승규는 해방 전 동아일보 퇴직 기자들과 어울려 다녔다. 일장기 말소사건 당시의 사회부장 현진건과 화백 이상범, 전 지방부장 박찬희,  1920년대 활약한 기자 장종건, 폐간 전 사회부 기자 양재하가 그들이었다.


“허구 한날 퇴직 신문장이들이 어울려 노상 동네술집들을 휩쓸고 다니자니 일경의 눈초리는 우리들에게로 쏠렸다。그렇다고 만만들한 존재도 아니라서 잔뜩 눈독을 들이고 미행과 감시만 했다。” 2


 


동아일보 자료사진


  해방 이후 남산 국기게양대에 일장기 대신 처음으로 태극기가 올라가고 있다.


 


 이날 서울시내에 있는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 건물 앞 게시판에는 애국가 가사가 나붙었다. 매일신보 이봉구 기자는 “신문사 앞에는 잠간 사이에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회고했다. “그들은 적으며 합창을 하고…. 난 그때 들창에서 그것을 내다보고 있으려니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이봉구, ‘신문기자가 겪은 8.15’, 월간 신천지 19488월호) 




 월간 신천지는 해방 반년이 지난 19462월 창간호에서 유명인사를 대상으로 일왕의 항복방송을 들었을 때의 감격을 설문조사했다. 이화여전 재학 중 동아일보 자매지 신동아를 통해 등단한 시인 노천명은 “순간 눈물이 흐를 뿐”이라고 회상했고, 동아일보의 또 다른 자매지 신가정의 단골필자였던 소설가 이태준은 “최근 두 번 운 일이 있는데, ‘문장’ 잡지 폐간 당하던 날과 이 날”이라고 답했다. 동아일보에 몸담았던 임병철 함상훈 양재하도 “너무 기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토로했다.



 


이름

(직함)
815일 일왕의 항복방송을 들었을 때  가장 혹독했던 일제의 악정(惡政) 동아일보 경력
임병철(고려문화사 주간) 누구든지 붙잡고 울고 뛰고 소리지르고 싶음

말과 글을 없애려한 것

시골면장 순사 은행수위 급사에 이르기까지 위에서 아래까지 송두리째 저희끼리 해먹은 것

세계사상에 없는 혹독한 취조법, 사형

일장기말소사건 당시 사회면편집기자,

폐간 당시 사회부장
함상훈(정치평론가) 너무 돌연이라 머리가 띵하고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꿈인가 생시인가 의심했습니다. 언론기관을 폐지하고 인권을 유린하여 고문을 자행한 것

조선인을 차별하여 경제적 빈궁에 빠지게 한 일

조선역사 조선어 교수금지, 창씨강요, 문화를 말살한 것
20년대말 30년대초 정치부 논설반 기자
양재하(신조선보 주필) 대소대곡(大笑大哭)이 극치된 심정이었습니다만 다른 일에 바빠서 돌아다니느라고 정신 차리지 못했습니다. 어느것이 악정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만 우리 역사 문화를 무시하고 되지 않은 제것 속으로 우리를 집어 넣으려한 근본정신이 틀렸던 것입니다. 폐간 당시 사회부 기자

(신천지 1946년 2월호)


 


 동아일보 창간기자였던 염상섭은 멀리 만주에서 해방을 맞았다. 만선일보의 주필 및 편집국장도 그만두고 건설회사 촉탁으로 근무할 때였다. 일본인들과 일왕의 항복방송을 들은 그는 “뼈에 맺힌 원한이 갑자기 풀리는 환희의 눈물을 흘렸다”고 회상했다.


“이날, 일본 동경으로부터「중대방송」이 있다는 예고에 바로 옆의 집 일본부인과 뒷골목에 사는 노일인(老日人)이 방송을 들으러 내 집으로 왔었다。 이 노일인은 안면은 있었으나 내 집에 발을 들여 놓기는 처음이었었다。 방송은 목 메인 소리가 흘러나오는 일제의 침통한 항복선언이었었다。 실내는 냉수를 끼얹은 듯이 찬바람이 돌았다。그러나 내 가슴은 뛰었다。내 눈에도 그 일노인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하였건마는、제각기 그 뜻은 달랐었다。하나는 뼈에 맺힌 원한이 갑자기 풀리는 환희의 열루(熱淚)이었고、하나는 비분(悲憤)에 가슴 쓰린 통한의 눈물이었다。” (작가 염상섭, ‘환희의 눈물 속에 만주에서’, 1962815일자 동아일보) 3


 


 동아일보 기자와 신동아 편집장을 지낸 이은상은 전남 광양에 있는 형무소에 수감돼 있다가 8.15 다음날 석방돼 비로소 해방된 것을 알았다.


“전남광양에 있는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조선어학회사건에는 집행유예로 나왔으나 강연을 거부한다고 45년 정초 일경(日警)의 미움을 사서 예비검속으로 형무소 생활을 하게 되었다。16일 날 석방되어 비로소 해방된 것을 알았다。그러나 일본의 전국이 나빠진 것으로 미루어 해방을 미리짐작하고 있었다。…중국의 나갈 길(철학)을 가르친 손문 선생 생각이 났다。우리 겨레에게도 나아갈 기본적 궤도를 마련해주는 사상이 있어야 하겠다고 생각되었다。그래서 붓을 아꼈다가 11월에 해방 후 처음으로 붓을 들어「충무공일대기」를 썼던 것이다。” (시인 이은상,  ‘회상, 18년 전 그날…815일’,  1963 814일자 동아일보)  4


 


 그러나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내기도 했던 이광수는 해방을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그는 나중에 “이제 민족이 일본의 기반(羈絆․굴레)을 벗은 이상 나는 더 말할 필요도 또 말할 자격도 없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나는 사릉에 여전히 가만히 앉아 있었다. 독립의 기회가 이렇게 쉽게 온 것이 큰 기쁨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조국이 전장이 되지 않고 만 것, 동포가 일본의 손에 학살을 당하지 아니하고 만 것이 다 기쁜 일이었다. 앞으로 나 자신이 어떻게 할까 하는데 대하여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이 있었으나, 결국 가만히 있기로 하고 나는 역사와 철학 서적을 읽으면서 그날그날을 보내었다.…가장 깨끗하자면 해방의 기별을 듣는 순간에 내가 죽어 버리는 것이지마는, 그것을 못한 나의 갈 길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이광수, ‘나의 고백’, 이광수전집 13, 삼중당, 1963년) 5


 


 동아일보사 사내소식지 ‘동우(東友)’는 해방 20주년을 한해 앞둔 1964년,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해방의 감격을 되새기는 설문조사를 했다.  8 ․ 15 당시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복역 중이던 이희승 사장부터 1960년대 사회부 명기자로 활약하는 한태열 견습기자까지 124명이 ‘8 ․ 15와 나’란 설문에 응했다. 6


 1920년 경성방직의 사원으로 있으면서 동아일보 설립 신청서류를 작성했던 이희승 사장과 1940년 폐간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고재욱 주필, 일본 정치인을 상대로 폐간을 저지시키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는  심부름을 했던 당시 일본유학생 김상만 전무가 해방 전 동아일보와 관계가 있었을 뿐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세상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Notes:

  1. 이길용, 신문기자수첩, 모던출판사, 1948


     1945815일 해방과 동시에 내 집 뒤주 밑바닥에 깔아 감추었던 옛날의 태극기를 성북 산촌의 내 초가 대문에 올릴 때 감격도 감격이려니와 그해 97일 미군이 진군하면서부터 익(翌, 다음날) 8일 하오 4 점(點)을 금(線)잡아 36년 동안 이 강산에서 고혈을 빨아먹던 총독부 간판을 떼쳐 내고 이 시각부터 일장기는 땅에 떨어지며 그 자리 경복궁 옛터에 깃발도 찬연한 태극의 옛 국기가 오랜만에 풍년든 이 강산, 이 가을바람에 나부낄 때, 이 순간의 필자는 자신의 얼도 넋도 분별할 수 없는 무아몽중(無我夢中, 넋을 잃어 자기도 모르게 행동함)이다. 감분(感奮,감격하여 분발함)의 극적 장면이었다.



  2. 우승규, ‘나절로 만필-8.15의 좌우혼돈’, 19751 4일자 동아일보


     마침 내 이웃엔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있다가 손기정 군의 일장기 말살사건의 한사람으로 일경에 강제 퇴사를 당하고 난 뒤 대일 적개심으로 술에다 화풀이를 하며 앙앙불락 나날을 보내던 빙허 현진건군이 살고 있었다。두 사람이 의지상합(意志相合)、만나면 시국불평과 일제 저주로 노상 술타령만하며 세월을 보냈다。그러다가 43년에 병으로 타동(他洞)에 옮겨 살다가 작고했지만、거기에 함께 어울린 친구가 빙허와 같은 처지의 청전 이상범 군과 늙은 신문계 퇴역인 장종건 군。그밖에 전 동아일보 지방부장 금계 박찬희、동사(同社) 사회부 기자 양재하 군 외、시인인 노작 홍사용 등 여섯 친구였다。 허구 한날 퇴직 신문장이들이 어울려 노상 동네술집들을 휩쓸고 다니자니 일경의 눈초리는 우리들에게로 쏠렸다。그렇다고 만만한 존재도 아니라서 잔뜩 눈독을 들이고 미행과 감시만 했다。

     이렇듯 어물쩍하고「술망나니의 농업요원」으로 자처하며 지내는 동안 한해가 가고 이태가 지났다。이 사이 미군의 B29기가 끊임없이 은빛을 반짝거리며 고공을 날 때마다 환성을 올렸다。일본의 패망은 시간문제라고。

     신문 휴업을 한지 세 해째 되는 그 해에 학수고대하던 8·15를 맞았다。잡았던 농사연장들을 팽개쳤다。 때마침 농립을 쓰고 내 과원(果園)에서 아내와 함께 새빨갛게 늦익은 능금을 따다가 오랜 사이렌 소리를 듣고、연이어 일황「히로히토」(유인)의 울음 섞인 비명의 항복방송을 듣고선 제국주의 일본이 망했다는 것을 확인했을 순간의 그 열광。 그렇지만「희비난측」의 그 기쁨이 될 줄이야。

     농사고 뭐고 집어치웠다。다시 신문계로 나가서 오래 벼르던 언론보국을 하자고 마음먹고 가슴을 설레며 있을8월 하순께였다。아니나 다를까、이사람 저 친구가 신문을 같이 해보자고 찾아왔다。





  3. 작가 염상섭, ‘환희의 눈물 속에 만주에서’, 1962815일자 동아일보


     광복의 첫날을 맞이한 것은 압록강 대안(對岸)、만주 땅 안동에서 있었다。이날, 일본 동경으로부터「중대방송」이 있다는 예고에 바로 옆의 집 일본부인과 뒷골목에 사는 노일인(老日人)이 방송을 들으러 내 집으로 왔었다。 이 노일인은 안면은 있었으나 내 집에 발을 들여 놓기는 처음이었었다。 방송은 목 메인 소리가 흘러나오는 일제의 침통한 항복선언이었었다。실내는 냉수를 끼얹은 듯이 찬바람이 돌았다。그러나 내 가슴은 뛰었다。내 눈에도 그 일노인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하였건마는、제각기 그 뜻은 달랐었다。하나는 뼈에 맺힌 원한이 갑자기 풀리는 환희의 열루(熱淚)이었고、하나는 비분(悲憤)에 가슴 쓰린 통한의 눈물이었다。방송이 끝나자 말 없이들 헤어졌다。

     그런데、내가 여기에 말하고자하는 것은 바로 그날 저녁이 공교롭게도 내가 야경을 도는 차례이었다는 것이다。야경은 전시 중 동내(洞內)에서 자치제로 시행하여 오던 터인데 나는 당일로 밤을 도와가며 조직하여야할 우리 거류민회(居留民會)에 참석하기 위하여 순번을 바꾸어 달라고 청하여 인근의 국민학교의 일본인 선생이 대체하게 되었던 것이다。그리하여 회를 마치고、야반(夜半)에 집에 돌아와 앉았자니、마침 내 집의 옆 골목에서 딱딱이 소리가 나자마자、뒤미처 캑하고 비명이 희미하게 들리고는 잠잠히 밤은 깊어갔다。

    이튿날 회에 나가서、간밤에 내 집 옆 골목에서 D보통학교 일인교원이 흉한의 백인(白刃, 서슬이 번쩍이는 칼)아래 자살(刺殺, 찔러 죽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내심으로 어크머니나!하고 몸서리가 쳐졌으나、부회장인 나는 회장 L씨와 함께 지면(知面)이요 횡사한 그의 집에 조위(弔慰, 조문해 위로함)를 갔었다。

     해마다 광복절을 맞으면서 그때 이날을 일생에 한번밖에 또다시 없을 환희의 눈물로 맞이하고、그날 밤의 전율을 되씹고 있다。 그러나 그 환희는 비록 환희라 하여도 되풀이 하여서는 안되고 길이길이 후일을 위하여 명기(銘記, 마음 속 깊이 새기어 둠)하여야할 것이다。 또한 나 개인으로서는 그날의 횡액에서 벗어났음을 천주께 감사할 따름이다。


  4.  


    ‘회상, 18년 전 그날…815일’, 1963 814일자 동아일보


    8·15」의 감격은「민족의 감격」이었다。그날 그 때의 깊은 감명은 18년이 지나도 더욱 벅차게 가슴속에 살아오른다。그러나 그날의 감명은 국토양단과 동족상쟁, 그리고 혼돈의 사회상을 배경으로 자칫하면 흐린 회색의 망각지대에 묻혀 버려질듯하다가 오늘에 이르렀다。이제 웃고、울고、그리고 때로는 지친 지난 18년을 거슬러 올라 잠시 1945815일 그날의 기억을 몇 사람들로부터 되새겨보기로 했다。

     

    8·15 당시 어디에 계셨습니까?

    ❷ 어떻게 그 소식을 들었습니까?

    ❸ 그때의 직업은 무엇이었습니까?

    ❹그날의 복장은 어떠했습니까?

    ❺그날의 식사는 무얼 드셨습니까?

    ❻그때의 감회와 포부는 무엇이었습니까?


    ○ 윤현배(동아일보사업부장)

    ① 일본 군마(群馬)현 고기(高崎) 주둔 동부 제 38부대 병영 내에서。

    15일 낮 12시 좀 지나서。이날 새벽 1시부터 꼬박 4시간 동안 미 공군기의 맹폭격 때문에 잠을 설쳐 낮잠 자느라고 천황의 방송 있은 것도 몰랐다。

    ③ 일본군 군조(軍曹) 학도병으로 입대。

    ④ 약간 해이(?)된 복장이긴 했지만 서슬이 시퍼런 일본 군복(당시 보충대선 각반까지는 치지 않아도 되었다)。

    ⑤ 현미라 새하얗진 않았지만 하루 48작 쌀밥에 각종 육류 부식까지 끼여 당시 일본 국내에선 최고급 식사。

    ⑥ 오래전부터 일본이 패전하리라는 기미를 알고 있었던 탓인지 별다른 감회가 들진 않았다。「사이판」함락 후론「보병조전」(步兵操典, 보병훈련교본)을 찢어 담배를 말아 피울 정도였으니까 당시의 군대생활이란 게 형무소이상 정신적인 부자유이었으니、포부란 있을 리 없고 하루 빨리 일본군 냄새를 지우기 위해 군도(軍刀)도 떼어 장작 패는 데나 쓰라고 사병에게 주었다。그저 조용히 돌아가 국민학교 선생이나 할까 생각했다。


    ○ 이은상 (시인)

    ① 전남광양에 있는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조선어학회사건에는 집행유예로 나왔으나 강연을 거부한다고 45년 정초 일경(日警)의 미움을 사서 예비검속으로 형무소 생활을 하게 되었다。

    16일 날 석방되어 비로소 해방된 것을 알았다。그러나 일본의 전국이 나빠진 것으로 미루어 해방을 미리짐작하고 있었다。

    ③ 조선일보에서 나온 후 시골에 묻혀있어 직업은 없었다。

    ④ 감옥에서 삼베옷을 입고 있은 것으로 짐작이 간다。

    ⑤ 집에서 들여보내는 사식을 먹었다。광양의 유지들이 도와줘서 식사에는 고통이 없었던 것 같다。

    ⑥ 중국의 나갈 길(철학)을 가르친 손문 선생 생각이 났다。우리 겨레에게도 나아갈 기본적 궤도를 마련해주는 사상이 있어야 하겠다고 생각되었다。그래서 붓을 아꼈다가 11월에 해방 후 처음으로 붓을 들어「충무공일대기」를 썼던 것이다。


    ○ 홍재선 (금성방직 사장)

    ① 그날은 장사도 잘 안되어 대구 달성동 집에 있었다。

    ② 정오에 중대방송이 있다는 말을 듣고 짐작은 했으나 9시쯤 이웃에 살던 고 서상일(동아일보 대구지국장) 씨가 독립이 됐다고 큰소리를 쳐서 알게 됐다。

    ③ 그때 포목상을 하고 있었으며 41세였다。

    ④ 의복은 별로 곤란을 받지 않았으며 한복을 하고 있었다。

    ⑤ 식량사정이 곤란해서 잡곡으로는 보리쌀과 만주에서 들어온 좁쌀을 섞어 먹었는데 심한 때는 도토리 음식을 먹기도 했다。

    ⑥ 아무생각 없이 가슴이 벅차기만 했는데 해방된 조국이 이상적이며 급속한 발전을 하기만 꿈꿨는데。





  5. 이광수, ‘나의 고백’, 이광수전집 13, 삼중당, 1963


     을유년 816일 아침, 나는 자갈을 파는 개울가에 나가 보았다. 근로보국대 자갈 파는 사람들이 수십 명 삽들을 든 채로 서성서성하고 있었다. 서울 근방에 B29를 막는 방비공사를 한다고 사릉 내 집 앞개울에서 여름내 자갈을 추려서는 기차로 나르고 있었던 것이다. 농민들, 소학생들, 남녀노소가 매일 밥을 싸 가지고 와서는 자갈을 팠던 것이다. 내 작은 우물은 그들의 목마름을 축이는 데가 되어서 날마다 수백 명이 들고 났다. 그런데 이날은 웬 일일까 사람이 수십 명 밖에 안 오고 감독하는 일본 병정도 보이지 아니하였다.

     “오늘은 안하는 거야?”

     “병정도 어째 안 왔어?”

     근로보국대 사람들은 이런 소리를 주고받으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자갈을 반쯤 실은 열차가 뙤약볕에 아지랑이를 피우며 서 있었다.

     이때에 내 삼종이 더운 듯이 두루마기 고름을 풀어 헤치고 왔다.

     “형님, 일본이 항복하였소. 어저께 오정에 일본 천황이 항복하는 방송을 했다오. 나 지금 서울로 가는 길야.”

    하고 가버렸다.

     근로보국대원들도 뉘게 같은 소리를 들었는지 슬몃슬몃 다 가 버리고 개울가는 온종일 조용하였다. 자갈 파는 감독을 하노라고 와 있던 일병 둘은 동네 사람들한테 매를 얻어맞고 달아났다고, 어떤 청년이 내게 와서 말하였다. 사릉에서의 전쟁 종결은 이렇게 된 것이었다.

     그날 군중은 면소와 면장의 집을 부수고, 배급 양곡창고에서 막 쌀을 꺼내었다. 밤에 4, 5명 청년이 술이 거나하게 취하여서 내 집에 찾아 와서,

     “독립이 되었어요.”

    하고 좋아하였다.

     여운형과 안재홍이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사릉 앞으로 달리는 경춘선 열차에는 태극기를 든 군중이 차 지붕에까지 무더기로 타고 다녔다.

     9월에 미군이 들어 와서 금곡(金谷)에 와 있는 병정들이 곧잘 우리 동네에도 놀러 왔다. 까막까치도 막 쏘며 다녔다.

     나는 사릉에 여전히 가만히 앉아 있었다. 독립의 기회가 이렇게 쉽게 온 것이 큰 기쁨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조국이 전장이 되지않고 만 것, 동포가 일본의 손에 학살을 당하지 아니하고 만 것이 다 기쁜 일이었다.

     앞으로 나 자신이 어떻게 할까 하는데 대하여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이 있었으나, 결국 가만히 있기로 하고 나는 역사와 철학 서적을 읽으면서 그날그날을 보내었다. 나는 조선사, 그중에도 이조시대의 야사를 탐독하였고 시전·서전과 주역을 읽었다. 희랍·로오마·영국·미국·러시아의 역사도 읽었다. 7, 8년 간 내가 걸어오던 길, 하여 오던 생각에서 벗어난 나는 완전히 무념무상의 심경으로 세계와 우리 민족의 장래에 대하여 명상할 여유가 있었다. 왜 그런고 하면, 나는 다시는 세상에 안 나설 사람이기 때문이다. 과거 7, 8년 걸어 온 내 길이, 그 동기는 어찌 됐든지 민족정기로 보아서 나는 정경 대도를 걸은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조선 신궁에 가서 절을 하고, 향산 광랑으로 이름을 고친 날, 나는 벌써 훼절한 사람이었다. 전쟁 중에 내가 천황을 부르고 내선일체를 부른 것은 일시 조선 민족에 내릴 듯한 화단(禍端 ․ 화를 일으킬 실마리)을 조금이라도 돌리고자 한 것이지마는, 그러한 목적으로 살아 있어 움직인 것이지마는, 이제 민족이 일본의 기반(羈絆․굴레)을 벗은 이상 나는 더 말할 필요도 또 말할 자격도 없는 것이다.

    가장 깨끗하자면 해방의 기별을 듣는 순간에 내가 죽어 버리는 것이지마는, 그것을 못한 나의 갈 길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6. 8.15와 나’, 동아일보 사내소식지 동우(東友) 19648월호


     일제의 굴레를 벗은 지 어느덧 19년-그날의 시점으로 되돌아가 감격을 다시 새겨본다. ‘동우’의 집안 식구들이 어떻게 그날을 맞았을까를 상상해보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앙케트’를 내보았다.

    1. 귀하가 8.15를 맞은 곳은?

    2. 귀하의 8.15때 직업은?

    3. 귀하의 8.15때 나이는?


    이희승(사장)

    1. 함흥형무소

    2.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문과과장)

    3. 50


    고재욱(부사장, 주필)

    1. 전남 광주

    2. 귀농(동아일보사 폐간 후)

    3. 43


    김상만(전무)

    1. 전북 고창군 읍내에 있던 농장에서

    2. 원파농장 지배인

    3. 36


    우승규(논설위원)

    1. 서울 자하문밖에서 과수원을 경영하고 있을 때

    2. 농업

    3. 43


    천관우(편집국장)

    1. 서울(흥남에 근로동원 갔다가 병휴(病休)로 돌아와 있던 동안)

    2. 대학 예과학생

    3. 21


    김영상(심의위원)

    1. 서울 태평로 매일신보사

    2. 기자

    3.29


    강우봉(영업국 광고부)

    1. 함박산 기슭 양지바른 곳, 창 앞에 노수가 한 그루 서 있는 고향집

    2. 순사가 칼을 찬 것만 보아도 무서웠고 아직 カナ조차 배우지 못한 때

    3. 그러니까 엄마만 따라 다니던 여섯살


    김중배(편집국 사회부)

    1. 전남 광주

    2. 학생

    3. 12


    한태열(편집국 견습)

    1. 대구시 삼덕동의 집에서

    2. 무직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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