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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2 : 8월 15일, 그날 (1)

Posted by 신이 On 4월 - 13 - 2012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순간에 동아일보는 없었다. 1940년 8월 총독부에 의해 강제폐간됐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임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 해방을 맞았다.


 폐간 전 사회부에 있던 곽복산 기자는 14일 밤 매일신보 편집국에서 고하 송진우 전 동아일보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송진우는 당시 동아일보 사옥관리를 위한 동본사 사장으로 있었다.


“오랜 공백기에, 원서동 고하 선생 댁을 자주 드나드는 게 유일한 기쁨이요, 명일의 희망의 원천이 되었다. 고하 선생으로부터 미리부터 ‘카이로회담’ 내용을 들었었고, 독립이 되는 날, ‘동아’를 다시 할 수 있다는 희망과 신념을 간직하게 되었다. 기다리던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1945년 8월 15일 전날인 14일 밤 자정이 좀 지나서 매일신보 편집국 한 모퉁이에서 전화로서 조심스럽게 그것도 암호 형식으로 고하 선생께 15일 정오에 있을 일본 항복 발표를 전해 드리고, 신문사를 뛰쳐나와 흥분된 채 이 한밤을 새웠다. 얼마 후, 우리 몇 사람들은 동아일보 사옥에 모여, 동아일보 복간 준비에 착수하였다.” (곽복산 중앙대 신문학교수, 한국일보 논설위원, 동아일보 사내소식지 동우(東友) 1964년 12월호) 1




 폐간 전 총독부를 출입하던 사회부 기자 양재하와 일장기 말소사건 당시 조사부장을 역임한 이여성은 16일 건국준비위원회의 신문위원으로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를 접수하려했다.


“그때 제호는 해방일보라 고쳐서 냈지요. 그래서 우리들도 참말 생전 처음으로 민족적 기쁨과 정열을 가지고 해방일보를 발간하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경무국의 명령이라 해 가지고 신문을 나가지 못하게 하네. 신문사를 군대로 포위하고 해방일보를 못나가게 한단 말이야. 그래서 해방일보를 몇 번 발간하다가 할 수 없이 중지하고 말았습니다.” (정광현, ‘신문기자가 겪은 8.15’, 신문기자가 엮은 해방 10년사, 희망사, 1956년) 2




 설의식 전 편집국장은 김준연 전 동아일보 주필과 함께 16일 밤을 새웠다. 그때 김준연은 인촌 김성수 3가 정치는 고하 송진우에게 맡기고 김성수 자신은 학교를 키울 생각을 가졌다는 것을 설의식에게 전한다.


“16일 밤 내방(來訪)한 낭산(김준연)과 저녁도 같이하고 단파도 같이 들으면서 밤을 새웠다. 혜화정 꼭대기에서 바라보이는 서북각, 동남각에는 화광(火光)이 충천하였다. 총독부를 비롯하여 군영(軍營) 등에서 기밀문서, 기타를 소각하는 것으로 추측하였다. 새로 2시경, 야릇한 일군(日軍)의 행동을 발견하고 지하실에서 날을 밝혔다. 그때에 낭산과 주고받은 화제 중의 한마디를 쓰기로 한다.


필자=이제는 대도(大道)가 트였으니 역량 것 일들을 해야겠는데 대관절 조선 현 단계의 정책에 대한 고하(송진우) 선생의 심경은 여하(如何)?


낭산=토지국유, 대산업 국영 등 대체로 대세에 순응하려는 결심이다.


필자=인촌(김성수) 선생은 여하?


낭산=보전(보성전문)을 키워서 인재를 기를 자기(自己)는 박물관장이나 하여서 조선의 보물들을 간직하고 있겠다고. 사리사욕은 완전히 떠난다는 생각이오.


필자=그럼 됐소하고 나는 크게 즐거웠다. 그리고 낭산과 악수하면서『낭산이 나보다 연장이니 내가 형님으로 대하리다』하였다.


이리하야 우리는 고하 선생을 중심으로 새 조선재건의 일단을 맡으려고 나섰다. 그리하여 미군의 상륙을 기다려(즉 일군의 항복을 기다려서) 발족한 것이『국민대회준비회』였다. 정당의 요청도, 다른 염념(染念)도 끊고 오직 이 국준(國準)의 노선을 지켰던 것이다. 국준의 자취는 이미 낭산이 발표하였고 또 그 후의 사정은 만목소시(萬目所視, 많은 사람이 다같이 지켜보는 바)니 쓸 필요가 없다. 낭산은 지금도 정당에는 관계없이 민주의원에 간여하고 나는 나대로 이 동아일보를 지킬 뿐이다.” (설의식, 1946년 9월 17일자 동아일보)






 어느 신문사 소속이건 그 날은 감격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그날 한 두시 경에 부산 수상경찰서에 가보기로 하였습니다. 자연 그곳이 제일 동향을 알기 쉬웠으니까요. 갔더니 서장 고등계주임 조선인형사 셋이서 술을 마시며 얘기하고 있다가 내게도 한잔 부어주더군요. 그 조선사람이 왜 일본이 최후 일전까지 못하였느냐고 눈물을 흘리며 형언할 수 없이 안타까워한단 말예요. 그런데 조선말도 잘하고 조선사정에 능통한 서장놈은 그때 벌써 이 박사(이승만 박사)가 돌아오리라고 말을 하겠지요.” (남기영, ‘신문기자가 겪은 8.15’)


“오후 1시 20분 성진역을 떠나는 화물열차를 역장에게 사정사정해서 타고 함흥을 도착하니 거개는 벌써 해방의 기분이 넘쳐흐르고 태극 깃발이 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거리마다 무장한 일군과 일인경관이 그대로 남아 사나운 사자와도 같이 행인의 거동을 유심히 바라보며 자기들의 신변의 위험을 극도로 경계하고 또한 골목골목에서는 조선사람과 일인이 충돌되어 유혈의 극을 연출하는 등-어디서인지 ‘대한독립만세’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아아 감격이랄까…환희랄까…흥분이랄까…3천만 겨레가 함께 부르짖은 민족해방의 규성(叫聲)!! 내 어찌 이날의 순간을 잊으리오.” (호일엽, ‘해방일의 희비극’, 신문기자수첩, 모던출판사, 1948년) 4





                                                                                                             동아일보 자료사진


1945년 9월 서울에 진주하는 미 7사단을 환영하는 서울 시민들.





Notes:


  1. 곽복산, ‘구우회고실(舊友回顧室)’, 동우(東友), 1964년 12월호


     오랜 동안 동아와 고락을 같이 하던 수백 사우들은 폐간의 슬픔과 눈물을 안고 해산을 하고 말았다. 나는 그 뒤 부득이 ‘매일신보’로 전직을 하였다. 담당은 경성부청과 종로경찰서, 그리고 경기도 경찰부. 매신으로부터 입사 교섭을 받고 고하 선생(송진우)께 상의 말씀을 올렸더니, 신문사 간부가 아니고 한 개의 ‘리포터’니, 우선 생활과 호신책으로 있어 보라 하셨다. 그리고 멀지 않아 일본이 망하고 말 것이니 그때 다시 ‘동아’를 다시 해보자 하셨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 보니, 처신을 잘못했구나 하는 자각이 들었다. 해방 직후, ‘신문학원’을 설립하여, 15년 동안 후배 양성을 뜻한 것도 기자는 지조를 지켜야한다는 것, 그리고 올바른 지도적 일꾼이 되어야한다는 정신을 주입시키는 데에 큰 목적이 있었다고 할 것이다.


     오랜 공백기에, 원서동 고하 선생 댁을 자주 드나드는 게 유일한 기쁨이요, 명일의 희망의 원천이 되었다. 고하 선생으로부터 미리부터 ‘카이로회담’ 내용을 들었었고, 독립이 되는 날, ‘동아’를 다시 할 수 있다는 희망과 신념을 간직하게 되었다. 기다리던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1945년 8월 15일 전날인 14일 밤 자정이 좀 지나서 매일신보 편집국 한 모퉁이에서 전화로서 조심스럽게 그것도 암호 형식으로 고하 선생께 15일 정오에 있을 일본 항복 발표를 전해 드리고, 신문사를 뛰쳐나와 흥분된 채 이 한밤을 새웠다. 얼마 후, 우리 몇 사람들은 동아일보 사옥에 모여, 동아일보 복간 준비에 착수하였다.



  2. 정광현, ‘신문기자가 겪은 8.15’, 신문기자가 엮은 해방 10년사, 희망사, 1956년


     매일신보 기자로 시청 출입을 했는데요. 지금 생각하면 창피할 지경이지만 우리는 포츠담 선언내용을 사실 몰랐습니다. 그 때 동맹통신에서도 짐작하고 경성일보까지 들렸지만 매일신보에는 숨겼거든요. 두말할 것 없이 경성일보에서도 저희끼리만 사발통문으로 통하고 우리에게는 절대 비밀에 붙여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놈들 태도가 이상하단 말예요. 저희끼리만 수군수군하고 우리를 겁내는 기색이 있거든요. 난 또 직업적 의식에서 그러나보다 하고만  있잖았겠습니까.


     그리고 그 이튿날 유인(裕仁)의 항복방송을 들었는데 그 후부터 우리는 뉴스의 중심근원을 잃었기 때문에 아다시피 최후까지 그 같은 신문을 낸 겁니다.



     그러고 나서 그 이튿날 사에 가 보니까 학생들이 배치되어 있고 거리가 떠들썩해지며 또 휘문학교서 여운형 씨 강연이 시작되더군요.


     아까 이야기 계속이지만 15일 정오부터 뉴스원을 잃었기 때문에 신문을 발간할래야 무얼 알 수 있어야지요. 그래서 주낙찬 군과 나 몇몇이서 기사를 모으러 나섰잖습니까. 그저 아무데나 여기저기 뛰어다녔지요. 그러는 동안에 한국인사들이 이제부터 나섰단 말을 얻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나오며 누가 중심인지 알 수 있어야지. 무턱대고 YMCA에 가서 물어본즉 거기서도 캄캄하단 말이오. 송진우 씨 댁에 가 보라기에 전화로 물었더니 없고 여운형 씨 댁에 갔더니 안재홍 씨 댁에 가 보라더군요. 그래 안씨를 만나보고 대충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건준에 접수위원이 조직되어서 양재하 김광수 이런 이들이 왔었지. 그때 제호는 해방일보라 고쳐서 냈지요. 그래서 우리들도 참말 생전 처음으로 민족적 기쁨과 정열을 가지고 해방일보를 발간하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경무국의 명령이라 해 가지고 신문을 나가지 못하게 하네. 신문사를 군대로 포위하고 해방일보를 못나가게 한단 말이야. 그래서 해방일보를 몇 번 발간하다가 할 수 없이 중지하고 말았습니다.


  3. 인촌 김성수 전, 인촌기념회,1976년

    그렇게 해서 인촌은 연천에 내려갔고, 거기서 해방을 맞은 것이다.…참으로 기다리고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때로는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아 절망을 가누지 못했고 온다해도 생전에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탄식하던 조국해방의 날이 현실로 온 것이다. 그의 나이 55세였다. 22세에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잃고, 25세에 중앙학교를 인수한 이래 반생을 구국사업으로 일관한 인촌이었다. 누구보다도 감개가 깊었으나 이런 때에도 그는 서두르는 일이 없었다. 부인이 빨리 서울에 올라가야하지 않겠느냐고 해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서울에는 고하와 여러 동지들이 있으니 모든 일은 알아서 잘 처리할 것이요. 서두를 것은 없소.”

    그리고 앞으로의 처신을 이렇게 말하였다.

    “정치는 고하와 동지들에게 맡기고 나는 학교를 하겠으니 당신도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런가하면 이렇게도 말했다.

    “학교도 이제는 학자에게 맡기고 나는 박물관장이나 돼서 나라의 보물을 지키는 일을 하면 꼭 좋겠소.”

    그가 연천을 떠나 서울에 올라온 것은 17일 밤이었다.



  4. 호일엽, ‘해방일의 희비극’, 신문기자수첩, 모던출판사,1948년


     청진(함북)이 불바다로 화하고 소군이 상륙하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내가 나남역을 떠나 서울행 열차를 마지막 타던 날이 바로 해방전야인 1945년 8월 14일 밤이었다. 함포사격 소리를 들으며 덜컥거리는 기차(화물차)에 몸을 실어 한밤을 새워가며 이튿날(15일) 정오직전에 성진에 도착하였다. 내가 기차의 정차시간을 이용하여 역전으로 나가서 어떤 일인식당엘 들어갔을 때 그곳에 모여 앉은 일인들 수명이 마침 ‘라디오’를 듣고 있다가 돌연 소리를 지르는 사람 또는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저이끼리 눈과 눈을 마주 바라보며 한숨을 쉬는 등 도저히 알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래서 나는 하도 궁금하여 그 집 주인을 불러 점심을 주문하고 ‘라디오’ 방송내용을 물어보았더니 그는 눈치만 슬슬 볼뿐 아무 대답이 없었다.

     오찬을 급히 마치고 밖으로 나와서 보니 길거리에 조선사람들이 5,6명 서서 이야기를 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그 방송은 일본천황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한다는 비참한 국민에 주는 최후의 소리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에 벌써 한사람의 일인경찰관이 나타나서 “무엇을 길거리에서 떠들고 있느냐 빨리 헤어져라”하고 흥분된 어조로 고함을 친다. 그때 나의 심경은 지금에 잘 기억하기 어려우나 “하하 저놈들이 벌서 감정이 솟아 발악을 하려하는군”하고 생각하며 열차시간에 맞추어 바로 역으로 달음질쳤다.

     기차가 떠나기 약 10분전-내가 타고 있는 차량에는 하물(荷物)이 만재한 가운데 일본군인 두 사람과 평복한 일인 세 사람, 그리고 조선사람 둘 나였다. 그래서 나는 일본항복의 방송 건을 우리 일행 조선사람들한테 이야기(조선말로) 하는 것을 옆에서 듣고 있던 평복한 일인(모 소학교 교장)이 바짝 나의 앞으로 다가앉으며 주고받고 하는 중에 또 한 옆에 있던 일인병정(오장)이 귀를 기울이고 듣다가 단 바람에 뛰어 내려가고 말았다. “이상하다”하고 속으로 생각만하고 우리끼리 떠들고 있기 수분이 못되어서 돌연 나의 앞에 6,7명의 병장이 나타나서 “지금 일본이 항복하였다는 방송을 들은 자가 누구냐?”하고 물어 그것이 나인 줄을 알자 나를 끌어내리어가지고 그 열차 제일 앞에 달린 차량으로 데리고 갔었다.

     거기에는 부산으로 간다는 이동 일본군인부대가 가뜩 타고 있었는데 부대장인 듯한 젊은 대위가 나를 앞에 불러놓고 총검으로 위협하여 다짜고짜로 욕설 투로 취조를 시작하였다.

    “이놈아! 그런 허황한 방송을 듣고 지금이 어느 때라고 함부로 발설이냐 너는 나의 이 총 끝에 죽을 각오를 하고 바른대로만 말하여라”하며 당장에 총으로 쏘아 죽일듯한 무서운 형용을 보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실대로 이야기했더니

    “그런 허깨비소리 말아라. 일본이 항복을 하다니 하늘이 웃을 일이 아니냐”하며 손바닥으로 나의 바른 뺨을 후려갈긴다. 그쯤 뺨맞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흥분에 미친 그들이니 나를 죽인들 그 당시에야 누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을 테니 나는 모든 것을 각오하고 죽이면 죽여라하고 정신이 혼동되어 기다리고 잇을 뿐이었다. 그때 그는 나에게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기에 신문기자라고 하였더니 “조선인 기자놈들은 전쟁을 방해하는 악질분자들이다”라고 소리를 치고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그리하여 약 10분이 되자 그 대위가 다시 돌아와 그때는 조금 전보다 다른 태도를 보이며 혼자말로 중얼거리다가 다시 나를 보고 “너 같은 반전분자는 당장에 총살이라도 할 것이나 신문기자라하니 특별히 용서하고 이 사실을 조선군사령부에 즉시 보고하여 너를 적당히 처벌케 할 터이니 이 열차에서 내려서 다른 열차로 귀경하라”라고 일장유세를 하고 나의 주소 성명 연령 직업 등을 적은 후 나를 돌려보냈다.

     꼭 죽는 줄만 알았던 내 몸이 다시 살아나온 그 순간의 심경은 지금 어떻다고 말할 수 없으나 그들이 오랫동안 갖은 발악과 무기의 세력으로 우리 조선을 속국으로 집어넣으려고 애쓰던 40년 공부가 일조에 허물어지는 서글픈 그들의 심정이라 그러한 끔찍스러운 정보를 발설한 나를 그대로 돌려보낼 리가 없을 줄로만 안 내가 다시 그 무서운 곳을 빠져나온 뒤의 ‘재생의 감(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오후 1시 20분 성진역을 떠나는 화물열차를 역장에게 사정사정해서 타고 함흥을 도착하니 거개는 벌써 해방의 기분이 넘쳐흐르고 태극 깃발이 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거리마다 무장한 일군과 일인경관이 그대로 남아 사나운 사자와도 같이 행인의 거동을 유심히 바라보며 자기들의 신변의 위험을 극도로 경계하고 또한 골목골목에서는 조선사람과 일인이 충돌되어 유혈의 극을 연출하는 등-어디서인지 ‘대한독립만세’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아아 감격이랄까…환희랄까…흥분이랄까…3천만 겨레가 함께 부르짖은 민족해방의 규성(叫聲)!! 내 어찌 이날의 순간을 잊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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