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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1 : 해방의 기쁨

Posted by 신이 On 4월 - 13 - 2012

 

“밤 10시경부터 그 더운 때 덧문까지 닫고 두터운 이불을 덮어쓰고 땀을 흘려가면서 이불속에서 라디오를 들었다. 트는 순간에 무엇이 들렸든가? 그 순간의 충격과 감격은 실로 형용할 수가 없었다.『일본의 항복신청』과 그에 대한 연합국 측의 구체적 대답이 명쾌한 일본말로 방송이 된다. 정정당당한 미 국무성의 정식발표였다. 나는 그만 울었다. 소리까지 내어서 죽도록 가슴이 터질 듯한 감격을 느꼈다.” (설의식,1946년 9월 6일자 동아일보)

 해방은 한반도에 일대 사건이었다. 일장기말소사건의 여파로 동아일보를 떠났던 설의식 전 편집국장은 1945년 8월 10일 밤 단파수신기로 방송을 들었다. 이때는 단파방송이 ‘천황제 유지를 조건으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는 일본 측의 전문을 되풀이하고 있을 때였다.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지고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해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사회운동가 함석헌 옹은 “이 해방은 우리가 자고 있을 때에 도둑같이 왔다” (뜻으로 본 한국 역사, 한길사, 2009년)고 했지만 1 2 3 일부 지식인들이 해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설의식 이전에도 단파수신기로 국제정세를 수신한 사람들 4이 있었다.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홍익범 5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홍익범은 1940년 8월 동아일보 폐간 뒤에도 국제정세와 전황(戰況)에 대한 정보를 지도층 인사들 6에게 들려주었다. 홍익범은 이인 허헌 김병로 7가 주도한 ‘형사공동연구회’에서 조병옥 8송진우 윤보선 안재홍 박찬희 등을 자주 만났다.

“종전부터『요시찰인』으로 법정에서 변호조차 못하게 된 허수아비『변호사』로서 나는 이미 십년이나 창동에서 살고 있었고 고 고하 송진우씨 외 몇 사람들의 비밀 연락에 의하여『단파』『라디오』를 통한 미국의 정보는 매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패망이 날로 가까워 온다는 것은 의심치 않고 있었다.” (김병로,1954년 8월 12일자 동아일보)

 이승만 박사가 ‘미국의 소리(VOA)’에 실어 보내는 국제정세와 중국 충칭(重慶) 임시정부 단파방송이 전하는 독립운동 소식은 이렇게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1942년 말부터 ‘유언비어 유포’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어 닥쳤고 방송인 150명, 일반인까지 합치면 300명이 소위 ‘단파방송 사건’으로 수난을 당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45년 8월 15일 일왕이 라디오를 통해 항복을 발표하자 시민들이 서울 도심으로 나와 환호하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전 총독부가 고하 송진우와 몽양 여운형 중 누구에게 먼저 치안협조를 요청했는가하는 부분은 한때 논란이 됐다. 9 10 11

 그러나 총독부가 송진우에게 먼저 협조요청을 하고 송진우가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치안유지권이 여운형에게 넘어갔다는 것이 정설이다. 여운형은 일제의 무조건 항복과 함께 총독부가 치안을 부탁하자, 이를 받아들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결성하고 행정치안을 장악했다.

 설의식은 단파방송을 들은 다음날인 11일 상황을 회상하면서 “송진우 선생이 먼저 총독부의 교섭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12

“전화도 함부로 걸기가 어렵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그래서 일본항복에 관한 전기(前記) 내용전부를 얇은 종이에 깨알같이 써서, 콩알(대두)만큼 만든 뒤에 송삼(松蔘)을 따고 그 속에 넣어 감쪽같이 만들었다. 이 송삼 한 개와 금삼 (錦蔘) 4,5개를 합쳐서 일봉을 만들었다. 그리고 원동 고하선생 댁으로 전화를 걸었다. 선생이 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다짜고짜로『병환이 어떠하십니까? 출입 못하시겠지요? 절대안정을 하셔야 한답니다. 면회 같은 것도 일체로 피하십시오. 좋은 방문(方文)을 얻었는데 인삼이 들기에 삼까지 보내겠습니다. 금삼보다 송삼을 먼저 쓰십시오. 달리 부탁할 말도 있으니 누구든지 댁에 있는 사람을 곧 보내십시오.』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리하야 보낸 사람이 김우성 군이었다.『매우 중대한 일이니 안방에서 선생께 꼭 면전하라』고 두 번 세 번 부탁하였다.

 하회가 궁금하여 8시경에 전화를 걸었더니『좋은 방문을 얻어서 고맙다는 것, 지금 생전(生田,경기도지사)이가 만나자고해서 곧 다녀오겠다는 것, 나(고하)도 접객을 피하고 안정을 할 터이나 소오(설의식)도 건강에 절대로 주의하라는 것』이 몇가지 간단한 말로 이심전심하였을 뿐이었다.『생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는 곧 원등(遠藤) 정무총감의 뜻이라고 생각하였다. 시국에 대한 수습책을 상의하자는 것임은 틀림없다고 생각하였다. 그 하회가 또 궁금하였다. 11시반경에 송 선생으로부터 전화가 있었다.『지금 집에 왔다는 것, 출입 안하고 정양하겠다는 것, 절대로 자중하자는 것』뿐이었다. 『자중하자』는데 중점을 두시고 두 번이나 되풀이하셨다.” (1946년 9월 10일자 동아일보)

 그즈음 송진우와 관련한 김준연 전 동아일보 주필의 회상. 13 14 15

“전곡농장에 1937년에 갔지요. 45년 해방돼서 서울 왔어요. 45년 8월 13일 저녁 송진우 씨 댁에서 송씨를 만났어요. 원동이라고, 창덕궁경찰서 북쪽으로 뚫린 원동골목에서 살았어요. 전곡에서 8월 9일 오후 5시 뉴스를 틀어보니 소련군이 소만국경 넘어 왔다고 해요. 우리는 생각하기를 자칫하면 외국유학생까지 다 잡아 죽인다고 했지요. 리스트도 다 만들어놓았다고. 그래서 언제든지 도망갈 생각을 했지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일본서는 소련에 선전포고 안하고 있었지요. 나는 큰일났다 싶어 5분도 못돼 수건만 가방에 넣고 나섰지요. 10일에 서상국 씨 집에서 자고 13일 저녁에는 송진우 씨 댁에 갔었어요. 송 선생은 총독부 관리를 4번이나 만났다고 해요. 생전(生田) 경기도지사도 만나고.” (1965년 8월 13일 동아방송 ‘정계야화’에서)

 8월 13일경 송진우의 집을 방문했다는 전 동아일보 기자 이상돈의 회고.

작별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고하(송진우)가 별당 돌층계까지 내려오면서 “이군, 무슨 소식 못들었나? 이런 때일수록 말조심하고 경거해서는 안돼! 며칠 후에 다시  한번 찾아와. 15일 오후에 만나!”라고 말하며 나의 손을 힘주어 잡는 것이었다. (신동아 1977년 8월호 122쪽) 

 

송진우 16는 총독부의 치안요청을 거절할 때부터 여운형과 생각이 달랐다. 송진우는 총독부로부터 어떠한 권한도 이양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또 총독부가 연합군에 정권을 인도하기 전까지는 독립정권이 허용되지 않을 것이니 일제가 완전히 물러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를 추대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에 따라 송진우는 9월 7일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삼아 국내외 인사들로 거족적 민주세력을 결집하자는 취지 아래 ‘국민대회준비회’를 만들었다. 9월 16일에는 송진우를 수석총무로 하는 한국민주당이 창당됐다. 동아일보 사옥(현 광화문 일민미술관)은 국민대회준비회 사무실에 이어 한국민주당의 당사로 사용됐다.

 

Notes:

  1. 곽상훈, 1954년 8월 11일자 동아일보
     
     ‘『이번엔 죽는구나』, 마지막 철창행이 해방의 아침’
    삼일운동을 계기로 소위 요시찰인(要視察人)이란 날인이 찍힌 나의 주변에는 지긋지긋이 끈기 있는 왜경의 그림자가 떠날 줄을 몰랐다. 바루 일본 광도(廣島)에 원자탄 세례가 있던 전날 밤 반갑지 않은 손님에 끌려서 부득 동래경찰서 유치장 한구석에 몸을 옮겼으니 그것이 구십여 회에 궁한 마지막인 나의 철창행이였고 일제가 피로서 그의 단말을 장식코져 한국내 요인 학살계획 제일호『멤버』에 뽑혀 이미 단두대(斷頭台)가 마련된 신의주(新義州)행의 서곡이기도 하였던 것이다.『이번엔 죽는구나』하는 예감이 번개같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나 감방에는 무기미한 침묵이 흐를 뿐 좀채로 호출심문을 할 기색이 보이지 않아 그럴수록 나의 예감은 굳어만 갔다. 수감된 지 일주일만인 팔월십사일. 근거 없는 대화가 동료들 입술에서 흘러나왔다.『내일십오일에는 중대 방송이 있고 일본이 곧 항복하리라는』그러는 가운데 감방에도 팔·일오의 아침은 밝았다. 전날 들은 말을 확인코져 지나가는 한인 감수를 불렀을 때 그는『쉬』하는 한마디를 남기고 달아나 버렸다. 고개를 숙일대로 숙인 왜경들의 모습이 김빠진『맥주』인양 힘없이 내 앞을 지나갔다.『참말 일본이 망했나보다』일루의 의아심을 품은 채 죽엄의 꿈은 씻은 듯 사라지고『생』에 대한 벅찬 기쁨과 희망이 솟아올랐다. 이렇듯 감방에서 맞은 팔·일오는 또다시 감방에서 저물고 이틀 후에 비로소 동래경찰서 철문을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민족의 소생의 날 팔·일오가 그 아홉 뻔 째 돐을 마지하는 오늘 당시 천지를 뒤흔들던 희망의 외침은 어디로 가고 저조된 실망만이 서글푸게만 하고 있다. 이것이 얄구진 이 민족의 운명일진대 그 누구를 탓하랴마는 팔· 일오를 상기하고 통일을 위해서 힘껏 싸울 수 밖에 없는 것이 나나 이 민족이 걸머진 천부(天賦)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 김선기, 1954년 8월 15일자 동아일보

    ‘나의『귀』를 의심, 이북 모 광산에서의 그날’
    『일본』이 패망하였다. 이 순간 나는 그만 의식을 잃고 땅에 쓰러졌다. 내가 팔·일오를 맞은 것은 삼팔 이북 북청(北靑) 어느 산속 광산(鑛山)에서였다. 이곳에서 징용의 고역을 하고 있었으므로 해방소식을 듣고 처음 나는 나의『귀』를 몇번이나 의심했는지 모른다. 그러나『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확실히 낯익은『안재홍』씨의 목소리임에 틀림 없었다. 분명히 해방이 온것이었다. 광산에서는 사상범이라하여 나를 애국자 대접으로 그곳 노동조합장 노릇을 떠맡기는등 기가 막히는 일이 연출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는 9월에 들어서 홍원 함흥을 거쳐 3.8 선을 넘고 서울에 돌아오고 말았다. 홍원 함흥은『조선어학회』사건으로 나 자신 신세진 곳이다. 교직(延專)을 박탈당하고『요감시인』몸이 되니 내 집에『초상』이 났어도 어느 누구 하나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더니 해방된 후로는 어떻게 애국자가 많던지 내 문전에도 찾아주는사람이 많았다.
    지금 팔·일오 돐맞이를 하게된지 9년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슬프기만하다. 그러나 일년에 한번씩 던져주는 팔·일오 감격의 순간 나는 이 순간을 가슴에 간직하고 슬픈 현실을 극복하는 영양소로써 올해만은 헛되지 않은 생활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있다.

  3. 신익희, 1954년 8월 18일자 동아일보

    ‘『팔·일오』가 아니고『팔·구』감격에 찬 중경(重慶) 시가’
     해방 당시 조국에 있지 않고 자유중국 중경(重慶)에 있었던 나에게는『팔·일오』라는 석자에 아무런 흥미도 감격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내가 맞이한 『해방의 날』은 사실상『팔·일오』가 아니고『팔·구』이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9일 하오 7시! 요란스러운 종소리와 함께 중경시가에는 각 신문사의『호외』가 살포되었다.『일본은 드디어 연합국에 항복할 의사를 표명』했다는 것이었다. 그때의 감격은 말할 것도 없고 순식간에 중경시가는 물 끓듯 끓어올랐다. 중국인들은 손에 손에『딱총』을 들고 콩볶듯이 시가를 소연케하였던 것이다. 나는 벅찬 기쁨을 움켜쥐고 곧 당시 임정(臨政)요인들과 회의를 열었는데 그때 위선문제가 된 것은『귀국문제』였다. 그날 회의석상에는 좀더 형세를 보아 입국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나는 밤을 새우면서 강경히 이를 반대하고 즉시 입국을 고집하였던 것이다. 그리운 조국산천이 빤히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고 동포들의 모습이 나의 감정을 초급히 흔들었기 때문에.
    『가자 조국으로¡』『삼천만이 손을 잡고 일할 때는 왔다!』이것이 해방을 맞는 날의 결심이기도 하였다. 팔·일오에는 중앙통신(中央通信)을 보고 여운형 일파가 임정을 반대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가 미친 놈인줄 알았으며 오、륙백명의 국민대표명단을 일일이 체크하면서 국내정객들의 편모를 검토하고 그들과 만날 날만 고대했던 것이다. 그 해 12월 9일 귀국한 후 오늘까지 만사에 여의치 않아 무엇 하나 한 것 없이 8·15를 또다시 맞이하였으니 나 자신 국민 앞에 미안하고 부끄러운 심정을 금할 수가 없다.

  4. 정진석, 한국언론사, 나남신서, 1990년

    ‘단파방송사건’
     일제는 방송을 철저히 통제했을 뿐 아니라 방송을 한반도 식민지화를 위한 도구와 전쟁수행의 무기로 활용하고 있었지만, 한국인 직원들 가운데는 중국과 미국의 단파방송을 비밀리에 청취하여 중경의 임시정부와 미국의 구미의원부의 활동상황을 전파하였다. 이를 알게 된 일본 수사당국이 많은 한국인 방송관계자들을 체포하여 처벌한 것이 ‘단파방송 도청사건’이었다.
     단파방송의 도청은 경성방송국에 근무하던 성기석 이이석 등이 1940년 무렵부터 시작하였다는데, 그들은 개성방송소로 전근한 뒤로도 이를 도청하던 중에 1942년 말부터 일제 고등경찰이 대대적인 검거를 시작하였다.
     먼저 개성방송소에 근무하던 이이석 성기석 김동하 홍익범 등이 1942년 12월 말에서 이듬해 초에 걸쳐 검거되었다. 이어 경성방송국에도 검거선풍이 불었는데 이 사건으로 경성방송국 안에서만 아나운서 편성원 기술계직원 등 약 40명이 체포되었고, 각 지방방송국까지 합치면 150명 가까운 한국인 방송인들이 검거되었다. 그리고 정객과 민간인으로 끌려간 150여명을 합치면 300여명이 이 사건에 관련되어 수난을 당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 사건으로 2년 징역형을 치른 사람이 5명, 1년 징역형이 17명이며, 8개월, 6개월 징역형과 벌금형을 받은 사람까지 합치면 46명이 유죄판결을 선고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사건에는 이미 폐간된 동아일보 관계자들이 여러명 연루되었다. 함상훈(동아일보 조선일보 편집국장 역임) 국태일(동아일보 영업국장) 백관수(동아일보 사장) 등이 증인신문을 받았으며 허헌도 2년 옥고를 치렀다.
     아나운서 중에는 송진근 이계원 손정봉 서순원 이현 박용신 그리고 서정만이 구속되었다가 송 손 박 세 아나운서가 실형을 선고받았다. 편성계통에서는 이서구 모윤숙 김동익 이정관 및 양제현이 체포되어 양제현만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기술계에서도 많은 직원들이 체포되어 이중 이이석 성기석 김동하 염준모 등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방송국 직원 가운데 붙잡혀간 사람이 가장 많은 부서는 사업부였다. 사업부는 라디오 수신기의 성능검사로부터 설치공사와 라디오 수신기의 고장수리까지 맡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직원이 한국인들이었다.
    이 중 홍근호 송용운 조현국 이창근 홍진석 노현중 이창득 김필국 조국환 등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은 조선방송협회의 경성중앙방송국을 비롯한 지방방송국에 근무하던 한국인들이 비록 그 조직체제상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선전하고 침략전쟁의 도구였던 방송에서 근무하였지만 국외의 독립운동 소식에 목말라하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비밀리에 이를 전파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5. ‘홍익범 및 단파방송사건’, 독립유공자 공훈록 제9권, 국가보훈처, 1991년

     1897년 출생한 함남 정평(定平) 사람이다.
     1924년 미국에서 이승만(李承晩)과 제휴하면서 시카고동지회(同志會) 회장으로 애국운동을 하였고 1933년 10월 동아일보(東亞日報) 정치부 기자로 1940년 8월 10일까지 재직하였다.
    1938년 3월경부터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까지 서울 경신학교(儆信學校) 교장인 미국인 쿤스선교사가 단파수신기로 청취한 중경(重慶)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와 미국에서 이승만(李承晩)이 국내에 보내는 미국의 소리(V.O.A) 방송내용을 입수하여 민족지도자인 송진우(宋鎭禹)·김병로(金炳魯)·이인(李仁)·허헌(許憲) 등에게 전달하는 일을 하였고 쿤스선교사가 미국으로 추방된 뒤에는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 편성과 양제현(楊濟賢)을 통하여 해외방송을 입수 전달하여 조국광복에 대비케하는 활동을 하다가 1943년 봄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1943년 11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육해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6.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년

     그런데 단파방송사건에서 홍익범이 백관수 국태일 함상훈 등 동아일보-보성전문 그룹의 핵심인사들과도 관련을 맺고 있음이 밝혀졌다. 즉 이승만의 동정과 활동상황은 흥업구락부사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국내 우익인사들에게 전면적으로 유통되었던 것이다.…홍익범이 단파방송과 관련을 맺게 되는 경로는 그가 졸업한 경신학교(1916년 졸업)에서 비롯되었다. 여러 증언에 따르면 홍익범은 경신학교 시절 쿤스 선교사 밑에서 교육을 받았고, 미국 유학을 통해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을 갖추었으며 동아일보 활동으로 현실적인 감각을 익혔다. 동아일보 폐간 이후로 홍익범은 쿤스 등 선교사들과 교류하면서 선교사들이 소유하고 있던 단파수신기를 통해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 이를 송진우 윤보선 등에게 전달하는 일을 담당했다.
     쿤스가 1942년 5월말 강제추방되고 같은 시점인 4월27일부터 단파수신기가 압수됨에 따라 홍익범은 각종 정보를 수집할 길이 막혔다. 이에따라 홍익범은 아동문학가로 경성방송국에서 방송원고를 쓴 적이 있던 송남헌과 접촉했고 그를 통해 경성방송국에서 어린이 방송과 강연을 담당하는 편성원이었던 양제현과 연결되었다. 양제현은 일본 와세다대학 출신으로 홍익범의 대학 후배이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양제현은 청취한 해외 단파방송 내용을 송남헌에게 건넸고, 송남헌은 이를 다시 홍익범에게 건네줌으로써 정보유통의 연계고리가 형성되었다. 이들이 청취한 단파방송은 중국 중경방송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미국의 소리’ 방송이 보내는 한국어방송이 중심이었다.
     홍익범은 동아일보 폐간 이후 해외정보 수집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가 입수한 이승만 중심의 정보는 국내 민족주의자들에게 과장된 형태로 전달되었고, 증폭되어 유포되었다. 그런데 홍익범이 단파방송 수신 내용을 전달한 주요대상이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진영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송남헌은 홍익범이 송진우 김병로 이인 허헌 4자 회합에 정보를 제공했으며 이들은 전세의 추이를 검토하고 해외에서의 구국전선의 정보를 교환하는 한편, 국내에서 장차 있을 투쟁방안을 모색했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홍익범 신문조서에는 허헌 외에 송진후 김병로 이인 등 민족주의자들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으며 이들이 증인으로도 출두하지 않았으므로 정확한 사실을 판결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홍익범이 직접적으로 이들과 연관을 맺지 않았다 하더라도 백관수 함상훈 국태일을 통해 간접적인 연계를 맺었다는 사실이다. 어떠한 경우든지 홍익범의 단파방송 청취정보는 동아일보-보성전문 그룹에게 영향을 끼쳤음이 분명하다.
     송진우는 1944년 독립운동을 권유하는 안재홍에게 중경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정식 승인을 얻고 독립군 10만을 보유하고 있으며 미국차관 10억달러 중 1억 달러를 이미 확보했으니 일본의 패전만을 기다리자고 했다. 이러한 태도는 홍익범을 통해 전해들은 중경 단파방송의 정보를 과대평가한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7. 김병로, 1954년 8월 12일자 동아일보

    ‘밖에도 못나가고, 손자들 시켜『라디오』듣던 감격’
    민족전체가 벅찬 흥분에 사로잡혔던 팔·일오 해방도 어언십년이 닥아오고보니 밖에도 못나간채 손자를 시켜 그 일본항복의『라디오』보도를 전해들을 때의 감격의 기억은 다시금 새롭다
    종전부터『요시찰인』으로 법정에서 변호조차 못하게된 허수아비『변호사』로서 나는 이미 십년이나 창동에서 살고 있었고 고 고하 송진우씨 외 몇사람들의 비밀 연락에 의하여『단파』『라디오』를 통한 미국의 정보는 매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패망이 날로 가까워온다는 것은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일구사오년 삼월경 일정의 경무당국의『요시찰인』으로 지목되어온 칠십여명을 학살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자 피난처 창동도 위험하게 되여 다시 가족도 모르게 가평군『조종안』이라는 촌락에 피신하고 서울과 연락만을 취하고 있었다.
    팔월 달 칠 팔일경에 일본의 항복문제가 그들의 소위『덕전회의』(德前會議)에서 논의가 되었다는 정보를 들었다.
    이어 십일일에는 일본이 항복하기로 결정하였다는 정보를 들었다.
    즉시 가평을 떠나 어둠을 틈타서 창동집에 돌아와 꼭 방안에만 숨어있기를 나흘 그 나흘은 그대로 사년이나 되는 것 같기도 하였다.
    십오일 중대방송이 있다기에『드디어 해방은 왔구나』하고 짐작은 하였으나 역시 밖에는 못나가고 손자를 시켜 동내 방직공장의『라디오』를 듣고 오라고 하였다. 과연 그것은 해방의 기쁜 소식이었다. 예기하였던사실이면서도 벅찬 흥분은 좀체로 가라앉을 줄을 몰랐고 즉시 같은 동내에 피신생활을 하고있던 정인선(鄭寅善)씨 등 한집에 모여 밤을 새워가며 장래를 의논했다 십륙일에는 첫차로 서울에 들어와 우선 고하선생을 찾아보았다. 낮모를 청년들이 손을 붓잡고는 반갑게 인사를 한다. 알고보면 오랜 과거에 법정에서 변호해준 독립운동청년들이다. 전날밤(십오일)형무소에서 석방된 청년들이다. 그 후에 있은 일- 그것은 하나의새로운 역사이기도하고 팔·일오 해방은 그대로 나에게 있어서는 이 사회의 첫탄생이기도 하였다.

  8.  

    조병옥, 1954년 8월 14일자 동아일보

    ‘방랑생활 종막, 동지 규합에 골몰 턴 14일 밤’
    『팔·일오』라는 석자는 암흑에서 이민족을 구해냈고 특히 나에게는 차디찬 감옥과 외로운 산촌(山村)으로! 심지어『우마차조합』서기자리에 매달리면서까지 호구지책과 변신책을 강구한다는。 기막힌 방랑생활의 종막의 표지이기도 하였다. 1945년 6월 기아상태에 빠진 가족을 거느리고 충남 천안 선조묘막에다 마지막 피신처를 구했는데 그 간의 지나친 피로에 기인함인지 돌연『급성안질』에 걸려 그해 8월 8일 부득이 서울명의(名醫)를 찾아 묘막을 떠나게 되었다.
    상경하는 차중에서 당시『매일신문』을 보고 쏘련의 대일선전포고를 알았는데 그 순간부터 일본의 운명은 빤히 내다볼 수 있었으며 서울에 와서는 미행하는 왜경을 꺼릴 것도 없이 뻐젓히 대로를 활보했던 것이다. 15일에 중대방송이 있다는 말을 듣고 한국의 독립을 확신하게되고 14일 밤을 하야케 새우면서 동지규합과 정당조직에 골몰했던 것이다.
    15일 일제의 항복방송을 듣고 나서는 종일토록 숨어있는 동지를 찾기에 분주했다. 그때는 벌써 왜경의 총검이 어색하게 느껴졌고 힘없이 걸어가는 왜놈들『게다』소리가 유난히 시끄러워졌다 그날 천안에서는 내가8·15 를 감지하고 미리 상경했다는 소문이 퍼져 어렷을 때 서당(書堂)에서 얻은 재동(才童)이라는 별명은 일약 귀동(鬼童)이란 선각자적인 호칭으로 변했음을 나종에 들었으니『급성안질』이 귀동 팔·일오가 빚어낸 웃지못할 넌센쓰로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남북통일이 공중에 매달린 오늘 신의 섭리로 얻은 팔·일오가 또다시 찾아오고 있다. 우리는 이 기회에 우선 내정을 혁신하고 집단안전의 테두리안에서 통일을 위한준비를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9. 김준연, ‘해방과 정치운동의 출발’, 1946년 8월 15일자 동아일보

    “공산혁명으로 일로매진하겠소!” 이것이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여운형씨가 작년 8월 15일 오전 10시경 창덕궁경찰서 앞에서 내게 선언한 말이었다.
    “소련군이 곧 경성에 들어오고 우리가 곧 내각을 조직할 터인데 당신이 후회하지 않겠소?” 이것이 건국준비위원회 조직부장 정백 군이 역시 작년 8월 15일 오후 3시경에 내게 전화로 한 말이었다. 정계 일년을 회고하는데 있어서 이 여(呂) 정(鄭) 양씨가 내게 한 말은 참으로 우리가 기억할 가치가 있는 말이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직접 들은 말은 아니지마는, 세상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또 한사람의 다음말도 기억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작년 9월 8일 계동서 개최되었던 공산당 열성자대회 석상에서 책임비서 박헌영 군은『조선인민공화국 만드느라고 동무들 대하기가 늦어졌소.』하고 말하였었다.
    건국준비위원회 인민공화국 인민당 공산당 민주주의민족전선 이것이 좌익진영의 주요형태이고 거기서 중요한 활동을 한 것이 여운형, 박헌영 양씨이다. 이 두 사람의 자취를 살펴보면좌익계열의 활동을 알 수 있는 것이다.
     8월 6일에 광도시(廣島市)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9일 미명에 소련군이 조선 만주로 쳐들어오게 되니 일본은 손을 들고 만 것이다. 9일에 소련 측은 정정당당하게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행하고 전투를 개시하였으나 일본서는 그에 대해서 적대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회의만 거듭하고 있었다. 벌써 무조건 항복은 기정사실이었고 다만 그 절차에 관한 것이 논의되고 있었던 것이다. 중앙정부와의 연락으로 인하여 이 형세를 숙찰(熟察)한 조선총독부 당국은 창황(蒼皇, 어찌할 겨를이 없이 매우 급함) 실색하여 어찌할 줄 모르고 고(故) 송진우 씨에게 향하여 시국담당을 요청하게 되었었다. 총독부 보안과장 기기(磯崎)와 차석 사무관 원전(原田)과 조선군 참모 신기(神崎)외 또 한 참모의 박 모와 송씨의 5인이 본정(本町) 모(某) 일인의 사택에서 회합하게 되었었다. 그때에 그들은 물론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다는 말까지는 내지 못하였고 다만 형세가 급박중대하다는 것을 말하고 행정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라고 권하고, 독립준비까지를 하여도 좋다고 하였었다. 그러나 송씨는 응종(應從)하지 않고 양취(佯醉)하여 일본의 필승을 말하고 그 자리를 파하여 버렸었다. 그 익조에 원전(原田)사무관이 또 와서 권유하고 경기도보안과장 전중봉덕(田中鳳德)이 또 와서 권하고 최종에는 경기도지사 생전(生田)이가 경찰부장 강(岡)과함께 적극적으로 권하였었으나 송씨는 여전히 거절하고 응치 아니하였었으니 그것이 8월 13일의 일이었었다. 그때에 강(岡)경찰부장은 앉았다섰다 왔다갔다하면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형세가 절박하니 송씨가 담당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겠다는 것을 협박적으로 말하였었다. 총독부가 가진 권력의 사분지삼을 줄 터이니 맡아달라고 하였었다. 신문 라디오 교통기관 헌병 경찰 검사국 등을 다 내어주겠다고 하며 일본인의 거류를 인정하며 그 사유재산을 보호하여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며 당신이 응낙하면 지금 당장에 정무총감 원등(遠藤)에게 함께 가서 결정을 짓자고 하였었다. 그러나 송씨는 여전히 거절함으로 강(岡) 경찰부장은『당신이 그와 같이 고사하면 김준연 군으로 하여금 하여보게 하면 어떠합니까?김준연 군을 좀 만나게 하여달라』고 하였었다. 그래서 송진우 씨는『김준연 군도 나와 동일한 의견인줄 안다. 그러나 당신이 만나기를 원하니 연락은 취하겠다』고 대답하고 내에게 그 뜻을 전하였음으로 나도 경기도지사 생전을 만나게 되었다.

     

  10. 김준연, 1946년 8월 16일자 동아일보

     8월 14일 오전 9시경에 나는 경기도지사 생전(生田)을 경기도 지사실에서 만나게 되었었다. 강(岡)경찰부장도 들랑날랑하였었다. 이야기는 오륙시간 계속되게 되었었다. 그날 처음으로 경성에 미국비행기 B29호가 이차 나오게 되어서 나는 그들과 이차나 방공호에 들어가서 피난하고 오반(午飯)까지 같이하고 이야기하였었는데 조선 내에서 폭동이 일어나지 아니할까하고 그 점을 퍽 염려하는 모양으로 더군다나 학생들의 동향에 대하여서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는 모양이었었다. 그들이 무조건 항복에 관한 의사를 표시치 아니한 이상 나는 물론 그 눈치로 보일 수 없는 것이고 그들이 듣기 좋게 안심할 만한 말을 하여 주고 갈리게 되었는데 맨끝에 생전 지사는『당신이 송진우 씨를 만났는가?』하고 묻기에 나는『그러타』고대답한 즉『그러면 당신도 송진우 군과 의견이 동일하냐』고 하기에 나는 또『그러타』고 대답하였었다. 조선총독부의 시국담당에 관한 송진우 씨 측에 대한 교섭은 이와 같이 결말되고 말았는데、15일 조(朝)에 들은즉 여운형 씨가 오전 7시반에 정무총감 원등을 만나러 갔다고 하였다. 물론 송진우 씨 측에 대한 것과 동일한 문제인 줄을 짐작하였었다. 그때, 14일 밤, 라디오방송은 15일 정오에 중대방송이 있으리라는 것을 예고하였었다.
     그런데 나는 정백 군에게서 송진우 씨와 여운형 씨와의 제휴에 관하야 알선하여 달라는 부탁을 받았었다. 정백 군 등의 의견에 의하면 송진우 씨 측과 여운형씨 측이 제휴하면 국내에 있어서는 대항할만한 세력이 없을 터이니、그 뜻을 송진우 씨와 김성수 씨에게 말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였으나、나는 김성수 씨는 십일 오후에 연천 떠나는 길에 잠간 만났을 뿐으로 그 문제에 관하여는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고、송진우 에게는 14일 밤에 그 이야기를 하였더니、거절하고 응치 아니하였었다. 총독부 측으로부터 4차나 교섭을 받았는데 그것을 거절하였은즉 지금 다시 응낙할 수도 없고、연합군이 들어오기 전에 일본사람의 손에서 정권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송진우 씨는 중일전쟁(일지사변)이 일어나고 미일전쟁(대동아전쟁)이 계속하야 일어나서 일본이 혁혁한 승리를 얻어가는 동안에도 일본 필망의 신념을 굳게 가지고 있었다. 나는 송진우 씨에게서 다음과 같은 말은 수백번 들었다.『일본이 망하기는 꼭 망한다. 그런데 그들이 형세가 궁하게 되면 우리 조선사람에게 자치를 준다고 할 것이고 형세가 아주 궁하게 되어서 진퇴유곡의 경우에 이르게 되면 그들은 조선사람에게 독립을 허여한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자치를 준다고 할 때에 나서지 아니할 것은 물론이려니와 독립을 준다고 하는 때에는결코 나서서는 안된다. 그때가 가장 우리에게 위험한 때다. 망해 가는 놈의 손에서 정권을받아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불란서의 페탕 정권을 보라. 중국의 왕조명 정권을 보라. 또비율빈의 라우엘 정권을 보라. 그들이 필경 허수아비 정권밖에 되지 못할 것이고 민족반역자의 이름을 듣게 된다』하였다. 이와 같은 생각으로 총독부의 교섭도 거절하고 여운형 씨의 제의도 거절한 것이었다. 이것은 송진우 씨가 총독부 측 제안을 거절한 이유가 되는 동시에 여운형 씨측 제안을 거절한 이유도 되는 것이지마는 여 씨측 제안을 거절한 것은 또다른 중대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여운형 씨에게는 해외에 있는 재 중경(重慶) 대한임시정부를 위시하야 여러 독립운동 선배들의 존재를 무시하는 경향이 농후하게 있고 또 공산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것이 간취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되어서 최초의 합작시험은 실패에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여운형씨는 15일 오전 7시반에 정무총감 원등을 만나고 와서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가지고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던 것이다.

  11. 김준연, 1946년 8월 20일자 동아일보

     8월 15일 정오에 과연 중대방송이 있었다。그것은 일본 유인천황의 무조건 항복에 관한 것이었다。여운형 씨 등은 바로 활동을 개시하였다。건국준비위원회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16일 오후 2시에는 소련군이 경성으로 들어온다고 하였다。그래서 건국준비위원회 측에서는 위원장 여운형씨를 선두에 세우고 수만군중을 동원하야 경성역으로 나갔었다。그리하였었으나 소련군은 한사람도 오지 아니하였었다。건국준비위원회 사무소가 있는 계동 입구에는 목총 가진 학생군이 서서『조각본부』로 가는 행인을 제지하고 있었다. 여기서『조각본부』를 설명하는 일괄화(一括話)를 소개하겠다. 14일에 연천으로 갔던 김성수 씨는 사태의 급변함을 듣고 17일에 경성으로 돌아왔는데 오후 9시경에 자기 집 있는 계동 입구에 다달으니 목총 든 학생군이 제지함으로 무슨 까닭이냐? 물었더니『조각본부』가 있기 때문에 잡인의 통행을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학생들의 모자를 보니 자기학교 학생들이었다고、그러나 자기가 교장이란 말도 못하고 주저하고 있던 차에 다행히 보전졸업생 조중옥(趙中玉) 군의 알선으로 그곳을 통과하였다고、그런데 조 군은『조각본부』인 건국준비위원회 사무소에서 나오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권력이 있었던 것이라고 하였었다。
     17일 조에 평양서 송진우 씨 댁으로 전화가 왔다. 이것이 남북련□에 관한 중대한 사실이다、그 전화의 내용인즉 이러하다。『지금 조만식 오윤선 김동원 세 사람이 모여서 전화를 한다、그런데 지사로부터 시국담당의 교섭이 있으니、어찌하면 좋을까?』하는 것이었다、그래서 송진우 씨는『치안유지정도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회답하였었다、
     20일경에 김병로、백관수 씨 등이 건국준비위원회를 방문하고『정권은 정무총감에게 받은 형식을 버리고 각계 유지를 총망라하야 그 자리에서 공론하야 치안을 유지하는 정도로 하야 명칭도 치안유지회같은 것을 채용하자!』고 제의하였었는데 찬성자도 많이 있었으나 건국준비위원회 측에서 응종치 아니하여서 성립되지 못하고 만 것은 또한 기억할만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여운형 씨 등은 그대로 나가서 9월 6일 밤에 경기고녀 강당에 모여서 인민공화국을 만들고 13일에는 그 각원(閣員)의 명부까지를 발표하야 숙원이던 조각을 완성한 듯 하였었다。
     송진우 씨는 8월 말에 와서야 겨우 활동을 개시하였다。연합군이 9월 7일에 경성에 들어온다는 것이 확실히 알려진 때이었다、국민대회준비회를 발기하였다。 9월 7일에 그 결성식을 광화문통 동아일보사 3층 강당에서 거행하였는데 경향각지로부터 참집한 인사가 수백명에 달하는 대성황을 이루었었다.
     중경에 있는 대한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연합국에 대해서 감사의 의를 표하고 당면의 문제를 담당처리하기 위하야 간부를 선정하는 결정을 □보게 되었었다。
      9월 16일에는 한국민주당이 결성식을 거행하였었는데 송진우 씨는 그 수석총무로 취임하게 되어서 국민대회준비회위원장인 동시에 한국민주당 수석총무인 송진우 씨는 두 단체를  영도하게 되어 건국준비위원회 인민공화국에 대한 대항적 세력을 집결하게 되엇던 것이다。
      9월 말에 안재홍 씨의 국민당이 결성되고 또 임영신 씨를 중심으로 한 조선여자국민당이 결성되어서 민족주의 진영은 국민대회준비회、한국민주당、국민당、조선여자국민당、이와 같은 4개 단체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10월 16일에 이승만 박사가 미국으로부터 미국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하시고 11일월 중에 중경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들어오게 되어서 민족주의 진영은 강화되어 가게 되었다。
     그동안에 민족통일、정당통일, 좌우합작 등 문제는 많이 논강(論講)되고 시행도 되었었으니 10월 5일에는 양근환(梁槿煥) 씨의 알선으로 좌우요인들이 창□정 백(白)모가에서 회합하였고 이승만 박사는 중앙협의회를 중심을 하여서 노력하여 보았고 중경서 돌아온 임시정부에서는 조소앙(趙素昂) 장건상(張建相)씨 등을 내세워서 합작을 도모하여 보았었으나 다 성공하지 못하고 신탁문제가 나오고 박헌영 군의 소연방가입론(蘇聯邦加入論)이 나오게 되어서 합동 못될 것이 명확히 알게 되었던 것이다。

     

  12. 설의식, ‘해방삽화-8.15 직전 직후’, 1946년 8월 31일자 동아일보

    ◇ 8월 15일은 새 조선의 첫날이다。새 역사의 첫 장에 쓰여질 날인 까닭에 가장 중요한 날이다。따라서 이날을 전후한 그 당시의 사정은 세대를 물론하고 후일의 사료를 위해서도 중요할 것이다。 세상에 드러난 사실보다도 드러나지 아니한 이면동태(動態)가 더욱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3회에 걸쳐서 본지(本紙)에 발표된 낭산 김준연 형의 수기는 이러한 의미에서 귀중한 기록이 될 수 있다。그 당시의 상황이 대체로 드러났다고 볼 수 있는 까닭이다。그러나 필자는 필자대로 밝히고 싶은 몇 개의 사실이 있다。첫재 낭산수기로는 고 고하 선생과 전 총독부와의 교섭이 8월 13일부터 시작된 것처럼 일반이 오해하기 쉽게 되였음으로 이 수기를 시정보족(是正補足)하는 의미로도 집필할 필요를 느낀다。한걸음 나아가서 15일 이전에 이미 확정된 고하 선생의 심경을 단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유력한 기록임을 자신한다。사실자체는 그리 대단치 않은 일개 삽화에 지나지 않지마는 일후(日後)의 사가를 위하야서는 호개(好個)의 재료도 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그래서 낭산수기의 뒤를 이어서 곧 집필하려고 하였으나 워낙 쓸거리가 뒤를 이을 뿐 아니라、지면자체가 각종 원고를 정리할 도리가 없어서 오늘까지 미루게 된 것이다。
     작년 8월 15일 정오로부터 출발한 여운형 씨 주재(그 당시는 안재홍 씨도 가담하였었으나 사태가 부당함으로 즉시 이탈)의『건국준비위원회』가 오늘날 정치혼란 민족분열의 씨앗(종자)이었다는 것은 인제 세론이 일치하는 바이니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릇된 추측을 전제로하여 그 분쟁의 책임을 고하 선생의 고집에 돌리는 작위적 악선전이 아직도 남아있음은、유감이다。 즉
     ◇첫째、13일 이전에 여씨는 총독부로부터 일본이 항복하였다는 정보를 들었고、동시에 그 수습책에 대한 전권을 받았으나、송 씨는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다。 둘째、이미 수습의 주도권이 여씨에게 선점되었을 뿐 아니라、여씨로부터 합작교섭을 받게된 사정이 불쾌하야 쓸 데 없는 자존심으로 공연히 버티고 있은 것이다。
     셋째、따라서 당시에 만일 여씨를 중심삼아 송씨가 협력하였더면 이같이 대립과 파쟁이 격심하지 않았을 것이며 어느 정도의 질서도 유지되었을 것이다。
    요약하야 이상과 같은 논법으로 책임의 중점을 고하 선생에게 돌렸다。그럴듯한 논법이다。 그러나 이 논법은 낭산수기로도 충분히 분쇄될 수 있지마는 좀더 분명히 하려고 하는 것이 이 이야기의 골자다。결론을 먼저 쓰기로 한다。
     첫째、일본이 항복한다는 사실을 고하 선생이 알게 된 것은 11일 오전 7시경이다。 그저 막연한 항복담이 아니라 구체적 조항이였다。
     둘째、원등의 뜻으로 송 선생과 제일착으로 회담한 사람은 생전(生田) 경기도지사였다。바로 11일 오전 11시경이였다。여씨와의 시간적 선후관계는 모르나 송선생은 독자적으로 교섭을 받았다
     셋째、송선생의 신념과、심경과、당시의 정황판단(설혹 오단이 있었다 하더라도)으로는 일본주권이 그대로 있는 그때에 있어서『건준』같은 그 같은 출발은 절대로 할 수 없었든 것이다。그러므로 여씨의 교섭여부는 고사하고 여씨의 존재여부도 전연 문제가 아니었다。
     이상과 같은 결론을 입증하는 사실을 쓰려는 것이 이 글이다。 부분적으로는 이미 세상이 알지 모르나 널리는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13. 김준연, ‘(하) 해방 후 첫 번 삼일절을 당하여’, 1946년 3월 2일자 동아일보

     중일전쟁이 나고 이어서 미일전쟁이 발발하야 12월 8, 9일에 진주만이 격파되고 영국의 동양함대가 분쇄될 때에 나의 실망낙담은 퍽 커졌습니다. 이때에 나의 위안처를 선생과 창랑형(조병옥)이었나이다. 8월 15일 전후하여 여 씨(여운형)와의 합작이 나를 통하여 제의되었을 때에 선생은 단연 거절하였나이다. 나는 선생의 정하신 노선을 따라서 나가며 한국민주당을 위시하여 여러 동지들도 그대로 나가고 있나이다.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분투하고 있나이다. 동아일보도 고투하고 있사오며 국민대회준비회도 아직 남아있나이다. 선생은 우리 마음속에 항상 살아계십니다. 추억!고하 송진우 선생.

  14.  

    김준연, 1954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

     ‘일제패망은 이미 예기, 전곡서 연천으로 그리고『서울』로’
    『나는 공산주의 혁명으로 일로 매진하겠오 동무! 동무도 함께』이같이 나의손목을 잡고 권유하여온 고 여운형군에게 그 부당함을 명백히 지적하였고『이제 조각(組閣)에 착수합니다 후일에 후회 없으시도록 지금 빨리』운운하여온 정백군의 교섭을 일축하여 버린 민족해방의 날 1945년 8월 15일, 이날이야말로 ML당의 책임비서를 맡아보아 7년이라는 영어(囹圄)생활까지한 나였기에 더욱이 아무에게도 지지않으리만큼 크나큰 감격의 날이었고 민족갱생의 날이었다.
    내가 공산당과 합작치 아니함을 의아스럽게 여긴이도 없지 않았지만 해방된 이땅 하늘을 우러러 건국을 구상하는 나의 머리에는 이미 하나의 이념이 뿌리박힌지 오래였던 것이다.
    공산주의는 전통에 빛나는 우리민족의 역사를 황혼의 골자기로 몰아넣을 것이고 민주주의만이 우리 민족을 영구히 번영케할 길이다.
    × ×
    거개의 지식인들이 그러했듯이 나역시 일본이 패망할 것을 예지하고 있었고 8월 9일 원자탄세례에 뒤이어 쏘련이 대일선전을 포고함에 이르러서는 결정적으로 눈앞에 닥아오고 있음을 직각하였었다 그래서 신변의 위험을 느낀 나는 8년동안이나 낯익혀 살아온 전곡의 농장을 피해나와 연천에 일단 은신하였다가 조심스럽게 서울에 들어왔던 것이다. 들어와서도 제일 먼저 찾아야할 고하 선생을 심방한 것은 2,3일 후인 13일 저녁이었다. 당시 총독부로부터 누차 종용해온 정권인수를 고하선생은 거절한 터이었고 나역시 응하지 않은 채 일황의 수위『중대방송』을 들었던 것이다.
    해방십년에 아직 국토통일을 이룩하지 못한 오늘 팔·일오를 회고하며 감명과 결의를 새로이 하는 바이다.

  15. 김준연, ‘나만이 아는 비밀-송진우, 안재홍, 여운형과 해방 정계’, 독립노선, 시사시보사출판국, 1959년

     송진우씨는 나를 만나면 항상 대담하게 얘기 하였었다. 동아일보를 경영하던 우리는 그것이 폐쇄당한 후부터는 입장이 더욱 불리하였지만 우리는 그럴수록 태도를 강경하게 하였고 송진우씨는 일본과의 일체의 타협을 거절하였던 것이다. 그는 일본의 필망(必亡)과 조선의 독립을 확신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그의 감정이고 그의 신념이었다.
     그의 태도가 이러 하였기 때문에 친한 친구들에게도 그 선에 따라서 행동하기를 권하였다.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소위 대동아전쟁을 일으켜서 진주만을 기습하고 영국 동양함대를 전멸시켰을 때 우리 조선 사람들은 낙심천만하여 일본제국의 팔광일우의 대이상이 실현되어서 아시아 전부가 일본의 수중에 들어가고 한국은 영원한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까지 생각하는 자가 많았었다.
     소위 명사 지사 급에 속하는 이들도 대개 이와 같은 생각에 사로잡혔었다. 그래서 소위 명사라고 하던 이들이 보기 싫게도 그들의 태도를 굽혀서 뜻있는 사람의 울분을 자아내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송진우 씨는 시종일관하여 친구들에게 권하였다. 그때 일본은 모든 방법으로 송진우 씨를 순회강연 학병권유에 이용하려 하였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기엔 송진우 씨는 거절하다 못해서 한번 라디오로 방송한 일이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전곡에서 들었다.
     그이는 말하기를 “우리 동포들이 다 부지런히 일해서 저축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인들이 송진우 씨와 그 동지들에게 대해서 박해를 가하려고 할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바로 피신할 것을 결심했고 촌에 있으면 도리어 들어나기가 쉬운 때문에 서울로 오기를 결정하였던 것이다.

    송진우 ․ 안재홍 논쟁
     전례대로 하면은 청량리 정거장에 내려 바로 원동에 있는 송진우 씨 댁으로 향했을 것이지만 나는 특별히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그곳에 가지 아니하고 돈암동에 있던 서상국 군의 집으로 갔었다. 그 이튿날은 서군과 함께 북한산 밑에 있는 별장이라 할까 농막에 가서 하루 종일 유쾌하게 놀고 다음날은 동대문밖 제기동 박석윤 군을 찾아갔다. 그리고 13일 밤에야 송진우 씨를 찾았었다. 그랬더니 송진우 씨는 말하기를 자기는 총독부측으로부터 네 번이나 교섭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 교섭은 무엇인고 하니 총독부측에서는 자기들이 가졌던 권력의 대부분을 넘겨줄 터이니 총독부에 대신해서 사태를 수습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인의 재산을 보호하고 일본인의 생명을 보호하며 그들의 거주권을 인증해 달라는 것이었다.
     송진우씨는 여기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나에게 말하기를 일본이 불리하게 되면 우리에게 자치를 준다할 것이요 더 불리하면 우리에게 독립을 준다고 하여서 우리를 꾀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우리가 움직여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었다.
     불란서 페탕 정권, 중국의 왕조명(汪兆銘) 정권, 비율빈의 라우웰 정권 등이 결국 적국의 괴뢰정권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우리도 일본의 권유에 따라 나서다가는 결국 그와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다. 우리는 연합군의 손에서 우리정권을 받아야지 일본인의 손에서 받아서는 안 될테니 결코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송진우 씨의 생각을 증명하는 한 가지 좋은 재료가 있다. 그전 해 가을에 안재홍 씨가 송진우 씨를 찾아와서 민족유신회라는 것을 만들자고 하였을 때에 송진우 씨는 그에 응하지 않고 도리어 안재홍 씨를 친구로 알았기 때문에 그에게도 나서지 말라고 만류를 하였다. 그랬더니 안재홍 씨는 말하기를 “우리 학병들이 피를 흘렸으니 우리가 그 대가를 받아야 하지 않겠소?”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때 송진우 씨는 분개해서 “피는 다른 사람이 흘리고 값을 네가 받겠느냐?”하고 힐책하였다. 그러자 안재홍 씨는 “고하는 참 로맨틱하오. 이승만 박사가 미국군함이나 타고 인천항에다 들어올 줄 아오?” 라고 송진우 씨의 완강한 태도를 조소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송진우 씨는 일본이 꼭 망하고 조선이 꼭 독립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일체의 타협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조선총독부의 정권이양교섭
     그래서 안재홍 씨와의 사이에 논쟁이 있은 후에는 더욱 몸을 조심하는 의미로 이불을 펴고 1년 동안이나 칭병을 하고 들어 누워 있었다. 그랬었는데 13일 밤 그는 나를 만나서 총독부와의 4차에 걸친 교섭에 있어서 그전에 나에게 말한 대로 일본과의 타협을 일체 거절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송진우 씨는 나에게 말하기를 “경기도 생전(生田)지사와 오까 경찰부장을 만나서 강경히 거절하였더니 오까 경찰부장은 그러면 김준연 군을 만나게 해줄 수 없겠소? 김 군이 청년 간에 신망이 있다니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여보게 하겠소!”라고 말하더라는 이야기를 나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송진우 씨는 “낭산(김준연)이 여기 와있는 것을 경찰이 정보망을 통하여 다 알고 있으니 안 만나면 도리어 좋지 않을 것이니 한번 가보는 것이 좋겠다.” 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나는“그러면 만나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송진우 씨는 전화로 바로 연락하기를 “김 군이 여기와 있는데 내일 오전 중에 만날 수 있다” 이렇게 하자 저편에서도 내일 오전 9시경에 경기도청으로 와달라는 대답을 하여왔다.
     나는 다음날 아침에 경기도청으로 찾아가서 지사를 만나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오까 경찰부장은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나와 생전 지사의 이야기는 5, 6시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런데 그날 처음으로 서울 상공에 미국 B29폭격기가 날아왔었다. 한번 오고 또 오고 두 번이나 왔었다. 그래서 나는 생전 지사와 만나서 이야기 하다가 두 번이나 경기도청 길 건너편에 있던 체신부 방공호에 지사와 함께 피난하였었다. 나와 생전 지사는 점심도 같이 하였다. 점심은 빵 두개와 물 뿐이었다. 이래서 5, 6시간 이야기하는 도중 그의 근심하는 바는 ‘학생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일인의 생명을 위협하지나 아니할까’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대답하기를 ‘우리 학생들은 결코 그와 같은 일은 하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장담하였다. 그리고 흔연스럽게 대하였었다. 물론 생전지사도 일본이 항복 한다는 말은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나 자신도 그와 같은 의사는 표시할 수 없었고 전쟁이 계속된다는 전제하에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지금 생각하면 무엇으로 5, 6시간이나 이야기를 하였는지 알 수 없다. 아무튼 점심을 같이하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지사와 작별을 고하였다.
     작별시 지사는 내게 묻기를 ‘당신이 송진우 씨를 만났습니까?’ 라고 하기에 나는 ‘만났다’고 대답하였더니 ‘그러면 당신도 송진우 씨와 같은 의견이십니까?’라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다’고 하였다.
     그때 정백(鄭栢)이라고 하는 나의 ML당 옛 동지가 나를 찾아와서 “일본이 곧 손을 드니 우리가 뒷일을 담당해야 하지 않겠느냐? 국내서는 여운형 씨와 송진우 씨가 악수를 하면 그에 대항할 세력이 없을 것이니 그대가 송진우씨와 김성수씨에게 말해서 연락을 취해 달라.”
     그 이야기를 하였더니 송진우 씨는 “총독 측에서 네 번이나 교섭하여 왔는데도 거절하였는데 지금 여운형 씨가 말한다고 해서 되겠는가?” 라고 반문하는 것이었다. 그 길로 나는 김성수 씨를 만났는데 그이는 막 연천으로 떠나려고 옷을 갖추어 입고 마당에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길게 이야기할 시간은 갖지 못하고 경기도지사를 만났다는 이야기만 하였다. 그리고 밤에 돌아가 송진우 씨와 함께 저녁을 먹고 있자니 어떤 친구가 찾아와서 내일 정오에 일본천황의 중대방송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공산혁명을 말하던 여운형
     우리는 그것이 일본의 항복 선언인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와 송진우 씨는 일본세력이 물러가고 조선이 독립되는 것을 생각할 때 기쁘기도 하고 걱정도 되어서 잠을 편히 이루지 못하였다.
     그랬더니 이튿날 아침 어떤 친구가 ‘오늘 아침 7시 반에 여운형 씨가 총독부 정무총감을 만나러 갔다’는 사실을 전해 주었다. 우리는 그것이 앞서 총독부에서 송진우 씨와 나에게 하였던 교섭을 여운형 씨와 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침을 먹고 10시쯤 돼서 전일 정군이 나에게 송진우 씨와 김성수 씨에게 교섭해달라고 하던 사건에 대해서 회담하기 위하여 창덕궁 경찰서 쪽으로 내려왔다. 그때 계동 초입  우측에 장일환 군이 살고 있었는데 정군 이 거기 머무르고 있는 고로 거기에 가서 소식을 전하려 하였던 것이다.
     원동 송진우 씨 댁을 출발해서 창덕궁 담을 지나 창덕궁경찰서 앞에 다다랐다. 그때 저 남쪽으로부터 활발히 걸어오는 여운형 씨를 발견했다.
     서로 만나니 여운형 씨는 평소의 그 활발한 태도로 악수를 청한 후 나에게
    “고하는 어떻게 하오?” 라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대답하여
    “고하는 나오지 않고 김성수 씨는 어제 오후 연천으로 떠났기 때문에 이야기할 틈도 없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랬더니 여운형 씨는
    “동무는 어떻게 하겠소?”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여운형 씨는 나를 만나면 동무라 불렀다. 그것은 내가 ML당 사건으로 투옥되었고 그이도 또한 공산당사건으로 투옥된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나는 “나도 나서지 않겠소.” 라고 분명히 대답했다.
     그랬더니 여운형 씨는 다시 말하기를
    “그러면 좋소. 나 혼자 나서겠소. 공산혁명으로 일로매진하겠소.” 라고 결연한 태도로 말하는 것이었다. 여운형 씨의 이 한마디─‘공산혁명으로 일로 매진하겠소’─는 해방직후 우리 정국을 재는데 극히 중요한 척도가 되는 것이다.

    여운형과 결별
     그러므로 나는 한때 조선 공산당 책임자였지만 송진우 씨와 의견을 같이하였고 그래서 여운형 씨를 만나 이런 말을 듣고도 나는 그길로 장씨 집에 가서 정백 군을 만나 ‘송진우 씨는 거절했고 김성수 씨는 총총히 연천으로 떠나 이야기할 겨를이 없었다’ 고 말했고 ‘나도 그러지 못 하겠다’ 는 것을 여운형 씨에게 말 했다는 이야기를 하였던 것이다.
     나는 송진우 씨 댁으로 돌아가 정오에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방송을 듣게 되었다.
     ‘자 일은 이제부터로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자 오후 2시경 정백 군은 다시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말하기를
     “여운형 씨를 만났더니 송진우 씨가 확실히 거절하였다니 송진우 씨의 의견은 다시 물을 것 없고 동무만은 꼭 같이 일했으면 좋을 텐데 어떻게 하겠소?”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못하겠다’고 대답했더니 그는 다시 다져서 말하기를 ‘그러면 동무가 후회하지 않겠소’ 라고 하지 않는가? 나는 이 때 분연히 ‘후회하지 않겠다’ 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었다.
     그 후 여운형 씨는 안재홍 씨와 연락하여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9월 6일에는 박헌영과 함께 경기여고 강당에서 소위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송진우 씨는 이를 일소에 부치고 9월 7일 동아일보 강당에서 국민대회준비회의 결성을 거행하였던 것이다. 또한 결당 준비 중에 있던 한민당에서는 9월 8일 성명서를 발표하여 소위 조선인민공화국을 통격하였었다. 9월 16일 드디어 한민당이 결성되고 국민대회 위원장인 송진우 씨는 한민당 수석총무 자리도 겸하게 되었었다. 나는 국민대회준비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되어 송진우 씨를 도왔었다.
     10월 16일에는 이승만 박사가 미국군용기를 타고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였다. 생각하면 안재홍 씨는 1년 전 송진우 씨를 조소해서
     “고하는 로맨틱하오. 이승만 박사가 미국 군함을 타고 인천항에나 들어올 줄로 아오?” 라고 말하지 않았었던가? 그런데 그 후 1년이 지나지 못해서 이승만 박사는 미국 군함 아닌 미국 군용비행기를 타고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였으니 그들 두 사람의 식견을 말해주는 에피소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4292년 7월호․진상)

  16. 고하선생전기편찬위원회, 고하송진우선생전, 동아일보사출판국, 1965년

     마침내 8월 9일 소련은 대일선전을 포고하고 드디어는 만주 일대와 한국 북단 일부로 진격을 시작했다. 이리하여 군국주의 일본의 패전은 결정적 단계에 이르러 시간문제가 되었다.
     고하는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무슨 일이 꼭 일어날 것만 같았다. 예상한대로 8월 10일 상오 4시 총독경무국 하라다(原田)의 방문을 받았다.
    “명령을 받들고 선생을 찾아뵈러 왔습니다. 제가 오늘 선생께 말씀 올리는 것은 저 개인의 의사가 아니라는 것을 먼저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라다의 말에 고하는 일면 놀라고, 한편 적이 불안하기도 했다. 한국의 지도층이나 지식층을 학살하기 위해서 맨 먼저 자기를 찾아온 것으로 의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하라다는 전날까지의 오만불손한 언동에 비해서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었다. 고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뭐, 내가 징병 권유연설을 안해도 다들 끌려갔는데 그러오.”
     고하는 묵묵히 하라다의 말을 듣고만 앉았다가 딴청을 하면서 그의 말의 초점을 피했다.
    “아니,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올시다. 기실은 일본이 미 영측에 종전을 제의했고, 종전이 성립된 뒤의 뒷수습을 선생께서 해 줍시사고…, 그 의향을 여쭈어 보고 오라는 명령이올시다.”라고, 하라다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종전, 아니 왜 항복을 하오?”
    “아니올시다. 저…, 종전은 곧 성립될 모양이고 시간은 없고…. 선생께서 사랑하시는 조선민족을 위해서 힘을 써 주셔야겠기에….무슨 좋은 의견이라도 말씀해 주시면 상사에게 보고하겠습니다.”
     고하는 불안과 안도의 착잡 속에서도 배꼽이 뒤집힐 정도로 가소롭기만 했다.
    총독부는 이날 늦게까지 항복 후의 사후 수습을 맡을 인사의 인선을 끝내야했다. 그래서 고하를 지명하여 하라다를 파견한 것이다.
     한민족의 지도자라는 지도자는 전쟁 중에 거의 다 끌어다 부려먹었으니 끝까지 말을 듣지 않았던 고하 송진우라야만 한국사람들은 말을 들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삶아 먹을 수도 없고 구워먹을 수도 없는 놈”이라고 욕을 먹던 고하였지만, 그 고하 앞에 와서 애걸하는 도리 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이유일무이한 최적임자는 이미 오래전부터 오늘을 예측하고 방파제를 높이 쌓고 농성중이어서 그의 대답이 동문서답일 수밖에 없었다.
    “보다시피 나는 병자가 아니오? 신문사가 문을 닫은 그날부터 이렇게 병이 나서 누워있는 사람이오.”
    “거 신문사 말씀만은 그만두어 주십시오.”
     하라다는 사뭇 애걸했다.
    “허…그렇다면 또 그만두지…. 하지만 나는 병자니깐 아무것도 못하오. 그 문제는 더 말씀할 것도 없소. 다른 얘기나 있거든 하시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종전 후의 혼란이 수습되겠는지 그 방책이라도 좀…”
     머리를 숙이고 앉은 하라다의 모양은 처량하기만 했다. 고하는 하라다의 이 말에는 할 말이 있었다. 또한 말할 필요까지 느꼈다.
    “…첫째 나 자신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내 주위로부터 모든 감시를 해제하시오. 둘째 언론 집회 출판 및 결사의 자유를 주시오. 세째 정치범, 경제범의 명목으로 감금한 인사들을 석방하시오. 네째 군량미 기타 양곡을 풀어서 굶주린 백성에게 분배하시오. 이러한 시책이 곧 실행되면 대일감정은 다소 풀어질는지도 모르겠소.”
     고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라다는 면담내용 일체를 엄비에 붙일 것을 확약 받고 자기 상사에게 보고 차 자리를 떴다. 즉일로 고하집 주변에는 밀짚모자의 청년과 사복경찰이 자취를 감췄다.
     8월 11일 하라다는 조선군참모 간사끼(神崎)를 동반하고 다시 고하를 찾았다. 하라다와 간사끼, 그리고 경기도 경찰부장 오까(岡) 등은 전일과 꼭 같은 간청을 해왔다. 고하는 초지일관 끝끝내 거절했다. 그러나 고하는 그들의 4차 방문을 받고서야 마지못해 70 노인인 경기도지사 이꾸다(生田)와의 면담을 응낙했다. 경기도 지사실에서 고하는 이꾸다와 오까를 만났다.
    “만일 당신이 승낙만 해 준다면 현재 총독부가 가지고 있는 권력의 4분의 3, 즉 헌병, 경찰, 사법, 통신, 방송, 신문 등을 넘겨주겠소.”
     이와 같은 이꾸다의 제안에 고하는 묵묵히 앉았다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시오. 내가 중국의 왕조명이나 불란서의 페탕이 되고자 한다면 벌써 됐을 것이 아니오. 이것은 내가 사양한다느니 보다도 만일 내가 왕조명이나 페탕이 되어 버린다면 당신네가 일본으로 떠난 뒤에 나는 조선 민족에게 발언권이 없어지지 않겠소. 그리고 멀지 않아 조선은 일본과 국교도 맺어야할 것인데, 지금 목전의 이익만 생각하다가는 도리어 앞으로의 큰 경륜을 잃을 염려가 없지 않소. 한 사람의 올바른 지일(知日)하는 인사라도 남겨 두어야하지 않겠소?”
     고하의 조리 있는 이 말에 이꾸다는 말귀를 알아듣는 듯했으나, 들락날락하던 오까의 얼굴은 금시 오기에 차서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당신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우리에게 협력한 사실이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 협력을 해 달라는데 거절하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이요.” 하고, 오까는 고하에게 덤빌 듯이 대들며 지금 곧 총독과 정무총감을 만나 보러 가자고 했다.
    “나는 지금 당신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사와 이야기하고 있소.”하고, 고하도 오까에게 경멸에 가까운 응수를 했다.
    “당신이 끝까지 거절한다면 좋소. 그러면 지금 조선 안의 청년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는 김준연이 전곡에서 서울로 올라 왔는데, 당신은 연락이 될 것이니 좀 만나게 해 주시오. 김준연도 사양할까요?”
     이꾸다는 이 이상 고하하고 이야기해도 소용없음을 깨닫자 말머리를 돌려서 낭산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김군도 나와 같은 의견이리라고 생각하지만 정 의사가 그렇다면 연락은 해 주리다.”
     때마침 낭산은 소련참전의 방송을 듣고, 전곡 농장을 빠져나와 걸어서 연천의 박승철 집에서 하루를 쉰 뒤에 서울로 직행, 고하 집에는 감시가 심할 것 같아 돈암동 서상국에게 기식하면서 전화로 고하와 연락이 돼 있던 중이었다.
     낭산은 고하의 연락을 받고 곧 그 길로 경기도 도청으로 이꾸다를 찾았다. 때마침 공습이 있어서 낭산과 이꾸다는 방공호에서 회담했다. 낭산도 고하와 의견이 같았다.

댓글 한 개 »

  1. 이 글은 국사책에 반드시 등재하여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Comment by 정을기 — 2014/03/30 @ 4:0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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