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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 127 : 1940년 8월 10일 ‘哭’ 강제 폐간

Posted by 신이 On 10월 - 31 - 2011

‘조선의 우매한 학생들은 방바닥을 두드리면서 소리내 울었다’ 


 “1940년 8월 11일. 피눈물 나는 동아일보 해산식이 거행되었다. 종로경찰서에 수감 중인 중역과 간부 전원도 석방되었다(경리과장 김동섭 씨만은 제외고). 동아일보 해산식에는 백관수 사장만이 참석하고 여타 중역들은 한 사람도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공무국 종업원들은 윤전기를 붙들고 소리 내어 울고 편집국 사원들은 원고지와 연필을 내던지고 울었다. 그 때의 비통한 심경과 처절한 광경은 그야말로 이필난기(以筆難記)이다. 동아일보사 4층 강당에서 종로서 형사의 포위 하에 해산식이 간략하게 거행되었다. 백관수 전 사장이 등단하여 인사말을 하지도 못하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기가 바빴고 오직 ‘동아일보 사원과 종업원 여러분은 아무쪼록 몸 건강에 힘써 사중구생(死中救生)의 심경을 견지해 주기 바란다!’는 말만 남기고 하단하고 바로 해산해 버렸다. 작별의 술 한 잔도 나누지 못한 채 신문사에서 나와 뿔뿔이 헤어졌다. 다만 그때 사원들에게 일본말로 나미다낑 ‘누금(淚金)’(눈물 나는 돈, 퇴직금)으로 2년분 월급을 수표로 받았다. 1년분 치는 동아일보사에서 지급하고 1년분 치는 명목상으로는 매일신보사에서 증자를 해서 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총독부에서 마련해 준 것이었다. 나는 2년 치 월급 1천4백 원을 타가지고 화낌에 서울에서 친구들과 술을 진탕 마시고 그래도 마음이 풀리지 않아서 일본 동경까지 가서 마음껏 실컷 놀다가 돌아왔다.”(강제 폐간 당시 동아일보 기자 이상돈, 신문평론 1976년 1월호, ‘언론비화 50편’, 한국신문연구소, 1978년, 328쪽, 구우회고실(舊友回顧記) ‘동아 그때 그 시절’, 동우(東友) 1979년 8월 31일 발행 5~7쪽, 정치평론집, ‘회상반세기’, 505~516쪽)


 1940년 8월 11일자 1면 사고


  “8월 10일은 드디어 왔다! 폐간사를 누가 쓰느냐가 문제였다. 가장(假裝)과 허위의 글자를 써놓을 수 없다 해서 최익한(이북행) 양재하(납치) 씨 등이 한사코 폐간사를 못쓰겠다고 하여 김한주 씨(이북행)가 울며 겨자 먹는 심경으로 폐간사를 쓰던 것을 기억한다. 그날의 심정은 당해본 사람 이외에는 상상조차 못할 것이다. 분노 증오 자괴 절망감이 교착하여 참으로 형용할 수 없는 심경이었다.”(이상돈, ‘동아춘추’, 1955년 3월 17일자 4면)


이경남,  ‘설산 장덕수’, 동아일보사, 1981년 275~276쪽의 기술


  이제 남은 것은 폐간사를 실은 신문을 부고장처럼 발행하고, 피와 땀으로 얼룩진 ‘찬연한 깃발’을 내리는 일뿐이다. 그때 설산은 주위 동료와 후배들에게서 ‘창간사를 썼으니 폐간사도 설산이 쓰는 게 어떻겠느냐’는 종용을 받았으나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폐간되는 이 마당에 명론탁설(名論卓說)을 쓰건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되건 그것은 써봐야 알겠지만, 그것조차 검열에서 삭제되고 햇볕을 못 본다면 인사말 한마디도 못하고 문을 닫게 될 것 아니오. 그러니 김 형이 좀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로 써보는 편이 좋을 거요.”


  김한주(金漢周)는 설산의 생각을 곧 알아차렸다. 자칫 잘못하면 한마디 유언도 못하고 낙일(落日)하게 되기 쉬우니 만천하 독자들에게 차분하고 격조 있는 인사말이나 전하는 편이 오히려 상책이라는 생각인 것이다. 김한주는 설산의 뜻을 따랐다. 그러면서도 의미심장한 구절을 보석 박듯이 폐간사에 담았다.


  “이제 당국의 언론통제에 대한 대 방침에 순응함에 있어서 본보는 뒤를 보아 한(恨)됨이 없고, 또 앞을 보아 미련됨이 없는 오늘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창간 이래 20년, 민족의 대변지로서 비풍참우(悲風慘雨)를 참고 이기며 한국 민족은 결코 일본 민족에 동화될 수 없다는 증표로서 형형(炯炯)한 불빛을 밝혀 왔으니 이제 신문은 폐간된다 해도 한(恨)없는 긍지를 간직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면, ‘앞을 보아 미련 됨이 없다.’는 말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집필자의 주석은 비록 없었다 하더라도, 더욱 광폭해질 일본 군벌과 더욱 악랄해질 총독부의 탄압정책이 강요와 회유정책을 총동원하게 될 앞날을 예견하는 경우 ‘동아일보’가 훼절(毁節)하여 민족의 진로를 오도(誤導)하느니 보다는 차라리 자폭(自爆)하고 가사(假死)하여 윤전기를 멈춤으로써 먼 앞날을 기약하겠다는 비장한 결의의 표시인 것이다.


  그러므로 폐간사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잊지 않았다.

 “한번 뿌려진 씨인지라 오늘 이후에는 싹 밑엔 또 새싹이 트고 꽃 위엔 또 새 꽃이 필 것을 의심치 않는 바이다.”


 ‘동아일보’는 1940년 8월 10일 이 폐간사를 끝으로 일제하에서의 운명을 다했습니다.


  폐간사는 1면이 아닌 4면에 실렸습니다. 


  1940년 8월 11일자 4면


폐간사 전문


1. 본보는 자못 돌연한 것 같으나 금 8월 10일로써 소여(所與)의 보도 사명에 바쳐오던 그 생애를 마치게 되었으니 오늘의 본지 제6819호는 만천하 독자제위에게 보내는 마지막 지면이다. 회고하면 제1차 사이토 총독 시대의 문화정치의 일단으로 반도 민중에게 허여된 언론기관의 하나로서 다이쇼(大正) 9년 4월 1일 본보가 화동 일우의 추루(醜陋)한 사옥에서 고고(呱呱)의 성을 발한 이래 실로 춘풍추우 20년, 저간에 사회 각반의 진운과 함께 미력하나마 본보가 신문 본래의 기능을 발휘하여 조선문화운동의 일익적 임무를 다하여 왔음은 저윽히 독자 제위의 뇌리에도 새로울 줄 믿는 바이다. 그러나 이제 당국의 언론통제에 대한 대 방침에 순응함에 본보는 뒤를 보아 한(恨)됨이 없고 또 앞을 보아 미련됨이 없는 오늘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제위도 이 점에는 깊이 서량(恕諒)하는 바 있을 줄 믿는다.


2. 무릇 보도기관으로서의 신문의 사명이 결코 새로운 뉴스의 제공에만 그치지 않고 일보 나아가서 변전하는 시류에 처하여 능히 엄연한 비판적 태도와 부동의 지도적 입장을 견지함에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의의는 특히 과거 조선에 있어서 더욱 광범하였음을 볼 수 있으니 그것은 극도로 뒤진 이 땅의 문화적 수준에서 귀결되는 필연적 사실이었다. 이에 오인(吾人)은 다시금 본사 주최 급(及) 후원의 방계적(傍系的) 제반 사업과 행사에까지 상도(想到)치 않을 수 없으니 그 중에는 이미 적으나마 결실된 것도 있고 또 아직 개화성육 중의 것도 있다. 그러나 한번 뿌려진 씨인지라 오늘 이후에도 싹 밑엔 또 새싹이 트고 꽃 위엔 또 새 꽃이 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3. 속담에 일러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거니 20년의 세월은 과연 기다(幾多)의 괄목할 변천을 보이고 있다. 더욱이 제2차 구주대전의 발발로 말미암아 국제정세의 명일(明日)은 거연(遽然) 역도(逆睹)키 난(難)한 바 있으니 이때 지난날을 반성하면 오인은 온갖 성의와 노력의 미급(未及)에 오직 자괴하여 마지않을 뿐이다. 그러나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 이때껏 한결같이 연면(連綿)된 독자 제위의 심절(深切)한 편달(鞭撻)과 수호에 대해서는 충심의 사의를 표하는 동시에 그 마음 그 뜻에는 새로운 감격의 염(念)을 금할 수 없는 바이다. 끝으로 20년간 본보를 위하여 유형무형의 온갖 지도 원조를 불석(不惜)하신 사회 각반 여러분의 건강을 심축(心祝)하며 간단한 폐간의 사(辭)를 마치려 한다. 


  일제가 동아일보에 폐간을 강요하기 시작한 것은 1940년 초.


  미하시 코이치로(三橋孝一朗)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관사로 송진우 고문과 백관수 사장을 불러 ‘자진 폐간’을 통고했습니다. 


  “미하시(三橋) 경무국장이 관저로 고 송진우 선생과 나를 초치한 후 동아일보를 자진 폐간하라는 것이었다. 송 선생과 나는 너무나 어이가 없어 그 자리에서 자진 폐간은 절대로 못하겠다고 거부하였더니 그 뒤로는 별별 수단으로 위협하고 달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6개월이나 폐간 강요를 끝끝내 반대하자 그들은 최후 발악을 하여 경리관계에 부정사실이 있다 하여 경리부원을 잡아가고 다음에는 경리부장과 임정엽 상무취체역과 국태일 영업국장을 구금하는 한편 나를 종로서에 가두고 강박하였다. 그러나 10여일을 두고 끝끝내 폐간의 기색이 보이지 않으므로 신병으로 생명이 위독한 임정엽 상무 취체역을 강박하여 편집인 겸 발행인 명의를 변경케 하고 그로 하여금 폐간계를 내게 한 것이다.” (백관수 사장 회고담, ‘6개월간 투쟁, 일제의 폐간 강요에’, 1950년 4월 1일자 2면, 창간 30주년 기념특집)


  “일제의 소위 황민화정책이 강화되던 1939년 11월경부터 총독부에서 민족지 폐합을 계획한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1940년 정초, 백관수와 고재욱이 함께 미쓰바시(三橋) 경무총감을 만났다. 이때 동석했던 경무국장 모리(森)가 백관수를 보고 ‘금년에는 백 사장 얼굴이 더욱 희게 보이는군요’ 하면서 연방 싱글거렸다. 두 사람은 불쾌한 마음으로 돌아오면서 걱정했다. ‘저 녀석들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그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글쎄요. 심상치 않습니다.’ 그런지 열흘도 되지 않아 자진 폐간하라는 공식 통고가 왔다.” (고재욱, 곽복산 증언, ‘백 사장 얼굴이 희군요 폐간 통고’, 동아일보 1970년 4월 1일자 22면, 창간 50주년 기념특집)


  당시 총독부 관리들은 동아일보의 저항적 논조가 폐간의 원인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미하시 경무국장은 “(동아일보가) 일반인에게 너무도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일본 학습원대학 동양문화연구소, ‘미공개자료 조선총독부 관계자 녹음기록 제4권’ (동양문화연구 제5호, 2003년 3월) 중 조선에서의 경무행정.


번  호  828(T261)

일  시  1967년 1월 19일

장  소  중앙일한협회 회의실

강  사  삼교효일랑(三橋孝一郞, 미하시 코이치로·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삼호(森浩), 고천겸수(古川兼秀, 후루카와 켄슈, 조선총독부 보안과장 경무부장), 팔목신웅(八木信雄), 통정죽웅(筒井竹雄)

사  회  추원언삼(萩原彦三)

참가자  수적진육랑(穗積眞六郞), 상롱 기(上瀧 基), 안겸(岸謙) 


(386~387쪽) 

삼교(三橋): 가장 곤란했던 것이 신문통제와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다.

고천(古川): 창씨개명이죠.

삼교(三橋): 경찰은 양 쪽 다가 난처한 일이었지요. 통제문제는 오히려 조선일보가 말했던가요, 고천(古川)군. 그래서 古川군도 그런 일에 대단히 열심이어서 조선일보가 유지하지 못하겠으니 무언가 좀 해달라 라는 이야기가 있었고 그래서 무언가 이야기했지, 동아일보에게 이야기해 보자고 하여 동아일보를 불러서 이야기했지요. 그랬더니 잘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고 돌아가더니 바로 동경으로 가서 (총독부가) 동아일보를 부숴 버릴 생각이라고 말하며 선생이 선전했거든. 그때는 바로 의회가 열려 있는 중이어서 의회에서 문제가 되면 곤란하다며 고천(古川)군이 대야록일랑(大野綠一郞)씨에게 가 의논했습니다. 나는 역시 문제가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그런데 대야(大野)씨는 그러한 사람이니까, 아니 괜찮아, 그대로 하세요 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총감이 그렇게 말하니 한 번 해보자고 했던 것인데, 동아일보가 좀처럼 말을 안 들었지요. 결국 그 후 동아일보에서 여러 가지 흠이 생겼습니다. 경제통제 쪽에서 여러 가지 위반과 무엇인가가 있었어요. 그런 것 때문에 그 쪽에서 마지막에 한 번 협력할 테니 해달라고 하기에 이르렀습니다만. 다만 여기서의 이야기니까 노골적으로 말하지만 제일 난처했던 것은 총독에게 여러 사람으로부터 이러한 일이 있었는가 조회가 온 일 이었지요. 총독은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고 이렇게 대답했죠. 거기서 손들 수밖에 없었죠. 다른 일에서는 나도지지 않았으나 총독이 전혀 모른다고 말했기 때문 이걸로 입을 닫았죠. 내가 동경에 잠깐 왔을 때 고이소 씨가 척무대신인데 “당신, 하는 일은 끝까지 하지 않으면 안되죠”라고 고이소 씨한테 기합을 받았었지요. 그럭저럭 그것도 처리가 되었습니다.


(392~393쪽) 

추원(萩原): 신문의 통일합병 얘기입니다만 그것을 다시 한번 들어보죠.

삼교(三橋) : 에, 그것은 古川군이 상세히 연구했습니다만, 실은 그 근원은 누구냐 하면 총독이었습니다. 나는 총독에게 몇 번 말했던가. 국장회의 때 해야 되겠죠, 언제 할까요, 언제 할까요 라고. 처음에는 할 의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전쟁이) 급박해지면서 먼저 종이가 모자라게 되었습니다. 종이가 모자라 왕자제지(王子製紙)에 특별배합 등을 말해도 오히려 왕자는 코방귀를 끼고 해주지 않았죠. 古川군이 동경에 와서 많이 고심했습니다만 도무지 성공하지 못했죠. 그래서 이제 조선에서 만들어볼까라고 애기했으나 당시의 사정으로서는 그것도 어려운 일이었죠. 그래서 실질적으로는 종이 문제였으나 그저 정신적인 방면에서 얘기하면 송진우가 하고 있는 그 신문이라는 것이 너무도 비판일변도여서 읽는 이에 따라서는 너무도 일반의 민중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라고. 그러나 동경 어디의 당시 조선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던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다라고 연기(煙氣) 굴뚝을 하나 만들어 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라고 말했죠. 확실히 그건 그랬죠.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때 하나로 해버려서 그저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의 그것이 아무리 봐도 세련되지 않은 신문이어서 말이죠. 누가 보아도 거짓말로 보이는 내용의 신문이었던 까닭에 이것을 하나 개혁해보자라고. 거기에는 민중의 여러 사람에게도 받아들여질 만한 사람을 사장으로 하고 내부도 일반에게 받아들여질 만한 내용으로 개조하고 그래서 매일신보에 모두 함께 하여 동시에 지금의 종이 부족문제도 그것으로 보충하자고 하는 것이 본 줄거리였어요. 총독이나 군부 언저리의 생각은 이것과는 역시 다른 것이었습니다만, 경무국으로서는 지금과 같은 실제문제가 동반한 것이기 때문 고천(古川) 군이 중심이 되어 매우 고생을 했습니다.

古川 : 그것은 신문지의 통제로 호치신문(報知新聞)이었습니다만…. 거기에 언문지는 그러한 필요도 있었기 때문에 역시 소문을 낼까 말까 알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 당시의 그것에는 맞지 않는 반전적(反戰的)인 반제국주의랄까 할 수 있는 것이 많은 것이었기 때문 단속대상이 되었고 정말 어렵고 싫고 귀찮은 대상이 되었죠. 언제나 사건을 일으키고 말이죠.

삼교(三橋) : 전연 연기를 뽑아내지 않는 것도 곤란하기 때문 매일신보를 개혁하여 엷긴 하지만 연기가 어느 정도 나올 만한 것을 만들어가자 라고. 거기에는 최린이라고 하는 사람이 좋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로. 당시 뽑으려 생각해도 잘 안 되었어요. 그런데 최린씨가 어쩐지 호랑이가 고양이가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상당히 나쁜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만 정말로 인선도 꽤 어려웠었지요.

상롱(上瀧): 그것은 15년경입니까.

고천(古川): 12, 3으로 7년까지죠. 최린씨가 확실한 13년까지는 아니니까요. 지나사변이 시작되면서부터 매일신보가 독립했었지요.      

삼교(三橋): 에에. 독립되어서 최린이 사장이 되었다.

상롱(上瀧): 최린 다음에는 누구?

고천(古川): 누구로 되었나. 나는 잠깐 바뀌었기 때문에 모릅니다만. 내가 있을 때는 최린씨였어요.


  당시 총독부의 문서들은 동아일보의 폐간이 철저한 계획 아래 이루어졌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총독부 경무국이 1941년 작성한 소화 15년(1940년) 중 ‘조선경찰개요’


  “이상과 같이 언문신문은 사변 발발 당시에 비해 거의 180도의 전환을 봤다고 할 수 있으나 매일신보를 제외한 다른 2개 신문 가운데 특히 동아일보의 논조를 세부까지 검토해보면 아직도 민족적 편견에 의거한 것, 또는 일본 정신과 서로 맞지 않는 것 그리고 통치의 근본 방침에 전적으로 순응하지 않는 것이 눈에 띄고 있어 이를 그대로 방치할 때에는 조선 통치를 위해서는 물론이고 반도 민중의 민심을 잘못 인도할 우려가 있었다. 그리하여 1940년 8월 10일 마침내 동아일보, 조선일보의 양 신문을 폐간 조치한 것이다.”(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 64권, 한국학술정보, 2000년, 495쪽)


  총독부가 작성한 ‘극비, 언문신문통제안’


一, 언문신문의 현상

언문 일간신문으로 현존하는 것은 매일신보,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의 세 가지이며, 이 외에 주간지가 셋, 순간지가 하나 있으나 특필(特筆)하기에는 부족하다. 매일신보는 명치39년(1906년) 본부의 기관지로서 태어난 이래, 시정방침의 포연(布衍)과 여론의 지도, 또는 민심의 계발에 힘썼다. 특히 작년 4월에 그 기구를 확충한 이래, 전황의 보도나 혹은 시국인식의 철저에 매진하여 내선일체의 강화, 촉진에 공헌한 부분이 지대하다.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는 모두 소요사건 후, 소위 문화정치의 소산으로 1920년에 허가받은 것이나, 매일신보가 본부 기관지인 것에 대하여 민족주의자 및 사회주의자 진영의 기관지인 느낌을 나타낸다. 그리고 사사건건 당국을 비방하고 민심을 자극하는 듯한 언사에 치우쳐 민중에게 영합하고 민중 또는 우리들의 신문이라 하여 환영한다. 그리하여 그것의 발행부수는 모두 개조 전의 매일신보를 훨씬  능가하는 상황으로 세력을 떨치므로, 대중을 소란스럽게 하고 그 귀추를 보아도 조선人 및 조선통치에 독이 될 우려가 적지 않다. 시국의 중압과 준엄한 단속에 의해 최근 그 필치가 현저히 온건화 되었다고 하더라도 사변 하에서의 언론기관으로서 사명을 다하지 못한 책임감과 열의가 부족하다. 적극적 불온성이야말로 경감되어야 하나 또한 여전히 소극적 불온성을 지속하고 있어, 차압 또는 삭제를 당한 것이 수차례에 이른다. 그 외의 언문지는 자유주의적 색채의 것으로, 모두 소위 절발지(切拔紙, 스크랩) 내지 광고지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발행부수도 또한 근소하여 다루기에 마땅치 않다.


二, 언문신문 통제의 필요성

(一)문화공작상  

신문은 문화공작의 하나의 정말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써, 그 존재의의를 결정하는 것은 실로 문화공작의 지도정신이다. 그리고 조선에 있어서 문화공작의 지도정신은 내선일체의 실현, 즉 반도인의 황국신민화에 있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으나, 그 발생에 있어서 이미 민족주의적 및 사회주의적으로 발간된 이래 수차례의 차압처분, 정간처분, 또는 사법처분을 받고, 머지않아 일장기 말소사건을 야기시키고, 지금은 또한 내지인 직원을 전혀 채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4대절에 조차 황실 관계의 사진과 기사에 지면을 할애하는 것을 유쾌히 여기지 않는다. 이 외에 시국관계 및 시정방침에 관한 보도에 있어 부당하게 적극적, 협력적  태도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자주 교묘한 필치로 독자의 민족의식 및 계급의식을 부추기고 있는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과연 이상과 같은 지도정신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 명백하며, 더욱이 그 존재 자체가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부추겨 문화공작의 지도정신에 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중략) 


(四) 매일신보의 강화 발전

본질적으로는 민족의식의 저류에 기인하고 형식적으로는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존재에 기인하여 현저히 조해되고 있는 지금의 매일신보의 발전은, 기초를 단단히 하여 본부 기관지로서의 엄연한 사명을 달성해야 할 객관적 조건을 구유(具有)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시국의 중압에 의해 암류하고 있는 민족의식이 언제 양지의 존재를 기반으로 하여 흘러넘칠지 모르며, 이것을 매일신보로 하여금 꼼짝없이 가라앉히도록 이르게 하는 것도 어렵다. 때문에 조선일보, 동아일보를 통제하는 것은, 한편으로 불량지를 정리하여 민족의식의 삼제(芟除)를 꾀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매일신보의 발전을 가져와 민심의 선도에 힘쓰게 하는 결과가 된다.(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 37권, 한국학술정보, 2000년, 257~285쪽)


  ‘언문신문통제안’의 작성 시기는 문서에 나와 있지 않으나 1939년 하반기에 작성된 것으로 봐야 한다. 내용상 신문 폐간을 위해 만든 자료이고 1940년 초부터 총독부가 본격적으로 동아, 조선에 대해 폐간 압력을 넣었으며 일본 내에서도 ‘1현(懸) 1지(紙)’ 원칙을 내세워 신문 통합을 시작한 것이 1939년이기 때문이다.” (정진석 외국어대 명예교수)


 “내가 1940년 1월에 동기방학으로 귀성하였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무렵이었다. 이때 총독인 남차랑(南次郎)은 소위 동화정책이란 미명하에 창씨를 강행했었고 그 여세를 몰아 우리말 신문을 없애버리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이를 미리 탐지하신 선친께서는 남차랑의 흉계를 사전에 분쇄해버리고 그의 갖은 폭압정책과 만행을 열거하여 일부 일본인의 양심에 호소하는 밀서를 작성한 다음 이를 나에게 휴대케 하여 평소에 교분이 있었던 일본의 모정치가에게 수교케 한 일이 있었다.” (김상만, ‘창간 50주년의 날에 선친을 생각하면서’, 1970년 4월 1일자 10면)


  “1940년 초 일본 조도전대학을 졸업하기에 앞서 겨울방학 때 잠시 귀경해 있었다. 정초에 명사들의 신년하례식 파티에 다녀온 당시 동아의 고문이시던 고하 송진우선생과 사장이시던 근촌 백관수 선생께서 긴장된목소리로 ‘큰일 났다. 아버지 어디 계시냐’고 묻는 것이었다. 계동 집에서 선친과 두 분께서 말씀을 나누신 뒤에 방으로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갔더니 세분께서는 본인에게 언제 동경으로 떠나느냐고 물으시고 간찰지(簡札紙)에 먹으로 쓴 편지를 건네주시면서 동경의 언론계 중진 모원화산(茅原華山) 씨에게 전하라고 분부하셨다. 편지의 내용은 세분이 상의하였고 글은 고하 선생께서 쓰신 것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마는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강제 폐간시키기로 작정하였다. 그때 일본은 중국침략을 노골화했을 때였고 태평양전쟁 발발을 얼마 남겨 놓지 않고 있던 무렵이었으며 유럽에서는 이미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었다. 일제는 우리 민족의 ‘황민화’를 내걸고 민족말살정책에 광분하여 그 첫 조치로서 동아 조선 양 신문을 폐간키로 하였다. 그날 신년 파티 날 양지(兩紙)의 대표를 불러 일본의 건국기념일인 소위 기원절(2월 11일)을 기해 두 신문을 자진 폐간하여 일제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 통합하라고 종용하였다. 계동모임은 바로 이날 개최된 것이다. 어른들이 주신 밀서는 본인이 1월 중순 동경으로 돌아간 뒤 무사히 전달되었다.” (김상만, ‘동아일보와 더불어’, 1980년 4월 1일자 6면)


  총독부의 계획은 ‘삼천리’ 1940년 3월호 기밀실(機密室)난에 ‘우리 사회의 제 내막(諸 內幕) – 민간신문 통제설’로도 게재됐습니다.


동아, 조선, 매일, 3지의 장래

 “동경서 발행되는 ‘신문내보(新聞內報)’에 의하면 총독부에서는 전 조선의 각 신문지를 강력하게 통제하기 위하야 위선 지방신문 중 7개지(紙)를 폐간시키고 또 경성에 있는 국문지 4지(紙)를 2지로 통합한다는데 가장 주목을 끄는 사실은 조선문 3지에 대하여도 폐합이 있게 되어, 일설에는 모지모지(某紙某紙)의 2지를 합병시켜 농상공 위주의 경제 신문지를 만들고 일반 신문은 모지 1지만에 허한다는 설도 있고 또는 모지 1지만 폐하고 모지모지 2지만은 그냥 존치한다는 설이 있어 그 장래는 비상한 주목을 끌고 있다.” 


  1939년 10월부터 경성일보 사장으로 있던 미타라이 다츠오(御手洗辰雄)가 말하는 ‘동아-조선 통합시도 비화’ (신문연구, 일본신문협회 1979년 3월호 별책, ‘들어서 엮는 신문사’)


통합 전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한국의 신문 통합 문제입니다만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운 것은 총독부의 도서과로, 착수한 것이 소화13년(1938년-인용자 주)입니다. 처음 조선어의 ‘언문신문’을 통합한다는 방침이었는데 당시 경성에 있던 조선중앙일보는 없어지고 두 신문만 남아있었습니다. 그 조선일보, 동아일보 두 신문의 통합, 다시 말해 폐간 논의가 진행된 것이죠. 소화14년(1939년-인용자 주) 8월 29일 경성일보에 당시 총독부 경무국장을 맡고 있던 미하시(三僑)씨의 담화가 실렸습니다만, 거기에는 ‘구랍 이래-소화 13년 말에 해당하는 것입니다만-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대해 간담을 시작한 결과 조선일보는 동아일보와 동시에 폐간하는 것을 조건으로 비교적 빨리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동아일보는 동사의 간부들이 당국의 진의를 오해한 점이 있어 협의가 진척되지 않고 그 후 다소의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결국 폐간에 동의했다’고 하는 기사가 나와 있습니다. 그 담화의 문장으로 보면 동아일보는 매우 저항했고 조선일보도 간단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만 그 때 일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으시다면….


 “그 때 나도 그 논의에 간여했다. 동아일보는 송진우 군이 사장이었습니다. 그는 독립선언에 끼었던 사람으로 성립 때부터 반일신문으로 여러 차례 반항했습니다. 송 군은 자주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완고했고 듣지 않았다. 주필은 서춘으로 대정8년(1919년-인용자 주)의 독립소동 때 재일유학생대회의 의장이었습니다. 그는 조선 학생의 독립선언 기초자입니다. 그 두 사람이 강경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송과 자주 조선 요리나 뭔가로 밤을 새워 떠들기도 하고 이야기하기도 했으나 아무리해도 듣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모두 과거를 잊는 수밖에 없지 않는가. 당신은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는 것이 그것으로 좋긴 하겠지만 전쟁 때문에 일본 내지에서 아사히신문도 마이니치신문도 억압받고, 경성은 이제부터 더한층 혹독해진다. 이런 때 반항하는 것도 하나의 신념이겠지만 지금은 대세에 따르는 게 좋지 않겠는가.’라고 몇 번씩 얘기해도 듣지 않았다. 서춘은 나이도 십년 아래라 활기 있게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미타라이 씨’하는 투였다. 그래서 최린 씨에게 ‘주필이나 편집장으로 서춘은 어떤가요’라고 했더니 ‘당신 진심인가’ ‘진심입니다. 선생 당신도 그렇게 하면 안심이겠죠.’라고 했더니 ‘당신이 총독부를 설득할 자신이 있다면 기쁘게 받아들이겠다.’ 그래서 서춘에게 얘기했다 ‘최린 선생이 책임지고 떠맡겠단다. 당신한테 주필이나 편집장 어느 곳이나 희망하는 자리를 주겠다고 선생이 말했는데 어때’라고. (그는) 바로 누그러졌습니다. ‘최린 선생이 정말로 사장이 되는 걸까’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면 직접 가서 들어봐라’ 그리고 또 한사람, 그리스도교 장로로 종로의 독립회의 의장-그는 재산가로 귀족이었습니다만-그도 논의에 끼었다. 동아일보의 대주주로 유력 스폰서입니다. ‘그것도 들어줬다’라고 했더니 꺾어졌습니다. 결국 송, 한 사람이 최후까지…. 그러나 마지막에는 알아들었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가 되었다. 사장 최린, 주필 서춘, 편집국장은 매일신보의 국장을 수평 이동하는 것입니다. 부사장이 이상협, 영업국장이 이상철, 이상철은 전후 대의사가 됐고 통신대신이 되어 도쿄에 와서 제일 먼저 나를 만나고 싶어 해 만났습니다.”


-조선일보 쪽에서는 새로운 ‘每日新報’((‘申報’를 ‘新報’’로 개명)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들어가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장은 극히 고분고분한 사람이죠. 애당초 상인이고 실업가입니다. 경성일보 앞이 조선일보입니다. 하루걸러 꼴로 만나 얘기했습니다만 처음부터 큰 저항은 없었습니다.”




1940년 1월 25일 목요일 윤치호 일기

“오전에 유억겸 군이 전화로 알려준 바로는, 총독부 경무국 보안과장이 백관수 동아일보사 사장에게 오는 2월 11일 이전에 신문 발행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단다. 그는 이런 비상조치를 발동한 까닭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동아일보’ 인사들은 유 군을 통해서, 미나미 총독을 만나 신문 폐간 결정을 철회해줄 것을 간청해달라고 내게 요청했다. 난 유 군에게, 이런 미묘한 문제를 교섭할 만큼 총독과 돈독한 사이는 아니라고 말했다. 다만 곤도 총독 비서관을 만나 총독에게 내가 진정한 내용을 전해달라고 요청해보겠다고 약속했다. 낮 2시에 곤도 씨를 찾아가, ‘동아일보’가 조선 통치에 장애가 된다고 여겨지지 않는다면, 또 폐간이 총독부의 확정된 방침이 아니라면, 폐간 결정을 철회해줄 것을 총독에게 간청해달라고 부탁했다.” (김상태 편역, 윤치호 일기, 1916~1943 한 지식인의 내면 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 시기, 역사비평사, 1988년, 453~454쪽)


  1월 하순 송진우 고문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송진우 고문이 지한파 일본 정객들을 만날 때 동행한 김승문 당시 동경지국장(영업국 차장 겸임)의 회고.    


  “총독부가 동아일보에 마지막 검은 손길을 뻗치기 시작한 것은 1940년 초부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해 1월 상순 총독부 경무국장 삼교(三橋)는 당시 사장 백관수 씨를 불러 ‘사원위로금 정도는 고려할 터이니 동아일보를 자진 폐간하라’고 강제명령을 내렸다. 1936년의 일장기사건으로 사장을 사임하기는 했지만 당시 사실상 동아일보의 경영을 맡고 있던 송진우 선생은 계속 발간을 지시하고, 동아일보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비상수단으로 일본 중앙정계의 여론을 일으켜 조선총독부의 신문 탄압을 막아보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때 동아일보 동경지국장으로 있던 나는 송 선생을 안내하여 당시 일본서 지사라고 알려져 있던 흑룡회 회장 두산만(頭山滿), 동경매일신문(東京每日新聞) 중역이었던 백상(白上) 모, 그리고 귀족원 의원이었던 환산학길(丸山鶴吉) 등 명사 10여명을 만났는데, 이들은 송 선생의 정연한 이론에 감복하고 송 선생을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이리하여 어떤 이는 조선총독 남차랑(南次郞)에게 장문의 충고 편지까지 써 보낸 사실도 있었고 일본 ‘야마도’라는 신문은 동아일보를 폐간시켜야한다는 사설을 실었다가 때마침 일본 체류 중이던 송 선생의 항의로 사과를 하고, 내 기억으로는 이 사건으로 두산만(頭山滿)의 압력을 받아 그 신문이 자진 폐간까지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김승문 동아일보 이사 회고,  ‘동아일보의 강제 폐간’, 1965년 4월 10일자 6면, 창간 45주년 기념특집)


  “송진우가 곧 동경으로 밀행했다. 평소 즐겨 입던 한복을 양복으로 갈아입고 수행원도 없이 혼자 야간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 당시 일인이나 친일파 거물들이 아니면 도일시 반드시 가져야하는 도항증도 없이 관부연락선에 올랐다. 고하가 선창을 나서 배에 오르려 할 때 지켜 섰던 일인 형사가 당당한 풍모의 송진우를 보고 ‘누구신지!’하며 머뭇거리자 그는 ‘와다시가 소오징우다요(내가 송진우야)’라고 태연히 대답했다. 형사는 그 이름을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처음인 것 같기도 하여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그의 태연한 태도에 질렸음인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동아가 그나마 7개월가량 더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송진우가 동경에서 일본 정계인사들과 접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재욱, 곽복산 증언, 1970년 4월 1일자 22면)


  “1월 하순에는 고하 선생께서 동경으로와 잡지 ‘내관(內觀)’을 주재하던 모원화산(茅原華山) 씨 등 지한파(知韓派) 정객들을 만나 동아일보의 폐간을 획책하던 총독부의 방침을 바꾸도록 설득하였다. 본인이 고하 선생을 모시고 모원 씨 집에 갔을 때 고하 선생께서 격렬하게 총독부를 비판하던 모습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문제를 국회에서 정식으로 정치문제로 삼았다. 동아일보의 폐간은 덕택으로 기원절 만은 무사히 넘겼다. 그러나 대세는 어쩔 수 없었다. 그해 8월에는 부득이 폐간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결국 고하 선생의 노력으로 폐간이 약 6개월간 연기된 셈이었다. 하여간 그해 4월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게 되었을 때 동아일보는 이미 폐간이 예측되던 바로서 본인은 동아일보에서 일할 수 없게 되었다.” (김상만, ‘동아일보와 더불어’, 1980년 4월 1일자 6면) 


  일제시기 사상범 동향에 관해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가 편찬한 사상휘보(38) 1940년 3월호 165~166쪽.

  언문신문 동아일보에 대한 내지(內地) 신문의 주장


  내지 우익계통에 속하는 동아일일신문(東亞日日新聞, 발행소 東京市 芝區 田村町 4의 5, 편집 겸 인쇄 발행인 小松崎重)은 제 12,148호(쇼와 15년, 1940년 2월 20일)에 ‘조선 통치에 반역의 필진을 펴는 국적 동아일보를 폐간하라, 불령반도의 독립을 책모(策謀)하고 총독부의 국책에 반항함, 단호한 강경수단을 취하라’라는 제목을 달고 격앙된 필조(筆調)로 동아일보의 폐간을 주장하고 있다. 반도에서도 언문신문의 동향이 문제가 되고 있는 요즘에 주목할 만 한 주장이라고 생각되어 그 전문을 소개한다.   


  “조선합방 만30년이 지나 성전 하 반도에 대한 통치시정은 지금 미나니(南) 총독 아래 비상한 긴장 속에서 정치, 경제, 국방사상, 교육 등등 전면적으로 내선일체의 대승적 융합 정신으로 강화 충실을 서두르고 있다. 이번에 총독부 당국은 내선(內鮮) 국어의 일원화를 기하려고 반도 내의 신문, 통신 등 언론기관의 통제를 단행할 방침을 결정, 현재 미나미 총독 측근에서 예의 구체적 실시에 착수하고 있다. 종래 조선에서의 반일적 정치 책모의의 소굴이고 책원지(策源地)로서 매사 총독부 당국의 시정(施政)에 반항해 온 동아일보 사장(백관수)은 조선일보 사장(방응모)과의 합판(合辦)에 절대 반대의 태도로써 총독부의 통제방침에 반역하고 있는 것이다. 즉 조선총독부에서는 반도에서 국민정신총동원의 철저를 기하고 반도인의 문화적 사상의 선도 향상 발전을 기하기 위해서라도 신문 통신 등의 언론기관을 차제에 통치 국책의 선(線)에 바르게 통제 정비할 필요를 통감하고 있어 이번의 중대 시국 아래에서 내선일체의 정신으로 돌아가지 않는 신문, 통신의 존재는 단연코 용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처음 이 동아일보는 다이쇼(大正) 9년(1920년) 4월 1일 제1호를 발간한 이래 반도인에 의해 경영되어 지금까지 여러 번 총독부 당국의 경고 주의에도 불구하고 마치 반도인의 반일적 기관으로서 소위 불령 반도인의 민족자결운동의 급선봉이 되어 매사 총독부 당국의 통치시정에 반항해온 불령신문인 것이다. 일찍이 쇼와 12년(1937년, 쇼와 11년의 오인-인용자 주) 독일에서 개최된 세계올림픽대회에서 우리나라(일본-인용자 주)를 대표하여 마라톤 경기에 출장하여 제1착의 영예를 차지한 반도 출신 선수 손 군의 그 당시 사진을 이 신문이 게재하면서 유니폼의 일장기 마크를 고의로 말살한 불경사건을 일으켜 비난의 세평(世評)을 뒤집어썼고 당국으로부터도 강한 질책을 받은 일이 있다. 현재 사장 백관수도 그가 품고 있는 불령한 사상, 반일적 이데올로기를 전혀 전향한 바 없으며 이번의 총독부  통제방침에 대해서도 끝까지 강경하게 반대하고 있다.  이리하여 끝까지 반 국책적 태도로 총독부 통치에 해독을 끼치고 있는 동아일보의 불령 간부는 최근 극비리에 도쿄에 와  데이꼬꾸(帝國)호텔에 머물며 내지(內地) 측의 불령선인(鮮人) 일당과 제휴하여 중앙조선협회(회장 阪谷芳郞男)의 친선(親鮮)분자인 환산학길(丸山鶴吉), 관옥정삼랑(關屋貞三郞), 송강정남(松岡正男) 씨 등의 간부에게 읍소하며 통제 반대 책모에 자기편이 되어 협력해 달라고 간청하고 지금은 중앙정부 당국에 대해 반대운동을 극비리에 책모하고 있는바 그 경과가 대단히 중대시 되고 있다. 그럼에도 조선총독부는 가능한 한 업자의 입장도 고려하여 강압적이지 않은 극히 온건한 통제정비를 실현하려고 여러 가지 고심의 대책을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동아일보와 같은 불령 극한의 반일적 악 존재는 차제에 단호하게 용서 없이 강경한 방침으로 절멸 폐간시켜 다년간 통치의 암이었던 이 커다란 화근을 근본적으로 멸제(滅除)하고 단호하게 내선일체의 대승적 지도정신을 함양하여 명실 공히 반도의 명랑 견실 부동의 외침이 중앙의 식자(識者) 사이에 유력하게 대두케 해야 하는 바 그 경과가 주목되고 있다.”  


‘동아일일신문’ 1940년 2월 20일자를 찾아 밝힌 동아일보 1985년 4월 12일자 6면


 삼천리 1940년 5월호 13~16쪽, 기밀실(機密室) – 우리 사회의 제 내막(諸 內幕)  




민간신문 문제 진상 

동아, 조선 양지 운명?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양 민간신문 문제에 대하야 최근 조선 사회에는 여러 가지 풍설이 돌아다닌다. 이에 본사에서는 그 사실을 조사 발표하는 바 이 기사의 근거를 명확히 하기 위하야 출처까지 전부 명시하는 바이다.


‘신문내보’ 4월 2일부, 동경 발행

언문지 통제 문제로 조선춘추회 총독부를 지원

결의문을 제작 수교


미타라이(御手洗), 노자키(野崎) 양씨(兩氏)가 대표로


결의문

‘일본신문정보’ 3월 28일부, 발행소 동경

춘추회 결의 후 양 대표 질문에

미하시(三橋) 경무국장 답(答)


‘신문공보’ 3월 23일부, 발행소 동경

언문지(諺文紙) 통합문제의 전모

마루야마(丸山鶴吉)씨의 질문에 고이소(小磯) 척무상, 오노(大野) 정무총감 답변

귀족원 예산위원회 제2분과위원회에서 마루야마씨의 “언문신문 통합의 경위를 자세하게 밝히라”라는 질문, 즉 이의 요지는 폐간계를 강요했는가 운운의 질문에 대해 “강요한 일 없다”라고 오노 정무총감 답변.

고이소(小磯) 척무상 답

조선총독부의 처치가 꼭 부당하지는 않은 것으로 일장기사건 등을 예시했다.

오노(大野) 정무총감 답

신문 폐합(廢合)을 권고한 것은 사실이다.


‘신문시대’ 4월 6일부, 발행소 동경

언문 양지(兩紙)의 통제

이미 결정적


‘일본신문정보’ 10월 19일부, 발행소 동경

마루야마(丸山) 씨의 질문에

오노(大野) 정무총감의 답변


‘신문비판’ 4월 6일부, 발행소 동경

이 불의불령을 공격해야만

언문신문의 폐회

미나미(南)총독에 진언


  “이렇듯 한국인 발행 신문에 대한 폐간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던 가운데 1940년 3월 22일 조선춘추회는 간사회에서 협의를 한 후 경무국장을 만나 자신들의 입장을 전달했다. 조선춘추회 간사들이 한국인 발행 신문의 폐간을 포함해 신문사 통폐합 정책을 강력히 추진할 것을 요구하자, 미츠하시 경무국장은 실시 시기는 확답할 수 없으나 원래의 방침대로 추진할 것임을 밝혔다. 일본의 일부 반대 여론 때문에 잠시 주춤하던 총독부는 두 신문의 창간 20주년 행사가 끝나는 4월말쯤부터 다시 폐간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내비쳤다(삼천리, 1940년 5월호, 13~16쪽). 이후 일제는 폐간의 빌미를 찾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을 했는데, 강력한 폐간 반대 움직임을 보인 동아일보가 그 주된 대상이 되었다.” (박용구 상지대 교수, ‘일제말기, 1937~1945년의 언론통제정책과 언론구조변동’, 한국언론학보, 2001년 겨울호, 211쪽)


 1940년 4월 21일 일요일 윤치호 일기. 

 “사촌동생 치영의 말로는, 1~2개월 전에 도쿄에 간 송진우 군이 다나카 척무차관을 만나 2월 11일까지 동아일보를 폐간하라는 총독부 경무국 보안과장의 명령을 철회해 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그 결과 동아일보는 당분간 폐간의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으나, 송  군은 감히 서울에 돌아올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2일 전 그가 서울에 돌아와 곧바로 종로경찰서의 감시대상에 올랐다고 한다. 내 생각엔 송 군이 도쿄의 유력인사들을 찾아가 도움을 청한 건 좀 어리석은 일이었다. 총독부 경무국은 그가 조선 내에 있는 당국자들을 제쳐두고 도쿄의 실력자들을 찾아가 자신의 불만을 직접 토로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것이고, 용서하지도 않을 것이다. 경찰은 동아일보를 문 닫게 할 구실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김상태 편역, 윤치호 일기, 459쪽)


   당시 홍효민(洪曉民) 기자는 총독부의 폐간 방침 소식을 듣고 각혈까지 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장기말소사건으로 통양(痛痒)이 가시기도 전에 한 일 년이나 지내었을까? 또다시 동아일보 폐간이 일정(日政)에서 제의되어 왔다. 그것은 그때 2월 11일인 저들의 ‘기원절’에 자진하여 폐간해 달라는 것이다. 이때의 통분은 일필난기이다. 합법적 기관이란 이런 때에는 큰 난관이다. 철면피의 저들 일정은 꼭 2월 11일 기원절을 택하려 하였으나 그 일은 그대로 되지 않아 그해 8월 10일에 민족적 표현기관이 폐간된 것이다. 그해 2월 초순에 그 소리를 듣고 나는 각혈을 하였다. 우연히 난 ‘디스토마’로 돌리었지만 기실 통분이 일어 그리 되었던 것이다. 그래 고재욱 편집국장이 휴가 3주간을 주어 조금 고치어 가지고 온 일이 지금도 뼈저리게 생각되고 있다.” (‘구우회고실<舊友回顧室>’, 동우<東友> 1964년 9월호 7쪽)


  이상돈(李相敦) 기자는 총독부 출입기자 양재하(梁在廈)를 통해 총독부의 폐간 강요 사실을 알았다고 합니다.


  “1940년 봄. 총독부 출입을 하던 사회부 양재하 기자에게서 총독부 당국이 신문사 통합이라는 명목 하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한 사(社)만 남기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자진 폐간시킬 방침인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사장 백관수 선생이 총독부 경무국장을 만나 자진폐간하기를 종용받았다는 말과 백관수 사장이 단호히 거절했다는 말도 들었다.…(중략)…남차량의 무단정치는 극에 이르렀다. 조선인 지원병 제도와 학도지원병제도를 강요하고 소위 창씨제도까지 강요하는 폭거를 자행하다가 급기야 동아, 조선 두 신문을 강제로 폐간시키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런 판국에 조선일보는 그들 방침에 순응하는데 유독 동아일보만이 불응할뿐더러 동경에 가서 정치문제를 야기 시키게 되었으니 일은  확대일로로 치닫게 되었다.” (‘동아 폐간, 사중구생의 심경’, 언론비화 50편, 한국신문연구소, 1978년, 326~327쪽)


  백관수 사장의 표현대로 총독부는 동아일보의 폐간을 위해 ‘별별 수단’을 다 동원했습니다. 김승문 당시 영업국 차장(동경지국장 겸임)의 회고.


  “1940년 5월 동경지국장으로 있는 나에게 본사로부터 귀국전보가 날아들었다. 당시 총독부 당국은 동아일보를 폐간시킬 목적으로 단호하게 간부급들을 구속하기 시작했다. 영업국장 임정엽 씨와 경리부장 김동섭 씨 등이 이미 경기도 경찰국에 구속되었다. 5월 10일 나도 드디어 귀국 직후 송진우 선생과 함께 체포되어 송진우 선생은 종로서에, 나는 동대문서에 각각 구속되었다. 총독부 당국은 본사 간부 뿐 아니라 8백여 지분국장까지도 구속할 방침이었다. 며칠 뒤 송진우 선생과 나는 종로서 연무장에 끌려나왔는데 경기도 경찰국의 재하칠랑(齋賀七郎)은 우리가 김성수 씨 댁에서 모여 대한독립 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를 조직, 그 사실을 자백하라고 강요하며 자백하지 않으면 고문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때 땀에 젖은 베 고의적삼을 입은 송진우 선생은 어려운 지경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태연자약하고 위엄 있는 태도로 나는 일절 심문에 응할 수 없다고 말하고 오히려 재하(齋賀)에게 실정을 솔직히 이야기하도록 권유하였다. 이에 재하는 기실인즉 상부 명령으로 동아일보를 폐간케 하라는 지령을 받고 동아일보 간부들을 체포한 것이며 또 허위사실을 날조코자함이라고 자백했다. 이어 송진우 선생은 석방되었으나 동아일보도 강권에 못 이겨 폐간되었다.” (김승문, ‘폐간 지령에 역공세’, 1971년 4월 1일자 12면)


  “송 선생이 일본으로 건너간 사실을 안 총독 남차랑(南次郞)은 본격적으로 동아일보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우선 동아일보에 경리부정(經理不正)이 있다고 사건을 조작하고 이것을 조사한다고 경리장부를 압수하고 신문인쇄 후에 남은 파지(破紙)를 소홀히 처분하여 ‘물가안정을 위한 가격정지령’이라는 법령에 위반했다고 트집을 잡아 동아일보 사장 백관수 씨, 상무 임정엽 씨, 영업국장 국태일 씨, 영업국 차장으로 있던 본인, 경리직원 김동섭(金東燮) 씨, 김재중(金載重) 씨 등 6인을 검거했다. 간부들을 검거하여 동아일보 자진폐간과 사건을 ‘바타’하려던 일본경찰은, 구금된 간부들이 끝내 폐간에 불응할 뿐 아니라 아무런 경리부정을 밝혀내지 못하자, 다음에는 일본서 귀국한 송진우 선생을 예비구속하고 종로경찰서에 유치시켰다. 송 선생을 비롯한 우리들의 죄목은 동아일보 간부들이 주동이 되어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8백여 지국, 분국을 통해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보냈다고 또 다른 사건을 만들게 된 것이다. 한번은 경기도경찰부의 재하칠랑(齋賀七郞)이라는 형사가 종로서 연무장(鍊武場)에 송 선생과 나를 데려다놓고 죽도(竹刀)와 여러 가지 고문 기구를 내보이며 혐의사실을 시인하라고 협박했다. 송 선생이 그래도 끝까지 응답하지 않자 제하(齊賀)는 “총독부에서는 무슨 방법으로든지 동아일보를 폐간시키라는 지시가 있어 사건을 취급하는 것이니 도와 달라”고 애걸까지 하는 것이었다.” (김승문, ‘동아일보의 강제폐간’, 1965년 4월 10일자 6면)  


  폐간 뒤 경무국장의 담화와 삼천리의 기사가 당시 상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매일신보 1940년 8월 11일자 1면(10일 석간), ‘언문신문 통제와 삼교 경무국장 담’

 “언문신문의 통제에 제하여 삼교 경무국장은 아래와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중략)…동아일보사 내에 경제통제령 위반, 탈세, 배임 등의 불정사건이 있어 세상에서는 금차(今次)의 통제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과 같이 오해하는 자도 있으나 본건은 전혀 사직(司直)의 취조로 판명될 성질의 것이어서 전혀 별 문제이다.”


  경성일보 1940년 8월 12일자 1면(11일 석간), ‘동아일보, 조선일보 자발적으로 폐간, 언론통제의 국책에 순응’

 “언문신문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사는 긴 세월에 걸친 언론 보국에 매진해 왔으나 이번 국책에 협력하여 양사는 다 8월 11일부 석간으로서 자발적으로 폐간하기로 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삼교(三橋) 경무국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다.


삼교(三橋) 경무국장 담(談)

본부(本府)는 시국의 추세를 감안하여 언론의 지도, 물자 절감 기타 여러 방면의 국책적 견지에서 언론기관 통제의 긴요함을 인정, 신중 연구한 결과 먼저 언문 신문의 통제를 단행하기로 결정하여 ○○이래 조선일보사와 간담협의 한바 동사는 잘 시국의 대세를 양해하고 나아가 국책에 순응하는 태도로 나와 일체의 사정(社情)을 ○○하여 동아일보와 동시 폐간을 승낙 표시함. 이어서 동아일보사에 대하여 절충한바 동사 간부는 당국의 진의를 오해한 자 있어 협의가 진섭하지 않아 그 후 다소의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이번 드디어 당국의 방침을 양득하여 자발적으로 폐간하기에 이른 것은 통치 상 이것을 동의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조선 언론계는 일신(一新), 시기를 둘러싼 언문신문의 통제를 보게 되어 양사 간부 및 관계자의 국책에 순응하는 이해있는 태도와 양사 영년(永年, 오랜 세월)에 걸친 언론 보국의 공적에 대해서 깊은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당국은 특히 양사 사원, 정업원의 처우에 관하여 될 수 있는 한선의의 고려를 하기로 하고 생각건대 현하 급전하는 국제정세에 대처하여 결연히 흥아(興亞)의 성업을 완수하도록 지금이야 우리나라는 고도국방 국가의 건설에 거국 매진 중이며 조선에 부과된 사명감 더욱 무거워지고 언론기관 역시 그의 전능을 발휘해서 더욱 부족함이 없는 후회하지 않는 때가 되어 이번 통제의 결과로서 유일한 언문신문이 된 매일신보는 반드시 그 책무가 참으로 중차대함을 자각하여 x초에도 독점적 지위에 안일을 탐하는 것과 같은 일 없고 더욱 기구를 확장하여 지면을 쇄신하고 통치의 철저, 민심의 작흥(作興)에 힘써 내선일체 관민협력의 유대로서 그 중요한 사명의 수행에 전폭의 노력을 경주할 뿐만 아니라 삼가 조선 민중 여러분께서도 이번 통제의 참 정신을 잘 양득(諒得)하여 시국 하 조선의 전면적 약진의 신기원이 되도록 협력을 간절히 바란다. 더욱 때맞추어 동아일보사 내에 경제통제령 위반 탈세, 배임 등의 부정사건이 있어 세상 움직임은 이번의 통제 문제와 상관이 있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 경향이 있는 것을 인정하나, 본 건은 오직 사직(司直)의 취조에 의해서 규명되어야 할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삼천리 1940년 9월호 15쪽, ‘조선일보 동아일보 자진 폐간 진상과 금후’


사법사건 3건 취조 중

삼교 경무국장의 담화 중 ‘동아일보사 내에 경제통제령 위반, 탈세, 배임 등의 불정사건이 있어 세상에서는 금차(今次)의 통제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과 같이 오해하는 자도 있으나 본건은 전혀 사직(司直)의 취조로 판명될 성질의 것이어서 전혀 별 문제이다’라는 일절이 있는데 이 점을 싸고돌며 세상에는 여러 가지 풍설과 오해가 있다, 이에 진상 일부분을 보하건

一. 탈세사건=동아일보는 창간 이래 늘 결손을 보아오다가, 약 5,6년 전부터 독자의 증가와 광고료의 수입증가로 신문경영이 순조롭게 되여 소화11년(1936년)에는 약 6만원의 순익을 보았다. 이것을 사 간부들은 주주총회에 보고 하지 않고, 개인 명의로 동일은행에 예금하여 후일 사용에 쓰려 하였으며, 그 뒤로도 매년 이익을 내여서 최근까지 약 20만원의 순익을 내었는데 모다 동양(同樣)으로 은닉하여 탈세하였든 것이다, 이것이 경기도 경찰부에 탐사(探査)된 바 되어 방금 사법사건으로 취조 진행 중

二. 배임사건=전기 순이익 20여만원을 개인 명의로 은행에 예금하였든 바, 년 전에 모 간부가 7만원을 학교 건축하는데 돈이 부족하여 소정의 이자를 지불하고, 채용하여 쓴 뒤 이내 도로 갚었는데, 이것도 배임에 해당하다 하며 그밖에 몇 건이 있는 모양이다.

三. 경제통제령 위반=이 사건은 동사에서 사옥을 증축코저 철재, 목재 등을 매입하였고, 또 신문용지를 매입하였든 것을 사원 수 명이 통제가격 이상으로 몰래 팔았든 사건이 발각된 듯하다는데 자세한 것은 취조 중이므로 후일로 미룬다. 이리하야, 전기 3건의 사법사건으로 그 동안 동사 간부 송진우, 백관수, 임정엽, 양원모, 김승문, 국태일, 김동섭 등 10여 인이 경기도 경찰부에 피검되었든 중, 그 중에 송진우, 임정엽, 양원모 등 몇몇 분은 신체 불구속으로 일전에 석방되었으나, 사건은 여전히 취조 진행 중.




동아일보 사사 387쪽 기록.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백관수 사장은 동경에 사람을 보내어 사태수습을 꾀하려고 하였으나 마땅한 인물을 얻지 못하다가, 마침 당시 큰 글자를 주조할 수 있는 대형주조기 1대와 6·3 포인트 본문자모를 발주 중에 있어 일본 왕래에 의심을 받지 않을 조건이 갖춰져 있던 공장 차장 이언진을 사장실로 불러 마루야마 쓰루키치(丸山鶴吉)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 그 전달을 의뢰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편지가 전달되었을 무렵에는 편집국까지 마비시키기 위하여 백관수 사장을 다시 구속하였는데, 그때가 7월 중순이었다.”


당시 공장 차장 이언진의 회고. 

“1940년 8월 10일에 동아는 조선일보와 동시에 폐간되었다. 때는 바로 일본이 만주사변에 이어 북지사변, 상해사변 그리고 소위 대동아전쟁으로 줄달음칠 무렵이요 이 민족에게는 창씨개명과 함께 젊은이들을 지원병 혹은 징용을 서두르는 시절이었다. 한편 총독부는 눈의 가시같은 존재의 동아, 조선 양지를 없애고 국문지로는 그들의 앞잡이 역할을 하는 매일신보만을 남겨두기로 방침을 세우고 연초부터 양대국문지는 자진폐간할 것을 권고 내지 협박하는 사태에 이르렀고 동아는 강완히 이를 거절하였으나 기정방침을 변경할 그들도 아니었기에 그해 5월경에 드디어 하찮은 문제로 구실을 삼아 본격적인 폐간공작을 시도하게 되었다. 이미 그 당시는 신문용지도 통제물자로서 배급제였는데 배급해준 용지를 불법처분하였다는 구실로 경찰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처음에 용도경리사무를 담당하던 김우성 씨(작고하신 전 대법원장 김병로 씨 장남, 작고), 김동섭(당시 경리부장, 납북) 그 다음에 국태일씨(당시 영업국장), 김승문 씨(당시 영업차장), 임정엽 씨(당시 상무취체역), 송진우 씨(당시 고문), 등 사(社)간부(신문폐간을 실질적으로 불가능케하는 수단으로 편집국 간부사원들도 피검되었던 듯 하나 기억 못함)를 검거하여 경기도경찰부 유치장에 수용하고 연일 야신문(夜訊問)을 계속하였는데 원래가 하찮은 엉터리 구실이었는지라 신문의 방향은 어느덧 신문 자진 폐간 쪽으로 변질이 되어 무더운 장마철에 유치장에 가두어 놓고 심심하면 “자진폐간에 동의하겠는가”식으로 심한 고통을 주었으나 각자의 대답은 “못하겠다”라 하였다. 일자로는 불과 수삼일간의 차였지만 당시 사장 백관수 씨(발행인이며 편집국장을 겸하고 있었음, 납북)는 간부급으로서는 최후에 피검되었는데 7월 중순경 피검되기 바로 직전에 나를 사장실로 부르시더니 낙루 한참만에 “이군, 신문사의 운명은 경각에 달렸네. 그러나 나는 절대로 동의서에 도장은 안찍겠네. 한가지 부탁이 있는데 이군이 오늘 밤차로 동경엘 좀 다녀오게. 환산학길(丸山鶴吉, 당시 일본 귀족원 의원)이 동아폐간 건에 대하여 많은 걱정을 해주고 있어서 기간(其間) 수차 서신 혹은 전보로 연락을 취하였으나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필시 놈들이 검열하여 배달을 막고 있음이 분명하니 최후수단으로 나의 편지를 실수없이 환산에게 좀 전하고 돌아오게. 다른 사원은 하관까지도 못갈듯하나 자네는 기계관계로 동경에 간다고 하면 무사히 통과될듯하니 말일세”하시며 두루마리지 한 권을 다 소비하시며 주먹같은 붓글씨로 장문의 편지를 써 주셨는데 이 부피가 큰 비밀문서(?)를 품고 비 내리는 남행열차 속에서 진땀을 뺏으나 운 좋게도 ‘죠또고이(좀보자)’ 한번 아니 당하고 하관에 내려 동경지국 백남교씨(향북)에게 전보연락을 하고 동경역에 도착하니 환산의 측근인 송정(松井)이라는 자와 같이 역에 마중을 나와주어서 즉석에서 편지를 수교하고 나니 또 한번 진땀이 솟는 것은 무슨 이유였는지? 송정이라는 자의 말이 “수고했소, 이제는 아무 걱정 말고 며칠 푹 쉬고 안심하고 돌아가시요”하나 그래도 이번엔 다시 사의 그 후의 일이 궁금하여 기계관계의 잔무(그 당시 큰 글자를 주조할 수 있는 대형주조기 1대와 6.3 포인트 본문자모를 발주중이었음)를 끝맺고 귀사한 것이 7월 하순이었는데 때는 이미 폐간결정이 내려진 뒤였다.” (‘동아야사-못 찍겠다 끝내 폐간’, 동우(東友) 1966년 8월 31일 발행 9쪽)


  이상돈 당시 기자는 백관수 사장이 연행돼 갈 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날짜는 자세히 기억되지 않으나 최후로 사장 백관수 선생을 검거하여 갈 때 모양이 아직도 눈에 보이는 것 같다.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 2명이 와서 ‘동행’을 요구하자 백관수 선생은 편집국원을 모아 놓고 ‘동아일보 발행권은 나에게 있는 만큼 내 손으로 폐간계에 죽어도 날인치 않을 것이니 여러분은 끝까지 동아일보를 사수하여주기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모시 두루마기에 의관을 갖추고 태연자약한 태도로 미소를 띠우면서 형사가 준비하여놓은 인력거에 몸을 싣고 종로경찰서로 갔다. 이것으로 신문사 중역은 전부가 구금 당한데다가 설상가상으로 편집국장 고재욱 씨는 불의의 신병으로 출사(出社)치 못하게 되어 신문사는 글자 그대로 불안과 공포 속에 싸이게 되었다. 그러나 사원들은 일치 결속하여 신문발행에 매진하였다.” (이상돈, ‘동아춘추-8월 10일’, 1955년 3월 17일자 4면)


1940년 7월 25일자 조간 1면


편집 겸 발행인 백관수

인쇄인 장석태




1940년 7월 26일자 1면(25일 석간)


편집 겸 발행인 임정엽

인쇄인 장석태




종로경찰서에서 열린 마지막 중역회의


 “동아일보 사원 일동은 깜짝 놀라 그 내용을 알아보니 다음과 같은 기막힌 사유가 있는 것이다. 즉 총독부 경무국에서 백관수 사장을 구속 유치시켜 놓고 여러모로 설득과 위협을 해가며 동아일보 자진 폐간계에 서명 날인할 것을 강요했지만 백 사장이 끝내 불응하므로 종로경찰서에 구속수감중인 동아일보사 중역들로 하여금 경찰서 내에서 중역회의를 열게 하고 그 회의에서 발행인 명의를 임정엽 상무로 갱신 결의함과 동시에 임정엽 씨는 즉석에서 1940년 8월 10일에 동아일보를 자진 폐간하겠다는 각서에 서명 날인하였다는 것이다.” (이상돈, 언론비화 50편, 한국신문연구소, 1978년, 328쪽)


  “이리하여 종로경찰서 수사과장실에서 이른바 ‘중역회의’가 열리게 되었는데 백관수 사장은 사원들과의 약속대로 그의 손으로 폐간계에 서명 날인할 것을 거부했다. 그러자 경찰당국은 발행인 겸 편집인의 명의를 중병중인 임정엽으로 변경토록 강요, 임정엽 명의로 폐간계를 내게 되었고, 본사에서는 7월 26일 중역회의를 열어 이를 추인함으로써 폐간이 확정되었다. 경찰 당국은 강제 폐간의 인상을 남기지 않으려 했음인지 8월 초순에 백관수 송진우 임정엽 국태일을 석방하고 폐간일을 8월 10일로 잡아 자진 폐간 형식으로 문을 닫도록 하되, 그 때까지는 세상이 알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경찰은 기자와 사원의 언동을 엄중감시하고 미행을 시작, 8월 10일까지는 동아일보의 폐간을 보도 관제하였던 것이다.” (동아일보 사사, 1975년, 388쪽)


  “총독부는 마침내 당시 신병으로 생명이 위독했던 임정엽 씨 앞으로 발행인 겸 편집인의 명의를 변경하게하고 임정엽 씨를 위협하여 그의 명의로 폐간계를 제출하게 하였으니, 저 비통의 폐간은 1940년 8월 10일의 일이었다.” (김승문 회고,  ‘동아일보의 강제폐간’, 1965년 4월 10일자 6면)


 “40년 7월 총독부는 마침내 사장 백관수, 고문 송진우, 상무 임정엽 등 10여명의 간부사원을 구금하고, 중병 중인 임정엽을 위협하여 사장 백관수의 명의로 되어있던 법정의 발행 겸 편집인을 임정엽으로 강제 변경케 하고 그로 하여금 폐간계를 내게 하니, 이것이 8월 10일의 일이요….” (‘동아일보의 폐간과 동본사’, 1964년 4월 1일자 4면)   




  1940년 7월 31일 수요일 윤치호 일기

  “김종찬의 말로는, 1~2일 전 2명의 조선인 청년이 자기를 찾아와 오는 8월 10일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된다고 말하더란다. 이 청년들은 방바닥을 땅땅 내리치면서 ‘아이고’, ‘아이고’ 하며 소리 내 울더란다. 조선이 병합되었을 때도 조선의 우매한 학생들은 방바닥을 두드리면서 ‘아이고’, ‘아이고’ 하며 소리내 울었다. 방바닥을 두드리면서 통곡해봐야 뭘 할 수 있지?” (김상태 편역, 윤치호 일기, 468쪽)


  “8월초에 돌연 발행인 명의가 상무 임정엽 씨(당시 경기도 경찰부에 구속 중)로 변경되는 동시에 ‘8월 10일’에는 폐간하기로 확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하여졌다. 경찰에서는 신문사를 포위 감시할뿐더러 사원들의 언동을 엄중히 감시하였다. 그리고 ‘8월 10일’에 폐간한다는 것은 엄비(嚴秘)에 붙이고 발설조차 못하게 하였다.” (이상돈, ‘동아춘추-8월 10일’, 1955년 3월 17일자 4면) 


  “나는 8월 10일에 강제 폐간된다는 소식을 무슨 방법으로든지 지방 독자들에게 미리 알려주고 싶은 심정에서 필명 ‘천마공(天馬公)’ 명의로 8월 8일 부 ‘응접실’ 난에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말미암아 오는 8월 10일부터는 ‘응접실’ 문을 폐쇄치 아니치 못하게 되었으니 독자 여러분은 미리 양해하기 바란다.’는 문구를 넣었다. 윤전기 소리가 나자마자 전화소리가 요란스럽게 났다. 당시 사회부장 고 임병철 씨가 수화기를 들었다. 경무국 도서과에서 전화로 야단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응접실’ 난에 천마공이 쓴 ‘8월 10일’ 운운하는 문구 전부를 삭제하라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 자들은 8월 10일에 폐간한다는 것을 극비에 붙였던 것이다.” (이상돈, ‘동아춘추-8월 10일’, 1955년 3월 17일자 4면)




1940년 8월 7일자 3면(6일 석간), 응접실


문: 천마공(天馬公)의 경력을 좀 알고자하옵니다. 생지(生地), 학력, 연령 등을 알려주시오.(황주 B생)

답: 응접실을 부활시켜 개설한지 손꼽아 회고하니 어언간 일개성상이 가까워졌습니다.…(중략)…아울러 사정이 있어 오늘부터 유서 깊은 동아의 응접실도 영구히 폐실(閉室)하게 되었음을 독자에게 알려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강제폐간 2일 전인 8월 8일에 나는 ‘전쟁과 문화’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썼다. 고 설산 장덕수 선생(당시 보성전문학교 교수)이 임시로 신문사에 나와서 일을 보살피는데 ‘전쟁과 문화’라는 제목으로는 전문 삭제당할 것이니 ‘생활과 문화’라고 개제하고 내용도 약간 수정하라고 해서 하는 수 없이 내용과는 전혀 다른 ‘문화와 생활’이라는 사설을 게재한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이상돈, ‘동아춘추-8월 10일’, 1955년 3월 17일자 4면)


  이상돈의 회고대로 1940년 8월 8일자 조간 1면 사설, ‘문화와 생활’에는 ‘전쟁’ 4번, ‘대전(大戰)’ 6번 사용된데 반해 ‘생활’은 8번, ‘문화’라는표현은 37번 나옵니다.


1940년 8월 8일자 조간 1면 사설, 문화와 생활


  총독부를 출입하던 양재하 기자가 폐간 직전 마지막 조간에 실은  ‘당대 신문 단편(斷片)관’ 하편(下篇) 역시 동료 기자들에게 지식인으로서의 성찰을 촉구하면서 동아일보 없는 조선 사회에서의 시련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1940년 8월 10일자 조간 1면, 당대 신문 단편(斷片)관-하(下)




(전략)…그러면 앞으로 조선 신문인은 어떻게 몸을 가질 것인가?

이미 현역을 떠난 선배들 중에는 치부 방면에 진출한 분이 적지 않다. 또 앞으로도 신문 생활의 연장보다도 산업 방면, 단적으로 말하면 돈을 좀 벌어보겠다는 것이 대다수 동료의 지향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생활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나 그러면 신문인들이 과연 치재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고래로 조선의 지식층은 정말 돈을 몰랐다. 이른바 책상물림이라고 해서 돈을 모은다는 것은 차치하고 돈을 가까이 하지도 않았다. 작금과 같이 신문인 내지 지식인들이 돈에 눈뜨라하는 일은 없었다. 아주 최근의 변이한 경향이다. 문화의 옹호에서 이재(理財)의 화신(化身)에로! 다만 그들의 성찰과 시련이 주목된다.

필자-비교적 오랜 시일을 윤전기와 함께 전전하여온 만치 조선 신문계의 금석을 내다볼 때에 만감이 울러 오름을 금치 못하겠으나 총총하여 모든 것은 후일로 미루고 일언이평(一言而評)하여서 이때까지 조선 신문의 공죄는 어느 각도로 보던지 그 비중이 상반된다고 하여 둔다.


  마지막 조간 1면 사설은 이 기사와 관련한 ‘신문인의 회고와 반성’ 입니다.  


 1940년 8월 10일자 조간 1면 사설, 신문인의 회고와 반성




무릇 사물이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는 것은 오인의 상식에 속한 진리요 간심 오묘를 다한 주역의 진리만이 이를 도파한 것이 아니다. 우리 신문인은 현 계단에 있어서 자기를 돌아볼 때에 역량으로나 기술로나 또한 이 궁극변통의 전환적 계기에 직면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 신문인 즉 저널리스트는 현대문화선상에 가장 첨예한 부분을 점령하고 있다고 자타가 함께 인정하는 바이다. 과연 그러한가. 아니다. 우리는 현대 문화선상에서 그 반대로 가장 둔각을 그리고 있다. 우리는 현대문화의 적극성을 고조 앙양치 못하고 한갓 소극성을 주장하며 일종의 타락의 길을 밟고 있다. 역사적 행정에 대하여서도 그것의 건실한 유동과 광명의 방향을 지시 또는 촉진치 못하고 도리어 무질서한 사상에 엽기적 포착을 일삼음으로서 주적 흥미를 느낄 뿐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 신문인은 문화적 과급(課級)에 대하여 생산적이 아니오 소비적이며 이니시어티브가 아니오 짜쓰적 경향이란 것을 솔직히 자백하는 바이다. 그러면 우리 신문인에게는 영원의 비열이 앞을 가로 막을 뿐이오 분려(奮勵)의 전기(轉機)가 타락의 구렁으로부터 우리를 구출치 못할 것인가. 돌아보건대 우리가 자랑하는 현대적 무기인 신문이란 것은 사실에 있어서 현대만이 가진 것이 아니다.…(중략)…황성, 제국 양(兩)신문을 본받은 매일신보도 또한 그의 두각을 나타나게 되었다. 당시 차등(此等)신문은 벌써 상보(商報) 본위의 성질을 벗어나 민중 공계(公契)로서 지도기관의 면목을 차리었다. 즉 민권의 신장과 국가의 자립과 전제의 제한과 문명의 수입이 그들의 적극적 요구였다. 편집의 기술과 인쇄의 정도에 있어서는 현대 신문의 형식에 비론할 바가 아니었지만 현금 저널리스트의 퇴폐적 기분은 조금도 발견할 수 없는 반면에 그들은 보도자에 그치지 않고 민중의 수평선에 훨씬 앞선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의 창조적 기혼은 자구의 사이에 의연히 약동하고 있었다.…(중략)…한동안 침묵의 속에 잠겨있던 민간신문은 대정 8,9년 이후 시세의 변동과 문화의 앙분(昻奮)에 의하여 수개 보사(報社)가 새로운 존립을 보게 되었다. 본보도 그 중 하나로서 민의창달을 예의 목적으로 하였다. 이제 만 20년 전의 본보 상태를 회고하여보면 활자와 제판으로부터 기사와 수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아직 치기(稚氣) 임리한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물론 숫자의 나열과 취재의 복잡 등에 있어서는 십년 후의 오늘이 십년 전의 옛날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그 반면에 숫자와 취재에 횡관(橫貫)한 영도적 정신은 현대 지식인인 신문인의 입장에 있어서 너무나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것을 통환치 않을 수 없는 바이다. 우리 신문인은 과거를 회억하고 현재를 경험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동시에 역사의 굴곡성에 순응하여 참회와 반성을 거듭하고 다시 수양의 문을 향하여 무언의 가운데서 백배 면려하려하는 바이다.  


  이기영의 장편소설 ‘봄’은 1940년 8월 10일자 59회로 중단됐습니다. 이무영의 장편소설 ‘세기의 딸’은 190회로, 윤승한의 ‘조양홍(朝陽虹)’은 160회로 연재가 중단됐습니다.


  1940년 8월 10일자 조간 3면




  ‘봄’은 그 해 10월부터 1941년 2월까지 ‘인문평론’에 계속 이어졌습니다.


  김도태 선생이 석간에 연재하던 지상(紙上) 수학여행도 서둘러 끝냈습니다.

 “부(府)의 부근에는 고려의 34 왕의 능(陵)들이며 멀리 천마산에 있는 박연폭포 등이 많이 있으나 일일이 찾아볼 틈이 없고 또한 신문의 페이지가 좁아서 이것으로 여러분의 수학여행을 끝막습니다.” (김도태, ‘지상 수학여행-경의선 편 개성 행, 1940년 8월 11일자 5면)


 


1940면 8월 11일자 1면 횡설수설은 “밝은 하늘에 마음을 가다듬고 서늘한 바람에 기운을 일으키어 정진 매진 확실한 결실, 실속 있는 수확이 있도록 노력합시다.” 며 마지막 인사를 합니다.


▼ 말복 후 입추가 지나더니 아침저녁으로 벌써 상량한 기운이 완연하오 ▼ 섬 뜰에 잠겼던 벌레 소리 이슬에 적셔지고 푸른 들을 거치는 바람 끝이 가벼우니 이것이 추심인가보오 ▼ 가을이란 자고로 감상기(感傷期)라서 추심은 수(愁)로 표현되었거니와 ▼ 벌여놓은 것 걷어 들이고 시작한 것 끝막는 때라. 인간의 희비양면이 앞서고 뒤서고 수심 중에 희망도 오락가락! ▼ 시서변천(時序變遷)을 어찌할 수 없고 시회(時懷)의 청담(晴曇)도 자제키 난(難)하나 ▼ 그렇다고 때 따라 흐려지고 마음가는대로 방임해서야 될라고! ▼ 밝은 하늘에 마음을 가다듬고 서늘한 바람에 기운을 일으키어 정진 매진 확실한 결실, 실속 있는 수확이 있도록 노력합시다.


     1940년 8월 11일자 2면, 포도송이처럼 정답게 서로 엉키라.


포도송이처럼 정답게 서로 엉키라

  “어린 포도 알알이 살쪄가고 푸른 포도송이 송이마다 자색 물들면 이른 가을이 찾아온다오. 가을이 오면 이 마을에는 옛 추억이 포도송이처럼 송이송이 다래 운다오. 포도송이를 손에 들면 송이 송이마다 정답게도 서로 끼어 안고 서로 위해주는 포도의 족속이 부러워.”


   “1940년 8월 10일부 본보 폐간의 마지막의 신문이 배달된 날 사회면 한구퉁에 탐스러운 포도송이의 사진이 실리고 포도송이처럼 정답게 엉키라는 표제 아래…(중략)…이 사진은 당시 뜻있는 인사들은 눈물을 흘리며 보았을 것이다. 이 사진을 실리게 된 본사의 의도는 붓으로 쓰지 못하는 민족 단결을 외치는 한 장의 의미심장한 사진이었다.”(‘포도송이처럼 정답게 엉키자’, 1950년 4월 1일자 3면, 창간 30주년 기념특집) 


  1940년 8월 11일 일요일 윤치호 일기

  “어제 저녁 조선의 두 신문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호를 발행했다. 두 신문의 폐간으로 조선인들이 깊은 상처를 받을 게 틀림없다. 그러나 요즈음이 비상시국이다 보니, 당국의 입장에서도 이들 신문의 발행을 금지할 명분은 충분하다. (1) 용지 절약을 위해서, (2) 일본 신문의 보급을 촉진하기 위해서, (3) 조선인들에게서 민족주의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뿌리 뽑기 위해서.” (김상태 편역, 469쪽)  


  “유치장에 갇히었던 간부들은 모두 나왔다. 8월 12일 신문사 3층 강당에서 경찰서 형사들의 포위 감시 하에 동아일보사 해산식이 거행되었다. 근촌 백관수 선생은 단에 오르자마자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억제할 수 없이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참동안 말을 못하였다.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도 형사를 제하고서는 전부 울었다. 형용키 어려운 비통한 장면이었다. 백관수 선생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우리는 사중구생(死中求生), 죽음 속에서 생을 구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또다시 만날 때가 있을 것을 믿습시다!”라 말하고 눈물을 씻으며 내려왔다.” (이상돈, ‘동아춘추-8월 10일’, 동아일보 1955년 3월 17일자 4면)


 “동아일보는 창간 이래 20년간에 6819호를 내고 그 문을 닫았다. 그동안 ▲무기정간 4회 ▲판매금지 63회 ▲압수 489회 ▲삭제 2423회라는 국내 최고의 압도적 기록은 곧 반(反) 일제투쟁의 혁혁한 족적을 입증하여 주는 것이다. 그동안 발간부수는 명확치 않으나 31년 현재 동아 조선 중외의 3 민간지가 도합 13만부 정도로 추산되고 있었다하며, 40년 강제폐간당시의 동아는 5만 5천부였다 한다. 총독부는 동아일보가 복간을 획책할까 두려워하여 시설 인수조로 50만원을 떠맡기고 윤전기 등 일체 인쇄시설을 폐간 즉시 철거하였으니, 사옥만은 고수해야 되겠다하여 동본사를 조직하여 재기의 날까지 임대사무실로서 그 유지에 고심하게 되었다.” (‘동아일보의 폐간과 동본사’, 1964년 4월 1일자 4면)


  고재욱 당시 편집국장 회고.

 “이 모두가 인촌, 고하 두 분 선생의 지도하에 ‘동아’가 민족과 더불어 울면서 하나하나 새 역사를 창조한 피어린 자취입니다. 두 분은 흔히 ‘동아일보는 우리 민족의 정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민족 통치하에 겨레를 위한, 겨레에 의한, 겨레의 ‘기관’은 ‘동아’ 밖에 없으며 언제고 앞으로 해방이 되어 합법 정식정부를 가질 때까지는 해외에 임시정부가 있어 독립운동을 주도하듯이 국내에서는 동아일보가 민의의 총화기관(總和機關)으로서 정신적 정부 역할을 맡아야겠다는 것이 두 분의 포부였고, 우리 동인(同人)들도 그런 긍지와 신념으로 일해 왔습니다. 당시 ‘동아’에 재직한 동인으로서 인촌 선생, 고하 선생의 인품에 영향을 입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나 개인으로는 고숙(姑叔)이신 인촌 선생과 또 그와 더불어 선친의 오랜 지기(知己)이신 고하 선생의 ‘젊은이에 있어 가장 보람 있게 겨레를 위하는 길은 동아에서 일하는 일이야…’라는 한마디 말씀이 나의 일생을 결정지었습니다. 1940년 여름 ‘민족의 정부’ 동아일보에 최후의 날이 닥쳤을 때 편집국장의 중책을 맡고 있던 나로서 당시의 애끊는 비애와 분함을 잊을 수 없습니다만, 그보다 그 때 우리에게 보여주신 인촌 선생과 고하 선생의 의연한 태도는 지금도 뇌리에 생생합니다. ‘동아가 반드시 권토중래할 날이 있을 터이니 잠시 전원(田園)에 묻혀 때를 기다리게’라고 말씀하시던 그 성음(聲音)들이 지금도 귓전에 들리는 듯합니다.” (‘고난과 영광을 겨레와 더불어’, 동아일보 1970년 4월 1일자 9면)


  백철(白鐵) 선생 회고. 자서전 ‘속(續) 진리와 현실’ (박영사, 1975년,  25~27쪽)

 “1940년대 초기의 역사적 상태를 다시 문화운동적인 뜻에서 재고할 때에 우리 문화의 본질적인 위기를 의미하는 치명적인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다. 그 위기의 사건들을 총괄해서 한마디로 그 대의를 밝히면 그것은 우리 언어의 말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신문학사상(新文學史上)에서 이 말기 시대를 암흑기라고도 부르고 있는데 그 암흑기의 뜻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 언어의 말살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왜 그러냐 하면 한 민족의 문화운동에 있어서, 그 언어는 등불이기 때문이다. 그 등불이 꺼질 때에 일시에 사방은 암흑의 빛깔로 화할 수밖에 없이 된다. 소위 고꾸고 죠오요오(國語常用)라는 것이 40년대 초기에 일본 총독부가 내선일체의 구체화 운동으로서 강요한 슬로건이다. ‘고꾸고’란 말할 것도 없이 일본말을 가리킨다. 일본말을 일상어로 상용한다는 것이다. 황국신민 구실을 하기 위해선 성씨(姓氏)를 바꾸고 ‘유까다’나 ‘하오리’를 입는 것만으론 부족하고 조선 사람 가정에서도 일본어로 이야길 하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시세에 아첨하고 나선 그 때의 친일파의 가정에선 별의별 희극이 다 벌어졌지만 하여튼 일반 조선 사람의 입장으로 하면 말까지 빼앗기게 되어 실로 기가 막히는 수난이었다. 특히 치명적인 것은 문화, 언론, 문학의 방면이었다. 그 방면에서 연달아 대사건들이 일어났다. 우선 동아, 조선 양대 민간신문의 폐간사건이 된다. 1940년 8월 11일로서 두 민간신문은 비장한 분위기 속에서 폐간호를 내고 유서 깊은 문화전통의 막을 내렸다. 그 때 일본총독부측으로선 용지난 등의 구실을 내세우고 신문 통제의 부득이한 사정을 설명하는 척하였으나 물론 그것은 하잘 것 없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이오 그들의 본의는 도대체 이 시국 하에 있어서 조선말 신문이 세 개씩이나 필요하지 않고 어용신문인 ‘매일신보(每日新報)’ 하나만으로 족하다는 것, 그것도 그들이 강요하는 ‘고꾸고 죠오요오’가 현실화될 때까지의 어느 기간만 남겨둔다는 심산에서 취해진 조치였다. 이 양대 신문의 폐간 때 조선 사람들의 심회(心懷)는 어떠했던가. ‘본보(本報)는 말(末)과 종(終)이 왔다. 금일(今日)로써 본보(本報)는 무(無)와 사(死)의 막(幕)이 내리었다’(조선일보 폐간사)라고 한 것은 유독 두 신문사의 사람들만이 아니오 온 조선 사람이 실감한 어떤 종말의 기분이었던 줄로 안다. 더구나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일본 침략전의 승세가 꺾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현명하게 정세를 내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도 이 종말의 암흑기는 퍽이나 긴 터널로 바라 뵈는 때였기 때문이다. 이 두 신문의 폐간으로 해서 심리적으로만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직장을 잃은 기자들 외에 문필에 종사하는 지식인들, 특히 문학인의 처지였다. 무대를 잃어버린 연기자들, 극단은 해체되고 각각 초라한 보따리를 싸들고 뿔뿔이 유랑의 길을 떠나는 심정이라 할까, 사실은 그런 심정의 여유도 가질 수 없으리만큼 시세가 급박하여 전전긍긍한 마음으로 피난을 떠나는 심리이든지 모른다. 이 언어말살의 정세가 더 험악해지면서 특히 문학 분야에서 볼 때에 중대사건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두 개의 문학잡지의 폐간이었다. 1941년 4월에 조선신문학을 위한 일정(日政) 말기의 두 문학잡지, ‘문장(文章)’과 ‘인문평론(人文評論)’이 폐간을 당한 사실이다.”


   1940년 8월 12일 폐간식 뒤 사옥 앞에서 마지막 사진.  




 아래는 1920년 4월 1일 창간 후 기념사진


 1920년 4월 2일자 7면, 태극(太極)에 신경 과민




지나간 그믐날 일어난 일이라. 동대문에서 신용산으로 가는 37호 전차 차창에 태극이 그려있음을 발견한 경관은 무슨 큰일이 난 듯이 빨리 쫓아가 자세히 조사한 결과 이 전차는 합병하기 전 돌아가신 이 태왕 전하께옵서 황제로 계실 때에 능행시에 타옵시고자 만드신 전차로 오늘까지 차 곳간 속에 넣어두었든 바 공교히 운전수가 무심코 끌고 나온 일이 판명되어 회사에서는 즉시 곳간으로 다시 끌어들여 가기로 하고 무사하였다는데 대체 태극에 대하여 경관의 취체는 참으로 신경 예민이 되고 말 것 같으니 요 며칠 전 어느 길가에서 한 일(日) 순사가 어떤 집 하인이 색떡을 담은 밥소래(밥 담는 작은 그릇-인용자 주)를 이고 가는데 그 색떡 위에 태극을 새긴 떡이 달린 것을 보고 칼집끗 그 떡을 찍어 버리었다하니 한편으로 일본 상민들은 태극을 상표로 삼아 마음대로 쓰거늘 그것은 도모지 모른체하고 유독 이러한 일에만 지나치게 취체를 하는 것은 도모지 요령을 모를 일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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