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일제강점 하 동아일보에는 창간 발기인, 기자뿐 아니라 수많은 애국지사, 지식인, 문사(文士)들이 동아일보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것이 곧 민족을 위하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식회사 동아일보 발기인


◇京城府(경성부)

▲金性洙(김성수) 桂洞(계동) 一三○

▲金雨英(김우영) 仁寺洞 (인사동) 三六

▲金煜(김욱) 水下町(수하정) 三○

▲朴泳孝(박영효) 崇仁洞(숭인동) 八一

▲朴容喜(박용희) 和泉町(화천정) 二一一의一

▲李康賢(이강현) 崇仁洞(숭인동) 七一

▲李慶世(이경세) 積善洞(적선동) 一六二

▲李相協(이상협) 弼雲洞(필운동) 八八

▲李應善(이응선) 壽松洞(수송동) 四六의二

▲任冕淳(임면순) 勸農洞(권농동) 一五二

▲張斗鉉(장두현) 長橋町(장교정) 五九

▲張春梓(장춘재) 菊屋町(국옥정) 三一

▲玄俊鎬(현준호) 光化門通(광화문통) 九八


◇釜山府(부산부)

▲金時龜(김시구) 埋立新町(매립신정) 三三

▲文尙宇(문상우) 佐川洞(좌천동) 四三三

▲安熙濟(안희제) 草梁洞(초량동) 六五九

▲尹炳浩(윤병호) 本町三丁目(본정삼정목) 一二

▲尹相殷(윤상은) 영州洞(영주동) 二六

▲尹顯泰(윤현태) 草梁洞(초량동) 三三七

▲池榮璡(지영진) 本町四丁目(본정사정목) 一九의一


◇경기도

▲고윤묵 高陽郡 龍江面 東幕里(고양군 용강면 동막리) 二一○

▲羅弘錫(나홍석) 水原郡 水原面 南昌里(수원군 수원면 남창리) 五五

▲李定烈(이정렬) 龍仁郡 器興面 新葛里(용인군 기흥면 신갈리) 三四七


◇충청북도

▲劉世冕(유세면) 忠州郡忠州面新龍里(충주군 충주면 신용리)


◇충청남도

▲金永福(김영복) 瑞山郡 浮石面 芝山里(서산군 부석면 지산리)

▲成元慶(성원경) 禮山郡 禮山面 禮山里(예산군 예산면 예산리) 一一四

▲李象德(이상덕) 公州郡 寺谷面 虎溪里(공주군 사곡면 호계리) 四六

▲정재원 天安郡 天安面 邑內里(천안군 천안면 읍내리) 一○○


◇전라북도

▲康邦鉉(강방현)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

▲金箕東(김기동) 井邑郡 井邑面 長明里(정읍군 정읍면 장명리) 一一一

▲金琪中(김기중) 扶安郡 乾先面 茁浦里(부안군 건선면 줄포리) 四四

▲朴正植(박정식) 南原郡 水旨面 好谷里(남원군 수지면 호곡리)

▲朴昌鎭(박창진) 高敞郡 興德面 興德里(고창군 흥덕면 흥덕리) 六七

▲邊光鎬(변광호) 沃溝郡 羅浦面 羅浦里(옥구군 라포면 나포리) 三九七

▲李鐵煥(이철환) 高敞郡 大山面 山亭里(고창군 대산면 산정리) 一二

▲殷成雨(은성우) 井邑郡 古阜面 南稻里(정읍군 고부면 남도리) 二○七四

▲鄭鳳洙(정봉수) 金堤郡 月村面 長華里(김제군 월촌면 장화리) 二一○

▲鄭海魯(정해로) 高敞郡 富安面 鳳岩里(고창군 부안면 봉암리) 一三七

▲洪鍾轍(홍종철) 고창군 고창면 읍내리 八七


◇전라남도

▲高光馹(고광일) 潭陽郡 昌平面 三川里(담양군 창평면 삼천리)

▲高光駿(고광준) 潭陽郡 昌平面 三川里(담양군 창평면 삼천리) 四三五

▲高廈柱(고하주) 潭陽郡 昌平面 三川里(담양군 창평면 삼천리)

▲金榮洙(김영수) 康津郡 鵲川面 君子里(강진군 작천면 군자리) 二四七

▲金衡玉(김형옥) 光州郡 光州面 須奇屋町(광주군 광주면 수기옥정) 三○○

▲朴珥圭(박이규) 昌平郡 昌平面 昌平里(창평군 창평면 창평리) 一九九

▲朴夏馹(박하일) 光州郡 松汀面 素村里(광주군 송정면 소촌리) 三五八

▲徐孟洙(서맹수) 羅州郡 鳳凰面 鐵川里(나주군 봉황면 철천리)

▲李載爀(이재혁) 咸平郡 咸平面 咸平里(함평군 함평면 함평리) 三五七


◇경상북도

▲김승묵 大邱府 橫町(대구부 횡정)

▲孫秀文(손수문) 慶州郡 慶州面 城東里(경주군 경주면 성동리)

▲鄭忠源(정충원) 大邱府 南町(대구부 남정) 五一

▲崔浚(최준) 慶州郡 慶州面 校里(경주군 경주면 교리) 六九


◇경상남도

▲金秉圭(김병규) 東萊郡 □山洞(동래군 □산동) 二九二

▲金宗元(김종원) 統營郡 統營面 曙町(통영군 통영면 서정) 四三

▲金弘祚(김홍조) 蔚山郡 下床面 伴?里(울산군 하상면 반관리) 六一五

▲文永斌(문영빈) 河東郡 北川面 稷田里(하동군 북천면 직전리) 一一九

▲孫永暾(손영돈) 密陽郡 密陽面 校洞里(밀양군 밀양면 교동리) 七三一

▲李炳穆(이병목) 山?郡 丹城面 南沙里(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李鍾和(이종화) 蔚山郡 下床面 東里(울산군 하상면 동리) 七二九

▲李鍾淳(이종순) 蔚山郡 下床面 西里(울산군 하상면 서리)

▲崔演武(최연무) 泗川郡 泗川面 龜岩里(사천군 사천면 구암리)

▲許杰(허걸) 東萊郡 龜浦面 華明里(동내군 구포면 화명리) 一一三四


◇강원도

▲李鳳夏(이봉하) 鐵原郡 鐵原面 栗梨里(철원군 철원면 율리리)


◇황해도

▲金泳澤(김영택) 海州郡 海州面 北幸町(해주군 해주면 북행정) 二四七

▲李台健(이태건) 鳳山郡 萬泉面 유정리(봉산군 만천면) 二四○

▲李承駿(이승준) 海州郡 海州面 南幸里(해주군 해주면 남행리 二四○

▲李   雲(이   운) 海州郡 海州面 東崇町(해주군 해주면 동숭정) 六四

▲李忠健(이충건) 鳳山郡 萬泉面 유亭里(봉산군 만천면 유정리) 二三九

▲張德秀(장덕수) 載寧郡 下湖面 孤山里(재령군 하호면 고산리)

▲張德俊(장덕준) 載寧郡 下湖面 孤山里(재령군 하호면 고산리)


◇평안북도

▲吳熙源(오희원) 鐵山郡 站面 二응洞(철산군 참면 이응동)

▲李規曾(이규증) 龍川郡 ?中面 大城洞(용천군 내중면 대성동) 二九二

▲張熙鳳(장희봉) 龍川郡 北中面 大長洞(용천군 북중면 대장동)

▲崔浚晟(최준성) 宣川郡 南面 石湖洞(선천군 남면 석호동) 一一五


◇평안남도

▲李孝健(이효건) 鎭南浦府 後浦里(진남포부 후포리) 二五


◇함경북도

▲李鍾浩(이종호) 明川郡 上加面 石峴里(명천군 상가면 석현리)


◇함경남도

▲金舜善(김순선) 咸興郡 咸興面 荷西里(함흥군 함흥면 하서리) 一三

▲金孝澤(김효택) 定平郡 府?面 豊陽里(정평군 부내면 풍양리)




최준(崔浚 1884~1970) 경상북도 경주군 경주면 교리 69  


 “최준이 의욕을 잃고 한숨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서울에서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인촌 김성수였다. 1918년 봄에 경주를 찾아온 김성수는 박상진, 안희제와 더불어 최준의 인생 진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박상진이 혁명가이고 안희제가 창업가라면 김성수는 절묘하게 조화한 실천가라 할 수 있다. 김성수가 최준을 찾은 것은 경성방직과 동아일보에 지방의 유력인사를 참여하도록 권유하기 위함이었다. 김성수가 다녀간 지 1년 후인 1919년 10월에 계획대로 경성방직주식회사(경방)가 창립되었고 최준도 창립발기인이 되었다. 당시 우국지사들의 공통된 생각은 해방을 위해 교육사업과 물산장려사업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준이 교육 사업이야말로 필생의 사업이라 믿고 꾸준히 때를 기다리며 다짐을 하게 된 데는 안희제나 김성수와 교유하면서 함께 느낀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전진문 전 대구가톨릭대 경영학과 교수, ‘경주 최 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 황금가지, 2007년)


  “최 부자 집에서 전해오는 전통은 진사 이상의 벼슬을 금지했고, 만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라고 했다. 또한 찾아오는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고, 흉년에 남의 논밭을 사들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며느리는 3년 동안 무명옷을 입고 사방 100리 안에 굶어서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고 했다. 최부자 집의 1년 쌀 생산량은 약 3천 석이었는데 1천 석은 사용하고, 1천 석은 과객에게 베풀고 나머지 1천 석은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구한말에는 신돌석 장군이 이 집으로 피신하였고 최익현 선생이 여러 날을 머물러 갔다는 일화가 전해지며 의친왕 이강(李堈)이 사랑채에서 엿새 동안 머물면서 최준(1884~1970)에게 문파(汶坡)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최준은 집안의 마지막 부자였는데 백산 안희제와 함께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막대한 독립자금을 제공하였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백산상회는 결국 부도를 맞게 되었고 3만 석에 해당하는 빚을 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일제 식산은행과 경상합동은행에게 모든 재산이 압류되었는데 식산은행 아리가(有賀光豊) 총재가 최준과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빚의 절반을 탕감하여 주었다고 전해진다. 해방 후 최준은 김구를 만난 자리에서 안희제에게 전달한 자금이 한 푼도 빠지지 않고 전달된 사실을 확인하고 백산의 무덤에서 그를 기리며 통곡하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전 재산은 교육사업에 뜻을 둔 최준의 뜻에 따라 대구대학교(영남대학교 전신) 재단에 기부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


 최준 선생(오른쪽)과 동생 최윤(왼쪽), 신동아 2001년 1월호  ‘한국의 명가 4’ 최 부자 집






 안희제(安熙濟, 1885.8~1943.8), 부산 초량동 659   


 “1914년 9월 독립운동 자금의 조달과 일제 자본에 맞서는 민족기업의 발전을 위해 이유석(李有石)·추한식(秋翰植) 등과 더불어 부산 중앙동에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했다. 곡물·면포·해산물 등을 판매하는 소규모 개인상회로 출발한 백산상회는 1919년 5월 자본금 100만 원과 총 주수 2만 주, 주주 수 182명의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대 개편되었으며, 대구·서울·원산·펑톈(奉天) 등지에 지점과 연락사무소를 설치하는 등 대규모 회사로 성장했다. 회사의 확장에 따라 부산상업회의소 부 회두와 부산상업학교 이사를 역임했으며, 부산 유지들과 더불어 부산진과 영도에 공립보통학교를 설치했다. 3·1운동을 전후하여 남형우(南亨祐) 등과 국내외 연락을 담당했으며, 의령에서 독립선언서 수만 장을 제작하여 영남 각지에 배포하고 의령지방의 독립운동을 지휘했다. 이해 11월에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회사 관계자 및 영남 유지들과 함께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하여 전진한(錢鎭漢)·안호상(安浩相)·이극로(李克魯) 등 많은 장학생을 각국에 유학시켰다. 1920년 동아일보사 창립 때 최준(崔浚)·허걸(許傑)·이종화(李鍾和)·윤현태(尹顯泰) 등 백산회사 관계자들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그해 4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동아일보사 부산지국장을 맡기도 했다. 1921년 친일단체 상애회(相愛會) 회장이자 친일파의 거두인 박춘금(朴春琴)의 도항증명서(渡航證明書) 강매 기도에 맞서 부산에서 ‘박춘금 성토대회’를 열고 항의·진정 투쟁을 벌여 도항증명제를 폐지하게 했다. 또한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연통제(聯通制)를 구성하고, 그 교통사무국을 만주의 이륭양행(怡隆洋行)과 백산회사에 두게 했다. 그러나 백산무역주식회사는 계속된 독립운동자금 공급과 부채, 일제의 수색, 장부검열 및 회사간부의 감금·고문 등의 탄압은 견디지 못하고 1927년 해산되고 말았다.” (김형두, ‘독립투사 안희제’, ‘나라사랑 제 19집’, 외솔회, 1975년)  


  “1931년에는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신앙하는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만주로 갔으며, 1933년에 발해의 옛 수도인 동경성(東京城) 부근에 발해농장(渤海農場)과 발해학교(渤海學校)를 설립하였다. 당시 한국 농민들은 일제의 식민지 약탈통치하의 국내에서 토지를 잃고 남부여대하여 만주로 건너가서 유랑하다가 중국인 지주들의 불리한 소작조건 밑에서 착취당하는 일이 매우 많았는데, 안희제는 동경성 부근에 천 수백 일 갈이(千數百日耕) 넓이의 농토를 구입하여 농장을 만들고 유랑하고 있는 한국농민 300여 호를 유치하여 토지를 분배해 주고, 5개년 연부상환조건으로 자작농의 창설을 추진하였다. 또한 발해학교를 농장 일대에 설립하여 이주농민의 자제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42년 11월에 일제는 대종교가 독립운동조직이라고 보고 만주와 국내에 있는 대종교 지도자 윤세복(尹世復) 이하 21명을 일거에 체포하였다. 이 사건이 대종교에서 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임오교변 때 일제의 고문으로 10명의 대종교 지도자가 순국했는데, 이를 순국십현(殉國十賢) 또는 임오십현(壬午十賢)이라고 하며, 안희제도 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안희제는 일제에게 체포되어 대종교의 독립운동에 대한 장기 조사를 받다가 잔혹한 고문으로 1943년 8월에 옥사(獄死) 순국하였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현준호(玄俊鎬, 1889~1950), 경성 광화문통 98



  “수복된 다음 나는 계동 댁으로 인촌 선생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정말 무사해서 다행이라며 내 손을 잡았다. 적치 하, 피난살이 등 여러 얘기 끝에 나는 광주(光州)에서 들은 얘기를 말씀드렸다. 인촌 선생의 동지 중에 현준호 씨란 분이 있었다. 이 분은 6·25가 나자 광주에서 내무서에 잡혀가 정치보위부에 넘겨졌다. 빨갱이들은 그때 그들의 정치선전을 위해 ‘미 제국주의 8적(賊)’을 조작하고 그에게 도장을 찍으라고 강요했다. 그 8적은 이승만, 신익희, 조병옥, 인촌 등 여덟 사람이었다. 그러나 현준호 씨는 그 8적중에 인촌 선생이 끼어 있다하여 도장 찍기를 거부했다. ‘김성수가 어째서 민족반역자냐? 그야말로 민족 애국자이다. 일제 36년 동안 그는 민족독립을 위해서 인재양성을 했으며 언론기관을 세워 싸웠으며 민족 기업을 일으켜 일제와 맞섰다. 그가 민족반역자라면 초부도 웃는다. 그의 이름이 끼어 있는 한 나는 도장을 찍을 수 없다.’ 그러면서 현준호 씨는 갖은 고문을 다 당했는데도 끝내 도장을 찍지 않고 신의를 지켰으며, 결국 빨갱이의 총에 목숨을 빼앗겼다는 말씀을 전해 주었다.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인촌 선생은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리셨다.” (양회영 초대 참의원,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  동아일보사, 1987년, 306쪽)


  “1954년. 일본에서 귀국하여 아내와 함께 계동 댁에 인사를 갔다. 그때 선생님은 병환 중이셨다. ‘니가 영원이냐? 내가 너희 아버지 돌아가고 너를 처음 만나고, 또 너 처의 첫 인사를 받는데 누워서 받을 수야 없지. 부인, 나  좀 일으켜 줘요’ 부축을 받아 겨우 앉으셔서 절을 받으셨다. ‘나 때문에 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너 알고 있냐?’ 그러시며 우셨다. 내가 아버님 친구 분들한테 들은 얘긴데 광주에서 아버님과 친구들이 인촌 선생의 생일상을 차리겠다고 했다 한다. 그러자 선생님은 호의는 고맙네만 반찬이 세 가지만 넘어가면 난 안 먹을 테니 그리 알게 하시더란다. 상을 차렸다고 해서 내려 오셨는데 생일상이 너무 호화로운 걸 보자, 이건 약속이 다르다며 친구들이 붙잡아도 그냥 나오셨다고 한다. 그렇게 형식과 사치를 싫어하신 분이다. 선생님과 아버님은 아주 흉허물 없이 가까운 친구였다고 한다. 아버님이 계동 집엘 가면, ‘순민(인촌의 막내딸)아! 네 오래비가 왔다!’ 하시며 농담을 했다고 한다. ‘야 이 사람아 그럼 내가 자네 아들이란 말인가? 농담도 가려서 혀’ 정색을 하고 그러면, ‘야 이 사람아 내가 자네나 만나야 농을 허지. 나처럼 점잖만 빼고 사는 사람이 언제 농을 하는가?’ 하시며 두 분이서 가가대소하곤 했다고 들었다.” (현영원<玄永源, 현준호 선생의 아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아버지>, ‘인촌 김성수 사상과 일화’ 307쪽)


  “초창기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지국 운영은 단순히 신문의 판매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방의 애국적 유력 인사들이 참여하여 그 지방의 신문 판매와 취재를 아울러 담당하였다. 신문사의 지국은 민족 운동의 지방 조직 같은 인상이 강하였다. 신문사의 지국을 운영하는 사람은 단지 지방의 유력 인사에 그치지 않고 그 지방 민족 운동의 중심적인 인물이었으며, 또 지국과 분국(分局)의 기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 지방 민족 운동의 전위분자(前衛分子)였던 것이다. 동아일보의 경우 그 가장 뚜렷한 예가 바로 부산의 안희제, 평양의 이덕환(李德煥), 김성업(金性業), 대구의 서상일(徐相日)이었다. 이덕환은 한말 항일 비밀 단체였던 신민회에 가담하였던 사람으로, 평양 지방 민족 운동의 유력한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서상일은 1909년 안희제 등과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을 조직하여 만주와 러시아 등지에서 활동하였고, 3.1운동 후에는 대구에서 백산상회를 경영하면서 부산에 있는 안희제의 백산상회와 긴밀한 연락을 취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1923년 7월부터 동아일보 대구지국장을 맡아 동아일보가 폐간되던 1940년까지 17년 간 계속 재임하였다.”(정진석, ‘역사와 언론인’, 커뮤니케이션북스, 2001년, 270쪽)






대구지국장 서상일(徐相日, 1887~1962) 



 “서상일은 대구 출신으로 호를 동암(東庵)이라 하였다. 23세에 보성전문을 졸업했으며 1909년 안희제 김동삼 등과 대동청년당을 조직해 만주 노령 등지에서 활동했다. 합방 후 1915년 대구에서 윤상태를 통령(統領)으로 하는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를 조직한 뒤 그 외교부장으로 선출되었다. 박상진(광복단 수령), 안확, 조긍섭 등을 포함하는 이 비밀결사는 표면적으로는 시사(詩社)를 가장하여 빈번히 회합을 갖고, 상업 시찰의 명목을 내세워 만주 노령의 독립운동가들과 연락을 하며 기회를 엿보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영남 여러 곳의 민중시위를 지도하였다. 또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만주 노령으로 보내는 한편, 장석영 조긍섭 등 유림의 파리장서사건(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 제출)을 후원하여 그 대표 파견의 여비를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그는 대구에서 태백상회를 경영하면서 부산 안희제의 백산상회와 긴밀히 연락을 취하면서 독립운동자금 조달의 중심적 역할을 하다가 조선국권회복단이 검거당할 때 함께 기소되었다. 서상일은 37세 되던 1923년 7월 동아일보 대구지국장이 되어 본보가 강제 폐간될 때까지 17년간 재임하였다. 조양회관, 교남학교, 대구상공협회, 경북청년회 등을 설립해 대구 방면 민족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하다가 해방 후 한국민주당 총무, 입법의원 민선의원을 거쳐 1948년 제헌국회의원으로 헌법기장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또 민주국민당 고문이 되어 1952년 정치활동 때 반독재 호헌구국선언대회사건으로 투옥되고 이승만 대통령 저격사건에도 연루되는 등 반독재투쟁을 전개했다. 1955년 민주사회주의를 표방한 진보당을 발기하여 부위원장에 취임하였다가 탈퇴했으며 민주혁신당을 조직, 1960년에는 무소속으로 제5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됐다. 이듬해 5.16 군사정변 후 혁명재판소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은거 중 1962년 4월 신병으로 별세하였다.”(동아일보 사사 1권)






평양지국장 이덕환(李德煥, 1877~1938)


 “이덕환은 평양에서 객주업을 경영하던 거상으로 합방 전 안창호 양기탁 등의 신민회에 가담했으며 신민회 사업의 하나로 당시 평양에서는 처음이었던 마산동자기회사(馬山洞磁器會社)를 설립(초대사장 이승훈)했다. 뿐만 아니라 장대현 교회(목사 길선주)의 장로로 종교계에서도 명망이 높았다. 그는 감리연합의 저축조합을 설립하고 영세자금을 모아 그 자본으로 메리야스 양말 고무공장을 설립하는 등 민족자본의 근대산업을 일으킨 선구자였다. 합방 직후 105인 사건에 연루돼 1심에서 징역 6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2심에서는 무죄(105명 중 유죄판결은 6명)로 풀려났다. 3.1운동에 앞서 상하이에서 잠입한 선우혁(鮮于爀)으로부터 정세 설명을 듣고 안세환(安世桓) 김동원(金東元) 도인권(都寅權) 등과 함께 평양에서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시내 각 급 학교의 동원계획을 세웠으나 서울에서의 전국적 시위 계획 소식을 듣고 3.1운동에 합류했다. 그는 동아일보 창간 때 평양지국장을 맡았다가 1921년 3월에 사임하였다. 그 후 평양지역의 유력한 민족운동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다가 1937년 중일전쟁 직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안창호 계의 인사들이 일제히 검거되던 무렵 병사하였다.” (동아일보 사사 1권)






 평양지국장 김성업(金性業, 1886~1965)    



 “김성업은 평양 출신으로 호를 일석(一石)이라 하였다. 안창호가 세운 대성학교를 졸업한 후 보성전문에 진학해 2년 수료로 학업을 중퇴하고 다음 해인 1916년부터 안창호가 설립한 평양의 마산동자기회사(馬山洞磁器會社)의 지배인으로 1918년까지 재임했다. 그 뒤로는 베이징을 왕래하면서 안창호의 국내 연락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39세 되던 1924년 5월 동아일보 평양지국장이 되었다가 1924년 잠시 평양지국이 본사 직영이 되어 지국장에 주요한이 파견되자 지국 고문이 되었다. 1928년 다시 본사 직영이 풀리자 재차 지국장이 되었다가 1937년 9월 수양동우회사건으로 투옥됐다. 수양동우회는 안창호 주도의 흥사단과 표리(表裏)를 이룬 단체였다. 이 사건은 중일전쟁 발발 후 이 단체를 말살하려는 총독부의 의도로 조작된 사건이었던 만큼, 1939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전원 무죄가 선고되었다. 1940년 경성복심법원에서는 김성업 징역 3년 등 유죄판결이 내려졌다가 1941년 고등법원에서 다시 전원 무죄가 선고되었다. 이 사건으로 김성업은 수년간의 옥고와 종로경찰서에서의 심한 고문으로 척추신경 마비와 언어장애 등으로 오랜 투병생활을 계속하다가 1965년 1월 서울에서 별세하였다.” (동아일보 사사 1권, 49쪽)


  “평안남도 대동(大同) 사람이다. 1920년부터 시작된 조선물산장려운동에 적극 협조하여 평양시민 궐기대회를 소집하여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데 기여하였다. 1922년 7월에는 평양의 동아일보 평양지국에서 조명식(趙明植)·김병연(金炳淵) 등과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 단체는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가 조직될 때까지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6년 4월 수양동우회 간부회의에 참석한 그는 조병옥(趙炳玉)·이윤재(李允宰)·정인과(鄭仁果) 등과 함께 서울에서 기관지 동광(東光)을 발행하기로 결정하고, 동년 5월부터 이를 발간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1928년 7월에는 평양과 안악(安岳)에 동 지부를 설치하였으며, 수양동우회 약법(約法) 초안을 작성하여 상해의 안창호(安昌浩)와 협의 확정하기도 하였다. 1930년 1월 민족진영과 사회주의 계열이 합의하여 민족운동의 구심체로서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자 조만식(曺晩植)과 함께 평양지회를 조직하였으며 그는 서기장(書記長)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한편 수양동우회 활동에도 적극 참가하여 백영엽(白永燁)·김항복(金恒福) 등 동지들을 다수 가입시켜 동우회 운동의 활성화를 기하였으며, 1934년 7월에는 소년척후대(少年斥候隊) 조직에 관여하여, 평양연맹 부이사장(副理事長)에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각 방면으로 독립운동을 위해서 활동하던 그는 1937년 6월 동우회 운동으로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피체되어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받았으며 고등법원에 상고하여 1941년 11월 17일 무죄판결을 받아 석방되었으나 고문과 옥고의 여독으로 불구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안창호 선생의 부인 이혜련 여사가 미국에서 보낸 편지와 봉투(1938.3.8)


병석에 누우신 어른 전 상서


병이 그리 침중한 가운데 위로를 받으시겠는지 무슨 말로 쓸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허락하신다면 아무쪼록 병이 나으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병이 속히 나으시기를 믿습니다. 저는 아이들 데리고 다 잘 있사오며 아이들도 다 잘 있사오며 필영(안창호 선생의 3남-인용자 주)도 많이 자랐으며 공부도 잘합니다. 그동안에 필립(안창호 선생의 장남-인용자  주)이가 돈 백 원을 미국 영사에게로 보낸 것을 받으신 줄 알았습니다. 또 정월 십육일에 돈 삼백 원을 전보로 보낸 것을 받으셨는지요. 오늘까지 소식을 듣지 못하여서 궁금하외다. 할 수 있는 대로 병이 속히 나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만 그칩니다.

삼월 초팔일

혜련 상서







  안창호 선생에게 보내는 편지 봉투의 주소가 김성업이 지국장인 ‘코리아, 평양, 동아일보 지국’으로 돼 있습니다.




 계초 방응모 선생도 한때(1922년 6월~1927년 5월) 동아일보 정주(定州)지국장이었습니다.  

 “방응모는 서울 사회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었다. 신문과의 관계라곤 1922년부터 5년 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운영했던 경력이 전부였다.” (조선일보 사람들-일제시대 편, 299쪽)


 “방응모 씨는 오산학교로 유명한 정주(定州) 사람인데, 그가 조선일보를 맡게 된 데에는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그가 젊었을 때에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경영한 일이 있었는데, 본사에 보낼 신문 대금이 밀려서 지국장을 파면 당하자 그에 분발하여 금광을 한 것이 들어맞아 벼락부자가 되었으며, 그 돈을 가지고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사를 사서 태평로에 동아일보사보다도 더 큰 집을 짓고 무엇으로나 동아일보를 누르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쨌든 정주에서도 행세하는 집안에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한문을 많이 배웠고, 성장하여서는 여러 가지 사업도 많이 해보았으나, 결국 경제력이 없이 사업을 한다는 것은 한낱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삭주(朔州)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금광을 채굴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하여 전후 8년 동안이나 조밥과 소금으로 연명해 가면서 악전고투한 결과 하늘도 무심치 않아 필경 노다지를 발견하여 일약 거부가 된 것이라고 한다. 이름도 없던 가난한 선비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 금광이 팔려서 1백50만원(지금 돈으로 치면 수십억 원)을 손에 쥐게 되자 우선 향당의 선배인 조만식 선생을 사장으로 모시고 조선일보를 한국의 대표적 신문으로 만들기에 전력을 경주하였던 것이다.” (김을한, ‘신문야화-30년대의 기자수첩‘, 일조각, 1971년, 285쪽) 


  “방응모가 관할했던 구역 중 귀성군(龜城郡)은 1926년경 정주 출신의 민족 서정시인 소월 김정식(素月 金廷湜)이 동아일보 귀성군 지국을 분리, 경영하면서 생계의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그와 방응모 간에 어떤 만남이 있었는지, 혹은 이름이라도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년, 97쪽)


  “장남 준호(俊浩)의 아버지가 된 소월(素月)은 처가 곳 구성군 서산면 평지동으로 가서 동아일보 지국을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별 재미를 보지 못했으니, 거금 40년 전인 1924년, 시골 구성군에서 웬 재미를 붙일 만큼 신문독자가 있었겠는가? 그저 달리 해 볼만한 직업이 없으니 그것이라도 해서 몇 푼 벌어보자는 것이었고…” (임종국 박노준, ‘흘러간 성좌-오늘을 살고 간 한국의 기인들’ 제3권, 국제문화사, 1966년, 93쪽 김소월 편)  




동아일보1926년 1월 1일자 1면 ‘돈과 밥과 맘과 들’(소월)




1

얼굴이면 거울에 비추어도 보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비추어도 보지만 어쩌랴 그대여 우리들의 뜻 갈은 백(百)을 산들 한 번을 비출 곳이 있으랴


2

밥먹다 죽었으면 그만일 것을 가지고

잠자다 죽었으면 그만일 것을 가지고 서로가락 그렇지 어쩌면 우리는 쯕하면 제 몸만을 내세우려 하더냐 호미 잡고 들에 나려서 곡식이나 기르자


3

순직한 사람은 죽어 하늘나라로 가고

모질던 사람은 죽어 지옥 간다고 하여라

우리네 사람들아 그뿐 알아둘진댄 아무런 괴로움도 다시없이 살 것을 머리 수그리고 앉았던 그대는

다시 “돈!”하며 건넌 산을 건너다보게 되누나


4

등잔불 그무러지고 닭소리는 잦은데

여태 자지 않고 있더냐 다심도 하지 그대 요밤 새면 내일 날이 또 있지 않우


5

사람아 나더러 말썽을 마소

거슬러 예는 물을 거스른다고

말하는 사람부터 어리석겠소


가노라 가노라 나는 가노라

내 성품 끄는 대로 나는 가노라

열두 길 물이라도 나는 가노라


달래어 아니 듣는 어린적 맘이

일러서 아니 듣는 오늘날 말이

장본이 되는 줄을 몰랐더니


6

아니면 아니라고

말을 하오

소라도 움마 하고 울지 않소

기면 기라고라도

말을 하오

저울추는 한곳에 놓인다오


기라고 한대서 기뻐 뛰고

아니라고 한대서 눈물 흘리고

단념하고 돌아설 내가 아니오


7

금전 반짝

은전 반짝

금전과 은전이 반짝반짝


여보오

서방님

그런 말 마오


넘어가요

넘어를 가요

두 손길 마주잡고 넘어나 가세


여보오

서방님

저기를 보오


엊저녁 넘던 산마루에

꽃이 꽃이

피었구려


삼 년을 살아도

몇삼 년을

잊지를 말라는 꽃이라오


그러나 세상은

내 집 길도

한 길이 아니고 열 갈래라


여보오 서방님 이 세상에

났다가 금전은 내 못 써도

당신 위에 천 냥은 쓰오리다




 동아일보 1926년 8월 3일자 6면




사고

一 명칭 귀성(龜城)지국

一 위치  귀성군 남포(南甫)

一 구역  귀성군 일원

一 직씨명(職氏名)

     지국장 김정식(金廷湜)

    (이하 생략)




 “창간 이듬해 고향인 강원도 김화에서 18세의 나이로 분국장을 맡음으로써 동아일보와의 첫 인연이 맺어졌지요. 3·1운동 후유증으로 북간도에 망명해있던 중 모친 위독 소식을 듣고 귀향한 후 다시 망명할 생각이었는데 같은 또래의 지방 젊은이를 깨우치는 것도 급할 것 같아 당시 민족지로 한창 성장하는 동아의 분국을 맡기로 했던 겁니다.”(이강훈 전 광복회장, 동아일보 1980년 4월 3일자  5면) 


  “동래고보 졸업 직후 교원으로 취직했다가 직장 내에서의 민족적 차별대우에 불만을 품고 조선인교원연맹을 조직하려다 피검되었으며, 도쿄 유학 시절에는 사회주의 문학운동 단체인 동지사(同志社)에 참여하였다 193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사하촌’이 당선되어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한 후, 식민지 현실의 제반 모순에 대한 강렬한 비판의식을 추구하는 단편소설을 주로 발표하였다. ‘사하촌’은 가뭄이라는 자연적 재난과 사찰의 가혹한 소작제도 및 일제의 통제라는 삼중의 억압 속에 시달리고 있는 소작농민들의 절대적 빈궁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식민지 시대 농촌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소작 농민들의 집단적인 행동의식을 그려내고 있다. 그의 문학적 출발이 경향적 특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일본 유학 시절에 가담했던 사회주의 문학단체 동지사의 체험에서 연유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하촌’ 이후 ‘옥심이’(1936), ‘항진’(1937), ‘기로’(1938), ‘낙일홍’(1940) 등 리얼리즘적 경향이 강한 단편소설을 발표하였다. 1940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한국어교육이 금지되자, 교직에서 물러나 동아일보 동래지국장으로 활동하던 중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피검되었고, 같은 해 8월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되자 절필에 들어간다.” (김정한, 金廷漢)  


 

  

 ‘일제시대, 우리 가족은’의 저자 나영균(이대 명예교수)의 아버지 나경석(나혜석의 오빠)도 동아일보 특파원과 지국장을 지냈습니다.


(128쪽) 그는 만주에 이주하면서도 동아일보 봉천지국장을 맡아 계속 기사를 썼다.


(64쪽~65쪽) 3.1운동이 비밀리에 기획될 때 교장 송진우, 교사 현상윤(玄相允), 교주 김성수는 그들이 사는 학교 구내 사택을 아지트로 사용하며 밤마다 모의를 했다. 당연히 아버지도 그들의 밀의에 가담했다. 아버지가 맡은 일은 2월 28일 인쇄된 독립선언서 1000장을 만주 지린(吉林)으로 가지고 가서 그곳에 있는 손정도(孫貞道) 목사에게 전달하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동지들에게 부탁하여 총기 10정을 구입했다. 총독부 신상조서에서 살인강도 미수 운운한 것은 이 사건을 두고 한 말이다.


(77쪽) 아버지는 1919년 3.1운동 때 옥고를 치른 뒤 요감시인물이 되어 행동의 자유가 몹시 제한되었다. 때마침 전에 중앙학교 교장을 하다가 동아일보 사장이 된 송진우가 그에게 시베리아와 연해주 지방에서 객원기자로 일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아버지는 원산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80쪽~81쪽) 그는 동아일보 ‘로령견문기(露領見聞記)’에서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조선 사람인 내가 아라사(亞羅斯)의 해삼위(海參威), 즉 조선으로 치면 회령(會寧)이나 경성(鏡城)같은 곳에 갔었는데 왕왕 나를 향하여 묻는 사람은 “그 아라사 형편이 어떠한가.” 하니 모른다면 나의 아라사 구경한 자랑을 할 수 없고 안다 하면 염치없는 일이외다. 그러므로 나의 대답은 항상 “우리 해삼위는 알지만도 아라사 일은 잘 알 수 없소.” 합니다.


(99쪽) 아버지는 1922년 10월 21일부터 27일까지 5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시베리아 동포의 살아갈 길’이라는 글을 연재했다. 이 글은 공산혁명이 이뤄진 러시아령 시베리아의 한국 거류민 처지를 걱정하며 장차 취할 길을 제시하려는 것이었다.  





  일제강점 하 동아일보 지국장을 지냈던 사람들 중 해방 후 인천 지국장 곽상훈(郭尙勳) 씨는 제헌의원에 이어 민의원 의장을 지냈고 , 해주지국장 김인식(金仁湜), 홍성지국장 손재학(孫在學), 고흥지국장 오석주(吳錫柱), 수원지국장 홍길선(洪吉善) 씨도 제헌의원에 당선됐습니다. 고병철(高炳喆 ) 장수 지국장(1950년)은 독립촉성국민회 장수지부 선전부장, 대한독청 장수지부 감찰부위원장을, 여수지국장 김문평(金汶枰) 씨는 1950년 전남 여수군수를, 군산지국장 이갑룡(李甲龍) 씨는 광주철도경찰서장을, 대전지국장 조병곤(李炳坤) 씨는 1947년 충청남도 제3관구 경찰청 부청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사사 1권 1장, 초창기의 동아일보

창간 당시 지국망

전국의 지국 분국 망을 조직할 때 동아일보는 신문의 성격상 단순히 판매만을 위주로 조직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민중과의 혈맥이 상통하는 일대 민족적 조직’으로 만들려는 의도 하에 지방의 애국적 유력인사들을 지국장으로 임명했고 그 지국장의 책임 아래 분국을 설치, 그 지방의 판매와 취재를 아울러 담당하도록 했다. 특히 초창기 지국 분국장의 상당수는 지방의 유력 인사에 그치지 않고 그 지방 민족운동의 중심적 인물이었고, 지국 분국의 기자들도 상당수는 그 지방 민족운동의 전위들이었다. 동아일보의 지방조직은 일개 신문사의 지방조직이라기보다도 민족운동체의 지방조직 같은 인상이 더 강했다. 그 대표적 예가 창간 당시의 부산지국장 안희제(安熙濟), 평양지국장 이덕환(李德煥) 등이다. 안희제(1885~1943)는 합방 전 고향인 의령과 동래 구포에 학교를 설립했고, 합방 후에는 북간도와 노령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한 애국지사였다. 그 후 귀국하여 부산에서 곡물, 면포, 해산물 등을 판매하는 백산상회(백산은 그의 아호)를 경영하였다. 3.1운동 때는 의령에서 만세운동을 지휘하였고 윤현진(尹顯振) 등 영남대표를 상하이로 보내는 한편 그해 최준(崔浚) 윤상은(尹相殷) 등 영남 일대의 민족 자본가를 규합, 백산상회를 자본금 100만원의 백산무역주식회사로 개편했다. 또 국내외 독립운동의 자금을 지원했고, 유지들이 기탁하는 운동자금을 전달했다. 상하이임정이 연통제를 실시하자 백산무역은 안동현(安東縣)의 이륭양행(怡隆洋行)과 함께 임정 국내 연락의 2대 거점이 됐다. 따라서 회사는 항상 결손을 면치 못하였다. 그는 이런 일로 여러 번 검거되어 예심에 회부되기도 하였으나 문서상 증거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면소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1919년 11월에는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 유망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해외유학을 시켰다. 전진한(일본) 안호상(독일) 이극로(독일) 신성모(영국) 등이 육영회가 파견했던 유학생들이었다. 그는 동아일보 창간 때 부산지국장을 맡아 1921년 6월까지 재임하였다.




경기도 경서(京西)지국장 김유연(金有淵 서울신학교 교수, 1899~1950. 8.23 납북)


이호균, ‘김유연 목사의 생애와 설교 연구’(서울신학대 석사학위논문, 1998년)

(8쪽)1922년 3월 젊은 나이에 향리에 동명학원을 설립하여 육영사업에 힘쓰기도 하였다. 1924년 5월 그는 뜻한 바가 있어 서울로 올라와 신문배달로부터 시작하여 동아일보 경서지국을 경영하기에 이르렀고 언론계에 투신할 준비를 하였다.

(17쪽) 그 후 김유연 목사의 생사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동아일보에 내외문제연구소에서 제공한 납북인사 북한 생활수기인 ‘죽음의 세월’이 나와서 김유연 목사의 납북 이후의 삶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신동아, 1987년 11월호, 김한조(金漢祚)의 ‘코리아 게이트 증언’ 2, 253쪽

김한조-각하, 동아일보 문제는 손해 보는 일 같습니다. 미국의 언론들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세계의 언론들은 특유의 동지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동아일보는 아주 못됐습니다. 일전에 워싱턴포스트지에서 나를 ‘세계에서 가장 위험스런 인물’이라고 썼는데, 동아일보가 그것을 그대로 전재했어요. 그래, 내가 김일성이란 말이요! 일국의 대통령을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김한조-미국에서는 언론의 비판을 받는다고 해서 반박하거나 보복하지 않습니다. 동아일보는 민족지이고 미국에서도 잘 알려진 신문입니다. 괜히 건드려 평지풍파를 일으킬 것 같습니다.

박 대통령-하긴, 한국에서는 신문이라면 동아일보지. 일제시대 우리 형님(朴相熙)도 동아일보 지국장을 하셨어. 미국에서야 ‘동아’라는 발음이 쉬워서 잘 알려졌을 거야.


 “황태성, 박상희, 김성곤은 1946년 10월 1일 대구지방에서 발생하였던 이른바 ‘10·1 폭동’을 주동하였고, 한때 그곳에 공산주의자에 의한 인민공화국이 설립되자 향리인 경북 선산군 구미면에서 동아일보 지국장을 하고 있던 박상희는 구미 인민위원장을 역임, 세력을 떨친 바 있었다.”(김경재, ‘김형욱 회고록-혁명과 우상’ 제2권, 1991년, 전예원, 23쪽)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세째 형 박상희




출처: 박준홍 홈페이지 http://www.juno2007.co.kr/ 




 김일성의 부친(김형직)도 (양강도) 포평에서 동생 김형권의 이름으로 동아일보 지국 일을 맡아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도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비밀련락을 자주 다녔다. 언제인가는 포평주재소에 갇힌 애국자들에게 옷과 음식을 차입해준 적도 있다. 내가 제일 많이 다닌 집은 우편물 위탁소였다. 아버지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와 같은 신문 잡지들을 비롯하여 조선에서 발간되는 출판물들을 그 집에서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때 아버지는 형권 삼촌의 이름으로 동아일보 지국을 맡아 보았는데 수입은 따로 없었지만 신문은 그저 얻어 볼 수 있었다.”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65~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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