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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 124 : 시대를 앞서 간 여기자들(3) 최의순

Posted by 신이 On 10월 - 28 - 2011

화학을 전공한 미모의 최의순(崔義順, 1904~1969)


1928년 9월 학예부 기자, 1933년 8월 퇴사







  가부장적인 유교 관습이 뿌리 깊은 시대에 등장한 여기자들은 그야말로 ‘장안의 명물’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1928~1933년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근무했던 최의순은 뛰어난 실력 뿐아니라 미모로도 유명했다고 합니다.




* 장안 신사숙녀 스타일 만평, ‘삼천리’ 1937년 1월호, 106쪽  

 覆- 황신덕(黃信德)이고 최의순(崔義順)이고 김자혜(金慈惠)고 하는 부인기자들은 스타일이 어떤고?

卜- 여자 스타일이야 자네 같은 사내가 보아야 잘 알지. 초록동색이라고 내가 알 수 있나? 그러나 제 눈에 안경이라고 황신덕이는 양장(洋裝)하지 말 일, 김자혜는 차라리 날신한 몸에 유선형(流線型) 소질이 있은 즉 아모쪼록 양장할 일, 최의순이는 원체 바탕이 미인인데다가 걸음거리 곱고 뒷맵시 고와서 양장도 어울리고 검정치마 흰저고리 받쳐 입으면 여학생풍으로도 어울리고 머리 쪽찌고 긴치마 발뒤꿈치에 질질 흘리며 노랑갓신 받쳐 신은 고전적 아씨 되어도 어울리고, 아마 역대 부인기자 중 남버 원이야!




* 동아·조선·중외 3신문사 여기자 평판기, 별건곤 1929년 12월호, 18~20쪽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외일보 세 신문사에 부인기자가 각기 한분씩, 각 신문사 부인기자의 존재는 극히 몽롱하든 끝에 일제히 한분씩 뫼신 것은 신문독자로서도 극히 흥미있는 일이라고 하겟다.

부인기자의 활동하는 범위는 별수없이 가정방문이나 계속 기사로 가정 학예 방면에 국한되고 아직도 다른 나라의 그네들같이 진기한 통쾌한 재료를 골라낸다든지 기막힌 체험을 스스로 맛보아 일대 파문을 일으켜 놓는다든지-그러한 솜씨는 보이지 못하나 그래도 직업 중에도 가장 활력과 큰 용기를 가져야 지켜갈 수 있으며 사회의 제일선에 서서 악전고투하는 신문기자 노릇을 하는 아낙네가 세 신문사에 다 각기 한분씩 계시다는 것은 어쨌든 기쁘고 든든한 노릇이다. 

지금잇는 세 신문 중에는 동아일보 최의순(崔義順) 군이 제1구군이요 그다음이 중외일보사의 김말봉(金末峯) 군이며 제일 뒤진 분이 조선일보사의 윤성상(尹聖相) 군이다. 세분이 아울러 ‘미세스’인데 공통되는 견실성이 있으며 그의 학력에 있어서는 수염난 남기자들의 간담을 서늘케하는 굉장한 분들이니, 최의순 군은 동경여자고등사범 출신, 김말봉 군은 동지사대학 영문과 출신, 윤성상 군 역시 고등사범 출신으로 신문기자 노릇을 하지 않아도 넉넉한 살림을 할 사람들이 의논이나 한 것같이 일제히 팔을 걷고 나선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의순 김말봉 양군은 벌써 어머니 노릇을 한지 오래건만 윤성상 군이 아직 슬하에 혈육이 없으니 그것이나 손색이라 할가. 그러나 그러니만큼 젊고 꽃답다는 자랑 한가지가 그저 남아 있다. 

세 분의 키는 막상막하라면 아무 탈도 없겠으나 눈이 제일 크신 대신 키가 작은 분이 최의순 군이며 얼굴의 면적이 넓은 정도로 보아서는 김말봉 군과 윤성상 군에 공통성이 있으나 윤성상 군의 백옥같은 얼굴빛은 신문기자 노릇을 시키기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도 들고…(중략)…부인기자는 인기로 사는 여배우가 아니라 남편이 있다든지 아기가 있다는 것은 꺼릴 것이 없으나 누구에게든지 호감을 주고 붙임성 많고 그러고도 여자다운 데가 있지 않고는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며 이사람 저사람에게 재료를 얻기가 어렵다. 

이같은 점에 있어서는 최의순 군이 가장 유리한 성품과 용모를 비교적 많이 소유하였다 할지니 그에게는 타고난 애교가 있다. 곱슬머리에 눈이 반갑고 생글생글 웃는데 호의를 갖지 않을 수 없으며 큰 눈을 가련히 깜박이며 여성중에 여성같은 고운 소리로 차근차근히 수작을 풀어내는 데 당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체구가 좀 빈약한 듯하다. 그리하야 무게가 없어 보인다는 말씀도 듣지만 대신을 지낸다든지 중역 노릇을 하시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데까지 자격심사를 가혹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만큼 떠들어 놓으니 중외 조선 두 곳에 계신 분은 수효에도 끼우지 못할 것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럴리야 있슬 수가 없지. 경애하는 김말봉 여사의 조리있는 필치에는 중외 사회부장 정인익 군의 가장 경탄하는 바이며 때때로 심사가 좋으실 때이면 아리따운 노래를 읊으시어서 편즙국원들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도 특색의 하나이며 일즉이 악단에 이름을 날리신 일도 있어 아시는 분이 매우 많다. 고향에 아기가 있고 남편이 있고 가평이 있으나 그는 제일선에 나서서 팔을 걷고 활약하는 재미에 모-든 신변의 번루를 대담히 끊어버렸다. 이 용기만 가져도 기자 생애에는 큰 밑천이 될 것이다. 

세 분 중에 제일 얌전한 분은 윤성상 여사, 여사라기보다는  ‘미쓰’라고 부르고 싶을만큼 젊어 보인다. 분이야 바르든지 아니 바르든지 얼굴빛이 매우 희고 눈초리에 가을이슬같은 정기가 돈다. 좀처럼 말을 먼저 붙이지 못할 것같이 쌀쌀하야 보이는 분이다. 손결을 보와서는 노동의 신성한 줄은 익히 아시는 것 같으며 3.1운동 때에는 매우 분주히 지내신 분이라고 하나 대외적으로 과연 얼마나 활약을 하실지가 큰 의문이다. 그러나 의문인만큼 기대가 큰 것도 사실이다. 모를 때가 좋은 때다. 알고나면 별 수없다는 속담에 들어서는 우리 윤성상 여사가 가장 큰 재미를 준다. 

세 신문사 부인기자에게는 대개 남자기자가 한 분씩 딸려있다. 남기자에게 여기자가 딸려있는지 여기자가 남기자에게 딸려있는지 여기서 그것을 명언하고는 싶지 않으나 그러나 어쨌든지 만세 이전에 헌병에게 보조원이 따르듯이 학예부 주무자인 남기자에게 한 분씩의 부인기자가 딸려있는 것은 보아서 아는 바이다. 그러나 이같은 현상은 오래가지 못할 것. 부인 대의사가 있고 박사가 나고 나중에는 대신까지 난 이 세상에 부인기자인들 학예부장 영감노릇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니 남자기자들이여 크게 주의할 일. 

동아일보 학예부에는 얼굴 순후하고 말 곱게 하는 인격의 표본이라고 일컫는 이익상 군이 앉아서 “최의순씨 오늘은 판을 좀 짜아주시지요.” “네 그러지요. 머리에다가는 무슨 기사를 놓을까요.” 매우 구순하게 의논성스럽게 지낸다. 

조선일보사에는 염상섭 안석주 두 분이 나란히 앉아서 부끄럽다는듯이 고개를 숙이고 기사를 쓰는 윤성상 여사를 바라본다. “이것 좀 번역해주시지요.” 안석주 군이 겨우 입을 열면 “네!”하고 윤성상 군은 신문 오린 조각을 집어간다. 두 분이 함께 말이 적고 수줍은 터이라 그야말로 쌀쌀한 바람이 분다. 이 광경을 옆으로 보다가 기가 막히는 듯이 빙긋 웃는 염상섭 군의 가슴이야 어떠할런지. 

중외일보사에는 편집국을 등진 남쪽 창 앞에 좁은 책상을 나란히 놓고 남좌녀우의 고례를 거꾸로 잡아 앉은 두 분이야말로 문단에 이름 높은 최독견 군과 부인기자 감말봉 여사다. 불행히 이 두분은 취미가 서로 맞지 않는다. 최독견 군이 매고 오는 금빛 나는 넥타이가 김말봉 여사의 눈에 안들어서 이것으로 말썽이 여러날 계속 했다든가. 어쨌든 두 분이 아울러 수재인만큼 개성이 굳세게 나타나 때때로 재미있는 토론이 일어나 편집국 여러분은 돈 안내고 남녀토론회에 구경간 모양. 

어쨌든 앞으로 이 세 부인기자의 활동하는 정도는 대항하고 섰는만큼 높아질 것은 사실이다. 경성같이 신문기자의 활동할 구역이 국한된 곳에서 과연 이 세 분은 어떠한 방면으로 돌아서 어떠한 기발한 성공을 하실는지 그야말로 재미있는 구경거리이다.




  1932년 5월호 신동아에 실린 ‘여기자 좌담회’에서 전 동아일보 기자 허영숙과 당시 현직 기자 최의순은 사회생활과 가정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던 여기자들의 일상을 진솔하게 털어놓았습니다.






* ‘여기자 좌담회’, 신동아 1932년 5월호 87~95쪽




<출석자>

조선일보사 기자(전) 윤성상

동아일보사 기자(전) 허영숙

불교잡지사 기자(전) 김일엽

아이생활사 기자(현) 박은혜

여론사 기자(현)       조현경

부인공론 기자(현)    권유순

삼천리사 기자(현)    최정희

동아일보사기자(현)  최의순

<본사측>

설의식

주요섭

김자혜




<기자된 동기>

설의식=여러분 분주하신데 이처럼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무쪼록 거북스러운 태도가 없이 탁 터놓고 마음껏 말씀해주십시오.

허영숙=나는 공부는 의학공부를 했으나 처음부터 의학은 싫었고 문학에 취미가 많았었습니다. 그래서 기자가 되면 문학공부에 도움이 될까하고 생각해서 기자가 되었습니다.

최정희=저는 중앙보육학교를 마친 후 기자가 되었는데 사실인즉 나도 어렸을 때부터 문학에 취미가 많아서 창작 장난도 많이 해 보았지요. 그러나 집안 형편이 허락지 않아서 문학을 전공 못하고 있었습니다.

윤성상=나는 배운대로 바로 나갔지요. 그저 기자도 여자가 할 수 있는 직업이니까 해본 것이지 특히 선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방문(訪問)의 비결>

설의식=기자생활을 하시는 중 가장 괴로운 일 또는 가장 즐거운 일을 말씀해 주십시오.

윤성상=더욱이 가정부인 같은 이를 방문하면 어디 말을 해주어야지? 참 딱한 때가 많아. 그리고 학교방문이 제일 귀찮았어요.

최의순=가정부인은 사귀기는 쉬우나 말을 잘하지 않고 신여성은 퍽 까다롭습디다.

허영숙=나는 고아원 방문이 제일 인상 깊었어요. 그런 기관이 있는 줄 모르고 있다가 그것을 보니까 아주 별유천지(別有天地) 같더군요.

최의순=이렇게 말하면 내자랑 같지마는 내가 이때까지 방문에 실패한 적이 없었는데 꼭 한번 혼을 뜬 일이 있어요. 모씨를 방문 갔는데 마침 미리 전화를 걸지 못하고 찾아갔더니 방금 외출하여야겠다고 못 만나겠다고 딱 잡아떼겠지요. 그러나 기자로써 그렇다고 그냥 돌아온대서야 말이 되어요. 그래서 문밖에 서서 기다렸지요. 조금 있더니 모씨가 나오시는 고로 전차정류장까지 동행해오면서 간단히 내가 물으려던 말을 다 물어보았지요. 그때 어떻게 땀을 뺏는지 영 잊혀지지 않아요.




<남녀의 차별>

허영숙=여자가 절대로 남자보다 못하지 않지요. 물론 생리상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마는 일해가는 능률로 보면 조금도 차등이 없지요. 남자더러 집안일도 돌아보고 또 기자노릇도 해 보라고 해보시오. 할 사람이 있나? 그러나 여자는 그렇게 하지요. 그러니까 도리어 여자가 나은 셈이지요. 여자는 너무 눌리니까….

최정희=여자가 강해서 양보한 것이지. 남자들이 여자의 환심을 사려고 제각기 여자를 벌어 먹이겠다고 날뛰니까 자연 경제권이 남자에게로 가게 된 것이지요.

윤성상=교육의 불평등 사회제도의 결함 등 때문이지요. 분업적으로 본다면 여자에게는 제2세 국민을 낳고 또 양육한다는 천직이 있으니까 도리어 더 우월하지요.

허영숙=나는 가정을 가진 여자로써 사회적 활동은 불가능한 줄로 압니다. 가정일만으로도 여자는 시간이 부족한데.

김일엽=나는 거기 반대입니다. 여자라고 가정에만 매여 있으리라는 것은 나는 반대합니다. 자녀생산은 부득이 여자가 책임을 지겠으나 그 양육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여자도 사회로 나와서 활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정이라는 것은 범위가 너무 좁아서 그 안에서만 꼬물거리면 언제나 여자의 지위는 향상될 가망이 없습니다.

윤성상=현시에는 여자더러 가정도 돌보고 또 사회일도 하라고 강요하는데 그것은 무리입니다. 현 사회제도가 나쁘기 때문이에요. 새로운 사회제도가 생긴다면….

허영숙=그러나 여자는 생산을 해야 하는데 그때에는 몇 달씩 쉬어야하니 어떻게 남자와 같이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어요?

윤성상=내 말은 양으로는 다르지마는 질로 보면 꼭 같은 줄 압니다. 생산기에 누워있는 그 기간은 내놓고 건강할 때에 사회에 나가서 일할 때에는 어린애만 길러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활동의 질이 남자보다 조금도 못할 것이 없습니다.




<연애와 정조>

허영숙=하필 왜 나더러 연애의 정의를 내리랍니까?

최정희=연애대가(戀愛大家)니까!

김일엽=아니요. 연애대가는 여기 있습니다. 아마 내가 이 좌중에서는 연애대왕일걸.(웃음소리)

허영숙=연애의 정의를 내리자면 이러합니다. ‘정신과 육체가 건강한 남녀가 미래에 결혼을 목적하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김일엽=연애란 누가 통괄적 정의를 내린 사람도 없고 또 내릴 수도 없지요. 사람은 언제나 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동물인데 그 사랑의 대상을 두루 찾다가 가장 마음에 드는 이가 나서면 전(全)사랑이 그리로 쏠리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간혹 사랑의 대상을 잘못 택하는 수도 있는데 그것은 곧 사랑의 실패이지요.

윤성상=정조가 어디 육체에만 국한되었나요? 정신적 정조는 어찌하고?




<독신과 이혼>

허영숙=(독신생활은) 여자가 쉽지요. 현 사회에서는 남자는 독신생활하기 어려운 자극과 유혹이 너무 많으니까요. 여자는 생리적으로 두려움도 있고 하니까 웬만해서는 깨뜨리지 않지요.

윤성상=이혼해야할 경우가 되거든 자녀유무를 불구하고 갈라서는 것이 좋겠지요. 더욱이 아이들을 밤낮 싸움만 하는 가정에서 기르는 것보다 둘이 갈라나서 따로따로 기르는 것이 자녀교육상에도 좋겠지요. 그러나 조선에는 자녀들 때문에 살기 싫은 것을 억지로 사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의복과 오락>

허영숙=머리가 가려워서 깎아버렸더니 시원하고 좋아요. 경성 안에 단발한 이가 10여 명만 있대도 나는 모자를 벗고 다니겠어요. 나는 깎았지마는 머리 깎는 것을 찬성할 수는 없어요. 거리에 나다니기도 창피하고 어디가나 무슨 배우나 그런 사람으로 보니까요.

최의순=짙은 것이 아니라 간색(間色)을 많이들 입지요.

김일엽=미감이 발달되어서 어울리는 색을 택하는 것이지요.

최정희=축음기가 있으면 가만 앉아있어도 좋지요.

윤성상=가야금을 배웠으면 좋겠어요.

최의순=나는 방아타령을 배웠는데 잘 안되어요.

윤성상=남자들도 화장을 많이 하는데요. 분 바르는 남자도 있습디다. 모던 뽀이들.

김일엽=여자가 깨끗이 차리지 않으면 게으른 것 같아서 보기 싫어요. 그러나 또 너무 현란하게 차리는 것은 더 보기 싫지요.




<타도 남성!>

윤성상=현 사회제도가 남자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는 것을 이용하여 젠 척하고 뽐내지요.

허영숙=음흉하고 무정하고 술 잘먹고 게으르고…

김일엽=아아 이 선생님이 그러신 게지! (웃음)

허영숙=아니야. 그이는 음흉하지는 않아.(웃음)

조현경=기차 안에서 옆에 앉거나 마주 앉아서 담배 피우는 것이 참으로 밉습디다. 싫어하는 기색을 보면 더 피우지요.

박은혜=많이 먹고 사실 취해서 그런다면 좀 낫지요. 그냥 건성으로 술은 취하지도 않고 취한체하며 못되게 구는 것은 참으로 눈꼴 틀려요.

권유순=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일부러 놀라게 하거나 또는 공연히 종을 자꾸 울리는 것도….

허영숙=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박정자(여의사-인용자 주)가 한번 학교로 가는데 마침 눈이 와서 머리에 눈을 하얗게 맞으며 가더래요. 어떤 학생이 지나가다가 ‘꽃 위에 꽃이 피였군’하고 히야까시를 하더래요. 그래서 홱 돌아서면서 ‘네 할머니라고 그래라’ 했더니 그만 ‘에, 무섭다’하면서 뺑소니를 치더래요. 또 전차 안에서 불 꺼지면 손목을 잡는 놈도 있대요.

윤성상=일본에 비하면 조선은 그래도 군자국(君子國)이지요. 일본서 아침에 학교 갈 때 성선(省線)을 타고 가노라면 별 데로 손이 막 들어오는데.

최의순=최은희(전 조선일보 기자-인용자 주) 같은 이는 남자들을 막 해대인답니다.

김일엽=윤심덕이도 그랬지요.

최의순=윤심덕이는 그래도 침울한 때가 있었지만 최은희는 언제나 괄괄했어.  




  일본 동경여자고등사범학교에서 당시 여성으로서는 이례적으로 화학을 전공하고 귀국한 최의순은 입사 전부터 유명인사였습니다.






1927년 5월 11일자 3면




여자계의 새인물을 찾아

조선여자로서 화학전문은 처음

간단없는 연구를 해보려고 노력해

동경여고사(東京女高師) 최의순


최의순 씨는 경성 출생으로 일즉이 현해탄을 건너 대판(大版)에 가서 고등여학교를 졸업한 후 동경으로 가서 동경여자고등사범학교 이과 화학부에 입학하여 이래 4년동안 연구하여 금춘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귀국하여 5월 1일에 휘문고등보통학교 교유 진장섭 씨와 결혼하였다는데 청량리 124번지에 유숙하고 있는 씨는 방문한 기자를 향하여 “화학을 전문하였습니다마는 아직 교편은 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몸이 너무도 약하니까 정양하는 한편 번역 같은 것이나 좀 해보고 완쾌되면 곧 여러분과 같이 일하겠습니다. 지금 생각으로는 여성잡지를 하나 해볼까 합니다마는 여러분의 협력이 없으면 도저히 할 수 없을 것입니다.(하략)”라고 하며 고요히 시선을 보내는 씨는 사람을 취하게 할만한 마력을 가진 눈의 소유자이었습니다.




  여성잡지를 만들고 싶었다는 최의순은 1928년 9월 동아일보에 입사해 신문기자가 되었습니다. 여성의 사회활동에 제약이 심했던 시대였지만 최의순은 적극적인 현장 취재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는 1928년 12월 13일부터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 등 사회 각계 저명인사들을 인터뷰한 ‘서재인 방문기’를 12회 연재했습니다.






1928년 12월 13일자 4면




서재인(書齋人) 방문기 (1)

보전 교수 홍성하(洪性夏) 씨

이론 경제에서 실제 경제로

여성의 사치 느는 것이 걱정

부인기자 최의순






1928년 12월 15일자 4면




서재인(書齋人) 방문기 (3)

춘원 이광수 씨

독서보다 명상

근일에는 겨우 단종애사의 집필

부인기자 최의순






1928년 12월 17일자 3면




서재인(書齋人) 방문기 (6)

육당 최남선 씨

반날을 서재에서만

여성의 천직을 다함이 제일책

부인기자 최의순




  그리고 최의순은 1929년 1월 1일 신년호에 ‘10년간 조선여성의 활동-배태기에서 활약기에, 활약기에서 다시 침체기로’라는 제목으로 조선의 여성운동사를 정리하는 기획기사를 실었습니다. 이 기사는 1월 3일까지 총 3회에 걸쳐 게재되었습니다.






1929년 1월 1일자 부록 1면




10년간 조선여성의 활동(1)

배태기에서 활약기에

활약기에서 다시 침체기에

부인기자 최의순


(전략) 조선의 여성도 이중삼중의 종속과 압제 아래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생명없는 생활을 거듭하였으며 더욱이 세계 여성과도 또다른 불행한 사정을 가지고 있음으로 문명의 혜택과 변천의 의식을 오로지 차지할 수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과거 10년간 조선엔 사회 진화가 정당하게 진행 발전하지 못하였으므로 따라서 일반 조선부인들이 자기를 위주로 하는 인간운동을 아무리 고조하였으나 이상의 현실을 아직도 못 구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근 40년 전부터 암암리에서 소극적으로 갈망해오던 것만큼 그들의 희망은 최근 10년간에 많이 사실화 되었다고 단언할 수 있겠습니다.






1929년 1월 2일자 13면




10년간 조선여성의 활동 (2)

배태기에서 활약기에

활약기에서 다시 침체기에

부인기자 최의순


거듭 말하면 조선 부인은 여러 관계로 너무도 부자연하고 무리막심한 환경에 처하였었지만 그 고통이 컸던 것만큼 부인운동열이 고열도이였으며 옆에서 바라보기에 위험일만큼 가속도로 사상경향이 변천되었습니다. 이때에 구체화한 결실은 많지 못하였다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다만 우리는 이제부터의 즉 미래의 부인운동으로 좀더 이상화하기 위하여 대전 이후 과거 10년간 조선부인의 운동 역사를 살펴볼 생각이 북받쳐 일어날 뿐입니다.(하략)






1929년 1월 3일자 9면




10년간 조선여성의 활동 (3)

배태기에서 활약기에

활약기에서 다시 침체기에

부인기자 최의순




  최의순은 수필 잘쓰기로도 유명했습니다. 동아일보와 잡지 ‘신동아’에서 그의 수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933년 6월 11일자 5면




여름의 미각(味覺)

최의순


뱃속 밥주머니가 비면 동리집 국끓는 냄새에도 정신이 아찔해진다. 몸의 땀구멍이 열리고 갈증이 돌기 시작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물로만 보인다. 먹고 싶은 마음은 사러 갈동안 온갖 재주를 다 부리게 한다. 한창 걸은 때―출출할 때 더구나 온몸이 더위에 배었을때 겨우 얻어먹은 냉수 몇 모금은 당장 눈까지 밝아오게 할 것이다.(하략)






신동아 1931년 11월호 89쪽




소경(小景)

신가정풍경(新家庭風景)

그들의 하루동안

최의순


전등불 앞에 앉아 머리를 빗고있는 아내의 자태는 새벽동산의 여신과 같이 윤택해보인다. “여보, 지금 하늘에 별이 몇이나 남았을까?” “아이고 듣기 싫어요. 너무 일찍 일어나 떠든단 말씀이지요?” 하며 아내는 그대로 자리위에 누워있는 남편의 아직도 잠에 취한 눈을 미운듯 똑바로 치어다보았다. 차가움을 끼치는 아내의 시선을 오래간만에 받아본 그는 당장 어제밤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아내와 약속한 시간보다 한시간쯤 늦게 돌아온 일 외에는 다른 노염을 살 일이 없었던 까닭이다.(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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