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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웃음이 없던 시절, 웃음을 그린 일송 최영수(一松 崔永秀).


  “최영수의 만화는 1930년대가 그 전성기였다. 그의 작품은 신문을 통해 유명세를 탔지만, 잡지라는 발표무대를 통해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다. 다양한 장르의 만화창작은 물론 다수의 만화관련 이론을 잡지매체에 발표했기 때문이다. 최영수 만화를 들여다보는 일은 그래서 1930년대 우리 만화사의 한 단면을 되짚어보는 일이기도 하다.” (손상익 만화평론가, 한국만화통사, 프레스빌, 1996년, 314~315쪽)


  경기도 안성 출생으로 일본의 가와바타미술학교(川端畵塾)에서 공부한 일송 최영수가 동아일보 지면에 등장한 것은 유학생으로 고향에서 활동할 때입니다.


  “안성학우회 조직-이재효 김제영 서병각 김종욱 조성업 최영수 박용삼 제군의 감상담이 잇슨 후….” (‘유학생의 회합’, 1928년 8월 8일자 4면)


  “안성읍내 면려(勉勵)청년회 주최 웅변회는 거 9일 오후 8시 서리 예배당에서 민홍식 씨 사회로 개최하였든 바… 박용석, 김종욱, 최재영 이창섭, 주장성, 최영수 등 연사가 강연중 임석 경관으로부터 이창섭 최영수 양군의 강연은 논지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중도에 금지하였다는데….” (‘웅변회 재금지’, 1928년 8월 13일자 3면)


  최영수는 1933년 6월 동아일보 자매지 ‘신동아’에 입사하기 전 고향에서 동아일보 안성지국 기자로 활동했습니다.


  “이 미산리(美山里)는 양잠(養蠶)뿐만 아니라 제사, 제탄 등등의 부업이 대규모로 실시되어있음으로 겸하여 소개하고자한다.” (안성지국 최영수, ‘양잠(養蠶)모범촌인 미산리 답사기’, 1931년 4월 21일자 5면)


  이때 최영수는 스케치 기행에 나서 ‘군산을 다녀와서’(1931년 9월) ‘송도를 차저서’(1931년 10~11월) 같은 연재물을 싣습니다.


   “지국장의 권(勸)함을 바더 군산시찰(群山視察)의 길을 떠나기는 팔월 십오일! 홍염(紅炎)이 끓어오르는 날이었습니다. 이 제 각종탐사, 조사, 답사의 기록은 다음으로 미루고 우선 스케치 몇장과 아울러 소조(蕭條)한 추풍과 같이 선물로 바칠까하나이다.”(1931년 9월 8일자 5면)


  “필자가 동아일보와 연분이 없음을 개탄하였더니 윤씨는 필자에게 기자되기를 청하므로 승낙한 것이 필자가 본보와 인연을 맺기 비롯한 것입니다.…소화 4년 4월 1일부터 임씨는 사면하고 필자의 단독경영으로 되엇음니다. 그동안 외무원 한용덕(韓用悳), 기자 우종안(禹鍾安), 최영수(崔永秀) 제씨가 다년간 폐지국을 위하야 공헌이 많음은 감사하는 바이나…” (김태영<金台榮> 안성지국장, ‘20년을 회고하며’, 동아일보 1940년 6월 25일자 4면)


  “필자는 동아일보 분국 지국을 관계하는 동안에 많은 도움을 아끼지 않던 당시 명망가 박태병(朴泰秉) 박화병(朴華秉)…기자 최영수씨는 뒤에 본사기자로 또 다른 신문사 기자로 언론계에 공헌이 많은 분인데…” (추수 김태영<秋水 金台榮>, ‘지방에서 본 동아 45년’, 동우 1965년 4월호 24쪽)


  그는 그후에도 사생화를 짧은 글과 함께 연재합니다. 1932년 그의 기행문은 막막하고 답답한 현실을 한탄하고 안타까워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습니다.


  최영수는 ‘한양춘색(漢陽春色)’(1932년 3월 18일~3월 30일)이란 제목으로 글과 삽화를 7회 연재합니다.


  “헐리어진 헐리어가는 성지(城址)에 춘양(春陽)의 사선(斜線)이 나려 쪼여 잔디 우에 봄빗이 물들어간다…춘궁(春窮)에 울던 토막민의 애달픈 소리도 이제는 찾을 수 없으니 한강수의 봄 소식은 무엇을 상징함일까?…북한산 및 토막민을 바라보니 단장(斷腸) 알바 없으니 내 가슴만 답답(畓畓).” (‘한양춘색-성지(城址)의 춘색’, 1932년 3월 18일자 5면)


  “쫏김의 선구자 광화문에도 춘광이 나려 쪼인다. 전날의 영화를 추상하면서….” (‘한양춘색-광화문’, 1932년 3월 24일자 5면)


  최영수의 ‘도회(都會)의 비가(悲歌)’ 연재는 ‘기픈밤 어둔 거리에 구슲다! 야끼모 소리’(1932년 12월 6일), ‘밤거리에 사모 치는 어린군밤 장수의 넉’(12월 7일), ‘환락과 비애의 쌍선(雙線)에 우는 여급일기’(12월 8일), ‘항가(巷街)로 범람하는 실업군(失業群)의 한숨, 절규’ (12월 11일) 등으로 역시 우울한 주제입니다.


 최영수는 이즈음 동아일보와 신동아에 본격적으로 만화를 싣습니다.


  “신동아에 실렸던 토막만화로는 ‘벼룩퇴치’와 ‘월급날은 서러워’(1932.11.)를 비롯해 ‘실업자와 양산’(1934.6.), ‘어쩌라구 깽깽’(1934.11.) ‘용두문미’(1934.11.) 등이 있다.”(손상익, 한국만화통사, 315~318쪽)


  동아일보 1932년 4월 1일자 4면부터 실리기 시작한 ‘복남의 탐험기’는 아동연재만화입니다.


  동아일보 문예면에 실은 최영수의 ‘전억망 일대기(一代記)’(1933년 10월~12월)는 성인연재만화입니다.  


  “일송 최영수 작화, 작가로서-세상에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돈과 사랑이요, 넘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비애와 모순일 것이외다. 그리하여 돈과 사랑에 굶주리고 비애와 모순의 상처를 받은 인생이라고 하는 가련한 병자는 바야흐로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것이외다. 그것을 통털어 이르되 ‘야릇한 세상’. 여기 ‘전억망’이라고 하는 만화적 가상인물을 하나 내세우고 그의 일대기를 그리어 그것으로 그 ‘야릇한 세상’을 해부하여 거기에 웃어운 때 한번 웃고 서러운 곳에 일적(一適,종지 그릇만큼)의 눈물을 흘려보려는 것이 이 만화의 목적입니다.” (연재만화 ‘전억망 일대기’ 예고, 동아일보 1933년 10월 2일자 4면)


1933년 10월 5일자 3면, 연재만화 전억망-실업편




 최영수는 만화 ‘얼간선생’(1935년 10월~12월)과 ‘뚱단지 영감님’(1938년 3월~6월)도 동아일보에 연재했습니다.


  “과감히 여성을 만화의 주인공으로 채택한 선구자적 만화작가가 최영수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한국 최초의 순정만화작가로 꼽아도 손색이 없다.…신동아 1932년 10월호에 실린 최영수 만화 ‘남이 조와하는 여자’는 반페미니즘 경향을 드러낸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최영수의 여성관은 신동아 1935년 5월호에 기고한 ‘그 여자’란 제목의 글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1932년 6월호 ‘서정어화’를 비롯해 1933년 7월호 ‘일인일미 미혼남녀 레뷰’, 1933년 10월호 ‘알고도 모를 여자의 마음’등이 그것이다.”(손상익, 한국만화통사, 315~318쪽)


  최영수는 자신의 문학적 소양과 필력을 과시할 수 있는 ‘만문만화(漫文漫畵)’에 특히 관심이 많았습니다.


  최영수는 1933년 4월 문화(文畵)를 모두 맡아 ‘봄이 쓰는 만문(漫文), 봄이 그리는 만화(漫畵)’를, 1934년 3월과 4월에는 만문만화 ‘춘광점묘(春光點描)’를 동아일보에 연재했습니다.


  “봄을 맞는 젊은이의 가슴을 결코 심상치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금강으로 봄맞이를 온 것도 그것은 오로지 내 마음의 빈 한구석을 채워보려 함이었다. 한 사나이가 사랑하는 한 여자에게서 배반을 당할 때 그의 마음동산에는 눈물의 싹이 돋는 것이오, 주검을 동경(憧憬)하는 이상한 심정이 떠도는 것과 같이 금강영봉(金剛靈峰)으로 봄을 찾아 지금 늙은 잣나무 밑에 지극히 궁한 호흡을 짓고 있는 나의 가슴에는 그렇게 거룩한 봄도 그렇게 정다운 봄바람도 오히려 눈물의 꽃을 피게 하고 주검의 동경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중략)…바른편으로 삼일포를 격 (隔)하야 해금강의 물결소리가 철서덕-왼편으로 팔선봉의 위엄한 자태에 스스로 고개를 숙이면서 차는 혹은 밭을 지나면서 모든 아름다운 풍경을 역력(歷歷)히 보여준다.” (‘춘광점묘’, 1934년 4월 6일자 3면)


1934년 4월 6일자 3면, 춘광점묘




  일송 최영수는 만화관련 이론을 신동아를 통해 설파하기도 했습니다.


  “약간 오래된 것을 들추어보면 ‘멍텅구리’(조선일보) ‘허풍선이’(동아일보) ‘엉터리’(동아) ‘정수동’(중외일보) ‘구리귀신’(시대일보) ‘뚱뚱이 말러꽹이’(중외) ‘박문수’(중외) 등의 연재만화가 있었고 동아일보의 ‘동아만화’와 조선일보의 ‘철필만화’란 시사만화란이 있어 계속 발표하였으며 그 외에 수개의 아동만화가 연재되었었다.…(중략)…조선의 저널리즘이 먼저 만화를 알고 또 저널리즘이 가져야할 만화와의 동반성을 잘 인식하는 동시 세계 저널리즘과의 만화대세를 실피어 거기서 조선 저널리즘이 가져야할 정도를 깨달아 그 깨달은 바를 하루바삐 이루어야할 것” (‘조선신문만화의 과거 현재 급(及) 장래’, 신동아 1934년 5월호, 97~98쪽)




 최영수는 신동아소속이었지만 계속 동아일보에 기사와 그림을 실어 1934년 8, 9월에는 다도해의 여러 섬을 다니면서 본 풍경을 ‘다도해순범(多島海 巡帆)’이란 이름으로 스케치합니다.


  최영수가 1935년 6월 병을 얻어 요양 생활을 하러 간 석왕사에서 자신의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으로 글을 쓴 ‘자연의 요람에서’ 중 중(中)과 하(下) 편에 스케치 형식의 삽화를 함께 실었습니다.


  최영수는 1935년 8, 9월에도 계속 동아일보에 만문만화 ‘추광곡(秋狂曲)을 연재했습니다.


  “신문연재를 통해 유행하기 시작했던 만문만화(만화만문)는 1930년대 들어 잡지 쪽에서도 연재붐을 일으키게 된다. 이의 선두에 선 작가가 바로 최영수였으며 문화(文畵) 모두에 능했던 그에게는 이상적인 창작장르였다. 때문에 그는 이시기의 언론매체를 통해 최고의 만문만화 작가로 인기를 끌었다.…신동아에 실린 최영수의 만문만화는 1934년 8월호 ‘한양우물타령’을 비롯해 ‘만춘변주곡’ (1936년 5월호) ‘학교는 눈물이런가? 한숨이런가?’ (1936년 6월호), ‘하숙구걸행장기’ (1936년 7월호), ‘빈대타령’ (1936년 9월호) 등이 있다.…‘하숙구걸행장기’에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에 겪었던 실업자 시절과 동아일보 재직시 5년간에 걸친 서울하숙생활의 애환을 묘사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 글에는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 동료였던 주요섭과 함께 하숙집 구하는 광고를 신문(조선일보)에 냈던 에피소드, 4개월마다 한번 꼴로 이사를 다녀야했던 비참한 하숙생활의 실정 등을 적고 있다.…신동아에 발표된 최영수의 만화만문은 ‘제-발 빕니다’ (1933.2.)를 비롯해 ‘이때가 오면’ (1933.3.), ‘아깝지 않습니까?’ (1933.4.), ‘이런 의술이 생겼으면’ (1933.6.), ‘1940년의 여름’ (1933.8.) ‘유행은 그녀를 울렸습니다’ (1933.11.) ‘세모풍경’ (1933.12.), ‘한강어부기담’ (1934.2.), ‘세기말적 풍경’ (1934.6.), ‘고서(苦署)! 고소(苦笑)!’ (1934.8.), ‘금광(金鑛)! 금광(金狂)!’ (1934.9.), ‘치통행진곡’ (1934.10.), ‘만화자가 본 세상단편’ (1935.2.), ‘신춘소보’ (1935.4.), ‘통계유언’ (1935.5.), ‘백화점 풍경’ (1935.6.), ‘세모잡경’ (1935.12.)등이 있다.” (손상익, 한국만화통사, 318~323쪽)   




1936년 1월 1일자 23면, 스포츠 조선의 세계적 등장과 제패의 쾌기록조감




 최영수는 1935년 말 신동아를 떠난 뒤에도 동아일보 기고를 계속했고 해방 후 경향신문에 시사만화를 그리기도 했으나 6.25 때 납북됐습니다.


 “문(文), 화(畵) 최영수-일년에 한번 여름이 오고 여름이 오면 덥다는 것은 사람이면 다 아는 것이라 치드라도 그러타고 사람이면 누구나 피서를 해야한다는 법칙…” (‘해수욕장풍경(1)’, 동아일보 1936년 8월 5일자 7면)


  “문(文), 화(畵) 최영수-수평선, 해안선, 여긔에 반라곡선…” (‘피서지통신 11’, 동아일보 1937년 8월 10일자 8면)


  1962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납북인사북한생활기.


 “금천을 거쳐 해주에 도착하자 이미 해주 중학 안에는 무명납치인사들로 꽉차있었다. 8월17일 밤 11시쯤이었다. 미리 모의를 한 50여명의 무명인사들이 유리창을 부수고 경비원의 입을 틀어막아 질식시킨 후 뒷쪽 산등으로 도망을 쳤다. 비상소집으로 급거 동원된 인민군 경비대원들은 공포를 마구 쏘며 시내는 물론 야산 일대와 해변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하였다. 새벽녘 그 중 20명이 붙들리고 해변에서 3,4명이 사살되었으머 나머지 전원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날이 밝자 인민군경비대장은 8백여명의 피납무명인사들을 모아놓고 붙잡아온 20명에 대한 군중재판을 열었다. 사전에 이미 군중 속에는 그네들의 푸락치가 배치되어 있었다. 주모자급 5명에 대해 ‘옳소!’식 재판으로 총살형이 언도되고 나머지십 5명은 징역형이 언도되었다. 총살형이 언도된 5명의 무명인사중에는 하문진(河鎭文,변호사) 박윤선(朴允善,중앙청과장) 최영수(崔永秀, 기자)등이 끼어 있었다.” (내외문제연구소제공, ‘죽음의 세월-납북인사북한생활기’, 동아일보 1962년 4월 2일자 2면)


 

“다재다능했던 최영수


일송 최영수(一松 崔永秀)형을 내가 마지막 본것은 6.25때 어느 뒷골목 으슥한 술집에서였다. 눈을 피해 싱검털털한 막걸리 한사발씩을 나눈 후 헤어지는데

“몸조심 합시다.”

이것이 나에게 준 그의 간곡한 작별인사였다.

일송형은 내 고향의 선배며 나와는 처남매부간이다. 남달리 두터운 사이였다. 그는 다재다능한데다 다정다감한 사람이다. 정들기 쉽고 정들면 끝내 잊지 못하는 결연을 맺게 해주는 사람이다. 그는 청춘기를 동아일보사에서 월간잡지 ‘신가정’을 편집하는데 보냈고 6.25 직전까지는 경향신문사에서 ‘신경향’ ‘부인경향’을 편집하고 있었다.

그의 수필집 ‘곤비(困憊)의 서(書)’에서 그는 고백 비슷한 편집자의 신세한탄을 하였는데 문득 그가 그리워 질 때는 읽어보며 나는 서글픈 감회를 이기지 못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의 옛집인 동아일보사가 건재하고 그의 정든 집인 경향신문사가 또한 건재할 뿐만 아니라 그의 맏아들이 고등학교를 나와 아버지의 뒤를 이으려는지 아버지가 일하던 경향신문사 문화부에서 일을 배우고 있다. 숙명의 사진(寫眞)틀을 어떻게 어디다 버리고 지금쯤 어디서 그리움에 지쳐 쓰러져 있는가.” (소설가 이봉구<李鳳九>,‘6.25에 생각나는 사람들’, 동아일보 1962년 6월 25일자 4면)





                           최영수






  한국인 최초로 동경미술학교에 정식으로 입학한 서양화가 청구 이마동(靑駒 李馬銅). 


  청구 이마동이 동아일보에 등장한 것은 휘문학교 재학중입니다.


  “시내 종로경찰서는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오전 9시경부터 고등계형사 전부가 시내 각처로 출동하야 휘문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맹휴생의 주모자라고 인뎡되는 리마동(李馬銅) 이하다섯명을 잡어다가 흑소(黑沼)경부보 이하 부댱 수인이 취조중인데 이 구속은 맹휴에 찬성치 아니하나 부득이 폭력에 눌리워…등교치 못한다는 투서 7장을 받고 그 폭행자는 구속함이라더라” (‘경찰에서 방해자검속, 다섯명을, 휘문교 맹휴여파’, 1924년 9월 1일자 2면)


 “그는 중앙, 휘문, 보성, 중동학교에서도 미술을 가르쳤는데 이때 그에게 그림을 배운 제자로는 장발, 이마동, 안석주 등이 있다.” (김영나 서울대 고고미술학과 교수, ‘고희동, 건국 활동에 앞장선 근대 화단의 거두’, 한국사 시민강좌 43호, 일조각, 2008, 310쪽)


 청구는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해 후지시마 다케지(藤島武二) 등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동경미술학교-(서양화과) 이마동(충남)” (‘금춘(今春)졸업할 일본유학생’, 동아일보 1932년 2월 6일자 7면)


 “그중 조선인 특선은 동양화에 리상범(李象範), 백윤문(白潤文),량씨이오 서양화에는 리마동(李馬銅), 리인성(李仁星), 최연해(崔淵海)의 3씨, 공예품에는 이남이 등 전부 6씨이다.” (‘제11회 미전에 조선인 특선 육명’ 동아일보 1932년 5월 27일자 7면)


 “최근 창립된 미술가단체 목일회에서는 금 5월 16일부터 4일간 종로 화신 누상에서 소전람회를 열고….”(‘목일회 소전’, 동아일보 1934년 5월 16일자 3면)


 “1930년을 전후하여 나날이 많은 화가들이 동경에서 또는 국내에서 서양화를 연구하였는데 1935년에는 미술동인회 목일회를 결성하였고 이에 참가한 사람은 이종우 이병규 이마동 공진형 구본웅 황토수 등 8명으로 이것은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고 말았다.” (미술평론가 이경성, 한국근대미술연구, 동화출판공사, 1975년, 101쪽)




  동아일보에 입사한 뒤 청구 이마동의 첫 삽화는 장혁주(張赫宙)의 장편소설 ‘삼곡선(三曲線)’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1934년 9월부터 1935년 3월까지 122회 연재됐습니다.


 “삽화는 청년 양화가로 미전(美展)에 특선은 물론 조선화단에 이채적 존재인 우리의 화가 이마동(李馬銅))씨의 새로운 정취, 아담한 필촉으로 그려질것이니 실로 금상첨화의 애독품이 될 것입니다.” (장편소설 ‘삼곡선’ 예고, 1934년 9월 19일자 2면)




1934년 9월 26일자 6면, 삼곡선(三曲線)






 “그 뒤를 이어서는 주요섭(朱耀燮)씨의 장편소설 ‘구름을 잡으려고’가 청구 이마동(靑駒 李馬銅) 화백의 삽화와 아울러 지면을 빛내게 되엇습니다.” (연재소설예고, 1935년 2월 16일자 2면)


  주요섭 작, 이마동 화 ‘구름을 잡으려고’는 1935년 2월부터 8월까지 156회 연재됐습니다.


  이무영(李無影)의 장편창작 ‘먼동이 틀 때’는 1935년 8월부터 12월까지 동아일보에 132회 연재됐지만 청구 이마동이 삽화를 담당한 것은 1회부터 44회까지입니다.


  “이무영씨의 장편창작 ‘먼동이 틀 때’는 이마동(李馬銅)씨의 삽화와 아울러 연재되게 되엇습니다.” (장편소설예고, 1935년 7월 27일자 2면)


   김말봉의 장편소설 ‘밀림’의 삽화에도 청구 이마동이 참여했습니다. 청전 이상범의 뒤를 이어 1935년 10월 10일자 13회부터 1936년 4월 14일자 132회까지 삽화를 그렸습니다.


 주요섭의 장편소설 ‘길’은 1939년 9월 6일자부터 1939년 11월 23일자까지 61회 연재됐는데 청구 이마동이 삽화를 맡았습니다.


  청구는 당시 유행한 사생화도 동아일보에 그렸습니다.


 동아일보 1934년 10월 4일자부터 10월 20일자까지 총 11회 가을 풍경을 그린 청전 이상범의 ‘추일잡제(秋日雜題)’ 중 제2화 ‘벽공(碧空)’은 청구의 작품입니다.


1934년 10월 5일자 3면, 벽공






  서울의 곳곳을 돌아보고, 그 풍경을 스케치한 청구 이마동의 ‘서울풍경’ 삽화는 1935년 6월 25일부터 7월 27일까지 총 15회 연재됐습니다. 특히 6월 25일자부터 29일자까지의 삽화는 동아일보사 본사 옥상에서 각각 서울의 동쪽, 남쪽, 서쪽, 북쪽을 바라본 경관을 스케치 한 것입니다.


 “서울은 선미(鮮美)한 풍광 명랑한 하늘로 화인(畵人)의 귀염을 받는 곳. 스케치북을 들고 거리로 나서며 우선 동을 바라보고 한 장.” (‘서울풍경-동을 바라봄’, 1935년 6월 25일자 3면)


 “본사옥상에서 외외(巍巍)한 수봉(秀峯) 북악을 조망할 수 잇음은 한 큰 기쁨이다. 서울은 이 산 아래에서 길리어 낫다. 기쁨과 슬픔이 교지(交至)하는 이 산아래의 사화(史話)에 지금의 사녀(士女)는 한루(恨淚)도 흘린다.” (‘서울풍경-북을 바라봄’, 1935년 6월 29일자 3면)




1935년 6월 29일자 3면, 서울풍경






  청구는 동아일보와 자매지 신동아, 신가정에 미술기사를 쓰기도 하였습니다.


 “‘신동아’ 편집실은 3층에 있었다. 서향으로 큰 거리가 내다보이며 멀리 무악재 고개가 보인다. 기자로는 고형곤(高亨坤) 씨와 최영수(崔永秀) 씨 두 분이 있었다. 고 씨와 나는 주로 편집일을 보게 되었고 최 씨는 만화를 맡게 되었다. 사진은 신문과 공동으로 쓰게 되었고 삽화는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노수현(盧壽鉉), 이마동(李馬銅) 세 분이 담당하게 되었다.” (최승만<崔承萬>, 나의 회고록, 인하대출판부, 1985년 285쪽)


 “춘곡 고희동씨, 심산 노수현씨, 청전 이상범씨 등 건재하여 역작들을 보여주심은 기꺼운 일이며 심산 노수현 씨 작 ‘영춘’과 청전 이상범씨의 ‘소림’은 동양화부장 중 백미일 것이다.” (이마동, ‘협전을 보고<중>’, 동아일보 1935년 10월 26일자 3면)


 “전날에 여류작가로 이름 있던 나혜석 여사의 개인전람회가 10월말에 조선관에서 다수한 작품을 진열하였다. 그러나 여사의 전날의 화려하던 꿈자취는 찾아볼 길 없었고, 오히려 그 작품을 대하지 않았던들 옛날의 기억이 남았었을 것을 하는 이상한 감을 느꼈다.” (이마동, ‘잘가거라 을해년아-을해 1년간 여성화단 회고’, 신가정 1935년 12월호)




  청구는 달변가 애주가에 ‘환하게 터진 밝은 성질’(화가 김용준의 평)을 가졌다고 합니다.


 “벌서 여러해 전입니다. 내가 졸업기념 전람회에 출품을 하려고 작품을 제작하던 때 일이니까요. M이라는 동창생과 한집에 있었는데 친분도 자별했고 서로 성격도 맞아서 모든 일을 상의하던 터였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졸업작품을 내라는데 돈이 있어야 모델을 구하지요. 할 수 없이 너와 나와 서로 맞그리자고 얼마동안 그리다가 둘이 다 붓을 내던진 일이 있었습니다. (능변가 이마동씨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래서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고 둘이서 손을 맞잡고 우던 터에 그 M군한테는 후원자로부터 대금 3백원이 날러왔습니다. 그래서 모델을 하나 구해가지고 둘이 그리다가…(중략)…그래 내처(그때는 아직 애인시대였겠는데)를 그렸죠. 작품을 완성해서 출품했더니 그게 다행이 특선이 돼서 이왕직에서 샀더군요.” (화가 이마동씨, ‘작품이전과 이후-작가와 모델과의 로만스’, 동아일보 1937년 6월 19일자 6면)


 “요우(僚友) 이마동 군이 이번 신작 오십여점을 화신화랑에 진열하고 그의 첫번되는 개인전람회를 개최함에 제하여 20년 동안이나 소위 화도를 같이 걸어오던 나로서는 비록 눌변으로서나마 그의 적지 않은 노력을 칭송하고 축하하지 않을 수 없다. 이군은 그의 이름이 마동(馬銅), 아호가 청구(靑駒)인데다 병오년생까지 겹쳤으니 말과는 끔찍스리도 인연이 깊다느니보다는…(중략)…이군의 성격은 뚫어진 문구녁으로 햇빛이 쏘아오듯 그늘 어두움 따위는 모조리 집어치우는 환하게 터진 밝은 성질이다.…(중략)…이군이 견인한 의지와 가경할 열정으로서 그의 초지를 좌절함이 없이 걸어나오는 것을 우리 화우들의 한가지로 축하하여 마지 않는 바이라하겠다.” (김용준<金瑢俊>, ‘미술평-이마동 개인전’, 동아일보 1938년 6월 4일자 3면)




동아일보에 난 청구의 부음기사.


“재미 이마동씨

서양화가 이마동씨가 지난 5일밤(한국시간 6일 오후) 미국의 시카고 교외아파트에서 노환으로 별세, 7일 장례식을 갖고 시카고근교의 한국교포묘원에 안장됐다. 향년 75세.

이 화백은 충남아산 출신으로 선전(鮮展)에 특선한 후 화단에 데뷔, 국전심사위원장 한국미술협회장등을 역임했고 32년 동경(東京)미술학교를 졸업했으며 홍익대학장(69~71년)으로 후진양성에도 힘쓴 미술계원로이다. 그는 얼마전 가족들과 함께 미국에 이주해 살아왔었다.” (1981년 10월 8일자 11면)


 “이달 초 재미(在美)화가 이마동 선생의 부음을 신문에서 접하고는 ‘멋장이 한사람이 또 가는구나’하는 한탄과 함께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내쉬어졌다. 이선생을 처음 뵌 것은 부산피난시절의 일이었지만 워낙 알려진 화가인데다 숙명학교 다닐 때 사모님이 우리학교 미술선생으로 계셔서 일찌기 말씀은 많이 듣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단체로 조선미술전람회 구경을 가곤 했는데 아이들이 ‘저기 윤선생 있다’고 해서 가까이가보면 미인으로 이름났던 우리 미술선생님이 모델로 그림 속에 들어있는 것이었고 그린 이는 다름 아닌 이마동 선생이었다.

숙명 2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웃집 여학생과 그 오빠와 셋이서 명동에 있던 희락관이라는 영화관에 구경간 일이 있다. 구경도중 아무래도 이상한느낌이 들어 옆을 보니 바로 윤선생이 앉아있질 않는가. 학교에서 가지 말라는 영화관에 들어온 것부터 찔리는 데다 비록 친구오빠일망정 남성까지 동반한 행위는 여학생의 신분으로선 중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영화를 보다말고 뛰어 나오기는 했으나 놀란 가슴은 쉽게 가라앉지를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순진하기 짝이 없어 보이지만 그일 때문에 밤새 고민으로 지새운 나는 이튿날 학교에 가자마자 부르지도 않았는데 윤 선생을 찾아가 잘못을 빌었다. 그러나 야단을 치기는커녕 의외로 선생자신이 우물쭈물하는 눈치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윤선생도 그때 이마동선생과 영화관에 나란히 앉아있었다는 것이었다. 이선생 또한 윤선생 못지않게 인물이 훤했던 분으로 두 사람의 미남미녀는 세상이 떠들썩한 연애사건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그들의 사랑이 벽에 부닥치자 두분은 소설에나 나음직한 도피행각에 뛰어들어 장안의 화제의 촛점이 돼버린 것이다.

부산시절엔 나도 이 선생을 따라 술집깨나 돌아다녔다. 사모님에게는 밤낮 야단맞으면서도 술 없이는 못사는 분이었던 선생은 ‘우리 호랑이 마누라가 알면 또 큰일 날텐데’ 연방 걱정을 하면서도 어느새 술잔을 비워버리는 것이었다. 문제는 술버릇이었다. 술기운이 오르기 시작하면 입었던 옷을 한가지씩 활활 벗어 던지셨으니 말이다. 저고리 벗고 바지도 벗고 다 벗은 다음 나중엔 달랑 남은 팬츠마저 벗으려는 눈치여서 주위사람들을 당황시키곤 했다.

그렇게 술 좋아하고 친구 좋아하던 분이 남의 땅에 이민 가서 오죽 답답하셨을까. 자식들 따라 미국 들어간 것이 재작년의 일이었지만 아무래도 삭막한 객지생활이 선생의 명을 재촉한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김정숙<金貞淑>, ‘나의 교유록(交遊錄)-이마동 선생’, 동아일보 1981년 10월 29일자 7면)





                                         이마동






  단골로 아동물에 삽화를 그리다 6.25 때 월북한 화가 정현웅(鄭玄雄). 


  독학으로 미술계에 진출한 정현웅은 조선미술전람회(선전)와 서화협회전람회(협전)에서 입선과 특선에 오르며 동아일보 기사에 나왔습니다.


 “정현중(鄭玄雄) 씨-하(夏)의 온실내.”

(‘제8회 미전평(美展評)’(5), 동아일보 1929년 9월 7일자 3면)


 “제2부 서양화=악기, 김공화. 교회당, 정현웅.”

(‘서협(書協)전람회, 6인을 특선’, 동아일보 1930년 10월 21일자 2면)


 “정현웅씨 ‘빙좌’ 곱게 묵업게 성공한 그림이다.”

(‘제10회 조미전평(朝美展評)’(5), 동아일보 1931년 6월 7일자 4면)


 “입선자중 특히 알에의 네 사람의 입상자를 선정하게 되엇다. 서양화부 ‘부립도서관(府立圖書?)’ 정현웅.”

(‘제11회 협전 입상자’, 동아일보 1931년 10월 18일자 4면)


 “좌상(座像) 경성 정현웅(京城 鄭玄雄).”

(‘미전(美展),주옥의 입선-이백구십륙점!’, 동아일보 1935년 5월 14일자 2면)


  “정현웅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1935년 선전(鮮展) 특선작 ‘좌상(坐像)’은 자신의 여동생 명은(75,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씨를 모델도 그린 것으로 밝혀졌다. 명은씨는 ‘35년 선전을 6개월 앞두고 수차례에 걸쳐 오라버니의 모델이 됐으며 다행히 그 작품이 특선으로 뽑혔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해금(解禁)…밝혀지는 월북화가 정현웅’, 동아일보 1988년 11월 2일자 8면)




 정현웅이 동아일보에 그린 연재소설 첫 삽화는 이무영(李無影)의 장편소설 ‘먼동이 틀 때’ (1935년 8월~12월, 133회 연재) 45회분입니다. 정현웅은 청구 이마동의 뒤를 이어 1935년 9월 20일자 13면에 삽화를 그렸습니다.


1935년 9월 20일자 13면, 먼동이 틀 때(45)


  “이번 소설은 숨은 삽화가로 헤성같이 돌현하여 삽화게의 폭탄적 경이를 나타내인 정현웅(鄭玄雄)씨의 삽화로써 독자앞에 나타나게 되엇으니 새해 첫날에 이에서 더 큰 선물이 어디있겠습니까.” (장편소설예고 ‘여명기(黎明期)’, 1935년 12월 24일자 2면)




  장혁주(張赫宙)작 정현웅(鄭玄雄) 화 ‘여명기’는 1936년 1월부터 8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정간되기 전까지 모두 208회 연재됐습니다.


  정현웅은  청구의 뒤를 이어 김말봉(金末峯)의 장편소설 ‘밀림’에 1936년 4월 15일자 133회부터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정간되기 직전 8월 27일자 233회까지 삽화를 그렸습니다.


정현웅은 만화도 그렸습니다.


“동아일보 신년특집(1936.1.1~4)

당시 신문은 신년특집을 위해 만화를 가지고 다양한 코너를 마련하였다. 옆 그림은 1936년 특집의 하나로써 루즈벨트, 히틀러, 장개석 등 국제적 유명인물을 캐리커처로 보여준 것이다. 이 외에 이상범, 최영수, 정현웅 등 당시 만화계 대표주자들이 공동으로 ‘세상 삼태집’이라는 제목으로 신년, 발전, 생활, 과음, 연애에 관한 만화를 2~3면에 걸쳐 그렸으며, 나흘 동안 만화만문 형식으로 문단의 동태와 문인들의 에피소드를 코믹 하게 그렸다.” (신문박물관 홈페이지)


  그러나 정현웅의 ‘아룽다룽한 솜씨’는 아동물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또 자랑삼아 말씀하올 것은 삼화예술의 최고수준을 보이는 정현웅 씨의 아룽다룽한 솜씨로 그림에 굶주린 가엾은 우리 아기들의 새해선물로 곱게 채색 올린 아동화보를 특별부록으로 내여 놓게 된 것입니다.” (변영로 신가정 편집장, 편집후기, 신가정 1936년 1월호, 198쪽)


  “이무영(李無影) 씨의 재미잇는 이야기에 정현웅 씨의 그림을 넛케된 것은 그야말로 꽃우에 또 꽃을 언진것과 같이 여러 어린 동무들을 즐겁게 할 것입니다. 정씨는 애기네 그림에 있어서 단연히 따를 사람이 없을만치 잘 그리는 분인 것을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것입니다. 똘똘이를 가운데 노코 여러 어린이들이 얼마나 씩씩하게 자라가고 잇나하는 것이 정현웅씨의 그림을 통하여 단번에 알 수 있도록 여러분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소년소설 ‘똘똘이’ 예고, 동아일보 1936년 2월 8일자 5면)


1936년 2월 9일자 5면, 똘똘이




  이무영 작 정현웅 화 ‘똘똘이’는 1936년 2월부터 5월까지 72회 연재됐습니다. 정현웅은 이어 노양근(盧良根)의 소년소설 ‘열세동무’에 1936년 7월 2일자부터 8월 5일자 28회까지 삽화를 그렸습니다.




1936년 7월 2일자 3면, 열세동무




  정현웅은 납량풍물기인 ‘납량풍물첩’ 삽화를 1936년 7월 2일자 ‘쇼윈도우’부터 16일자 ‘해수욕’까지 이운곡 글과 함께 연재했습니다.


  정현웅은 전조선철도예정선 답사에 제 1대로 나서 1936년 7월 29일자부터 ‘백두성봉 밑을 감도는 혜선(惠山) 백무준령선(白茂峻嶺線)’이란 제목으로 임병철 기자의 기사와 함께 그림을 연재했습니다.


 정현웅은 6.25 때 월북해 그의 작품은 1988년이 되어서야 해금됐습니다.


  “고난의 90일 괴뢰군 철제 밑에서도 수절하고 예술과 인간의 본령인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투쟁하고 또한 은신하다가 마침내 그들 속에 피체(被逮)되어 북한으로 납치되어 간 우리 애국문화인도 많거니와, 그에 못지 않게 민족문화의 말살과 괴뢰선전의 앞잡이로서 욕된 그 혀와 그 부를 둘다 북한으로 도주한 반역문화인들도 상당수에 달한다.<반역월북한 자 명부> 미술:정현웅 박래현 김□영 이쾌대.” (‘납북 예술인과 월북 예술인’, 민주신보 1951년 1월 1일자) 


  “지난달 27일 정부의 납월북 미술 음악인 작품의 해금이 발표된 후 그들에 관한 새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서양화가 정현웅.

1910년생인 그는 월북 후 고구려 고분벽화의 재현과 어린이를 위한 동화그리기 인물화 등에 전념하다가 지난 76년 작고했는데 남쪽에 두고 간 부인과 4남매를 그리워하여 한때심한 우울증에 빠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미국으로 이민간 그의 가족이 미국적십자사를 통해 북한측에 확인, 북에서 재혼한 부인으로부터 자세한 내용의 서신을 받아 알려진 것이다. 정현웅은 월북(50년9월)후 두고 간 부인 남궁요안나 씨(73,재미)와 같은 성(姓)의 여인을 찾아 지난 54년 재혼, 1남1녀를 두었으며 아들은 자신의 가업을 잇도록 그림수업을, 딸은 피아니스트였던 첫부인 요안나씨를 그리며 음악을 가르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10월27일자(일부지방 28일자) 동아일보의 납월북예술인 해금기사를 보고 동아일보사를 찾아온 정현웅의 차남 지석씨(47, 한미약품전무)는 “수년전미국에 사는 어머니와 형이현지 적십자사를 통해 아버지의 월북후 족적을 알게됐다”면서 “아버지가 평소 두고 온 가족들을 그리며 우울증에 빠졌다는 내용으로 보아 비록 가치관이 달라 월북했겠지만 혼란하던 전쟁중 순간적으로 선택했던 자신의 길을 후회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중략)

정현웅은 1930년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기자를 거쳐 45년부터 48년까지 월간지 ‘신천지’의 주간을 맡았다. 48년 이후에는 동화작가들과 더불어 동화그리기 어린이잡지 장정 등을 맡았는데 지금도 일부동화집에 그의 그림이 남아있다. 한편 그의 첫부인 남궁요안나 씨는 구한말의 유명한 언론인 남궁억의 손녀로 이화녀전 기악과를 졸업했다.(중략)

차남 지석 씨는 북에서 보낸 서신을 토대로 “아버지의 작품은 현재 북한의 박물관 미술관에 다수 보관되어 있으며 이충무공 강감찬 장군 전봉준 장군 등의 인물상을 비롯, 주로 인물그림에 주력했던 것 같다”고 말하고 “남북의 교류가 제대로 이뤄져 아버지의 일생이 재조명되기를 바랄뿐”이라고 말했다.” (‘해금(解禁)…밝혀지는 월북화가 정현웅’, 동아일보 1988년 11월 2일자 8면) 


 


                                  정현웅







동아일보에 실린 정현웅의 작품사진을 보며 그를 회고하는 여동생 명은씨와 차남 지석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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