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입사해 1936년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를 떠날 때까지 연재소설 삽화를 도맡아 그린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
그는 심전 안중식(心田 安中植)의 두 수제자 중 한 사람으로 심산 노수현과 함께 심전(心田)의 아호(雅號)중 ‘전(田)’자를 나눠 받았습니다.
“(심전 선생의 스승은) 오원 장승업 씨였다 합디다. 그때 지금으로 치면 미술학교와 같은 서화미술회라는 것이 잇엇는데 나뿐이 아니라 오늘날 동양화가들은 대개 이 서화미술회를 거처 나왓지요. 심산 노수현 씨라든가 안종원씨 등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지요. 다만 심산 선생과 나는 한 반년 서회미술회에 다니다가 직접 선생의 댁으로 가서 공부하게 되어 말하자면 보통 사제간보다는 인인이 깊게 된 셈이지요.…(중략)…그때 나이 열일곱이었으니까 동기고 뭐고 없었지요. 남의 그림을 보고 나도 저렇게 생각한 바를 표현해 봤으면 하는 아주 막연한 생각으로 시작했던 것 같이 기억됩니다.” (이상범, ‘나의 스승을 말함(1) 자유주의자 안심전(安心田) 선생’, 동아일보 1938년 1월 25일자 4면)
“청전의 작품이 양식적으로 큰 변화를 보이게 되는 데에는 여러 가지 계기가 있었겠으나 1921년 처음으로 열린 서화협회전이 그에게 큰 자극을 주었을 것이다.…이상범은 또한 1920년 7월 7일자 동아일보에 발표된 변영로의 ‘동양화론’으로부터도 큰 자극을 받았음을 회상하고 있어 이 시대의 새로운 사조의 압력을 많이 느끼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이성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한국인의 정서:청전 이상범의 회화’, 청전 이상범 전 도록, 삼성문화재단,호암미술관, 1997년, 17쪽)
청전이 동아일보 연재소설에 처음 삽화를 그린 것은 염상섭 작 ‘사랑과 죄’라는 소설입니다. 원래 이 소설의 삽화가는 ‘단곡’이었는데 한동안 삽화가 실리지 않다가 갑자기 청전이 50회부터 담당합니다. ‘청전’이란 이름은 51회부터 들어갑니다.
1927년 10월 3일자 4면, 사랑과 죄(50), 염상섭 작
1927년 10월 4일자 6면, 사랑과 죄(51), 염상섭 작, 청전 화
“청전은 이 시기에 동아일보에 소설 삽화를 그려 인물화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동아일보사와 청전의 인연은 1936년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우승사진의 일장기말살사건으로 퇴직할 때까지 계속되었다.…그가 신문의 소설 삽화를 그린 것도 한국 근대 미술사에 남긴 그의 커다란 업적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이성미, ‘한국인의 정서: 청전 이상범의 회화’, 18쪽)
1928년 11월 30일자 6면, 단종애사
“이중에 제일 어렵게 생각한 것이 ‘단종애사(端宗哀史)’엿다. 수양대군이나 안평대군, 또는 단종께서의 필화사진이라도 후세에 전한 것이 잇섯스면 그를 보고 얼골도 체격도 상상하여 표준을 삼을 수 잇겟는데 나는 그런 것을 구하지 못하엿다. 그리기에 전혀 상상만으로 등장인원 수십명을 창안(創案)하여 그리엇다. 더구나 그것이 현대인물이라면 용역할 것이로되 먼 수백년전 역사상 인물이 되어 이렷웟다. 궁정내(宮廷內)에 도라다니는 예절가튼 것은 차치하고 기어히 알지 안으면 안될 것이, 가옥제도와 의복, 의관 등이엇다. 사모관대라는 엇든 것이며 삼현륙각(三絃六角)가튼 악기는 그 시대에 엇더하엿든고, 이것들을 모르고는 큰 실수하기 쉬웟다. 그래서 나는 선배에게 뭇기를 게을니지 안엇다.”(이상범, ‘신문소설과 삽화가’, 삼천리 1934년 8월호, 162쪽)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이 춘원의 민족의식을 감히 운위하지만 그이만큼 민족애에 철저하던 분도 그리 흔치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이의 문장은 구태여 이 자리에서 말하는 것이 쑥스럽지만 동아에서 수많은 소설 삽화를 그려온 덕에 여러분 작가들을 친근히 접할 수 있었던 나는 그때마다 춘원은 참으로 남다른 분이라는 생각을 되새기곤 한다. 그이는 대개 신문소설은 편집국장 책상에 앉아 마감 얼마 전부터 쓰기 시작하는 것이 일쑤였다. 그러나 한번도 막히지 않고 슬슬 써내리는 문장이 한번의 가필도 없이 정연하고 삽화가의 머리에도 선연히 그 영상이 떠올라 그림 그리는데 여간 편하지가 않았다. 문책재기자” (서양화가 이상범, ‘구우회고실<舊友回顧室>’, 동우<東友> 1963년 12월호, 13쪽)
청전은 동아일보 삽화를 그리는 중에도 작품활동을 계속했습니다.
“이상범 씨 ‘춘산모옥’-먹을 쓰는데 씨만치 자유스런 화가는 드물 것이다. 침침한 산골작이가 주는 그묵어움과 침묵과 신비함은 씨의 독특한 경지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씨에게 불만이 있다. 9회전 때도 장언한 바이지만 씨의 화면은 언제든지 한 산 한 골잭이로 차잇섯다.” (이태준,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3)’, 동아일보 1930년 10월 25일자 4면)
“요새 일본에서는 나무닢 하나만 그려도 그의 이름을 보고 한 장에 20원 30원 주니까 화전삼조(和田三造)나 천단룡자(川端龍子) 같은 대가들이 신문삽화에 손을 대이지 마는 우리 조선서는 하로 석장 넉장씩 한달 30일에 120매를 그려도 저네들의 두 장이나 석 장값밖에 안 되는 것을 바라고 대가들이 신문삽화에 전용이 되어 잇다. 그러나 청전(靑田)은 심산(心汕)에게다 비하면 월급에나 낙자(落字)가 없으니 덜 억울할는지 몰으나, 아모런 제작할 시간이 없어 애쓰는 것은 보기에 딱한 일이다. 청전더러 웨 늘 한 산, 한 골재기만 그리느냐고 하지만 출품 기한이 내일 모레로 닥들니기나 해야 마지못해 붓을 잡아보니 무슨 비약이 잇으리오. 그러나 청전에겐 청전 독자의 화경(畵境)이 잇다. 그 고집과 그 굵은 선에 완전한 필력만 심거 놓는다면 그의 그림은 무겁고 크기 한이 없을 것이다. 신문사 일에도 충실해야겟지만 자기 예술에 더욱 충실할지어다.” (이하관, ‘조선화가총평(朝鮮畵家總評)-이상범 씨’, 동광 1931년 5월호, 70쪽)
“춘곡 고희동씨, 심산 노수현씨, 청전 이상범씨 등 건재하여 역작들을 보여주심은 기꺼운 일이며 심산 노수현 씨 작 ‘영춘’과 청전 이상범씨의 ‘소림’은 동양화부장 중 백미일 것이다.…(중략)…‘소림’에서는 청전 독특희 필치의 세련이며 깊은데다 소박한 맛을 맛볼 수 있다.” (이마동, ‘협전을 보고<중>’, 동아일보 1935년 10월 26일자 3면)
1931년 동아일보가 앞장선 이 충무공 유적보존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춘원에게 의뢰한 소설 ‘이순신’의 삽화도 청전이 맡았습니다.
1931년 6월 26일자 7면, 이순신
“또 한가지 어렵든 일은 ‘이순신’을 그리든 때이다. 이순신의 얼골을 엇더한 어룬으로 꾸밀고 하고 나는 한참 생각하엿다. 그 어룬은 서양에 넬손에 비길만치 천고의 명장인 줄은 알지만은 다만 용맹하고 싸홈 잘 하는 무장으로 그리면 족할가, 아니 아니 춘원의 말슴을 드르면 그 어룬은 덕행도 놉하서 일세의 사표될 인물이라 한즉, 지(智), 덕(德), 용(勇), 삼자가 구유(具有)한 어룬의 얼골로 그리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용긔잇는 무장의 얼골에 덕행잇는 도덕군자의 얼골에 임군에 충성하고 백성을 진정으로 위하는 지사의 얼골을 混合하여 그린 것이다. 그 뒤 그 선영의 지(地)인 아산 ‘배아미골’에 이르러 수백년래 전하여 오는 붓으로 된 초상화를 보고 기분(幾分)참고는 하엿지만, 요컨대 이순신은 순전히 내 머리 숙에서 비저낸 얼골이엇다. 후세 사가들은 내 붓을 엇더케 비평할는지 나로도 모르겟다.” (이상범, ‘신문소설과 삽화가’, 삼천리 1934년 8월호, 163쪽)
“시대물의 삽화야 대개 그리는 사람의 짐작에서 맨들어지지요. ‘이순신’은 초상을 보앗는데 일반 현대인이 생각하는 명장의 타입을 가진 장군의 얼골로 보이지 안트군요. 만일 그 초상대로만 그린다면 지금 사람의 눈에야 명장군으로 보이겟서요? 그래서 얼골에다 살도 부치고 수염도 힘잇게 부처 놋코 여러 가지로 맨들어 노왓섯지요. 시대물의 삽화는 그 시대의 참고 재료를 구할 수도 업고 또 그 시대의 풍속 습관 등을 모르니까 여간 어려운 점이 만흔 것이 아니지요.” (이상범<동아일보>, 좌담 ‘화가(畵家)가 미인(美人)을 말함’, 삼천리 1936년 8월호, 123쪽)
청전은 동아일보가 충무공 유적보존운동을 벌여 중수한 현충사의 충무공 영정도 그렸습니다.
“청전이 다른 인물화가들을 제치고 1932년에 동아일보사가 주축이 되어 중수한 아산의 이 충무공 사당 현충사에 봉안한 ‘충무공 영정’을 그리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인물화 역량을 그만큼 인정받았음을 입증해준다. 이와같은 그의 인물화에 대한 평가에는 그가 1927년 10월 4일자 동아일보에 염상섭의 소설 ‘사랑과 죄’ 51회의 삽화를 시작으로 수년간 많은 신문소설 삽화를 그린 것도 큰 몫을 하였을 것이다.
현재 두 본의 충무공 영정이 있는데 하나는 진해의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다른 하나가 이번에 전시된 통영의 착량묘 보관본이다. 통영본은 그가 1933년에 두 번째로 그린 것으로 1년전에 제작한 진해본에 비하여 손의 묘사, 가슴 띠의 방향, 발판의 채색 등 좀 사실적인 면에서 멀어진듯하다.” (이성미, ‘한국인의 정서: 청전 이상범의 회화’, 22쪽)
“또 우리들은 어떻게든 민족감정을 불러일으키려고 그 압박아래서도 위험을 무릅썼으니 지금 아산 이순신 장군의 향제에 세워진 충무공 사당은 그때 동아일보사에서 전 민족의 열렬한 성원을 불러 일으켜 세워놓은 항일 독립정신의 결정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충무공의 그럴듯한 영정이 없어 영정을 맡게 된 나는 전국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또 보급망을 통하여 충무공상을 수집하는 한편 그것도 마음에 차지 않아 우리 사학자들의 의견까지를 종합하여 이뤄놓은 것이 지금 아산 충렬사에 모셔 놓은 충무공의 영정이다. 영정을 다 완성한 우리도 그 뒤에 기어이 단기연호(檀紀年號)와 작자인 나의 필명을 써 넣었으나 왜경들의 말썽이 일어날 것이 뻔했으므로 그때 편집국장이던 이광수 선생과 나는 그것을 영정의 뒷면 부벽 속에 넣고 봉함해버렸다. 아마 지금도 그 영정이 그대로라면 그 속에 햇빛을 보지 못한 단기연호가 있으리라.” (서양화가 이상범, ‘구우회고실<舊友回顧室>’, 동우<東友> 1963년 12월호, 13쪽)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의 소장유물 ‘이충무공 영정’(세로 193cm, 가로 113cm)에 대한 설명.
“공의 영정에 대하여 기록상으로 보아서는 일찍이 통영의 초묘안에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고 하나 그 뒷소식은 전혀 알 길이 없고 그 후 순천과 여수 충민사에 화상을 모신 일이 있었으나 역시 그 내력은 알 길이 없다.
1932년 일제 강점기에 현충사 재건을 위한 거족적인 운동이 일어났을 때 성금 16,021원30전으로 사당 및 영정을 모시고 남은 돈 386원 65전은 현충사 기금으로 하여 동년 6월 5일 송진우(宋鎭禹), 백관수(白寬洙), 유억겸(兪億兼) 등이 참석하여 영정 봉안식을 가졌다.
그때, 청전 이상범 화백(靑田 李象範 畵伯)이 영정을 그려서 현충사에 모셨으나, 고증이 부족하였으므로 1949년 다시 충무공기념사업회 편집위원(위원장 이은상)들이 이당 김은호 화백(以堂 金殷鎬 畵伯)으로 하여금 두 폭의 충무공 영정을 그리게 하였는데 조복화상은 현충사에 모셨다가 순천 충무사로 옮겼으며(불의의 화재로 영정도 소실 되었다) 갑주입상은 한산도 영정각에 모셨다.
현재 현충사의 영정은 유성룡의 징비록에 나타난 고증에 입각하여 1953년에 월전 장우성 화백(月田 張遇聖 畵伯)이 그린 것으로 1973년 10월 30일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공의 영정을 그리기 위하여 많은 학자들의 고증이 있었던 것 중, 공의 용모에 대한 대표적 기록이 있는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을 참고하였다.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는 현충사에 봉안되어 있는 영정을 비롯하여 순천 충무사(1953년 이당 김은호 화백 작)에 모신 조복 좌상과 한산도 충무영당(1950년 이당 김은호 화백 작)에 모신 갑주입상 등을 볼 수 있다.”
동아일보가 ‘브나로드’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연재한 춘원의 ‘흙’, 심훈의 ‘상록수’의 삽화도 청전의 작품입니다.
1932년 4월 12일자 7면, 흙
1935년 9월 10일자 3면, 상록수
“여류작가에 대한 최초의 연재소설인 박화성 씨의 ‘백화’가 나온 건 32년이며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으로 대공모한 심훈의 ‘상록수’가 연재된 것이 35년, 삽화는 안석주·노수현이 많이 맡았지만 27년부터 청전 이상범 씨가 무려 17개의 작품을 담당했다. 동아일보가 민족지로서 사회운동을 활발히 전개한 것은 주지의 일이거니와 연재소설도 이에 보조를맞추어 제작되었다. 이광수의 ‘이순신’이 연재된 것은 31년 당시 동아일보가 일으킨 충무공유적 보존의 범국민적 운동을 지원하기위한 것이며 ‘농촌속으로 들어가자’는 ‘브나로드’운동을 위해 춘원의 ‘흙’, 심훈의 ‘상록수’가 연재되었다.” (‘명작의 산실-1925년 처음으로 신춘문예 공모, 창작소설론 나도향의 환희 첫 연재’, 동아일보 1968년 4월 1일자 5면)
1935년 9월 26일자 3면, 밀림(密林), 김말봉 작 이청전 화
1936년 2월 22일자 4면, 백련유전기(白蓮流轉記) 윤백남 작 이청전 화
백련유전기(白蓮流轉記)는 1936년 2월 22일자부터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정간되기 전 8월 24일자까지 모두 154회 연재됐습니다.
청전이 삽화를 그린 연재소설 목록
청전이 잡지 ‘삼천리’에 밝힌 삽화에 대한 생각.
“동아일보에 와서는 재직 년수가 만흔이만치 삽화 그린 수도 정말 만타. 위선 기억에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염상섭 씨의 ‘진주는 주엇스나’ 이광수 씨의 ‘혁명가의 안해’ ‘삼봉의집’ ‘이순신’ ‘춘향’ ‘단종애사’ 윤백남 씨의 ‘흑두건’ ‘대도전’ 이은상 씨의 ‘삼국사화’ 현빙허씨의 ‘적도’ 장혁주 씨의 ‘무지개’ 김팔봉 씨의 ‘심야의 태양’ 이성해 씨의 ‘키 일흔 범선’ 주요한 씨 번안 ‘사막의 꼿’ 등등이다.…(중략)…빙허의 ‘적도’ 장혁주 씨의 ‘무지개’들은 모다 현대의 소설이기에 예비지식이 미리 업시도, 일상 거리에서 대하는 인물들을 묘사하면 가하엿기 역사소설에서와 가치 고심하지는 안엇다. 삽화화가로써 늘 유의하는 것은 소설에 나오는 인물의 얼골을 끗까지 가튼 얼골로 보지(保持)하자함이다. 첫 회에 나닷슬 때는 주인공얼골이 길고 광대뼈, 쑥 나온 사람이다가, 10회, 20회 가는 사이에 그만 가튼 사람의 얼골을 이저버리고 동굴동굴한 얼골의 사람으로 만들기 쉽다. 그러기에 우리가 제일 주의하는 것이 첫 회에서부터 100회, 200회 가는 사이에 본(本)얼골을 변하게 마자함이다. 그러고 사건에 변화잇는 소설이면 삽화 그리기도 흥미잇다. 심리삽화에만 치중하여, 행동에 나타나지 안는 삽화가 3일, 4일 련속될 때에는, 삽화를 엇더케 그려야할는지 실로 고심한다. 매회 움지겨지는 장면이 잇는 소설이면 붓을 들기 쉽다. 나는 삽화그리기 시작한지 벌서 7, 8년, 이 사이에 통절히 늣기는 것은, 소설원고를 미리 볼 수 잇섯스면 한다. 가령 첫 회로부터 끗 회까지 써 노흔 소설이라면 한번 훌터보고, 작중 나오는 인물의 성격과 특징 등을 뽑아낼 수 잇지만은 늘 2, 30분전, 또는 1, 2시간 전에 겨우 한회치나 갓다주니까 삽화도 잘 되지 안커니와 연락도 잘 아니된다. 엇든 때는 10분, 20분 전에 갓다주는 소설원고를 보고 7, 8분 사이에 빨니 그려버리지 안으면 안되는 때가 잇다. 이숙에서 재분(才分)도 업거니와 걸작화면이 용이히 나지도 안을 것이다.”(‘신문소설과 삽화가’, 삼천리 1934년 8월호, 162~163쪽)
“참말 미인을 엇떤데서 구하겟느냐? 하는 말슴은 즉 현대 미인의 표준을 말하라 하는 말슴인데 미인을 보는 방법도 모다 달고 그 표준도 모두가 달으니까요. 가령 기생은 기생으로서의 미를 가지고 잇다고 하겟고 여학생은 여학생으로, 부인은 부인으로서의 제각금 독특한 미를 가지고 잇다고 하겟지요.”
“나는 빙허(憑虛)의 작품으로 적도(赤道)를 그렷 보앗는데 그 속이 나오오는 남주인공은 감혹에서 나온 사람 갓치 그려야 할텐데 모텔을 구할 수도 업고 경험도 업고 해서 내 생각으로 대강 짐작해서 이러케 그리면 감혹에서 나온 사람 갓해 보히려니 하는 생각으로 그려 보앗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의 얼골이 통일된 듯 합데다. 그 박게도 춘원의 ‘리순신전’도 물론 고대 인물이라 유명한 장군 갓치만 그렷는데 그 것도 맨 나종까지 주인공의 얼골이 통일된 점을 일치안노라고는 한 셈이지요.
“혹 잇기야 잇지요. 그러나 사실 항의 해오는 그 사람들도 삽화가의 상식에서 더 잘 아는 점이 보이지 안트군요.”
“그러치요. 조선서도 인제부터는 삽화가도 전용으로 두워야 하겟서요. 그리고 현대물과 시대물의 삽화가도 따로 따로히 전문가를 둘 필요가 잇지요. 요컨데 한 기술자로서 삽화가를 대우해 줄 아량이 잇서야 하겟지요. 또 한가지는 아직도 조선은 인쇄술이 뒤떠러저서 그림은 잘 그리드래도 정작 지면에 나타나는 삽화를 보면 아주 선명하지가 못하드군요.”
“사실 어떤 소설을 물론하고 제일 먼저 독자의 눈을 끄으는 것은 삽화지요. 위선 삽화를 먼저 보고야 글 내용을 보게 되는데 이것을 보든라도 얼마나 삽화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함을 알 수 잇지요.”
“그 뿐인가요. 마음대로 화면을 엽흐로 짤너 버린다든가 꺽구로 뒤집어 놋는 경우도 중중하지요.”
(좌담 ‘화가(畵家)가 미인(美人)을 말함’, 삼천리 1936년 8월호,116~126쪽)
청전은 동아일보가 기획한 기행기에 사생화(寫生畵)도 많이 그렸습니다.
청전은 1934년 5~6월 노산 이은상과 함께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을 기행하고 돌아와 ‘문묵동도(文墨同道)’(1934년 5월 24일~7월 1일)’라는 기행문을 연재하였습니다. 글은 노산이 썼고, 삽화는 청전이 그렸습니다.
“우선 제1회는 신록에 덮인 강서, 용강의 고분, 고비(古碑)를 찾기로 하였다. 존상(尊常)한 탐승행(探勝行)도 좋기야 하지만은 어디서나 잊지 않는 우리의 애사심(愛史心)을 여기서도 겸하야 위로받으려함이다.” (‘문묵동도 서언(序言)’, 1934년 5월 24일자 3면)
1934년 5월 25일자 3면, 문묵동도
청전은 1935년 ‘서행일천리(西行一千里)’(5월 23일~6월 14일)와 ‘팔도풍광(八道風光)’ 시리즈 중 하나인 ‘전주근교(全州近郊)’(1935년 9월 5일~9월 13일)를 연재하였습니다. 두 연재물의 글과 그림 모두 청전이 직접 쓰고 그렸습니다. ‘서행일천리’는 평안북도를, ‘팔도풍광’은 전주의 명승고적을 둘러본 기행입니다.
“창외(窓外)의 신록에 끌리어 경장(輕裝)으로 길을 나니 향한 곳은 서도천리 내 본디 화인(畵人)이라 눈에 드는 대로 화첩(畵帖)에 거두니 이 ‘서행일천리’라는 화집(畵集)이다. 그림에 찬이 없을 수 없으매, 졸문이나마 두어 줄씩 곁붙이기로 한다.…(중략)…이 성은 동림폭포로 가는 도중 선천군 심천면 동림동에 있는 주위 약 십리의 성곽으로 지금은 대부분 파괴되고 더구나 남부의 일부는 철도 선로에 편입되어 무더기 성지(城址)의 잔적만이 옛날을 말하는 듯하다. 내 사가(史家)드면 ‘여조시통주(麗朝時通州) 거진지구지(巨鎭之舊址)’ 운운을 찾을 것이지만 유구 오천년 역사를 가진 이 땅에 어디를 간들 폐허잔초가 없을 것이라고 구태어 이곳에 와서 모처럼 명랑한 내 마음을 부질없는 상감(傷感)에 흐리게 할 것인가? 저기 촌락 한 줄이 소나무 사이에 사라지고 그 위에 소바리 하나 초하(初夏)의 들판을 한가히 호아 간다. 전원의 아취-이에 족하지 않으냐!” (‘서행일천리’, 1935년 5월 23일자 3면)
1935년 9월 5일자 3면 팔도풍광-전주 근교
“남문은 이마에 한남(漢南) 제일성(第一城)이라는 현판이 그대로 남아있어 그 옛날 호남의 도읍이었던 것을 말없이 자랑하는 채 문구(門口)는 막혀 통행치 못하게 되어있고 양편으로만 다니게 되어있다.”
창간호부터 사용하던 제호(題號)의 배경을 1930년 새로운 도안으로 그린 것도 당시 미술담당기자였던 청전입니다.
“30년에는 이상범이 제호 도안을 개작, 한반도와 무궁화 바탕을 그려 넣은 것을 사용하게 되었으나 8년 뒤에 총독부의 강요에 따라 다시 바뀌어졌다. 총독부는 이 도안의 내용이 잃어버린 나라와 나라꽃을 담아 은연중에 항일의 민족혼을 불러일으킨다고 개작토록 강요한 것이다. 이 도안은 1945년 12월 속간과 더불어 부활되었다.” (이상범 증언, 1970년 4월 1일자 22면, 창간 50주년 기념특집)
“해방후 1945년 12월 1일자 중간호(重刊號)부터의 제호는 1930년부터 1938년까지 8년간 제호로 쓰다가 총독부당국의 지시로 폐도(廢圖)된 김돈희 씨의 휘호 ‘동아일보’에 이상범씨 의 도안인 흰바탕의 한반도 주위를 빈틈없이 둘러싼 ‘무궁화’로 부활되었다。그후 1948년5월 좌익분자의 방화로 원형목각제호를 잃어 보관지의 제호를 사진으로 복사해서 제호를 살리는 등 여러 차례 도안 내용이 조금씩 바뀌어왔으나 결국 김돈희 씨의 휘호와 이상범 씨의 재도안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보제호의 의미와 제작 경위’, 1971년 4월 1일자 9면)
청전은 일장기말소사건 주역 중의 한 사람이었고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를 떠났습니다.
청전이 해방 후 1956년 쓴 ‘일장기말소사건 20년 전의 회고기’.
“그러므로 당시의 신문잡지-특히 우리말로 간행된 본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는 그의 쾌승 ‘뉴-스’를 호외 또는 본지에 기사와 사진을 섞어 게재하여 독자에게 알리었었다. 그러나 이렇듯 통쾌한 첩보를 만천하 동포에게 알리면서도 무엇인가 말 못할 가슴에 뭉클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손 선수가 뚜렷한 ‘배달’의 피를 가진 한국인이었만 그가 한국민족의 대표로 간 것이 아니고 일본국 선수로서 일본 국기 밑에서 동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날이 계속해오는 ‘뉴-스’에서 손 선수의 가슴에 일장기 표지(標識)가 붙은 사진을 대할 때마다 가슴이 쓰리고 뼈가 저리던 것은 그때의 온 ‘겨레’가 똑같이 당한 일이지만 더구나 이러한 보기 싫은 사진을 신문에 게재하게끔 된 당시의 신문기자 – 특히 편집과 사진에 관계한 사람으로서는 말할 수 없는 고애(苦哀)를 맛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본사 조사부에서 미술 부문의 책임을 가지고 있었는데 8월 24일 상오 11시경에 운동기자 이길용 씨가 손 선수의 사진 한폭을 보내면서 편집국 여사동(女使童, 지금은 그 애의 성명조차 망실하였다)에게 “손 선수 흉부에 있는 일장기 ‘마-크’를 지워 달라.”는 부탁의 말을 전하여 주었다. 그런데 그 전언이 분명치 못하여 나는 이길용 씨에게 구내전화를 걸어 이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를 듣고 그의 뜻을 알았다. 물론 이런 일이 혹시나 무슨 문제나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없지는 않았으나 고어에 ‘시인은 의사동(意思同)’이라는 말과 같이 역시 그것이 꼴 보기 싫던 판이라 다시 더 고려할 나위도 없이 그의 말대로 호기 있게 정성껏 말소해 가지고 사진과 제판실로 돌렸다.” (동아일보 1956년 8월 17일자 4면)
“씨는 조간 편집담당자이었는데 그는 황황히 공장으로 들락날락하더니 다시 나에게 와서 “큰일 났습니다. 경기도 경찰부에서 일인경부보가 제판실에서 지금 손 선수 사진을 다시 제판시키고 있는데 일장(日章)을 더 똑똑하게 만들어 기어코 압수한 석간본지에 게재 인쇄하라고 독촉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 청전 선생은 모르는 체하고, 어서 댁으로 돌아가시오.”하고 일변 조간편집에 분주하고 있었다. 항례(恒例)로 말하면 신문압수의 경우에는 경무국 도서과에서 소할(所轄)종로경찰서를 통하여 신문차압명령서를 광화문통 파출소 순사가 본사에 지참하여 제시한 후 인쇄된 신문을 가져가면 우리는 그 압수부분의 기사나 사진을 연판에서 끌로 깎아버리고 신문의 호수 없이(다시 말하면 일종의 호외) 인쇄 배부하는 것이어늘 이날따라 간부급 경찰이 일부러 입회하여 그 사진을 다시 넣어서 인쇄 배부케 하는데는 새삼스럽게 전 사내가 긴장 전긍(戰兢)치 않을 수가 없었다.” (동아일보 1956년 8월 18일자 4면)
“내가 동아를 떠나게 된 연유이기도 했지만 손기정씨 가슴의 일장기 말살사건 때만 해도 그 전부터 계획하던 일도 아니었고 또 위에서 시킨 바도 없었지만 그저 영광스런 우리 선수 가슴에 ‘히노마루’(日之丸)가 보기 싫은 감정, 그것 때문에 관계자들끼리 쥐도 새도 모르게 지워버렸었다. 그때의 통쾌하던 마음은 지금도 오래 잊혀지지 않는 일중에 하나다.” (서양화가 이상범, ‘구우회고실’, 동우 1963년 12월호, 13쪽)
“내가 있던 시대의 가장 큰 사건은 ‘일장기말소사건’이다. 이 일장기말소는 그 때의 사회부의 편집기자 장용서 씨가 처음 일장기 ‘마크’를 단 손기정 선수의 가슴을 들여다보다가 운동부의 유일의 기자 이길용 씨와 논의하고 지워버리기로 하였다. 이때쯤은 대담한 일이 아니면 아니되었다. 조사부의 기자 이상범 씨는 그대로 그것을 분칠하여 내려 보냈다. 신경을 날카롭게 쓰는 그때 일정이 이것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나는 야근으로 늦게 들어가 막 앉자마자 허심이란 친구가 찾아와 조사부에서 주고받고 한담을 하고 있는 때에 편집국에 형사가 나타나 제1착으로 데려간 사람이 여 급사이었고, 여 급사가 말한 것을 근거로 사진부를 샅샅이 뒤지고 사진부가 전부 한바탕 경을 치는 봉변이 있었다. 일장기말소는 그때 사진부의 서영호 기자가 하였던 것이다. 그 다음 사회부가 한바탕 경을 치게 되어 현진건 사회부장을 비롯하여 임병철 차장, 장용서 씨, 이길용 씨 등이 순차로 잡혀갔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신동아’, ‘신가정’도 폐간이 되고 간부 진용이 통 바꾸이게 되었으니 그것은 그때의 사장은 고하 송진우 선생이었던 바 사장에 근촌 백관수 선생이 입사하게 되고, 주필에는 낭산 김준연 씨 이었던 것이 아주 주필이 없어지고 편집국장에는 고재욱 씨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홍효민<洪曉民>, ‘구우회고실’, 7쪽)
일장기말소 30돌에 동아(東亞)의 주역들이 증언하는 사건전모 (‘통렬한 민족지의 자기주장’, 동아일보 1966년 8월 9일자 6면)
장용서(당시 편집부기자)-일본 조일(朝日)신문에서 발행하는 ‘조일(朝日)그라프’에서는 대대적으로 손선수의 우승화보를 발행했습니다. 소위 동아일보에 말소한 사진은 여기에서 다시 복사한 것입니다. 한 가지 조일그라프와 다른 점은 일장기가 없었다는 것뿐이죠. 문제의 사진이 신문에 게재됐던 1936년 8월 25일(8월 24일 발행 25일자를 말함. 24일이 월요일-인용자 주)은 월요일이었습니다. 그 전날인 일요일에 저는 둘째아들을 데리고 신문사에 왔더니 운동부 이길용기자가 “이 사진은 너무 좋으나 일장기가 달려 곤란한데”하며 사진을 아까와 하는 걸 보고 지나가는 말로 그냥 지워버리면 되지 않느냐고 해버렸죠. 이 말이 도화선이 되어 그 후 이길용 씨와 이상범 씨가 지워서 소위 ‘일장기말소사건’이란 사건을 낳은 거죠.
이상범(당시 삽화가)-먹으로 수정해서 제판을 한 것이 바로 25일 사진이었죠.
이상범-감옥에서 우리는 그래도 자부심을 갖고 있었죠. 무슨 놈의 질문이 그렇게 많고 서약서가 그렇게도 많은지.
이상범-그때 그만 두게 된 것은 순전히 타의에 의한 것이었죠. 들은 이야기지만 복간되기 전에 동아일보 간부에게 일본관헌들이 이런 이런 사람은 문화기관에서는 절대로 써서는 안된다고 못을 박았다더군요. 그때 그만 두신 분으로 고하·낭산·지방부장 그때 장덕수씨도 포함되었는지 기억이 희미한데.
김준연(당시 주필)-아닙니다. 장선생은 소위 일장기말소사건이 있은 후 얼마 있다가 미국서 왔었죠. 지금도 생각나지만 장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너무 이길용 군을 트러블메이커로만 생각하지 말라하면서 후세에는 애국자로 불리워질 게 틀림없다고 자기는 생각한다더군요.
이상범-당시 일장기말소는 순전히 몇몇 기자들에 의하여 조작됐던 것입니다. 편집국장도 전연 몰랐고, 모를 수 밖에 없는 것이 편집국장은 그때 시골에 가있었거든요. 요는 손선수 인물보다는 민족적 감정, 그게 말소시킨 원동력이었죠.
이상범-남승용 선수의 고향 나주와 손 선수의 고향 신의주에서 대대적인 환영행사에 호응, 전국적으로 각종 환영행사가 연달아 있었으나 독립운동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별로 없었습니다. 다만 우리민족도 국제무대에서 자웅을 다툴 수 있다는 자부심에서 흥분했었습니다.
1963년 청전의 동아일보에 대한 회고입니다.
“일거리에 밀려 저녁 늦게까지 내 방에서 일하고 있을 때면 사내를 둘러보던 인촌께서는 다정한 위로의 말을 베풀고는 “술 한 잔 하지 않으려나”-일을 마칠 때까지 사장실에서 기다리다가 함께 데리고 나가 술을 나누고 정을 터주던 후덕한 분이였다. 그때 신문사는 걸핏하면 삭제다 압수다하는 소란이 잦았고 또 자연히 살림도 옹색한 편이었지만 힘닿는 데까지는 식구들을 돌보는데 인색치 않았고 동아인들의 보건에까지도 마음을 써 3층 옛 회의실 자리에는 탁구대 그리고 역도, 아령까지 구비해 놓고 있었다.” (서양화가 이상범, ‘구우회고실’, 동우 1963년 12월호, 13쪽)
일정시대 퇴사직원록-이상범
동아일보 연재소설 (1931년) 삽화 이상범, 이광수 作 `이순신`
동아일보 연재소설 (1935년) 삽화 이상범, 심훈 作 `상록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