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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자 이하윤(異河潤, 1906~1974)


1939년 9월 학예부 기자, 1940년 8월 강제 폐간으로 퇴사







이하윤, ‘중첩되었던 파란’ (1960년 4월 1일자 6면)


“20년 전 나는 동아일보 기자로 학예부에 근무하면서 창간 20주년 기념호의 편집을 거들고 있었다. 중역실로 통하는 문 한옆에 학예부 테이블이 있어 박승호 여사와 둘이 마주앉고, 그 한 옆 중앙에는 편집국장 고재욱 씨가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일제 말기의 단말마적(斷末魔的) 발악에 항거하면서 날이 갈수록 중첩되는 파란을 겪은 기억이 아직도 새로운데 어느새 벌써 20년의 세월이 또 흘러 이제 40주년 맞이하게 되었으니 미상불 감개무량 하다. 억울하게도 1940년 8월 10일 우리들은 본의 아닌 폐간사로 붓대를 꺾고 울분의 눈물을 머금은 채 기능을 상실한 불구의 신세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을 수 없는 비운에 부닥치고 말았던 것이다. 각설-내가 쓴 원고가 처음으로 발표된 것이 1923년 동아일보인데 고향에서 수집한 ‘이천지방유행동요’와 ‘아버님 무덤 앞에서’라는 수필 비슷한 글로 기억한다. 이후 7년 동안 동경 학창에 유하는 동안 톨스토이, 로우제티 등의 백년제를 기념하는 소개 논문을 위시하여 주로 외국문학연구에 관한 글을 실렸으며 귀국 후에는 ‘현대시인연구’라는 큰 제목 밑에 연재한 구미 시인의 연구 소개 등 입사하기 이전의 나의 문필 생활과도 깊은 인연이 맺어져 있었다. 드디어 고하 선생의 지도로 동아의 일원이 되어 강제폐간을 당하던 날까지 운명을 같이하였으니 동우회의 해산 기념으로 낯익은 사문(社門)을 안고 나온 안성 유기의 9첩 반상에는 아직도 동아의 뚜렷한 마아크가 빛나고 있다. 암흑의 5년 해방된 지 15년 이렇게 다사다난한 20년이 더하여 40주년을 맞는 오늘 나는 기자 생활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한 동아일보 시대를 회상하면서 그리운 옛집의 흥융과 발전을 진심으로 축복하는 바이다.”




동아일보 1960년 4월 1일자 6면






  동아일보에 입사하기 전부터 이하윤은 동아일보를 통해 그의 작품들과 의견을 발표했습니다.






1926년 7월 16일자 3면, 석양에 먼길을 떠낫드러니






 1927년 3월 19, 20일자 3면, 양주동(梁柱東) 씨에게(전 2회)는 외국 시의 오역(誤譯) 여부를 놓고 벌인 설전(舌戰)입니다.






1927년 7월 30일자 4면, 연설은 중지, 연사는 포금(抱禁), 금강(金剛)구락부 강연






  이하윤은 외국의 시와 소설들을 주로 많이 소개했습니다.






1928년 5월 20일자 3면, 영시인(英詩人) 「로셋티」탄생 백년(전 2회), 이하윤






 1928년 6월 30일자 3면, 형식과 내용, 운문(韻文)과 산문(散文), 시가(詩歌)의 운율(韻律) 제1회(전 6회)






 1928년 9월 2일자 3면, 톨스토이 탄생 백년(전 2회)






 1930년 12월 25일자 4면, 현대시인 연구 인도편 (1) 동방 인도의 시성(詩聖) R. 타고르 옹






 1931년 9월 30일자 5면, 현대 불란서 시단(詩壇) 시인을 중심으로 하야 제1회(전 10회)






 1931년 9월 30일자 5면, 현대 불란서 시단(詩壇) 시인을 중심으로 하야 제5회(전 10회)






 1933년 9월 22일자 3면, 유행가 작사 문제 일고(一考) 상






 1934년 3월 28일자 3면, 나의 아호(雅號)·나의 이명(異名)






 1934년 4월 2일자 4면, 유행가요곡의 제작 문제 제1회(상, 중, 하)






 1939년 9월 15일자 3면, 패배(전 10회)






 1940년 5월 26일자 3면, 조선문화 20년(1) 신시( 新詩)의 발아기(發芽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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