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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함께 파격적으로 입사한 최승만-박승호


최승만(崔承萬, 시흥, 1897~1984)  1934. 8. 잡지부장, 1936. 9.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신동아, 신가정 무기정간, 폐간해 퇴사


박승호(朴承浩, 시흥, 1897~1950 납북) 1934. 8. 학예부 기자, 1940. 8 . 강제 폐간. 


     최승만





1935년 박연폭포에서. 가운데가 황신덕, 오른쪽이 박승호.




 “동경 YMCA 건축기금 모집하는 데 많이 도와주신 동아일보 송진우 사장에게 귀국 인사를 하러 갔던 일이 있었다. 나는 취직 부탁을 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나를 위하여 사회사업 방면의 일을 생각해 보는 것이 있으니 좀 기다려 달라고 한 일이 있어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곧 만나 달라는 기별이 왔다. 먼저 말했던 일은 뒤로 밀고 우선 ‘신동아’의 일을 맡아 보아달라는 것이었다. 사령은 잡지부장으로 하겠으며 집사람은 신문 학예부 기자로 채용하겠으니 특히 가정에 관한 글을 담당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때의 취직이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일시에 두 사람이 청한 일도 없는데 먼저 일자리를 주겠다고 하니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 (최승만, ‘나의 회고록’, 인하대학교 출판부, 1985년 285쪽, 동아일보사 시절, 동아일보사에 취직함)




동아일보 1926년 12월 11일자 4면




신축 계획 중의 동경 기독청년회 만천하의 동정을 희망, 재(在) 동경 기독교 청년회 총무 최승만


  동경 기독교 청년회 총무인 최승만은 이 글에서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으로 불타 폐허가 된 동경 기독청년회관 재건을 위한 국내의 지원을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이같은 그의 기특한 노력이 당시 송진우 사장의 관심을 끌어 동아일보는 그에 대한 관심을 계속 가졌고 그들 부부를 동시에 동아일보에 입사시키는 파격적 인사가 있었습니다.




1928년 8월 25일자 3면, 기독교도에게 제1회 최승만(전 4회)




1930년 9월 9일자 2면, 미국시찰 마치고 최승만 씨 귀래(歸來)




1933년 12월 22일자 2면 사업후원회 조직, 6대 사업 계획






1934년 2월 9일 2면, 동경 기청(基靑) 최승만 씨 부처, 연극과 위안 음악의 밤




  최승만-박승호 부부가 입사한 1934년 당시 상황


 “아예 원고는 두벌을 만들어 하나는 인쇄소에, 하나는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에 제출해야했다. 검열은 순순히 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열흘이건 스무날이건 마냥 묵혀두고 애를 먹인 다음 원고 압수니 게제금지니 삭제를 자행했다. 그러다 보면 책은 연판이 깎인 부분, 먹칠한 자국이 수두룩하게 되었다. 동아일보가 폐간되던 1940년까지 20년 동안 총독부의 관리로 있던 니시무라(西村眞太郞)라는 일인이 검열관이었다. 이 자는 동경관립외국어학교 조선어과를 나와서 우리말을 잘하고 술좌석에서는 우리 가락 흉내도 곧잘 냈다. 최승만과 니시무라와는 외국어학교 동창이라는 인연이 있었다. 아무리 외국인이라도 동창이란 반가운 법인데 만나자마자 초면인 최승만에게 덮어놓고 ‘자네는 빨갱이군’하더라니 그 위인 됨을 알 수 있다. 최승만은 노어과 출신이었다.”(이문환 동아일보 여성동아부 차장, ‘옛 신가정 새 여성동아’, 여성동아 1972년 11월호)




 동아일보 1934년 12월 30일자 4면, 평범 불회-극웅(極熊) 최승만

 “오랫동안 해외에서 지나던 몸이라 19년 만에 금년, 처음으로 조선서 가족들과 같이 안정된 가운데서 묵은해를 보내게 되는 모양이다.…(중략)…요즘에는 신동아 신년호를 마치어 놓고 이월호 편집에 열중한지라 세모는 벌써 수 삭전에 지난 것 같은 감도 없지 않게 된다. 다 못 며칠 전 밤에 아이들 데리고 화신을 가보고서 다소의 세모기분을 맛보았으며 아래층 신문사 편집실에서 신년호를 편집하느라고 눈이 벌게서들 야단치는 것을 보고 얼마만큼 세모의 기분을 맛보게 되었다.”


 “동경에서부터 잘 알고 지내던 박찬희(朴瓚熙), 현진건(玄鎭健), 설의식(薛義植), 양원모(梁源模), 고영환(高永煥), 홍익범(洪翼範) 씨 등이 있어서 그리 스스럽지가 않았다. 그런데 봉급은 100원이라 동경에서 180원 받던 나로서는 별안간 줄어드는 것 같아서 좀 박봉이 아닌가도 생각되었으나 이것은 크게 후대하는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신문사 초창시대부터 일하시는 노인 김철중(金鐵中) 씨도 서무부장으로서 100원밖에 아니 되니까 처음 입사해서 100원이라면 특별대우라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보니 오히려 송 사장의 후의를 잊어버리는 것 같아서 그 후로는 일체 보수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신동아’ 편집실은 3층에 있었다. 서향으로 큰 거리가 내다보이며 멀리 무악재 고개가 보인다. 기자로는 고형곤(高亨坤) 씨와 최영수(崔永秀) 씨 두(286쪽) 분이 있었다. 고 씨와 나는 주로 편집 일을 보게 되었고 최 씨는 만화를 맡게 되었다. 사진은 신문과 공동으로 쓰게 되었고 삽화는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노수현(盧壽鉉), 이마동(李馬銅) 세 분이 담당하게 되었다. 매주 월요일 오후에 한 번씩 신문과 잡지 편집자들이 모여서(주필과 조사부장 포함) 편집에 관한 일을 토의하게 되는데 다른 신문사보다 특수한 기사가 무엇이었으며 또 어디가 더 신속히 보도되었느냐가 주로 얘기되곤 하였다. ‘신동아’ 편집은 매삭 한 번씩 편집국장, 각 부장 중에서도 경제부장 고재욱(高在旭), 사회부장 현진건(玄鎭健), 조사부장 이여성(李如星) 씨가 참석하여 잡지에 대한 의견을 듣게 되었다. 설의식 편집국장과 이여성 조사부장의 발언이 늘 많은 참고가 되었었다. 그 때의 동아일보사는 조선총독부에서 특히 배일(排日)단체로 보았으며 애국동지들이 모인 곳이라고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써 민중들이 신뢰를 받았고 권위가 있었다고 할 것이다. 공정하게 기사를 취급해야 된다는 것이 사시(社是)가 되기 때문에 누구의 청탁을 받거나 돈을 받고서 글을 쓴다는 일은 전혀 없었고 들어본 일조차 없었던 것이다. 자동차도 그리 없었던 때이지마는 급한 일이 생겨서 타게 될 때에는 동아일보 기자라는 명함 한 장으로 어디나 돈이 없어도 왔다 갔다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고 모으는 일이 용이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권위 있는 잡지를 만들기 위하여는 아무에게나 부탁할 수도 없는 일이라 이것을 생각하면 그 범위가 그리 넓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늘 모자라는 때가 많았는데 이런 때는 자연 보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권두언(卷頭言)은 내가 늘 쓰게 되었지마는 페이지 수가 부족하면 여러 가지 글을 쓰게 되므로 여러 가지 이름을 쓰게 되었다. 극태(極態), 인왕산인(仁旺山人), 필운생(弼雲生), S.M.생(生) 등으로 표시했던 것이다. 원래가 재주가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노력하는 편이라고 할까. 잠자는 시간 외에는 집에 와서도 편집 재료 수집에 시간을 쓰고 신문사에서도 서고(書庫)에서 살게 된다. 총독부 검열관의 심한 제재를 당해본 사람이 아니고는 잘 모를 것이다. 조금이라도 배일(排日)적 문구가 있다면 가차 없이 삭제다. 일본인(287쪽)을 일본이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고 이상할 것이 없겠건만 이것을 반드시 일본내지인(日本內地人)이라고 써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온사상을 가졌다고 통과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얼마나 그 사람들의 배일(排日)사상을 경계하고 억눌렀던 것을 짐작할 것이다. 삭제는 항다반(恒茶飯)의 일로 늘 있는 것이요 압수도 종종 당하게 되는 일이다. 정간 폐간까지 당한 동아일보의 과거를 생각하면 얼마나 총독부의 혹독한 탄압을 당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언론의 자유라는 것은 조금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요 자기네 식민지 정책에 순응하는 글이라야 좋다고 하는 판국이었으나 글자 하나 쓰고 글구 하나 만드는 데도 적지 않은 신경을 쓰게 되어 언제나 전전긍긍의 태세로 지나게 되니 그야말로 살얼음 딛는 심정이 아닐 수 없었다.” 


 최승만-박승호와 동아일보와의 인연은 그들의 동경유학시절부터 있었습니다. 


  “요시노(吉野, 법학교수, 신진 사상가) 박사를 찾아갔다. 조선의 여학생으로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데 혹 학비 보조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더니 박사는 지체하지 않고 얼른 대답하기를 당신이 소개하는 사람이라면 더 물을 필요 없이 장학금을 주겠다고 한다. 당신이 추천하는 사람이라면 더 묻지 않고 주겠다는 말에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이 났다. 맨 처음 장 형(장덕준-인용자 주)의 소개로 내가 길야 박사를 만났을 때 일본 사람의 돈이라 아니 받겠다고 거절한 것이 박사의 마음에 무슨 느낌이 있었는가, 혹은 장덕준 형이 박사에게 나를 소개할 때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이도 어린 학생에게 당신의 말이라면 두말하지 않고 듣겠다고 한 것이 내게는 퍽 과분하다는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사람은 언제나 무게 있는 말을 해야 하고 무게 있는 행동을 해야만 남에게 대접을 받는 것이라고 느껴졌다. 하여간 생각한 대로 잘 되었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길야 박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서 자리를 떠났다. 이 결과를 장 형과 박 양에게 전달했다. 박 양을 나도 곧 만나게 되리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다소 흥분되기도 한다. 장 형은 김성수 씨에게서 박 양의 여비로 100원을 얻어서 서울을 떠나도록 해주었다.” (최승만, ‘나의 회고록 중)




신동아 1980년 4월호 298~305쪽,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좌담회’, 최승만


설산 장덕수 씨하고 東京에서 친했는데 雪山이 귀국할 때 얘기를 나눴어요. 설산은 조선에 가서 ‘황서신문(黃西新聞)’을 하겠대요. 황해도 분이니까 그랬겠지요. 그래서 내가 이왕 신문을 한다면 거국적으로 하는 신문을 해야지 이름까지 황서(黃西)라고 할 게 뭐냐고 대답한 기억이 있어요. 그런데 그가 귀국한지 얼마 안돼서 仁村 댁에서 지금 동아일보사 창간에 분주해서 양기탁 씨 등 여러 사람을 찾아다닌다는 편지가 왔어요. 속으로 기뻤습니다. 저는 1934년에 입사를 했기 때문에 그 당시의 경위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내 느낌으로는 당시 우리나라 사람의 의식에는 민중보다 민족이 훨씬 강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고 민족의 대변지 ‘동아일보’도 당연히 민중보다는 민족을 이야기했을 것으로 생각집니다. 3.1운동을 계기로 해서 민족의식이 더욱 고조되었던 때에 창간된 신문이었으니 ‘동아일보’ 하면 어쨌든 겉으로 뚜렷하게 표방은 못하지만 일종의 독립운동회의 성격을 가졌어요. 또 거기 모인 사람들도 스스로를 독립지사로 인식하고 있었고 ‘동아일보’ 기자하면 아주 권위가 있었어요. 아까 徐 선생은 반대의 경우를 얘기했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의 말이고 어느 지방을 가더라도 존경을 받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동아일보’는 우리 민중을 끌고 나가는 최고의 집단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人적 구성을 보더라도 팔팔한 동경 유학생들이 많았어요. 동경 유학생이 배일사상이 아주 농후했다는 것은 일본 사람들도 인정할 정도 아니었어요? 따라서 ‘동아일보’가 어쨌을 것인가는 짐작이 갈 것입니다. 인촌 선생은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 가운데 한 분입니다. 그 분은 사심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또 난 체 한다거나 하는 것이 없이 아주 평민적이었습니다. 나이가 많이 차이가 나지는 않았지만 차이는 있는데도 그저 친구로 대해주셨지 선배니 사장이니 해서 우쭐하는 모습을 도무지 그 분에게서는 찾을 수가 없었어요. 예를 들면 그때 우리 집이 사직골에 있었는데 인촌 선생이 자주 들르셨습니다. 나는 기자고 그 분은 창설자이시자 중책을 맡으신 데다 위품이나 연령으로 해도 비교가 안 되지만 그 부근에 오시면 꼭 찾아 주셨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서가 아니고 “잠깐 여기까지 왔다가 내 들르는 길일세” 하셨어요. 그런 일은 말이 쉽지 행동은 퍽 어려운 일이 아닐까 생각돼요. 또 그 분처럼 자신의 힘자라는 대로 각 방면에 돈을 쓰시는 분도 드물 것입니다. 언론을 위시해서 학교와 산업에 이르기까지 힘이 있는 데로 전력을 다하셨어요. 학생들도 많이 도와주셨어요. 저도 인촌 선생께 신세진 일이 있어요. 인촌 선생이 저에게 1백 원을 준 적이 있어요. 큰돈이었어요. 이런 큰돈을 잘 모르는 학생에게 선뜻 내주신 것을 볼 때 사람을 길러야겠다는 장학의 필요성을 절감한 인촌의 심정이 아닌가 느껴져요. 송진우 씨가 3.1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일반인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원래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고하는 현상윤 씨와 민족의 장래에 대한 의논을 자주 했고 최남선 씨나 최린 씨를 만나 민족독립을 위한 운동을 타진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당장은 곤란하지 않느냐는 부정적인 대답을 했다는 거에요. 이런 때에 東京에서 2.8 운동이 시작이 됐고 본국과의 연락을 위해서 송계백(宋繼伯) 씨가 돌아왔습니다. 송계백 씨가 현상윤 씨와 고하와 인촌을 만나고 최남선 씨에게 갔답니다. 최남선 씨는 처음에 못한다고 했는데 2.8 운동의 선언서를 보고서는 “학생들이 이러고 있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 우리가 해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그 길로 최린 씨에게 갔어요. 최린 씨도 찬동해서 얘기가 성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쪽의 이승훈 씨는 “현상윤과 송진우가 있으니 기독교 쪽은 내가 책임지겠다.”고 나섰다고 합니다. 3.1운동에 고하가 큰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지요. 그런데 고하는 은근하고 믿음직스러운데다 누구를 한번 신뢰하면 믿고 나가는 대신에 교제성이 있다든지 말을 정답게 하는 점은 별로 없었어요. 일장기 말소 사건은 우리 언론역사에 남을 일이었습니다. 이길용 씨와 이상범 씨가 주역이었는데 일제의 압박이 극심한 그때 이런 사람이 나올 수 있었던 ‘동아일보’의 분위기는 정말 좋았습니다. ‘동아’는 3.1정신에 입각해서 세워진 신문입니다. 따라서 이제까지 3.1정신으로 신문을 제작하는 노력을 많이 해왔습니다. 따라서 ‘동아’에게 부탁하고자 하는 말은 우리 민족이 지금 어떤 위치에 처해 있느냐, 또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잘 알고 있느냐, 공연히 남의 소리에 귀를 더 기울이고 남이 떠드는 데 더 흥미를 갖는 것은 아니냐 하는 것을 반성해야겠습니다. 성서에 있는 말과 같이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것도 안 됩니다. 우리도 우리의 특정한 역사적 배경, 역사적 전통을 잊지 말고 우리 것을 기초로 한 새로운 우리 것을 만드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고 ‘동아’는 이 일에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합니다.”




신동아 1936년 9월호, 6쪽 권두언(극웅極熊 최승만)


 ‘마라손에 제패한 손기정 군’

“독일 백림에서 열린…(중략)…11일 새벽 신문의 호외는 손 군 1착, 남 군 3착의 쾌보를 전해 주었다.…(중략)…조선은 오랜 역사가 있고 우수한 문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중략)…이때를 당하여 한 번 더 느껴지는 것은 조선 사람은 어디로나 결코 남만 못하지 않은 우수한 민족이요 더욱 체력에 있어서도 그렇다고 할 것이다.…(중략)…진정한 스포츠의 정신이 널리 조선 민족에 보급되어 실망치 않고 분투노력 할진데 어는 방면에 있어서나 남부럽지 않은 우수한 지위를 점령하게 되리라는데 의심이 없는 바이다.”


 “나는 그때 신동아 9월호 편집을 마치고 인쇄소에 넘긴 후 약간의 틈을 타서 서울중고등학교(그때는 일본인 경성중학) 근처에 있던 한경순 의학박사가 운영하는 지성의원에 입원하여 기생충, 특히 십이지장충을 없애고자 하였다.…(중략)…이런 때에 신동아 심부름하는 아이가 와서 화보의 최후 교정을 해달라는 것이다. 나는 9월호 교정을 완전히 마치고 4 페이지의 화보만 신동아 기자 최형종 이무영 두 분에게 부탁하고 입원하였던 것이다. 나는 머리가 훵하고 현기증도 나서 드러누워 있는 때라 최, 이 두 분이 잘 했으려니하고 ‘OK’라고 써서 보냈다” (잡지부장 최승만, ‘나의 회고록’, 인하대출판부, 1985년, 303쪽)  


 “신동아(新東亞)가 처분된 까닭은 마찬가지로 권두구회(卷頭口繪)로 낸 사진의 일장기를 동양(同樣) 말소하야 비국민적 태도를 취한 데 있었다.”(‘중첩한 바도 언론계의 불상사, 동아일보 정간, 중앙일보 휴간’, 삼천리 1936년 11월호, 28~29쪽)


 “이날 밤 늦게 잡지부장 최승만 씨(본사 간행잡지 신동아 책임자)가 붙들려왔는데 씨는 나의 감방으로 들어오더니 저성으로 사진과원 송덕수 씨도 잡히어 옆 감방 장용서 씨 있는 데로 들어갔다고 말하여 준다.…(중략)…이 분들이 붙들려온 이유는 첫째로 최, 송 양씨는 ‘신동아’에 낸 손 선수의 사진에 일장기 ‘마아크’가 좀 선명치 않다는 것이고…” (이상범, ‘일장기말소사건 20년 전의 회고기’, 1956년 8월 19일자 4면)


 “당시 동지(同誌)의 편집 책임자 최승만 형과 동지 사진반 송덕수 씨까지 잡혀 들어오니 단 여섯 방 밖에 없는 경찰부 유치장은 대거 10명의 사우(社友)로서 난데없는 매의 합숙소가 되었던 것이다.” (이길용, ‘세기적 승리와 민족적 울분의 충격, 소위 일장기말살사건’, 매 5쪽)




최승만, ‘3대 민족지의 언론투쟁’, 신동아 1969년 10월호, 316~327쪽, 최승만, 극웅필경(極熊筆耕), 보진재, 1970년, 675~681쪽


젊은 사람들의 뛰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으며 울분한 심정을 참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이것이 동아일보 사회부 소속 운동 면을 담당한 이길용 기자의 일장기 말소사건을 빚어낸 것이다. 손 선수의 가슴에 일장기를 붙이고 찍은 사진을 신문에 낼 터인데 이 일장기에 대하여 분통이 터진다는 것이다. 없애버리기도 어렵고 두기도 싫어서 희미하게 있는 둥  마는 둥하게 만들어서 8월 24일 신문에 낸 것이 당국의 눈에 거슬려 반일적 행동이요 비국민적 불경사건이라 하여 8월 26일 동아일보에 제 4차 무기정간의 행정처분을 내리게 된 것이다. 여러 관계자들이 붙들려 가서 문초를 받게 되었는데 말하자면 맨 처음 체육담당 이길용 기자는 우승한 손 선수가 월계관을 쓰고 흰 런닝샤쓰의 오른쪽 가슴에 일장기를 붙이고 찍은 사진을 한 장 들고 삽화담당 이상범을 찾아가서 나지막한 소리로 말을 꺼냈다.

“이 사진을 좀 보슈, 일장기가 눈에 좀 거슬리는데-”



이 말을 들은 이상범은 그 뜻을 알아차리고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것을 지우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흰 색깔로 문질러 버리면 되는 것이 아닌가. 두 사람의 뜻은 말없는 가운데 맺어지게 되었다. “자 그럼-” “알았소이다” 말은 간단히 끝낸 후 사진부를 통하여 손 선수의 오른쪽 가슴의 일장기는 지워지고 말았다. 총독부는 원래 동아일보를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송 사장을 위시하여 불온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신문사라고 주목을 받고 잇던 차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당국으로서는 탄압하기에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문사 사원들은 “일 났군, 단단히 걸리겠는데”하고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수군거렸던 것이다. 총독부에서는 누가 이런 일을 지휘했을까. 누가 일장기를 지웠으며 또 사진취급을 누가 했을까. 이것이 당국자의 날카롭게 추궁하는 점이었다. 날짜는 잘 생각나지 않지마는 내가 ‘신동아’ 9월호 편집을 마치고 교정까지 완료한 후 화보 4페이지만 이무영(李無影) 최형종(崔衡鍾) 두 신동아 기자에게 부탁하고 서울중학(그때는 경성중학) 부근에 있는 지성의원(至誠醫院)에 입원하여 12지장충 없애는 약을 먹고 쉬고 있었을 때였다. 드롭스 같이 생긴 약을 먹었는데 냄새가 몹시 나고 비위가 뒤집히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머리가 어찔어찔하여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위에서는 구역질이 자꾸 나서 정신없이 있을 때 화보의 최후 교정을 해달라고 심부름하는 아이가 왔다는 것이다. 이, 최 두 기자가 다 잘 했겠지 하고 사진은 잘 보지도 않은 채 또 볼 정신도 없어서 ‘오케’만 써서 보냈던 것이다. 수 3일 후의 일인 줄 안다. 신문사에 나갔더니 오후 세시쯤 되어 내가 잠시 자리를 떠난 사이에 경기도 경찰부에서 형사가 와서 나를 찾으면서 내일 오전 9시 도 경찰부에 반드시 나와 달라는 말을 하고 갔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직감으로 ‘신동아’화보의 손, 남 두 선수의 사진이 신문에 난 것과 같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게 되었다. 틀림없이 ‘신동아’화보에도 신문에 난 것과 같이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이 나타나게 된 것을 비로서 알게 되었다. 나 개인으로서는 실상 말소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물론 분한 생각이야 말할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속에서 복받치는 생각대로 한다면 태극기라도 그려서 내고 싶었지마는 책임상 그럴 수도 없는 것이 아닌가. 당장에 그 화가 신문사에 올 것이니 사장에게 부하로 있는 자로서 미안한 노릇이고 이로 말미암아 신문사에 큰 손해를 끼치게 될 터이매 이것을 무릅쓰고라도 해야 할 것인가에는 의문을 아니 가질 수 없게 된 까닭이다. 사장의 암시나 명령이라도 있다면 또 몰라도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의대로 하겠는가 하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내가 알았건 몰랐건 간에 신동아에도 이런 말소사진이 났으니 책임자인 나로서는 이 책임을 면할 수는 없게 된 것이다. 나는 곧 송진우 사장에게 이에 대한 경과를 보고하고 아마 얼마동안 고생을 좀 각오해야 되겠다고 인사를 한 후 집으로 일찍 돌아오고 말았다.…(후략)




최승만, 일장기말살사건, 동아일보 1965년 4월 10일자 6면


(전략)…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 서리는 암영과 울분은 금할 길이 없었다. 제 나라 제 민족의 이름으로 나가지 못하고 남의 나라 남의 민족의 이름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인의 표지(標識)는 못 붙이고 일본인의 일장기를 붙이고 나가게 되는 심정 어찌 분통 터질 일이 아니리요. 손 군 제패의 일이 신문의 사설로 기사로 또는 화보로 계속 떠들게 되었었다. 그런데 8월 25일 신문 사회면에 나타난 손 선수 사진의 가슴에 달려있던 일장기의 표지가 지워 있었던 것이다. 뒤좇아 나온 ‘신동아’ 9월호 화보에도 손 남 양선수의 가슴에 있던 일장기가 또한 말소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체육담당의 이길용 기자(6.25때 납치됨)가 삽화담당 이상범 씨에게 쑤군쑤군 얘기 한 것으로부터 일이 생기게 된 것이다. “손 남 두 선수 사진에 나타난 일장기가 아무리 보아도 눈에 거슬리고 화가 치밀어 올라 못 견디겠으니 어떻게 해보자”는데 공감되어 단연 붓을 들어 일장기를 지워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총독부 당국은 발칵 뒤집혔다. 노기 찬 전화가 그칠 새 없이 왔다 갔다 하고 형사들이 여러 번 들락날락하다가 급기야는 몇몇 사람이 경기도 경찰부에 구금되었던 것이다. 이길용, 이상범, 사회부장 현진건, 사회부기자 임병철, 사진부장 신낙균, 사진부원 백운선 송덕수. 신동아 책임편집자인 필자 등 8인이었다.…(후략)


 최승만은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와 함께 무기정간된 신동아와 신가정이 일제하에서 더 이상 나오지 못하자 동아일보를 떠났고 그의 부인 박승호는 1940년 8월 동아일보가 페간될 때까지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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