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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작가

주요섭(朱耀燮, 1902~1972)


1931.10. 신동아 기자, 잡지부장, 1934. 8. 퇴사 


 




미망인이 보내온 ‘망미(亡未)의 일생’


 “미국 스탠포드대학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고 돌아와서 1931년부터 동아일보사 잡지부에서 주간으로 일하게 됐다. 신동아 잡지를 창간하기 시작하여 34년까지 모든 책임을 맡아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발간되는 신동아의 산파역을 맡아한 것이다. 그 당시 현재 광화문 네거리에 서있는 구 동아일보사 2층이 신동아의 산실이었는데 고형곤 씨 한분을 데리고 글을 쓰고 각 곳으로 기사 취재 방문도 하러다니고 원고가 다 모이면 조선총독부 검열과에 원고 전부를 가지고 가서 검열을 받아야 했다. 어떤 때는 너무 많은 기사들이 검열에 걸려서 붉은 잉크로 덮여져 있는 때도 많았다. 그때마다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 자기 이름 외에 그의 아호인 여심이나 양두식(梁斗植)이란 가명으로 숨 가쁜 원고제작에 정신없었다. 그밖에 외지(外誌)를 번역해서 공백을 채우기도 했다. 양두식이란 이름은 자기모친의 성인 양씨를 따라서 만든 또 하나의 이름이다. 그 외에도 동아일보 사설이나 여러 잡지에도 이상의 세 가지 이름으로 글을 많이 썼던 것으로 안다. 그때는 지금처럼 자동차가 흔하던 때가 아니어서 방문기(인터뷰)를 써야만 할 때는 5천 짜리 전차 삯을 내고 전차로 다녀야 했다. 그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송진우 씨는 자가용 인력거를 가지고 있어서 혹시 어떤 때는 기자가 방문기를 쓰기위해 가정방문을 할 때 사장의 인력거를 내주어서 타고 다닌 일도 있었다. 그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에는 서 춘, 이길용,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씨 등이 있었는데 모두 술을 좋아하셔서 회사일로 명월관 같은 데를 가게 되면 만취가 되도록 술을 마시는데 남편은 술을 반잔도 마시지 못하는 체질이라서 항상 안주나 축내고 술 취한 사우들의 뒤치닥꺼리나 하는 형편이었다 한다. 잡지는 순조롭게 발간되고 호평을 받자 그 이듬해에 신가정을 또 발간하기 시작했다. 이때 이은상이 주간으로 들어오게 되어 삽화를 그리는 이상범과 모두 한방을 쓰게 됐다. 그래서 잡지부의 일은 더 범위가 넓게 되었고 여러 가지 기사를 쫓고 원고를 모아 들이느라고 항상 긴장이 되었다. 잡지사 주관으로 신문사 3층 홀에서 여러 가지 강습회도 주관해서 실시되었고 가을에는 신가정 주최로 안양 등지에서 주부들을 위한 습율대회(밤줍기 대회) 같은 것을 주관해서 치르기도 했다. 35년부터는 북경에 있는 보인대학에 가게 되어 그 대학에서 영문학 교수로 43년까지 있다가 일제가 북경을 점령하면서 남편은 상해임시정부와 관련이 있다는 혐의로 7개월간 일본헌병대에 수감되어 모진 악형을 받고 한국으로 추방명령을 받아서 귀국하였다. 50년에는 코리아 타임스 영자일간지의 논설위원이 돼서 부산피난 때까지 영문으로 발간되는 신문에 많은 일을 맡아서 했다. 다음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공산군이 압록강 근처까지 후퇴했을 때는 유엔군 8군 비행기로 평양에 올라가서 신문기사를 취재하기도 했다. 그리고 중공군이 투입되어서 쳐내려 왔을 때 남편은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내려와서 아슬아슬하게도 하마터면 이북에 잡혀 있는 몸이 될뻔하기도 했으나 가까스로 모면했다. 61년에는 코리안 리퍼블릭 영자 일간신문사의 이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영자신문을 발간하는데 많은 힘을 썼다. 상해 호강대학과 미국에서도 일류인 스탠포드대학에서 석사를 받은 박학과 유창한 영어실력은 남편이 영문신문을 만드는데 많은 공헌을 했을 것으로 안다.”   




  1902년 11월 평양에서 태어나 숭실중학, 도쿄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을 다녔던 주요섭은 중국 호강대학 유학시절인 1923년 11월 상해체육경진회(上海體育競進會) 주최 도보경주에서  2등을 한데 이어 1924년 12월 중국 남방 8대학 마라톤에서 1등을 했습니다.






동아일보 1923년 11월 19일자 3면




조선 학생 신형철(申瀅撤) 주요섭(朱耀燮)이 1, 2등을 다 차지






동아일보 1924년 12월 25일자 2면




  1착은 주요섭 군, 상해서 거행한 중국 남방 8대학 마라손




  1925년 상해 호강대학을 졸업하고 미 스탠포드대학에서 교육학 석사과정을 공부하던 주요섭은 미국 문명에 대한 소견을 8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기고했습니다.






동아일보 1930년 2월 6일자 4면 미국 문명의 측면관(側面觀) 제1회




  이어 교육학 전공자 답게  ‘시험철폐와 그 대책’을 20회, ‘의무교육을 목표’를 12회나 동아일보에 게재, 시대를 앞서 가는 주장을 폈습니다. 






동아일보 1930년 10월 19일자 4면






 1931년 3월 28일자 1면




  주요섭은 스탠포드대학서 석사학위를 받고 1931년 10월 귀국해 동아일보 입사했습니다.




 “내가 김활란 박사를 처음 뵌 것은 지금으로부터 1931년 전 추운 겨울날이었다. 월간 잡지 신동아 편집 책임자로 동아일보사에 입사하고 나자 맨 처음 인터뷰하러 찾아갔었던 분이 바로 김활란 박사였기 때문에 내 인상에 깊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 당시, 왜놈의 학정 밑에서 신음하고 있던 우리 겨레가 가지게 되었던 단 한 분, 그리고 맨 첫 번 여자 박사님! 김 박사가 미국서 박사학위를 따 가지고 귀국하자 학계는 두말 할 것 없고, 언론계도 흥분했고 지성인 전부가 통틀어 감격했던 것이다. 흔해 빠진 것이 박사요, 또 여자 박사도 상당히 많아진 오늘의 인사들은 삼십년 전 첫 여자 박사를 맞이하는 그 당시 민족적인 흥분과 프라이드를 상상조차 못할 것이다. 지금 이화여자중고등학교가 서 있는 정동 이화여자전문학교 교무실에서 나 혼자 김 박사 인터뷰를 하게 되었는데 첫인상이 키가 너무 작고 몸집도 매우 작은 편이었지만 몸 전체가 지성의 화신(化身) 같았고 기자 다루는 솜씨가 여간 아니요, 좌담이 남을 매혹시키는 어떤 면을 발견했다. 그 후 며칠 뒤 사회 각계 연합 주최로 ‘김활란 박사 귀국환영만찬회’를 명월관에서 열었는데 참석한 손님 오백여 명의 대성황이었고 그날 저녁 답사로 하신 연설은 웅변이면서도 조리가 선명하게 선 명강연이었다.” (내가 아는 김활란 박사-막사이사이상  수상을 기뻐하면서, 동아일보 1963년 8월 6일자 5면 )




동아일보 1963년 8월 6일자 5면






 1932년 1월 1일자 부록 1면, 군비축소회의의 유래와 현세(現勢))






 1932년 1월 1일자 부록 2면, 근대를 주출(鑄出)한 민주주의 기조(사진: 룻소)






 1934년 3월 24일자 3면 교육시감(敎育時感) 8회 연재






주요섭(朱耀燮) ▲1931.10 신동아 근무, 1934. 8. 퇴사

김자혜(金慈惠) ▲1932.  4 신동아 근무, 1934. 7. 퇴사




  “당시 기자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주요섭과 김자혜였다. 주요섭과 김자혜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송진우 사장은 사내에서의 남녀관계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엄격했다. 결국 두 사람의 결혼은 두 사람 모두가 퇴사를 한 후에야 이루어졌다.” (고형곤 전 전북대 총장, 당시 신동아 기자, ‘민족의 잡지, 일제하의 신동아’, 신동아 1991년 11월호) 




  김은우(金恩雨) 전 이화여대 교수는 “1990년 미국 LA에서 부인(김자혜)의 초청을 받아 우리 내외가 같이 가서 점심을 먹고 그녀의 노인 아파트에 들렀을 때는 혼자 살면서도 마치 신부의 방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웠으며 가끔 딸이 꽃을 가지고 와서 방을 새롭게 꾸며준다면서 행복감을 감추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동아일보 1925년 3월 20일자 2면




 아래 가운데가 김자혜






동아일보 1995년 8월 17일자 7면 김자혜 할머니 인터뷰




  독립운동가 김조길(金祚吉) 선생 딸 재미 김자혜(金慈惠) 할머니


  “여기자가 두 명 밖에 없었기 때문에 특별대우를 받았어요. 취재 나갈 때 다른 기자들은 5전짜리 전차를 타고 다녔는데 저는 송진우 사장이 내준 전용인력거를 타고 다닌다고 남자기자들의 불평이 많았었지요”

  독립운동가 김조길 선생의 장녀로 광복50년을 맞아 정부의 해외 거주 독립유공자 초청행사에 참석중인 김자혜 할머니(85·미국 로스앤젤레스 거주)는 30년대 초 동아일보 ‘신가정’(여성동아 전신)지 기자였다. 16일 숙소인 소피텔 앰배서더호텔에서 김 할머니를 만나 당시 얘기를 들어보았다.

  “아직 남녀가 유별하던 때라 기자의 성별에 따라 기사가 분담됐어요. 저는 여류명사 가정 탐방을 주고 했고 사회부에 있던 여기자는 여성관련 사건을 주로 맡는 식이었어요”

  김 할머니는 30년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하고 32년 4월부터 34년 7월까지 신가정에서 근무했다. 당시 여성들의 개화에 앞장섰던 신가정은 집안에만 있던 가정주부들을 밖으로 끝어내기 위해 광화문사옥 4층 강당에서 요리강습 양재강습 등을 자주 개최했었다고 회고한다.

  “일제의 서슬이 시퍼렇던 때라 총독부에서 매일 신문기사를 검열했죠. 중간중간이 시커멓게 지워진 신문대장을 들고 술에 잔뜩 취한 채 편집국에서 비탄에 젖은 목소리로 유행가 가락을 흥얼거리던 정치부 기자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그러나 김 할머니의 기자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늑막염에 걸린 데다 신동아 주간으로 있던 소설가 주요섭씨와의 ‘비밀교제’가 알려질 것같아 미리 사표를 냈다고 한다. 지하신문을 발간하다가 10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주 씨는 일제의 계속되는 감시를 피해 북경으로 갔고 36년 YWCA회관에서 두 사람은 결혼했다.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아네모네의 마담’ ‘추물’ 등 주 씨의 대표작들이 대부분 김 할머니와의 연애 신혼시절에 쓰여졌다.

  김 할머니의 기억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는 아버지 김조길 선생의 모습은 그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할 때라고 한다.

  “어머니가 한복차림의 아버지를 부축하고 나오시는데 서대문형무소 언덕에 흐드러지게 핀 아카시아 꽃향기가 어찌나 강렬하던지 아직도 그 향기가 코끝을 맴도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73년만에 다른 유족들과 형무소터에 다시 가보았는데 그많던 아카시아나무는 간데 없고 널찍한 공원이 되었더군요” (김세원)


  “미국서 돌아오자 집사람(김자혜 여사)이 신동아가 복간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여간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신동아에는 창간호부터 관여했었다. 그때도 미국서 갓 돌아 왔을 때였는데 송 사장의 부탁으로 일하게 되었었다. 설의식 선생 주관 아래 창간호의 교정을 보고 있을 때였다. 다음호부터는 설 선생의 지도를 받으면서 내가 맡아보았는데 원고 부족 총독부 검열 등 어려운 일이 많았다.  실명 외에 용악산인(龍岳山人) 양두식(梁斗植) 멍텅구리 등 가명, 필명으로 마구 쓸 밖에 없었는데 한번은 양두식 선생이 어떤 분이냐고 문의가 와서 모두 웃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들이다. 원고를 모아놓고도 고생이었다. 원고 검열이어서 손을 나누어 복사하고 한편으로 조판, 한편으론 검열을 진행시켰다. 신문사에서 하는 거라 보아 준다는 것이 자그만치 한 달이나 걸리곤 했다. 그만두라는 이야기와 같았다. 총독부의 눈을 속이려고 투고의 자구를 요리조리 수정하느라 모두 땀을 빼기도하고. 자유천지 미국에서 돌아온 직후여서 더했겠지만 부자유스럽기가 감옥 같았다. 2년 뒤 중국으로 떠났다.” (작가, 초대 잡지부장 주요섭)


  주요섭 선생 관련 자료에 기록돼 있지 않아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지만 동아일보 1922년 7월 21일자 1면 사고에 그의 고향인 평양 숙천분국 기자에 ‘주요섭(朱耀燮)’이란 이름이 나와 있는 것으로 봐 숭실중학 3년 때 동경으로 가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에 편입, 3·1운동 후 귀국해 등사판 지하신문을 발간하다가 10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상해 호강대학으로 가기 전 잠시 평양 숙천분국의 기자로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합니다.






 동아일보 1922년 7월 21일자 1면






  1934년 8월 퇴사한 주요섭은 북경 보인(輔仁)대학 교수가 됐습니다.






1934년 9월 28일자 2면






 1934년 10월 24일자에는 북경의 아편장사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동아일보 1935년 2월 17일자 5면 ‘구름을 잡으려고’는 1935년 8월 4일까지 156회 연재됐습니다.






 1937년 10월 1일자 3면 벼알삼형제(전13회)






 1938년 5월 17일자 4면, 주간 단편  ‘의학박사’ (7회 연재)






 1939년 9월 6일자 3면에서 시작, 1939년 11월 23일자까지 61회 연재됐던 장편소설 ‘길’은 1953년 2월 20일자에 다시 이어져 1953년 8월 7일자까지 169회를 연재하는 진기록이 됐습니다.







 “그의 이력을 보면 천재나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는 옛말날에 있듯이 달자무착(達者無着)이란 말이 그대로 해당되는 것 같다. 어떤 직위도 어떤 유혹적인 좋은 조건도 이분을 한곳에 잡아매어 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깨끗하고 청렴하고 굽힐 줄 모르는 그의 지조는 누구도 따를 수가 없다. 남 같으면 모두 부러워하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아주 조그만 일에서라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생기면 그 자리를 훌훌 털어버리고 아무 미련 없이 일어나는 위인이었다.” (김은우 전 경향신문 논설위원, 한국언론인물사화 8.15전 편-하, 한국언론인회, 1992년)




  그의 단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신상옥 감독, 최은희 김진규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져 1962년 제9회 아시아영화제 최우수작품상, 제1회 대종상 감독상, 각본상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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