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메이드 인생’ 채만식(蔡萬植)
채만식의 대표작 ‘레디메이드 인생’은 ‘신동아’ (1934년 5~7월호에 3회)를 통해 발표되었습니다.
신동아 1934년 5월호 232쪽
실직자 P.
이력서를 들고 이곳저곳 찾아다니지만 모두 거절당하자 자신이 인텔리인 것을 원망한다. 아들만은 자신과 같은 인텔리 실업자를 만들지 않겠다며 어린 아들을 인쇄소에 맡기고 돌아오면서 ‘레디메이드(기성품) 인생이 비로소 임자를 만나 팔리었구나’ 라고 중얼거린다.
일제 강점기 인텔리의 비애를 풍자적으로 그린 작품으로 독자들의 반응은 컸습니다.
‘레디메이드 인생’ 채만식은 1925년 7월 동아일보 기자가 됐습니다.
정치부 기자였던 채만식의 당시의 기명기사는 찾을 수 없지만 퇴사 이후에도 채만식은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작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1931년 2월 14일부터 21일까지 5회에 걸쳐 연재한 ‘평론가에 대한 작자로서의 불복’은 평론가들의 평에 대한 작가 채만식의 반론입니다.
1931년 2월 14일자 4면
평론가에 대한 작자로서의 불복 (1)
1936년 2월 13일부터 17일까지 5회에 걸쳐 실린 ‘문예시감’은 ‘시감(時感)’ 및 ‘문단풍경’의 이모저모입니다.
1936년 2월 13일자 석간 5면
1939년 4월 6일자 동아일보에는 춘원의 ‘무정’을 영화한 것을 보고 느낀 소감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1939년 4월 6일자 석간 5면
문예작품의 영화화 문제
춘원의 원작 ‘무정’을 영화 ‘무정’으로 보고서 문득 생각이 난 소감이다. 물론 나는 영화 그것에 대한 이론에 있어서는 문외한이다. 그러므로 이번의 영화 ‘무정’이 영화로서 얼마만큼 성공을 했느냐, 또는 어떠한 정도로 실패를 했느냐, 더우기 가부간 그 세부적 테크닉 같은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말하기를 피함과 같지 못한 줄로 생각한다. 그리고 다만 한사람 문학인의 입장으로서 영화가 문학과 접촉되는 부면(部面), 그중에서도 이번의 ‘무정’을 보고 나서 영화가 문학작품 즉 소설을 영화화하는 태도 그것에 대하여 문득 느낀 바를 간단히 토로하는데 그치려고 한다.(하략)
동아일보에 실린 채만식의 소설로는 단편 ‘치숙(痴叔)’(1938년 3월 7~14일)이 있습니다.
1938년 3월 7일자 석간 3면
동아일보 1937년 11월 16일부터 21일까지 걸쳐 게재된 채만식의 기행문 ‘박연행 회화’는 박연폭포에 얽힌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1937년 11월 16일자 4면
박연행(朴淵行) 희화(戱畵) (一)
조각적인 송도물색(松都物色)
내노라 하는 풍치객이면 다 한 두번 씩은 구경을 했을 테고 구경을 하고 난 끝에는 글줄이나 하는 문객이면 제가끔 붓을 들어 흥대로 울궈먹어 시인이 식진금강육(食盡金剛肉)했다듯이 이제는 앙상하니 야위었을 박연(朴淵)이다. 하니 보나 안보나 그저 그 박연일 것이고 재상연하는 명화 구경가기 같아 제법 시적 감흥을 기대한다거나 엄숙한 흥분으로 이 험한 40리 산로를 떠나는 바는 아니다. 그저 좋은 악우(惡友) 둘이 있으니 같이 섭쓸려 한잔 마시고 떠들면서 놀면서 가다가 박연이라도 있으면 대접삼아 구경을 하는 것이고 없으면 못보고 와도 그리 섭섭잖아할 그런 배부른 배짱이다.(하략)
채만식은 1950년 6월 폐결핵으로 숨기기 전, 가족들에게 자신의 유해 위에 각양각색의 꽃을 가득 실어 꽃수레를 꾸미고 ‘채만식지구(蔡萬植之柩)’라는 영정을 덮어 이리 시내를 한바퀴 돌아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는 자유주의를 몹시 공격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우월성을 강조하여…(중략)…그러나 그의 성격으로 보아 공산당이 될 수는 전혀 없는 것으로 알고 개인 간의 우정은 여상하였다.”(동아일보 창간기자 유광렬)
채만식
1925년 7월 동아일보 기자(정치부)가 돼 1926년 10월 퇴사한 채만식이 동아일보에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