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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록수’  심훈(沈熏, 본명 심대섭 沈大燮, 1901~1936)


1924년 10월 동아일보 기자, 1925년 5월 퇴사 .


 심훈의 소설 ‘상록수’는 1935년 동아일보 창사 15주년 기념 공모에 당선된 작품입니다. 


1935년 8월 13일자 2면




본보 창간 15주년 기념 5백원 장편소설

심훈 씨 작(作) ‘상록수’ 채택

응모작품 52편을 엄밀히 고선(考選)한 결과

지상 발표는 9월 중에


본보가 지난 4월 1일의 창간 15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의 하나로 5백원의 사례금으로써 장편소설을 천하에 공모한 것은 일반이 다 아는 바거니와 이제 그 경과 및 결과를 발표하면서 다음과 같은 좋은 작품을 얻게 된 것을 독자와 아울러 기뻐하는 바입니다. 소설의 모집기한인 6월 말까지에 신인은 물론이오 문단의 지명 작가도 다수히 응모하여 총수 50여 편에 달하여 수에 있어서 벌써 예상 이상의 호성적을 얻었습니다.…(중략)…이렇게 신중히 또 엄밀히 고선한 결과 심훈 씨의 ‘상록수’가 채택되었습니다. 이 소설이 본사가 이번 소설 공모를 발표할 때에 희망 조건으로 제시한 바와 같이 첫째 조선의 농어산촌을 배경으로 하여 조선의 독자적 색채와 정조를 가미할 것. 둘째 인물중에 한사람쯤은 조선의 청년으로서 명랑하고 진취적인 성격을 설정할 것. 세째 신문소설이니만치 사건을 흥미있게 전개시켜 도회인 농어산촌인을 물론하고 다 열독하도록 할 것 등의 모든 조건에 부합할 뿐 아니라 그밖에 여러가지 점으로 근래에 보기 어려운 좋은 작품입니다. 본사는 이러한 좋은 소설을 얻어 한편으로 농어산촌 문화에 기여하고 한편으로 독자 제씨의 애독을 받게될 뿐만 아니라 문단적으로도 커다란 수확을 동시에 거두게 된 것을 끔찍한 자랑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 소설이 본지에 실리기는 오는 9월경부터 되겠습니다. 미리부터 기대를 크게 가지고 기다리십시오.(하략)


 ‘상록수’는 1935년 9월 10일부터 1936년 2월 15일까지 5개월여 동아일보에 연재(127회)돼 농촌계몽운동의 상징이 됐습니다.


1935년 9월 10일자 3면


상록수 (1) 심훈 작, 청전 화(畵)


  이때 받은 상금으로 심훈은 충남 당진에 상록학원을 설립했습니다. 




 심훈은  ‘상록수’라는 소설이나, 이름이나, 생긴 모습과는 달리 투사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1919년 3.1운동 때였다. 경성보고(경기중고 전신)에 재학 중이었던 심훈은 파고다공원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행렬에 나서는 군중의 맨 앞에 끼어 거리에 왔다가 체포됐다. 그의 맏형 심우섭은 매일신보에 있는 일본 기자에게 부탁, 동생의 구명에 애썼다. 그 덕분에 보석, 불구속 재판을 받게 됐다. 그런데 재판이 열린 날 재판정에 나간 심훈은 재판장이 ‘다시 또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인가?’ 묻자 큰 눈을 반짝이면서 한손을 들어 목에 대고 목 자르는 시늉을 하면서 ‘일본이 내 목을 이렇게 잘라도 죽기까지는 독립운동을 하겠소’라고 대답했다. 심훈은 보석이 취소되면서 징역 6월이 선고되었다. 그의 나이 열아홉 살 때였습니다.” (유광렬, ‘한국의 기자상’) 


 심훈은 1924년 10월 동아일보에 입사했으나 1925년 5월 사회부 기자들의 모임인 ‘철필구락부’의 인금인상 투쟁 때 파인 김동환과 함께 동아일보를 떠났습니다.


  “3.1운동 전야부터 30년대까지 신문사에는 자유를 사랑하고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우국충정의 젊은 지식인층과 문학청년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춘원 이광수, 횡보 염상섭, 월탄 박종화 등을 비롯한 수많은 문인들이 젊은 시절 신문사 사회부나 학예부 기자 혹은 논설기자를 거쳤다. 심훈도 문학청년으로 중국에서 돌아온 그 다음해인 24년 10월 동아일보에 입사, 신문기자가 됐다. 신문기자를 하면서 소설 창작의 붓을 들기 시작, 대성한 대표적인 문인이었다. 사회부 기자로서 시, 수필, 평론, 시나리오 등 다방면에 능하여 그 무렵 석영 안석주와 함께 쌍벽을 이루었다. 동아일보사에 1년 남짓 있다가 영화에 매혹되어 동아일보를 그만두고 영화계에 투신했다.” (민규호 전 시사통신 전무 겸 편집국장, ‘한국언론인물사화’, 대한언론인회, 1992년)


 신문기자 시절 심훈은 ‘객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원래 얼굴이 잘 생긴 호남인데다 로이드형 안경을 쓰고 있어서 젊은 귀족인사 같았다. 그 안경도 시력이 약해서 쓴 것이 아니고 중국 상해로 밀항할 때 가장(假裝)을 위해 안경을 썼는데 그것이 습관화되어 계속 안경을 쓴 것이다. 이런 안경잡이 신사가 어느날 친구 안석주와 구리개(지금의 을지로2가)를 걸어가다가 앞에 가는 일본 순경의 볼기짝을 툭툭 건드렸다. 순경은 누가 건드리는가 하고 돌아다 보았으나 그런 장난을 했을성 싶을 만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 아무리 돌아다보고 살펴봐도 안경낀 점잖은 두 신사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한번은 술 기운에 종로를 거닐다가 파출소 앞에 보초 선 순사의 모자를 벗겨 냅다 도망쳐 소동을 빚었다. 그 순사는 뒤쫓아가서 모자를 찾긴 했지만 신문기자에다 경찰출입기자라는 심훈의 직함때문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나중에 친구들이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묻자 ‘골려주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이다.”(윤석중, ‘한국언론인물지’, 한국신문연구소, 1981년, 462쪽)


  동아일보를 떠난 뒤에도 심훈은 1926년 영화소설 ‘탈춤’(1926년 11월 9일~12월 16일까지, 34회)을 동아일보에 연재했습니다.


1926년 11월 9일자 3면


영화소설(禁 무단촬영)

탈춤 (1)

심훈 원작


머리말

사람은 태고로부터 탈을 쓰고 춤을 추는 법을 배워왔다. 그리하여 제각기 가지각색의 탈바가지를 뒤집어 쓰고 날뛰고 있으니 아랫도리 없는 도깨비가 되어 백주에 큰 길을 걸어다니기도 하고 때로는 제웅같은 허수아비가 물구나무를 서서 괴상스러운 요술을 부려 같은 인간의 눈을 현혹케 한다. ‘돈’의 탈을 쓴 놈, ‘권세’의 탈을 쓴 놈, ‘명예’ ‘지위’의 탈을 쓴 놈…. 또한 요술장이의 손에서는 끊임없이 ‘연애’라는 달콤한 술이 빚어나온다. 모든 무리는 저희끼리 그 술을 마시고 환호한다. 그러나 눈 깜박할 사이에 향기롭던 그 술은 사람의 창자를 녹이는 실연이란 초산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옛날에 짐새가 한번 날아간 그늘에는 생물이 죽어버린다 하였거니와, 사람의 해골을 뒤집어쓴 도깨비들이 함부로 장난을 하는 이면에는 순결한 처녀와 죄 없는 젊은 사람들의 몸과 영혼이 아울러 폭양에 시드는 잎새와 같이 말라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 탈을 한겹이라도 더 두꺼이 쓰는 자는 배가 더 불려가고, 그 가면을 벗어버리려고 애를 쓰는 자는 점점 등어리가 시려울 뿐이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은 온갖 모양의 탈을 쓰고 계속하여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하략)


  ‘신동아’ 1934년 3월호에 실린 ‘나의 보건법’에서 심훈은 “나는 1년에 감기 한 번 아니들고 체증 한 번 아니나는 비교적이 아니라, 매우 건강한 몸이외다”라고 밝혔으나 ‘상록수’를 발표한 이듬해인 1936년 장티푸스에 걸려 35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신상옥 감독의 영화 ‘상록수’를 소개한 동아일보 1961년 9월 24일자 석간 4면. 


 최은희는 이 영화로 1962년 대종상 1회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심훈의 셋째 아들 심재호(沈在昊)는 심훈이 세상을 떠난 그 해 충남 당진 ‘필경사'(筆耕舍, 붓으로 밭을 일군다)에서  태어나 1966년 8월 신동아 기자로 입사 1974년 8월 퇴사,  미국으로 이주해 미주 동아일보에서 일했습니다. 1988년 ‘뉴욕이산가족찾기’ 후원회를 조직하고 현재도 남북 관계 일을 하고 있습니다.   


1978년 임권택 감독의 상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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