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자 일본도 없고 조선 같은 피압박 민족도 없는 평화로운 지구마을’을 꿈꾼
안서 김억(岸曙 金億, 1893~1950 납북)
1912년 20세 때부터 시를 발표한 안서 김억(岸曙 金億)은 1921년 베를렌, 보들레르 등의 시를 번역해 ‘오뇌의 무도’라는 한국 최초의 시집을 만들었고 1923년, ‘신(神)에게 바치는 송가(頌歌)’라는 뜻의 타고르 시집 ‘기탄잘리’를 번역해 이문관(以文館)에서 처음 간행, 한용운 선생을 비롯 일제강점하 많은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김소월을 발탁하기도 한 김억은 당시 소문난 ‘에스페란티스토’(국제 공통어 에스페란토를 사용하는 사람들)로 한국 에스페란토 역사의 제일 앞에 기록돼 있습니다.
“이 세상 어디를 가나 누구를 만나나 한 가지 말로 서로 자유롭게 통할 수 있는, 거기에는 정복자 일본도 없고 조선 같은 피압박 민족도 없는 평화로운 지구마을을 만들기 위해” 에스페란토어를 사용하면 좋겠다는 것이 김억의 이상이었습니다.
게이오대에 다니며 에스페란토를 배운 그는 1920년 YMCA에서 강습회를 열어 강의도 하고 잡지 ‘개벽’에 에스페란토 지상 강의록을 싣기도 했습니다.
그를 중심으로 조선에스페란토협회가 생겼고, 동아일보에도 에스페란토를 알리는 기사가 여러 차례 실렸습니다.
김억은 에스페란토를 끊임없이 소개하고 에스페란토를 통해 국제적 문화교류의 장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동아일보 1920년 6월 24일자 4면
청년 제군에게 에스페란토를 전함
투고생(投稿生)
1923년 9월 23일자 5면
에스페란토에 대하여
김억
에스페란토란 무엇이냐?…(중략)…타파할 수 없는 언어의 성벽 속에 있는 문화와 사상을 다같이 공유물을 만들어서 진정한 이해를 기본 잡은 인류상애의 평화를 맞이하자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인류의 최고 이해인 축복된 행복을 영구히 함락하자는 것입니다. 붉은 피에 목말라 하는 검을 내어던지고 영구히 쟁투의 무기를 사귀는 세상에 에스페란토가 신성한 조화를 약속하였습니다.(하략)
1924년 동아일보는 에스페란토 고정란이 만들어져 매주 1회씩 모두 47회에 걸쳐 에스페란토 글이 소개됐습니다. 때로는 번역문 없이 원문 그대로 실리기도 했습니다. 당시 젊은 사람들, 지식층 사이에서 에스페란토에 대한 관심은 예상 외로 넓었습니다.
1924년 2월 4일자 3면
세계어의 필요
1924년 4월 14일자 3면
조선 에스페란토 운동사
김억은 동아일보 1924년 1월 1일자 신년호에 ‘조선심(朝鮮心)을 배경 삼아’ 라는 글을 썼습니다.
이글에서 김억은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란 말은 오래된 말이지만 이 말에는 날을 따라 새로워지는 깊은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1924년 1월 1일자 2면
조선심(朝鮮心)을 배경 삼아
시단(詩壇)의 신년을 맞으며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한 말은 오래된 말입니다만은 이 말에는 날을 따라 새로워지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짧은 인생에게도 영구한 고정(苦情)속에 울부짓는 인생을 곱게하여 줍니다, 하고 예술로 말미암아서 개성(個性)은 영생을 하게 됩니다. 로멘 로란의 말과 같이 인생에게 고뇌가 없었던들 예술이 있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예술로 인하여 인생은 시화(詩化)되며 미화되어 모든 고뇌를 달게 할 수가 있습니다.…(중략)…우리 시단에 발표되는 대개의 시가(詩歌)는 암만하여도 조선의 사상과 감정을 배경한 것이 아니고, 어찌 말하면 구두를 신고 갓을 쓴 듯한 창작도 번역도 아닌 작품입니다. 달마다 나오는 몇종 아니되는 잡지에는 이러한 병신의 작품이 가끔 보입니다. 남의 고민과 뇌오를 가져다가 자기 것을 삼는다면, 그야말로 웃음감밖에 더 될 것이 없습니다. 남의 작품을 모방하여 자기의 작품을 만드려는 작자의 희극다운 비극을 설어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일본 유학을 중도에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온 김억은 모교 오산중학교와 평양 숭덕학교 교사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다 1924년 5월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언론계에 첫 발을 들여놓았으나 1925년 8월 퇴사했습니다.
김억이 왜 동아일보를 떠났는지 분명치 않으나, 그의 후임이었던 주요한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필자(주요한)가 처음 ‘동아’에 관계한 것은 1925년 9월 화동 한전에서 4면의 신문을 내고 있던 시절이었다. 4면 중의 1면은 격일로 ‘학예면’의 소관으로 되어 있었고, 필자의 첫 기자 수업이 이 학예부였었다. 당시 안서 김억 씨가 이 면을 맡아서 편집하고 있었는데 필자는 그 조수 격으로 일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출근 수 일 만에 안서는 원산 근처로 피서행을 가서 영 돌아오지 않고, 결국 혼자서 그 면을 맡아보게 되었다.” (‘주요한 문집 새벽1’, 1982년, 754쪽)
그는 그 후 경성방송에도 근무했으나 해방 후 소설가 계용묵과 함께 어울려 풍류를 즐기다 6.25 때 납치됐습니다.
북한총람(공산권문제연구소, 1968년)에 따르면 납북된 후 출판사 교정원으로 있다 신병이 악화돼 요양소로 보내졌고 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으로 임명됐으나 고분고분 하지 않았던지 1958년 평안북도 철산 협동조합으로 강제 이송된 뒤 소식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영어를 얼마나 잘 해서, be 동사에 ing 붙이면 현재진행형이 된다는 걸 알았는지, 말은 조선말 하면서도 말끝마다 영어 현재 진행형을 섞어 쓰니, 그 사람들이 멋으로 그러는 건지, 잘못 알고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이 말은 김억이 8.15 전에 경성 중앙방송국 젊은이들에게 가끔 한 말이다. 그러나 그때 이 말의 뜻을 누가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지금 와서는 알 수 없다. 그는 또 말했다. “교육을 많이 받은 젊은 사람들은 ‘밥을 먹고 있다’느니, ‘공부를 하고 있다’느니, ‘빨래를 하고 있다’느니 해서, 어떤 움직임이 계속되는 것을 똑똑하게 나타내고 싶어 하지만 우리 조선 사람들은 그냥 ‘밥 먹는다’ ‘공부한다’ ‘빨래넌다’고만 해도 다들 잘 알아들어, 그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똑똑한 때매김보다는 조금쯤은 흘게가 늦은 쪽을 오히려 우리말스럽게 느끼거든. 그러니까 영어와는 달라서 우리말에는 우리말 스러운 ‘말소리의 울림’이 있고 그 우리말 스러운 울림이 우리말을 우리말답게 구수하게 들리도록 해주는 것이지. 영어는 어떤 시점에서 그보다 훨씬 전에 일어났던 일을 말하면서 그보다도 전에 일어났던 일이라는 것을 꽤 까다롭게 낱낱이 다 밝히기 위해서 ‘대과거’라는 때매김을 따로 만들어 쓰지마는 우리가 ‘그랬었었다’하면 어찌 되겠나? 어색하지 않겠나?”
이때의 김억의 이 말을 시인 박화목은 ‘한국언론인물지’에 8.15 후에 만난 김억이 ‘시의 말에는 향(饗)이 있어야 해. 그 향은 곧 향(香)이 되는 걸세. 그리고 그 향과 향은 곧 우리 한민족의 얼일세’라고 가르쳐 주었다고 썼다. 시인끼리라 바로 알아들었던 것 같다. 그 말을 직접 들은 필자는 그 때를 다음과 같이 되돌아본다.
‘그러나 그때 나는 무슨 말씀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대선배님도 까마득한 대선배님이 하시는 말씀이니까 그대로 따르기로 했을 뿐이다. 그래도 몹쓸 후배는 아니었던지 그 후로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하고 있다’의 현재진행형이나 ‘그래었었다’ 같은 대과거 때매김을 쓰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로부터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 50년 동안 나는 꼴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우리말을 제법 많이 쓰고 방송도 하고 때로는 강의로, 강연으로 우리말을 제법 많이 했고 제법 많이 썼다. 그러다 보니까 같은 뜻의 같은 말인데도 귀에 울려들어오는 맛이 말마다 조금씩은 다르다는 것을 겨우겨우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 옛날에 선생님이 ‘말의 울림이 우리말다워야 구수하게 들린다.’던 그 말씀을 이제야 겨우 안개 속을 더듬는 것같이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아졌다. 그래서 몹시 자상하시면서도 가르쳐야할 일은 조금도 에누리 없이 엄격하게 가르치던 그분의 얼굴이 새삼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다지 희지 않은, 오히려 조금은 검다고 해야 할 갸름한 얼굴은 그대로 조선 사람의 얼굴이었다. 키도 그다지 큰 편은 아니었다. 그 때도 한국 사람들이 흔히 입는 쥐 빛 싱글 양복에 조끼를 받쳐 입으시고 서양 곰방대를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선비답게 깔끔하시고 단정하셨다. (문제안 한글문화단체 모두모임 사무총장, ‘한국언론인물사화’, 대한언론인회, 1992년, 416~419쪽)
문제안(文濟安) 선생은 “1990년대 한국에서 유행하는 ‘지구촌’ 이란 말을, 시인 김억은 70년 전인 1920년대에 이미 꿈꾸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