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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사람의 순직기자 홍익범(洪翼範, 1897.3.7~1944.12.19)


 




  1940년 8월 강제폐간 당시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였던 홍익범(洪翼範)은 ‘단파방송사건’으로 1943년 3월 26일 체포돼 옥고를 치루다 이듬해 12월 19일 고문의 후유증으로 숨졌습니다.


 그는 장덕준에 이어 일제에 의해 목숨을 잃은 또 한 사람의 동아일보 기자였습니다.


  ‘단파방송사건’은 동아, 조선 폐간 후 총독부 기관지(매일신보, 경성일보)와 방송(경성방송) 밖에 없던 시절, 세계대전의 전황과 세계정세의 흐름, 해외독립운동가들의 동향 등에 목말라 하던 홍익범이 단파방송을 통해 전해진 정보들을 국내 지도적 인사들에게 비밀리에 전달하다 적발돼 목숨까지 잃은 사건입니다.


  “최초의 정보 출처는 다름 아닌 홍익범이었다. 홍익범이 단파방송과 관련을 맺게 되는 경로는 그가 졸업한 경신학교(1916년 졸업)에서 비롯되었다. 여러 증언에 따르면 홍익범은 경신학교 시절 쿤스 선교사 밑에서 교육을 받았고, 미국 유학을 통해 국제 정세에 대한 안목을 갖추었으며, 동아일보 활동으로 현실적인 감각을 익혔다. 동아일보 폐간 이후로 홍익범은 쿤스 등 선교사들과 교류하면서 선교사들이 소유하고 있던 단파 수신기를 통해 중일전쟁ㆍ태평양전쟁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 이를 송진우ㆍ윤보선(尹潽善) 등에게 전달하는 일을 담당했다. 한국명 군예빈(君芮彬)인 쿤스(Edwin Wade Koons, 1880~1947)는 1903년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했으며, 1913년 서울 경신학교 8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일제 말 신사참배 강요로 교장 직을 사퇴한 후 1942년 5월 미국 간첩 혐의로 20여 일 동안 감금되기도 했던 반일적인 선교사였다. 쿤스는 미국에 돌아가자마자 한국 사정에 관한 장문의 보고서를 썼으며, 공교롭게도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OWI(Office of War Information, 전시정보국) 해외부 태평양국 한국과 고문으로 활동했다. OWI는 바로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을 담당하는 부서였으며, 쿤스는 한국어 방송을 감독하는 역할을 했다. 쿤스가 1942년 5월 말 강제 추방되고, 같은 시점인 4월 27일부터 단파 수신기가 압수됨에 따라, 홍익범은 각종 정보를 수집할 길이 막혔다. 이에 따라 홍익범은 아동문학가로 경성 방송국에서 방송 원고를 쓴 적이 있던 송남헌과 접촉했고, 그를 통해 경성 방송국에서 어린이 방송과 강연을 담당하는 편성원이었던 양제현(楊濟賢)과 연결되었다. 양제현은 일본 와세다대학 출신으로, 홍익범의 대학 후배이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양제현은 청취한 해외 단파방송 내용을 송남헌에게 건넸고, 송남헌은 다시 이를 홍익범에게 건네줌으로써, 정보 유통의 연계 고리가 형성되었다. 이들이 청취한 단파방송은 중국 중경방송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미국의 소리’ 방송이 보내는 한국어 방송이 중심이었다. 홍익범은 동아일보 폐간 이후 해외정보 수집에 전력을 기울였다. 송남헌은 홍익범이 송진우ㆍ김병로(金炳魯)ㆍ이인(李仁)ㆍ허헌 4자 회합에 정보를 제공했으며, 이들은 전세의 추이를 검토하고 해외에서의 구국 전선의 정보를 교환하는 한편, 국내에서 장차 있을 투쟁 방안을 모색했다고 증언했다. 단파방송 사건은 경성ㆍ개성 방송국 한인 직원들이 1942년 말~43년 초에 검거된 후, 1943년 3월 말에 송남헌(3월 25일)ㆍ홍익범(3월 26일)ㆍ허헌(3월 26~30일 사이)ㆍ문석준(5월)의 순서로 검거가 확대되었다. 허헌ㆍ송남헌ㆍ홍익범ㆍ문석준 등 정치ㆍ사상성을 지닌 구속자들이 집중적인 심문과 고문을 당했다. 관련자 중에선 홍익범과 허헌이 최고형인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으며, 나아가 홍익범ㆍ문석준 등은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동아일보 출신이었던 홍익범의 정보는 당연히 동아일보 계열에도 퍼져나갔다. 재판 과정에는 국태일ㆍ함상훈ㆍ백관수 등의 동아일보 관계자들이 증인으로 출두했다. 국태일은 동아일보 재정부장ㆍ영업국장, 함상훈은 동아일보 논설반, 백관수는 폐간 당시 동아일보 사장을 지내는 등 이들은 동아일보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먼저 국태일은 1935년 중앙상회 재직 당시부터 동아일보를 출입하며 홍익범과 알게 되었고, 동아일보 영업국장 대리로 근무할 때 친하게 지냈다. 동아일보 폐간 이후 홍익범은 1942년 7월과 1943년 3월 두 차례 국태일을 방문해 ⑴ 미국 거주 이승만이 미국 원조로 임시정부를 수립, ⑵ 조선임시정부는 연합국과 군사동맹을 체결, ⑶ 미국 조선인은 미군과 함께 추축국과 교전, ⑷ 연합군의 승리로 종전되면 조선은 완전 독립될 것, ⑸ 중국 거주 조선인은 장개석 군에 편입되어 일본군과 교전 중이기에 일본의 패전이 확실하다고 발언했다. 함상훈은 동아일보에서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1942년 9월과 1943년 1월 3일 두 차례 홍익범을 만나, 일본의 패전 전망과 이승만의 활동 등에 대한 정보를 전해 들었다. 또한 홍익범은 1942년 가을부터 백관수의 자택을 매달 1회씩 방문해서 국제 정세를 전달했고, 1942년 12월 말에는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할 것이며, 그때는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있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조선정부를 수립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이상이 일제 신문조서에 등장하는 내용이며, 홍익범은 이보다 많은 동아일보 계열 인사들에게 이승만 관련 정보를 전했을 것이다. 이처럼 홍익범은 선교사ㆍ단파방송ㆍ자신의 경험 등에서 종합한 이승만 관련 정보를 국내의 좌우파에게 널리 유포시켰다. 특히 해방 직후의 정치 상황과 관련해 결정적으로 중요한 두 세력, 즉 건국동맹-건국준비위원회-인민공화국을 이끌어나간 여운형 그룹(여운형ㆍ허헌ㆍ이증림ㆍ한설야)과 국민대회준비위원회-한국민주당을 주도한 동아일보-보성전문 그룹(송진우ㆍ백관수ㆍ함상훈ㆍ김병로ㆍ이인)에게 이승만 관련 정보가 입력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정병준 교수의 글 중 발췌)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된 뒤인 1943년 사이가는 ‘단파방송 청취사건’을 수사했다. 정보의 통제가 철저했던 당시에 방송국 직원들을 중심으로 ‘미국의 소리(VOA)’와 중국 충칭(重慶)의 임시정부가 보내는 단파방송을 청취해 전황(戰況)과 국제정세를 비밀리에 전파하다가 많은 사람이 투옥된 사건이 ‘단파방송 청취사건’이다. 엄혹한 언론, 사상 탄압으로 긴박하게 돌아가는 해외의 동정을 알 길이 없었던 때에 경성방송국 소속 조선인들은 이승만 박사가 ‘미국의 소리’에 실어 보내는 국제정세와 충칭 임시정부의 김구(金九) 주석이 전해주는 독립운동 소식을 몰래 들었다. 일본은 반드시 패망하고 조선은 독립할 것이라는 소문이 은밀히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이 하와이의 진주(眞珠)만에 공습을 감행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후 전시상황은 극도로 긴박하게 돌아갔다. 단파방송 사건 3개월 전인 1942년 10월 1일부터는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수사를 받고 있던 살벌한 분위기였다. 독립이 머지않았다는 ‘복음’을 전하다가 투옥된 사람들은 주로 방송국 기술 계통 종사자였지만, 신문인 변호사 문인 의사 목사 등 다양한 직업의 지식인들이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경찰이 압수할 수 있는 ‘증거물’을 확보하기는 어려운 사건이었다. 소수의 방송 기술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단파수신기 외에는 물증을 확보할 수 없었다. 단순히 입으로 전파된 형체가 없는 ‘유언비어 유포’라는 ‘범죄’였다. 범죄를 입증하려면 본인의 자백과 공술인(供述人)들의 증언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관련자 색출을 위해 피의자를 상대로 같은 내용을 반복해 심문하고 고문을 가하는 방법을 썼다. 같은 사실을 며칠 간격으로 되풀이해서 심문하는 동안에 조금씩 다른 내용이 나오도록 유도하고 고문을 병행하기 때문에 피의자의 심리적, 육체적 고통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가 된다. 조선일보 영업국장을 지냈던 문석준(文錫俊)은 혹심한 고문에 시달리다가 목숨을 잃었다. 1944년 1월 22일 새벽 5시, 문석준이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하루 전에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로 실려 나와 사망했으니 고문에 의한 옥사(獄死)였다. 나이 50세. 체포돼 사이가의 심문을 받기 시작한 날은 1943년 7월 17일. 6개월 만에 목숨을 잃었으니 투옥의 시련이 얼마나 혹심했을지 짐작이 간다. 1심에서 징역 1년2개월을 선고받고 불복 상고하여 2심 재판을 앞두고 있는 때였다.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였던 홍익범(洪翼範)은 1943년 3월 26일에 체포돼 이듬해 12월 19일 옥고로 죽었다. 같은 사건으로 옥사한 두 번째 희생자였다. 이 사건으로 사이가가 수사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백관수(白寬洙·폐간 전 동아일보 사장), 함상훈(咸尙勳· 조선일보 편집국장), 국태일(鞠泰一· 동아일보 영업국장)이 있었다. 변호사 허헌(許憲)은 2년 징역, 돈암동에 민중의원을 개원 중이던 의사 경기현(景祺鉉)은 징역 1년6개월, 아동문학가 송남헌(宋南憲)은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방송인 성기석(成基錫·개성방송소 기술자-2년), 이이덕(李二德·개성방송소장-1년6개월)를 비롯해 편성원 아나운서 등 많은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소설가 한설야(韓雪野)가 피의자 또는 증인(공술인)으로 경찰의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정진석, 신동아 2009년 8월호 598~609쪽 중 발췌)   




  “1942년 6월부터 이승만은 국내에 있는 동포들에게 단파방송 ‘미국의 소리(VOA)’를 통해 특유의 떨림이 강한 목소리로 단결을 촉구하고 반일 자세를 잃지 말 것을 촉구하는 연설을 내보냈다. 일제의 마지막 발악에 시달리고 있던 한국인에게는 ‘복음’과도 같은 것이 아닐 수 없었다. 필자는 1995년 2월 조선일보 주최 이승만 전시회 때 이 단파방송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지금도 그때의 감동이 생생하다.


나는 이승만입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해내(海內), 해외에 산재한 우리 2,300만 동포에게 말합니다. 어디서든지 내 말을 듣는 이는 자세히 들으시오. 들으면 아시려니와 내가 말을 하려는 것은 제일 긴요하고 제일 기쁜 소식입니다. 자세히 들어서 다른 동포들에게 일일이 전하시오. 또 다른 동포를 시켜서 모든 동포들에게 다 알게 하시오.

나 이승만이 지금 말하는 것은 우리 2,300만의 생명의 소식이요, 자유의 소식입니다. 저 포악무도한 왜적의 철망, 철사슬에서 호흡을 자유로 못하는 우리 민족에게 이 자유의 소식을 일일이 전하시오. 독립의 소식이니 곧 생명의 소식입니다.


왜적이 저희의 멸망을 재촉하느라고 미국의 준비 없는 것을 이용해서 하와이와 필리핀을 일시에 침략하여 여러 천 명의 인명을 살해한 것을 미국 정부와 백성이 잊지 아니하고 보복할 결심입니다. 아직은 미국이 몇 가지 관계로 하여 대병(大兵)을 동(動)하지 아니하였으매 왜적이 양양자득하여 온 세상이 다 저의 것으로 알지마는 얼마 아니해서 벼락불이 쏟아질 것이니 일황 히로히토의 멸망이 멀지 아니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것입니다.


우리 임시정부는 중국 중경에 있어 애국 열사 김구·이시영·조완구·조소앙 제씨가 합심 행정하여 가는 중이며, 우리 광복군은 이청천·김약산·유동열 여러 장군의 지휘 하에서 총사령부를 세우고 각방으로 왜적과 항거하는 중이니, 중국 총사령관 장졔스와 그 부인의 원조로 군비군물(軍備軍物)을 지배하며 정식으로 승인하여 완전한 독립국 군대의 자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미주와 하와이와 쿠바와 멕시코 각지의 우리 동포가 재정을 연속 부송하는 중이며 따라서 군비군물의 거대한 후원을 연속히 보내게 되리니 우리 광복군의 수효가 날로 늘 것이며 우리 군대의 용기가 날로 자랄 것입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가 쉽지 아니하나니 37년 전 남의 나라 영지에 숨어서 근거를 삼고 얼고 주리며 원수를 대적하던 우리 독립군이 지금은 중국과 영·미국의 당당한 연맹군으로 왜적을 타파할 기회를 가졌으니 우리 군인의 의기와 용맹을 세계에 드러내며 우리 민족의 정신을 천추에 전할 것입니다.


일본과 만주와 중국과 우리나라와 서백리아(시베리아) 각처에 있는 동포들은 각각 행할 직책이 있으니 왜적의 군기창은 낱낱이 타파하시오. 왜적의 철로를 일일이 파상하시오. 적병이 지날 길은 처처에 끊어 버리시오.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경우에는 왜적을 없이 해야만 될 것입니다.

이순신·임경업·김덕령 등 우리 역사의 열렬한 명장의사(名將義士)들의 공훈으로 강포무도한 왜적을 타파하여 저의 섬 속에 몰아넣은 것이 역사상 한두 번이 아니었나니 우리의 용기를 발휘하는 날은 지금도 또 다시 이와 같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내지에서는 아직 비밀히 준비하여 숨겨 두었다가 내외에 준비가 다 되는 날에는 우리가 여기서 공포할 터이니 그 때에는 일시에 일어나 우리 금수강산에 발붙이고 있는 왜적을 일제히 함몰하고 말 것입니다.


내가 워싱턴에서 몇몇 미국 친우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 정부와 교섭하는 중이며 우리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을 날이 가까워옵니다. 승인을 얻는 대로 군비군물의 후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망을 가지고 이 소식을 전하니 이것이 즉 자유의 소식입니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 씨의 선언과 같이 우리의 목적은 왜적을 파한 후에야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백배나 용기를 내어 우리 민족성을 세계에 한 번 표시하기로 결심 합시다. 우리 독립의 서광이 비치나니 일심합력으로 왜적을 파하고 우리 자유를 우리 손으로 회복합시다.


나의 사랑하는 동포여 !

이 말을 잊지 말고 전하여 준행하시오. 일후에 또 다시 말할 기회가 있으려니와 우리의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 이때 우리 손에 달렸으니 분투하라! 싸워라! 우리가 피를 흘려야 자손만대의 자유기초를 회복할 것이다. 싸워라. 나의 사랑하는 2,300만 동포들이여.

이 방송 내용은 몇 주일 동안 매일 반복해서 방송되었다. 당시의 사정으로 볼 때 이 방송을 들은 사람은 국내에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군국주의 통치가 극에 달했던 1942년이라는 시점에서 우연히 라도 이 방송을 들은 한국인들은 얼마나 가슴 벅찬 감격을 느꼈을 것인가.


이승만은 이 방송을 하기에 앞서 이미 1941년 12월 25일 COI의 요청에 따라 한글방송을 한 적이 있고 이후에도 영어와 한국어로 여러 차례에 걸쳐 방송을 했다. 문제는 이 단파방송이 의외로 국내 독립운동가와 여론지도층에 커다란 영향을 불러 일으켰다는 점이다. 단파방송은 이승만의 명성을 제고시켰을 뿐만 아니라 지도자로서 신비감, 민족해방의 희망과 우상으로 자리 잡게 했다. 특히 이승만의 단파방송은 좌파의 여운형·허헌·한설야·홍증식이나  우파의 송진우·백관수·김병로·이인 등 주요 인사들에게 영향을 주게 된 구체적인 경로를 추적함으로써 적어도 여론주도층 사이에서 생겨난 ‘이승만 신드롬’이 해방 직후 정국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되었는지를 생생하게 제시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이승만의 단파방송을 국내에 확산시킨 주인공은 홍익범이라는 인물로 일본 와세다대학과 미국 콜럼비아대학에서 공부했고 1932년 귀국해 1940년 동아일보가 폐간될 때까지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했다.”(서대숙, 김인식 등 저, ‘역사공간’, ‘이승만 신화를 되살린 단파방송’)


  이 홍익범(洪翼範)은 동아일보 기자가 되기 전인 1926년 2월 4일자 동아일보 2면에 등장합니다.


동아일보 2월 4일자 2면, 홍씨 도미(渡米)




  1932년 11월 26일자에는 ‘재미 고학생 전도는 암담, 불경기와 이민법의 취체로, 금의환향한 홍익범 씨 담’이 실렸습니다.


1932년 11월 26일자 석간 2면




  1897년 함경남도 정평서 태어난 홍익범은 경성의 경신학교를 거쳐 1925년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을 졸업하고 1926년 도미, 1930년 오하이오 주 테니슨 대학을 졸업한 뒤 컬럼비아대 대학원에서 외교학을 전공, 석사학위를 받고 1932년 11월 귀국했습니다.


  외교학을 공부한 학도답게 동아일보 입사 후 세계 정세를 논하는 글들을 동아일보에 씁니다.


동아일보 1933년 10월 21일자 석간 1면, 독(獨) 군축 탈퇴와 불,독(佛,獨) 관계(상)


1933년 10월 27일자 석간 1면, 미(米), 소(蘇) 승인 교섭, 정치적, 경제적 접근 이유(하)




 1934년 1월 1일자, 1면 일미소(日米蘇)의 삼각전(三角戰) 암운저미(暗雲低迷)의 극동정국 제1회(전 4회 게재)




1935년 1월 2일 2면, 소연방(蘇聯邦)의 지위 제2회( 전 3회 게재)








 1936년 2월 28일자 석간 5면   입지(立志)




  “시작이 절반이란 말이 있다. 뜻을 세우는 것이 곧 성공의 절반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무엇보다도 먼저 뜻을 세우는 것이다.” 


 동아일보 기자 홍익범은 뜻은 세웠으나 일제의 고문으로 조국 광복 7개월 여를 앞두고 한창 일할 나이(47세)에 숨져 그 꿈을 펴지 못했습니다.




 홍익범(동아일보 기사 DB)







유병은(방송인), ‘일제 말 단파방송 사건의 전모’, 신동아 1988년 3월호 588~595쪽


단파방송도청사건은 규모가 큰 사건인데도 지금까지 전모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일제 말 방송인들 사이에서 은밀히 퍼진 단파방송의 내용은 송진우 김병로 이인 허헌 등에게 전해졌다. 해방 직전 국내 지도자들은 일제의 패망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고, 일제 패망 이후의 독립 방안을 암중모색하고 있었다. 이때 국내 지도자들이 가장 목말라 하던 것이 국제정세와 해외 독립운동가의 활동에 대한 소식이었다. 그러나 정규방송에서는 일본이 계속 이긴다는 선전뿐이었다. 여기서 해외의 단파방송 청취가 큰 몫을 하였고, 이것은 끝내 단파방송도청사건으로 터지고 말았다. 이인(李仁)의 ‘애산여적(愛山餘適)’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하루는 고하 송진우가 내 변호사 사무실에 들려서는 나를 보고 잠시 나오라고 하기에 나갔더니만, ‘일본이 이젠 멀지 않아 패망할 거요’라고 하더군!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었는데, 그때 고하는 연합국 방송을 들을 수 있었던 모양이야! 그 후에도 고하는 아주 정확한 전세(戰勢)를 전해 주었거든…”


고하 송진우는 해외 소식을 접할 수 있었고, 이것은 해방 직후 그의 정국 구도에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송진우가 해방 직후 요지부동이었던 것은 단파방송을 간접적으로 수신하여 중경임시정부의 활동상을 약간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송진우는 해방 직후 몽양 여운형이 찾아와 건국준비를 같이 하자고 했을 때도 “몽양, 자중하시오. 우리에게는 중경에 임시정부가 있고, 미국에는 구미위원부가 있소”라고 잘라 말했고, 그와 같은 얘기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되풀이했다고 한다.




송진우는 어떻게 해서 해외소식을 들을 수 있었을까.

그는 1940년 8월 10일 동아일보에 근무했던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만났다. 홍익범(洪翼範)도 그 중 한 명이었다. 홍익범은 1924년에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하고 도미하여 31년 콜럼비아대를 졸업한 인텔리로, 35년 동아일보에 정치부 기자로 입사하여 폐간될 때까지 근무하였다. 어느 날 홍익범은 송진우를 찾아가 그동안 전세를 알 수 있었던 것은 외국인 선교사 덕택이었는데, 그들이 잡혀가고 귀국하여 전세를 알 길이 없다고 말했다. 송진우는 어떻게 해서든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전세를 알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 봤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홍익범은 송남헌(宋南憲)을 찾아갔다. 송남헌은 교편을 잡고 있을 때 홍익범의 아들을 가르친 적이 있어서 서로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다. 홍익범의 이야기를 들은 송남헌은 경성방송국 편성과 PD로 근무하고 있는 양제현(楊濟賢)을 떠올렸다. 송남헌은 경성방송국의 어린이 방송프로와 가정물의 작가로 문학 활동을 하고 있어 방송국에 자주 출입하고 있었으며, 아동문학 동호인인 양제현과는 교분이 두터웠다. 양제현은 처음에는 난색을 표했으나, 은밀히 단파방송 내용을 알려주는 데 동의했다. 그래서 송남헌과 홍익범을 통해 단파방송 내용이 당시의 지도적 인사들에게 전해졌는바, 송진우 김병로 이인 허헌 등이 주로 그 소식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단파방송에서 들은 얘기가 세상에 나돌면서 일본 경찰의 주시를 받게 되었다. 42년 말에서 43년 봄에 이르는 동안 경성방송국의 단파방송 도청으로 ‘유언비어’가 유포되었다고 하여 대량 검거가 일어났다. 이것이 바로 경성방송국의 단파방송도청사건이다.


단파방송도청사건은 규모가 큰 사건인데도 지금까지 그 전모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사건으로 경성방송국 안에서만 아나운서, 편성원, 기술계 직원 등 약 40명이 체포되었고, 각 지방방송국까지 합치면 1백50명 가까운 한국인 방송인들이 붙잡혀갔다. 그리고 정객과 민간인으로 끌려간 1백50여 명을 합치면 3백여 명이 이 사건에 관련되어 수난을 당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 사건으로 2년 징역형을 치른 사람이 5명, 1년6월형이 3명, 1년2월 징역형이 1명, 1년 징역형이 17명이며, 8개월, 6개월 징역형과 벌금형을 받은 사람까지 합치면 46명이 유죄판결을 선고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사건에는 동아일보 관계자들이 여러 명 관계되었다. 함상훈(咸尙勳)(전 동아일보 조선일보 편집국장), 국태일(鞠泰一)(전 동아일보 영업국장), 백관수(白寬洙)(전 동아일보 사장) 등이 증인신문을 받았으며, 허헌도 2년 옥고를 치렀다.




선교사 단파수신기를 몰수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이 일어났다. 대동아전쟁 발발에 발맞춰 조선총독부는 선교사들에 대해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추방령을 내렸다. 선교사들은 한국에 올 때 고국 소식과 국내외 정세를 알기 위해 단파수신기를 생활필수품의 하나로 휴대하였다. 선교사들의 사택은 대개 비교적 높은 지대에 자리 잡았고, 대지도 아주 널찍했으며 정원도 아름다웠다. 물론 신식 양옥집이었다. 이 양옥집의 옥상에는 본국을 향한 단파수신용 안테나가 가설되어 있어 한국인들에게는 매우 특이하게 보였다. 선교사들은 지도적인 한국인 기독교 인사들에게 단파방송에서 들은 소식을 얘기해 주었다. 단파방송도청사건의 주범격인 홍익범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경신학교 졸업생이었는데, 그 학교 교장은 미국인 선교사였다. 선교사들을 추방, 그들로부터 몰수한 단파수신기는 중앙방송국을 비롯하여 지방방송국에 비치되었다. 심지어는 간이 방송소에까지도 비치되었다. 선교사들의 단파수신기는 주로 RCA회사 제품으로, 금속진공관을 사용하여 성능이 아주 우수하였다. 방송국에 근무하는 한국인들은 바로 몰수된 이 선교사들의 단파수신기를 통하여 은밀히 해외 독립운동의 소식을 듣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 당시 경성방송국의 단파방송 현황을 살펴보자.

KBS의 전신인 경성방송국은 24년부터 실험방송에 들어갔고, 27년 2월 16일 정식 JODK로 개국하였다. 단파방송시험은 25년 여름부터 있었고, 그 해 12월 17일 7시부터 8시까지 1시간 동안 단파방송 전파를 한국의 상공에 발사하였다. 이때의 단파방송용 수신시설 제원은 출력 20와트, 주파수 41MHZ, 송신공중선 높이 31m로 카운터 포이스접지방식이었다. 비록 20와트였지만, 이 시험방송은 일본에서도 수신 상태가 양호하였다. JODK에는 단파수신기가 전혀 없었다. 29년에 최초로 경성방송국에서는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일본식 씨름대회 실황을 중계방송하였는데, 이때도 단파수신기가 없어서 일본에서부터 한국을 거쳐 만주에 가설되어 있던 일만(日滿)케이블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경성방송국에서는 35년에 와서 독자적으로 일본에 가까운 부산 동래에다 수신소를 세웠다. 그러던 중 대동아전쟁이 발발하였고 외국인 선교사들을 추방하면서 그들의 우수한 RCA제품 단파수신기를 몰수하여 군부나 경찰의 정보기관 및 방송국에 비치하였던 것이다. 중앙과 지방의 방송국 · 방송소에 고급단파수신기가 비치되고 수신공중선을 비치하여 상호간에 단파방송으로 교신을 하게 되어 주야로 근무하는 현업자들은 누구나 단파수신기 조작법에 능통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 중에는 단파수신기를 제작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중경임정(重慶臨政)방송을 청취

단파수신기를 만들어 해외 독립운동단체의 방송을 제일 먼저 들은 사람은 성기석(成基錫)일 것이다. 성기석은 38년 5월, 20세에 경성방송국에 입사하여 JODK정동방송국 지하실 시험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곳은 방송기기를 시험하는 곳이면서도 소출력 방송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성기석은 손재주가 좋아 일반인들이 듣는 보통 수신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1940년경 그는 자기 집에서 취미삼아 외국단파방송을 들을 수 있는 단파수신기를 만들어보자고 마음먹었다. 간신히 필요한 것들을 구해 이리저리 만들어보다가 어느 날 새벽 4시경에 베를린 런던 로마 등지에서 보내오는 단파방송을 들었다. 뛸듯이 기뻤다. 그가 처음 들은 단파방송은 음악방송이었다. 그는 더욱 깨끗하게 잘 들리는 수신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국어방송이 들리는 것을 발견하였다. 41년 봄이었다. 단파방송의 주파수는 9MHZ대(帶)이었고 파장은 31m Band였다. 그는 숨을 죽이고 귀를 바싹 댔다.


“여기는 중국 임시수도에 있는 중경방송국입니다. 조선임시정부 우리말 방송시간입니다. 각 전선에서 용전분투하는 독립군전사 여러분, 그리고 동포 여러분, 날로 격렬해지는 전쟁에 팔로군의 전위부대로서 수색전과 기습공격에 적극 가담하여 다대한 전과를 올리는 데 대하여 장 총통께서는 우리 임시정부 김구 주석에게 치하하시고 적극 지원해 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성기석은 이것은 김규식(金奎植) 임시정부의장(의정원 의장?)의 방송이라고 기술하였다. 이 방송을 들었을 때 그는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고 한다. 꿈에도 들어본 일이 없는 말들이었다. 얼마 후에는 미국에서 하는 이승만(李承晩) 박사의 방송도 들었다. 그는 부친이 귀가하자 부친의 방에 들어가 중경방송을 들은 것을 얘기하였다. 부친 성희경(成禧慶)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학교 훈도도 했고 금융계에도 다녔다. 아들의 얘기를 들은 부친은 벌떡 일어나 “아니 무어라고!”하고 놀랬다. 그리고는 “총통에 이승만이라고 하더냐”하고 물었다. 아들은 김구 주석이라고 하더라고 대답하였다. 부친은 또 대신 급은 누구누구라고 하더냐고 물었다. 성기석은 흥분된 상태여서 청취했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부친은 상해임시정부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부친은 이러한 이야기를 절대 발설하면 안 된다고 단단히 다짐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도 아들도 입을 꾹 다물고만 있을 내용은 아니었다. 성기석의 방은 문간방이었는데, 소리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커튼을 치고 부자는 단파방송을 도청하였다. 방송을 듣지 않을 때는 단파수신기를 옷장 안에 감추어두었다. 부친은 조병옥 이범승 이인 김병로 등과 교유가 있었다. 어느 날 성기석이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가보니 부친은 교동초등학교 근처의 친구 댁 사랑방에 있었다. 그는 조병옥 등의 얼굴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노변정담 식으로 국제정세와 해외의 독립활동 소식이 국내 정객들에게 전달되었다.




입에서 입으로 도청내용 전달

부친을 제외하고 성기석이 단파방송의 내용을 맨 먼저 얘기해 준 사람은 초등학교 동기동창인 박형완(朴炯完)이었다. 박형완의 부친은 그가 태어나던 1919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그는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박형완은 골목친구였던 성기석을 따라가 직접 단파방송을 들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여기는 중경에 있는 조선임시정부 우리말 방송시간입니다. 각 전선에서 용전분투하는 독립군전사 여러분! 그리고 동포 여러분, 일본 침략군의 패망과 아울러 우리 조선의 독립도 멀지 않았습니다. 동포 여러분! 전사 여러분! 더욱 분투하시어 항일전투에 앞장서 일본 침략군을 몰아냅시다. 장 총통께서는 우리 조선독립에 적극 협조해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방송 어조는 격렬하고 감동적이었다. 박형완은 양손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고, 얼굴은 굳은 표정으로 바짝 긴장되어 있었다. 그의 몸에서도 역시 젊은 피가 끓어올랐다. 성기석은 이 자리에서 박형완에게 미국에서 이승만 박사가 독립을 위해서 활약 중에 있으며, 이 박사가 루즈벨트 미국대통령을 만나 일본의 잔학상을 폭로하고 조선 독립에 협조할 것을 약속받았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두 사람은 조선의 독립이 실현될 것 같은 희망에 부풀어 올랐다. 경성방송국 시험실에서 성기석과 같이 근무하는 이이덕(李二德)도 단파방송을 몰래 듣고 있었다. 이이덕은 일찍이 삼촌인 선천(宣川) 장로교회 장로의 주선으로 미국에 입양되어 미국 주립대에서 전기과를 졸업한 미국시민권을 가진 미국통이었다. 그는 기술부문에서 능력이 있었지만 학력을 인정받지 못해 경성방송국에서 저임금을 받고 있어 마음이 편하지 못했으며, 언제나 미국에 돌아갈 생각뿐이었다. 그는 단파수신기를 조작하여 일본방송을 중계방송하는 일을 맡았으며, 방송기기도 수리하였는데, 일본인의 눈을 피해가면서 업무용으로 비치된 단파수신기를 조작하여 미국의 영어 단파방송을 도청하였다. 이이덕은 같은 시험실에서 근무하는 성기석과 이야기하다가 피차 단파방송을 도청한다는 것을 감지하였다. 이이덕과 성기석은 퇴근길에 끽차점(喫茶店)(다방)이나 대포 집 뒷방에서 밀담을 주고받았고, 어떤 때는 연지동 성기석 집에서 함께 도청하였다. 이이덕은 주로 미국의 제너럴 서비스 단파방송을 도청하였는데, 여기서 들은 소식을 송진근 아나운서와 양제현 PD에게 몰래 이야기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1년 11월 11일자로 성기석이 광주로 전근하게 도자 성기석과 이이덕의 관계는 일단 끊어졌다. 그러나 이이덕이 개성방송소장으로 가면서 둘의 관계는 또 깊어졌다. 미일전쟁이 치열해지자 방송국에서는 전파전시체제로 돌입하여 전파관제를 실시하였다. 방송기 출력 전력은 대폭 인하되고 동일 주파소를 사용하게 하여 어제까지 방송이 잘 들리던 지역에서도 별안간 난청지역이 생겨났고,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개성, 서산, 장전 등에 간이방송소를 만든 것이다. 1942년 8월 14일에는 이이덕이 힘써 성기석이 개성방송소에 와 차석에 부임하였다. 성기석 이이덕이 개성에 모임으로써 개성은 단파방송을 도청하는  숫자가 점차 늘어났다. 이이덕은 개성의 부호 자제로 명치(明治)대를 나온 고한균(高漢均)을 사위로 맞아들였던바, 이 사위도 단파방송 도청에 끼어들었다. 이이덕은 성기석에게 단파수신기를 하나 만들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사위가 방송소에 자주 드나드는 것이 경찰한테 의혹을 살까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성기석 이이덕 고한균 등이 체포되기 석 달 전인 1942년 9월경 성기석이 서울로 올라와보니 이곳저곳에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거기에는

① 날조된 유언비어에 속지 말 것,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자는 엄벌에 처함

② 유언비어를 날조 선동하는 자는 경찰에 신고해 주기 바람

③ 허가 없이 3인 이상의 집회를 금함 이라고 씌어 있었다.


성기석은 이미 박형완이 졸라 그에게도 단파수신기를 하나 만들어 준 바 있었다. 방송국을 중심으로 단파방송 도청 내용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송진군 아나운서, 양제현 PD는 남정준 · 손정봉 · 박용신 아나운서 등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단파방송을 밀청한 바에 의하면 소련군의 전쟁에서도 독일군이 포위되었고, 미얀마전선에서는 영국군이 진격해 오며, 미국이 유리하게 전쟁을 전개하여 연합군은 승리하고, 한국은 독립하게 된다.”는 얘기를 주고받았다. 양제현은 송진근 등에게 미국에서 이승만 박사가 활동하고 있으며, 중경에서도 맹렬한 투쟁을 하고 있는데, 이미 20여국의 승인을 받았다는 사실을 이승만이 직접 방송에 나와 호소하면서, “천 명에 한명이라도 이 방송을 들으면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하더라는 얘기도 해주었다. 이처럼 경성방송국 내에서는 입과 입으로 단파방송 도청의 얘기가 은밀히 퍼져 나갔고, 그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정객들에게도 전해졌다. 홍익범의 증인들은 법정에서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였다. 전 동아일보사 영업국장이었고, 당시 삼양사 사원인 국태일은 1942년 7월경 홍익범이 중국의 조선인은 장개석 군에 편입해서 일본군과 교전 중이고, 1943년 3월 일본이 큰 손해를 입을 것이라고 얘기해 주었다고 증언했다. 국태일의 증언 신문조서만 총 3백49매에 달한다. 역시 홍익범의 증인으로 나온 허헌(1943년 당시 59세)은 이미 동일한 사건으로 체포되어 재감자로 출두하였는데, 홍익범은 1942년 8월 허헌의 집을 방문하여 이승만의 활동상황을 얘기해 주었고, 그해 12월 20일에는 이승만과 임시정부 관계를 얘기해 주었으며, 허헌이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3회에 걸쳐 문병하면서 중경 임시정부와 장개석 군에 대해 설명하였다고 증언했다. 특히 홍익범은 매월 1회씩 9개월 동안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백관수의 자택을 방문하여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전황 등을 얘기해 주었다.




美 단파방송과 이승만 박사

중경단파방송은 중경임시정부가 장개석 총통의 협조 아래 중경의 방송시설을 빌어서 한국인이 직접 방송하였다.


“여기는 중국에 있는 중경방송입니다. 조선임시정부 우리말 방송시간입니다.”로 시작되는 이 방송은 장개석 총통과 김구 임정주석과의 긴밀한 관계를 설명하고, 팔로군과 독립군의 전과 외에도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해서도 방송했다. 물론 결론은 일제가 패망하고 우리는 독립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어조는 격렬하고 선정적이었다. 중경에서 보내온 단파방송은 주파수 9MHZ, 31m Band로, 미국에서 이승만이 한 방송보다 훨씬 먼저 시작하였으나, 감도는 미국 단파방송보다 약하였다. 1941년경 방송시간은 오후 4시30분부터 30분간이었으며, 처음에는 매주 목요일 1회뿐이었다. 얼마 안 있어 하절기에는 방송시간이 6시30분부터 30분간이었고, 방송회수가 늘어나 매주 월 수 금 3회였다. 이 방송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에도 계속되었다. 중경 단파방송은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 이하 여러 독립지사들이 직접 마이크 앞에 나와 방송을 보내올 때도 있었다. 평상시에는 주로 신기언(현재 고인), 정명(현재 재미 중) 두 사람이 교대로 하였다. 신기언 아나운서는 중국에서 정치대를 졸업하였고, 해방 후에는 입법의원을 지냈다. 정명 아나운서는 일본군에서 탈출한 학병 출신으로, 한국애국부인회의 첫 번째 재건 메시지도 방송하였다 한다(1986.3.7. 한국일보참조). 약 2백50명에 달하는 중경임시정부 요인들의 부인으로 조직, 재건된 애국부인회에서는 매주 1회 중경방송국 마이크 앞에 서서 한국 동포에게 애국심을 호소하였다. 중경 단파방송은 수신 상태가 매우 불량하여 때로는 방송 내용을 알아듣기가 곤란한 때도 있었으며, 한동안은 아주 안 나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차차 좋아져 방송 내용을 분간할 수가 있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보내온 단파방송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전파가 발사되었다. 이 방송은 영어로 된 제너럴 서비스와 한국어로 보내는 두 가지가 있었고, 우리말 단파방송은 KGEI라는 콜 사인(Call Sign)으로 운영되었다. 주파수는 11.9MHZ대, 파장은 25m Band. 1일 3회씩, 아침 10시, 오후 4시, 밤 9시부터 각 30분씩 방송했다. 태평양을 횡단하는 원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깨끗한 상태로 수신할 수 있었다. 송신출력은 50kw 정도로 추정된다. 중경 단파방송에 비하면 훼딩이나 CW의 혼신도 적어 도청하는 데 큰 불편은 없었다. KGEI 미국 단파방송의 시그널 뮤직은 ‘호랑이 우는 소리’가 3회 연속되는 것이 특색이었다. 백두산 호랑이를 상징하는 우렁찬 호랑이울음은 매우 인상적이어서, 이 시그널 뮤직만 들어도 도청자들의 가슴은 흥분되었다. 그러면 “백두산 호랑이 시간이 돌아왔습니다.”라고 이어진다. 처음에 아나운서는 재미 한국인 유학생 중에서 골라 했으며, 그 후 매인랜드대 도서관에 근무하던 류경남 박사가 수고했다고 한다. 이승만 박사는 직접 방송을 했는데, 그 특유한 어조로 “나는 이승만이요. 나 이승만이 지금 말하는 것은 2천5백만의 자유의 소리요 생명의 소리입니다.”라고 말하며, “이순신 장군과 임경업 장군의 뜻을 받들어 왜적의 군 장비를 낱낱이 타파하시오. 철로는 일일이 파손하시요! 적병이 지날 길은 철저히 끊어 버리시요! 언제, 어디서든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왜적을 없이해야 될 것입니다.”라고 외쳤다.




대대적인 검거 선풍

성기석은 개성방송소에서 근무하면서 경성방송국에서 보내오고 있는 방송을 끊고 그 대신 미국의 자유의 소리 방송을 잡아넣고 싶은 충동이 종종 일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누가 안 되고 자신의 자폭으로 끝난다면 그는 실제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1942년 말부터 단파방송 도청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돌풍이 일었다. 개성방송소의 이이덕 주임, 성기석 차석 및 김동하가 1942년 12월 27일, 28, 29일 3일간에 걸쳐 계속 체포되었다. 홍익범은 비교적 늦게 1943년 3월26일 체포되었다. 대량검거는 경성방송국 내에서 일어났다. 돌연히 특별고등경찰관이 찾아와 약궁(若宮) 기술과장에게 면담을 요청하고, 당직일지를 보여 달라고 했다. 당직일지를 본 특고경찰관은 메모와 대조를 한 후 아무개 아무개를 호출하여 달라고 했다. 이때부터 검거가 꼬리를 물었다. 아나운서 중에는 송진근 주임, 이계원 주임, 손정봉 서순원 이현 박용신 및 서정만이 구속되었다가 이중 송 · 손 · 박 세 아나운서가 실형을 받았다. 편성계통에서는 이서구 모윤숙 김동익 김정실 및 양제현이 체포되어 양제현 만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기술계에서도 많은 직원들이 체포되어 이중 이이덕 성기석 김동하 염준모 박도신 등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방송국 직원 중 가장 많이 붙잡혀간 부서는 사업부였다. 사업부는 라디오 수신기의 성능 검사로부터 설치공사와 라디오 수신기의 고장 수리까지를 맡고 있었다. 또 사업부에는 대부분의 직원이 모두 한국인이었으며, 초대 사업부장도 한국인이었다. 이 중 홍근호 박훈상 송용운 조종국 이근창 홍진석 노현중 이창득 김필상 조국환 등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단파방송도청사건보다 약간 이른 1942년 10월의 조선어학회사건에서도 혹독한 고문이 있었고 옥사자가 나왔는데, 단파도청사건에서도 지독한 고문으로 옥사자까지 나왔다. 그 고문을 소개해 본다.


전기고문에는 전기 절연을 측정하는 메가라는 기계가 사용되었다. 메가는 손으로 발전기의 핸들을 회전시키면 출력 단자에서 5백 볼트 내지 1천 볼트의 전기가 발생되는 것으로, 성기석은 평소에 이것을 많이 사용했었다. 피의자의 양손 손가락에 전선을 연결해 놓고 발전기의 핸들을 돌리면 전기가 몸에 흘러들어오게 되어 있다. 심장에 전기가 전달되면 순간적으로 참기 어려운 상황에 이른다. 전기고문으로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아 견디다 못해 쓰러져버리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호떡집 걸상 비슷한 걸상에 앉혀놓고 다리와 팔을 묶어놓은 후 실시하는 전기고문 때는 꼭 죽을 것만 같았다고 성기석은 후에 악몽을 되새겼다. 물고문도 많았다. 팔 다리 등을 결박해 놓고 강제로 입을 벌린 뒤 물주전자로 물을 퍼붓는 것이었다. 계속 물을 마시면 배는 마치 북장고처럼 불어 올랐다. 때로는 고춧가루를 코 속에다 넣는 고문도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다 봉을 넣고 힘껏 내리누르는 고문도 참기 어려웠다. 문석준은 보성고보 보통학교 교사로 있다가 조선일보사 영업국장을 역임하였는데, 1년형을 받고 복역 중 옥사하였다. 성기석 허헌 경기현 김종호 등과 함께 2년 징역형을 받은 홍익범은 고문으로 사경을 헤매다가 병보석으로 출옥 직후 사망하였다. 1년6월형을 받은 이이덕은 해방 직후 미 군정청 고문직도 맡았으나 고문후유증으로 1947년 사망하였다. 44세였다. 이밖에도 옥중 사망자가 두셋 있다고 하나 정확한 이름은 알 길이 없다. 고문의 악역을 맡은 대표적 인물이 제하칠랑(齊賀七郞)이다. 수양동우회사건에서도 직접 도산 안창호의 취조를 맡는 등 1930년대 후반 이래 주요 사건을 많이 맡았던 제하는 한국인 사상범만 취급한 경기도 경찰부의 고등계 사찰계장이었다. 성기석 등도 그에게 체포되어 고문 받았다. 제하는 피의자들을 유치장에서 끄집어내다가 밤새도록 고문하여 실신상태에 이르러서야 유치장으로 되돌려 보냈다. 약궁경성방송국 기술과장이 패전 후 일본에 돌아가 쓴 단파방송도청사건에 대한 회상기에는 제하가 종전 후 창경원 근처의 집 부근에서 사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제하를 사살한 한국인은 정화암(鄭華岩)과 김성수(金聖壽)였다고 송남헌은 회고한다. 단파방송도청사건 등에서 몹쓸 고문을 한 자의 최후의 모습이었다.




 단파방송 사건의 홍익범(洪翼範, 1897.3.7~1944.12.19)  자료

-유병은, ‘일제 말 단파도청사건의 전모’, 신동아, 1988년 3월호, 588~595쪽

-정진석, ‘한국언론사’, 나남신서, 1990년, 600~602쪽

-유병은, ‘단파방송 연락운동’(KBS 문화사업단, 1991년)

-독립유공자 공훈록 제9권(국가보훈처, 1991년, 528~529쪽)

-유병은, ‘방송야사’(KBS 문화사업단, 1998년, 102~109쪽)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년, 412~413쪽

-시노하라 쇼즈 외, JODK 조선방송협회 회상기, 커뮤니케이션북스, 2006년, 23~27쪽

 (아카야마 요시마, 전 기술부 회고)

-손세일(孫世一), 월간조선, 2007년 7월호

 ‘한국 민족주의의 두 유형-이승만과 김구’(64)

 이승만의 단파방송 내용을 지도급 인사들에게 전파한 전 동아일보 기자 홍익범. 

-정진석, ‘정진석의 언론과 현대사 산책②

 일제 고등경찰 피살 사건 미스터리’, 신동아 2009년 8월호 598~6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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