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가 창간된 해인 1920년 10월초 일제는 만주 간도(間島)에서 ‘혼춘(琿春)사건’이라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동아일보 창간 주역인 추송 장덕준(秋松 張德俊, 1892~1920)기자는 이 사건 취재를 위해 간도에 갔다가 한국 언론사상 최초의 순직기자가 되었습니다.
혼춘사건은 일제가 만주 간도(間島) 혼춘에 있던 일본영사관이 방화로 소실(燒失)된 것을 우리 동포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대규모 군부대를 출동시켜 3천명에 가까운 우리 동포들을 무차별로 학살한 사건입니다.
당시 상해임시정부가 발행하던 독립신문은 이광수(李光洙)가 쓴 ‘삼천(三千)의 원혼(寃魂)’이란 시(詩)를 게재하고 혼춘사건으로 희생된 우리 동포들의 원혼을 달랬습니다.
2년10월지변(二年十月之變)에
무도(無道)한 왜병의 원혼아
너의 시체도 묻어 줄 이도 없도다
너희가 무슨 죄 있으랴
망국백성으로 태어난 죄
못난 조상네의 벽(蘗)을 받아
원통코 참혹한 이 꼴이로고나
무엇으로 너희를 위로하나
아 아 가엾은 삼천의 원혼아!
눈물인 듯 무엇하며 슬픈 노랜들
너의 원한을 어이할 것인가
원혼! 원혼아!
소리가 되어 외치고 피비가 되어
꿈꾸는 동포네의 가슴에 뿌리라
너의 피로 적신 땅에
태극기를 세우라고
혼춘사건이 일어날 당시 동아일보는 ‘제사(祭祀)문제를 재론하노라’라는 사설(社說)에서 일본 왕실의 삼종신기(三種神器)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무기정간 처분 중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덕준은 “신문은 비록 정간 중에 있지만 기자의 활동은 중지할 수 없다”며 일본군의 동포학살 진상을 취재하기 위해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간도로 향했습니다.
“만주 혼춘에서 일본군의 우리 동포에 대한 대학살사건이 있었다. 일본군이 청산리(靑山里)와 봉오동에서 우리 독립군에게 섬멸당한 것에 앙심을 먹고 혼춘지방에 사는 우리 동포 주민을 무차별로 어린아이 할 것 없이 2천여명을 학살한 사건이었다. 그 때 동아일보는 정간 중이라 취재를 하여도 낼 데도 없는 때다. 그러나 덕준씨는 뛰어가 보겠다고 했다. 그 때 만주일대는 일본의 학살이 뒤를 이어서 일어나던 때라 동료들은 그가 가는 것을 위험하다고 말리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그는 고집하였었다. 비록 가서 역시 학살되는 한이 있더라도 동포가 대량 학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 보도기관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고 하였었다. 그는 필자에게 그의 평소의 지론인 ‘하루를 살다가 죽어도 정의를 위하여 살다가 죽어야 한다’는 말을 하면서 이번 길에 자기가 죽고 못 돌아오더라도 자기로서는 달게 받겠다고 하였다.” (유광렬, ‘기자반세기’, 서문당, 1969년, 275~276쪽)
10월 15일 서울을 출발하여 11월 6일 간도에 도착한 장덕준 기자는 본사로 ‘무사히 잘 도착하였다’는 전보를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이후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 손정룡(孫定龍) 당시 동아일보 연길분국장의 증언(1974년 5월 10일 인터뷰)
20년 10월 어느 날 동아일보사 용정(龍井)지국장 김용찬(金用讚)씨가 연길의 조선인 민회로 전화를 해서 본사에서 장 기자가 토벌군(일본침략군) 종군기자로 왔는데 그 쪽으로 갈 터이니 연길분국을 맡고 있는 나에게 환영회를 가지도록 알려왔다. 그 후에 들으니 장 기자는 용정에 도착한 후 삼성(三成)여관에 여장을 풀고 곧 일본영사관과 토벌군 사령부를 찾아가서 한인학살의 진상을 추궁하고 자기가 직접 취재하기 위해 종군을 허락할 것을 요구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서는 저녁에 김용찬 지국장외 수명의 유지와 혜산루(惠山樓)에서 술을 나누고 있는데 마침 ”토벌군이 통구(通溝) 방면에 출동하니 종군하라“는 연락을 받고 곧 떠난 뒤 김 지국장이 통구를 거쳐 그 쪽으로 갈 터이니 마중하라고 전화한 것이었다.
그래서 용정과 연길은 40리 길이라 토착할 시간을 맞추어 유지 몇 사람과 함께 포이압통강(江) 다리까지 나아가 밤 12시가 넘도록 장 기자의 도착을 기다렸으나 끝내 나타나지 않아 헛되이 돌아오고 말았다. 내 생각으로는 장 기자가 일본군에게 당한 것이 분명하며 피살된 곳이 통구의 토벌지역에서 우리 한인교포와 함께 살해되었으리라 짐작된다. 동포학살 현장을 목격한 장 기자가 일군지휘자에게 항의하자 사살당했을 것으로 안다. 그러나 장 기자가 귀국하여 조선에 여론을 악화시킬 것을 고려하여 계획적으로 살해할 목적으로 종군을 종용하였을 가능성도 짙다. (‘한국언론인물사화’ 8·15전편 하, 대한언론인회, 1992년, 11~12쪽)
– 홍상표(洪相杓) 당시 북간도 국민회원 증언
장덕준은 용정 삼성여관에서 여장을 풀고 즉시 간도 일본영사관으로 찾아가서 ‘토벌’에 대한 진상을 물었다. 영사관측은 “우리는 모르니 토벌사령부에 가서 알아보라”고 핑계하였다. 사령부는 장 기자의 물음에 “우리는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바 없다. 우리와 같이 직접 토벌하는 실황을 보면 알 터이니 여관에서 기다려라”고 하였다. 장 기자는 여관으로 돌아왔다. 과연 이튿날 아침, 사령부에서 군마(軍馬)와 군복, 방한외투 그리고 방한화까지 보내면서 “토벌을 떠나니 동행하자”고 권했다. 장 기자는 안심하고 일본군과 동행했다.
삼성여관에서는 몰래 행선지를 눈 여겨 보아 두었으나 그들이 결빙한 해란강(海蘭江)을 건너 모아산(帽兒山)쪽으로 가는 것만을 확인하였을 뿐이었다. ‘토벌대’와 동행한 장 기자는 돌아올 시간이 되었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동아일보사의 서울본사에서는 수차 전보로 장기자의 안부를 물어 왔으나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마침내 장덕준 기자의 실제 장덕수(실형 장덕주의 착오-편집자 주)가 직접 간도로 찾아와서 일본영사관에 문의하였던 바 그들은 “토벌을 참관하고 바로 경성으로 돌아갔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는 것이었다. 장씨는 다시 토벌사령부로 가서 문의하였으나 거기서도 같은 대답이었다. 사태는 명백해졌다. 장 기자는 일군의 간교에 넘어간 것이었다. 일군에게 유인되어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된 것이다. (신동아 1965년 4월호, 316~317쪽)
– 장덕준의 누이동생 장덕희(張德姬)여사의 증언(1974년 5월 16일 인터뷰)
취재차 북간도로 떠난 덕준 오빠가 돌아오지 않아 두 살 아래인 덕수 오빠가 현지로 찾아가려 했으나 주위에서 장 주간은 이름이 널리 알려져 곤란하다 하여 시골에 있는 큰 오빠(장덕주)를 불러 현지로 떠나보냈다. 큰 오빠는 약 2주일 후에 덕준 오빠가 여관에 두고 간 가방만 찾아들고 돌아왔다.
큰 오빠가 현지에서 들은 바로는 일본 경찰이 덕준 오빠가 묵고 있던 여관에 저녁 8시경에 찾아와서 동행을 요구했으나 거절하고 잠을 잤으며 밤 12시경에 또 찾아와서 동행을 강요했으나 또 거절했는데 새벽 2시경 세 번째로 말을 끌고 찾아와서 기어이 동행을 강요하여 붙들려 가다시피 끌려갔다는 것이다.
현지인들 말로는 아마 등에 나무판을 대어 묶고 돌을 달아 강물에 던져 죽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한다. (‘한국언론인물사화’ 8·15전편 하, 대한언론인회, 1992년, 13쪽)
– 상해 독립신문 1921년 10월 28일자 4면 기사
張德俊氏 遭難詳報
敵의 蠻行을 詰責한 일로 夜間에 誘出하야 暗殺함
昨年 十月頃 北間島에 出動하엿던 敵軍隊의 從軍紀(記)者로 隨行하엿던 東亞日報 記者 張德俊(現 東亞日報 主幹 張德秀氏의 兄)氏는 其後 行衛不明이 되여 자못 黑幕에 싸여잇던 바 近日 北間島로부터 도라온 某氏의 談에 依컨대 氏가 敵에게 暗殺을 當한 것이 確實하더라.
其時 敵의 軍隊가 北間島一帶에서 가즌 惡行을 行할 時에 間獐岩洞에서 三十餘戶의 住民을 一室에 閉鎖하고 放火하야 沒殺한 慘事가 잇섯는대 그가 此에 對하야 참아 견대지 못하고 敵의 軍隊에 드러가 敵의 上官을 보고 그러한 不人道의 事를 行한 것을 詰責한즉 敵側에서는 그런 일이 업노라 말하면서 그러면 한번 함게 가서 보자 하고 後期를 約하는 改로 氏는 無心히 도라와 就寢하엿더니 夜半에 至하야 敵의 軍兵이 와서 上官이 부르니 함게 가자 함으로 氏는 十分疑訝하야 夜深함을 핑게하고 聽從치 아니하엿스나 敵은 馬까지 가지고 再三 와서 强請하는 故로 不得已 따라간바 一次 따라 나아간 後로는 一切 종적이 업서지고 말엿는대 敵은 氏을 嫌忌하야 當夜에 氏를 誘出하여다가 暗殺한 事가 確實無疑하더라.
– 당시 동아일보 기자 김동철(金東轍)의 회고
내가 재직하던 얼마 사이 동아는 이루 다 헤일 수 없는 숫한 고난을 겪어야했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가장 길이 내 맘에 잊혀지지 않는 일은 1921년 혼춘사건을 취재하러 갔던 우리 신문사 특파원 장덕준씨가 영 흔적조차 없이 실종되어버린 사건이다. 혼춘사건이란 만주 간도성 혼춘에 있는 일본영사관이 방화로 소진된 것을 우리 동포들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나남부대를 출동시켜 우리 동포들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그때 우리 신문사는 주필 장덕수씨의 백씨인 장덕준 씨를 종군특파원으로 급파, 실정을 취재토록 했으나 장 특파원은 현지에 도착 후 그 행방이 없어져버렸다.
십중팔구는 왜병들의 만행을 취재한 탓에 이의 보도를 두려워한 왜병들의 손에 의하여 참살된 것이라 단정하였다.
동아일보에서는 이에 대한 대책을 의논하는 모임을 가졌었다. 나는 그 모임에서 내가 간도성으로 가서 장 기자의 사체라도 찾아오겠다고 자원하고 나섰다. 그 자리에는 장기자의 계씨 되는 장덕수씨도 나와 있었다. 장덕수씨는 이 때 내손을 붙들고 ‘당신이 가던들 사체를 찾기는 고사하고 왜병들 손에 또다시 생명을 뺏길 것이 뻔하나 부디 후일을 기약하자’고 울면서 만류, 우리 둘이는 함께 부여잡고 통곡을 했던 기억이 지금도 가슴에 맺힌다. 장덕준 씨는 영 불귀의 객이 되었으며 그 일이 있은 후 장덕수씨와 나는 서로 깊은 마음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구우회고실<舊友回顧室>’, 동우<東友> 1963년 10월호, 10~11쪽)
– 일제 비밀문서 고경(高警) 제3512호(불령선인 최천호의 여행목적에 관한 건)
최근 탐지한 바에 의하면 (최천호의) 동지 장덕진(張德震)은 생전(生前) 임시정부 내무총장 김구(金九)에게 “실형 덕준(德俊)이 수년전 간도에서 일본군대에 참살됐고 내가 복수를 위해 지금까지 전력을 경주해 왔으나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지금 천명을 다하니 바라건대 선생(김구)이 우리의 뒤를 이어 그 복수를 해주기를 바란다”고 유언했다.
백방으로 장덕준 특파원의 행방을 쫓던 동아일보는 그 이듬해인 1921년 속간 이튿날인 2월 22일자 1면에 ‘추송 장덕준형을 사(思)하노라’는 사설을 ‘동인(同人)’의 이름으로 게재했습니다. 실제 집필은 당시 김명식(金明植) 논설반원이 하였습니다.
동아일보 1921년 2월 22일자 1면
추송 장덕준(秋松 張德俊)형을 사(思)하노라
추송형(秋松兄) 추송형(秋松兄)아 생야(生耶)아 존야(存耶)아 하처(何處)로 거(去)하고 하처(何處)에 주(住)하관대 어찌 생시(生時)에 견(見)치 못하며 또 어찌 몽리(夢裡)에 봉(逢)치 못하는고. 추송형(秋松兄) 추송형(秋松兄)아 위빈(渭濱)의 여상(呂尙)이 되어 희창(姬昌)에게 초빙(招聘)이 되었던가 한북(漢北)의 이능(李陵)이 되어 흉노(匈奴)에게 부로(俘虜)가 되었던가 아니 원야(原野)에 사자(獅子)를 만나 거항(拒抗)의 용(勇)이 궁(窮)하였던가 고당(錮塘)에 독사(毒蛇)를 만나 피신(避身)의 기(氣)가 절(絶)하였던가 총림(叢林)에 고조(錮鳥)를 만나 탈신(脫身)의 예(銳)가 진(盡)하였던가 하처(何處)로 거(去)하고 하처(何處)에 주(住)하관대 어찌 신(信)이 무(無)하며 식(息)이 단(斷)한고?
작년 초동(初冬)에는 한양의 야월(夜月)이 비록 이정(離亭)의 비엽(飛葉)을 비(悲)하였으나 그러나 오히려 관북만리(關北萬里)에 두절(杜絶)한 생민(生民)의 회(懷)를 문(聞)하고 극맹(劇孟)의 가(家)에서 재회의 가(歌)를 촉(囑)하여 험로위보(險路危步)의 길흉을 복(卜)코저 사(思)치 아니하였더니 금년 신춘(新春)에는 간도(間島)의 한풍(寒風)이 귀붕(歸鵬)의 로(路)를 개(開)치 아니하고 다만 공산모운(空山暮雲)에 슬피 우는 성성(猩猩)의 소리가 우인(友人)의 예민한 고막(鼓膜)을 치며 처량할 뿐이라. 이에 설(雪)의 조(朝)를 당하여 설(雪)을 영(詠)하고 입(立)하되 설(雪)이 언(言)이 무(無)하고 풍(風)의 석(夕)을 당하여 풍(風)을 망(望)하고 청(聽)하되 풍(風)이 보(報)가 무(無)하고 월(月)의 야(夜)를 당하여 월(月)을 회(懷)하고 보(步)하되 월(月)이 영(影)을 단(斷)치 아니하여 고독한 쌍영(雙影)이 자상(自狀)을 조위(弔慰)할 뿐이니 그 생(生)을 수(誰)에게 문(聞)하며 그 존(存)을 수(誰)에게 지(知)하리오. 희희(噫噫)라 창천창천(蒼天蒼天)이여 인사(人事)의 일생이 과연 여사(如斯)한가?
천(天)이여 신(神)이여 사인(斯人)의 소재를 두호(斗護)하여 풍성한 은혜를 시(施)하시고 그 소재를 그 친(親)에게 또는 그 우(友)에게 전고(傳告)하여 간절한 생각과 열렬한 사랑의 우수(憂愁)를 해(解)하는 대상을 작(作)케 하시며 저의 소재가 사막이어든 태풍(颱風)이 취(吹)치 물(勿)케 하시고 산곡(山谷)이어든 농로(濃路)가 강(降)치 물(勿)케 하사 저의 정신을 쾌(快)하게 육체를 안(安)하게 하소서.
추송형(秋松兄) 추송형(秋松兄)아 오래 정간이 되었던 형의 애(愛)이며 형의 우(友)인 동아일보는 속간이 되는데 형은 하처(何處)로 거(去)하여 우리 동인으로 더불어 환(歡)을 또는 우(憂)를 공(共)히 하지 못하고 형이 속간의 보(報)를 문(聞)하면 연인(戀人)이 소생함보다 더욱 환희할지오 경영의 난(難)을 찰(察)하면 애자(愛子)의 기제(肌啼)하는 소리를 듣는 것같이 그 간담(肝膽)이 찔릴 줄로 지(知)하노라. 그러나 우리 동인은 험로(險路)에 위보(危步)를 상(上)할 새 심지(心志)가 궁(窮)에서 일층견고(一層堅固)하여 서로 부조(扶助)하고 서로 조위(弔慰)하니 단락(團樂)한 회합은 시일(時日)을 경(經)할수록 화기(和氣)를 첨(添)하나 다만 우리 동인으로 하여금 시시(時時)로 일면(一面)의 한(恨)을 빙(聘)케 함은 오형(吾兄) 1인이 그 당(堂)에 참석이 무(無)함이로다. 내객(來客)의 접대를 행할 때와 탕반(湯飯)의 오찬을 끽(喫)할 때에 좌로 고(顧)하고 우로 찰(察)하다가 문득 오열(嗚咽)하니 종차(從此)로 사(事)에 임(臨)하고 심(心)을 논(論)할 시(時)에 우리 동인이 소일(少一)의 회(懷)를 감(感)하는 그 정황(情況)은 과연 여하(如何)할고? 형은 본사의 맹장(猛將)이며 우리 동인 중 수재(秀才)이라 본사 창시(創始)가 형의 경륜(經綸)에서 출(出)하였으며 어간(於間)의 발전이 또한 형의 열성과 분투로 인함이니 형은 실로 본사의 산파(産婆)이며 현모(賢母)이라. 고로 본사의 종차(從此)로 성장발달도 형의 력(力)을 뢰(賴)하여 도(圖)코자 하였으며 형도 또 그 전력(全力)을 본사에 주(注)하여 우리 동인으로 더불어 고락(苦樂)을 공(共)히 할 뿐 아니라 그 평생을 본사에 투(投)하여 본사로 하여금 자아(自我)의 생명을 작(作)코자 하였나니 형은 하처(何處)에 재(在)하며 하처(何處)로 거(去)하였을지라도 본사는 형의 회중(懷中)에 포(抱)하였을 것이오 또 뇌리(腦裡)에 인(印)하였을 줄로 신(信)하노라. 그런즉 형은 본지가 속간이 됨을 지(知)하면 애자(愛子)의 급증(急症)을 구한 것보다 연인의 숙질(宿疾)을 치(治)한 것보다 더욱 환(歡)하며 열(悅)하여 그 사랑의 소재(所在) 우리 동인의 회집처(會集處)로 순각(瞬刻)을 지체치 아니하고 주야배도(晝夜倍道)하여 래하(來賀)하리라. 창천창천(蒼天蒼天)이여 저의 전로(前路)에 은하(銀河)가 횡재(橫在)어든 작교(鵲橋)를 사(賜)하시고 약수(弱水)가 조격(阻隔)이어든 청조(靑鳥)를 여(與)하소서.
추송 장형(張兄)은 조선청년이라 성(性)은 엄(嚴)하고 지(志)는 견(堅)하고 심(心)은 인(仁)하며 기(氣)는 활(活)하니 항상 조선을 사(思)하고 애(愛)하여 측측(惻惻)한 지기(志氣)가 외표(外表)에 노출하며 체(體)는 중(中)이나 격(格)은 건(健)하고 질(質)은 강(强)하여 비록 악질(惡疾)을 포(抱)하고 시시로 혈흔(血痕)을 토(吐)하되 능히 그 병(病)을 승(勝)하고 그 통(痛)을 내(耐)하여 석(席)에 안(安)치 아니하고 형극(荊棘)의 도(道)에 사회의 마(魔)와 악전고투하였나니 작년 엄동(嚴冬)에 북방의 한설(寒雪)도 외(畏)치 아니하고 그 구역의 험악(險惡)도 원치 아니하여 약질단신(弱質單身)으로 의연히 정(程)에 등(登)함은 본대 축적한 바 의기(義氣)로 희생봉공(犧牲奉公)의 정신이 일신의 고통과 위험을 추호도 사(思)치 아니함에 재(在)하다.
추송형(秋松兄) 추송형(秋松兄)아 상설(霜雪)은 거(去)하고 양춘(陽春)이 래(來)하였으니 래(來)하라 래(來)하라. 양춘(陽春)은 래(來)하였으나 사위(四圍)는 적막하고 아회(我懷)는 유유(悠悠)하도다. 고산(高山)에 수(誰)로 더불어 등(登)하며 심연(深淵)에 수(誰)로 더불어 임(臨)할고. 형이여 형이여 래(來)하라. 남무(南畝)의 기경(起耕)도 형을 대(待)하고 동주(東疇)의 파종(播種)도 또한 형을 사(竢)하니 형이여 래(來)하라.
널리 우리 형제에게 고하노니 추송 장형(張兄)은 당년이 30이라. 형용(形容)은 초췌(樵悴)하고 체질은 수약(瘦弱)하되 활발한 기개와 맹렬한 담력은 인(人)의 지기(志氣)를 압(壓)하며 첩첩(喋喋)한 구변(口辯)으로 방방(方方)한 조리(調理)는 인(人)의 경앙(敬仰)을 집(集)하며 그 상(狀)은 그 성(性)을 화(畵)하였고 그 성(性)은 그 상(狀)을 인(印)하였나니 비록 초면의 인사(人士)이라도 일면(一面)에 장추송(張秋松)인 줄을 지(知)키 난(難)치 아니한지라 사인(斯人)을 하처(何處)에 견(見)하든지 오제(吾儕)의 형편을 고하고 그 소재를 전하여 주시오. 희희(噫噫)라 청천(靑天)이 무언(無言)하니 그 생(生)을지(知)치 못하며 인사(人事)가 무도(無道)하니 그 존(存)을 문(聞)치 못하겠도다. 추송형(秋松兄) 추송형(秋松兄)아 그 생야(生耶)아 존야(存耶)아 방초(芳草)에 춘귀(春歸)하나니 그 래(來)하라 래(來)하라.
(추송 장덕준형은 본사의 특파원으로 작년 10월경에 간도 방면의 험악한 형세를 조사키 위하여 출장하였다가 행방이 불명하여 탐지할 도가 두절되다)
3월 12일자 1면에는 이 사설을 읽고 시(詩)로써 동생 설산 장덕수(雪山 張德秀)를 위로한다는 독자 신천 최동순(信川 崔東詢)의 한시(漢詩)를 게재했습니다.
동아일보 1921년 3월 12일자 1면
從來達士不縻身 예부터 광달한 선비는 몸이 얽매이지 않았는데
異域詎愁披棘榛 이역땅에 큰 근심 생기니 가시덤불 헤치고 가셨네.
塞馬重歸能幾日 새옹지마 다시 돌아올 날 언제이리오?
冥鴻飛急伴三春 밤 기러기만 급히 날며 봄날을 함께 하네.
五湖煙月孤舟客 오호의 안개처럼 어스름한 달빛속 외로이 배 탄 나그네
六國風塵蹈海人 육국의 풍진속에 바다를 밟고 간 사람
憤切鴒原何所極 비통하게 척령새 우는 들판 어디가 끝인가?
北天遙望亂馳神 북쪽 하늘 멀리 바라보니 정신만 어지러이 내달리네.
행방불명이 된 지 만 5년 가까이 되던 1925년 8월 29일, 30일자에는 독자의 질문에 기자가 답하는 형식으로 장덕준 특파원을 회상하는 글이 실렸습니다.
동아일보 1925년 8월 29일자 2면 동아일보 1925년 8월 30일자 2면
동포의 원혼(怨魂)을 찾아
단신으로 북국만리(北國萬里)
간도동포의 사라진 원혼을 위해
편모의 만류도 듣지 않고 떠나가
억만년(億萬年) 생사불명, 추송 장덕준씨
귀사의 기자로 있던 장덕준씨는 몇 해 전 소란한 간도방면으로 출장을 갔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더니 영영 소식이 없습니까(선착과제자 의성 이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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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닯은 일이나 구태여 말하기를 사양치는 않겠습니다마는 눈물겨운 그의 일을 돌이켜 생각함에 묵어진 아픈 기억이 새로워지며 말 못할 우리의 설움이 앞을 섭니다. 흐르는 눈물을 씻어가면서 그늘을 잦은 그의 령(靈)을 불러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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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 운동이 일어나던 이듬해 가을이었습니다. 관북만리에 흩어져 있는 간도 동포들이 학살(虐殺)의 창끝에 연방 쓰러진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고 본사에서는 동포의 안위를 염려하여 밤잠을 못 이루는 만천하 조선형제에게 그 진상을 보도하며 이역만리에 천추의 원한을 품고 고국을 향아여 쓰러진 고혼(孤魂)에 한줄기 피눈물도 보내지 못하고 하늘을 부르짖어 통곡하는 조선 형제를 대표하여 남달리 용감한 장덕준씨를 특파케 되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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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만(二千萬) 형제의 뜨거운 피와 초조한 심사를 한 몸에 받아 총과 칼이 번쩍이는 간도 벌판으로 고단한 동포를 찾아 금풍(金風)이 소슬하고 야월(夜月)이 처량하던 경신년(庚申年) 늦은 가을 음력 구월 초나흗날이었답니다. 때마침 시골서 올라온 그의 자당(慈堂)은 살기(殺氣)등등한 이역타국에 홀몸으로 떠나려는 사랑하는 아들을 한사코 말리었더랍니다. 열여섯살에 부친을 여의고 가난한 홀어머니 슬하에 자라나서 십여년이나 동분서주로 한번도 그 모친을 정성껏 모셔보지 못하였다 하니 정 많은 그가! 피 많은 그가! 노모의 이 간절한 만류를 두어 마디 위로로 뿌리치고 위험하고 고단한 길을 단연히 떠나던 심정은 기어이 여기에 말하고자 아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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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십구(二十九)세의 혈기방장한 청년이었으나 그가 피 많은 조선의 청년인 만큼! 남달리 열정적 인물인 만큼 그의 이아(爾我)을 구별치 않는 사내다운 의분(義奮)과 수화를 가리지 않는 근기찬 노력이 그의 건강을 다소 해하여 간혹 가다가 혈담까지 토하는 약질이었다 합니다. 전하는 소식은 믿을 수 없고 동포의 손에는 총칼이 없음을 그가 알았음으로 혹독한 북국(北國)의 추위와 처참한 전장의 위험을 향하여 초생달이 비춰주는 외로운 그림자를 데리고 머나먼 길을 떠난 것이라 합니다.
간도의 황야(荒野)에 자 넘어 싸인 눈은 붉은 피가 점점이 물들이고 소조한 겨울들에 가로누운 시체들은 스쳐가는 바람에 말 한마디 못 붙일 것을 그 당시 누구나 상상하고 쓰라린 가슴과 조여드는 마음을 호소할 곳이 없던 바이어니와 자모애제(慈母愛弟)를 이별하고 고토친우(故土親友)를 떠나 소름이 끼치는 현장에 이른 장덕준씨는『빨간 피덩이만 가지고 나의 동포를 해하는 자가 누구이냐?고 쫓아와 보니 우리가 상상하던 바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는 첫 소식을 전하였다 합니다. 포연(砲煙)이 자욱한 거치른 벌판에 흰옷입은 형제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이던 장덕준씨의 모양이 이 글을 쓰는 기자의 눈에 어리어 붓대를 옮길 수가 없습니다. (계속)
일인(日人)과 동반출가(同伴出家)
기후(其後)는 성풍혈우(腥風血雨)
일본인이 찾아와서 같이 나간 후
소식은 돈절하고 비풍만 삽삽해
억만년 생사불명, 추송 장덕준씨
종군기자로 활동
일조(一朝)에 부지거처(不知去處)
그때 살풍경이니러나 공포의 기운이 가득한 간도 일대에는 죄가 있고 없고 간에 남녀노소가 살육의 난을 피하였음으로 텅텅 비인 마을도 많았다 하며 또한 길거리에 거니는 흰옷입은 동포들은 별로 볼 수 없고 오직 장총한 군인들만이 이곳 저곳에 가고 오고 하여 낯선 손님네들을 보고 짖는 개소리만이 이 마을 저 마을에서 들렸을 뿐이었더랍니다. 그러한 중에 본사 특파로 간 장덕준씨는 국자가(局子街)에서도 얼마를 더 들어가서 있던 곳에 여관을 정하고 낯에는 종군기자로 군인들의 뒤를 따라 무가한 동포들이 피신하여 있는 벽촌 혹은 심산궁곡에서 동포들을 만나게 되였더랍니다. 그때 뉘의 말을 들으면 그는 이르는 곳마다 사람으로서는! 아니 동포로서는 차마 보지 못할 비극을 목도하게 되어 피 많은 그로서는 혈조에 뛰노는 의분을 참지 못하여 밤이면 그들과 목에 피가 마르도록 언쟁을 하였더랍니다. 그렇게 밤잠을 자지 못하여 가며 의분을 참지 못하여 괴로워하던 그는 어느 날 안개가 잦은 이른 아침에 낯모를 일본 사람 두세명에게 불리어 나간 후로는 영영 소식이 잦아지고 말았었답니다.
거처불명(去處不明)의 비보
편모(偏母)는 호천통곡(呼天痛哭)
그 소문이 한 입 건너고 두 입 건너서 간도 알판이 다 알게 되고 멀리 본사에까지 그 소식이 전하여 오기는 한양의 겨울달이 이우러져 가는 때이었답니다. 여러 달을 두고 그의 소식을 듣지 못하는 본사에서 안타깝게 궁금하였지만 멀리 험한 곳에 자식을 보내고 소식조차 듣지 못하는 그의 어머니는 더욱 애닯어 하였답니다. 그러하던 중에 그의『행방이 불명』이라는 간단한 소식을 받게 되자 그의 가족들은 물론 일반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죽었는가 살았는가 병이 났는가 어찌하여 소식이 없고 돌아오지를 않는가』하고 일구월심으로 이마에 손을 얹고 자식을 기다리던 그의 자당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호천통곡을 마지 아니하였답니다.
동기(同氣)의 뒤를 찾아
장덕주씨도 북국(北國)
행여 그 비보가『한때의 사나운 글이 되고 말았으면…』하고 일루의 희망을 가지고 의문에 잠긴 그의 그림자를 찾아 그의 형 장덕주씨가 다시 관북만리의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안개에 잦은 아들을 찾기 위하여 맏아들을 보내는 그의 어머니는 목멘 소리로『부디부디 네 아우를 찾아 가지고 무사히 다녀오너라』는 부탁을 다시금 하였더랍니다. 그 눈물의 부탁을 듣고 아우의 비껴간 길을 밟아 백설이 만건곤한 간도에 이르렀으나 하늘로 솟았는지 땅 밑으로 잦았는지 모름의 세계에서 배회하는 아우의 생사존몰을 알 길이 없었더랍니다. 잔인한 창끝에 원혼이 누리에 차고 포연이 채 사라지지 않은 쓸쓸한 벌판을 헤매이며 찾다 못하여 눈물이 앞을 가리는 길을 돌이켜 돌아왔을 뿐이었답니다.
혈루(血淚)의 제단(祭壇)
그러한 후로 어떤 그의 동지들은 그의 영을 불러 눈물의 제사를 드리는 이들도 있었고 그의 뜻을 이어 피의 제단을 쌓는 동지들도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마저 들으니 육십에 근당한 그의 어머니는 벌써 삼사년이 된 옛 일이지만 아직도 몽롱한 처지에서 그를 찾는답디다.(끝)
동아일보는 그가 실종된 지 10년이 지난 1930년 4월 1일, 창간 10주년을 기념하면서 안타깝고 쓰라리지만 그의 죽음을 인정하고 순직자(殉職者)로서 추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동아일보 1930년 3월 30일자 2면
고 추송 장덕준씨 추도회
4월 1일 본사 루상(樓上)에서 거행
추송 장덕준(秋松 張德俊)씨는 지금으로부터 10년전 경신년 9월 간도사건(間島事件)이 돌발하자 종군기자로 결연히 현지를 향한 후 소식이 묘연해진 것은 아직도 기억에 새로운 일이외다. 그의 생존에 대한 모든 요행(僥倖)과 기적(奇蹟)을 믿던 우리였건마는, 10년을 지난 오늘날이어니, 그의 자취가 아직도 세상에 남았으리라고 믿으랴 믿을 수 없는 것을 슬퍼합니다. 소소(昭昭)한 백일(白日)도 속절없이 그의 벽혈(碧血)을 비추었을망정, 그의 영은 길이 우리와 같이 있어 우리와 같이 울고 우리와 같이 웃고 우리를 지도하며 우리를 채찍질하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의 힘과 열과 정성을 힘입어 이룩된 본보가 만 10주년을 맞이하는 자리에 그의 육체적 그림자를 볼 수 없는 것은 얼마나 창자를 끊는 일입니까, 맘을 여의는 일입니까. 의미 깊은 창간기념일을 당하매 그를 사모하고 그를 경앙하는 생각이 더욱 간절함을 금할 수 없어 4월 1일 오후3시 본사 루상에서 그의 추도회를 열기로 하였습니다.
추도회를 마친 뒤 4월 3일자 1면에는 ‘추도(追悼) 장덕준군(張德俊君)’이란 추도사를, 2면에는 장덕준의 사진과 추도회 광경 사진을, 7면에는 추도식 상보를 싣고 1921년 2월 22일자에 실렸던 ‘추송 장덕준형을 사(思)하노라’는 사설을 재록하였습니다.
동아일보 1930년 4월 3일자 1면
추도 장덕준군
군이 생명을 바쳐 사랑하신 동아일보 창간 10주년 기념일에 본사 동인(同人) 일동은 추송 장덕준군의 재천(在天)의 영(靈)에 이르나이다. 추송 장덕준군은 본사 창립 당시의 중요인물로 그 열성 있고 고결한 인격과 간간악악(侃侃諤諤)한 언론은 당시 내외의 추중(推重)하는 바이었나이다.
밑 경신년 10월분에 북간도에 출병함을 당하여 해지(該地) 재류동포(在留同胞)의 사정을 보도하기 위하여 단신 종군기자로 북간도에 특파함이 되어 포연탄우(砲煙彈雨) 중에 분치(奔馳)하시다가 마침내 불귀의 객이 되시니 실로 우리 조선에서 처음 되는 언론계의 희생이라. 군을 애석(哀惜)함이 어찌 본사 동인뿐이었으랴. 실로 조선이 들어 군의 순직을 애도하였더이다.
세월이 흘러 오늘 본지 창간 10주년을 축(祝)할 새 군을 추모함이 더욱 간절한지라. 이에 동인은 눈물로써 군의 재천의 영을 부르나니 원컨대 우리의 뜻을 보소서.
동아일보 1930년 4월 3일자 2면
동아일보 1930년 4월 3일자 7면
4월 5일자 4면에는 김영섭(金永燮)의 추도사를 게재하였습니다.
동아일보 1930년 4월 5일자 4면
추도사
고 추송 장덕준씨를 곡(哭)함 – 김영섭
추송형! 형을 알게 됨은 12년 전에 처음으로 동경(東京)에서 시작하였다. 형이 청산일우(靑山一隅) 비루(鄙陋)한 곳을 멀다 하지 아니하고 찾아서 귀한 발자취가 나의 처소에 부딪치게 됨은 형과 나의 인연을 맺은 시초이며 일찍부터 영제(令弟) 장덕수씨와 숙친(熟親)한 나는 비록 형을 대함이 처음이나 초면 같지 아니하고 죽마(竹馬)의 우(友)를 대함같이 기쁘고 반가웠었다.
이후(爾後)부터 형을 대하는 나는 언어로는 능히 발표할 수 없는 무슨 큰 인상(印象)이 나의 심전(心田)에 깊이 사무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어느 날 밤 침침한 월영(月影)은 청산(靑山)의 적막한 자연계를 여지없이 단장하고 앵화(櫻花)의 찬란한 가지는 우리 두 사람의 몸을 보호하였으니 백만(百萬)의 사는 도시는 오직 우리 두 사람 이외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았었다.
형아! 인연이 박(薄)함인지 시세(時勢)의 투기가 심(甚)함인지 그런 모임을 자주 얻지 못하여 때때로 동경(憧憬)함이 간절하던 나는 부득이 『형과 나는』태평양을 가로 놓고 연모(戀慕)의 단꿈(甘夢)을 항상 꾸고 그치지 아니하였도다.
형아! 지금은 어디서 무슨 꿈을 꾸고 있나뇨? 뉴육(紐育·뉴욕)에서 영제(令弟)를 만나 형의 없어짐을 알았다. 지금 나는 여기 있는데 형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 태평양을 다시 건너 형을 찾은 나는 그날부터 오늘까지 신문지를 대할 때마다 장자(張字)만 보아도 형을 연상하며 덕자(德字)만 보아도 형의 소식을 구하여 행여나 온다는 소식, 어디인지 있다는 말이 있는가?하고 왔다.
오호(嗚呼)! 지금 무슨 말이냐? 듣기 싫다!! 아! 이것이 꿈이냐? 이 추도회라고 씌어 있는 이 신문, 이 모임…! 과연 참된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형아! …? 어찌하여 오지 아니하는가? 봄풀은 또다시 푸르러서 새 소식을 전하는데 어찌하여 형은 가고 올 줄을 모르는가? 때도 오도다. 이 혹독한 추위 몹시도 추운 땅은 형을 가지기 합당치 못하였다. 그러나 이 추위 이 쓰라림 제 혹독하면 얼마나 하며 제가 길면 얼마나 길까 보냐?
대기(大氣)가 돌아오매 죽었던 가지도 봄을 자랑한다. 무궁화동산에 아리따운 봄빛은 지금 자랑할 단장을 갖추지 아니하였는가! 어서 오라 어서 어서 형아!! 추도회라는 이 모임……? 오호! 정말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영제(令弟)도 불원간 올 터이다. 이것은 믿지만 형의 옴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이 말이 웬일이냐?
나는 형의 추도사를 과연 하고 싶지 않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형은 여기보다도 더 좋은 그곳에서 좋은 꿈을 꾸고 있을 줄 믿으면서 나의 이 악몽을 어서 깨고 싶다.
오호! 이것이 꿈이다. 이것이 과연 꿈이야! 이 악한 꿈을 언제나 깰는지! ……? 형이 꿈을 꾸는가? 내가 꿈을 꾸는가? 누구의 꿈이 참 꿈이뇨? ……!? 오호 통재(痛哉)라!! 추송 장덕준 형아!! ……?
동아일보 창간 때 통신부장과 조사부장을 겸해 맡았던 추송 장덕준은 창간 다음날인 4월 2일자부터 4월 13일까지 1면에 ‘조선소요(朝鮮騷擾, 3·1독립만세운동을 말함)에 대한 일본 여론(與論)을 비평함’이란 논설을 10회에 걸쳐 쓴 강골(强骨)기자였습니다.
동아일보 1920년 4월 3일자 1면
또 실종되기 두 달 전인 1920년 8월에는 미국 상하원 의원시찰단의 중국 방문에 맞춰 김동성(金東成)기자와 함께 북경(北京)으로 특파돼 8월 8일자부터 8월 27일자까지 특파원 발(發)로 많은 기사를 남겼습니다.
– 동란(動亂)의 북경에서 (1920년 8월 8일자 2면)
– 동란(動亂)의 북경에서(속)/ 금회(今回)의 동란과 문파(文派) (1920년 8월 9일자 2면)
– 동란(動亂)의 북경에서(속)/ 사면초가(四面楚歌)중의 안복파(安福派) 말로(末路) (1920년 8월 10일자 2면)
– 동란(動亂)의 북경에서(속)/ 오자옥(吳子玉)장군을 방문하고 (1920년 8월 19일자 2면)
– 동란(動亂)의 북경에서(속)/ 장작림(張作霖)씨를 방문하고(1) (1920년 8월 20일자 2면)
– 동란(動亂)의 북경에서(속)/ 장작림(張作霖)씨를 방문하고(2) (1920년 8월 21일자 2면)
– 미국 의원단장 스몰씨/ 조선민족에게 친애(親愛)의 정(情)을/ 동아일보를 통하여 전달 (1920년 8월 24일자 3면)
– 동란(動亂)의 북경에서(속)/ 오자옥(吳子玉)장군을 방문하고(2) (1920년 8월 26일자 2면)
– 동란(動亂)의 북경에서(속)/ 오자옥(吳子玉)장군을 방문하고(3) (1920년 8월 27일자 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