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고하(古下)는 남자다. 눈썹이 빠져 문둥병이라는 소문까지 있었다. 소고기가 좋다고 해 자주 스테이크를 먹으러 다녔다. 어느 날 고하를 없애려고 일본 야쿠자 조직에서 자객을 보냈다. 고하가 자른 스테이크를 칼로 찍어 입에다 쿡 갔다댔다. 고하가 아무런 표정 없이 빤히 쳐다보자 자객이 놀라 도망갔다. 오야봉에게 돌아가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허, 오도꾸네’ 하며 없던 일로 하자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백기완 선생 전언)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


  그는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가 창간 될 때 3·1운동 민족대표 48인의 1인으로 서대문감옥소에 있었고 출감(1920년 10월 30일) 이후 1945년 12월 30일 대한민국 정치암살의 첫 희생자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생을 동아일보와 함께 했습니다.


  1906년 16살 때 창평 영학숙(英學塾)서 15살의 김성수를 만나 동경유학도 함께 했고 중앙학교 인수도 함께 했으며 3.1운동 논의도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함께 했습니다.




  ‘고하 송진우 선생전’, 고하선생전기편찬위원회 편, 동아일보 출판국, 1965년, 3~4쪽 서(序)


 “선생은 인촌 김성수 선생과 더불어 형영상반(形影相伴)하여 뜻을 조국의 광복에 두고 일신의 안위를 초개(草芥)같이 여기면서 암담한 속에서도 희망을 제시하고 인고에 처해서는 스스로 선봉이 되어 이를 짐내(斟耐)하였다. 선생이 동아일보를 이끌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시종일관 항쟁하고 민중의 각성을 외친 것도 조국 광복을 위한 일념의 발로였다. 돌이켜보면 선생의 생애 55년은 일직선의 강직 그것이었다. 불의와의 타협을 몰랐고, 동요를 몰랐고, 더구나 굴종이란 선생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어휘였다. 실로 선생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암흑기에 민중과 더불어 있으면서 낙망, 좌절이 일세를 휩쓰는 가운데서도 앞날을 똑바로 내다보고 군계일학 같이 특립(特立)하여 항시 조국 광복의 등불을 밝힌 선각자였다. 세태가 어지럽고 인심이 날로 각박하여 방향타를 잃은 일엽선을 방불케 하는 작금에 있어서는 더욱 선생의 풍모를 연상케 되고 그 적확한 선견과 청탁(淸濁)을 병탄(倂呑)하는 고사지풍(高士之風)이 아쉬울 뿐이다. 만약 선생이 지각없는 흉한(凶漢)의 총탄에 쓰러지지 않고 절세의 경륜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면 우리 역사의 진로도 달라졌고, 오늘의 현실도 행여 다르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다.”(1965년 9월 5일 후학 고재욱)


  평생을 함께 한 두 사람을 두고 고재욱 전 동아일보 사장은 ‘형영상반(形影相伴)’, ‘형(形)’과 ‘영(影)’이 함께 가는 것과 같았다고 표현했습니다.


  3.1운동 후 일제가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꾸자 고하 송진우 선생은 인촌에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하늘이 기회를 준 거야. 분골쇄신이란 말도 오히려 부족하지. 눈을 뒤집고 일을 해야지.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민충정공(閔忠正公) 처럼 자문(自刎)하지 못한 답변이 될 것이요, 안중근 의사처럼 교수대에 오르지 못한 설명이 되어주는 거요. 죽어서 민족에게 이바지하는 것도 애국의 한 방편이지만, 살아서 적과 싸워 이긴다면 이 얼마나 좋은 애국인가. 학교도 하고, 신문도 하고, 공장도 차리고…. 학교에서는 열 명, 백 명의 충무공이 나올 것이오, 백 명, 천 명의 안중근 의사가 나와 준다면 우리가 망국일에 죽지 않은 보람도 날 것이 아닌가.”


  열 명 백 명의 충무공, 백 명 천명의 안중근 의사가 나와 주길 학수고대하며 인촌과 고하는 동아일보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1925년 6월 하와이에서 열린 제1회 범태평양회의에 다녀와 ‘세계 대세와 조선의 장래’를 10회(1925년 8월 28일~9월6일자)에 걸쳐 썼습니다.

  조선이 망한 이유, 개혁 실패의 원인, 세계정세의 흐름을 명쾌하게 분석하고 조선민족이 나아가야할 길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동아일보 1925년 8월 28일자 1면(1)






우리는 조선 사람이다. 그러므로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과 같이, 새가 수림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과 같이 도저히 조선을 떠나서는 또한 조선을 잊어버리고서는 일각일초라도 설 수가 없고 살 수가 없다. 이리하여 자거나 깨거나 듣거나 보거나, 잊으려 하여도 잊을 수 없는 것이 현하 우리 동포의 심리적 상태인가 한다. 그러면 조선을 위하여 웃을 사람도 우리 동포요, 또한 조선을 위하여 곡할 사람도 우리 형제일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조선 과거의 흥체적(興替的) 사실(史實)을 추구하며 또한 조선이 세계 구성의 일부인 이상에는, 현하의 세계와 조선과의 영향 관계의 현상을 그대로 냉정하고 엄숙하게 관찰하여서 조선민족의 당래의 운로를 개척 노력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긴차절(緊且切)한 문제일 것이다.


2  

물론 조선의 장래를 논구(論究)하는데 있어서는 외부적으로 중요한 영향 파동이 관계를 가진 세계적 대세도 요긴한 재료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보다도 더욱 중차대한 관계를 포함한 것은 내부적으로 조선민족 자체의 과거 역사상 흥체성쇠(興替盛衰)의 인과관계이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우리는 먼저 과去 사천년간 흥체성쇠의 사실을 개괄적으로 일론(一論)하려고 하는 바이다. 물론 과거의 조선에는 표면적으로 관찰하면 단군대황조의 등극조판(登極肇判)하신 이후로 기자, 기준(箕子, 箕準)의 조선도 있었고 위만의 조선도 있었고 또한 진한, 변한, 마한과 고구려, 신라, 백제의 분열된 조선도 있었다. 이리하여 이를 통일 조직하였던 신라의 조선과 또한 이를 통일 계승하여 온 고려의 조선과 이조의 조선이 있었던 것도 역사적 사실이었다.




그래서 사천년을 통하여 역사적 변천과 정치적 흥체가 반복무상하였다. 그러나 언제든지 조선인의 조선이라는 관념은 없어져 본 일이 없었으며, 또한 실체적으로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은 엄숙한 사실이다. 환언하면 삼국의 분열은 그 당시 정치 당로자의 분열이며 신라·고려·이조의 멸망도 또한 그 당시의 왕위 교대의 흥망변천에 부과하였던 것은 소소한 사실이 아닌가. 어째 그러냐 하면, 역대 왕조의 변천 흥체에 따라서 만일 조선이 멸망하였다 하면, 어찌하여 사천년래로 조선 민족의 문화가 의연히 보전할 수 있었으며, 또한 조선 민족의 혈통이 엄연히 존재할 수가 있는가. 경(更)히 일례를 거하면, 미국의 민주·공화 양당이 경쟁 교체하여 미국의 정권을 접수상전하는 동안에 혹은 공화당이 승리를 득하며 혹은 민주당이 실패에 귀하여도 누구든지 결코 미국 자체의 동요 흥체로는 보지 아니할 것이 아닌가. 이러한 의미에서 역대 왕조 자체의 정치적 흥망에 부과한 것이고 결코 조선 민족 자체의 전체적 멸망, 근본적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을 이에서 굳게 단언하는 바이다.


동아일보 1925년 9월 6일자 1면(10)




1

그러면 우리 민족의 세계대세에 처하는 포부와 조선의 장래에 대한 경륜은 여하할 것인가. 객관적으로 조선의 장래가 여하히 되리라 하는 것보다, 일보를 진하여 주관적으로 조선의 장래를 여하히 할까 하는 것이 주의의 초점이며 문제의 목표가 아닌가. 일언으로 폐하면 조선민족의 포부는 어디까지든지 웅위하여야 할 것이며 또한 어디까지든지 원대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 조선의 동양 각 민족에 대한 전통적 주의와 방침이었으며 또한 우리 형제와 인도와 문화를 애호하는 유전적 천성인가 한다. 회고하여 보라. 북으로 중국의 인의를 존중히 하고 동으로 일본의 문화를 계발하여 항상 동양평화의 선구가 되며 또한 동양문화의 도솔(導率)이 되었던 것은 시대적 사실이 오인에게 예증하는 바가 아닌가. 왕왕히 수·당의 겁운과 일·청의 악몽이 있었으나 이것도 또한 조선민족의 자주적 살벌이 아니요, 외적의 만성 발작에 대한 정의적 제재이며 인도적 방위였던 것은 정확한 사실이다.


2  

우리는 구미의 자유정신과 과학문명을 애호하는 바이다. 그러나 인국을 도탈하고 인혈을 흡취하는 수성만행은 어디까지든지 배척하고 구축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만일 이러한 수성만습을 그대로 긍정한다면 인류사회는 결국에 강도의 발호(跋扈)에 불감(不堪)할 것이며, 평화의 제단은 필경은 목축의 유에 불과할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민족적 정의와 인도적 평화의 유지발전에 대하여는 어디까지든지 민족적 의혈을 불사하여야 할 것이며 전국적 동원을 행치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설령 일본을 배척한다 하면 일본의 군벌일파의 침략적 군국주의를 배척하는 바이며, 또한 적로를 친근한다 하면 적로의 평등의 정신을 애호하는 바가 아닌가. 혹은 만일 동아의 풍운이 기하고 이리하여 일·미의 충돌이 생할 시에는 미국의 세력 하에서 조선의 해방을 희망하며, 혹은 일로·일중의 충돌을 예기하여 로·중 양국의 원조 하에서 민족의 자유를 촉망하나 이것은 결코 조선민족의 전통적 정신에 배치될 뿐 아니라 우리의 양심이 또한 불허하는 바이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에게는 자주적 정신이 있는 까닭이다. 자유는 어디까지든지 자주적 행동이며 자력적 해결이 될 것이다. 결단코 타력적 원조와 사대적 사상의 지배와 용인을 불허하는 바가 아닌가.


3  

물론 우리는 타민족의 인도적 동정과 정의적 원조를 불사하는 바이다. 그 뿐만 아니라 현하의 일본으로도 작비금시(昨非今是)의 진리를 번연히 회오하고 자진하여 조선 문제의 인도적  해결을 단행한다면 우리는 결코 역사적 감정에 구니(拘泥)하여 배척할 필요가 없을 것이 아닌가. 우리의 주의와 목표는 언제든지 민족적으로 자유·생존·평화의 3대 이상에서 그 출발점을 작할 것이요, 결코 증오·배척·침략적 관념에 지배될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첫째로 민족적 자유를 해결할 것이요, 둘째는 사회적 생존권을 보장할 것이요, 셋째로 세계적 평화에 노력할 것이 아닌가. 이 곧 조선민족의 웅위한 포부가 될 것이며 또한 원대한 경륜이 될 것이다. 거연히 소강을 지하고 동색민족을 박해하여 사리를 농하여 인류의 평화를 교란하려 하다가 최후의 파멸을 자초하던 로·독 양국의 전철에 감하여 또한 이를 견습 모방하던 일본 문명의 파탄에 증하여 반성자오할 바가 아닌가.


4  

우리가 이러한 포부와 경륜을 가지고 당래할 세계적 변국에 처하여, 어떠한 수련을 가하여 어떠한 준비를 행할 것인가. 두말 할 것도 없이 사상적 수련과 민족적 단결이다. 첫째로 우리의 사상계는 복잡한 것이 사실이다. 이를 정리하여 통일하는 데 있어서는 조사와 비교와 연구가 필요한 것은 물론이며, 둘째로 이렇게 정리 통일이 된 사상 하에서 중심적 단결을 작성하여서 우리의 일빈·일소(一嚬·一笑)와 일동·일정(一動·一靜)이 단결적 배경에 의하여 발하며 행하게 되는 것이 현하 급무가 아닌가. 여하한 명 배우라 할지라도 무대가 없으면 교기절예를 연출치 못하는 것과 같이 인류는 단체적 배경과 사회적 토대가 없으면 그 천재와 재능을 발휘치 못할 뿐만 아니라, 여하히 웅위한 포부와 원대한 경륜을 가졌다 할지라도 활천(活川)의 로(路)가 절(絶)할 것이며 실현의 일(日)이 무(無)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오인은 외세의 파동보다 타력의 원조보다, 중심세력의 확립과 자체세력의 해결을 절규역설하는 바이다. 요컨대 조선 문제는 민족 자체의 단합이 확립하는 그날로부터 해결될 것을 확신하는 바이다.     




 “송진우의 지도자로서의 특성은 흔히 ‘세계대세에 대한 정확한 분석, 역사의 진운에 대한 예리한 선견’(고재욱, ‘고하송진우선생전’ 서)으로 평해진다. 그가 남긴 그다지 많지 않은 문장 중에서 1925년 6월 하와이에서 열린 제1회 범태평양회의에 신흥우 등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석하고 돌아와 동아일보에 연재한 ‘세계의 대세와 조선의 장래’라는 일문(一文)은 그의 예언자적인 선견을 보여 준다.


만일 19세기를 프랑스 문화의 확충 시기라 하면 20세기는 적로(赤露)사상의 발전시대라 하는 것이 적당한 견해일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범인 미국과 사회주의의 대표적인 적로(赤露)가 태평양을 격(隔)하여 양양상대(兩兩相對)하여 발흥되는 것은 과연 불원한 장래에 그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가. 협조할까, 충돌할까. 이 곧 태평양 상의 일말의 의운(疑雲)이 되어 있는 것은 불무(不誣)할 사실이다. 세계대세의 운명이 이에서 결정될 것이며 또한 인류의 문화상 총결산이 이에서 감정(勘定)될 것은 상상키 부(不)난할 바가 아닌가.


라고 하여 20년대의 국제정치 안정기에 이미 2차 대전 이후의 정황을 전망하고, ‘세계대세의 추이와 동양정국의 위기로 보아서 4, 5년을 불과하여 태평양을 중심으로 한 세계적 풍운이 야기될 것’을 예언했다. 그리고 조국의 광복이 열강의 대일전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지만 그러나 현실은 그의 경고를 적중시켰다. 이러한 일제필망(日帝必亡)의 신념에서 그는 일제 말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저들의 소위 ‘황민화운동’에 협력 내지 동원된 것과는 달리 혹은 지방으로 나가 옛 동아일보 주주들을 찾고 혹은 신병을 빙자하고 자리에 누워 견디어 냈다.”(손세일, ‘한국근대인물100인선’, 신동아 1970년 1월호 별책부록)


  고하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당시 인물평으로 아래와 같은 글들이 있습니다.


  1929년 9월 ‘삼천리’, 제2호,

 ‘명사의 멘탈테스트’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 씨


조선에서 좋든 굳든 가장 인기의 초점 위에 올라서고 있는 인물은 신문사장이다. 그 중에도 송진우 씨는 무슨무슨 사건 등으로 세상에 정치적, 사회적, 파문이 일 때마다 항상 찬훼(毁)의 화살을 만이 받아 온다. 이 사실은 씨의 동적인 성격을 의미하는 동시에 항상 무슨 일관한 주의보다 현실 조건을 더 중요시하고 추축(追逐)하는 정치가적 소성(素性) 때문에 그리 되는 것이리라. 어쨌든 춘추(春秋) 불혹에 가까워 달관하신바 있는가. 요즈음은 매일 원동  자택에서 인력거를 타시고 팔장을 끼고 만면 미소로 동아일보사로 출입하신다. 무에 그리 기쁘십니까 하고 물어도 ‘소이부답심자한(笑而不答心自閑)’이라 하실 듯 씨를 해양에 물결차고 가는 거선(巨船)가튼 청신한 기분을 주는 황사현 동아 사옥의 사장실에 찻기는 삼복 어느 더운 날

“미국의 자본이 조선에 만히 드러 온다면 엇더하겟슴니까. 우리의 생활이 좀 나서지리까요”하고 죄송하나 두뇌 시험의 일시(一矢)를 던지니 언하(言下)에

“무론 조치요!”

하고 실업문제, 물가문제, 범백(汎百) 문제에 도도수백언(滔滔數百言)(내용은 어느 관계로 략함니다) 그러다가 슬머시 키를 돌니더니

“그러나 그 돈은 우리를 주체로 한 즉 조선 사람의 행복을 위주하여 쓰는…”하며 결론에 힘을 준다. 그대로 필기하여도 얌전한 논문이 될 것 가치 조리정연, 어세침중(語勢沈重) 유감이나 옥중 노고로 건 늙은 것이 풍채를 상함이 만타. 최후로

“우리들은 엇더케 나가면 올해요?”

씨는 한참 잇다가, 가늘게 그러나 무겁게

“민족적으로 노력할 밖에…”

일언(一言)뿐 씨는 한참 당년에는 영웅 호색의 염문과 인력차 이등사건 등으로 경중에 화제를 잘 제공하시드니 이제는 새 집 지으시기에 분주하신 모양 치가치산(治家治産)하심인가. 그러나 치가(治家)의 도와 와석종신(臥席終身)의 도라 하야 난세의 사(士) 즐겨 취치 안는 길이어든???

실례지만 씨를 새에 비기면 능굴능신(能屈能伸)이요, 권모술수가 만흐며, 그 기개가 항상 공격적, 전제적인 장공(長空)의 수리개와 갓다 할 것이다. 금일 성적 채점 8점으로 급제(及第)




  백능, ‘혜성(彗星)’ 제1권 제1호(1931년 3월호)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 씨 면영(面影)

  화동 동아일보 사옥-때는 오후 2시.


하루일이 가장 바쁜 시간이다.

편집국장 자리 암체어에 큼직한 구체를 푹신 잠그고 한 팔로 뺨을 고인 채 예에 의하야 눈을 감고 오수(?) 명상(?)을 하고 있던 송진우 씨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눈을 번쩍 뜨고 바로 그 옆에 있는 사회부를 바라본다.

오후 2시니까 사회부 외근기자도 다 들어왔다. 일상 하는 대로 나란히 앉은 고영한 군과 유지영 군도 잡념 없이 원고를 쓰고 있는 판이다.

그때에 송진우가 넙죽한 목소리로 ‘고지영 씨-’ 하고 불러 놓았다. 이 서슬에 고영한 지영 양군이 다 같이 한꺼번에

“네?” 

“네?” 

대답을 하고 이편을 바라본다. 그러면서 사회부를 중심으로 웃음이 왁 터져 나온다.

그때에 송진우 씨가 고영한 군을 부르려다가 고지영 씨라고 했는지 유지영 군을 부르려다가  고지영 씨라고 했는지 그것은 모르겠으나 이것으로써 씨가 일상 ‘생각’을 골똘히 하다가 뜻밖에 그러한 망발을 잘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A사원이 설렁탕을 먹으면 자기도 설렁탕을 급사더러 시키라고 해놓고 또 다른 B사원이 모리를 시키면 먼저 시킨 설렁탕은 잊어버리고서 모리를 시키라고 하고… 등등 절창이 많다.

씨는 전남 담양 태생이다.

지금 사업에 있어 일신양면이라고 할 만한 김성수 씨와 한가지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약 20년 전인 듯하다(그때 하관서 잘못 2등차를 타고 차장에게 혼이 나서 동경 역(?)에 내려 인력차 삼등타기를 고집했다는 말도 유명한 일화다)

동경서 명대법과를 마치고 귀국하여 김성수와 한가지로 그때 바로 폐문의 비운에 빠진 중앙학교를 인계하여 기미사건 이전까지 처음에는 학감으로 나중에는 교장으로 교육 사업에 종사하였다.

그때의 씨는 지금의 활달하고 때가 벗은 정치가적 인물임에 비하야 다만 한 교육자요 선생님일 따름이었다.

씨 자신 역시 학생들에게 ‘나는 일생을 교육가로서 마치겠다.’고 하였다. 그에 알맞게-말하자면 약간 고릿하게-시험문제를 도판에 써 놓고 난로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과연 졸음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나 기미운동을 획기로 씨는 당당히 정략가로서 나서게 되었다.

변재도 그 당시는 그다지 신통스럽든가 싶지 않다. 그 고유한 어벽와 사투리는 그대로 있으나 ‘…그리 각꼬-는’ 하며 꽉 쥐인 주먹으로 테이블을 땅 치고 눈을 한번 꿈벅 입을 움찟하고 청중을 내려 보는 양은 우습기는 하나 웃음은 나오지 못하고 귀와 눈이 번쩍 띄이는 무엇인가가 있다.

기미 이후 씨는 다시 김성수와 한가지로 동아일보를 세우며 일을 하게 되었다.

김성수 씨의 말이 여러 번 나오니 말이지 이 양씨는 일신양면이다.

무슨 일이든지 둘이서 같이 나선다. 그것은 마치 한 쌍의 부부와도 같다.

물론 두 성격은 전연 다른 점이 많다.

일을 착수 혹은 진행하는데 있어 김 씨는 소극적인데 반하야 송 씨는 적극적이다.

김 씨는 약간 성이 급한데 반하야 송 씨는 뱃심이 나온다.

김 씨는 돈을 모으고 송 씨는 돈을 쓴다.

김 씨는 쪽을 맞추고 짝을 짓는데 반하야 송 씨는 떼어놓고 벌려 놓는다.

김 씨는 군자적으로 얌전하며 살림꾼인데 반하야 송 씨는 외교적이요 수호지식이다.

김 씨는 자자본하니 고요한데 반하야 송 씨는 거칠고 왕뗑- 한다.

김 씨는 군자적으로 공평한데 반하야 송 씨는 정치가적으로 다소 당파적이다. 그러므로 그 수하의 사람 중에 씨가 한번 신임한 사람이면 그 두호가 두터운 반면에 한 눈이 벗은 사람이면 포인트로 이하 떠 내려놓고 만다.

그것은 그렇다고 이상과 같이 송 김 양씨는 서로 반대되는 두 성격을 잘 종합하여 가지고 오늘날의 사업을 이룬 것이다.

그러므로 김 씨가 없었으면 오늘날의 송 씨와 그 사업이 없었을지도 모르는 것이요 송 씨가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김 씨와 그 사업이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동아일보는 초창기인 화동 구 사옥 시절이 가장 어려웠던 때다.

따라서 그를 배경삼아 오늘날까지 이르는 송진우 씨도 그 시절이 가장 어려운 고비였을 것이다.

편집국장으로 사장으로 한번은 일단 인퇴를 하였다가 다시 고문으로 편집국장으로 급기야 사장으로-

그리하는 동안에 신문 자체로도 아슬아슬한 경우를 많이 넘겼고 씨도 어려운 재주를 많이 넘었다. 필화사건으로 철창에 들어간 것도 그때요 말썽 많은 사회단체의 뭇 공격을 받던 때도 그때요 ○○○에게 시달림을 받던 때도 그때다.

○○이라니 우스운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는 부하를 데리고 어떠한 때는 피스톨까지 차고 온다.

마주 붙어 싸울 수도 없는 일이요, 그러자니 당하기가 창피하고 어쩔 수 없이 실컷 시달리고 나서 어떻게 쫓아 보내고는 영업국으로 쭉-오면서 당시 영업국장(?)인 신구범 씨더러

“신구범 씨 총 갖다 놓으시요. 총……그 놈이 내일 또 오면 내 그 놈을 쏘아 죽일테야”하며 분에 못 이겨 하던 양은 실지로 아니 본 사람 말이지 아니 웃을 수가 없었다.

곤란이 있었을 뿐 아니라 많은 유혹도 있었다. 이것은 확실하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도지사’라는 미끼까지도 있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곤란과 난관을 디디고 넘어 한층 두층 동아일보의 기초가 굳어짐에 따라 송 씨의 지반도 든든하여지고 가부간에 씨의 정체도 또한 선명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은 신사옥을 건축하고 다시 사장의 자리로 올라가 앉으면서부터이라 하겠다.

그러나 일반이 보기에는 송진우 씨가 평생을 한 저널리스트로 보내리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그리하기에는 씨는 너무도 정치적으로 두뇌가 생겨졌다.

언뜻 보기에는 둔한 것 같고 우물우물 하는 것도 같다. 손님을 앉혀놓고 혼자 졸기가 일쑤요 ‘하이 하이 와다구시가 소징구데스’ 하는 한심한 일어로 외교는 하건만 어데를 가든지 발을 척 개이고 앉었지 납짝 업드려 국궁하거나 반쯤 쪼그리고 앉거나 할 질이 아니다.

이만큼 버틴다. 그리고 그만큼 밝게 관찰을 하며 그 관찰을 실지에 이용할 수단을 부린다.

물론 이것은 송진우 씨가 현재 디디고 서서 있는바 배경인 그 정세 밑에서라는 전제로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 배경이나 그 정세를 ‘선’으로 보지 아니하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논한다하면 그동안까지 써온 중 송 씨의 공적생활에 대한 것은 전부 부인할지 모를 것이다. 그보다 더 그 전체까지도 부인할지 모를 일이다.

차설 씨는 앞으로 정치적 무대가 허여된다면 그때에 비로소 씨의 씨다운 활동과 면목이 나올 것이다. 그러므로 동아일보 사장으로의 송진우 씨는 그 앞날로 보아 아직도 잠복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씨는 아직 42세. 연령으로 보아도 지금으로부터가 한창 일을 할 때다.

아침마다 화동 자택에서 인력 차에 몸을 싣고 예의 예대로 팔찌를 꽉 끼고 입도 꽉 다물고 눈을 꽉 감지 않으면 무슨 소린지 흥얼흥얼 하면서 사로 향하야 출근을 하고 있다. 그 큼직한 얼굴에 수염이 없는 것이 좀 섭섭하다.

몸은 비교적 퍽 건강한 편이요 정객답지 않게 술에는 약한 모양이다.

염사를 조금만 썼으면 좋겠으나 선생님 꾸중하실까봐 그만둔다. 가장 신임하기는 주요한 설의식 이광수 씨. 말이 났으니 말이지 전날 구 사옥에서 생긴 이야기이다.

이광수가 병으로 나오지 못하고 그 대리 겸 해서 그 부인 허영숙씨가 학예부 일을 잠시 맡아본 일이 있었는데 하루는 아침에 지성으로 허영숙 씨를 불러놓고는

‘춘원 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아이구 웬일인지 어제오늘 열이 더해요’

‘엉? 그거 안됐군! 저 저 허영숙씨를 춘원한테서 격리를 시켜야해 격리’

이런 의외의 농을 하고 모두들 웃은 일이 있었다.

자녀 간에 소생은 없다.

소생이 없다는 것 보담 연전에 만득으로 하나 얻은 애기를 앗차 잃어버리고 말았다.

폭언다사(暴言多謝)




  황석우(黃錫禹)  나의 팔인관(八人觀), 삼천리 제4권 제4호(1932년 4월) 

 “씨(氏)는 이론가는 아니다. 그는 모략종횡(謀略縱橫)의 가장 활동적인 정객이다. 조선 안의 인물로서는 정치가로의 그럴듯한 소질이 제일 풍부한 인물은 송 씨일 것이다. 그는 조선 안의 젊은 인물로서는 벌써 정치가로의 급제점 이상을 돌파한 인물이다. 그러나 송 씨는 그 정객으로의 성격이 너무나 동적인 것에 많은 실패와 또는 그에 따르는 많은 시비가 있을 것이다. 그는 앞날의 정치적 활동에 있서서 풍운이 자못 자질 것이다. 장덕수(張德秀) 군과 같은 충실함과 굿센 곳이 업는 점이 그 이의 큰 결점, 그러나 종인어인지술(縱人御人之術)에 있어서야  장군지비(張君之比)가 아니다. 정(張) 군은 그점에 있어서는 송(宋) 씨의 발 아래에 멀리 내려다 보이는 순진한 보이(boy)일 것이다.”   “송진우 씨에게는 술 마실 때 두 가지 버릇이 있었다. 거나해지면 옆 사람 어깨를 무는 버릇이 있어 술자리에서는 모두들 옆자리를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 하나는 바지 앞단추를 끄르는 버릇이다. 한번은 광고주인 유일한(柳一韓) 씨와 중국인 부인 호(胡)매리 여사를 명월관에 초대했는데 이 버릇이 나왔다. 유 씨 부인이 영어로 ‘야만스럽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나는 급히 김성수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인촌이 달려와서 송진우 씨와 교대를 했다. 김성수 씨와 송진우 씨는 번갈아가며 사장을 몇 번 지냈다. 기사로 말썽이 난다든가 하면 사장이 사표를 내고 바뀐 것이다. 김 씨는 편집에는 간섭을 하지 않았다.”(‘주요한 문집- ‘새벽 Ⅰ’, 요한기념사업회, 1982년, 53쪽) 




 ‘號外’(1933년 12월호)

 ‘소문의 소문’ 송 사장과 독재자

최근 동아일보사에 입사한 일 신입사원이 술회하여 가로되

“나는 그전에 송진우 씨라면 그저 고집투성이 독재자로만 알았더니 이번 동아일보에 입사를 하여 보니까 아주 말과는 딴판입니다. 그야 신문제작에 대하여서는 모든 점을 통솔하는 관계상 자연 독재적으로 나가는 점도 없지 않지만 아침 아홉시면 벌써 출사(出社)하여 다른 사원이 거진 다 나간 오후 6, 7시까지 편집국에 혼자 떡 버티고 앉아서 새로 찍혀 나온 신문을 글자 한 자 빼어놓지 않고 샅샅이 주워 읽는 열성에는 정말 감탄치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까닭에 글자 한 자라도 잘 못 쓸래야 잘못 쓸 수가 있어야지요. 역시 송진우 씨는 부지런한 일꾼입니다….” 




  “죽어서 민족에게 이바지하는 것도 애국의 한 방편이지만, 살아서 적과 싸워 이긴다면 이 얼마나 좋은 애국인가”고 했던 고하 송진우 선생은  ‘살아서 적과 싸워 이기고’  적이 아닌 동족의 손에 죽음을 당했습니다. 


동아일보 1993년 2월 20일자 23면

한현우 씨 일(日) 여자와 재혼 동경 거주

본부인은 사위와 서울에서 함께 살아


최근 정가에서 불투명한 경력으로 의구심을 불러 일으켜 화제가 되고 있는 김영삼 차기대통령의 정책수석비서관 내정자 전병민 씨(46). 그의 장인이 민족지도자였던 고하 송진우 선생의 암살자로 밝혀져 또다시 관심을 끌고 있다.

전 씨의 장인인 한현우 씨는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자주 이름을 바꿔 홍건 계일 등의 이름으로 호적등본에 올라있으나 전 씨의 부인 한영구씨(46·외교안보연구원교수)는 20일 본보 기자를 만나 이 같은 사실을 시인했다.

부인 한씨는 “아버지는 현재 일본 동경 목흑구에서 한일고대사에 대한 저술을 하며 지내고 있다”면서 “아버지는 6·25직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여자와 결혼해 3명의 자녀를 낳았다”고 말했다. 그동안 한현우 씨의 행방은 불투명했었다.

한씨는 “집안에서는 우울한 기억을 되살리지 않기 위해 아버지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금기로 삼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현우 씨의 부인 이모 씨(69)는 한 씨가 경찰에 붙잡혔던 곳인 서울 중구 신당동 304의 200 한옥에서 지난 83년까지 거주하다 사위인 전 씨의 서울 성동구 옥수동 자택으로 옮겨 딸 부부와 함께 살고 있다.

한현우 씨는 지난 45년 12월 30일 새벽 6시경 서울 종로구 원서동 74 고하의 자택에 유근배 김의현 등 공범 4명과 함께 침입, 일제 99식 권총으로 별채에 누워있던 고하를 쏴 숨지게 하고 달아났다가 사건발생 98일 만인 46년 4월8일 자신의 집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전 씨는 이에 대해 “공인이 되려하지 굳이 밝히고 싶지 않은 사생활의 부분까지 드러나게 돼 씁쓸하다”면서 “결혼한 뒤 동경에서 장인을 뵌 적이 있다”고 밝혔다.    




 고하 송진우 선생을 저격한 한현우의 사위 전병민(김영삼 차기대통령의 정책수석비서관 내정자)은 위의 동아일보 기사가 보도된 직후 정책수석비서관 내정자 직을 사퇴했습니다. ‘죄 있는’ 한현우의 업보(業報)로 ‘죄 없는’ 그의 사위가 상처를 입었으니 이 무슨 운명의 행로(行路)입니까?




 위당 정인보 선생은 고하 송진우 선생의 비명(碑銘)에 ‘혹 절조를 자랑할 수는 있어도 지략과 포부를 갖춘 이는 드문데 이를 겸해 갖춘 선비’라고 썼습니다.







스코필드 박사가 송진우선생에게 선물한 성경.(1918년 5월)









1922년3월 18일 중앙고보 제1회 졸업기념사진.

왼쪽부터 인촌 김성수, 각천(覺泉) 최두선, 고하(古下) 송진우, 기당(幾堂) 현상윤.









송진우 선생의 필적

1924년 2월 18일 남강 이승훈(南岡 李昇薰) 선생 회갑기념 서화첩의 첫머리에 실린 축사.







1925년경 동경에서 김성수(오른쪽)와 송진우












1926년 3월 5일 3.1운동 7주년을 맞아 국제농민회본부가 보내온 축사를 실었다하여, 일제는 동아일보에 대해 발행정지(정간)처분을 내리는 동시에 주필 송진우와 편집인 겸 발행인 김철중을 재판에 회부, 송진우는 징역 8개월(보안법위반), 김철중은 금고 4개월을 선고받았다. 고등법원 판결 후 이들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9년 일본 경도(京都)에서 열린 제3회 범태평양회의에 한민족 대표로 참가한 고하(왼쪽에서 두번째).

맨 왼쪽이 백관수(白寬洙), 한사람 건너 윤치호(尹致昊) 유억겸(兪億兼).







1932년 현충사 준공식  







1935년 자신의 동상 제막식에 참석한 최송설당 여사(앞쪽)와 축하하러 온 고하 송진우(뒷줄 왼쪽), 몽양 여운형.

 







1940년 8월 동아일보가 강제폐간되어 쉬는 동안의 금강산 여행 때.







일제하 어느날 명월관에서 자리를 같이한 송진우(좌측 앞에서 두번째)와 여운형(우측 앞에서 맨끝쪽). 




 


위당 정인보 선생이 송진우에게 보낸 문안 엽서. 1945년 5월 19일 소인이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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