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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 94 : 일제하 동아일보의 연재소설

Posted by 신이 On 9월 - 16 - 2011

  동아일보의 3대 사시(社是) 중의 하나인 ‘문화주의’를 구현하는 첫걸음은 국내 최초의 신춘문예 공모와 연재소설 게재였습니다. 


  1920년 4월 1일 창간호에 ‘민우보(閔牛步)’라는 필명으로 연재된 민태원(閔泰瑗)의 연재소설 ‘부평초(浮萍草)’(1920년 4월 1일~1920년 9월 4일, 전 113회)를 시작으로 동아일보는 한국 장편문학의 산실이 되었습니다.






1920년 4월 1일자 4면




 부평초(1) 민태원




  이때는 삽화 없이 글만 실렸으나 이후 연재소설에 삽화가 등장하면서 매일 매일 연재소설을 기다리는 독자들에게 또다른 즐거움을 선사했습니다. 연재소설의 삽화는 독자의 시선을 붙잡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동아일보의 첫 삽화 작가는 안석주(安碩柱)였습니다. 그는 1922년 연재된 나도향의 소설 ‘환희’(1922년 11월 21일~1923년 3월 21일, 전117회)의 삽화를 맡았습니다.




 1922년 11월 21일자 4면




 환희(1) 나도향 작 




  처음에는 삽화에 이니셜로 화가의 이름이 들어갔으나 이후에는 삽화가의 이름이 소설가의 이름과 나란히 실리게 됩니다. ‘환희’에 이어 연재된 이희철의 소설 ‘읍혈조(泣血鳥)’(1923년 6월 2일~1928년 10월 18일, 전 140회)의 삽화는 심산 노수현(心汕 盧壽鉉)이 그렸습니다. 근대 산수화의 거장으로 꼽히는 노수현은 이후에도 동아일보 연재소설의 삽화가로 자주 이름을 올렸습니다.






1923년 6월 2일자 4면




 읍혈조(泣血鳥)(1) 이희철 작 노수현 화




  노수현이 바통을 넘겨준 다음 작가가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입니다. 청전 이상범은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까지 대부분의 동아일보 연재소설 삽화를 그렸습니다.






청전 이상범 삽화, ‘이순신’(위, 1931년)과 ‘상록수’(아래, 1935년)


 






  ‘표본실의 청개구리’ 작가이자 동아일보 창간 기자였던 염상섭(廉尙燮)도 동아일보에 연재소설을 썼습니다. 염상섭이 창간기자로 6개월간 몸을 담았던 동아일보에 처음으로 연재한 ‘해바라기’(1923년 7월 18일~8월 26일, 전 30회)는 한때 그가 마음을 두고 사귀었던 화가 나혜석을 모델로 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화제를 낳았습니다. 신여성 나혜석을 모델로 한 작품이었던만큼 그 인기 또한 대단했습니다. 염상섭은 그후에도 잇달아 ‘너희들은 무엇을 얻었느냐’(1923~1924) ‘진주는 주었으나’(1925~1926) 등의 장편소설을 동아일보에 연재했습니다.






1923년 7월 18일자 1면




 해바라기(1) 염상섭




  한국문학사에 동아일보가 남긴 베스트셀러 첫 머리에는 춘원 이광수가 우뚝 서 있습니다. 1917년 1월 1일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을 매일신보에 연재하여 새로운 신문소설의 역사를 개척한 춘원 이광수. 이광수의 ‘무정’은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이자 연애소설이고 춘원의 출세작이었습니다. 매일신보에 연재(1917년 1월 1일~6월 4일, 전 126회)될 당시에는 화제만큼이나 논란도 컸습니다. ‘부도덕한 작품’이라는 중장년 독자층의 비난을 반박하는 연설회가 열리기도 했고 유림(儒林)은 총독부의 자문기관인 중추원에 ‘무정’의 연재를 중단시켜 달라는 진정서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두 차례에 걸쳐 편집국장을 맡기도 했던 이광수는 1933년 조선일보로 떠나기 전까지 ‘선도자’(1923년)를 비롯하여 ‘허생전’(1923) ‘재생’(1923) ‘춘향전’(1925) ‘마의태자’(1926) ‘단종애사’(1928) ‘이순신’(1931) ‘흙’(1933) 등 무려 13편의 소설을 동아일보에 연재했습니다. ‘가장 세력있는 신문’에서 ‘가장 인기있는 작가’가 된 이광수는 이 10년 동안 그의 문학적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춘원이 그 문단적 지위를 축성한 무대가 주로 동아의 연재소설난을 통하였다 함이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춘원으로서 대표할 수 있는 문단의 한 시대가 우리 문학사상에 인정될 수 있다 하면, 그 기여는 동아가 같이 누릴 수 있는 영예라고 해도 무방할 줄 안다. 춘원의 연재소설은 소위 신문연재소설이란 의미의 통속소설과는 약간 종류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의 예술적인 천분(天分)은 비록 소설의 형식을 통했지마는 아주 숨어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춘원의 연재소설은 일반 독자의 통속적인 취미를 예술의 분위기로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춘원의 장편소설과 이를 실릴 지면을 준 동아는 우리나라 문화사 상에 하나의 기록을 남긴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음직하다.”(주요한, ‘주요한 문집-새벽Ⅰ’, 1982년, 757쪽)




  춘원의 소설은 연재 때마다 늘 화제를 불러 모았습니다. 그의 소설이 연재될 때면 ‘연재예고’ ‘사고(社告)’ ‘작자의 말’ 등이 지면에 요란스레 등장해 그의 인기를 실감케 했습니다.






1926년 4월 26일자 3면




연재소설 예고

역사소설 ‘마의태자(麻衣太子)’ 춘원 작


 여러분의 많은 환영을 받던 ‘천안기(天眼記)’는 오래동안 중단되었던 관계로 독자의 흥미가 없을 것뿐 아니라 작자의 생각하는 바 있어서 단연히 중지하고 본보 속간을 기념하기 위하여 새로 지은 역사소설 ‘마의태자’를 연재하게 되었습니다. 마의태자는 신라 최후의 임금인 경순왕의 왕자로서 신라가 망하게 되매 부왕에게 최후의 결전을 권하다가 듣지 아니함으로 어머니 되는 이를 모시고 금강산에 들어가 일생을 마친 이외다. 작자 춘원은 그의 웅건한 붓을 새롭게 하여 신라 9백년 사직이 멸망하는 비극을 줏대로 하고 궁예 견훤 왕건 등의 절세영웅의 삼각전(三角戰)을 여실히 그려냈습니다. 소설인 동시에 역사이오 비극인 동시에 활극인 이 새 작품이 만천하 독자에 공전의 환영을 받을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1926년 5월 8일자 5면




 역사소설 ‘마의태자’(춘원 작)

모레 10일부터 본지 연재됩니다






1926년 5월 10일자 4면




 마의태자(1) 춘원 작 단곡 화






1928년 11월 20일자 3면




 [사고] 소설 예고

단종애사(端宗哀史)

춘원 이광수 작

청전 이상범 화


 (상략) 독자여러분이 오래 두고 기다리던 춘원 이광수 씨의 작 ‘단종애사’를 연재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보배의 하나인 춘원은 그동안 병들어 일시에는 위독하다는 소문까지 전하였으나 한울이 아직도 그의 천재를 아까워 하심이 있든지 그는 건강을 회복하고 우리 독자를 위하야 다시 붓을 들게 되었습니다. 춘원의 세련된 문장과 여유있는 구상과 거짓없는 인생관이 항상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작자와 함께 울고웃게 하였으니 다시 그에 대하여 노노히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번에 집필되는 ‘단종애사’는 씨가 침묵을 오래 지킨 나머지에 비로소 나온 사상의 결정이므로 이 작품을 통하여 우리들은 우리 조선사람의 마음을 파악할 줄 믿습니다.


 <작자의 말>

단종대왕처럼 만인의 동정의 눈물을 끌어낸 사람은 조선만 아니라 전세계로 보더라도 드물 것이다. 왕 때문에 의분을 머금고 죽은 이가 사륙신을 머리로하여 백으로써 세일만하고 세상에 뜻을 끊고 일생을 강개한 눈물로 지낸 이가 생륙신을 머리로하여 천으로써 세일 것이다. 육신의 충분의 렬은 만고에 꺼짐이 없이 조선백성의 정신속에 살 것이오 단종대왕의 비참한 운명은 영원히 세계 인류의 눈물로 자아내는 비극의 제목이 될 것이다. 더구나 조선인의 마음, 조선인의 장처와 단처가 이 사건에서와 같이 분명한 선과 색채와 극단한 대조를 가지고 드러난  것은 역사 전폭을 떨어도 다시 없을 것이다. 나는 나의 부조한 몸의 힘과 맘의 힘이 허하는 대로 조선역사의 축도요 조선인 성격의 산 그림인 단종대왕 사건을 그려보려한다.(하략)






1928년 11월 30일자 6면




 단종애사(1) 춘원 이광수 작 청전 이상범 화




  ‘마의태자’ ‘단종애사’ 같은 춘원의 작품은 역사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면서 독자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는 잡지 ‘삼천리’ 등을 통해 작품 집필 당시의 소회와 연재소설 집필의 힘겨움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나의 ‘단종애사’는 매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지간은 감기까지 더처서 아조 병상의 몸이 되었음으로 가끔 며칠씩 궐(闕)하게 되어 읽어 주시는 여러분에게 대단히 미안스럽습니다. 소설은 아마 300회 가령은 갈 것 같습니다. 아모쪼록 많이 써야 나 자신의 팡(빵)문제도 해질이 될 터이니까요. 무엇이요? ‘단종애사’는 ‘햄릿’에 가깝지 않느냐고요. 아녀요. 세익스피어 같은 분에 비하여 어떨런지 모르지만 오히려 ‘맥베스’에 비슷할 점이 많을 걸요. 자기의 끝없는 야욕을 채우기 위하여 옳은 사람, 좋은 사람, 귀한 사람, 부한 사람을 모조리 살육하고 또 모든 것을 파괴하여 버리고는 끝없는 권세와 재물과 물질의 영화(榮華) 속에 살려고 박박 애를 쓰는 그런 점을 그린 것이 나는 ‘맥베스’와 그 제재(題材)가 같은 것인줄 압니다.

생각건대 제실(帝室)이 몰락하는 그 비참한 역사야 동서의 어디에 없으랴마는 실로 단종께서와 같이 슬프게 기막히게 끝을 마친 이가 드물 줄 압니다.

민비-명성황후도 슬픈 역사를 가진 분으로는 같으나 그러나 그분은 말하자면 우리들에게서 동정을 살만한 재료를 적게 가졌음에 반하야 단종께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린 그 분의 사기(史紀)는 조정에서 편과(編寡)한 국사(國史) 속에 그렇게 소상하지 못하나 야사(野史)로 내려오는 것에는 정확한 것이 많습니다. 지금 내가 쓰는 근거는 그 정사와 야사의 두 가지인데 그러기에 아모쪼록 작자의 상상을 빼고 역사상에 나오는 사건 그대로 또 실재 인물 그대로 문학상에 재현시키기에 애쓰는 터이외다.

비참한 장면이야 김종서(金宗瑞) 등 고명( 顧命)받은 충신들이 참살을 당하는 곳이나 육신(六臣)이 죽는데도 그러하겠지만은 이제 앞으로 그보다 몇 갑절이나 더 하다할 실로 기막힌 장면이 나타납니다. 결국 단종께서는 강원도 영월이란 산골에 쫓기어 가서 목을 매이어 돌아가시지요. 그때 어느 충신이 유제(幼帝)를 업어다가 모셔두고 들어앉아서 시냇물을 바라보며 지은 시조가 잇는데 그 한 수(首)만은 실로 즉감(卽感)을 잘 노래한 것으로 일만 사람의 애틋한 눈물을 자아내고야 말 것인 줄 압니다. 나는 이 ‘단종애사’를 다른 때 소설에서보다도 더 많은 정성과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써가는 터이외다.(이광수, ‘3대 신문의 소설’, ‘삼천리’ 1929년 6월호, 42~43쪽)




  그리고 춘원은 1931년 동아일보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 유적보존운동을 벌일 때, 이에 맞춰 소설 ‘이순신’(1931년 6월 26일~1932년 4월 3일, 전 178회)을 신문에 연재하게 됩니다. 이 소설의 집필에는 고하 송진우와 하몽 이상협의 권유가 있었다고 그는 ‘소설예고’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1931년 5월 23일자 2면




6월 중순부터 게재

장편소설 이순신

춘원 이광수 작

 청전 이상범 화


 ◇소설예고◇

장편소설 ‘이순신’-눈물겨운 이 기회에 거룩한 감격을 가지고 우리는 우리의 충무공을 주인공으로 한 춘원의 소설 한 편을 세상에 보내려 합니다. 그 강산, 그 인물과, 그 기록, 그 모양을 이 강산 이 즈음에 그대로 재현시키려는 것입니다. 이순신이란 어떠한 어른인가? 이천만 가슴에 뿌리박은 이 어른의 깊고 환한 존재는 임진란, 거북선으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크나큰 존재에 간단한 설명이 원래 당치 않거니와 이 강산 이 백성에게 대한 우리의 이순신은 그저 ‘이순신’으로 설명이 충분합니다.

작자 춘원, 또한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의 소설로써 민족을 향해 외쳐온 춘원은 이번 이 ‘이순신’으로서 한층 더 힘있게 외칠 것입니다.

작자 자신도 이번에는 일층 역작을 내이려고 기록을 캐고 생각을 다듬는 중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선 공의 유적을 찾으려고 남도 방면에 여행중입니다.

일즉이 ‘단종애사’를 통하여 일년남아 이 백성의 가슴을 헤치던 그 평범하고도 핍진하고 간곡한 필치는 장차 ‘이순신’을 통하여 우리의 심금을 얼마나 또는 어떻게 울릴는지? 만천하 독자는 우리의 이 선물을 위하여 작자의 건강을 축복하소서.


 ◇작자의 말◇

나의 외우(畏友, 가장 아껴 존경하는 벗) 고하(古下, 송진우)는 과거 조선에 우리가 숭앙할 사람이 3인이 있다 합니다. 한 분은 단군, 한 분은 이조 세종대왕, 그리고 또 한 분은 이순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고하는 날더러 3부곡으로 ‘단군’ ‘세종대왕’ ‘이순신’이란 소설을 쓰라고 권합니다.…(중략)…나도 이 점에서 고하의 말에 공명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 제목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회에 나는 하몽(何夢, 이상협)이 이순신을 소설화 할 것을 간권(懇勸)하던 것을 회억(回憶)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순신을 철갑선의 발명자로 숭앙하는 것도 아니오 임란의 전공자(戰功者)로 숭앙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도 위대한 공적이 아닌 것은 아니겠지마는 내가 진실로 일생에 이순신을 숭앙하는 것은 그의 자기희생적, 초훼예적(超毁譽的), 그리고 끝없는 충의입니다. 군소배들이 자기를 모함하거나 말거나, 군주가 자기를 총애하거나 말거나, 일에 성산이 있거나 말거나 자기의 의무라고 신(信)하는 바를 위하여 국궁진췌(鞠躬盡췌)하야 마침내 죽는 순간까지 쉬지 아니하고 변치 아니한 그 충의 그 인격을 숭앙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 소설 ‘이순신’에서 내가 그리려는 이순신은 이 충의로운 인격입니다. 나는 나의 상상으로 창조하려는 생각이 없습니다. 고기록에 나타난 그의 인격을 내 능력껏 구체화하려는 것이 이 소설의 목적입니다.






1931년 6월 26일자 7면




 이순신(1) 춘원 작 청전 화




  소설 ‘이순신’ 집필 당시 춘원은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이었습니다. 그는 역사소설을 통하여 민족주의 운동을 하는 동시에 소설 ‘흙’(1932년 4월 12일~1933년 7월 10일, 전 271회)으로 농촌계몽운동과 브나로드 운동을 소개했습니다


  이광수의 ‘흙’은 신문에 연재되어 독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초유의 농민소설입니다. 춘원은 농민의 각성이 우리 민족의 영원한 삶의 길을 얻는 것이라 생각하고 농민에게 기대를 걸었던 것입니다. ‘흙’은 당시 성행하던 농촌계몽운동에서 취재된 인도주의적 경향이 짙은 농촌소설로 무지와 가난과 핍박에 시달리고 있는 농촌 마을을 풍요하고 아름다운 살기 좋은 마을로 만들어 보겠다는 지식청년의 희생적인 노력과 민족의지를 그렸습니다.






1932년 4월 8일자 7면




 장편소설 ‘흙’

【일명 군상이후】

춘원 작

청전 화


예고의 말

민족적 위인을 그린 춘원 이광수 씨의 작 ‘이순신’은 만천하 독자의 심연을 여지없이 울려 마침내 그 비절장절한 충무공의 최후와 같이 감격과 눈물로 끝마치게 되었습니다. 계속하여 춘원의 영필인 ‘흙’을 싣게 되었습니다. ‘흙’은 일명 ‘군상이후’로 조선의 젊은이들의 새싹을 그린 것입니다. 연재는 오는 10일 경부터 하겠습니다.


작자의 말

새봄에 싹트는 조선의 흙, 그 우에 새로 깨는 조선의 아들들, 딸들의 갈고 뿌리고 김매는 슬픔과 기쁨과 소망, 청춘의 사랑, 동족의 사랑, 동지의 사랑…이것을 그려보려 한 것입니다.






1932년 4월 12일자 7면




 ‘흙’(1) 춘원 작 청전 화




  농촌소설의 또다른 대표작으로 꼽히는 심훈의 ‘상록수’ 역시 동아일보를 통해 세상에 소개되었습니다. 동아일보는 1935년 신문 창간 15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장편소설 현상모집을 실시하여 심훈의 ‘상록수’를 당선작으로 뽑았습니다.


  아래는 당시의 현상모집 광고입니다.






1935년 3월 20일자 1면




장편소설 특별공모

본보 창간 15주년 기념

기한은 6월말

사례는 5백원


 본보는 창간 15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장편소설을 천하에 구한다. 예년 신춘문예 현상모집 등에서 의도한 바는 주로 신인을 얻으려는 것이었지마는 이번은 ‘인(人)’을 찾는 것이 아니오 ‘작(作)’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인의 약등(躍登)도 환영하지만 문단제가(文壇諸家)의 노작(勞作)도 기다림이 물론이다.


제재(題材)와 구상(構想)

응모작품의 제재와 구상은 작자에게 일임할 성질의 것이지마는 본사의 의도가 조선농어산촌문화에의 기여에 있는지라 다음의 몇가지에 유의해주면 더욱 좋을까 한다.

一, 조선의 농어산촌을 배경으로 하여 조선의 독자적 색채와 정조를 가미할 것

一, 인물중에서 한사람쯤은 조선청년으로서 명랑하고 진취적인 성격을 설정할 것

一, 신문소설이니만치 사건은 흥미있게 전개시켜 도회인 농어산촌인을 물론하고 다 열독하도록 할 것


 규정

▲장단은 120회 내외 ▲기한은 금년 6월 말일限 ▲고선(考選)은 본사 편집국 ▲채택은 단 1편. 사례는 금 오백원

동아일보사




  이와 같이 공모한 결과 총 52편이 응모하였고 동아일보는 당선작 ‘상록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습니다.






1935년 8월 13일자 2면




본보 창간 15주년 기념 5백원 장편소설

심훈 씨 작(作) ‘상록수’ 채택

응모작품 52편을 엄밀히 고선(考選)한 결과

지상 발표는 9월 중에


본보가 지난 4월 1일의 창간 15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의 하나로 5백원의 사례금으로써 장편소설을 천하에 공모한 것은 일반이 다 아는 바거니와 이제 그 경과 및 결과를 발표하면서 다음과 같은 좋은 작품을 얻게 된 것을 독자와 아울러 기뻐하는 바입니다. 소설의 모집기한인 6월 말까지에 신인은 물론이오 문단의 지명 작가도 다수히 응모하여 총수 50여 편에 달하여 수에 있어서 벌써 예상 이상의 호성적을 얻었습니다.…(중략)…이렇게 신중히 또 엄밀히 고선한 결과 심훈 씨의 ‘상록수’가 채택되었습니다. 이 소설이 본사가 이번 소설 공모를 발표할 때에 희망 조건으로 제시한 바와 같이 첫째 조선의 농어산촌을 배경으로 하여 조선의 독자적 색채와 정조를 가미할 것. 둘째 인물중에 한사람쯤은 조선의 청년으로서 명랑하고 진취적인 성격을 설정할 것. 세째 신문소설이니만치 사건을 흥미있게 전개시켜 도회인 농어산촌인을 물론하고 다 열독하도록 할 것 등의 모든 조건에 부합할 뿐 아니라 그밖에 여러가지 점으로 근래에 보기 어려운 좋은 작품입니다. 본사는 이러한 좋은 소설을 얻어 한편으로 농어산촌 문화에 기여하고 한편으로 독자 제씨의 애독을 받게될 뿐만 아니라 문단적으로도 커다란 수확을 동시에 거두게 된 것을 끔찍한 자랑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 소설이 본지에 실리기는 오는 9월경부터 되겠습니다. 미리부터 기대를 크게 가지고 기다리십시오.(하략)




  영화감독, 소설가, 시인으로 다재다능했던 심훈도 동아일보 기자(1924~1925년)였습니다. 그의 작품 ‘상록수’는 1930년대의 농촌계몽운동을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1935년 9월 10일부터 1936년 2월 15일까지 5개월간 동아일보에 연재(전 127회)되며 농촌계몽운동의 열기를 고조시켰습니다.






1935년 9월 10일자 3면




 ‘상록수’(1) 심훈 작 청전 화




  ‘상록수’가 발표되던 1935년을 전후한 시기는 일제의 압제가 더욱 가중되던 시기로,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태평양전쟁을 준비하던 일제는 한국에서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 탄압을 가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맞서 동아일보에서는 특히 농촌계몽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여 사멸되어 가는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 농민의 자각을 촉구하였습니다. ‘상록수’는 이러한 정신과 목적으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작품이었기 때문에 독자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1930년대 신문 연재소설의 또다른 경향은 ‘역사소설’이었습니다. 어두운 시대 현실에 대한 문학적 동기가 역사 소설의 유행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 당시 체포돼 1년 여의 옥고를 치르고 나온 사회부장 현진건이 1938년 7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동아일보에 장편 역사소설 ‘무영탑’(1938년 7월 20일~1939년 2월 7일, 전 164회)을 연재했던 일도 결국 당시 언론자유가 통제된 상황에서 민족적 자긍심과 희망을 국민에게 심어주려 한 의도였습니다. 일제의 검열 때문에 소설의 주제를 사랑과 예술로 승화했지만 당시 식민지 현실을 감안할 때 석가탑이란 신라의 아름다운 문화재를 부각시킴으로써 민족의 정서와 혼을 고양시킨 것입니다.


  문학평론가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도 이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 ‘무영탑’에서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는 다름아닌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 사회부장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던 현진건이었던 만큼 그의 내면 의식에는 민족주의적 의식이 잠재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김윤식, ‘한국근대소설사연구’, 을유문화사, 1986년, 399쪽)






1938년 7월 16일자 2면




본보 조간 연재의 장편소설 ‘무영탑’ 연재 예고

천년 전 신라를 재호흡


작자의 말

이 소설은 시대를 신라로 잡았으니 소위 역사소설이라 하겠으나, 만일 독자 여러분이 이 소설에서 역사적 사실을 찾으신다면 실망하시리라. 이 소설의 골자는 몇줄의 전설에서 출발하였을 뿐이오 역사적 사실이란 도무지 없다 하여도 과언이 아닌 까닭이다. 기록적 설화적 역사상 사실의 나열만이 역사소설이라 할진댄 이 소설은 물론 그 부류에 속하지 않을줄 안다. 어떤 한시대, 그 시대의 색채와 정조를 작자로써 어떻게 재현시키느냐, 작자의 의도하는 주제를 그 시대를 통하여 어떻게 살리느냐, 하는 것이 작자는 역사적 사실보다도 더욱 중요한 줄 믿는다. 이 작자의 힘에 부치는 염원이 이 소설에 어느 정도로 이루어질는지는 아직 미지수라 하겠으나 집필을 즈음하여 소회의 일단을 밝혀둔다.






1938년 7월 20일자 4면




 무영탑(1) 현진건 작 노수현 화 




  현진건은 ‘무영탑’ 다음으로 ‘흑치상지’(1939년 10월 25일~1940년 1월 6일)란 역사소설을 다시 신문에 연재했으나 이 작품은 52회로서 게재가 중지되었습니다.


  ‘흑치상지’는 백제 장군 흑치상지가 자신의 모국인 백제가 멸망하자 의병을 일으켜 국가를 회복하려고 의병 3만을 결합하여 나당(羅唐)연합군에 반격을 가해 백제의 200여 성을 회복했던 것을 소재로 한 작품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일제의 민족문학에 대한 탄압이 더욱 혹심할 때였고 거기에다 현진건이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겨우 풀려나온 뒤라 일경이 그에 대한 감시의 눈을 뻗칠 대로 뻗치고 있을 때였습니다. ‘흑치상지’라는 노골화된 이름은 결국 총독부 경무국의 올가미를 피하지 못하고 게재금지 되어 안타깝게도 미완성으로 현진건의 유고(遺稿)가 되고 말았습니다.






1939년 10월 25일자 4면




  역사소설 흑치상지(黑齒常之)(1) 현진건 작 노수현 화




  이 작품을 끝으로  빙허 현진건은 영원히 붓을 던지고 세상을 비관하면서 술을 벗삼아 지내다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3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1940년 동아일보가 일제에 의해 강제폐간되면서 일제강점기, 국민들의 가슴에 맺힌 한과 비애를 위로해주던 동아일보의 연재소설도 함께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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