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신가정(新家庭)‘의 여기자’는 김자혜(金慈惠) 김원경(金元經) 황신덕(黃信德)이었습니다. 


  “노천명이 시를 쓰고 최정희 씨가 나오기 시작하던 때고, 모윤숙 씨가 시를 쓰셨고, 몇 분 여류가 있었어요. 박화성 씨, 강경애 씨라구 북간도에 계시던 분도 신가정에 소설을 쓰곤 했지요.” (김자혜<주요섭씨 부인>, ‘신가정 때의 여기자’, 여성동아 1967년 11월호 복간호, 464쪽)


  “신여성은 자꾸 나오는데 발표할 기관도 없고, 그때부터 동아일보는 동포들에게는 정부 모양 대중이 신임하고 믿고 의지하는 기관이었지요. 민족적인 문제가 생기면 우선 동아, 조선으로 달려왔고 했으니까요. 여론이 그만큼 집중된다고 할까요, 그런 정도였으니까요.” (황신덕 중앙여고 이사, ‘신가정 때의 여기자’, 463쪽)


  이은상 편집장의 회고.


  “그들(주요섭과 김자혜)은 마침내 그 사랑을 결실시키기 위해서, 신문사를 떠나기까지 했다. 주형은 사임하고 북경 보인대학 교수가 되어 떠나갔다.…(중략)…새로 들어온 사람으로 주형의 후임으로는 최승만 형이 들어왔고, 김 양의 후임으로는 김원경 양이 들어왔다. 그는 원산 여자였다. 미인은 아니었어도 둥근 얼굴에 좋은 인상이었다. 얼굴만 둥근 것이 아니라 마음씨도 둥글둥글했다. 같이 일하는 여기자로서 만 번 다행이었다. 나는 여기자에게서 무슨 글 도움을 받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의복 음식 등 기사를 만드는 일 이외에는 본시부터 기대할 것이 없기도 했거니와, 거의 나 한사람의 독무대였던 것이다. 여기자란, 글이야 잘 쓰건 못쓰건, 말이나 고분고분 잘 들어주면 고작이었다.…(중략)…그 김 양도 역시 정 들일만 하자 또 제짝을 구하여 제 갈 길을 가고 말았다. 다만 그는 결혼에 실패한 것인지 아닌지, 그것은 내가 알지 못하나, 수명이 짧아서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므로, 아깝기 짝이 없다.” (이은상, ‘나의 신가정 편집장 시절’, 여성동아 1967년 11월호 복간호, 460쪽)


  신가정 창간 전, 신동아 1932년 5월호에 여기자 좌담회가 실렸습니다. 당시 신문 잡지에서 활약하던 여기자들을 모두 모았습니다.  동아일보에서는 설의식 편집국장 대리와 주요섭, 김자혜 기자가 참석했습니다. 


 신동아 1932년 5월호(87~95쪽), 여기자 좌담회

(출석자)

조선일보사 기자(전) 윤성상

동아일보사 기자(전) 허영숙

불교잡지사 기자(전) 김일엽

아이생활사 기자(현) 박은혜

여론사 기자(현)         조현경

부인공론 기자(현)     권유순

삼천리사 기자(현)     최정희

동아일보사기자(현)  최의순


 




(오른쪽부터) 윤성상 허영숙 김일엽 박은혜


 




(오른쪽부터) 조현경 권유순 최정희 최의순


 <기자된 동기>

설의식=여러분 분주하신데 이처럼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무쪼록 거북스러운 태도가 없이 탁 터놓고 마음껏 말씀해주십시오

허영숙=나는 공부는 의학공부를 했으나 처음부터 의학은 싫었고 문학에 취미가 많았었습니다. 그래서 기자가 되면 문학공부에 도움이 될까하고 생각해서 기자가 되었습니다.

최정희=저는 중앙보육학교를 마친 후 기자가 되었는데 사실인즉 나도 어렸을 때부터 문학에 취미가 많아서 창작 장난도 많이 해 보았지요. 그러나 집안 형편이 허락지 않아서 문학을 전공 못하고 있었습니다.

윤성상=나는 배운대로 바로 나갔지요. 그저 기자도 여자가 할 수 있는 직업이니까 해본 것이지 특히 선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방문의 비결>

설의식=기자생활을 하시는 중 가장 괴로운 일 또는 가장 즐거운 일을 말씀해 주십시오.

윤성상=더욱이 가정부인 같은 이를 방문하면 어디 말을 해주어야지? 참 딱한 때가 많아. 그리고 학교방문이 제일 귀찮았어요.

최의순=가정부인은 사귀기는 쉬우나 말을 잘하지 않고 신여성은 퍽 까다롭습디다.

허영숙=나는 고아원 방문이 제일 인상 깊었어요. 그런 기관이 있는 줄 모르고 있다가 그것을 보니까 아주 별유천지 같더군요.

최의순=이렇게 말하면 내 자랑 같지마는 내가 이때까지 방문에 실패한 적이 없었는데 꼭 한번 혼을 뜬 일이 있어요. 모 씨를 방문 갔는데 마침 미리 전화를 걸지 못하고 찾아갔더니 방금 외출하여야겠다고 못 만나겠다고 딱 잡아떼겠지요. 그러나 기자로써 그렇다고 그냥 돌아온대서야 말이 되어요. 그래서 문밖에 서서 기다렸지요. 조금 있더니 모 씨가 나오시는 고로 전차정류장까지 동행해오면서 간단히 내가 물으려던 말을 다 물어보았지요. 그때 어떻게 땀을 뺐는지 영 잊혀지지 않아요.


 <남녀의 차별>

허영숙=여자가 절대로 남자보다 못하지 않지요. 물론 생리상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은 일해 가는 능률로 보면 조금도 차등이 없지요. 남자더러 집안일도 돌아보고 또 기자노릇도 해 보라고 해보시오. 할 사람이 있나? 그러나 여자는 그렇게도 하지요. 그러니까 도리어 여자가 나은 셈이지요. 여자는 너무 눌리니까….

최정희=여자가 강해서 양보한 것이지. 남자들이 여자의 환심을 사려고 제각기 여자를 벌어 먹이겠다고 날뛰니까 자연 경제권이 남자에게로 가게 된 것이지요.

윤성상=교육의 불평등 사회제도의 결함 등 때문이지요. 분업적으로 본다면 여자에게는 제2세 국민을 낳고 또 양육한다는 천직이 있으니까 도리어 더 우월하지요.

허영숙=나는 가정을 가진 여자로써 사회적 활동은 불가능한 줄로 압니다. 가정일만으로도 여자는 시간이 부족한데.

김일엽=나는 거기 반대입니다. 여자라고 가정에만 매여 있으리라는 것은 나는 반대합니다. 자녀생산은 부득이 여자가 책임을 지겠으나 그 양육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여자도 사회로 나와서 활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정이라는 것은 범위가 너무 좁아서 그 안에서만 꼬물거리면 언제나 여자의 지위는 향상될 가망이 없습니다.

윤성상=현시에는 여자더러 가정도 돌보고 또 사회일도 하라고 강요하는데 그것은 무리입니다. 현 사회제도가 나쁘기 때문이에요. 새로운 사회제도가 생긴다면….

허영숙=그러나 여자는 생산을 해야 하는데 그때에는 몇 달씩 쉬어야하니 어떻게 남자와 같이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어요?

윤성상=내 말은 양으로는 다르지만은 질로 보면 꼭 같은 줄 압니다. 생산기에 누워있는 그 기간은 내놓고 건강할 때에 사회에 나가서 일할 때에는 어린애만 길러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활동의 질이 남자보다 조금도 못할 것이 없습니다.


 <연애와 정조>

허영숙=하필 왜 나더러 연애의 정의를 내리랍니까?

최정희=연애대가니까!

김일엽=아니요. 연애대가(戀愛大家)는 여기 있습니다. 아마 내가 이 좌중에서는 연애대왕일걸.(웃음소리)

허영숙=연애의 정의를 내리자면 이러합니다. ‘정신과 육체가 건강한 남녀가 미래에 결혼을 목적하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김일엽=연애란 누가 통괄적 정의를 내린 사람도 없고 또 내릴 수도 없지요. 사람은 언제나 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동물인데 그 사랑의 대상을 두루 찾다가 가장 마음에 드는 이가 나서면 전(全)사랑이 그리로 쏠리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간혹 사랑의 대상을 잘못 택하는 수도 있는데 그것은 곧 사랑의 실패이지요.

윤성상=정조가 어디 육체에만 국한되었나요? 정신적 정조는 어찌하고?


 <독신과 이혼>

허영숙=(독신생활은) 여자가 쉽지요. 현 사회에서는 남자는 독신생활하기 어려운 자극과 유혹이 너무 많으니까요. 여자는 생리적으로 두려움도 있고 하니까 웬만해서는 깨뜨리지 않지요.

윤성상=이혼해야할 경우가 되거든 자녀유무를 불구하고 갈라서는 것이 좋겠지요. 더욱이 아이들을 밤낮 싸움만하는 가정에서 기르는 것보다 둘이 갈라나서 따로따로 기르는 것이 자녀교육상에도 좋겠지요. 그러나 조선에는 자녀들 때문에 살기 싫은 것을 억지로 사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의복과 오락>

허영숙=머리가 가려워서 깎아버렸더니 시원하고 좋아요. 경성 안에 단발한 이가 10여명만 있대도 나는 모자를 벗고 다니겠어요. 나는 깎았지만은 머리 깎는 것을 찬성할 수는 없어요. 거리에 나다니기도 창피하고 어디가나 무슨 배우나 그런 사람으로 보니까요.

최의순=짙은 것이 아니라 간색(間色)을 많이들 입지요.

김일엽=미감이 발달되어서 어울리는 색을 택하는 것이지요.

최정희=축음기가 있으면 가만 앉아있어도 좋지요.

윤성상=가야금을 배웠으면 좋겠어요.

최의순=나는 방아타령을 배웠는데 잘 안되어요.

윤성상=남자들도 화장을 많이 하는데요. 분 바르는 남자도 있습디다. 모던 뽀이들.

김일엽=여자가 깨끗이 차리지 않으면 게으른 것 같아서 보기 싫어요. 그러나 또 너무 현란하게 차리는 것은 더 보기 싫지요.


 <타도 남성!>


윤성상=현 사회제도가 남자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는 것을 이용하여 젠 척하고 뽐내지요.

허영숙=음흉하고 무정하고 술 잘먹고 게으르고….

김일엽=아아 이 선생님이 그러신 게지! (웃음)

허영숙=아니야. 그이는 음흉하지는 않아.(웃음)

조현경=기차 안에서 옆에 앉거나 마주 앉아서 담배 피우는 것이 참으로 밉습디다. 싫어하는 기색을 보면 더 피우지요.

박은혜=많이 먹고 사실 취해서 그런다면 좀 낫지요. 그냥 건성으로 술은 취하지도 않고 취한체하며 못되게 구는 것은 참으로 눈꼴 틀려요.

권유순=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일부러 놀래게 하거나 또는 공연히 종을 자꾸 울리는 것도….

허영숙=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박정자(여의사-인용자 주)가 한번 학교로 가는데 마침 눈이 와서 머리에 눈을 하얗게 맞으며 가더래요. 어떤 학생이 지나가다가 ‘꽃 위에 꽃이 피였군’하고 히야까시를 하더래요. 그래서 홱 돌아서면서 ‘네 할머니라고 그래라’ 했더니 그만 ‘에, 무섭다’하면서 뺑소니를 치더래요. 또 전차 안에서 불 꺼지면 손목을 잡는 놈도 있대요.

윤성상=일본에 비기면 조선은 그래도 군자국(君子國)이지요. 일본서 아침에 학교 갈 때 성선(省線)을 타고 가노라면 별 데로 손이 막 들어오는데.

최의순=최은희(전 조선일보 기자-인용자 주) 같은 이는 남자들을 막 해대인답니다.

김일엽=윤심덕이도 그랬지요.

최의순=윤심덕이는 그래도 침울한 때가 있었지만 최은희는 언제나 괄괄했어.


  “매달 한번씩 열렸던 편집회의는 편집국장, 편집국 각 부장, 잡지부 전원이 참석했다. 설의식 현진건 고재욱 이여성 서항석 박찬희 임봉순(사회부 기자, 황신덕의 남편) 이런 면면이었다.” (이문환, ‘옛 신가정 새 여성동아’, 여성동아 1972년 11월호, 338쪽)


  창간 때부터 삽화를 그렸던 최영수가 1934년 5월호부터 연재한 만화 ‘쩔쩔이의 일기’.


신가정 1933년 7월호 35쪽, 만화자가 본 여름 풍경 ‘가정풍경’




 신가정 1934년 5월호 173쪽, 연재만화 ‘쩔쩔이의 일기’




  신가정에는 여성과 가정얘기가 주로 실렸지만 동아일보에 보도한 사건사고의 뒷얘기도 담았습니다. 사회부 이길용 기자는 수해현장의 뒷얘기를 썼습니다. 


 “이번 홍수는 6월 27,  28일께부터 퍼붓는 비가 줄기차게 계속하여 30일에 낙동강이 범람한 때문입니다. 이제 내가 여기 쓰려고 하는 것은 이번 홍수의 자세한 이야기보다도 이번의 홍수가 낳은 여러자기 참상중에도 가정을 또는 어린아이들을 싸고 도는 몇몇가지 이야기를 초잡으려고 하는 것 뿐입니다. 어찌하엿든 이번 물은 내가 일직이 을축년 수해 당시에도 출장하여 본 일이 있지만 과연 그 이상이라는 말로 이번 홍수의 정도를 말하여 둡니다.” (이길용, ‘홍수지옥에서 본 눈물과 사랑의 기록-수해지를 다녀와서’, 신가정 1933년 8월호, 96쪽)


  신가정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신가정 1934년  2월호 105쪽, 인간의 고통-토막방문기




 신가정 1934년 2월호 106~107쪽, 인간의 고통-토막방문기




 섣달그믐을 닷새 앞둔 26일 벌써 사흘 전에 명령을 받은 대로 있는 토막방문을 하기 위하여 광화문 네거리로 나오기는 했으나 그래도 선뜻 차에 올라지지는 않는다.…(중략)…그러나 남산 밑에 토막이 있다는 말만 들었다 뿐이지 기실 방향조차 모르는 기자다. 하는 수 없이 후래하게 차린 노동자 한분을 붙들고 “요 근처에 토막이 있다는데 어디쯤 됩니까?”하고 물으면서도 지금까지의 나의 생활태도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이었던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였다.…(중략)…가까이 가니 천변을 끼고 게집처럼 20여 채가 늘어있다. 문은 거적 지붕은 짚단과 다 썩은 함석조각 깨어진 도기그릇.…(삭제)…“댁엔 모두 몇 식구나 되십니까?” “다섯 식구지요.” “아드님이 벌이를 하시나요.” “벌이랄 게야 있나요. 그저 정거장에 가서 지키고 섰다가 10전 버는 날도 있고 20전 버는 날도 있지요. 사는 게 아니라 저승 놀이지요. 죽지 못해 사는 게지!” 노파는 허옇게 센 머리를 극적극적하며 이렇게 말한다. 하루에 20전 버는 날이면 재수 좋은 날이고 한달이면 반은 그냥 터덜터덜 들어온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다섯식구의 생활비가 한달에 불과 56원. 한사람 앞에 1원씩이다. 그나마도 굶은 날이 있다면야. 기자는 몹시 우울해졌다.

(중략)

“조런 망할 녀석 웬 돈이 있다고 고구마를 사달라니!”

보니 아침도 못 끓인 모양이다. 기자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다. 어제 야근비 1원 탄 것에서 거스른 돈이 50전 있다. 나는 그것을 만작만작 하다가 전차 탈 생각을 하고 그대로 나오려니까 어린아이가 할머니한테 버리를 하는지 울음보를 터뜨린다. 기자는 눈물이 핑 돌았다. 50전 한푼을 노파에게 쥐어주고 거리로 나오니 바람조차 맵다. 인간의 상상할 수 있는 최저의 생활을 하는 이네들의 가정을 우리 독자에게 하루라도 빨리 보여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불현듯 났다. 바람소리만 들어도 이날 밤의 그네들의 잠자리에 마음이 켜인다. (‘인간의 고통-토막방문기’, 신가정 1934년 2월호, 105~107쪽)


  꽹-꽹-

일요일이라 늦잠을 자고 밥상을 받고 앉았으려니 적군이나 쳐들어온다는 듯이 징소리가 요란하다. 어제 편집주임한테 연통소제부의 가정을 방문하라던 명령이 생각이 나서 나는 벌떡 일어나갔다. 그리고 우선 굴뚝을 쑤시게 하였다.

“얼마요?”

“삼십전입니다!”

나는 삼십전을 꺼내들고 수작을 붙였다.

“하루에 얼마나 버시오?”

“잘 벌면 돈 원이나 벌지요”

돈원? 나는 깜짝 놀랐다. 하루에 십전도 못버는 토막살림보다는 여유 있는 생활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면 먹고살기는 그래도 걱정 없겠구려?”

(중략)

“요새 신여성들은 좀 대우가 낫겠지요?”

“천만에!”

소제부는 펄쩍 뛰듯이 소리를 친다.

“말두 마시오. 요새 신여성들은 더 무섭습니다. 어떻게 셈수만 따지는지 자기네는 향수 한 병에 일이원씩이나 주고 사면서도 오전 한 푼을 가지고 벌벌 떤답니다!”…(삭제)…  (‘어두운 생활-연통소제부의 가정’, 신가정 1934년 2월호, 108~109쪽)


  1935년 4월 이은상 편집장 후임으로 변영로가 왔고, 여기자 김자혜가 1934년 7월에 그만두고, 김원경이 잠시 있다가 1935년 6월부터는 황신덕이 들어와 폐간까지 있었습니다.


  “송 사장님이 자가용 인력거를 가지고 계셔서 방문 간다면 늘 저는 인력거를 얻어 타곤 했죠.…(중략)…한복에 짧은 치마였어요. 검은색을 주로 입었어요. 전 분홍저고리도 못 입어본 것 같아요.” (김자혜, ‘신가정 때의 여기자’, 여성동아 1967년 11월호 복간호, 462~463쪽)


  “제가 있던 시대일보, 중외신문은 참 곤란했어요. 종이를 하루하루 사오고 할 형편이니 기자들의 월급도 제 때에 잘 안 나오고…. 그래도 민폐는 없었던 것 같아요. 그 후 ‘동아’로 옮긴 다음에 주인과 저의 월급의 반만 쓰고 나머지는 저축할 수 있었어요. 닭치고 돼지 치는 기자의 부업을 맨 처음 시작한 것도 우릴 겁니다.” (황신덕, ‘좌담, 46년 전 초창기의 언론계 그맘때 지사<志士>기자의 회고’, 1966년 3월 3일 오후 6시, 조선일보 회의실, ‘주요한 문집-새벽Ⅰ’, 요한기념사업회, 1982년, 842쪽)


  “천의무봉한 성격을 지녔던 수주(변영로)는 그 재담으로 온 방안에 웃음꽃을 피웠다. 그를 가리켜 방송국이라고 했다. 어데서 듣고 왔는지 사내외의 소식이 누구보다도 빠른 정보통이었던 것이다. 최승만이 윤보선이 쓰던 구 한국의 책상을 20원에 살 수 있었던 것은 수주가 주선해준 덕이었다고 한다. ‘수주는 군더더기 같은 글을 자르는 명수였다. 나는 간결하게 글 쓰는 법을 그한테서 배웠다. 인간적 매력이 풍부했던 사람이었다.’ 당시 학예부장이었던 서항석의 말이다.” (이문환, ‘옛 신가정 새 여성동아’, 여성동아 1972년 11월호, 337쪽)


  신가정은 작가들의 작품발표장이기도 했습니다. 창간호 문예란만 보아도 강안식(시조 ‘소려’), 이순영(신시 ‘그후부터’), 윤석중 (동요 ‘엄마목소리’), 이강흡(동화 ‘소와 호랑이새끼’), 주요섭(고담 ‘어머님의 사랑’), 최의순 (콩트 ‘언니와 아우’), 김자혜 (수필 ‘어머니된 죄’), 모윤숙 (감상 ‘황혼평가’), 임병철 (소품 ‘두동무’), 이무영 (희곡 ‘펼쳐진 날개’), 이태준 (단편 ‘슬픈 승리자’)의 글을 실었습니다.


  “이번 체험을 해보았는데 신가정에 이무영 이태준 양 씨의 것을 이십여 페이지나 실었더니 너무 길다고 안에서들 비난이 많더군요.” (이은상, ‘문인좌담회’, 동아일보 1933년 1월 7일자 조간 3면)


  동아일보에 조선 최초의 여자 장편소설 ‘백화’를 166회 연재한 소영 박화성(朴花城)은 신가정 창간호에 여류연작소설 ‘젊은 어머니’ 첫회를 집필했습니다. 신가정 1933년 5월호까지 연재된 이 소설의 집필엔 박화성 외에 송계월 최정희 강경애 김자혜 등 인기 여성작가가 모두 동침했습니다. 박화성은 이어 신가정 1933년 8월호에 장편소설 ‘비탈’ 연재를 시작합니다.


  “그 무렵 문단에 등장한지 얼마 안되었던 박화성은 목포에서 상경하여 편집실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는 그때 김자혜가 사직동 자기집에 초대해서 모윤숙 이선희 최의순 등 여류문인과 여기자들을 소개해주고 따뜻이 대접해 주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이문환, ‘옛 신가정 새 여성동아’, 여성동아 1972년 11월호, 337쪽)


  신가정 1933년 10월호엔 이태준의 단편소설 ‘어떤 젊은 어미’(174~190쪽)와 장덕조의 ‘남편’(168~173쪽)이 실렸습니다.


  “불행히 필자는 이태준 씨의 작품을 많이 읽지 못하였다. 역시 신가정에서 ‘슬픈 승리자’를 읽었고 신동아에서 ‘아담의 후예’, 그리고 이번에 ‘어떤 젊은 어머니’의 3편이다. ‘슬픈 승리자’에서 너무나 통속적인 이 씨의 일면을 엿본 나는 ‘아담의 후예’에서 센치멘탈하기는 하나마 거의 완벽에 가까워가는 작가의 면영을 보았다.…(중략)…‘아담의 후예’에서 불만을 찾는다면 안영감의 얄미운 개인주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작품은 이상 2편에 비하여도 제일 떨어지는 작품이다. 내가 지금까지 읽어온 이 씨의 작품 중에서 가장 실패작품도 이것일 것이요, 10월 창작에서 가장 옅은 수준에 놓여지는 작품도 이것일 것이다.” (이무영, ‘작가가 쓰는 작품평 10월 창작 별견<2>’, 동아일보 1933년 10월 19일자 조간 3면)


  “장덕조는 솜씨 있는 작가다. 비록 조그만 이야기나 맺고 끊은 듯이 붓을 댔고 붓을 떼었다.” (이무영, ‘작가가 쓰는 작품평 10월 창작 별견<2>’, 동아일보 1933년 10월 20일자 조간 3면)


  최정희가 신가정 1933년 송년호에 실린 여류문단총평(45~47쪽).


  “최근에 와서는 박화성의 소설 ‘하수도공사’를 위시해서 모윤숙의 시집 ‘빛나는 지역’이 출판되고 또 그 외에도 본격적인 여류소설이 계속하여 나오는 것을 보아 앞으로는 확실히 양에서 질로 전환해서 우리들도 문단의 일부를 점령할 시기에 도달할 것 같은 예감이 떠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이 나아갈 송계월의 죽음이라든지 김명순의 행방불명, 불문입(佛門入)으로 붓을 꼭 멈춘 김일엽 또는 가정에 들어간 김원주 제씨를 잃어버린 것은 실로 유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신가정 1936년 1월호 창작란에는 박화성의 단편소설 ‘불가사리’(164~177쪽), 김말봉의 장편소설 ‘요람’(178~186쪽), 정비석의 단편소설 ‘상처기’(187~197쪽)가 실렸습니다.


  “그러나 화성 씨는 ‘불가사리’에서 그의 사회와 소설에 대한 열정과 역량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다.” (이종수, ‘신춘창작시평’, 동아일보 1936년 1월 23일자 석간 3면)


  “비석 생(生)의 ‘상처기’(신가정)는 창백해 보이게 까지 민감한 인테리가 위독한 처를 간호하면서 느끼는 마음을 그린 것인데 이 작품은 박태원 씨의 작품과 같이 심리의 객관적 묘사에 흥미를 끈다.” (이종수, ‘신춘창작시평’, 동아일보 1936년 1월 24일자 석간 3면)


  김말봉의 장편소설 ‘요람’은 신가정 1935년 11월호부터 1936년 2월호까지 연재됐습니다. 


  “우리 잡지에 시로 수필로 창작으로 갖은 채필(彩筆)을 날리시는 김말봉 씨가 상부하시게 된 것인데 그의 부군이시든 청애 전상범  씨는 부산에 성망 높은 청년실업가로 아내에 대한 비단 일개의 남편뿐이 아니라 아내 예술의 유일한 이해자요 다시 구치못할 ‘페트론’이었습니다.” (변영로, 편집여언<餘言>, 신가정 1936년 2월호, 204쪽)


  “필자들을 보면 이병기 박마리아 나혜석 임효정 문애성 최영수 차사백 이만규 김활란 백낙준 이윤재 이은상 피천득 현상윤 유각경 고재욱 현재명 박인덕 이극로 이정섭 김신실 윤석중 주요섭 최의순 임병철 이무영 이태준 박화성 최정희 김자혜 강안식 이순영 이강흡 김안서 허영숙 김장환 홍효민…(중략)…등이었다. 살림기사 필자는 의복에 임정혁 박한표, 미용에 김니수 오엽주 정현순 임형선…(중략)…등 모두 근 4백명이 동원되었다. 연말에는 그해 집필자 기고가들을 조선호텔에 초대하여 연희를 베풀고 고마움을 표했다. 독자문단에는 후일의 시인 정소파가 ‘박모소창’(35년 9월호)을 비롯 계속 시를 투고했고 박남수도 ‘아침’ (36년 5월호) ‘오후의 해안풍경’(동 6월호) ‘지도항해’(동 8월호)를 투고했다.” (이문환, ‘옛 신가정 새 여성동아’, 여성동아 1972년 11월호, 339쪽)


  모윤숙은 신가정 1936년 3월호에 ‘어떻게 난 시인이 되었나’(92~96쪽)를 기고합니다.


  “나의 중학시절은 개성 호수돈여고보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이 비로소 내가 시를 사랑하게 된 어머니 시절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중략)…그러다가 그 선생이 ‘강 건너 뜰’이라는 내 시를 처음 동아일보에 발표해준 이후 어떻게 해서든지 글을 잘 써서 발표해보리라는 발표욕이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나는 일기책에 날마다 시 비슷한 것을 쓰고야 견디었습니다.”


  아동문학가 윤석중 선생은 신가정의 단골 필자였습니다. 창간호(동요 ‘엄마목소리’)부터 마지막호인 1936년 9월호(동화 ‘비’)까지 글을 기고했습니다.


  “아동잡지의 경우 원고료 안주어도 잘 써주던데요. 독자의 눈높이는 소학 3년을 표준(標準)합니다. 정도는 될 수 있는 데까지 저하(低下)하게 할 생각이요.”(윤석중, ‘잡지기자 좌담회’, 신동아 1934년 5월호, 139쪽)


  “밤세톨을 구워서/할머니 한개/언니 한개/나 한개/할머니는 오물오물/언니는 어기적어기적/나는냠냠/오물오물/어기적어기적/냠냠.” (윤석중, 동시 ‘밤 세 톨’, 신가정 1934년 4월호, 170쪽)


  삽화 담당 최영수는 1935년 말 퇴사한 뒤 신가정 1936년 5월호에 기고한 수필 ‘누이야’(109~111쪽)에서 누이로 의인화한 신가정에 대한 그리움을 쏟아냅니다.


  “삼년동안이나 우리 신가정 잡지를 위하여 진력하시든 최영수 선생이 개인 사정으로 고만두시게 된 일입니다.…(중략)…2월호는 세 사람이 하던 일을 자연 수주(변영로) 선생 혼자 담당하시게 되었것만 이만큼 풍부한 내용을 갖추고 여러분 앞에 나가게 되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황신덕, 편집여언, 신가정 1936년 2월호, 204쪽)


  “애여. 누의 가진 바 그 고결과 순정 그리고 정의(正義)의 심장에 털끝만치라도 거슬릴까, 조심에 타던 내 가슴” (최영수, ‘누이야’, 신가정 1936년 5월호, 109쪽) 


  신가정은 1936년 8월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때 동아일보와 함께 무기정간 당했습니다. 신가정은 그동안 부분적인 삭제는 많았지만 매월 결호 없이 1936년 9월호까지 통권 45호를 발행했습니다.


 “필자는 개권(開卷) 벽두에 손 선수의 화보를 넣었는데 필자 딴에는 평범을 떠난 효과적 사진을 넣는다는 생각으로 상반신(손 선수의)을 잘라버리고 양각(兩脚)만을 확대하여 “세계를 이긴 이 다리”란 설명을 붙이어내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고 이것에 말썽이 붙어서 전기(前記) 양 형사공(刑事公)들의 내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일 형사는 다짜고짜로 필자에게 


 “당신은 참으로 지능적이요. 일장기를 지워버리는 것은 무모한 짓이니까 다리만 내이면 그만이란 생각으로 그리한 것이 아니요. 답할 말이 있으면 해보시오!”하며 자못 기세불온하게 얼러 메었다. 


 필자는 극히 태연한 어조(자신이 있었기 때문)로 “손 선수의 상반신을 잘라버리고 양각(兩脚)만을 확대하여 내인 이유를 설명하겠소. 손 선수가 세계를 제패하였다니 그가 무엇으로 세계를 제패하였겠소?…(중략)…그러니 화보적 효과를 백퍼센트로 내려고 그 다리만을 확대 게재한 것이요. 그리고 잘라버린 사진 동강에는 일장기 마아크가 아니고 양정고보의 “養”자 마아크였었소. 입증 삼아 찾아서 뵈오리다.”하고 선선히 말을 하였으나 형사는 종시 미신(未信)적게 여기는 태도였다. 필자는 갈 데 없으려니 하고 사무상(事務床) 아래 휴지 넣는 용수를 뒤지었다.…(중략)…에누리 없이 참으로 기가 막히었다. 유치장행이 겁나서 보다도 형사들에게 야비한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더욱 분하였다. 이윽고 사동(使童, 불행히 성명을 잊었다) 하나가 반신반의하면서도 “이겐가요”하고 필자에게 갖다가 보이는 것이 있었다. 틀림도 없는 잘라버린 손 선수의 뚜렷이 “養”자 마아크가 그리어진 상반신의 사진 조각이었다! 행여 틀리기를 바라며 대여보고 또 대여보아도 트집 잡을 길 없는 “바로 그쪽”이었다. 형사들은 기대에 어그러진 실망에서인지 떡심이 풀리어 싱거운 웃음을 입가에 띠우며 “미안하였소이다.”란 말을 남기고는 돌아가 버린 것이었다.…(중략)…필자의 경우에는 화를 당하지 까지는 않았더라하여도 손기정군 다리 바람에 각화(脚禍)를 당할 뻔하였다.”(변영로, ‘손 선수와 다리소동’, 동아일보 1955년 1월 29일자 4면)


 “곧 뒤이어 잡지 신가정 편집자 변영로 씨도 불려 왔었는데 이 분들이 붙들려온 이유는…(중략)…둘째로 변 씨는 신가정에 손(기정) 남(승룡) 두 선수의 각부(脚部)사진을 뚜렷하게 노출시켰다는 것이라 한다. 놈들이 변 씨에게 트집을 하기를 ‘손 남의 사진 중에서 전신형을 내지 않고 하필 각부만 냈느냐?’ 하기에 예의 ‘유모러쓰’한 변 씨는 ‘아니 여보시오, 마라톤 경기에 다리가 제일이지 얼굴이나 전신이 무슨 관계가 있소, 그래서 그 건장한 다리를 일부러 독자에게 보이기 위하여 확대 게재하였소’하고 대답하였더니 놈들도 어이가 없는지 웃으면서 ‘그러나 그것은 풍속괴란죄(風俗壞亂罪)에 해당하오’하며 얼음얼음 하더라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이 정도의 문초 끝에 변 씨는 며칠 밤 고생하다가 무사히 석방되었다.” (이상범, ‘일장기말소사건 이십년전의 회고기’, 동아일보 1956년 8월 19일자 4면)  


 1936년 9월호는 일제하에서 발행된 마지막 ‘신가정’이 됐습니다. 


 ‘세계를 이긴 다리와 그 어머니’가 실린  신가정 1936년 9월호 표지  




 신가정 1936년 9월호를 소장하고 있는 한국잡지박물관에도 손기정, 남승룡 선수의 다리가 실린 권두화보는 뜯겨져 있고 목차에만 ‘세계를 이긴 다리와 그의 어머니’가 기록돼 있습니다. 


<목차>


권두화보-세계를 이긴 다리와 그 어머니


권두화보-해안 스냅(박필호 촬영)


권두화보-비오는 거리(백운선 촬영)







댓글 한 개 »

  1. 우리나라 최초에 여기자와 신가정을 들여다 볼수있어 고맙고 저에 친고모님을 뵙어서
    무척반갑고 역사에 인물들을 알게되어서
    동아일보에게 감사드립니다

    Comment by 최선희 — 2011/11/27 @ 1:1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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