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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1933년 1월호 권두화(卷頭畵), 청전 이상범 선생의 작품입니다. 민족의 새벽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1월호에는 당시 기자들의 고민도 담겨 있습니다.




 신동아 1933년 1월호 70~76쪽 신문기자 좌담회




 <기자의 수명>

최용환(동아일보 기자)=신출기자는 모든 문제를 모두 큰 기사거리로 보고 덤벼들지만 날이 지나 갈수록 감격성을 잃어버리지요.

서범석(동아일보 기자)=내가 처음 기자로 들어와서 첫 번 외근을 나갔는데 맨 첫 번 만난 사건이 곧 70 노인이 집세 못내서 목매 죽었다는 사건이었어요. 이것이야말로 천하의 대사(大事)로구나 하여 곧 사(社)로 전화를 걸었더니 대답이 그리 시원치 않겠지요. 그러나 나는 신이 나서 얼른 인력거를 타고 현장으로 가서 닥치는 사람마다 붙들고 인터뷰해 가지고 와서 기사를 한 단이 넘게 길게 죽 써 들여놓았지요. 첫 번 외근의 첫 번 쓴 기사라 나는 흥분이 극도에 달하여 참 있는 정성을 다 들여서 써 놓은 것인데 부장께로 가져가니까 그저 푹푹 지워 내버리는데 참으로 눈물이 날만큼 아깝고 분하더군요. 그래서 일호일단(一號一段) 제목으로 열아문줄 조그마하게 나오고 말았지요. 사실 내 그날 밤 잠 못잤습니다. 신문사에 오래 있으면 저렇게까지도 감격성이 감소되는가하여 부장되는 사람을 야속하게 생각하고 분개도 하였지요.


<기자와 사회봉사>

최용환=꼭 어느 것이라고 단정할 수야 없지요. 물론 고용 관계로 일해가면서도 속으로는 봉사적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지요.

이홍직(당시 중앙일보 기자)=조선에는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순전한 고용 관계로만 볼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취재에 협동적 노력>

최용환=여론을 일시에 환기시키기 위하여는 아무리 특종이라도 서로 알려주어 일시에 실리도록 했으면 좋으련만은.

임봉순(동아일보 기자)=그 특종이 만일 중대 문제라면 그 뒤에라도 다른 신문에서도 크게 떠들고야 말 것이니까 미리 서로 통지할 필요까지야 없겠지요.


 <취재방법의 신 제안>

서범석=아직 조선 사회는 그런 시기에 도달되어 있지 아니합니다. 정치적 활동이 도무지 없으니까.

최용환=정치 부문 이외에도 특종이야 있지요.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서양화가 나혜석이 신동아에 글을 싣게 된 것도 이즈음부터입니다.


  “1933년 새해에 접어들면서 혜석은 ‘신동아’ 잡지의 청탁으로 지난 10년을 회고하는 글을 썼다. ‘화가로 어머니로’ 라는 제목의 대화체로 씌어진 이 글은 ‘어머니로서’ ‘외교관 부인으로서’ ‘여자 화가로서’ ‘구미 만유 생활’ ‘독신생활’ 등 네 토막으로 나누어져 지난 10년의 삶을 되돌아보고 있다.”(정규웅, ‘나혜석 평전’, 중앙M&B, 2003년, 239쪽)


  “나의 10년 생활 중에는 계급과 빈부와 귀천의 굴곡이 가로 내려질리고 세로 흘러 나를 웃기고 혹 울리고, 즐겁게 또는 괴롭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억제케 하는 것은 오직 내게 뿌리박혀진 예술심과 보리심이다.


중생무변 서원탁

번뇌무진 서원단

법문무량 서원학

불도무상 서원성” (나혜석, ‘화가로 어머니로 나의 10년간 생활’, 신동아 1933년 1월호, 86쪽)


  “혼자 있을 때면 더욱 괴로웠고 외로웠다. 그때 쓴 글이 ‘원망의 봄 밤’이었다. 꼭 17년 전에 죽은 최승구를 그리워하는 이 글은 신동아 4월호에 실렸다. 이 글에는 자신을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두고 혼자 떠난 최승구를 원망하는 심사가 가득 담겨있다.”(정규웅, ‘나혜석 평전’, 243쪽)


  “아! 그는 아를 버리고 갔다. 그가 내게 모든 풍랑을 안겨주고 멀리멀리 가버린 때가 이 봄밤이다. 내 몸은 사시나무 떨 듯 떨린다. 아래윗니가 서로 딱딱 닿는다. 나는 할 수 있는대로 생각지 않으려고 눈망울을 일자로 굴려 잠을 청한다. 보름달은 구름에 가려 그 얼굴이 보일 듯 보일듯할 뿐 아니라 빛까지 가리워 어두컴컴하다. 아아! 소월아! 소월아!” (나혜석, ‘원망스런 봄밤’, 신동아 1933년 4월호 121쪽)


신동아 1933년 10월호 83~85쪽, 연필로 쓴 편지-나혜석


바로 전해인 1932년 여름을 해금강 총석정에서 보낸 나혜석은 ‘총석정 어촌에서’란 그림을 신동아에 그렸습니다. 




신동아 1933년 8월호 나혜석 씨 필

 

 


   경성제대를 졸업한 고형곤(高亨坤)과 만화 담당 최영수가 이해 5월과 6월 잇달아 신동아에 합류했습니다.  


   “하룻저녁에 새 원고를 만들어 메우는 일은 예사였다. 뜻이 큰 젊은이들이 모여 통쾌한 일도 많았다. 우스운 일도 많고. 문예란을 맡아 독자투고를 다루었다. 한번은 잘 아는 벽암이란 호를 가진 친구가 단편을 투고해왔다. 판을 짜다 보니 아무리 애를 써도 이백자 원고지 석장쯤이 남았다. 별 수 없었다. 재독 삼독 끝에 마지막 부분이 허술한 것 같아 잘라버렸다. 그런데 그 작품이 출세작이 되어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되었다. 돌이키면 터무니없는 짓이었다.”(고형곤, ‘신동아의 초창기’, 동아일보 1964년 8월 22일자 5면) 


 ‘잘라버려 출세작’이 된 작품은 신동아 1933년 10월호에 실린  조벽암의 ‘구직과 고양이작’로 추정됩니다.  조벽암의 작품으로는 ‘새 아침’ (신동아 1933년 1월호), ‘만추사경(晩秋四景)’ (동아일보 1933년 12월 6, 7일자), ‘새 설계도(設計圖)’ (동아일보 1934년 2월 10일자), ‘봄’ (신동아 1934년 2월호) 등이 있습니다.


신동아 1933년 10월호 166~170쪽 구직과 고양이-조벽암




소설 ‘칼의 노래’의 작가 김훈의 아버지 김광주도 신동아를 통해 등단했습니다.


신동아 1933년 10월호 160~165쪽, 밤이 깊어갈 때-김광주


  “독자들의 투고 원고도 게재했는데 특히 시가 많이 들어와 책상 위에 원고가 늘 수북이 쌓일 정도였다. 이는 신동아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좋았다는 얘기도 되고, 한편으로는 문학 지망생들이 작품을 발표할 지면을 얻기가 힘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투고된 원고는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원고난을 덜어주는데 크게 기여하지는 못했다. 독자 투고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 사람 중 하나가 김광섭 시인이었다. 당시 무명의 김 시인이 여러 차례 시를 투고해왔으나 문학 전공도 아닌 필자가 담당기자의 직권(?)으로 번번이 몰고 했었다. 그러다가 한번은 ‘벙어리’라는 제목의 시가 투고돼 왔는데 작품이 좋아 보여 실었더니 결과적으로 이것이 김 시인의 출세작이 돼 버리고 말았다. 한하운 씨의 원고도 기억에 남는 경우다. 소록도에서 써 보낸 ‘혈누기’라는 글로 만주에서 유랑하던 얘기였는데, 장갑을 끼고 원고정리를 하는 법석을 떨기도 했다. 청마 유치환도 신동아를 통해 이름이 알려졌고…”(고형곤, ‘민족의 잡지, 일제하의 신동아’, 631~632쪽) 


  신동아 편집실은 화기애애했습니다.


 “광화문 네거리를 내려다보는 조용한 방이었다. 테이블은 여섯 개. 북쪽으로 세 개는 ‘신동아’를 만드는 이들이 앉았고, 남쪽에서 마주보는 세 개는 ‘신가정’을 만드는 사람들이 앉았었는데 그 중의 하나는 만화 그리던 최영수 군이었다. 앉은 차례로는 북쪽의 주형과 남쪽의 김자혜 양이 마주보고 앉았었고, 그 다음 자리, 김 양의 곁에는 내가 앉았었는데, 나와 마주보던 사람은 ‘신동아’의 고형곤 씨. 그 분의 곁 구석자리에는 ‘신동아’의 이무영(李無影, 본명 이용구, 李龍九) 군이었는데, 그와 마주 앉았던, 내 왼편 자리에는 최영수 군이었다. 이같이 몇 해를 한 방에서 뒹굴었건만, 어느 한 사람, 한 번도 다투어본 일 없었던, 평화의 방이어서, 가른 사원들이나, 바깥 손님들도 우리 방에만 들어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하며 부러워  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설가 이무영과 만화가 최영수는 내가 천거해서 입사시킨 제자였고, 고형곤 씨는 그 당시 경성제대를 마치고 들어온 철학도여서 종일 묵묵히 앉았던 신입사원인데다가, 아무 것보다도 서로 마주보고 앉았던 주 형과 김 양이 백도 이상의 정열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으며, 나는 그들의 너무도 충실한 호위병이었으니, 그 방이 웃음 가득한 방이 될 수밖에 없었다.”(이은상, ‘나의 신가정 편집장 시절’, 여성동아 1967년 11월 복간호, 459쪽)


신동아는 동아일보가 벌이는 브나로드운동이나 아산의 충무공 현충사 중건사업 등을 지원하면서 독자적인 사업도 벌였습니다. 1932년 11월 창간 1주년 기념사업으로 현상금 총액 5백만원을 내걸고 ‘독자작품모집’을 했고 1933년 11월부터 각종 학술강연회을 열었습니다.


 “학계의 권위를 망라 학술 대강연 개최, 11일 공회당, 입장은 동지(同誌) 독자 한(限), 잡지 신동아사 주최-조선 쌀은 어디로 (노동규), 조선경제사의 방법론 (백남운), 예술의 근본 문제와 조선문단 (양주동).”(‘학계의 권위를 망라 학술 대강연 개최’, 동아일보 1933년 11월 10일자 2면)




 동아일보 1933년 11월 12일자 조간 2면 신동아 창간 2주년기념 학술 대강연회




동아일보 1934년 11월 11일자 조간 2면 신동아 창간 3주년기념 시국 문예 대강연회




대 성황을 이룬 신동아주최 시국 문예 대강연

신동아 창간3주년기념 시국 문예 대 강연회, 주최 잡지 신동아

최근 재계 종횡관 (이순탁) 구주 정국의 현상 급(及) 장래 (고영환) 조선 문학의 현 단계 (김기진)




동아일보 1935년 6월 18일자 조간 2면 하계대학 개강-성황리 제1일 종료




제1회 하기대학 주최 신동아사

현대인으로 알어야 할 법률지식 (이인) 최근 세계문예사조(정인보) 최근 세계교육 사조(오천석) 조선 농촌문제(노동규) 최근 세계 정국(이여성) 세계 경제전(김광진)




동아일보 1935년 11월 7일자 석간 3면 사고




제1회 조선 역사 강좌

상고사(정인보) 인물 중심으로 본 한말 외교관계(이선근) 조선사 개설(손진태)

주최 신동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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