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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는 일제하에서 시사 종합 월간지 ‘新東亞’ (1931년 11월호)를 창간했습니다.





  송진우 당시 동아일보 사장은 창간사에서 ‘조선 민족은 바야흐로 대 각성, 대 단결, 대 활동의 효두(曉頭)에 섰다.’ 며  ‘新東亞’는 조선 민족에게 대 경륜을 제시하는 명실상부한 ‘조선 민족의 공기(公器)’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창간사   송진우


조선 민족은 바야흐로 대 각성, 대 단결, 대 활동의 효두(曉頭)에 섰다. 사업적 대 활동의 전구(前軀)는 사상적 대 온양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사상적 대 온양은 민족이 포함한 특색있는 모든 사상가, 경륜가의 의견을 민족 대중의 앞에 제시하여 활발하게 비판하고 흡수케 함에 있다. 이러한 속에서 민족 대중이 공인하는 가장 유력한 민족적 경륜이 발생되는 것이니 월간 신동아(新東亞)의 사명은 정(正)히 이곳에 있는 것이다. 신동아는 조선 민족의 전도의 대 경륜을 제시하는 전람회요, 토론장이오 온양소다. 그러므로 신동아는 어느 일당 일파의 선전기관이 아니다. 하물며 어느 일(一) 개인 또는 수(數) 개인의 전유기관이 아니다. 명실이 다 같은 조선 민족의 공기(公器)다.


 46배판,  30전의 신동아 창간호 2만부는 매진됐습니다.


 ‘발행처’  신동아사(新東亞社),  ‘저작 겸 발행인’ 양원모(梁源模),  제작 총괄 동아일보 편집국장 대리 소오 설의식(小梧 薛義植) .  ‘月刊 東亞’ 로 하려다 ‘新東亞’로 제호를 정한 사람도 설의식 선생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잡지의 편집 대강에 망라주의를 취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학술 문예 등 각 방면을 통하여 시사 평론으로부터 과학 운동 연예 취미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나 간에 우리의 지식과 견문을 넓히고 실익과 취미를 도울만한 것이면 모두 취하기로 하였습니다.”(설의식, 편집후기, 신동아 1931년 11월호 창간호)


  창간호엔


-‘농가부채 5억원, 조선 농촌은 어디로 가나?’


-‘열강의 신계획 경쟁’


-‘중국 국민당의 조직체계’


-‘세계적 인기 작가 레마르크’


-‘태교의 과학적 음미’


-‘독일의 나체운동’


-‘결이혼(結離婚)으로 본 조선의 자태’


-‘빙설의 비경! 북극탐험사’ 등 시대를 앞서 살펴보는 다양한 주제의 글 17편이 실렸습니다.


 ‘세계의 동정’란에서는 ‘조선 적자(赤字)문제’ ‘영인(英印) 제2원탁회의’ ‘영국의 거국내각’ ‘중국의 대수해’ ‘일중(日中) 충돌전말’ ‘영국 금본위제 정지’ 등 국내외의 현안을 다뤘습니다.


 “우리사회는 보도시대라 하지만 단순한 보도만으론 부족하지 않아. 그러니까 보도를 할 때에 암시성을 초고도로 발휘하여야 되는데 이것이 매우 힘이 드는 일이란 말이지. 그러니 필자도 여간한 노력으론 어렵겠고 편집자도 지낭(智囊)을 쪽쪽 짜내야 되겠지.”(B기자, ‘기자실’, 신동아 1931년 11월호 창간호, 48쪽)


   ‘암시성을 초고도로 발휘하여야  한다.’    ‘新東亞’엔 단순 보도 외(外) 시대를 앞서가는 플러스 알파의 그 무엇이 더 있어야 한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통권 2호(1931년 12월호) 권두언은 편집국장 춘원 이광수가 썼습니다.




 1931년 12월호 1쪽 권두언




 9월 만주사변 이래로 재만 백만 동포는 생활의 기초를 잃어버리고 비참히도 동아(凍餓)에 빈(瀕)하게 되었다. 설마 금년 동삼(冬三)을 생명을 부지한다하기로니 명년 이후를 어떻게나 살아가나. 아 신산한 신미년이여. 또 민족운동방면으로 보더라도 유명무실하나마  기치만이라도 섰던 신간회 마저 자살을 하고 그에 대신할 아무 맹아도 보이지 아니하지 아니하는가!


  편집국장 대리 설의식은 ‘편집후기’에서 “보다 충실한 잡지를 만들기 위해 이번에 주요섭(朱耀燮) 씨를 맞아 신동아 편집 사무에만 전력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신동아에는 창간호부터 관여했었다. 그때 미국서 갓 돌아 왔을 때였는데 송 사장의 부탁으로 일하게 되었었다. 설의식 선생 주관 아래 창간호의 교정을 보고 있을 때였다. 다음호부터는 설 선생의 지도를 받으면서 내가 맡아보았는데 원고 부족, 총독부 검열 등 어려운 일이 많았다. 실명 외에 용악산인(龍岳山人), 양두식(梁斗植), 멍텅구리 등 가명 필명으로 마구 쓸 밖에 없었는데 한번은 양두식 선생이 어떤 분이냐고 문의가 와서 모두 웃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들이다. 원고를 모아놓고도 고생이었다. 원고 검열이어서 손을 나누어 복사하고 한편으로 조판, 한편으론 검열을 진행시켰다. 신문사에서 하는 거라 보아 준다는 것이 자그만치 한달이나 걸리곤 했다. 그만두라는 이야기와 같았다. 총독부의 눈을 속이려고 투고의 자구를 요리조리 수정하느라 모두 땀을 빼기도하고. 자유천지 미국에서 돌아온 직후여서 더했겠지만 부자유스럽기가 감옥 같았다.”(주요섭 초대 잡지부장, ‘신동아의 초창기’, 동아일보 1964년 8월 22일자 5면)


  “일제하의 신동아를 만든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주요섭이었다. 신동아 창간호가 나오기 직전인 31년 10월 1일자로 입사한 주요섭은 중국 상해의 호강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스탠포드대학에서 공부한 해외유학출신이었다. 사내에서 최초의 잡지전담기자로 입사한 주요섭은 33년 11월에 잡지부장으로 승진했는데, 미국쪽 사정이 밝고 어학실력이 뛰어났으므로 신동아의 번역 원고는 거의가 그의 손을 거쳐 나온 것이었다. 주요섭은 아이디어도 많고 활동력도 대단했던 사람으로 기억된다. 외국잡지를 입수해 정치 경제 등 각 방면의 기사를 만들어내곤 했다. 특히 원고 부족사태가 발생하면 주요섭의 번역원고로 막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형곤 당시 신동아 기자, ‘민족의 잡지, 일제하의 신동아’, 신동아 1991년 11월호, 632쪽)




  1932년 1월호 목차




 고 손병희 미망인 주옥경 여사 방문기-일기자(신동아 1932년 1월호, 100~101쪽)


 해아(海牙)밀사 이준씨 미망인 이일정 여사 방문기-일기자(신동아 1932년 2월호, 62~64쪽)


 철학박사 김활란 양 회견기-일기자(신동아 1932년 2월호, 66~67쪽)


 “그러나 혼자서는 아무리 애를 써야 미처 돈이 돌아가지 않은 것을 어찌합니까! 이번에도 본래 계획보다 틀려진 것이 많습니다마는 그래도 조선 유일의 처녀박사 김활란 양의 박사논문을 얻은 것이라든지 이준 씨 미망인 회견기, 전쟁시비론 등과 인물 소개, 조선과학자 프로필 등은 상당한 읽을거리라고 생각합니다.”(주요섭, 편집후기, 신동아 1932년 2월호, 120쪽)


 “내가 김활란 박사를 처음 뵌 것은 지금으로부터 31년 전 추운 겨울날이었다. 월간 잡지 신동아 편집 책임자로 동아일보사에 입사하고 나자 맨 처음 인터뷰하러 찾아갔었던 분이 바로 김활란 박사였기 때문에 내 인상에 깊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 당시, 왜놈의 학정 밑에서 신음하고 있던 우리겨레가 가지게 되었던 단 한분, 그리고 맨 첫 번 여자 박사님! 김 박사가 미국서 박사학위를 따가지고 귀국하자 학계는 두말 할 것 없고, 언론계도 흥분했고 지성인 전부가 통틀어 감격했던 것이다. 흔해 빠진 것이 박사요, 또 여자 박사도 상당히 많아진 오늘의 인사들은 삼십년전 첫 여자 박사를 맞이하는 그 당시 민족적인 흥분과 프라이드를 상상조차 못할 것이다. 지금 이화여자중고등학교가 서 있는 정동 이화여자전문학교 교무실에서 나 혼자 김 박사 인터뷰를 하게 되었는데 첫 인상이 키가 너무 작고 몸집도 매우 작은 편이었지만 몸 전체가 지성의 화신(化身) 같았고 기자 다루는 솜씨가 여간 아니요, 좌담이 남을 매혹시키는 어떤 면을 발견했다. 그 후 며칠 뒤 사회 각계 연합 주최로 ‘김활란 박사 귀국환영만찬회’를 명월관에서 열었는데 참석한 손님 오백여명의 대성황이었고 그날 저녁 답사로 하신 연설은 웅변이면서도 조리가 선명하게 선 명강연이었다.”(주요섭, ‘내가 아는 김활란 박사-막사이사이상 수상을 기뻐하면서’, 동아일보 1963년 8월 6일자 5면)


  “창간호는 발매 부수가 2만부를 돌파하여 당시로선 파격적인 판매실적을 올려 절판되었고, 제2호는 3판까지 발행하여 1만5000부 내외, 제3호부터는 9000~1만부 선에 고정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발행해오던 잡지들의 발행부수는 많아야 2000~3000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동아일보를 포함한 일간지들의 발행부수가 10만을 넘어본 적이 없었던 사정과 비교한다면 이 같은 잡지 판매 부수는 놀라운 성공을 거둔 것이다.”(정진석, ‘민족의 지성 신동아 600호의 언론사적 의미’, 신동아 2009년 9월호, 651쪽)


 “동아일보사가 발행하는 종합잡지 ‘신동아’의 창간으로 신문잡지시대를 열게 됨에 따라 기존 발행중이던 잡지에도 경쟁을 불러일으키는 등 종합잡지의 발행이 성황을 이루었다. 이 시기의 잡지 평균 발행부수는 5000~6000여부에 이르렀으며 체제도 많은 발전을 하였다. 특히 경쟁 등의 이유로 가격이 저렴해져 이전에 40~50전 정도였던 것이 20전 이내로 낮춰졌다.”(김봉희 이화여대 명예교수,‘일제시대의 출판문화’, 한국문화연구, 이화여대한국문화연구원, 2008년, 189쪽)


 “출판법은 일단 원고를 사전검열 받은 다음에 조판이 되면 다시 한번 검열을 거쳐 발매할 수 있도록 된 2중 검열제였으므로 제작상 그만큼 더 번거롭고 애로가 컸던 것이다…(중략) …그런데 신동아가 창간된 뒤부터 일제는 원고의 사전검열을 생략하고 출판법에 의한 잡지라도 조판된 교정쇄 검열로 봐주었으므로 원고검열을 받아야하는 번거로움은 줄어들었으나 교정쇄 검열에서도 게재금지 당하는 경우는 있었다.”(정진석, ‘민족의 공기 신동아 반세기’, 신동아 1984년 9월호, 477쪽)


  신동아는 게재금지 사실을 사고를 통해 알렸습니다. 




  1932년 3월호 107쪽 사고




신삼재팔난(新三災八難)과 신삼두팔과응(新三頭八瓜鷹)…이광수

구미와 일본…쏘콜스키

동북문제와 대일방침…장개석


 이상 3편 논문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전부 약(略)하게 되었사오니 집필자와 독자 제위에게 미안한 마음이 그지없습니다.


 사고로 알리지 못하는 사연도 있었습니다.


 “이번 호에 본사에서는 금년도 각 중등이상 학교 졸업생들의 모 경향을 알아서 일반사회에 공개할 목적으로 전선(全鮮)을 통하여 설문을 했었습니다. 불행이 여러 가지 착잡한 사정관계로 그 결과를 독자여러분에게 알려드릴 수 없게 된 것은 유감이오며 더욱이 대답을 보내주신 전선에 널려있는 3백여명 졸업생 제위에게 대하여는 미안한 마음 글할 수 없습니다.” (주요섭, 편집후기, 신동아 1932년 3월호, 120쪽)




 1932년 4월호 152쪽 사고




상해대전 삽화…신언준

재만(在滿)직접파운동의 시발초에서 금일까지의 개략…서범석




  게재금지 사실을 알리는 사고는 그 후에도 실렸습니다. 게재 금지가 된 글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1932년 6월호

억센 고리가 되여지이다 (조선사람된 영예)

노서아 경제의 국제적 지위…홍성하

잡초(소설 종편)…김동인

임종하는 님이여(시)…김수만


1932년 7월호

용감스럽든 그 자태여!…강창숙

태양을 쏘는 자…이무극


1932년 11월호

사상운동의 일년…임봉순

울흥(鬱興)하는 일본의 애국운동…함상훈

입상희곡, 이반자…김희순

가작꽁트, 범인…선우창배


1932년 12월호

1932년의 조선사회운동…동문학인

잡초(시)…박계주

아버지 같이 웃어주세요(시)…황순원


 1933년 1월호

희곡 국유림…석산

우리는 탑 쌓는 무리외다(시)…박계주

태양(시)…유창선


 1933년 2월호

상해대전회상기…신언준


  설의식은 1932년 5월호 ‘편집후기’에서 “이번에 편집부원 또 한분을 맞아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려고 한다”며 “2년 전에 이화여전 영문과를 마치시고 이화모교에서 교무를 보시던 김자혜 씨가 입사케 되었다”고 신입사원을 소개했습니다. 




 신동아 1932년 5월호 87쪽




여기자좌담회

본사측  설의식

               주요섭

               김자혜




  “현상모집은 아니었지만 신동아는 독자투고란을 두어서 여기에 투고했던 사람 가운데 당시 이화여전을 졸업했던 모윤숙과 이전에 재학중이던 노천명의 시를 32년 6월호에 게재하였고 평양 숭실학교 3학년이었던 황순원도 같은 호에 ‘봄노래’라는 동시가 게재된 것을 시초로 여러 차례에 걸쳐 시가 실렸다.”(정진석, ‘민족의 공기 신동아 반세기’, 신동아 1984년 9월호, 481쪽)




신동아 1932년 6월호 118쪽




모윤숙-광야(曠野)로 가는 이

노천명-밤의 찬미




신동아 1932년 7월호 123쪽

모윤숙-오빠의 눈에

노천명-단상


  동경 가와바타미술학교를 졸업한 최영수(崔永秀)가 입사 전 신동아에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입니다. 한 칸짜리 연작만화를 많이 그린 그는 6.25때 납북됐습니다.




신동아 1932년 7월호 스케치기행

     117쪽 연광정                               118쪽 목단봉                               119쪽 현무문




녹의강산(綠衣江山), 평양의 절경을 찾아서-최영수




 신동아 1932년 11월호 시사만화




월급날은 서러워-최영수




   주요섭                                최영수




 동아일보 납북인물 실향사민신고서(1956년)-최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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