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동아일보 1931년 3월 21일자 7면에는 ‘경영(京永, 서울~영등포) 가도(街道) 50리 장쾌할 명일의 경주’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동아일보와 조선체육회가 공동 후원한 ‘제1회 마라손(마라톤) 경주회’로 오늘의 동아마라톤의 시작이었습니다.  




1931년 3월 21일자 7면




경영가도 50리

장쾌한 명일의 경주

20일 정오 본사 앞을 출발

과연 뉘먼저 다녀올까


금년도의 스포츠 시즌의 벽두일 경성―영등포간 왕복 14마일 반의 마라손 경주대회는 이윽고 명 21일로 임박하였다. 이날 정오를 알리우는 ‘싸이렌’ 소리의 끄침과 함께 광화문통 본사 정문의 출발점으로부터 ‘스타―트’를 비롯하야 태평통으로 달려 남대문 밖으로 하여 한강철교를 건너 노량진의 경인(京仁) 일등 가도우를 달리어 영등포 역전의 교차점에서 되돌아가던 그길로 한숨에 출발하던 본사 정문 앞에 귀착할 터인데 지금까지의 연습시간과 및 종래의 기록을 참작하면 이 구간 소요시간은 1시간 20분 가량을 그중 빠른 기록으로 잡고 당일 오후 1시 20분 경부터 동 50분까지에는 전부 귀착할 예정이다.




  본사 후원 문화사업 가운데 예술분야 외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스포츠였습니다. 그중에서도 마라톤 관련 보도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1931년 10월 20일자 1면 사설




세계기록 돌파 조선의 자랑


시내 양정고보생 김은배 군은 18일 마라손경기에서 2시간 26분 12초의 기록을 내 세계적 기록인 2시간 32분 5초 38을 돌파하기 5분 47초 38인 세계적 신기록을 지었다. 이는 조선인이 지은 세계적 기록의 효시로 조선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은 은자왕국의 별명이 있을만큼 진취와 모험의 기상이 결핍하고 소극과 고식이 전인민의 사상이 되어 정치적 학술적으로 또 운동경기적으로 전민족이 오늘과 같은 국제적 무대에서 후진자가 되고 말았으니 우연한 일이 아니다. 최근 점차 이러한 진취적 사상이 보급 실행되어 특히 운동경기에 있어서는 장족의 진보를 보이고 있다. 이로써 조선인의 천품상 또는 기질상의 결함이 없음을 증명했거니와 오등은 일층 이러한 증명에 자신을 갖고 더욱더 노력에 정진을 가하여 세계적 조선인이 되기를 기대할 것이다.




1932년 5월 27일자 2면




세계적 약진의 제1보

마라손에 독점적 우세

동경올림픽 예선에 출정한 3군

제1, 2, 5착의 영예를 획득

스포츠계 공전의 쾌사


세계적 무대에로! 우리 조선의 젊은 애들레틱스는 약진하야 뜻둔지 무릇 십수 년에 이제 그 제1보를 힘차게 마라손에서 발휘하였다. 25일 동경에서 열린 제10회 세계올림픽 파견 선수 최종예선대회에서 조선에서 원정한 권태하 군이 1착, 김은배 군이 2착, 이귀하 군이 5착, 이렇게 조선인 선수단 3명이 출정하여 당당히 1, 2, 5착의 영관을 획득하였다.




1932년 6월 3일자 7면




마라손의 양 용사

권, 김 군 금석 귀경

일단 고향 다녀 미국으로 간다

환영의 인해 이룰 역두(驛頭)


동경에서 본바닥의 당당한 제강을 쾌히 물리치고 1, 2착에 입선된 마라손의 쾌족 권태하 김은배 양 선수가 돌아온다. 조선의 애드레틱스에로 최초의 제1보를 내어 디딜 마라손의 권태하 김은배 양군은 올림픽대회에 출발을 직전하여 2일 오후 7시 경성역에 도착,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다.




  마라톤의 영웅 손기정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1932년 3월 본사의 경영단축마라톤에서 2위를 차지하면서부터였습니다.




1932년 3월 22일자 2면




경영간 마라손

작년 기록을 돌파

1시간 21분 54초

제1착 경성 변용환 군

제2착은 신의주 손기정 군

(상)선수입장식 (하)출발광경




  손기정은 양정고보 2학년 때인 1933년에는 조선 신궁대회 마라톤 풀코스에서 우승해 유명인사가 되었으며 이후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할 때까지 국내 마라톤과 중장거리 육상대회 우승을 휩쓸었습니다.


  손기정은 국내 대회를 거의 석권한 후 1935년 11월 3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명치신궁대회에서 우승하여 일본에서도 마라톤 선수로서 명성을 날렸습니다. 이 마라톤은 올림픽 파견선수 선발전을 겸한 경기였습니다. 손기정은 2시간 26분 14초의 세계기록으로 당당히 우승했습니다. 세계 신기록을 세운 손기정은 신문과 잡지의 집중적인 취재대상이 되는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손기정은 도쿄의 신궁운동장에서 수많은 환호와 갈채를 받는 순간에도 마음 한구석에 서운하고 쓸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에 손기정은 이렇게 심경을 토로했습니다.




  “지난 번 동경 신궁경기대회에서 열린 마라손 경기에서 나는 세계기록으로 오늘날까지 지켜내려오던 2시간 26분 42초라는 초기록(超記錄)을 깨뜨리고, 단연 2시간 26분 14초로 전에 세계기록보다 실로 28초라는 놀라운 기록을 짓고야 말았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조선 안의 여러 신문사에서는 너무나 지나치는 격찬과 찬사로 또는 지나치는 선전으로 떠들석하게 ‘나’라는 일개 미미한 마라손 선수를 크게 세상에 알리우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초인적 신기록’이라고 말하는 2시간 26분 14초를 짓고 피곤할대로 피곤해 돌아왔을 때이외다. 동경 신궁경기운동장 한쪽 구석에서 수많은 사람 속에 싸여서, 환호와 갈채를 받던 그 순간의 일이었습니다. 나는 어쩐지 마음 한 구석에 서운하고 쓸쓸한 생각이 일어나며 나도 모르게 저절로 눈물이 분명히 내 눈썹에 어리여저 나옴을 깨달았었습니다. 물론 이 말을 듣는 여러분은 너무나 기뻐서 솟아 오르는 눈물이어니 생각하실 분들도 계시리다마는, 그 때의 내 가슴속에는 어쩐지 기쁨보다는 슬픔이 더 많이 용솟음쳤던 것만이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내가 이 자리에서 구구히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마는, 구태여 말한다고 하면, 나도 상상하던 바 뜻밖에 호기록을 내어 기뻤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마는, 이러한 예상 이외의 기록을 깨뜨리고 제자리에 돌아왔을 때, 내 눈앞에는 많은 신문사 기자들이 와서 감상을 말하라거니, 어떤 사람들은 사인을 받아가기도 하고 카메라를 돌리기도 하였습니다. 모든 주위의 환호는 나에게 있어 무상의 영광이요, 기쁨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군중들 가운데서 나는 한 사람의 조선말 하는 사람을 못 대해 보았습니다. 나는 여기에서 쓸쓸한 느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중략)

 이 얼마나 이 땅 스포-츠맨으로서의 뼈아픈 노릇입니까. 이러한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그만 이 운동을 그만 두고 싶은 생각도 여러번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고적과 쓰라림을 꾹 참고 오늘날까지 짧지 않은 동안 그야말로 단신으로, 내 한몸의 열과 성의로 꾸준히 연습하여 내려온 고난의 기록이라고나 할 것입니다.(중략)

 이제 추위도 점점 닥쳐옵니다. 동경 방면에서 연습하는 여러 선수들은 별별 준비와 연습에 모든 돈의 힘과 지도자의 힘을 빌어, 음식물에 이르기까지 주의를 다하고 있으련마는, 나는, 오직 양정학교 앞에서 남대문통으로, 황금정(지금의 을지로)을 지나서, 동대문으로, 거기서 창경원 옆으로 뚫린 길로 돈화문 앞을 지나 총독부 앞까지 거기서 광화문통을 지나서 경성부청(서울시청) 앞까지를 한 코-스로 정해놓고, 추우나 더우나, 1주일에 꼭꼭 2차씩 누구의 지도도 없이 혼자 달려보는 것뿐입니다.”

(손기정, ‘伯林올림픽 대회를 바라보며’, ‘삼천리’ 1936년 1월호, 177~181쪽)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출전 선수 선발을 겸한 전일본 마라톤대회에서 우승했을 때 동아일보는 호외를 발행해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켰습니다.




1935년 3월 21일자 호외




육상의 혜성 손기정 군

세계최고기록 작성

명년 올림픽 앞두고 동경에 열린

마라손에 당당 2시 26분 14초


우리 육상장거리의 혜성 양정고보의 손기정 군은 21일 정오 동경에서 열린 일본 마라톤연맹 주최의 마라톤대회에서 2시간 26분 14초란 경이적인 세계 최고 기록을 지어 우승하여 명년으로 앞둔 제11회 세계올림픽대회에 우승할 제1후보로도 엄지손을 꼽게 되어 파견이 확정적이다.




1936년 5월 22일자 2면




마라손 조선의 대기염!

남, 손 양군 1, 2착

올림픽 예선에 단 두 명 출장하야

세계 제패의 꼬을에 매진


 【동경지국특전】 제11회 세계올림픽에 파견할 일본선수 최종결정 마라손 예선대회에서 1착은 남승용, 2착은 손기정 선수가 대표선수권을 획득했다.




 동아일보는 손기정, 남승룡 선수 환영행사가 성대하게 치러진 것을 사진을 곁들여 5단으로 상세히 보도하고 있습니다. 벌써부터 민족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36년 6월 4일자 2면




마라손 철각의 활약은

명일 조선의 예언


젊은 조선의 의기 메고

장도에 오른 남, 손 양웅(兩雄)


모교! 양정교정에

성대한 격려 환송

양 선수가 기운차게 입장하자 터질듯한 박수와 환호




1936년 7월 4일자 8면




우리의 생명을 걸은

백림의 마라손 코스


세계적 무대에 스포츠조선이 등장한지 불과 4년, 햇수로 4년이 돼 번 수(數)로 두 번째 되는 이번 백림의 제11회 올림픽대회도 전 세계의 시청도 응당 꺼으렸으려니와 유달른 처지에 있는 스포츠조선으로서 색다르게 인기 그을고 있는 가운데 바로 한 달 못남기고 임박하였다. 이제 우리가 가장 전폭적으로 기대를 가지고 있게 하는 마라손의 선수 손기정, 남승룡 양 군은 이미 선발하여 성전(聖戰)이 곧 백림에 다어있기 반삭에 가까웁고 농구, 권투, 축구의 5선수가 지금 백림에 거의 가까웁게 닿는 여도(旅途)에 있다.




  동아일보는 마라톤 엔트리 3명 중 일본선수를 제외한 손기정, 남승룡의 이름을 큰 글자로 뽑았습니다.




1936년 7월 15일자 8면




올림픽 마라손에 손, 남 양군 출장 확정

육상경기 엔트리 결정


【헬싱키13일발동맹특파원】일본육상대표는 13일 헬싱키에서 수뇌부 회의를 개최, 닥쳐오는 올림픽대회 육상경기의 남자 16종목, 여자 5종목의 엔트리를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마라손 손기정 남승룡 염포옥남…


  아래는 연습 때도 손기정 선수의 컨디션이 좋았음을 보여주는 르포기사입니다.




1936년 7월 28일자 8면




성전(聖戰)을 앞두고

적동색의 손, 남 양군

올림픽열차 백림까지의 기문(紀文)

백림에서 본지 보도진 정상희 발(發)


지금 백림에서 성전을 기다리고 있는 터입니다…(중략)…먼저 온 손기정, 남승룡 양군을 그 익일에 찾아가 보았더니 어찌도 피차간에 반가운지 이때 이 순간의 기쁨이란…(중략)…그들의 얼굴은 모두가 시커멓게 탄 적동색의 건강체입니다. 연일의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매일 10, 12마일씩 연습을 합니다. 손, 남 군은 52분 40초이고 염수(일본선수)는 53분 가량, 그 다음으로 령목(일본선수)입니다.




  아래는 독일 올림픽지가 예상한 마라톤 우승자로 손기정을 꼽았음을 외지 원문 그대로 옮겼다는 설명이 붙은 기사입니다.




1936년 7월 31일자 8면





올림픽 특집

이번 마라손 우승후보?

손기정 군, 당당 참렬

독일 올림픽지 그대로 소개

“마라손 우승후보에 코리아 학생 손 군”


백림에서 본지 보도진 엄상빈 발

마라손의 4총아


독일의 올림픽 잡지는 우리 해내(海內)동포에게 가장 힘있는 그리고 기뻐할 보도를 하였습니다. 이제 송두리째 올리오니 받으십시오. 마라손 이번 올림픽 우승후보들만 따로 열거하여 특집한 면에 우리의 손기정 군이 한목 끼어 있을 뿐아니라 그 설명에 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중략)…조선(코리아)의 학생인 손기정 군은 고국에서 대단히 칭송을 받었다. 이번 대회는 전번 대회에 있어서보다 기후의 변화가 적으므로 대단히 낙관을 하고 있는데 군은 이번에 일본팀의 지보(至寶)로 출장한 우승후보로 하마평이 높다.




  8월 1일 올림픽 개막을 즈음한 사설에서는 손기정의 기록을 두고 가장 유망하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1936년 8월 1일자 3면




올림픽 대회


제11회 국제 올림픽대회는 금 8월 1일에 독일의 수부 백림에서 열리게 되었다…(중략)…이러한 의미 깊은 회합에 우리 조선 선수가 7명이나 참가하게 된 것을 우리는 기쁘게 생각하는 바이다. 마라손에 남승룡 손기정 양군, 농구에 이성구 염은현 장이환 3군, 권투에 이규환 군, 축구에 김용식 군을 보내게 되었다. 더군다나 마라손 손 군은 작년 동경예선대회에서 2시간 26분 42초의 기록으로 금번 대회 최강자인 아르젠틴 대표 자바라 군의 2시간 31분 36초보다 우월됨을 보는 바이다.




같은 날 8면에는 손, 남 양 선수의 연습기록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1936년 8월 1일자 8면




백림에서 본지 보도진 정상희 발

최종의 전 코스 연습

손, 남 양군 극호조

약 20리를 좌등 코치와 종주


작일(7월 13일)에 처음으로 마라손 장거리 연습을 하였습니다…(중략)…손군은 자기의 속력이 나는 것도 참고 자중하는 것이 얼마나 자랑할만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남군 역시 실력을 발휘하여 속력을 내어 달려왔습니다.(하략)




  아래는 그로부터 4년전 10회 미국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하여 패배한 권태하의 글로, 왜 조선 마라톤이 세계대회에서 패배했는가를 첫째 매니지먼트의 잘못, 둘째 지도방법의 그르침이라고 지적하며 손기정과 남승룡이 우승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싣고 있습니다.




1936년 8월 4일자 8면




마라손에 우승할까(상)

올림픽 자신의 패에 비춰

손, 남의 전도를 축복

백림에서 본지 보도진 권태하 발


4년 전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제10회 올림픽에 마라손 선수로 출전하였으나 우승을 못하고 오늘 제패장에 나서지는 못할 망정 우리의 아우 두사람(손기정 남승룡)의 정패(征覇)에 일조가 되게 하려고 장문의 글을 초(草)잡아 마라손에 대한 우자(愚者)의 의견이라고 해서 타이브라이트로 인쇄해서 일본육상경기연맹에 제출하였더니 다행히 나의 의견에 절감하야 연습에 또는 작전에 좌등 코치와 나는 정 군과 함께 늘 회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오늘 통신에는 우리말로 역(譯)해서 드리기로 합니다.

우리 스포츠계에 유일의 희망과 자신을 가진 스포츠의 하나 마라손은 불과 십년 가량으로서 양적 질적으로 약진에 약진을 거듭하여 기록적으로 세계 수준을 넘어서 세계 제패의 야심을 갖게까지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의 실전에 딱 닥쳐가지고는 언제든지 일반의 기대에 어그러지고 이렇다고 할만한 족종(足踪)을 남기지 못하였다.(중략)

나는 4년이나 지난 오늘에 뜻하지않게 이 마당 성전지에까지 와서 내가 패(敗)한 말이든가 불만에서 우러나올 불평만을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오직 그 시(時)엔 생명을 바치고라도 후회가 없을 정도로 참 희생적인 마라손 세계정패열(世界征覇熱)에 기분간(幾分間)이라도 자료를 제공하고 또 사계당사자(斯界當事者)의 반성을 촉하고저 자기가 알고 평소에 느낀 범위 내에서 일단을 또 전회 대회의 당임(當任)들의 틀린 점을 들려고 한다.(하략)




1936년 8월 5일자 8면




마라손에 우승할까(중)

지도전선에 이변

손 군의 입상은 거의 확정적

백림에서 본지 보도진 권태하 발


우리 손, 남 양군 어떻게 하면 우승할까. 이 문제에 관하여 나는 지도, 인솔자급에 처한 현하 사계 현상을 살필 때 비관론자의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다. 우선 패전의 역사라는 불안의 재료가 있는 데다가 신뢰할만한 인물의 지도자가 없어 선수 자신들은 불안한 상태로 싸우게 되기 때문이다.(하략)




1936년 8월 6일자 8면




마라손에 우승할까(하)

적을 정복함이 1차적, 전사(戰士)를 위함은 2차적이다


누구의 입상이나 기록 등 무엇을 위하야 이끌고 갈만한 여유가 있으면 그 역량으로 전진하고 또 맥진해서 테입을 끊기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적을 정복하는 것이 일차적이오 동지랄가 전사랄가를 돕는 것이 이차적이 되어야 하는 때문이다…(중략)…과연 이번 마라손에 우리는 제패를 할 것인가. 이는 내 힘 미치는 데까지 내 경험을 기우려 부어주려 한다.(하략)




  동아일보는 8월 9일 오후 11시(한국 시각) 출발하는 백림의 마라톤 예상 기사를 실으면서 손기정과 남승룡이 연습 복장으로 나란히 앉아있는 사진을 게재했습니다.




1936년 8월 9일자 8면




용장! 인간력의 위대

성전(聖戰)을 상징하는 최고봉

금일 마라손 쟁패(爭覇)

격전이 예상되는 세계 60선수

우리 손, 남 양군 패기만만


대망의 올림픽 마라손 날은 이윽고 오늘로 닥쳤다. 우리의 자랑이요 또 우리의 두다리, 그 두 젊은 조선의 혼! 생명을 바치는 력과 열, 게다가 승리의 감로수까지를 잡고야 말려는 그 의기…(중략)…오늘 오후11시(백림 오후 3시) 30여 국 60선수 출발의 피스톨 일성과 순간을 같이 하여 이겨도 져도 그만인 옛일로 사라진, 다시 걷잡을 수 없는 옛일이 되어버리련다. 다만 “희랍군이 승전하였다”의 일성을 절규하고 혼도기절한 고대의 ‘피디 피더스’, 그 장중한 또 존귀한 정신의 구현을 할 자 우리의 자랑 손 군이냐? 남 군이냐? 그렇지않으면 누구냐에 대망의 오늘은 밝는다.(하략)




  그리고 이 날 손기정은 세계신기록 2시간 29분 19초로 우승했습니다(3위 남승룡은 2시간 31분 42초). 동아일보는 8월 10일 아침 호외를 발행해 손기정의 마라톤 세계 제패 소식을 알렸습니다. 사진은 미처 입수하지 못해 평소 연습 모습의 두 선수 사진을 게재했습니다.




1936년 8월 10일자 호외 1면(조간 1판)




대망의 올림픽 마라손

세계의 시청 총 집중리

당당 손기정 군 우승

남 군도 3착 당당 입상으로




  9일 오후 3시(조선시간 오후11시)에 올림픽경기장을 출발한 마라손에 우리 대망의 손기정 군은 장패! 30여 나라 60선수들 강적을 물리치고 당당 우승을 하였다.


  곧이어 호외 1보를 재록하며 후속기사를 보충해 호외 2보를 발간했습니다. 좌측 상하에 게재한 사진(‘쾌보에 광희작약하는 雨中의 대관중’ ‘본사의 쾌보 대기진’)은 마라톤 우승을 열망하는 분위기를 짐작케 합니다. 특히 체육계 관계자들이 심야에 본사 귀빈실에서 쾌보를 기다리고, 관중들은 심야의 빗속에 본사 앞에서 속보를 기다리고 있는 장면은 지난 월드컵때 광화문 전광판 앞의 열기를 연상케 합니다.




1936년 8월 10일자 호외 1면(조간 2판)




성전(聖戰)의 최고봉 정복

대망의 올림픽 마라손

세계의 시청 중집리(中集裡)

당당 손기정 군 우승


(사진)쾌보에 광희작약하는 우중(雨中)의 대관중(上은 본사 편집국 창구로부터 각각으로 통고하는 장면, 下는 본사앞 광장의 대관중)

(사진)본사의 쾌보 대기진. 양정 安 교장 이하 체육 각 단체 관계 및 전회 올림픽 선수 등 일동이 본사 귀빈실에 집합하여 제패의 쾌보를 대래(待來)하고 있는 긴장한 장면.(사진은 10일 오전 1시 촬영)




  다음날인 11일자에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손 제패 소식을 1면 전체를 털어 상세히 보도하고 평소 3면에 싣던 사설을 1면에 게재했습니다. 손, 남의 쾌거를 민족의 ‘성전(聖戰)’, ‘근역(槿域, 조선땅)에 옮겨온 감람수’로 표현, 억압민으로서의 울분을 대신해준 선수들의 마음을 본받자고 역설하였습니다.




1936년 8월 11일자  1면




세계 제패의 개가(凱歌)

인류최고의 승리!

영원불멸의 성화(聖火)

근역(槿域)에 옮겨온 감람수


우리의 손기정은 이겼다. 조선은 너무나 오랫동안 숨어살았다. 또 너무나 오랫동안 기운없이 살았다. 손, 남 양 용사의 세계적 우승은 시드는 조선의 자는 피를 끓게 하였고 깔아진 조선의 맥박을 뛰게 하였다. 한번 일어서면 세계도 손안의 것이라는 신념과 기백을 가지도록 했다.(하략)




  이어 11일부터 3일 동안 ‘조선의 아들 손기정 세계의 영웅이 되기까지’라는 제목의 시리즈를 제작해 손기정의 마라톤 세계 제패가 있기까지의 갖은 역경과 투혼을 고스란히 신문 지상에 담았습니다.




1936년 8월 11일자  2면




조선의 아들 손기정

세계의 영웅이 되기까지


월사금 못내고 눈물 지며 책보 끼고 공동묘지행


우리 손기정군이 우리 민족의 기염을 세계에 토하야 오늘의 영웅이 되기까지에는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었다. 모진 바람에 시달리다가 이것이 사라지고 순풍이 불어올까 하면 노도가 넘실거리었다. 그 길 그 항해에는 손군의 눈물과 피의 기록만이 너무도 선명한 것이다.(하략)




1936년 8월 12일자 2면




조선의 아들 손기정

세계의 패왕이 되기까지


안동취인소 사동(使童)으로

조석(朝夕), 철도우로 마라손

인쇄소, 상점 사환으로 전전튼 손기정


어린 가슴에 뛰노는 포부와 희망은 세상이 넓고 하늘이 높은 줄은 모르고 뛰노는 것이었다. 보통학교를 졸업만 하면 무슨 상급학교에 하면서 동무들은 하늘에나 나를듯이 즐거워하였다. 여기에는 불행한 사람과 다행한 사람이 갈라져 있는 판에 우리 어린 손 군은 물론 불행 그것이었다.(하략)




1936년 8월 13일자 2면




조선의 아들 손기정

세계의 패왕이 되기까지


직장과 가정을 버리고

경성 본무대로 진출

기쁨에 넘치던 그 밤 부친은 별세


월계관 쓴 손기정

(상)머리에는 월계관 쓰고 손에는 상수리나무 든 마라손 패왕

(하)역주하는 손기정


본격적으로 뛰어보고 싶다는 욕망에 불타고 있던 우리 손기정 군에게는 기어히 때가 돌아오고 말았다. 그것이 바로 1932년 손 군이 19세 되던 해 경성과 영등포간 마라손 경기가 열리었던 것이다. 손 군은 분연히 일어나 이 대회에 출전하였다. 그리하야 비록 규율있는 마라손 연습을 하여보지 못한 손 군이지만 그가 타고난 힘과 노력은 기어히 2등이라는 성적을 나타내었다. 여기에서 오늘의 마라손 왕이 될 첫 기염을 정식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하략)




  한편, 8월 12일자 사설에서는 마라톤 우승자를 환영하자면서,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는 민족의 수난과 비굴함을 들면서 이를 계기로 자기를 발굴하고 새 혼과 새 기운을 차리자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1936년 8월 12일자 3면




손, 남 양 선수의 위대한 공헌

마음으로 환영하자


남이라면 왜 그리도 두려워 하였던가. 큰 것을 두려워하고 강한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정(人情)의 상태나 자기를 잊어서까지 남을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드냐.

우리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너무나 자기를 잊어가면서 남을 두려워하였다…(중략)…강한 자 앞에서는 양과  같았으며…(중략)…사대주의의 새 옷을 갈아입히고…(중략)… 남이 준 안경을 다 벗어버리고 내 자신을 살피며 내 자신을 갈고 깎어야 되겠다…(중략)…자기를 업신여기려던 우리에게 있어서는 가장 힘있는 교훈이 되어준 것이다.


금번 손, 남 양군의 마라톤 세계 제패가 한번 지상에 보도될 때 그 기쁨의 감격에 뛰지 않은 자 누구이더냐. 선진 각국에 있어서 스포츠의 한 우승 쯤은 이다지 큰 환희와 감격을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 있어서는 그것이 비록 한 개의 운동경기였지마는 자기의 최초 최대의 표현이었던 만큼 그 환희와 감격은 보다 크고 깊은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발견한 뒤 최초의 영예요, 자기를 탁마한 뒤 최초의 수확이었던 때문이다.

이것이야 물론 자기의 속성에 일편린(一片鱗)이로되 백천(百千)의 자기의 속성을 발견하는데 자신과 혼담(魂膽)을 부어준 것이다. 자기를 잊으려고 자기를 업시여기려하던 우리에게 있어서는 가장 힘있는 교훈이 되어준 것이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손, 남 두 용사의 거둔 공은 생각할수록 거룩하며 높은 것이니 양군이 고토(故土)을 밟을 때 우리는 마음으로 그들을 환영하여야 할 것이며 정성으로 그들을 위로하여야할 것이다.

우리는 두 손을 벌리고 “어서 오라, 고토에, 조선의 두 아들아”를 부르는 자이니 다같이 이 소리에 화하여 마음껏 이 두 마라톤 패장(覇將)을 맞이하기로 하자.




  동아일보는 베를린 올림픽이 폐막되자 총결산을 하면서 출전했던 조선 선수 마라톤 손기정 남승룡, 농구 이성구 염은현 장이진, 축구 김용식, 권투 이규환 등 7명의 활약을 정리하는 기사를 전면에 걸쳐 게재했습니다. 당시에는 엄연히 일본팀으로 출전했지만, 조선 선수 이름만 적고 일본 선수 이야기는 단 한 줄도 볼 수 없습니다. 




1936년 8월 18일자 8면




우리 패업을 완성한 백림올림픽 총결산

휴전나팔 울려오자

단상의 성화 소영(消影)

히총통 임석, 작석(昨夕), 폐회식 거행

4종목에 7인이 분전

빛나는 마라손 제패


  그리고 1936년 8월 25일, 동아일보는 손기정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시상식 장면을 실으면서 가슴에 붙은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일장기 말소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와 자매지 ‘신동아’, ‘신가정’이 무기정간을 당하였습니다.




1936년 8월 25일자 2면




영예의 우리 손군

(上) 머리엔 월계관, 두 손엔 감람수의 화분! 마라손 우승자 ‘우리용사 손기정군’

(下)는 마라손 정문을 나서 용약 출발하는 손선수(×표) <지난 9일 세계 제패한 그날>


  이 사건에 관련되어 구속되었던 이길용(운동부), 현진건(사회부장), 최승만(신동아 편집부장), 신낙균(사진과장), 서영호(사진부) 등 5명은 앞으로 언론기관에는 일체 참여하지 않겠으며, 만일 또 다른 사건에 연루된다면 이번 사건의 책임에 가중하여 엄벌받을 것을 각오한다는 등의 각서를 쓰고 40일 만에 풀려났습니다.


  이밖에도 사장 송진우를 비롯하여 장덕수(부사장), 양원모(영업국장-신동아 편집 겸 발행인), 김준연(주필), 설의식(편집국장), 박찬희(지방부장), 이여성(조사부장), 장용서(편집부) 등이 신문사를 떠났습니다. 동아일보는 이듬해 6월 1일, 279일이라는 최장기의 정간 끝에 복간되었으나, ‘신동아’와 ‘신가정’은 일제 치하에서는 다시 발행되지 못하였습니다.


  손기정 선수는 뒤늦게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을 전해들었습니다. 그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손기정은 귀국 후 인촌을 찾아 보성전문에도 입학하게 됩니다.


내가 인촌 선생님을 뵌 것은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그 다음해 그러니까 1937년 이었다. 우승을 했는데도 당장 고국에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이상했다. 당연히 빨리 데려다가 거국적인 환영회를 해주던지 해야 되는데 선수단 임원들은 귀국일자를 차일피일 미루며 나는 해외에 잡아두는 것이었다. 거기다 날 감시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나중에야 동아일보가 내 가슴에서 일장기를 찢어 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때문에 동포들이 환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가슴이 꽉 메이는 걸 느꼈다. 밤낮없이 맨발로 달리기만 하며 아무 것도 모르던 내 마음 속에도 민족혼이라는 게 불붙어 일어났던 것이다.

“내가 왜 ‘손끼데이’냐, 손기정이다. 내가 왜 일본 선수냐, 조선 선수다. 그런데 왜 나라가 없었나?”

그 때의 감정은 뭐라 표현할 수가 없다. 뒤늦게 귀국은 했지만 대학 진학이 막연했다. 갈 데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동아일보를 생각하고 인촌 선생이라면 힘이 되어 주리라 여기고 계동 댁을 찾아뵈었다.

“마라톤 하는 손기정입니다. 보성전문에 입학시켜 주십시오.”

다짜고짜 그 말부터 했다. 선생님은 내 손을 잡으시더니 감격하신 듯 눈물을 글썽이시고 입학 부탁은 뒷전으로 미루고 친구 분들을 부르시며 손 선수가 왔으니 환영회를 해야겠다고 하셨다. 술상이 들어오고 모든 분들이 어린 나를 축하해 주는데 몸 둘 바를 몰랐다.

인촌 선생님까지 일어나셔서 창을 부르셨는데 ‘아마추어’로는 잘 하시는 편이었다. 마라톤 선수 하나를 위해서 그토록 자랑스럽게 아시고 술상까지 차리며 격려해 주시는 걸 보니 손기정 개인보다도 선생님의 애국심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했다. 물론 나는 보전에 입학하게 되었고 그 뒤에도 마라톤 하던 내 후배 선수들, 이를테면 보스턴 마라톤 우승자가 된 서윤복, 함기용 선수들을 추천하면 그들의 실력도 있었지만 보전 입학을 승낙하셨다. 게다가 해방 후 마라톤 중흥을 위해 선생님이 보이신 열의는 대단하셨다.(손기정, ‘孫 선수 왔으니 환영회 하자’, ‘인촌 김성수 사상과 일화’, 동아일보사, 1985년, 370~371쪽)




  이렇듯 일제강점기 때의 마라톤은 조선인의 울분을 달래고 희망을 전해 준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습니다. 동아마라톤이 탄생한 것은 스포츠 본연의 의미도 있겠지만 민족의식 고취란 사명감이 큰 바탕이 되었습니다.


  동아마라톤이 걸어온 길은 바로 한국 마라톤의 역사나 다름없습니다. 일제 치하에서는 겨레에 불굴의 민족정신과 독립의지를 고취시키는 구심점 역할을 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신기록의 산실로 한국 마라톤의 중흥을 일궈냈습니다. 동아마라톤은 지난 세월 민족과 고락을 함께 하며 달려왔습니다. 나라가 어렵고 힘들 때에도 동아마라톤은 우리 모두에게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선사했습니다.


  일제의 동아일보 강제폐간 후 어수선한 해방 정국과 6.25를 겪으며 열리지 못했던 동아마라톤은 1954년 25회 대회로 당당히 부활했습니다. 동아마라톤이 또 한 번의 도약을 하며 한국마라톤에 새로운 힘을 불어 넣은 때는 1964년. 이때부터 동아마라톤은 광화문을 출발점으로 경인가도를 달리는 풀코스로 재탄생하며 한국 마라톤을 본격적인 기록 경쟁시대로 이끌었습니다.


  2004년부터 서울국제마라톤대회를 겸해 열리는 동아마라톤은 현재 2만 명이 넘는 마스터스 참가자가 참가해 즐기는 ‘축제의 장’으로 한국 마라톤에 자양분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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