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동아일보의 이재동포 구제활동은 1931년 만주사변으로 어려움에 처한 재만피난동포를 위해 다시 시작됐습니다. 봉천특파원을 통해 그들의 참상을 알리자 “전국 방방곡곡 6만여 동포로부터 거두어진 동전 하나, 의복 하나 마다 동족애의 정성이 얽혀 있는 것이어서 받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적시게 하였다”고 합니다.




1931년 10월 27일자 1면 사설




만주 조난 동포를 동아사(凍餓死)에서 구하라


“이 가련, 비참한 동포들이 누구의 동족이냐? 수천의 동포들이 만리이역의 동한(冬寒)에서 굶고 있는 것을 좌시할 조선 사람이 어디 있으랴! 2천만이 넘는 동족을 가진 수천의 생령이 이역에서 동아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2천만 동족 중에는 돈 천원, 돈 만원이나 내기를 고통으로 여기지 아니할 부유한 동포가 있음에랴! 이에 우리는 첫째로 조선의 부유한 동포들게 호소한다. 사선상에 선 만주조난동포를 위하여 돈을 좀 내어 놓으라고. 둘째로 우리는 동포중에 부유치 못한 동포에게 호소한다. 만주의 풍운 찬 광야에서 사선에 임박한 동포를 위하여 2원이든지, 1원이든지, 입던 옷이든지, 버선이든지, 담요든지, 피륙이든지, 양식이든지, 약품이든지, 신발이든지, 무엇이든지 있는대로 얼마씩을 내어 놓으라고. 또 아기를 가지신 어머니들은 만주에서 떠는 어린 것들을 위하여 어린이의 의복이나 버선이나 포대기나 내복이든지 무엇이라도 내어 놓으시라고. 셋째로 각 학교의 남녀학생에게 호소한다. 그들이 각각 가정에서 부모께 말하여 구제의 힘을 내이도록. 또 국내의 각종단체, 교회, 교회내제단체에게 호소한다. 사선상의 만주동포의 구제를 위하여 전력을 다하여 활동하기를.”




 1931년 10월 29일자 2면  


 재만동포의 참상 듣고, 찬연한 동족애 발로 – 빈부를 초월한 위호의 지정


 “본사에서는 만보산사건을 조사하기 위하여 특파했던 서범석을 계속 현지에 머물게 하고, 다시 설의식 편집국장대리를 특파하여 재만 동포들의 참상을 신속히 보도했다. 아울러 국내동포들의 따뜻한 구호의 손길이 뻗치도록 호소하고 재만 피란동포를 위한 위문금품의 모집에도 나섰다. 당시 서 특파원의 회고에 따르면, 그를 만주사변에 특파할 때 이광수 편집국장은 ‘전황보도는 필요 없다’는 밀령을 주었다는 것이다. 만주사변에 특파원을 보내는 것은 하나의 위장에 지나지 않았고, 다만 그 목적은 전란으로 인한 피란동포의 실태를 알아보고 그들을 구호할 방책을 강구하는 데 있었다.” (‘동아일보사사’, 324쪽)


 “위문사는 사회단체를 대표해서 서정희 선생이 단장이 되고 각 신문사 특파원 설의식, 신영우, 서범석이 수행하였는데, 나도 그때 거기서 끼어서 생후 처음으로 만주행을 하게 되었다…(중략)…우리들은 간곡한 위문을 하고 본국에서 사가지고 간 돈을 내놓았더니 그들은 아주 버림받은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국내 동포들이 자기네들을 잊지 않고 이같이 따뜻하게 위문해줄 줄은 몰랐었다고 모두들 눈물을 흘려가며 기뻐하였다. 그리고 위문을 받는 그들이나 위문을 하는 우리들이나 다 같이 눈물을 머금었으니 그것은 누구나 나라 없는 설움을 뼈아프게 느낀 까닭이었다.” (김을한, ‘사건과 기자’, 신태양사, 1960, 153~154쪽)




 “동아일보의 애끓는 호소는 전국에 메아리쳐 그 익일부터 위문금품이 답지하기 시작하였다. 그 첫 금품은 경성 송월동 토막빈민 일동이 애끓는 사연의 편지와 함께 244점의 의복과 5원 14전을 보내온 것이었다. 한편 서울의 각계 유지도 모임을 갖고 만주조난동포문제협의회를 구성, 43인의 위원을 선출하고 동아일보와 나란히 구제사업에 나섰다.1932년 2월 10일 현재 본사에 집계된 총 수입은 물품 17,809점, 금액 22,714원20전이었다. 비록 얼마되지 않는 금품이지만 전국 방방곡곡 6만여 동포로부터 거두어진만큼 동전 하나 의복 하나 마다 동족애의 정성이 얽혀 있는 것이어서 받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것이었다. 본사에서는 이를 4회(제1회 31년 2월 1일, 제2회 12월 3일, 제3회 32년 1월 23일, 제4회 2월 19일)로 나누어 현지 피난동포에게 전달하였는데, 특히 제1회 배분시는 양원모(梁源模) 영업국장과 서범석(徐範錫) 특파원이 일일이 각처 수용소에 직접 가서 분배하였다. 4회에 걸친 각처 물품 분배는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은 횟수)

장춘(長春) 1,006점(1·2·4)

무순(撫順) 875(1·2·4)

길림(吉林) 563(1·4)

우장(牛莊) 240(1)

하르빈 980(1·2)

철령(鐵嶺) 1,439(1·2·4)

정가둔(鄭家屯) 1,567(1·2·4)

사평가(四平街) 2,194(1·2·4)

공주령(公主嶺) 1,863(1·2·4)

봉천(奉天) 1,354(1·2·4)

영구(營口) 541(2·4)

개원(開原) 2,061(2·4)

안동(安東) 803(3)

해용(海龍) 801(4)

조남(조南) 354(4)

도뢰소(陶賴昭) 569(4)

통요(通遼) 331(4)


  위문금품은 기간이 지난 후에도 계속 들어왔으며, 또 전기(前記)한 만주동포문제협의회를 비롯한 사회사업협의회 등 몇 단체에서도 금품을 모집 전달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최영식, ‘1931, 2년의 재만피난동포 위문금품 모집’, 사사낙수, 1968년 12월호 51쪽)


  1933년 영남 일대 대홍수 때는 즉시 호외를 내 시시각각 소식을 전하는 한편 지국과 분국이 총동원돼 구호활동에 나섰습니다.




  1933년 6월 30일자 호외




  낙동강 필경 범람




   1933년 7월 1일자 호외  





농작물은 전멸상태 – 삼랑진에서 본사 특파원 김정실 발전




 1933년 7월 1일자 호외(제2)




낙동강 제방 결궤 (부산지국 1일 오후 2시 반 지급전화)




1933년 7월 1일자 호외(제3)




일천삼백여호 전멸 칠천 주민 생사불명 (부산지국 1일 오후 8시 전화)




1933년 7월 2일자 조간 2면   




일천삼백여호 전멸 칠천 주민 생사불명




1933년 7월 2일자 조간 1면 사고




연안(沿岸)지분국도 총동원, 본사 구호반 출동




1933년 7월 2일자 호외

 

 


“영남의 대수재는 작3일 정오 현재 사상자 4백여, 유실침수가옥 6천여호, 전답유실 4만여정보, 선박유실 2백20척, 기타 제방 교량 도로의 파괴를 합하면 손해액이 1천만에 달한다고 한다. 아직도 비가 더 계속한다고 하면 손해가 얼마나 될지 짐작할 수 없다. 이런 참경을 당하여 시급 끽긴한 것이 구제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미 각 방면으로부터 본사에 구호금품이 환지하는 중이며 경남사회사업협회에도 구제금품을 모집하는 중이다. 이런 구제사업에 제일로 또 가장 중대하게 책임을 진 이는 조선의 재산가 여러분이다. 가난한 동포의 1분(分) 전(錢), 1시(匙) 미(米), 1건(件) 의(衣)가 고맙지만 큰 재산을 가진 이가 시급히 거액의 금품을 내지 아니하면 구제는 시기를 잃을 염려가 있는 동시에 도저히 완전을 기할 수 없을 것이다. 원래 재산가의 재산은 사회가 필요로 인정하는 시기와 사업에 사용될 수 있다는 예상에서만 사회적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다.” (‘재산가는 분기하라 – 영남 대수재 구호에 대하여’, 1933년 7월 5일자 조간 1면 사설)




1933년 7월 6일자 2면




1백70년래 대홍수, 대사(待死)의 9천3백 생령(生靈),

전가산은 탁류에 구명한 1만8천명, 비절참절! 판명된 구포 방면 일대의 피해 – 본사 구호반 필사의 활동


[부산에서 특파원 이길용 5일 오전 10시 전보] 탁류에 삼키울 것은 다 삼키우고 유실될 것은 다 떠나려 보낸 낙동강 연안 일대의 이번 대홍수는 구포 표준의 4m90cm를 최고로 이제는 물이 점점 감소되는 중이다. 이번 홍수의 수위는 실로 1백70년 이래에 처음 당하는 큰 물이라 한다. 5일 오전 9시까지 구포 방면에만 판명된 피해 정도는 가산 전부를 탁류에 삼키우고 생명만 구조한 사람이 1만7천9백명인데 그중에 9천3백75명은 각일각으로 죽음을 기다릴 뿐이다.


   영남지방의 홍수피해를 입은 이재민의 소작료를 탕감하도록 촉구하는 동시에 수재 극복을 통해 조선인의 저력을 보여 주자며 민족정신을 강조한 사설은 총독부에 의해 삭제됐습니다.




  1933년 7월 8일자 석간 1면 사설
 


살려는 뜻과 힘 – 영남 이재동포에게



“비는 개었습니다. 우리는 눈물을 거둡시다. 그리하고 새로 다시 살 길을 – 수재 당하기 전보다 더 잘 살기를 결심하고 일어납시다. 힘을 씁시다. 땅을 가진 이는 이재 동포에게 땅을 주시오. 금년 소작료와 명년 소작료를 면제하시오. 이재 동포에게 빚을 지운 부자들은 단연히 그 빚을 탕감하시오. 당국은 모든 국세와 공과금을 면제하고, 일거리를 주고 새로 살림을 차릴 밑천을 극히 적은 변으로 융통해 주시오. 모든 농촌 금융조합에서는 이 비상시에 있어서 적어도 2년간 채무 감보를 유예하는 동시에 이자를 탕감하시오. 그리고 이재 동포는 전보다 갑절 힘을 내어 가족 총동원으로 살기 위한 일터로 나서시오.” (정진석 편, 일제시대 민족지 압수기사 모음 2, 492쪽)


“이와 전후하여 본사의 발기로 남조선 수해구제회를 조직하고 널리 뜻있고 마음 있는 동포들의 따뜻한 동정을 빌었다. 이 결과 현금 7천9백83원, 물품 2천3백29점에 달하였다. 이들 재지 수만동포들에게 전달하는 본사 구호반들은…(중략)…지서로 헤매이기 수십여일간 이와 더불어 본사 의료반의 자비한 활동은 재후 설상가상으로 병고에 신음하는 이재동포들의 감격한 눈물과 아울러 의사의 거룩한 기술이 또한 인자한 인술인 것을 뼈에 새겨 인식케 하였다.” (‘경경미충의 15성상 – 낙강연안 수화<水禍>’, 동아일보 1935년 4월 10일자 석간 3면)




  1934년 갑술년엔 국내외에서 설재(雪災) 화재(火災) 수재(水災) 풍재(風災) 등 4재(災)가 겹쳐 일어났습니다. 새해 1월 설재는 울릉도에서 일어났습니다.


1934년 1월 27일자 조간 2면, 울릉도에 적설 십척여, 교통 두절 식량 결핍


(대구전화) 울릉도 26일 오후 4시 울릉도사발(發) 경북 경찰부 착전에 의하면 1월 1일 이래 끊임없이 눈이 내렸다. 오늘에는 직설 10척에 달하여 교통은 완전히 두절되고 인축 가옥 등은 상당한 피해가 있으나 조사 불능이다.


1934년 1월 31일자 조간 2면, 사선의 도민 찾아 본사 특파원 급행

대구 송기찬 군을 울릉도로, 위선 광목 백미 휴행

13여척의 높이나 내린 눈으로 말미암아 일만이천여명의 울릉도 동포들은 방금 생사기로에 방황하고 있다. 바다를 격한 한 개 눈덩어리로 환한 울릉도는 방금 바다의 노도광란으로 선박의 기항까지 못해 통신마저 두절되니 그들 동포들의 안위조차 알 길이 없다. 이에 본사는 대구 주재 본사 특파원 송기찬 군을 현장에 특파하기로 되었다. 




1934년 2월 5일자 호외




울릉도 설해의 실정 제1보




1934년 2월 16일자 조간 5면
 


설괴화한 울릉도 참해 실지답사 사진화보, 기(其) 2 – 본사 특파원 송기찬 기·사진반 홍병옥 촬영



“일금 1502원 59전 총 의연금 수입고

 일금 1677원  9전  총 구호금 지출고

 차인 부족액 184원 50전 본사 부담”

 (1934년 7월 7일자 조간 2면, 울릉도 설해이재 = 동포구제금품 결산, 전후 7차에 금품으로 위문)


“동해 고도(孤島) 울릉도에 1934년 1월 대설이 장기간 퍼부어 그 참상이 연일 보도되는 가운데 동아일보는 구호금품을 모집하였다. 사경에서 헤매는 낙도 동포들에 대한 동정은 국가 없는 민족의 설움을 또 한번 되새기게 한 것이다.” (‘동아의 지면 반세기’, 동아일보사, 1970, 99쪽)




  3월의 큰 불로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하코다테 거주 동포들이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1934년 3월 24일자 석간 2면




함관 재지(災地)의 현장에 본사 특파원 급파,

본사 동경지국장 신호균(申浩均)군 금일 오후 2시 동경 출발


(동경지국전보) “22일 북해도 함관의 대화재는 전시가를 휩쓸어 2만3천6백호 사상자 1천여, 행방불명 2천이라는 놀랠만한 미증유의 대참화를 내었다.”




1934년 3월 24일자 호외




초토 위에 한설엄습 참상은 목불인견, 조선인 피해 8할 이상 – 함관에서 본사 신 특파원 제1보


24일 오전 12시 싸락이 내릴 때에 함관시에 도착하였다. 즉시 1리 떨어져 있는 수상경찰서까지 걸어가는 도중 나(특파원)의 눈에는 눈물을 겁할 수 없는 여러 가지의 비참한 광경이 보이게 되었다. 나는 경찰의 특고과장을 만나가지고 재주조선인의 안부를 들었는데 급작히 돌발사건이 있어서 그에 대한 상세한 일은 아직 알 수가 없으나 신천정과 송풍정에 가장 피해가 많이 있는데 그곳에 조선인의 다수가 재주하고 있었으므로 그 방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조난된 것으로 추측이 되나 아직 확실히 알 수는 없다…(중략)…이재자는 그 대부분이 노농자인데 불이 급히 난 까닭에 이리저리 함부로 흩어져서 어디로 갔는지 전연 알 수가 없다…(중략)…요컨대 재주조선인의 8할 가량이 피해자인 듯하나 이를 다 구제할 방책도 없고 전연 기근과 추움에 신음하고 있는 형편으로 차마 눈으로 볼 수는 없다.  




1934년 3월 25일자 석간 2면




함관 대화재 이재자 구제의연금 모집


“함관재민 구제의연 24일 본사접수분 – 소계 20원 30전, 누계금 772원 93전”

“24일로 모집 막음, 그동안 모집하여 오든 함관 화재의 의연금은 찼으므로 24일로써 막음하고 금후는 받지 아니하겠기에 근고합니다.” (1934년 4월 25일자 조간 2면, 함관 화재 의연금)




  7월의 수재는 1년 전 수해를 당한 남쪽 지방에서 또다시 일어났습니다.




1934년 7월 21일자 호외




삼남 일대 우부(又復) 수란(水亂), 전남 일대 홍수란, 만오천 정보 니해화(泥海化)




1934년 7월 21일자 호외(제2)




경부 본선 불통, 경전 남부도 양처 침수, 경남 자동차선 두절(부산지국 오후 5시 50분 지급전화)




1934년 7월 23일자 2면




영남 호남의 수재지로 본사 구호반 출동


“이 재해의 급보를 접한 본사에서는 시각을 지체치 않고 위선 독자 여러분에게 이 현상을 알려드리는 동시에 재해 현장으로 특파원을 보내어 시시각각으로 범람되고 있는 홍수의 피해 상황을 알리는 한편으로 재해지 낙동강 연안과 영산강 연안의 이재민을 시급히 구호코저 연안 각 지분국장과 본사원이 구호반을 조직하여가지고 구호작업에 착수하였습니다.”


삼남 수재구제비로 본사 5백원 연출, 사원이 휴대코 재지 출동

“본사에서는 일금 5백원을 제공하여 현금과 약품 기타를 사원이 가지고 떠났다.” 




1934년 7월 24일자 석간 2면




삼남 수재의연금


(7월 23일 오전 접수분)

금 93원 동아일보 사원, 공장원 일동

금 100원 시내 신기신성당약

영신환 1천포 품직수입주식회사

금 100원 시내 계동 김성수 씨

금 100원 성북리 김연수 씨

금 50원 무교정 광덕상회 현용건 씨

금 20원 해동은행원 일동

광목(불로초) 10필 경성방직회사…(후략)  




1934년 7월 24일자 조간 2면




재지(災地) 정형(情形) 절박으로 재차, 천원을 급송,

미력도 불고, 본사 표성의 일등, 본사 제3구호반 금강 재지로 급행




1934년 7월 27일자 조간 2면




활사(活寫)면에 어린 수만관중의 동정루(同情淚),

본사 촬영 삼남 수재 영화 제1보


삼남 수재 활동사진 각 극장 무료 공개

“제1보를 보지 못하신 40만 장안 관심 가지신 여러분을 위하여 본사는 27일 낮에 전기 각 극장을 공개하여 일반에게 보여드리기로 되었다.”


삼남수재활동 상영회는 지국과 분국 주최로도 열렸습니다.


   삼남재민구제 영화회(춘천 8. 5~6)

   수해구제 예술의 밤(남해 8. 24)

   삼남수해구제 영화회(경서 9. 7~8)

   수해구제 현제명 독창회(대구 9.8)


삼남 수재 구호활동 중 태풍이 서일본(西日本)지역을 맹습해 피해가 속출하자 그 지역 동포들 돕기에도 나섰습니다. 




1934년 9월 23일자 석간 2면




피해가 우심한 대판(大阪)에 본사에서 5백원 의연,

이재민 응급구호사업에 쓰도록 본사 대판지국에 현송(現送)


“서 일본지대를 돌연 엄습한 태풍으로 인하여 부근의 피해는 연일 보도하는 바와 같이 풍재로는 공전의 대참상입니다…(중략)…더욱이 노동자 등 세민계급이 많은 곳이요 따라서 재류 조선 동포도 가장 많은 곳임으로 피해도 막대합니다…(중략)…본사에서는 현금 5백원을 본사 대판지국에 보내어 적당한 방법으로 이재민 구호사업에 쓰도록 합니다.”




1934년 9월 29일자 조간 2면




대판(大阪)조선인 피해 판명,

사상 8백40명, 본사 구호 조사대 활동 조사결과, 도괴 가옥 1천8백여호


“(대판에서 본사지국장 김정국 전화) 금번 서 일본 일대를 휩쓴 공전의 대 태풍 폭우로 말미암아 대판(大阪)지방에 산재한 조선인의 받은 피해는 실로 막대하였었다. 본사 대판, 동경 양 지국에서는 대 참재가 발생한 이래 구호 조사대 10대를 조직하여 지국원과 각 단체까지 총동원을 시켜 대판시와 계시(堺市) 일대에 긍하여 구역별로 재류 조선인의 피해 상황을 조사하였던 바 그 결과 판명된 숫자는 인명 사망이 847명, 가옥 파손이 1천887호에 달한다는데 상세한 것은 아래와 같다고 한다.”




  삼남 수해구호금 결산은 다음해 1월 이루어졌으나 구호금 결산 이후에도 의연금이 접수됐습니다.




1935년 1월 9일자 조간 4면




삼남수해구호금 수지결산 보고



수입지부

일, 금 3만3417원 95전,   일반의연액

일, 금      1500원,           본사의연액

일, 금        676원 91전,  추후 본사원 부담액

계  금  3만5594원 86전

일, 물품 7만809점




“누계 150원 48전” (1935년 1월 19일자 조간 4면, ‘삼남수재구제금 결산 후 수입분’)


“하와이 주재 본보 통신원이 얼마 전에 본사에서 박은 삼남수재의 활동사진을 가져다가…(중략)…1백14원 78전을 본사로 보내었다.” (1935년 3월 27일자 석간 2면, ‘본사 특사<特寫>의 삼남 수재 활사를 본 포와동포, 참경 보고 갹금 기탁’) 




 1936년 8월 홍수 피해 예고는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개가(凱歌) 소식 다음날 호외로 알렸습니다. 손 선수의 개가 소식을 8월 10일 두 차례의 호외로 알렸던 동아일보는 8월 11일 오후 4시 20분 시시각각 불어나는 한강 물 때문에 마포의 제방 수문을 열기로 했다는 호외를 발행했습니다.




1936년 8월 11일자 호외




마포제방수문 개방 탁류는 마포에 범람,  상류지방 폭우 계속 한강 연안 각각 위험


1936년 8월 12일자 호외, 서강에 탁랑(濁浪) 도도

“금일 오전 10시까지 침수된 가옥이 2백50호로서 피난민 3백여명은 엡윗학교와 서악여학교 서강예배당으로 피난 중이고 본사 구호반은 이곳에 출동하여 방금 응급구호에 착수 중이다.”


본사 구호반 출동, 응급적으로 식량 배부

“본사에서는 금 12일 새벽 응급으로 구호반을 조직하여 본사 서무부장 김철중씨 인솔하에 일대는 수해가 가장 심한 왕십리, 뚝섬 방면에 출동하여 식빵 기타를 배급하는 중이오 또 한 대는 강준표 씨를 필두고 사원 다수를 출동시켜 응급에 착수하였다.”  




1936년 8월 13일자 조간 2면  


영주 이산면에 수란(水亂) 6백 재민 산중 피신



 서강, 독도재민의 식사 공급에 주력, 본사 구호반 양대 활동

본사 구호반 서강대 김승문 김용판 이창재 강준표 김관호

                  독도대 김철중 고재섭 이주호 김우성 김병환 고정섭 김권동

수해화보: 상(上)은 서강에 탁류 집들을 삼킨 광경, 중(中)은 서강재민에게 본사 구호반이 식량 분급, 하(下)는 독도재민에게 주먹밥 배급.




1936년 8월 14일자 석간 2면 




중부 이남을 유린한 수마(水魔)의 참적(慘迹)


수해화보: 상(上)은 감수되는 침수지대(원정), 중(中)은 피난민의 독도재민, 하(下)는 격랑을 무릅쓰고 구호에 활동하는 본사 구호대.


  동아일보는 사회사업협회의 구제사업 통제로 민간 구제활동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질타하는 내용의 1면 사설을 싣기도 했습니다.


1936년 8월 16일자 조간 1면 사설, 민간 구제활동을 제한치 말라

“중남부 조선은 바야흐로 수국화(水國化)하고 있다…(중략)…그러나 이제 우리는 사회 동정을 토대로 한 신속한 구제활동을 하려할 때에 뜻하지 않았던 억제를 당하고 있음을 유감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구제활동은 그 얼마나 거창스러운 형식의 구애를 밟고 있음인가?…(중략)…사회사업협회는 민간사회사업을 통제한다는 그 목적을 달성하였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결과로 본다면 사회 방면의 상호부조의 활동을 거의 대쇄(對鎖)시키고 말았다는 것을 당국에서는 깨닫지 못하는가?…(후략)”


  1933년 영남 일대 대홍수 때 부산에 특파됐던 이길용 기자가 다시 삼랑진으로 갔습니다.




1936년 8월 17일자 호외




시급한 구호를 기다리는 재지의 참경


본사 구호대 재차로 구품 갖고 재지 삼랑진에

(삼랑진에서 본사특파원 이길용 발전) 삼랑진의 참상은 차마 볼 수 없는 형편으로 본사에서는 각처에서 모여든 구제 의복과 약품을 재지에 나눠 주었다. 그러나 창해일속의 구급책에 불과한 것으로 기한에 우는 재민을 보고 있지 않을 수 없는 참혹한 형편이다. 본사 구호대는 일단 부산으로 내려가서 부산 구호본부와 협의를 한 후 다시 만반의 준비를 하여 가지고 다시 오늘 아침에 재지로 향하였다. 재지의 시금한 것은 주림이요 떠는 것이다. 이에 응하고자 본사 특파원과 부산 구호대가 식량을 준비하여 가지고 현장으로 출동하였다.


1936년 8월 19일자 석간 2면, 삼랑진에 2차 구제 2천4백명에 식량 배급, 본사 구호반 벽지로 출동

(삼랑진에서 본사특파원 이길용 발전) 우리 구호 위문반은 제2의 구제에 착수하여 부산 본사 구호본부로부터 강 특파원과 밀양지국 김 특파원 등의 응원하에 부산으로 부터 보낸 식량품인 쌀을 2천4백 명에게 분배하였다.  


1936년 8월 20일자 석간 2면, 본사 낙동강 수해이재민 제2차 구호위문품 식량 운반(상) 오지 밀양 상남면 외산리 501호에게 분배하는 광경(하) 본사특파원 강대홍 촬영


재해의 벽지 찾아서 위문, 미력의 구호 – 본사 구호반의 활동

(삼랑진에서 본사특파원 이길용 발전) 본사 구호 위문반은 낙동강 연안의 오지를 일일이 배로 본사의 응급구제인 식량을 이재민들에게 분배하고 무사히 저녁 8시에 삼랑진에 돌아왔다. 이것으로서 응급구제를 마친 우리들에게 이재민들은 감사에 넘치는 눈물을 흘리면서 “언제든지 동아일보의 감사는 잊지 못하겠으며 이런 때의 한되 쌀은 평상시에 백석보다 효과 있다”는 감사의 말을 하였다. 그리고 우리들은 부모 형제와 가산을 잃어버린 이재민들에게 충심으로서 조의를 표하였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구호사업은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정간을 당하는 바람에 중단됩니다.




1936년 8월 19일자 석간 2면 사고




수해구제금품모집



“남 조선지방 급(及) 중부 조선지방의 수해구제의연금모집에 관하여서는 18일 각 관계자가 집합하야 재단법인 조선사회사업협회가 주체로 재경(在京) 각 일간신문이 후원키로 되었는데 모집요항은 다음과 같다.”  




1936년 8월 20일자 조간 2면, 본사 제2차로 낙동강 수해이재민 구호위문대 활동 화보

(상) 위문구제미를 운반, (중) 본사 구호위문선 출발, (하) 제1착으로 밀양 상남면 외산리에 위문선 상륙 (본사특파원 강대홍 촬영)


본사, 구제비로 3백원 연출

본사에서는 이번에 조선 10도에서 큰 재해를 입은 수해이재민 구제에 당하여 미력이나마 3백원을 연출하기로 하였다.




  정간 해제 이후 1938년 8월 관북 일대에 수해가 나자 동아일보는 또다시 나섰습니다. 수해 현장에는 사회부 이강성(李康成) 기자를 특파했습니다. 그러나 총독부는 소극적이었습니다.


“우리는 금반 관북 수재에 대하여 일반의 동정과 당국의 선처를 지적한 바 있거니와 수해를 당할 때에 병마의 발호를 경계해야한다는 것을 또한 들지 않을 수 없다.” (1938년 8월 19일자 조간 1면 사설, ‘재해와 병마’)


“도도한 탁랑, 초목 한 폭 없는 무의지에서 양도두절 음료 고갈로 외치는 재민(災民)의 참경을 상기할 때 그 누구나 샘물솟듯하는 감정을 느끼리다. 그것이 ‘정’이다.” (1938년 8월 20일자 석간 1면, 횡설수설)


“수해가 더 확대되지 않는 한 적극적으로 조선사회사업협회가 주최가 되어 의연금품은 모집하지 않고 민간에서부터 자진하여 들어오는 것만은 취급할 것.” (1938년 8월 20일자 석간 2면, ‘재해기금제도 – 이번 수해에 처음 운용’)




1938년 8월 21일자 조간 2면  




정평군하의 참절한 화보(禍報), 사망자 1백50여명 침수 가옥 5천여호


수화(水禍)의 관북답사기 본사특파원 이강성


  이 같은 동아일보의 적극적 보도는 의연금 모집으로 이어졌습니다.


“함남북 수해로 하여 여러 가지로 곤경을 당하는 주민들을 위하여 관민협력으로 구제에 노력 중인데 시내 유지 한 분은 이 정경에 감격된 바 있어 손수 곤궁 속에서 짜낸 돈 2원을 가지고 본사로 찾아와서 관북 수해구제금으로 써달라고 하고 돌아갔는데 특히 이름은 말하지 아니했다.” (1938년 8월 28일자 조간 2면, ‘관북 수해의연금 무명씨 본사 기탁’)


“(평양) 30, 40년에 처음이라는 관북 수해에 수많은 이재민의 참상은 실로 처참한 바 있어 각지에서의 동정은 답지하고 있는데 지난 28일 본보 평양지국에는 한 청년이 금 8원 65전을 가지고 와서 우리 동무 10사람이 한푼한푼 모은 것이니 얼마 안되지만 기아에 떨고 있는 관북재민들에게 보내달라고 하면서…” (1938년 8월 30일자 조간 2면, ‘무명의 청년 재민에 동정, 본사에 일금 의탁’)


“사회인사의 이재동포에 대한 동정도 날로 우합운집 상태. 그러나 이 동정은 부유계급에서 보다도 빈궁층에서 더 많이 우러나온다. 일례를 들자면 자기네의 성명도 알리지 않고 10인 동무가…” (1938년 8월 31일자 석간 1면, 횡설수설)     




1938년 9월 1일자 조간 2면 사고   


관북 수해의연금 모집



 “금하(今夏) 함남, 함북 일대와 평남 일부 지방을 맹습한 호우로 인하야 인명의 사상, 가옥의 류실, 도궤, 침수, 경지의 유실, 매몰과 각종 농작물, 도로, 제방, 교량 등의 피해는 의상(意想) 외로 막대한 바 있고 이재민의 참상은 연민 동정을 금할 수 없다는 실상에 감하여 좌기와 여히 수해의연금을 모집하기로 되었습니다.”




“지난 1일부터 일주간 계속된 호우는 중부 조선지방으로 폭주하여 오랫동안 계속 한발을 해소시켰을 뿐 아니라 한걸음 넘어가서 처처에 홍수난을 일으키어 인명의 사상과 가옥 도괴, 전답 매몰 등의 피해가 적지 않았다.” (1940년 7월 14일자 조간 2면, ‘인명의 피해 1백여명 유실 가옥 7백여, 침수 7만여호, 전 조선의 수해 피해’)


“(대전) 7월 7일 이후 말일까지의 충남 도내 강우는 드디어 수확을 이루어 인축의 사상 주택의 피해 경지의 손실 교통기관의 파괴 산야의 붕괴 등 산붕지탁의 각 방면에 미친 피해는 실로 막대하여…” (1940년 8월 9일자 조간 2면, ‘충남도내의 수해, 6백만원대 육박’)


 1920년 4월 1일 창간 이후 계속된 동아일보의 이재동포 구호사업은 중부지방의 수해소식을 1940년 8월 9일자에 마지막으로 전하고 8월 10일 강제폐간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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