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동아를 마치 한민족의 대표기관처럼 대접해 주었다’ (김동성 창간 기자, ‘초창기를 말한다’ – 동우<東友> 1963년 6월호 5쪽)


‘한 개의 언론기관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다른 어떠한 절대 기관이라는 것이 더 타당했을 거예요’ (유광렬, 사사 1권 112~113쪽)  


‘형태 없는 정부의 역할을 했다’ (최준 중앙대 교수, 동아일보 1981년 10월 6일자 6면)


‘일제시대, 그 당시에는 동아일보를 한국의 정부로 생각했었다’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 동아일보사, 1985, 374쪽) 




 동아일보는 1922년 2월 27일 재외동포위문회를 발족시켰습니다.  만주, 사할린 등지로 강제이주 당한 동포, 호구지책이 없어 하와이 사탕수수밭, 미주 등지로 떠나간 해외 동포들을 생각하자는 취지였습니다. 나라 없는, 그래서 그들을 돌볼 정부도 없는 상황에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곳은 민족지를 표방한 동아일보 밖에 없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동아일보가 특별 제작한 <워싱턴 군축회의> <호놀룰루 세계기자대회> <재외동포의 활동상> 환등회를 열고 청강(聽講) 동포들로 부터 입장료(갑 1원, 을 50전, 학생 30전)를 받아 수입금 중 경비 외 금액은 모두 해외동포를 위해 사용하며 3원 이상을 희사하는 동포는 신문지상에 게재한다는 사고를 내고 1922년 3월 6일 신의주를 시작으로 5차에 걸쳐 10개월간 85개 지역에서 이뤄진 이 캠페인에 당시 반향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6만명이 넘는 청중이 몰렸고 4천여명이 특별회비 3원 이상을 냈습니다.


  송진우 당시 사장은 “재외동포 위문금으로 13도 방방곡곡을 도라다니면서 우리들 여럿의 손으로 현금 3만원을 거두어 노키는 1922년의 일이엇슴니다…(중략)…우리가 가는 곳곳마다 지방 일반 인사의 열성이 대단하야서 연설 중도에 감(感)이 극(極)하야 제머리에 꼬잣든 비녀와 반지 등을 뽑아 노키는 비일비재이엿고 또 몸에 가진 돈이 업스면 집에 달려가서 의롱(衣籠)을 둘처 앗기어 두든 갑가는 저고리, 반지까지 내어다가 해외에 보내달나고 진정으로 우리에게 맛기어 주든 때외다. 그리고 해참위고, 상항, 포규 등지에 잇는 재류(在留)동포들이 경영하여가는 기독교회나 학교나 유치원 등의 활동사진을 놀닐 때마다 장내는 끈임업시 박수와 환호로 일관하엿든 것이외다. 생각건대 해내형제가 재외동포를 이러케 대중적으로 위문하여 본 일은 전무하엿든 일임으로 주최자와 민중의 의사가 동일점에서 이와가티 가관(可觀)스럽게 연소(燃燒)되고 잇엇든 것인 듯 하외다. 나는 지금도 기억함니다. 우리 일행이 가는 곳곳마다 정차장에는 수천군중이 마종 나와 주든 일을, 더구나 영광가튼 곳을 갓슬 때는 만여명이나 되는 그 지방 여러분이 열을 지어 풍악까지 잡히면서 먼곳까지 마중 나와 주든 일을, 때마츰 삼복(三伏)으로 그해 녀름은 덥기도 꾀합데다만은 나는 ‘와이쌋즈’ 여러 벌을 가지고 도라다니면서 땀에 저저 못입게 되면 다른 것을 밧구어 입고 밧구어 입고 실로 더운 줄도 다리 압픈 줄도 모르고 도라다녓슴니다.” (송진우, ‘재외동포와  번역’, 삼천리 1931년 4월호 17~18쪽)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워싱턴 군축회의> <호놀룰루 세계기자대회> <재외동포의 활동상>을 담은 영상물은 호놀룰루 세계기자대회와 워싱턴 군축회의를 취재한 김동성(金東成) 조사부장이 맡아 설명했고 송진우(宋鎭禹) 사장과 장덕수(張德秀) 주필은 <재외동포 위문에 대하여> <민족 발전에 관한 것> <조선 민족의 진로>에 대해 열변을 토했습니다.


  민족적 자각을 일깨우는 이 캠페인에 일제는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1922년 4월 20일자 3면 ‘삼천포 창유(創有)의 성관(盛觀)’, ‘주의(注意)! 전문(專門)의 삼천포 경관’ 제하의 기사는 “당지 경찰의 태도는 매우 거저 볼 수 없었다. 일행을 환영하는 자동차도 경관이 강제적으로 뚫고 들어와서 조사를 하며 강연을 할 때에도 변사(辯士)는 ‘주의’ 하라는 소리를 연하여 부르짖었다. 그 예를 들면 서양 역사를 말하여 조선 사람도 노력만하면 문명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에도 ‘주의’를 하라 하고 조선인의 긴절한 문제는 교육이라고 하는 때에도 ‘주의’를 부르짖고 사해(四海)는 일체이다, 서로 사랑하고 단결할 것이라고 하여도 역시 ‘주의’라고 소리를 친다. 이에 대하여는 연사 장덕수씨도 어찌할 수 없이 기가 막히는 모양이었으며 이와 같이 몰상식한 경관에 대한 비난의 소리는 회장에 가득하였더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1922년 2월 27일자 1면  사고(社告)




 ‘찬(贊)하라 차(此) 민족적 초유의 일대 정신사업에 전조선순회 환등영사 대강연회 – 내(來)하라 아(我) 동족상애의 자각을 촉(促)하는 집회에’ 


“가깝게는 만주 노령에, 멀게는 미주에까지 이주해 있는 우리 조선 동포 수백만을 위로하는 사업을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세계군축회의(워싱턴) 및 세계기자대회 관련 사진과 해외동포들의 활약상을 촬영한 사진으로 전조선순회환등영사회를 개최한다. 이 영사회의 수입금은 일체를 해외동포위문사업에 쓴다.”




  3월 4일자 사설에서 그 취지를 밝혔습니다.


  첫째는 해외에 진출하여 그 운명 개척에 노력하는 동포를 향하여 동정을 표하며 원조를 여(與)할 것이요,

  둘째는 문명을 수입하고 이상을 함양할 것이니…(중략)…일면(一面)에 재(在)하여는 널리 그 생을 세계에 접하고, 타면(他面)에 재(在)하여는 깊이 그 본(本)을 내지에 입(立)함이라.




1922년 3월 4일자 1면 사설   




국제적 조선 – 재외동포위문회 발기


 제1차 순강(경의선) 평안 황해 방면 17곳

 제2차 순강(경부선) 경상 충청 강원 경기 방면 30곳

 제3차 순강(호남선) 전라 방면 26곳

 제4차 순강(경원선) 함경 방면 11곳

 제5차 순강(제주) 제주 방면 1곳 


 ‘천여 청중의 열광’ (1922년 3월 15일자 3면)

 ‘동포를 축복하는 기행렬(旗行列)’ (1922년 3월 16일자 3면)

 ‘형제의 귀래(歸來)를 고대(苦待)’ (1922년 3월 24일자 3면)

 ‘후원회를 조직한 울산’ (1922년 4월 10일자 3면)

 ‘민족적 대동원으로’ (1922년 4월 15일자 3면)

 ‘입회자 백삼십명’ (1922년 4월 16일자 3면)

 ‘음악대로 대선전(大宣傳)’ (1922년 4월 18일자 3면)




  1922년 4월 20일자 3면




삼천포 창유(創有)의 성관(盛觀)


손에 기를 들고 수백명이 환영

삼천포 개항 이래 처음 대성황

17일 오전 11시에 자동차를 몰아 사천에 도착하였는데 삼천포 분국장이 음악대를 자동차에 싣고 기를 달고 맞아주었다. 인하여 악대를 앞에다 세우고 주악을 하면서 70 리를 진행하여 오후 2시에 삼천포에 도착한즉 청년회 보통학교동창회원과 노유 수백 명이 각각 손에 기를 들고 길가에 늘어서서 환영의 뜻을 표하였다. 이와 같은 열심을 볼 때에 일행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아니치 못하였으며 청년회관으로 들어가서 잠깐 쉰 후…(중략)…학교 마당에서 기념으로 사진을 박히고 9시부터 그 학교 마당에 특별히 설비한 회장에서 당지 청년회 평의원 강상기 씨 사회 하에 음악으로써 개회하여 경성에 유학하는 학생의 4부 합창이 있은 후 환등을 영사하였는데 박수갈채가 계속하여 일어나며 감동이 매우 깊은 모양이었다. 10시 반에 마치고 여학생의 합창이 있었으며 계속하여 회원을 모집하였는데 백 여명의 응모자가 있고 11시부터 희망과 조선이라는 연제로 12시가 지나도록 강연을 하였는데 청중은 약 1천5백 명이오 회장에는 입추의 여지가 없고 당지 개항 이래 처음 보는 대성황을 이루었다…(중략)…더욱이 당지 유지 윤진권 씨와 같은 이는 이번에 여러 가지로 사용한 자동차의 비용을 전부 부담하겠다는 성의를 보인 것은 진실로 감격하는 바이다. 


  ‘신기록의 입회수(入會數)’ (1922년 4월 21일자 3면)

 ‘화경(畵景)가튼 함양 연도(沿道)’ (1922년 4월 23일자 3면)

 ‘백지(白紙)로 유명한 거창’ (1922년 4월 24일자 3면)

 ‘원래(遠來)의 관중도 다수’ (1922년 4월 25일자 3면)

 ‘도처(到處) 신기록의 성황’ (1922년 4월 27일자 3면)

 ‘안동고보(安東高普) 기성(期成) 팔군(八郡)의 연합으로’ (1922년 5월 2일자 4면)

 ‘만장에 심심(深甚)한 감동’ (1922년 5월 4일자 3면)

 ‘유지와 청년의 찬조로’ (1922년 5월 5일자 3면)

 ‘희망 만흔 천안의 장래’ (1922년 5월 6일자 3면)

 ‘우천(雨天)을 모(冒)하고 십리에‘(1922년 5월 8일자 3면)

 ‘여주에도 역시 성황’ (1922년 5월 10일자 3면)

 ‘호남 방면의 강연대’ (1922년 6월 2일자 3면)

 ‘청중 칠백여명’ (1922년 6월 7일자 3면)

 ‘죽공 으로  유명한 나주’ (1922년 6월 9일자 3면)

 ‘팔개단체후원으로’ (1922년 6월 11일자 3면)

 ‘민족의 장래를 통론’ (1922년 6월 12일자 3면)




 1922년 6월 14일자 3면




육백호에 청중 천명


비상히 환영받은 능주 지방

11일 오후 6시에 능주(綾州)청년회원과 유지들은 위문회의 기를 임시로 만들고 조선음악대를 선두로 백여명이 출영하는 중에 이곳에 도착하여 뒤를 이어 청년회의 환영회가 있고 청년회장 조순기 씨의 식사와 송진우 씨의 답사가 있었다. 11일 오전 12시에 이곳 영벽정에서 유지의 다과 향응이 있었고 그날 오후 10시에 청년회 운동장에서 육영학교 여학생의 4인 합창으로 강연회를 연 후 회장 조순기 씨의 개회사가 있고 김동성 씨의 환등이 있고 신구범 씨의 위문회에 대한 설명이 있고 뒤를 이어 조선민족의 2대 방책이란 연제로 대략 한시간반의 강연이 있었는데 입장한 사람은 천명이라. 이곳 호수가 6백호인즉 매호에서 한사람 이상의 입장자가 있었다. 이곳은 노인과 청년으로 부인들까지 열렬한 동정으로 위문회의 사업을 환영하며 이곳 청년회의 경영하는 사업은 육영학교와 여자야학교라 이곳은 산수도 좋고 사람의 기상도 좋더라.(능주 전보)


 ‘산수명미한 보성’ (1922년 6월 15일자 3면)

 ‘육백명의 환영단’ (1922년 6월 16일자 3면)

 ‘중학 설립을 계획하는’ (1922년 6월 18일자 3면)

 ‘악대를 선두로 환영’ (1922년 6월 20일자 3면)

 ‘도처에 여일(如一)한 성황’ (1922년 6월 21일자 3면)

 ‘청중 천여의 성황’ (1922년 6월 24일자 3면)

 ‘호남로의 최대 성황’ (1922년 6월 25일자 3면)

 ‘감우중(甘雨中)에 대성황’ (1922년 6월 27일자 3면)

 ‘거군일치(擧郡一致)의 열성’ (1922년 6월 29일자 3면)

 ‘화환에 응결(凝結)한 열성’ (1922년 6월 30일자 3면)

 ‘고창지방의 위문강연회, 입회한 유지가 백삼십명’ (1922년 7월 3일자 3면)

 ‘다수 단체의 응원으로 셩황을 이룬 이리의 강연’ (1922년 7월 4일자 3면)

 ‘청년의 열성환영’ (1922년 7월 5일자 3면)

 ‘군산의 전항(全港)을 거(擧)하야 녈열한 위문회 사업의 찬조’ (1922년 7월 7일자 3면)

 ‘우중(雨中)도 불구하고 성황’ (1922년 7월 9일자 3면)

 ‘재외동포위문강연 계속’ (1922년 11월 17일자 1면)

 ‘민족적 경륜을 역설’ (1922년 11월 22일자 3면)

 ‘생우(生牛)로  유명한 길주’ (1922년 11월 28일자 3면)

 ‘생명의 로(路), 멸망의 로(路)’ (1922년 11월 30일자 3면)

 ‘수재(水災)에 이(罹)한 영흥에도’ (1922년 12월 4일자 3면)

 ‘폭풍한설을 불구하고’ (1922년 12월 6일자 3면)

 ‘숙신구도(肅愼舊都) 북청에서’ (1922년 12월 8일자 3면)




 1922년 12월 29일자 3면




탐라의 고국(古國), 제주에


천여명의 유지가 모이어

성황을 이룬 위문회 강연

재외동포위문회 순회 강연단 일행은 최후로 지나 18일 제주도를 향하여 떠났다. 겨울일기의 불순으로 선편이 늦어 목포에 4일간 두류하다가 23일 오전 2시경에야 비로소 제주성의 산지포에 도착하매 밤이 깊고 풍파가 심함을 불구하고 다수한 유지 제씨가 특히 후원회를 조직하여 종선머리에 환영등을 앞세우고 일행이 탔던 기선의 갑판위에까지 마주나왔다. 그날 곧 23일 오후 7시에 성내 관덕정에서 후원단장 홍순완 씨의 사회아래 강규언 김재선 양씨의 합창으로 막을 열고 곧 환등을 영사하였으며 송종현 씨의 독창이 있은 후 사회발전의 근본요소라는 문제로 장덕수씨의 열변이 있었고 홍군표 씨의 독창으로 10시에 폐회하였는데 청중은 약 천 명이오 입회원은 백여 명에 달하였다. 이 지방에서 강연단 일행이 오기를 고대한 지 오래였고 여러 단체에서 후원단까지 조직하였는데 참가한 단체는 제주청년수양회 부인회 기독교청년회 탐라협회이었었다.…(중략)…청년수양회에서 여러 가지로 문화운동에 노력하여 한편으로 흥학회를 조직하여 명신학교를 경영하는데 학생이 3백50명이며 소비조합을 경영하려는 계획이 성립되었다. 제주 전도의 인구 20만중에 그 반은 여자이지마는 근육노동에 제주여자는 남자에 비하여 손색이 없음으로…(중략)…금년 여름에 우리 동포끼리 상선회사를 조직하여 자본금 15만원으로 기선 2척을 사서 부산왕래에 종사하는데…(중략)…제주도와 같이 보천교도가 많은 지방이 드물다는데 지금 2만여 명에 달한다하며 제주감옥의 철창아래에는 괴이한 인물이 복역을 하는 중이라는데 독립운동이 발발하든 전해에 제주도내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정무까지 조직하여 자칭 불무황제란 사람이 곧 그 인물이다.(제주)   




1922년 6월 11일자 1면 기고




재내 동포에게 감사하노라 – 재 상해(上海) 옥관빈(玉觀彬)




 1922년 7월 30일자 1면 사설




남선형제(南鮮兄弟)에게 감사하노라 – 재외동포위문회를 대(代)하여




 1923년 8월 7일자 3면  




본사 주최 재외동포위문회


사랑과 눈물의 결정이 3만500여원

본사의 이 계획을 찬성하신 동포가 4만290여 명

동포위문 실행 방법은 목하 신중 조사 중


“만리 해외에 나가서 고생하는 동포를 위하여 본사에서 해외동포위문회를 발기하기는 작년 3월 20일 경이었다. 그 후 1년 4개월 동안에 본사에서 어떻게 하든지 많은 동포의 따뜻한 정의를 모아 길고 긴 고리줄을 모아가지고 국내국외에 퍼져 있는 2000만 동포의 맘과 맘을 마주 연결하고자 노력한 결과 이제 사무의 한 단락을 마치고 이를 발표하게 됨은 독자 여러분과 같이 기뻐하는 바이다.”


이때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재외동포위문회 성금 중 2천500원으로 구호품을 사 민족의 이름으로 동포들에게 전달했습니다. 




 1923년 9월 21일자 3면 




화물선 탄고(炭庫) 일우(一隅)에 고충분투(苦衷奮鬪)의 본사 특파원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게 어떻게 했는지, 상상할 수 없는 참상은 아래 기사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1923년 9월 1일. 일본 동경을 중심으로 이른바 관동지방에 대지진이 발생했다. 일본인들은 한국인이 이 지진을 이용,폭동을 일으켜 방화 강간 살인 등을 자행하고 심지어는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려 동포들을 감금 학살했다. 동아일보는 이 현황을 취재할 겸 재일동포를 위문키 위해 당시 편집국장 이상협을 즉각 현지로 특파했다. 먼저 대판(大阪)에 도착한 그는 면보 일만이천오백개, 통조림 칠천삼백개, 사이다 이천사백병 및 이만이천백 섬의 식량품들을 사서 천향환(千香丸)편에 싣고 9월 5일 자신은 이 배의 석탄고속에 몸을 싣고 요꼬하마에 도착했다. 폐허가 된 요꼬하마 동경가도(東京街道)를 도보로 통과 계엄령하의 동경에 도착했다 (9월 10일). 그때부터 그는 취재와 위문활동을 병행시키며 위문품을 전달하고 고국에 귀환하려는 이재동포의 교통편 주선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우리 동포 중 임신부의 배를 일본도로 잘라 그 속의 아기 모양을 보겠다는 일본인들의 만행을 비롯, 이모저모에서의 일어나는 한국인 피살 광경을 낱낱이 보았다. 일본 관원은 이것이 보도될까 두려워 북간도 혼춘사건때 특파되었다가 행방불명이 된 본사 장덕준씨 때처럼 그를 없애려고했다 한다. 그는 총독부보다 먼저 재일교포의 안부 조사명단을 6차례에 걸쳐 보내왔으며 일본의 만행을 폭로 했다” (1970년 4월 1일자 21면 창간 특집 ‘관동지진과 학살 – 이상협’)




1923년 12월 11일자 1면 사설




밖에 계신 동포께 (재외동포위문회에서)


본국은 지금 더할 수 없는 경제곤란 중에 있습니다. 어떻게 금년 세말을 넘기나 금년말에는 또 많은 동포가 혹은 상점문을 닫히고 혹은 은행과 회사에 전당 잡혔던 논밭을 빼앗길 것이다. 본국서는 지금 이러한 근심 속에 잠겨 있습니다. 듣사온 즉 서북간도에 계신 동포들도 금년의 수재로 조상강으로 그 구차한 농사지은 것조차 다른 해만도 못하다하며 아령 계신 동포들도 혹은 일본군대 때문에 혹은 백군 혹은 적군 이 모양으로 연방정치가 변하기 때문에 오륙십년동안 모처럼 벌어놓았던 재산도 많은 손해를 당하였다하며 하와이와 아메리카 각지에 계신 동포들도 대전 후에 노동시세가 떨어져서 많이 고생하신다 합니다. 하물며 상해 북경 각지에 흩어계신 여러 지사들의 곤경이야 말해 무엇하리까.…(중략)…정치적으로 생명을 잃어버린 우리 민족은 장차 경제적으로도 생명을 잃어버리려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울기를 그칩시다.…(중략)…진실로 우리의 민족적 대사업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중략)…첫째 우리는 뭉쳐집시다.…(중략)…둘째로 우리가 하여야할 일은 사람을 만드는 것이외다.…(중략)…그런데 이 전문가를 만드는 방법이 오직 둘이니 곧 우리가 각기 하나이 되는 것과 유위한 청년남녀에게 학교와 학비를 주는 것이외다. 셋째로 우리가 오늘부터 하여야할 일은 돈을 모으는 것입니다.…(중략)…우리가 위에 말한 세 가지만 준비하면 우리의 정치적 생활이 없어진 것이나 경제적 생활이 심히 위태하게 된 것이나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지막 승리는 힘 있는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중략)…우리는 밖에 계신 동포를 생각하는 정표로 적은 돈을 모아왔습니다. 비록 적은 돈이어니와 본국 있는 일천팔백만 형제자매가 밖에 계신 이백만 형제자매에게 사랑하고 촉망하는 정을 보이노라고 한푼 두푼 모은 것입니다.…(중략)…형제여, 기뻐하라, 하나이 되자, 힘을 쓰라!


  동아일보는 1924년 6월 18일 장장 12개면에 걸쳐 ‘재외동포위문회 경과 전말’을 실었습니다.




1924년 6월 18일자 별지부록 1면




재외동포위문회 경과 전말


(1면) 

재내 2천만 동포의 혈성을 합하여 재외동포에게

재외동포위문의 발기 이래 2년 반 동안의 경과 전말


 “재외동포위문회 발족 이래 2년 반 만에 그동안 조선 내의 동포 2000만이 혈성(血誠)을 모아 위문회에 보낸 위문금 모금 경과와 위문금 기탁자 명단을 전 조선 동포에게 보고합니다.”


발기동기와 계획 – 물질의 다과보다 사랑의 연결

성원 집중

교육기관에 기부키로 – 최초 계획 변경의 이유

감개전심(轉深)


(2면)

재외동포위문회 수지결산

재외동포위문금 배정액


(3면)~(12면)

재외동포위문회원 방명록




1924년 6월 18일자 별지부록 12면




재외동포위문회원 방명록


  재외동포위문회가 모금한 성금은 주로 해외동포 2세의 교육 사업에 사용되었지만 그 중 일부는  독립운동을 지원하는데도 쓰였습니다.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이승만에게 자금이 건네진 경우인데, 1923년 하와이 기독학원 모국방문단이 모금해 간 경우와 해외동포위문금 등이 이에 해당한다. (각주: 해외동포위문회는 하와이의 경우 한인기독학원에만 2500원을 기부했다.)”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296~297쪽)


 “상해에 있는 동포들은 벌써 그 돈을 받아서 인성학교의 발전을 위하여 쓰기로 되었었고 또한 만주와 중국 방면과 하와이에도 그 위문금을 보내어 재류동포의 아동교육을 권장하는 동시에 우리 재미동포의 아동교육을 위하여서도 불소한 금액을 보내셨다.” (‘동아일보와 해외동포위문회 아동 국어교육을 권장하여’,  신한민보 1924년 4월 24일자 1면)


“재주(在住) 불령선인단체인 교민단이 설립한 인성학교는 작년 여름 이래 가임(家賃) 문제로 휴교 중이었으나 전 교민단장 여운형의 실제(實弟)로 현재 경성에 있는 여운홍의 원조에 의해 조선 내에서 재외동포위문회 명의 아래 경성 동아일보사에서 벌이는 기부금 모집…” (불령단관계잡건<不逞團關係雜件> – 조선인의 부 – 상해 가정부<4>, ‘최근의 불령선인<不逞鮮人>상황에 관한 건’, 공신<公信> 제47호, 발송자 전중장태랑<田中莊太郞 상해 총영사대리, 발송일 1923년 1월 12일, 수신자 내전강재<內田康哉 외무대신>)




“조선민족운동연감(1924년)-1월 12일 상해 교민단 의사회개최 출석의원 8명 (의사) – (2) 동아일보에서 기증한 것 가운데 1천1백4십4원(元) 중 1천원을 교사 신축비 적립금으로, 잔금 1백4십4원은 교비로 사용하기로 결정.” (김정명편, ‘조선독립운동Ⅱ’, 도쿄, 원서방, 1960, 307쪽)


“한 가지 기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학원에 대하여 일화(日貨) 일천칠백원(元)의 보조금이 되었습니다. 그는 다른데서가 아니오. 제가 이 뜻을 춘원 군에 편지하여 동아일보사에서 모아 둔 재외동포위문회 돈을 좀 내어 보내어 달라고 하였더니 일천칠백원을 주기로 작정하였다 합니다. 그리고 이번 춘원 군이 북경까지 나와서 선생님을 뵙자고 한 고로 선생님께서 급히 가서 만나보았는데 아마 여러 가지 좋은 의론이 많았을 듯하오며 그 편에 일천칠백원 주겠다는 기별을 듣고 안 선생님(안창호 선생 – 인용자 주)께서도 삼백원만 더 채워 달라고 하셨다 합니다. 하여간 일칠수는 든든히 된 것이오니 우리 건축비는 거의 충수(充數)가 되겠습니다. 이제 더 생기는 점들은 더 완비하게만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우리 학원은 비록 규모는 작을지라도 순서양 문명식으로 모두 축조를 하여 모범을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한 욕심이올시다.” (차리석이 송종익 홍언에게 보낸 서신<1924.4.22>, 독립기념관소장 도산 안창호 자료) 




“합법적인 집회로서는 사상 미증유의 인원을 동원하였으니, 부산 등 몇몇 곳은 도시 창설 이후 최대의 집회였다고 한다. 여기에는 실행위원인 본사 각지, 분국장들의 노력의 결정이 있었다. 연동원 인원이 6만여 명이오, 입장료 수입만도 11,812원 5전, 입회원 4,886명에 입회금은 23,410원 81전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 중 입회금은 회원 신청시에 현금이 수금되기도 하였으나, 회원 신청은 해놓고 입금을 늦게 하는 이가 있어 순강이 끝나고 입회금 정리에 약 8개월이 걸렸다.이듬해 7월 28일에 본사에서는 임시중역회를 열고 모집금의 사용 방도를 논의한 결과, 당초 물품을 구입하여 해외동포에게 분배하려던 계획을 변경하여 교육사업에 현금을 배분해 주기로 결의하였다. 수지 결산과 국외 각지 교육기관에 배정한 금액은 아래와 같다.”  (최영식, ‘사사낙수 2 – 1922년의 본사 발기 재외동포위문회’, 25쪽)




위문금 각지 배정




  재외동포위문회 발족에 대한 당시 각계 반응. 


 “중국과 로서아에 있는 사람은 일본 영사관의 보호를 받는다 하나 실상 변변치 못하고 그렇다고 다른 조선 사람의 기관이 있어 보호하느냐 하면 그렇지도 못하여…” (조선인 변호사회 이승우 부회장, 혼춘사건에 감<鑑>하야, 동아일보 1922년 3월 3일자 3면)


 “생각하면 이것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그들을 보호하는 기관이 없는 까닭이겠지요.” (만주실업회사 김정식 사장, 만주의 표박생애<漂泊生涯>, 동아일보 1922년 3월 4일자 3면)


“우리 동포가 해외로 나간 것이 자연히 나갔던지 또는 무슨 강압에 못이기어 나갔든지 그것은 내가 지금 말할 수 없으나 하여간 3백만이라는 많은 수효에 달한 것은 사실이라…(중략)…하여간 아무 보호하는 기관도 없이 조선 사람 같이 남의 나라 사람 사이에 동정을 얻고 잘 싸이어 사는 사람은 없으니 이것이 우리 동포의 당처이라.” (중앙기독교청년회 윤치호 회장, 순연한 민중적 사업, 동아일보 1922년 3월 6일자 3면) 


 “제일 중요한 점은 우리 동족 사이에 사랑하는 생각이 깊어지고 이에 딸리어 사상이 통일되어 여러 가지 길로 나가던 사람이 한곳으로 보이게 될 것” (조선청년연합회 오상근 집행위원장, 재내동포의 숙원, 동아일보 1922년 3월 9일자 3면)


 “형식은 좀 다르지마는 역사 상에 우리 불교도의 손으로 이역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고생하는 동포 수천명을 건진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삼백여년 전 임진왜란 때에 우리 동포 중에 남녀 수천명이 일병에게 붙들려간 일이 있었습니다.” (조선불교회 박한영 이사, 위대한 사업을 축복, 1922년 3월 11일자 3면)


 “재외동포위문회. 동아일보사에서는 만주 노령 급(及) 미국 등지에 재한 아(我)동포의 생활 실상을 내지 동포에게 소개하며 또는 그들에게 상부상조의 동정을 여(與)하기 위하야 재외동포위문회를 조직하고 전조선순회 환등회 급(及) 강연회를 주최하야 5일로써 위선 양서(兩西)지방을 향하야 출발하다.” (일기자<一記者>, 사회 일지 – 3월, 개벽 제22호 1922년 4월호 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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