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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3년 6월 30일 동아일보가 주최한 제1회 전조선여자정구대회는 당시 조선 사회에서 ‘해괴한 짓’으로 여길만큼 경천동지할 파격이었습니다.  논란 끝에 ‘대회 장소에는 학부형과 대회 관계 임원 이외의 남성은 출입을 불허한다는 조건 하’에서 대회를 열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회가 열린 경성제1여고(정동 옛 경기여고 자리) 주변에는 2만여 인파가 몰렸습니다.




동아일보 1923년 7월 1일자 3면




  “특기할 것은 동아일보가 전국여자정구대회를 주최한 것이다. 그때만 해도 축구 야구 등 남자들의 경기만은 그런대로 발전의 길을 걷고 있었으나 아직도 짙게 남은 봉건적 인식 때문에 여자가 체육계에 나선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해괴한 짓으로 인정받는 때였었다. 이때에 동아가 감히 여자정구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은 여자 정구 그것 뿐 아니라 여자 체육 일반의 발전을 위해 획기적 시도를 한 것이다.” (김동철 창간기자, ‘구우회고실<舊友回顧室>’ – 내가 있던 시절, 동우<東友> 1963년 10월호 10~11쪽)




  “우리 한인 여성이 공개리에 정구대회에 출전한 최초의 시합은 1923년 6월 30일 동아일보가 주최한 조선여자정구대회가 시초였다. 아직도 당시 사회의 유교적인 인습은 여성의 공개 장소 출입 등 사회 활동을 금기시 했기에 이 대회에 대한 찬반양론은 분분했다. 이 대회를 주최하는 동아일보사에서는 대회전에 관계 출입인과 여학교 당국과 긴밀한 협의에서 대회 장소에는 학부형과 대회 관계 임원 이외의 남성은 출입을 불허한다는 조건 하에 이 대회는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 대회는 큰 용단이었으며 체육 발전에도 큰 공헌을 했지만 여성의 사회 진출과 지위 향상을 위한 계몽차원에서도 큰 몫을 한 사업이었다.” (한원영 전 문교부 장학관 · 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 심의위원장, ‘한국신문 한 세기’, 푸른사상, 2004, 483~485쪽) 




동아일보 1923년 6월 21일자 3면




동아일보 1923년 6월 28일자 3면




동아일보 1923년 6월 29일자 3면




동아일보 1923년 6월 30일자 1면 사설

“금번의 대회는 그 계획이 아(我) 조선 초유의 성사(盛事)이라 조선 여자 교육계는 물론이오 일반 사회의 주목을 야기케 하는 점에 있어서도 실로 중대한 의의가 있다 하노라…(중략)…원래 여자의 운동경기에 대하여 일종 호기시하며 또는 당목경첨의 견해를 지(持)하는 것은 벌써 시대에 뒤진 고루진부의 관념이라. 오인이 족히 치론할 가치가 없거니와…(중략)…시세의 조류는 만사 해결의 약건(열쇠)이라. 그 역행을 정(正)히하며 그 미몽을 각(覺)케 하는도다. 모성의 권위를 역창(力唱)하여 남자의 반성을 촉(促)하는 것과 직업의 기회균등을 주장하여 전 세계의 유발(有髥) 남자를 당약케 하는 일반 부인운동의 대세는 물론이라 심유의 규중에서 신 자각의 동경이 날로 촉진하는 현(現) 아(我) 조선의 여러 가지 현상은 어찌 시세변천의 반영이 아니고 무엇인가. 오인이 이 점에 있어 조선 장래의 신 여자계에 향도의 중임이 있는 일반 여학생의 자중을 절망(切望)하는 바어니와 먼저 모든 방면의 활동 기초가 될 체육의 수양에 심각한 유의를 촉(促)하고 조선 초유의 건괵(부인들의 머리쓰개)계의 운동이 금일에 개시된 것을 특필하노라.” 







동아일보 1923년 6월 30일자 3면




1923년 7월 2일자 3면




1923년 7월 3일자 1면





1923년 7월 제1회 여자정구대회(동아일보 자료사진)





흰색 유니폼을 입은 1923년의 경성여고 선수들(동아일보 자료사진)





머리를 길게 땋은 선수들(동아일보 자료사진) 




동아일보 1923년 7월 3일자 3면




동아일보 1923년 7월 4일자 3면




동아일보 1923년 7월 5일자 6면




2회 대회

1924년 6월 23일자 2면




3회 대회

1925년 6월 7일자 2면




4회 대회

1926년 5월 3일자 2면




  제4회 전조선여자정구대회를 본월(本月 – 5월) 중으로 개최하려 했으나 순종 국상(國喪)으로 연기한다는 근고(謹告)를 냈습니다.




1926년 9월 25일자 2면




1926년 9월 28일자 2면




본사 주최 제4회 전조선여자정구대회

북으로 평양 원산 남으로 공주 진주

북으로 남으로 전조선 여장부의 압잡이

열세군데 학교를 대표한 80여명 선수

신구(新舊)선수 80여명


참가학교

개성배화여고

개성호수돈(好壽敦)여고

경성이화여고

경성정신여교

경성여자고보

경성진명여고

공주영명여교

평양정의여고

경성여자상업

진주일신여고

원산공립고녀

경성제1고녀

경성제2고녀




1926년 10월 2일자 2면




호수돈 제2연승

배화와 남방양군 석패

필승을 다투는 여장부의 사기를 돕고저

창공에서 춤추는 비행기는 화환을 던져

비기난무(飛機亂舞)한 대회의 장관


여자정구화보

(상) 꽃같은 70여명 선수의 입장

(하) 남북이 다투는 대회장 전경




1926년 10월 3일자 5면




동아일보 주최

전조선여자정구대회 화보


1. 원산여고

2. 개성호수돈여고보

3. 평양정의여학교

4. 개성여고보

5. 경성여상

6. 경성진명여고보

7. 경성배화여고보

8. 공주영명여학교

9. 경성정신학교

10. 경성이화여고보

11. 진주일신여고보

12. 경성제2고녀

13. 경성제1고녀

14. 대회장 전경

15. 이화 전위(前衛) 손 마리아양의 맹타

16. 호수돈 후위 박순덕양의 서브 넣는 것

17. 열광하는 관중

18. 여자 심판원 송금황씨 




5회 대회

1927년 10월 1일자 1면




제5회 여자정구대회

신기록의 제일보


“본사는 각 관계자의 동의를 받아 금년부터서는 조선인 여자고등보통학교와 일본인 고등여학교 간의 구별을 철폐하고 합동하야 동등인 경기의 출발점에서 하게 한 것이니 앞으로도 재래와 같이 그 노력을 계속하면 세상을 놀내울만한 결과를 일우기에도 어렵지 아니할 것이다.”




1927년 9월 27일자 2면




남으로 북으로 각지의 정예

참가신청 십유여사(十有餘四)

가을 반도 운동계를 대표할

전조선 여자정구대회의 임박

여자정구대회를 앞두고 = 1


5년이란 세월이 짧다면 짧으나 조선의 여자 운동계로 보면 자못 격세의 느낌이 없지 않으니 그것은 본사 주최의 전조선여자정구대회가 밝히 말하는 바이다. 다섯해 전만 해도 조선의 여자 운동계가 적막하고 또 컴컴하였을 때이다. 이러한 때에 본사가 여러 가지 주위의 사정을 떠나서 단연코 전조선여자정구대회를 개최케 되었으니 이것은 반도 여자 운동계에 여명의 종을 외치기 비롯한 바이다. 이래 5년 동안 반도의 여자 정구계는 얼마나 진보되었는가? 이제 과거의 소장(消長)을 돌아보아 앞으로 열릴 제5회 대회의 조장에 한 도움을 바치고저 하는 바이다.


해마다 생장(生長)하는 대회

해를 거듭할수록 진보해

과거 수년의 소장(消長) 여하


맑은 바람 새롭게 부는 만추가절에 제5회 대회의 화려한 막은 열리게되었다. 10월 1일 오전 8시반부터 훈련 원두 경성운동장에서 거행한다함은 이미 예보한 바와 같거니와 금년의 참가학교는 작년의 우승교인 개성 호수돈(好壽敦)여자고등보통학교를 비롯하여 시내의 각 여자고보와 제1, 제2고등여학교가 거의 전부 출전케 되었으며 멀리 지방으로는 평양의 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와 원산의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와 남으로 진주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가 참가케 되었다. 원래 지난 22일까지 신청을 접수하기로한 지방학교의 신청 전문의 불명으로 확실한 발표를 후일로 미루나 전부 참가교는 실로 14학교라는 전에 없는 다수의 기록을 지어있어 대회 전부터 만도 호구가의 인기를 끌고 있는 터이다. 이제 과거 제1회부터 우승교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제1부

제1회 대회 진명여자고보

제2회 대회 경성여자고보

제3회 대회 경성여자고보

제4회 대회 호수돈여고보


◇ 제2부

제1회 대회 경성제1고녀

제2회 대회 경성제1고녀

제3회 대회 경성제2고녀

제4회 대회 원산고등여교


“거의 연중행사화한 동아일보사 주최의 제5회 전조선여자정구대회는 금년도 10월 1일로써 경성운동장에서 열니게 되얏다…(중략)…이날은 맛츰 10월 1일 ‘체육데-’엿다. 경성운동장에는 경성내 공사립 남녀학교 수만 명 학생이 총출동하야 연합경기 외에 체조, 딴스, 야구, 정구가 잇서 실로 장관 이상의 장관을 볼 수가 잇섯다. 게다가 여자 정구대회까지 겹해 열녓스니 남녀 관중이 여간 할 수 잇스랴!…(중략)…‘프로글람’을 어더보니 작으만치 열두 학교나 되는데 지방으로는 진주의 일신여고(一新女高), 평양의 정의여고(正義女高), 원산의 루시여고(樓氏女高), 개성의 호수돈여고(好壽敦女高)가 출진하얏고 京城으로는 리화, 진명, 정신, 용곡, 여상, 공립여학보, 제1여고, 제2여고가 출진하얏다. 기술의 진보는 엇던지 아직 모르나 참가교가 예년보다 만흔 것은 여자 정구계의 진보를 증명하고 잇다. 연래(年來)로 출진하든 숙명, 배화, 동덕의 그림자가 업는 것이 섭섭하얏고 그보다도 공주영명(公州永明)의 모시치마 적삼을 못 보게 된 것이 섭섭하얏다…(중략)…왼손잡이 이보패(李寶貝) 양은 관중에게 만흔 인상을 주엇다. 진명(進明)의 제 1조는 기술로나 성적으로나 과연 찬사를 들일만하고 호수돈(好壽敦)의 대장조도 기술이 상당하얏다. 이화와 일승일패 감전(甘戰) 수십회에 결국 최후 일공으로 승리를 득(得)하는데는 과연 관중으로 하여금 십년감수는 식키고 마럿다…(중략)…이날의 한 기관(奇觀)은 선수나 응원단 간에 패배를 당하고 나서도 울지 않는 것이 한 기관(奇觀)이었다. 작년만 해도 지고 나오면 라켓을 메다치며 모다 대성통곡을 하얏든 것이 사실이엿는데 금년은 그저 평범하게 태연하게 예사로 슬적 도라서는 것이 일대 의문이엿다.” (별건곤 1927년 9월호, 전선여자정구대회를 보고, 일<一> 기자)    




1932년 9월 23일자 1면

10주년을 맞는 여자정구대회

금석지감을 불금


“조선 여자의 체육계는 아직 여명시기에 있다. 하물며 올림픽 같은 세계적 무대에 나서서 세계의 여성과 다투리만큼 발전을 보기에는 아직 전도가 요원하다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수천 년 가정에 칩복했던 여성으로 이 수 십년 간 겨우 사회에 나와 남자들과 아울러 활동을 개시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경탄할 발전을 보았다고 않을 수 없다.”


 “어느 민족을 물론하고 남보다 뛰어나게 존재를 나타내려면 무엇보다도 세어야 할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더욱 건전한 국민을 산출하는 여자에 있어서는 더욱 튼튼하고 세어야 할 것이다…(중략)…‘센 놈이 결국 지배자다.’ 라는 말은 일종의 공리(公理)나 다름없다…(중략)…전조선 일천만 여성들이여! 체육 건설을 위하여 진출치 않으려는가?…(중략)…조선의 유일한 여자 스포츠계의 행사! 이는 곧 동아일보사 주최의 전조선여자정구대회이다. 여자 운동의 장려를 위하여 힘쓰고 굳센 딸을 길러낸데 대하여만 공의 사의를 표치 않을 수 없다…(중략)…패권을 결정하는 결승전이다. 선수나 관중이나 오로지 한마음으로 열광의 극에 달하고…(중략)…호수돈여고가 와신상담 4년 만에 여덟 학교를 물리치고 당당히 우승하여 만장의 기염을 토하였다. 이 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답고 깨끗하고 스포츠 스피릿을 존중히 여기어 싸운데 대하여 무엇보다도 경하를 표하는 바이다. 수천 년 동안 규중에만 박혀있던 동방의 여성이 만인환시(萬人環視)의 속에서 승리를 다투는 격세의 광경을 보이는 것도 흔희(欣喜)할 일이어니와 장래의 모성인 그들의 기상과 건강이 나날이 진작되고 증진되어감도 반가운 일이다. 해를 따라 이 대회가 더욱 왕성하고 성장하여 조선 여성 체육 향상에 공헌됨이 많기를 바라며 굳센 여성으로서의 존재를 세계에 나타내기를 또 한 번 바라마지 않는다(9월 26일 아침).” (이강성<李康成>, 제13회 전조선여자정구대회 인상기, ‘신가정(新家庭)’ 1935년 11월호, 14~21쪽) 




  제14(1936년), 15회(1937년) 대회는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정간(1936년 8월 29일) 됨에 따라 중단됐다  1938년 제16회 대회를 다시 열고 1939년에는 중등부에서 전문부까지 신설하여 대회를 발전시켜 나가려 했으나 제2차 대전의 발발로 전시체제가 됨에 따라 해방될 때까지 중단됐습니다.  




제16회 대회, 1938년 9월 25일자 2면




제17회 대회, 1939년 9월 6일자 2면




  ‘대한체육회 70년사’ (사단법인대한체육회, 1965)는 동아일보 주최 전조선여자정구대회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64쪽) 전조선여자정구대회 

동아일보가 마련한 이 대회는 우리 여학생의 손에도 라켓이 쥐어진 것을 길거리에서 보게끔 하여 주었다. 대회장을 일인 여학교인 제1고녀 교정으로 정하게 됨에 따라 부득불 일인 학생도 참가시켜 1, 2부(165쪽)로 나눈 동 대회는 우리 학생이 8개 교 일인 학교가 2개 팀이 참가하였다. 학부형과 임원 이외에는 일절 남자의 입장을 불허하였는데도 인파는 정동 일대를 메워 수용능력 4천명 밖에 안 되는 동교 교정만으로는 도저히 경기 운행이 곤란하여 인근의 불교중앙포교실과 보성초등학교의 언덕을 빌려 관람석을 마련해야만 했었다. 당시의 신문보도가 2만여 관중이라 할 만큼 공전의 대성황을 이룬 이 대회의 선수들은 흰 치마저고리에 백색 긴 양말 그리고 백 수건을 댕기 디린 머리에 동여매어 기관(奇觀)을 이루었는데 여자응원단의 활동은 특히 볼만하였다. 동 대회는 수년 전부터 교내에서 연습이 있던 진명과 숙명이 월등한 실력을 나타냈으며 숙명의 정분남 한유정 조와 서정주 김성정 조의 활약이 눈부시었으나 진명의 문상숙 김가매 조가 워낙 강하여 진명의 승리로 끝났으며 호수돈의 최사라 백유감 조, 경성여고의 김순용 홍순희 조와 황희순 윤정희 조 그리고 배화의 유영애 박경란 조와 황이김주 조는 많은 인기를 모았으며 결승에서 진명여고의 최정숙 민수남  조는 독무대를 이루어 대회의 종막을 장식하였는데 본 대회에서는 심판진도 당대의 명선수들로 구성하였었다. 이로써 역사적인 여자정구대회는 막을 내리었는데 시험 삼아 하여 본다던 이번 행사가 성공리에 끝남으로서 앞으로 매년 동아일보사의 연중행사의 하나로 1939년까지 17회의 대회를 갖고 제2차 대전 때 수년 중지되었다가 조국광복 후 다시 계속하여 오늘날까지 이른 것이다…(중략)…(166쪽) 1924년 6월 21일부터 3일간에 걸쳐 개최된 제2회 대회는…(중략)…경성여고를 비롯하여 진명여고 공주영명 이화여고 정신여고 호수돈여고 숙명여고 배화여고 그리고 동덕여고등 9개교가 참가하여 경성여고가 우승하고 익년인 1925년 6월 6일부터 2일간 거행된 제3회 대회는 김성수대회장의 개회사로 시작되었다. 원산 누씨여고를 위시한 진명여고 이화여고 동덕여고 배화여고 정신여고와 공주영명 그리고 개성의 호수돈여고와 작년도 패자 경성여고 등 9개교가 참가하였는데 경성여고가 연패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역시 남자 입장이 학교측 감독자 간에 의해 허용되지 않은 제4회 대회는 경성운동장의 준공으로 장소를 옮기게 되고 금남의 규제 아래 1926년 10월 1일부터 개최되었는데 전주의 일신학교를 비롯하여 평양의 정의 공주의 영명 개성의 호수돈 등의 지방 팀과 서울에서는 3연패를 노리는 경성여고를 필두로 이화 배화 여자상업 정신여고와 진명 등 10개교가 참가하였는데 호수돈여고의 우승으로 돌아갔다. 처음으로 우리나라 선수와 일인 학생들이 혼합되어 개최하게 된 제5회 대회도 역시 성동원두 경성운동장에서 1927년 10월 1일 그 막을 열었다. 이화여고 평양정의 개성 호수돈 전주일신 정신여고 개성여고 진명여고 원산누씨 경성용곡 경성여고와 일여(日女) 측의 제1고녀 및 제2고녀의 도합 12개교가 질서 있게 진행된 이번 대회에서는 호수돈여고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제2고녀가 우승함으로써 아깝게도 일인에게 제패되고 말았다. 일인학교가 출전하지 않은 제6회 대회는 이화여고를 비롯하여 정신 진명 여자실천 숙명 등의 서울팀과 공주영명 진주일신 그리고 강호 호수돈 등의 8개교가 참가한 가운데 1928년 5월 26일부터 막을 열었는데 이화여고가 적년의 불운을 일소하고 우승하였으며 1929년 9월 23일부터 열린 제7회 대회에서는 왕년의 강자 이화 호수돈 경성여고 등을 물리치고 공주의 영명이 월계관을 차지하였는데 이 대회에는 진주일신 원산누씨 그리고 숙명여고와 제1 제2고녀의 일인학교까지 9개교가 참전하였다. 1930년 9월 24일부터의 제8회 대회에서도 주최자 측의 희망이 용납되지 않아 금남의 베일을 걷지 못한 채 공주영명과 원산누씨의 지방학교 그리고 경성여상과 경성여고 및 진명 숙명 이화와 일인 측에서 역시 제1 제2고녀가 참가한 가운데 막을 열었는데 이화여고가 우승기를 되찾았다. (167쪽) 어언 개최한지 아홉돌을 맞이하는 제9회 대회는 도하 여성들의 인기를 집중한 가운데 1931년 9월 24일부터 경성운동장 정구코트에서 갖게 되었다. 대회기 게양과 구세군 육아홈 음악대에 맞추어 이화여자전문학교 합창단의 대회가가 합창된 다음 송진우 대회장의 개회사와 금년부터 처음 있는 선수선언문이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이창성 선수에 의하여 낭독된 후 시작되었다. ‘천고마비의 중추가절을 복(卜)하여 이에 성대히 거행되는 제9회 전조선여자정구대회에 출장함에 제하여 저의들 선수 일동은 운동 도덕을 존중하고 제반규약을 엄수하며 심판의 선언과 본부의 지휘를 일절 복종하여 운동정신을 오독하거나 본 대회의 체면을 손상하는 일이 없기를 서약하나이다. 우(右)를 참가선수 일동을 대표하여 자(玆)에 선언하나이다’라고 한 명랑한 음성의 선언문 낭독은 참가선수의 사기를 더욱 북돋아 주었다.


한편 이날 합창된 대회가는 이광수 작사 안기영 작곡으로 된 것인데

一 

하늘 빛이오 땅에 힘일세

젊은 딸들의 넘치는 기쁨

라켓을 맞아 허공 달리는

공과도 같아 아으 기쁨도깃다


二 

싸오는 속에 예절을 배고

용감하면서 온순하더라

맘을 합하고 법도 맞추어

정정 당당히 아으 겨르는 우리

라 하였는데 이것은 지난 대회 때부터 부르던 노래이다.


이 대회에는 초출전의 재녕명신을 위시하여 개성의 호수돈과 서울에서 이화고녀를 비롯한 숙명 진명 경성여고 경성여상의 7개교와 일인 측에서 제1, 제2고녀와 평양고녀가 참가하였으며 경성여고군은 최후까지 분전하였으나 초진의 평양고녀가 우승함으로써 영예를 또다시 일여(日女)에게 양보하게 되었다. 여자정구계의 전통과 권위를 과시하는 동 대회는 1932년 9월 3일부터 또다시 성대한 제10회 대회를 마련하였다. 특히 이번 대회에는 당시 70세라는 고령으로 시구에 임하여준 숙명여고의 이정숙 교장과 여성 심판으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인 김복림 최이순 양 이전(梨專) 학생의 존재는 여성체육동호인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중략) 이 대회에는 진명 숙명 이화 경성여고 경성여상 등의 서울 팀과 개성의 호수돈 재녕의 명신 그리고  평양고녀와 제1고녀 및 제2고녀의 일인 팀 등 10개 학교였는데 결승전에서 호수돈여고가 작년도의 패자 평양고녀를 누르고 6년 만에 패권을 되찾았다. 제11회 대회는 1933년 9월 23일부터 개최하였는데 작년도의 패자 호수돈여고를 위시하여 (168쪽) 재녕의 명신 평양의 정의 그리고 진명여고 개성여고 숙명여고 이화여고 경성여상과 제1고녀 제2고녀 대구고녀의 일인 측 3교를 합하여 도합 11개교가 참가하였는데 처음 출전한 대구여고의 일인학생이 우승하였다. 1934년 9월 24일부터 예년과 같이 경성운동장에서 거행된 제12회 대회는 재녕의 명신여학교를 비롯하여 개성의 호수돈과 진명여고 숙명여고 동덕여고 경성여고 경성여상 이화여고와 日女로된 제1 제2고녀 등 10개 여학교가 참전하였다…(중략)…이 대회에서는 경성여고가 숙적 제1고녀를 3대 1로 크게 누르고 9년 만에 패자의 위치에 올랐다…(중략)…다음의 제13회 대회는 1935년 9월 23일부터 거행되었다. 이 대회에서는 이창규 이무겸 조 김경임 백희주 그리고 옥순임 주남녕 조로 된 호수돈여고가 결승전에서 제1고녀를 3대1로 무찌르고 패권을 잡았는데 숙명여고 동덕여고 이화여고 진명여고와 개성여고 그리고 초진의 근화여고와 일인들의 제1, 제2고녀 등 9개 학교였다. 그러나 순항만 한 것 같던 본 대회도 1936년 8월 29일 손기정선수의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폐간됨으로서 중단의 슬픔을 맛보았다. 그러나 동사가 1937년 6월 2일 복간되자 2년을 격하여 1938년 9월 24일에는 다시 제16회 대회를 열게 되었으나 일제의 압력을 받아 학교 이름조차 일본인을 따르게 되어 진명고녀 호수돈고녀 숙명고녀(전에는 한국인계는 전부 ‘여고’였음)와 향상실업의 4개 팀 만이 참가한 조촐한 대회였다. 결승전에서는 김정중 고여욱 조, 서연옥 김영채 조, 권현순 김인순 조로 된 진명고녀가 김규복 정세룡 조, 황이선 이명옥조, 이복순 정희영 조의 숙명고녀가 이겨 우승하였다. 다음해인 1939년에는 중등부에서 전문부 까지 신설하여 대회를 발전시켜 대일항거의 의지를 관철하려 하였으나 제2차 대전으로 이 대회가 일제하에서의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중략)…(169~170쪽) 이 대회는 1919년 경성일보사가 주최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우리나라 여자 정구의 동아일보사 주최 단체전보다는 훨씬 앞선 행사로서 특히 개인전을 위시로 한 단하나의 전조선여자정구대회였다. 물론 시초부터 우리 여자선수들은 이에 참가하기를 꺼려하였으나 동아일보사 주최의 단체전도 일인과 혼합하여 상당한 회수를 거듭하게 되어 우리 선수는 1927년 4월 29일 경성운동장에서 열리는 제9회 대회부터 출전하였다. 이 최초의 참가대회에서는 이화의 이보패 김복림 선수가 재빨리 우승의 영광을 얻었다…(중략)…1938년 10월 그러니까 경성일보사 주최로서는 마지막으로 주최되는 제20회 대회의 중등부에서는 경성여고의 김옥수 함영숙 조가, 일반부에서는 강종의 박혜옥 조가 각각 우승하였다.”




  1923년 시작된 동아일보사 주최, 전조선여자정구대회는 조국광복과 함께 다시 이어져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긴 행사가 됐습니다.


  동아일보는 ‘흰 치마저고리에 백색 긴 양말 그리고 백 수건을 댕기 디린 머리에 동여매어 기관(奇觀)을 이룬’   전조선여자정구대회에 이어 1926년에는 전조선여자웅변대회를 개최, ‘조선 여자의 우렁찬 첫 부르짖음’ 을 터트려 또한번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1925년 1월 28일자 2면




1925년 2월 26일자 2면




전조선여자웅변대회

◇ 시일 : 3월 19, 20 양일 하오 7시

◇ 자격 : 중등 이상 학교와 단체서 각 1인

◇ 장소 : 경운동 천도교기념관에서

◇ 신청 : 3월 16일까지 본사 사업부로

주최 동아일보사




1925년 3월 18일자 2면




여류웅변

만물소생한 신춘벽두에

신진여성의 신진기염!

1일 격(隔)한 대회와 만도(滿都)의 비상한 인기

동아일보 주최 전조선여자웅변대회


일즉히 전조선학생 웅변대회를 첫 시험으로 주최하여 가지고 기대 이외의 큰 수확을 얻은 본사에서는 새로운 계획으로 새로운 수확을 얻고자하여 역시 마찬가지 조선의 첫 시험으로 이에 전조선여자웅변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던 것은 이미 지상으로써 누차 보도한바어니와 그동안 모든 준비가 착착 진행이 되어 마침 명19일로 비롯하여 조선 여자의 우렁찬 첫 부르짖음을 듣게 되었다. 어느덧 눈속에 잠겼던 조선 강산은 이제야말로 바야흐로 따뜻한 봄빛을 마지하여 산과 들에는 아지랑이가 자욱하고 봄날 반공에는 종달의 노래가 평화로운 웃음을 전하게 되었다. 30만 시민이 와글와글하는 대경성 중앙무대에도 고요한 봄소식은 기어히 오고야말아 만도의 인사는 화창한 봄동산에 새로히 솟아오르는 풀잎과 함께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새활동을 개시하려는 이때에 오래동안 규문에 유폐되었던 조선 여자들의 우렁차고 생기있는 첫 소리 첫 부르짖음은 과연 전 조선인사에게 얼마나 한다대한 흥미와 도움을 줄는지 이로조차 우리는 그들의 가진 인생관의 반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남에서 북에서

참가단체 12처

조선녀 웅변계의 패권은?

단체측 학교측 각 6개처

제1일 청년단체

학생단은 다음날


기보한바 전조선 여자웅변대회는 명 19일밤부터 시작하게 되었는데 우선 작일 오전까지 전선 각지로부터 참가수속을 마친 각 단체와 학교총수효는 12곳이었으며 또다시 그것을 학교와 사회단체별로 구별하여보면 사회측의 각 청년단체가 5곳이오 나머지 학교수가 7곳인데 이것이 조선에 있어서는 첫 시험인 까닭에 처음부터 모든 것이 완전무결하기는 바랄 수 없는 일이나 아래와 같이 각 지방으로부터 참가하는 곳이 많이 있게 된 것은 조선여자계의 장래를 위하여 매우 기꺼운 일이라더라.


참가단체


◇ 학교측

▲ 신명여학교(대구)

▲ 정의여자고보교(평양)

▲ 정의유치사범과(평양)

▲ 수피아여학교(광주)

▲ 정신여학교(경성)

▲ 배화여학교(경성)


◇ 단체측

▲ 여자기독청년회(경성)

▲ 여자교육회(개성)

▲ 조선여자청년회(경성)

▲ 간호부회(경성)

▲ 남산현여자엡윗청년회(평양)

▲ 여성동우회(경성)


만도(滿都)의 인사가 손에 땀을 쥐고 날과밤으로 고대하는 전조선여자웅변대회는 예정과 같이 명19일 밤7시부터 시내 경운동 천도교 기념관내에서 개최하게 되었는데 첫 날에는 청년단체로만 끝을 마치고 학교측은 둘째 날로 작정되었다.




1925년 3월 19일자 1면에서 여자웅변대회를 본사가 주최하는 본의(本意)를


一. 금명 양일간을 기하여 전조선여자웅변대회를 개최한다는 것은 기보와 같거니와 전자(前者) 오인이 남자학생웅변대회를 개최할 제(際)에도 일언한 바와 같이 웅변의 근본은 인격에 있음으로 고결한 인격에서 변론다운 변론이 곧 감화력이 있고 생맥(生脈)이 상통하는 자극과 암시가 발○ 되는 것이니 인격을 수양하는 것이 웅변의 토대를 축(築)하는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의 수양이라는 것은 단일한 ○서로만 가는 것이 아니니 웅변을 실습하는 동안에 인격의 향상을 기획할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이러한 의미에서 남자 청년을 위하여 그 기회를 작(作)할 뿐 아니라 여자 청년을 위하야서도 이 기회를 주고저 함에 있다고 설명하고


二. 그러나 남자와 동일한 균형을 취하기 위하여 여자웅변대회를 개최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도 점차 세계적 영향을 受하야 일보일보 구체적 국면에 향하는 것이 현저히 보이나니 재래와 같이 여자의 언행을 일종 호기심으로 차(此)를 관망하던 보수적 사상은 결코 허락할수없는 정도에 이르렀다. 여자가 자기네의 지위 향상과 자아 실현을 위하여 분투노력할 뿐 아니라 남자도 좀 더 진실하고 긴착한 사료와 조력이 필요하다. 그리하야 여자의 운동이 장차 갈수록 더욱 실제화하며 구체적 활동이 나타나게 될 터이니 근본되는 인격을 가정과 학교 내에서만 수양할 것이 아니라 그 범위를 확대하야 그 인격을 실현하는 자기네의 운동 진행상 기술의 훈련이 필요하다. 그럼으로 다수한 민중의 면전에서 민중과 같이 인격적 향상과 기술적 연마에 보익(補益)할 기회를 짓는 것은 실로 현금 우리 신(新) 여자에게는 심중한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 고로 본사는 다소 시기상조한 감이 있음을 불구하고 이에 전조선여자웅변대회를 개최한 것인데 각 지방 중요 도시에서 다수 참가한 것과 일반의 기대가 큰 것으로 보아서 오인은 보이지 아니하는 효과가 불소(不小)할 것을 확신한다고 했습니다.




1925년 3월 21일자 2면





1925년 3월 22일자 2면




1925년 3월 23일자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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