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단군영정 공모 – 백두산 기행에 이어 동아일보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유적보존운동을 벌였습니다. 1931년 5월 13일자 2면에 충무공의 13대 종손이 부채 때문에 은행에 잡혔던 충남 아산군 음봉면 사정리 충무공 묘소 위토(位土)가 경매에 붙여질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 보도하며 묘소와 사당, 그리고 종가 집이 모두 퇴락일로에 있음을 알렸습니다.


 “임진란, 거북선과 함께 역사를 지은 민족적 은인 이 충무공의 위토 60 두락지기가 장차 경매에 넘어갈 운명에 있다고 한다. 그 위토는 충무공의 묘소가 있는 충남 아산군 음봉면 사정리에 있어서 충무공의 묘소와 사당의 유지비와 춘추제향비 등을 순전히 이 토지에서 얻어 써왔었는데 지난 대정 8년 이래로 그 13대 종손 이종옥씨의 살림이 차차 영세해지면서 그 토지를 담보로 1천3백 원의 빚을 얻었던바 지금은 이자까지 2천4백 원이 되어 동일은행에 들어가 있다. 은행에서는 그 채무자인 이종옥 씨와 토지의 공동소유자인 이씨 일족 70여명에 대하여 여러 번 독촉을 했으나 모두 빈한한 살림이라 갚을 도리가 없어 오늘까지 왔었다. 얼마 전 은행에서는 돌연히 최후통지를 하게 되어 오는 5월 말일까지 갚지 않으면 단연 경매처분을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위토뿐이 아니라 충무공의 묘소가 있는 산판도 역시 다른 곳에 채무관계가 되어있으며 따라서 묘소와 사당과 종가 집 등은 여러 해 동안 수리를 하지 못하여 한없이 퇴락해지고 있다 한다.” 




1931년 5월 13일자 2면




  다음 날 ‘민족적 수치 – 채무에 시달린 충무공 묘소’라는 사설로 민족의 영웅인 이 충무공의 묘소 위토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한 민족적 정열의 냉각과 민족적 자부심의 마비를 통탄하고 충무공 유적 보존을 촉구했습니다.




1931년 5월 14일자 1면 사설




‘민족적 수치 – 채무에 시달린 충무공 묘소’


“우리들의 역사의 기록 면에서 그 인격으로나 그 사적으로나 충무공 이순신의 위를 갈 사람이 얼마 없으리라. 그의 위토와 묘소가 경매를 당하게 된다니 이런 변, 이런 민족적 치욕이 더 있으랴…(중략)…국난에 임하여 민토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출했으니 민족적 은인이요, 세계 최초의 철갑선 거북선을 발명했으니 민족 문화의 선구라 할 것이다. 조선인이 조선의 정신을 제대로 가지고 왔다면 그의 비각도 있고 그의 동상, 기념관, 도서실, 박물원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없을망정 위토와 묘소가 채귀(債鬼·빚쟁이)의 손으로 전전한다니 수치를 넘어 민족적 범죄라고 할 것이 아니냐…(중략)…이를 어찌 채권채무의 관계로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민족적 체면과 양심을 고려하야써 선처할 방법이 없을 것인가. 우리는 민족적 이상과 정열과 자부심이 마비된 조선의 사회를 스스로 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설워한다. 수치를 수치로 아는 자에게는 이러한 붓대를 들기조차 손이 떨리고 얼굴에 모닥불을 붓는 듯하다. 그러나 이를 널리 사회에 알려 그 책임감에 호소함이 이때의 의무로 생각하매 이 붓을 아니 들지 못하는 것이다. 어찌 충무공의 분묘를 위함뿐이랴. 이것을 계기로 우리는 일층 민족 문화에 대한 숭앙심과 애착심을 불길질할 필요가 있다.”




  1931년 5월 15일자 1면




   정인보 선생은 이 글에서 “충무공 같으신 어른은 일가 일족의 숭봉만에 한할 배 아니니 이 일은 이씨 일문의 대변만이 아니라 조선의 변고이며 수치라 통한이 사무친다. 이 충무공의 묘산을 보존하는 책임은 조선인의 공동으로 부하할 것이다. 보존하여 놓은 뒤에라도 구사(舊事)를 징(懲)하고 후래(後來)를 도(圖)하여 자손은 물론이어니와 이씨 문중에도 맡길 수는 없는 것이니 마땅히 전 조선적으로 공수(公守)하여야 할 것이다”고 했습니다.


“동일은행에서 이 충무공 위토를 경매한다는 문제로 내가 사명(社命)을 가지고 동(同) 은행 민(閔) 두취의 담(談)을 들어다가 신문에 보도한 것이 있었는데 두취 민대식씨는 임 비서를 통하여 아래와 같이 말했다. ‘그 채무관계는 10여년을 끌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사건 전체를 천안지점에서 맡아 가지고 있으니 그 내용을 도모지 모릅니다. 오늘 당장 천안지점에 통지를 해 보겠지 마는 기정방침이 경매로 되어 있다면 그야 어찌할 수 없겠지요.’ (5월 13일자) 물의가 되었다는 것은 끝에 절구인 ‘그야 어찌할 수 없겠지요.’인데 그 민 두취의 담은 어느 듯 세상의 물의를 자아내어 동일은행을 OO한다거니 민 두취를 OO한다거니 하는 분격에 넘치는 투서가 그 당시 매일 빗발치듯 우리 신문사로 들어 왔고 또 그 은행에도 들어왔다고 하며 심지어 수표교 모 회석(會席) 상에서는 동(同) 은행 모 간부에게 대하야 회중(會衆)이 그 민 두취의 담을 들추어 가지고 노호(怒呼)하는 것을 볼 때에 나는 어떠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시 동일은행을 취재했던 박금(朴錦) 기자, ‘충무공의 위토경매사건’, 동광 1931년 12월 1일호, 81~83쪽)   


  동아일보의 연이은 보도에 성금과 서신이 쏟아졌습니다.  


 감격 넘친 서신

‘1원씩 3천인이면 그까짓 채무 쯤이야’

‘전 가구가 굶더라도 표해야만 될 미충(微衷)’




 1931년 5월 17일자 2면




 이 충무공 묘소 문제로 확대되는 사회적 반향

학생 직공 등 각층의 향응

눈물겨운 어린이 정성 서신에 넘치는 추모열 




 1931년 5월 19일자 2면

 





  동아일보는 사원, 공장, 배달부, 용인들이 성금을 냈고 헌금자의 명단을 모두 실었습니다.




 1931년 5월 20일자 2면




사고(社告)

제위께서 본사에 보내시는 충무공 이순신 묘소 위토 보존 기금은 본사가 보관하여 책임지고 영구보존 사업 기금으로 쓰도록 하겠나이다. 




  1931년 5월 21일자 2면




  5월 21일자 명단에는 인촌 김성수 선생의 양부 김기중 50원, 친부 김경중 1백원을 낸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이 날자 1면 사설은 전 민중이 읽을 수 있도록 순 한글로 썼습니다.




1931년 5월 21일자 1면 사설




이 충무공과 우리


“우연한 기회로 실로 우연한 기회로 충무공 이순신에게 대한 기억과 감격을 새롭게 하게 되었다. 충무공의 묘소와 위토가 채무의 저당이 되었다는 본지의 보도가 이 민족적 분기의 기연을 지은 것이다. 이 보도가 한번 본 지상으로 되매 일주야가 다 지내지 못해서 본사로 답지하는 성금으로 민족적 분기가 어떻게 간절함을 보였다. 이것은 진실로 조선민족이 평소에 얼마나 충무공의 인격을 숭앙하고 흠모하는가를 보이는 증거가 되는 동시에 조선민족은 결코 그네의 민족적 은인에게 대한 감사와 흠모의 정이 박하지 아니하다는 것을 보이는 증거다…(중략)…다행히 우리 민족에게 의기가 멸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번을 기회로 우리 민족적 영웅이요 은인이요 모범인 충무공의 무덤과 유적과 유물을 영원히 보존하도록 또 그의 전기와 문집을 간행하여 널리 반포하도록 하는 무슨 사업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 일은 그의 종손에게서 떼어서 전 민족적인 어느 기관이 맡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4면에는 소설 이순신 집필을 위한 자료수집차 충무공 유적지를 찾아 나선 이광수 편집국장의 취재답사기 첫 회를 싣습니다. 답사기는 6월 10일까지 14회 연재됐습니다. 




1931년 5월 21일자 4면




 충무공유적순례(1)



“5월 19일 청(晴). 오전 10시 경성역 발.  오후 1시 40분 온양착. 그러나 이 길은 온천놀이 온 길은 아닙니다. 사명(社命)으로 우리 충무공 이순신의 사적을 찾는 길. 그야말로 충무공 유적 순례의 길입니다.”




   5월 23일자부터 6월말까지 1개 면 전체에 성금자 명단을 실었습니다.




 1931년 5월 23일자 5면




  5월 23일 충무공 유적보존회는 윤치호 남궁억 유진태 박승빈 유억겸 최규동 안재홍 조만식 정광조 김정우 김병로 정인보 한용운 윤현태 송진우의 15인을 위원으로 천거하여 적극 추진키로 하고 동아일보가 그 실무를 맡기로 했습니다.




1931년 5월 25일자 1면 사설




충무공 유적 보존회 창립 – 당연한 순서




 1931년 5월 26일자 6면




   ‘6월 10일 보존회 결의에 따라서 11일 윤현태 김병로의 2씨는 동일은행에 가서 채금 2372원22전을 갚음’ (동우<東友> 1965년 10월호 17쪽)


  성금이 1만원을 돌파하자 그것을 기념하는 사설을 1931년 6월 17일자에 썼습니다.




1931년 6월 17일자 1면 사설




성금 1만원 – 민족적 성심의 발로


“이충무공을 위한 성금이 1만원을 돌파했습니다. 그리 큰 돈이 아닐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이 거의 전부가 10전 20전의 모임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이에서 더 놀랍고 감격되고 희한스럽고 미쁜 일이 또 있겠습니까. 맨 첫 번 돈을 보내신 이가 1원씩 2천명이면 2천원 채무를 갚을 수 있지 않느냐고 하신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벌써 채무는 보존회의 손으로 청산되고 제2단계로 유적의 보존을 위하여 적당한 방법을 강구하기로 되었습니다. 이문제가 처음으로 세간에 물의를 지었을 때에 민족적 수치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동포 여러분의 열렬한 정성의 표시로서 그 치욕을 씻어버리기에 족함을 축하하고자 합니다…(중략)…조선사람이 각각 가진 힘은 얼마 아니된다 하더라도 그 힘을 합하고 뭉치면 능히 큰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스스로의 한팔 힘이 약한 것을 한하지 말고 먼저 그 팔과 팔을 서로 걷어 2천만의 온갖 힘을 다 합하면 못할 일이 없을 것을 대오해야 되겠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묘가 있는 언덕, 그가 살던 옛집, 그의 제사 음식을 장만할 비용을 대주는 논, 그가 사용했던 대단히 귀중한 전쟁 도구들, 이 모든 게 이 훌륭한 사람의 – 이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의 – 못난 후손이 진 빚을 갚기 위해 경매에 처해질 거라고, 꼭 한 달 전에 동아일보가 보도했다. 또 위에서 언급한 재산을 담보로 해서 돈을 대출해 주었던 동일은행이, 이씨 문중 앞에서 당장 3천 원을 갚지 않으면 그 담보물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밖에 없다고 공식 통보한 사실도, 이 신문 보도로 알려졌다. 기사가 나가자마자, 아이들과 아녀자들이 그 빚을 갚고자 기탁한 코 묻은 돈, 쌈짓돈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난 30일 동안 오직 몇 사람만이 100원씩 기탁했다. 지금껏 내가 낸 264원이 최고액이다. 전국 각지에서 5전, 10전, 20전씩 기탁되고 있다. 지금까지 모금된 금액이 무려 11,000원을 훨씬 웃돈다. 지금까지 잘사는 양반이나 상인 중에서 조금이라도 돈을 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들은 일본을 겁내고 있다.” (윤치호일기, 김상태 편역, 역사비평사, 1988, 275~276쪽. 1931년 6월 22일 월요일)


  이와 함께 이광수의 소설 연재를 알렸는데 이광수는 사고(社告)에서 소설 이순신의 집필에는 고하 송진우와 하몽 이상협의 권고가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1931년 5월 23일자 2면




소설 이순신 연재 사고


 장편소설 이순신 – 춘원 이광수 작, 청전 이상범 화

◇ 소설 예고

“눈물겨운 이 기회에 거룩한 감격을 가지고 우리는 우리의 충무공을 주인공으로 한 춘원의 소설 한편을 세상에 보내려 합니다. 그 강산 그 인물과 그 기록 그 모양을 이 강산 이 지음에 그대로 재현시키려는 것입니다. 이순신이란 어떠한 어른인가. 이천만 가슴에 뿌리박은 이 어른의 깊고 환한 존재는 임진란 거북선으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크나큰 존재에 간단한 설명이 원래 당치 않거니와 이 강산 이 백성에게 대한 우리의 이순신은 그저 이순신으로 설명이 충분합니다.”


 ◇ 작자의 말

“나의 외우(畏友) 고하(古下 송진우)는 과거 조선에 우리가 숭앙할 사람이 3인이 있다고 합니다. 한 분은 단군, 한 분은 세종대왕, 그리고 또 한 분은 이순신이라고 합니다…(중략)…나는 이순신을 철갑선의 발명자로 숭앙하는 것도 아니오 임란의 전공자로 숭앙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도 위대한 성공이 아닌 것은 아니겠지마는 내가 진실로 일생에 이순신을 숭앙하는 것은 그의 자기희생적, 초훼예적 그리고 끝없는 충의(애국심)입니다. 군소배들이 자기를 모함하거나 말거나 군주가 자기를 총애하거나 말거나 일에 성산(成算)이 있거나 말거나 자기의 의무라고 신(信)하는 바를 위하여 마침내 죽는 날까지 변치 아니한 그 충의 그 인격을 숭앙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 소설 ‘이순신’에서 내가 그리라는 이순신은 이 충의로운 인격입니다. 나는 나의 상상으로 창조하리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고기록에 나타난 그의 인격을 내 능력껏 구체화하려는 것이 이 소설의 목적입니다.”




 1931년 6월 26일자 7면 




이순신(1)




   이광수는 소설 연재를 막 시작하며 파인 김동인(巴人 金東仁)에게 아래와 같은 심경을 담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파인형(巴人兄). 요새 제(弟)는 ‘이순신’을 쓰기에 촌가(寸暇)가 업슴니다. 약 2개월 래(來)로 밤낫 이순신과 임진란만 보고 생각햇더니 눈에 어른거리는 것이 모다 300년전 일임니다. 꿈에 가끔 임진란을 꾸고… 참으로 고소(苦笑)할 일입니다…(중략)…이제 ‘이순신’을 쓰니 결국 나는 내 애인을 그리는 것입니다…(중략)…그럼으로 이순신에 내가 흥미를 가진 것이 혜성(慧星)기자의 억측과 가티 이번 충무공 묘소문제를 기회로 생긴 저날리스틱한 동기만은 아닙니다. 글이나 그림이나 저 생긴 이상은 뭇 쓸 법입니다. 내가 이순신을 그리거나 안창호를 그리거나 결국 내 인격 정도 이상에 넘지 못할 것을 내가 압니다. 그러나 나는 나 이상 할 수는 업기 때문에 다만 내 힘을 다하여서 내 애인을 그릴 뿐입니다.” (이광수, ‘이순신과 안도산’, 삼천리 1931년 7월 1일호, 32쪽)                            


   소설 이순신은 1931년 6월 25일자 부터 1932년 4월 3일자까지 178회 연재됐습니다.


   이광수는 178회 마지막회에서  “순신의 유해는 고금도 본영으로 돌아갔다가 아산 선영에 안장하였다. 순신의 상여가 지난 때에 백성들은 길을막고 통곡하였다. 왕도 어려운 한문으로 제문을 지어 조상하고 우의정, 선무 공신 일등을 책하였다. 원균은 삼등이었고, 권율이 이등이었다. 그러나 그까짓 것이 무엇이 그리 긴한 것이랴. 오직 그가 사랑하던 동포의 자손들이 사당을 짓고 춘추 제향을 지내었다. 그때에 적을 보면 달아나거나 적에게 항복한 무리들이 다 정권을 잡아 삼백년 호화로운 꿈을 꾸는 동안에 조선의 산에는 나무 한 포기조차 없어지고 강에는 물이 마르고 백성들은 어리석고 가난해졌다. 그가 돌아간 지 3백34년 4월 2일에 조선 오백년에 처음이요, 나중인 큰 사람, 이순신(충무공이란 말을 나는 싫어한다. 그것은 왕과 그 밑의 썩은 무리들이 준 것이기 때문에)의 슬픈 일생을 그리는 붓을 놓는다”고 끝을 맺었습니다.                          




 1932년 4월 3일자 7면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이 춘원의 민족의식을 감히 운위하지만 그이만큼 민족애에 철저하던 분도 그리 흔치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이의 문장은 구태여 이 자리에서 말하는 것이 쑥스럽지만 동아에서 수많은 소설 삽화를 그려온 덕에 여러분 작가들을 친근히 접할 수 있었던 나는 그때마다 춘원은 참으로 남다른 분이라는 생각을 되새기곤 한다. 그이는 대개 신문소설은 편집국장 책상에 앉아 마감 얼마 전부터 쓰기 시작하는 것이 일쑤였다. 그러나 한번도 막히지 않고 슬슬 써 내리는 문장이 한 번의 가필도 없이 정연하고 삽화가의 머리에도 선연히 그 영상이 떠올라 그림 그리는데 여간 편하지가 않았다.” (이상범, ‘구우회고실<舊友回顧室>’, 동우<東友> 1963년 12월호 13쪽)


“1970년 4월 26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김종신(金鍾信) 공보비서관에게 써준 ‘나의 소년시절’ 에는 군인 혁명가로서의 생애에 대한 최초의 생각이 싹트기 시작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소년시절에는 군인을 무척 동경했음. 그 시절 대구에 있던 일본군 보병 제80연대가 가끔 구미지방에 와서 야외 훈련하는 것을 구경하고는 군인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음. 보통학교 시절에는 일본인 교육으로 일본역사에 나오는 위인들을 좋아하다가 5학년 때 춘원이 쓴 ‘이순신’을 읽고 이순신 장군을 숭배하게 되고 6학년 때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나폴레옹을 숭배하였음’  박정희는 소년시절 병정놀이를 즐겨 했다…(중략)…춘원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소설 ‘이순신’을 연재한 것은 1931년 5월 30일부터 이듬해 4월 2일까지였다. 박정희는 1931년엔 6학년이었으므로 수기에서 5학년이라고 한 것은 착각이다. 보통학교 시절에 ‘이순신’을 읽었다면 책이 아니라 신문을 통해서 연재소설을 읽었다는 얘기가 된다. 박정희의 셋째 형 상희가 구미읍에서 조선일보 선산지국을 운영하면서 조선일보, 동아일보를 같이 팔고 있을 때였다. 아마도 정희 소년은 형으로부터 신문을 얻어서 읽었을 것이다.”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제1권’, 조선일보사, 1998, 365~369쪽)




 1931년 9월 18일자 2면 




16일에 상량식을 거행한 충무공 현충사




 1932년 5월 29일 1면




‘만중(萬衆)의 혈루(血淚)로 중건된 현충사, 신사(新祠)에 봉안될 충무공 영정




1932년 6월 3일자 1면 사설 




민족적 지정(至情)의 결정(結晶)




 1932년 6월 6일자 1면 사설




이 충무공의 인격, 현충사 낙성식 날에




  1931년 7월 11일 제 2단계 사업으로 아산군 염치면 백암리 방화산에 현충사 건립공사가 착수됐고 그해 연말에 현충사가 준공되었습니다. 새로 꾸민 사당 안에는 후손이 보관하고 있던 검 금대 일기 칙지(勅旨) 등 이 충무공의 유물을 안치했습니다.


   1932년 6월 5일 새 사당에 충무공 영정을 봉안하던 날, 3만여 명의 인파가 운집했습니다.




  1932년 6월 7일자 1면




충무공 영정 봉안일




 1932년 6월 7일자 7면





  쇠락한 현충사 모습(1931년 5월, 동아일보 자료 사진)     중수한 현충사 전경(1932년 5월, 동아일보 자료 사진)




중건 현충사 비문


“이 충무공은 인종 원년 을사 삼월 팔일 건천동서 나 선조구년에 무과하고 십육년의 건원보권관이 되고 전라좌도수군을 처음 거느리기는 이십사년이니 이듬해는 곧 임진이라 계사에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 무술 십일월 십구일 관음포에서 전사하니라 아산 어름목 산소를 비롯하여 뱀밭 고택과 친히 쓴 일기와 편지와 환도금대옥로 다 조서의 받들고 지킬 바이라 간해 비로소 공의 유적보존을 구구히 도모함이 실로 황송하도다. 정성의 모됨으로 먼저 산소의 향화를 받들도록 하고 이어 고택 이웃에 이집을 지어 공의 화상을 그려 뫼시고 유물을 이에 감초아 두니라 집이 이룬 뒤 마당에 비를 세울 새 우에 공의 생졸 연월을 간략히 적고 밑으로 이번일의 대강을 써 뒷사람으로 보게 하노라. 공 나신지 삼백팔십 팔년 임진 오월 이일 이 충무공 유적 보존회”


 1933년 6월에는 한산도의 제승당도  ‘바람조차 잠자고 물결도 옷깃을 여미는 가운데’ 중건되었습니다.




1933년 6월 4일자 2면




  모금운동은 남녀노소 빈부의 구별 없이 전 민중의 열성이 계속되어 그 뒤 약 1년간 2만 여명, 400여 단체가 이에 호응해 1만6021원 30전이 희사됐습니다. 이 중에서 본사가 직접 취급한 것은 1만3969원68전이고 나머지는 보존회에서 취급했습니다. 본사가 취급한 금액의 중요 지출명세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상이 본보가 취급한 내용이고, 1월 28일 보존회에서 위토매입 대금 1555원41전을 지불하였다. 위토경매설에 대한 민족적 의분에서 발단한 이 운동은 본보의 간곡한 호소가 전 민족의 가슴에 메아리쳐 현충사의 중건, 묘소 비각 종가 수리, 유물의 항구적 보존을 위한 강철금고 제조 등의 큰 사업으로 전개돼 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 특히 본보에서는 현충사에 모실 영정을 본보 전속화가 이상범에게 위촉해 이 화백이 직접 통영 한산도에 출장가 제승당에 안치된 영정을 대본으로 하여 3개월여 동안 심혈을 기울여 새로이 영정을 완성했다. 1932년 6월 5일 영정봉안식이 3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된 것은 뜻 깊은 일이었다. 본사에서는 송진우 사장, 영정을 그린 이상범 화백, 그 뒷바라지에 힘쓴 숨은 공로자 김철중 서무부장이 참석하였다. 이 메아리는 다시 충무공의 전승지인 한산도에 울려 퍼져 현지주민의 열성으로 제승당의 중건, 영정각의 건축, 다시 이상범의 화필에 의한 영정의 봉안으로 이어졌다. 1933년 6월 2일 거행된 봉안식에도 본사는 원조를 아끼지 않았었다. 봉안식에는 송진우 사장이 참석해 식사를 하였고, 행렬의 선두에는 본사기가 크게 나부꼈다. 선열 보존운동은 이충무공을 선두로 하여 더욱 활발해질 기세를 보였으나, 만주사변의 소란으로 더 진전을 보지 못한 것은 유감된 일이었다. ” (동아일보 사사 1권, 334~335쪽)




“내가 동아를 떠나게 된 연유이기도 했지만 손기정씨 가슴의 일장기 말살사건 때만 해도 그 전부터 계획하던 일도 아니었고 또 위에서 시킨 바도 없었지만 그저 영광스런 우리 선수 가슴에 ‘히노마루’(日之丸)가 보기 싫은 감정, 그것 때문에 관계자들끼리 쥐도 새도 모르게 지워버렸었다. 그때의 통쾌하던 마음은 지금도 오래 잊혀 지지 않는 일 중에 하나다. 또 우리들은 어떻게든 민족감정을 불러일으키려고 그 압박아래서도 위험을 무릅썼으니 지금 아산 이순신 장군의 향제에 세워진 충무공 사당은 그때 동아일보사에서 전 민족의 열렬한 성원을 불러 일으켜 세워놓은 항일 독립정신의 결정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충무공의 그럴듯한 영정이 없어 영정을 맡게 된 나는 전국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또 보급망을 통하여 충무공상을 수집하는 한편 그것도 마음에 차지 않아 우리 사학자들의 의견까지를 종합하여 이뤄놓은 것이 지금 아산 충렬사에 모셔 놓은 충무공의 영정이다. 영정을 다 완성한 우리도  그 뒤에 기어이 단기연호(檀紀年號)와 작자인 나의 필명을 써 넣었으나 왜경들의 말썽이 일어날 것이 뻔했으므로 그때 편집국장이던 이광수 선생과 나는 그것을 영정의 뒷면 부벽 속에 넣고 봉함해버렸다. 아마 지금도 그 영정이 그대로라면 그 속에 햇빛을 보지 못한 단기연호가 있으리라. .” (청전 이상범, ‘구우회고실<舊友回顧室>’, 동우<東友> 1963년 12월호 13쪽)  




문화재청 현충사 관리소(이 충무공 영정, 크기: 세로 193cm, 가로 113cm)

“공의 영정에 대하여 기록상으로 보아서는 일찍이 통영의 초묘안에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고 하나 그 뒷 소식은 전혀 알 길이 없고 그 후 순천과 여수 충민사에 화상을 모신 일이 있었으나 역시 그 내력은 알 길이 없다. 1932년 일제 강점기에 현충사 재건을 위한 거족적인 운동이 일어났을 때 성금 16,021원30전으로 사당 및 영정을 모시고 남은 돈 386원 65전은 현충사 기금으로 하여 동년 6월 5일 송진우(宋鎭禹), 백관수(白寬洙), 유억겸(兪億兼) 등이 참석하여 영정 봉안식을 가졌다. 그때, 청전 이상범 화백(靑田 李象範 畵伯)이 영정을 그려서 현충사에 모셨으나, 고증이 부족하였으므로 1949년 다시 충무공기념사업회 편집위원(위원장 이은상)들이 이당 김은호 화백(以堂 金殷鎬 畵伯)으로 하여금 두 폭의 충무공 영정을 그리게 하였는데 조복화상은 현충사에 모셨다가 순천 충무사로 옮겼으며(불의의 화재로 영정도 소실되었다) 갑주입상은 한산도 영정각에 모셨다. 현재 현충사의 영정은 유성룡의 징비록에 나타난 고증에 입각하여 1953년에 월전 장우성 화백(月田 張遇聖 畵伯)이 그린 것으로 1973년 10월 30일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공의 영정을 그리기 위하여 많은 학자들의 고증이 있었던 것 중, 공의 용모에 대한 대표적 기록이 있는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을 참고하였다.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는 현충사에 봉안되어 있는 영정을 비롯하여 순천 충무사(1953년 이당 김은호 화백 작)에 모신 조복 좌상과 한산도 충무영당(1950년 이당 김은호 화백 작)에 모신 갑주입상 등을 볼 수 있다.” 







댓글 없음 »

No comments yet.

RSS feed for comments on this post. TrackBack URL

Leave a comment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