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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백두산 기행은 일본 역사학자들의 단군 부인(否認)에 맞서 1926년 3월 3일부터 ‘단군론’을 연재하던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논설반 촉탁기자가 맡았습니다.


 “1926년 6월 22일의 ‘동아일보’ 지면은 매우 인상적이다…최남선과 백두산과 단군이 삼위일체로 한 데 모여 있는 장면이다.” (서영채 한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기원의 신화를 향해 가는 길’, 한국 근대문학과 민족-국가담론, 서울시립대인문과학연구소편, 소명출판, 2005, 107~108쪽)




1926년 6월 22일자 1면








사고(社告)


 백두산 참관대 파송

칠월 중순 출발 

백두산은 조선인이 국토적 역사적으로 감성(憾省)과 격분을 요할 때에 아무것 보담 앞서서 또 심절(深切)히 상기되고 탄앙(嘆仰)되는 것입니다. 백두산이 조선민물(民物) 일체의 태반이오 요람임은 막론(莫論)이어니와 대진(大震)일구(一區)의 존극(尊極)한 주인으로 동양 역사상의 풍운과 파란이 태반은 이 산곡(山谷)을 중심으로 하여 온양되고 발작(發作)한 것은 진인(盡人)의 다 아는 바입니다. 그러나 역사 무대의 상(上)에 백두산만큼 큰 배우도 없는 동시에 일변 그만큼 암흑과 침묵에 봉쇄된 자도 없습니다. 여기 들어있는 비미(秘謎)와 신기(神機)를 발출(發出)함이 전조선 전동양의 역사적 대조명일 것은 무론(毋論)이오 참으로 이것을 활독(活讀)하고 색험(色驗)함이 조선인의 정신 함육(涵育)과 동양 전국의 기운복찰(機運卜察)에도 아무것보담 위대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본사는 여기 감(感)함이 있어 조선의식이 바야흐로 비약적 발전을 수(遂)하려 하는 차제(此際)로써 백운향도(白雲香徒) 최남선(崔南善) 석전산인(石顚山人) 박한영(朴漢永) 양씨를 촉하여 구원겁래(久遠劫來)의 그 침묵을 때뜨릴 양으로 백두산 돌파를 결행케 하였습니다. 양씨의 식견과 문장은 이제 다시 오인의 췌변(贅辯)을 요할 것이 없거니와 그 열렬 심박(沈博)한 국토애의 지정이 어떻게 촉천(燭天)의 영광으로 발하고 감세(憾世)의 신풍(神風)으로 동할는지 오인은 독자와 한 가지 괄목하여 그 거완(巨腕)의 활문(活文)을 기대(企待)코저 합니다.

동아일보사 


  사고(社告)는 최남선과 박한영 두 사람이 백두산 참관대로 7월 중순 출발한다는 내용이며 그 왼쪽 기사는 ‘조선을 중심으로 한 동방문화연원연구’란 부제를 단 최남선의 ‘단군론’ 50회입니다. 위쪽 사설은 역시 최남선의 글로  ‘백두산의 신비 – 동방운명의 암시자’란 제목입니다. 이 사설은 사흘 동안 연재됩니다.


 “백두산의 이 신비한 실체를 발견하기에도 조선인의 총명은 결코 모자람이 없었다.”  




1926년 6월 22일자 1면 사설




백두산의 신비(상) – 동방운명의 암시자(暗示者)


산악(山嶽)! 어떻게 든든한 생각과 굳센 느낌과 힘과 아름다움을 우리의 마음에 샘솟게 하는 자인가. …(중략)…그런데 세계를 털어서 이 특수한 은총을 받게 된 민족이 실로 몇이 되지 못하는 가운데 그 가장 특저대정(特著大正)한 복인(福人)은 남 아닌 우리 조선인이다. 조선인에게는 백두산이 있다. 백두산은 어떠한 의미로 보아서든지 세계에 있는 가장 신령한 산악이다. 한갓 높은 것 한갓 큰 것 한갓 깊은 것, 한갓 기이한 것의 조각 영산은 세계에 얼마든지 있겠지마는 온통으로, 온갖 것으로, 그저 그대로 신비령이(神秘靈異) 그것인 점에서 우리 백두산은 정히 독일무이한 권위를 가졌다. 조선인에게 대한 백두산은 결코 심상한 의미의 산이란 것이 아니라, 그는 조선인의 신(神)이요, 대신(大神)이요, 그 지상존재(至上存在)의 구원한 상호(相好)이시다. 백두산의 이 신비한 실체를 발견하기에도 조선인의 총명은 결코 모자람이 없었다. 백두산의 신숭영배(信崇靈拜)는 그의 역사가 생기기 전, 그의 민족이 형식되기 전, 그네의 족적이 진토(塵土)에 처음 낳을 때로부터 이미 신으로의 그 존재를 인식하고 국토민물의 구원한 주인으로서의 그 비기오의(秘機奧義)를 동제(洞祭)코 낭오(朗悟·지혜가 밝아 깨달음이 빠름)하였었다. …(중략)…태초에 그네의 천주(天主)가 인간의 복토(福土)를 전고(銓考)하시매 태백차산이 그 선(選)에 응하였다하며 천주의 자(子)인 그네의 비조가 천국을 인간으로 확장하러 올 때에 태백차산이 그 착족점이었다하여 태백산 곧 백두산은 분명히 인간에 있는 천국의 분토(分土)로 인식하였다. 그리하고 이곳에 생긴 신시(神市)는 그네 민족의 연원이라 하고, 이곳에 탄육(誕育)된 단군은 그네 국권의 남상(濫觴)이라하고, 진(進)하여는 진토(震土)에 있는 일체의 민족문물은 총(總)히 이 대원(大原)으로부터 분파만연(分派蔓延)된 소류세조(小流細條)라고 믿었다.…(후략)




1926년 6월 23일자 1면 사설




백두산의 신비(중) – 동방운명의 암시자(暗示者)


세계는 누구를 위하여 생긴 것인지 모른다할 것이지마는 그 백두산이 조선을 – 민족과 이 역사를 위하여 생겨난 것 하나만은 아주 분명하여 의심 없는 일이다. 조선의 역사는 당초부터 백두산의 손목을 잡고 세계의 무대상에 그 소매자락을 번득거리기 비롯하였으며 다시 백두산의 허리통을 삥삥 돌아가면서 생장해 나왔으며 일변 백두산을 핵심으로 하여 그 광망(光芒)을 사방에 방사(放射)하고 그 세위를 팔해(八垓)에 발부(發敷)하였었다.…(후략)




1926년 6월 24일자 1면 사설




백두산의 신비(하) – 동방운명의 암시자(暗示者)


(전략)…조선이 어디서 나왔느냐, 백두산에서가 아니냐. 조선이 어디 있느냐, 백두산에가 아니냐. 그렇다, 백두산은 조선이란 나무의 뿌리인 것이며 백두산은 조선이란 형상의 거울인 것이다. 조선을 위하려 함에도 백두산으로 비롯해야하며 조선을 알려함에도 먼저 백두산에다 비추어 보아야할 것이다. 그런데 백두산이 깜깜한 속에 들어 있으며 그 성질과 의의와 가치가 널리 알려지고 밝히 살펴지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세인의 주의에서 멀어지고 따라서 받을만한 숭경도 받지 못하고 부려야할 권위도 부리지 못하게 되었다…(중략)…어허, 조선인으로 백두산을 탄앙(嘆仰)함이 어찌 심상한 산악열(山岳熱)과 동시할 것이랴. 금일 오인의 백두산참관이 어찌 심상한 산악순례의 일례행(一例行)이랴. 그 불가사의할 진의미지(眞義微旨)를 이제 강명(强名)하여 가로대 백두산의 신비라 한다.  


  최남선 일행은 1926년 7월 24일 기차로 서울을 출발합니다.




1926년 7월 28일자 1면




백두산 근참(覲參) 1회

광명(光明)은 동방(東方)에서



순우(旬日)에 걸친 음우(淫雨)가 겨우 그치고 오래 피신하였든 태양이 다시 위용을 내놓건마는 찌는 듯한 무더위가 오히려 사람을 열살흉살(熱殺?殺)치 아니하면 마지아니하려는 24일이었다. 밤이 되어도 원화(媛和)되지 아니하는 답답한 열압이 암만하여도 심상치 아니하여 서투른 무당이 궂은일에는 맞추는 것처럼 상해방면으로서 동진하는 저기압이 무서운 호우를 가지고 온다하던 측후소의 예보가 반갑지 아니한 일에만 어쩌다 한번 맞출 듯도 하다. 차창으로, 으스름한 월광에도 살펴지는 한강의 탁류를 보고 비야 올지라도 저놈의 광폭(狂暴)이나 없었으면 하는 기원을 마는 수 없었다. 하휴(夏休)로 귀성하는 학생, 원산의 욕장과 삼방의 약수로 량미(凉味)를 따라가는 이, 경부선 불통으로 수일 엄체(淹滯)되었던 남래행객의 일시 주집(注集) 등으로 인하여 차석(車席)의 붐빔은 비할 데가 없고 용산에서 청량리에서 연방 차량의 연결을 늘리건마는 차는 겨우 한 채를 더 달면 손은 이미 두세 채나 잡으리만큼 들이덤볐다. 원체 찌는 날을 사람의 운김이 한층 더 불을 지피고 지나인 노동자 떼의 지저귀는 소리와 어린애들의 울음소리가 그 위에 또 기름을 부어서 좀 서늘할까 했던 야행도 에누리 없는 홍로(紅爐) 그것이었다. 다만 이 길이 백두산 걸음이어니하는 생각을 하고는 일도(一道)의 량맥(凉脈)이 심파(心頗)에 뛰놀음을 느껴 적이 스스로 위로할 뿐이었다. 한양 5백년의 찌든 산하와 궁예 천년의 묵은 자최의 감흥은 벌써 법석과 더위의 아가리로 쏙 들어가 버리고 잠이나 들었으면 하는 생각만이 마음에 간절하였다. 그러나 염치없는 북새는 한 도막의 잠을 주기도 결코 활소하지 않고 겨우 명상의 길목을 얻어서 비로소 이것저것을 다 잊어버리는 기회를 얻었다. 백두산을 가다니? 손바닥만한 조선반도가 도모지 백두산 하나가 하늘을 뚫고 우뚝 솟는 통에 생겨난 주름살이오, 터진 금인 것들이어늘 이제 따로 간다는 백두산이 어디란 말인가. 부루퉁이거니 골짜구니거니 조선의 어느 흙 한덩이가 백두산신(白頭山身)의 일부 일분이 아니며 궁둥이를 붙임이나 발자국을 옮김이나 조선안에서 꿈쩍함이 어느 것이 백두산중에서 오비작거림이 아니길래 이제 이 길을 특별히 백두산으로 간다고 하는 생각도 났다. 사람이 공기를 모르고 고기가 물을 잊어버리는 셈으로 온통 그 속에 들어 있을수록 그런 줄을 모르는 것이 대개 상례어니와 조선인의 백두산 의식도 대개 이러한 종류라 할 것이다. 언제 아무데서고 이마를 스치는 것은 백두산의 바람이요, 목을 축이는 것은 백두산의 셈이요, 갈고 심고 거두고 다듬는 것은 백두산의 흙이요, 한 집의 기둥뿌리와 한 동네의 구수막이를 붓박은 것은 백두산의 한 기슭이니, 손행자(孫行者)의 근두운(筋斗雲)이 디디고 뛰어도 관음대사(觀音大士)의 장악외(掌握外)를 탈출하지 못한 것처럼 아무리 날 때 길 때 하늘이 냈다하여도 조선인의 등양비약(騰揚飛躍)은 밤낮해야 백두산의 이모저모에서 올지 갈지를 한바탕함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떠나려해 떠날 수 없고 떼려해 떨어지지 아니할 사정에 있는 것이 우리 대(對)백두산의 관계이다. 따로 가지 아니해도 앉은 거기가 곧 백두산이요, 등지고 달아나려 해도 밤낮 따라다니는 것이 온통 백두산이니 핍절(逼切)하게 말하면 백두산과 우리는 본래 한 덩이요, 결코 두 조각이 아닌데 가는 것 오는 것은 무엇이며 찾는 이 받는 이는 누구라 하랴. 억지로 말을 만든다하면 이번 이 길은 백두산의 아랫골로서 그 윗등성이를 올라감이라고나 할 것이란 생각도 하였다. 어느 틈엔지 잠도 들었다. 깨어보니 검불랑(劒拂浪)마루턱도 벌써 넘은지 오래고 동(東)을 트고 나오는 아침의 빛이 오봉산 꼭지를 어둠에서 해방하기 비롯하였다. 들이 높으며 하늘은 더욱 낮고 구름은 더욱 겸손하다. 기차바퀴의 구르는대로 퍼져나가는 빛이 어느덧 숭용장활(崇龍壯闊)한 반가운 신세계를 우리의 안전에 전개하였다. 광명이 또한 동방으로서 왔다. 욱일(旭日)에 채색된 숭엄한 고원은 쌀쌀한대로 홋홋한 봄이요, 꽃없는 채로 찬란한 봄동산인데 그리로 향하여 마주 달려드는 기차는 극락의 관문에나 들어가는 것처럼 기세도 좋고 운의(韻意)도 좋으며 심상한 궤도도 공연히 신비와 희망으로 이 지로표(指路標)와 같기도 하다.


  최남선 일행은 7월 29일부터 도보로 혜산을 떠나 백두산을 근참한 뒤 8월 7일 혜산으로 돌아옵니다. 그 기록은 다음해 1월 23일까지 89회에 걸쳐 연재됩니다.




1927년 1월 23일자 4면




백두산 근참(覲參) 89회

그리운 인환 세계



8월 5일. ‘저것 좀 보라’는 소리가 기약치 아니하고 여기저기서 나기에, 무엇인고 하고 눈은 비비고 나가매, ‘히아!’하는 소리가 내 목구멍에서도 튀어나온다. 9분 암색(暗色)에 1분 미명(微明)이 날락말락하여, 무엇이라는 것보다 굼실굼실이라고나 할 일종의 기운이 지면 전체에 서렸는데, 1분의 명기(明氣)가 9분의 암색을 마음대로 구역(驅役)하여 혹 구거(溝渠)도 만들고 혹 성장(城障)도 짓고 혹 창구(瘡口)도 내여, 종종(種種)의 변화를 신기롭게 일으킨다. 커다란 덩어리가 져서는 이리저리 뒹굴기도 하고, 기다란 횡강목이 되어 가지고는 가로 질렀다 세로 질렀다 하기도 하고, 경주들도 하고, 숨바꼭질들도 하고, 편편히 척구(隻鷗)로 날기도하고 핍핍(乏乏)히 쌍부로 떠놀기도 하여, 갖은 조화를 이루 형언할 길 없다. 명기가 느는대로 암색이 줄며, 그대로 무놀이의 조각이 잘아지고, 빛이 엷어져서는 고개를 살살 돌리는 빛에, 꼬리를 홰홰 내젓는 빛에, 강둥강둥 앙감질하는 빛에, 쪼르르 도망질하는 빛에, 말하자면 요사스럽다할 변화가 잦은 장단으로 연출된다. 무엇이랄 수 없으매 삼지의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온천수이기 때문이요, 온천만인 것이 아니라 냉수하고 마주뜨리는 물이기 때문이다. 소도(小島) 뒤편에는 온천이 나오고, 그 맞은쪽에서는 섭씨 4도의 냉수가 침입하는데, 그래도 평균 섭씨 20도 이상의 수온을 가져 김이 무럭무럭 떠오르며, 이 추운 아침에 벌거벗고 들어가는 것들이 보기에 끔찍끔찍하지마는, 들어간 이들은 아주 태연한 형편이다. 이렇게 평면적으로 온냉(溫冷) 양수가 교회하고, 수직적으로는 한난(寒暖) 양기가 충돌하매, 무놀이의 생성과 활동에는 저절로 맞춤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자(莊子) 열자(列子) 같은 것에 나오는 선인(仙人)이란 이의 기분으로 천지간 청호기(淸灝氣)의 최고조를 발보이는 아침의 삼지변으로 소용하는 취미는 백두산행 중의 가장 미묘한 일심경(一心境)에 속하는 것이요, 말과 글에 아울러 끊어지는 유현(幽玄)한 일정경(一情景)이었다. 느지막히 출발하여 천왕당에서 정성스러운 하직을 여쭙고, 밀림 40리를 단참에 통과하여 허항령구로 내달아서 오래간만에 포태리 촌가가 까맣게 내려다보일 적에는, 맨 먼저 눈물이 핑그르 돈다. 이렇게도 반가울까? 미쳐서 뛸듯하기도 하여 누구나 제 마음 진득지 못함을 스스로 우습게 여기는 모양이 보인다. 그 동안 일주일이 다 못되는 산거야처(山居野處)요, 그나마 단체적의 질번질번한 것이었건마는, 게딱지같은 모옥(茅屋) 십수(十數)에, 지하로서 나와서 천당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생긴다. 기다란기다란 협곡을 빠져나가서, 일광 출렁거리는 선경(仙境)을 발견한 것도 같고, 철비(鐵扉· 쇠로 만든 문짝) 석원(石垣· 돌담)에 유폐되었던 몸이 금시에 놓여서 자유신(自由身)이 된 듯도 하니, 남은 고사하고 그렇지 않은 듯한 나도 사바(娑婆) 집착이 이렇듯 완고함을 비로서 깨닫고, 애오라지 놀라지 아니치 못하였다. 후 1시 반에 전동 총출의 환영을 받으면서, 숙참(宿站)으로 개방한 대궐같은 순사주재소로 들어가매, 차가 끓었고 술이 더웠고, 목욕탕이 김을 설설 내며, 여편네도 눈에 보이고, 개 소리 닭의 소리도 귀에 들어와서, 마치 인간관격(人間關格)에 회생산(回生散)이 급효 난 것 같다. 선생님네들은 채집 표본 포쇄들 하시기에 분주한 양하지마는, 나 같은 한인(閑人) 몇 사람은 순사를 대수(對手)로 대낮부터 순배수작(巡杯酬酌)을 시작하여, 오래간만에 실없는 소시로 해를 지움도 인간정조(人間情調)라 할 것이었다. 8월 6일. 8시반 출발. 아침 예기(銳氣)에 곤장덕(昆長德)을 단참(單站)에 돌파하여, 물방아 많은 보태리에서 일신학교 박군(朴君)의 귀리국수 대접을 맛나게 받고, 청림을 지나서 후 5시 20분에 보천보로 귀착하였다. 포태리에서 인간에 돌아온 듯하던 마음이 보천보에서는 고향 땅을 밟는 것 같은 생각을 가진다. 본디는 청림에서 대평리로 가서, 떼를 타고 바로 혜산진으로 내려갈 예정이던 것이나, 아랫녘에도 그 동안 비가 많이 와서 협류(峽流)가 격하여 위험하다하므로, 보천보에 가서나 승차하기로 한 것이다. 이제는 타려니 하던 다리 아픈 축들의 눈살 찌푸려짐이 얼마만큼 딱하였다. 8월 7일. 원체 한마(悍馬· 사나운 말)같은 물이라, 하룻밤 동안에 길든 줄을 모르겠으매, 역시 보행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래도 내려가다가 내려가다가 하였지마는, 간 곳마다 속았다 속았다하고 끌려가는 것이, 마치 인생의 행로를 축사(縮寫)한 것도 같아서, 딱한 중 재미도 있다. 압록강 물이 미상불 늘기도 늘어서 개울 같던 것이 강이라고 할 만큼 되고, 급한 여울이 손길들을 마주 잡은 듯한 것을 보매, 떼를 탔더라면 낭패일 것을 깨달았다. 강 건너 청의인(靑衣人)들의 의구한 미영목송리(眉迎目送裏)에 우리의 단열 장대는 걸음걸음 인환으로 당기어들었다. 10리 목 20리 목마다 혜산진으로서 출영하는 이들이 벌써 등대하여 있으며, 괘궁정(掛弓亭) 못미쳐 시가의 입구에는 시민에 학생에 군대에 길이 좁다고 도열하고 주병(酒餠)에 다과에 식품이 산적하여, 그야말로 개선군이나 맞이하는 듯함에는 환송하기 그지없으며, 청년회 대표란 이가 특히 나를 위하여 위문이 비지(備至)하고, 유학생 대표인 몇분 청년이 석찬으로써 미리 부름에는 관곡한 정이 깊이깊이 감패된다. 여관에 이르러 오래간만에 백두산 먼지를 떨기는 오후 4시가 지나서이었다. 7월 29일 출발, 8월 7일 도착, 전후 10일간 염려하던 행정을 아무 일 없이 건쾌히 마쳤음도 오로지 단군천왕의 영우(靈佑)이심을 감사치 아니할 수 없었다.




온다고 간다 하나

게가 도로 거길 뿐을

님의 해 안 쪼이는

어느 구석 있겠다해

한 가지 그 품속에서

예라제라 하리오

지리산 천왕봉에

님의 신끈 글러 보고

금강산 비로봉에

허리띠를 만졌더니

백두산 장군봉두에

입도 마처 보도다

버려서 외론 몸이

뉘씨임을 몰랐더니

하누님 큰 대궐이

본대 내집이란말가

이 뒤야 아무데 간다

집 잃을 줄 있으랴

(졸문을 길게 끌고 그나마 동강을 내어서 애독열위께 황송한 일 많습니다. 백두산 기행은 우선 이것으로 끝을 막아서 도서(圖書)병한 일책으로 간행하겠사오며 틈 있는대로 압록강유하기(鴨綠江流下記)를 속초(續草)할까 합니다. 작자)  




“첫째, 최남선에게 국토기행은 민족의식을 함양하고 민족주의자로서의 정신적 동력을 만드는 종교적 순례였다. 금강산과 지리산에 대해서는 순례라는 말을 썼고 백두산에 대해서는 근참(覲參)이라했다. 그는 그런 의사, 종교적 태도로 국토기행에 임했다…(중략)…둘째, 최남선의 국토기행은 역사학자인 그에게 일종의 필드워크이기도 했다. 그는 기행을 통해 조선의 민속지식에 접근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자신의 단군 연구의 뼈대를 만들고 살을 붙여갔다…(중략)…최남선은 그때까지 단군조선의 성지로 생각했던 곳이 바로 백두산이었다. 그 자신이 ‘계고차존(稽古箚存)’(1918)에서 조선 최초의 입국지라 설정했던 백두산록의 고지평원 천평(天坪)으로 가는 길이, 그리고 그의 이른바 ‘불함문화권’의 으뜸가는 성지라 생각했던 백두산의 천지로 가는 길이 예사로울 수는 없다. 백두산 가는 길이 최남선에게는 순례의 절정이었던 것이다.” (서영채, ‘기원의 신화를 향해 가는 길’, 한국 근대문학과 민족 – 국가 담론, 103~106쪽)




 ‘백두산 근참기’와 별도로 1926년 9월 21일부터 10월 10일까지 4면에 백두산 사진이 14회 연재됩니다.




1926년 8월 9일자 2면

천지(天池)에 인적(人跡)가자 돌연(突然)히 풍우대작(風雨大作)

탐험대가 백두산 텬지에 배를 띠우울 때 갑작히 풍우가 이러나 활동사진만 박어

탐험대 삼지(三池)서 온천 발견


백두산등산대는 지난 29일 등산 이래 연일 내리는 비로 인하여 일행이 적지 않은 고생을 하며 등산을 계속하여 지난 삼일에 정상에 도달하였는데 일행은 등산도중에 산 도야지 떼를 만나 총으로 잡기도하고 여러 가지 식물을 채취도 하였는데 정상에 올라 천지(天池=용왕담)를 탐험하고자 가지고 갔던 배를 띠우며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과 같이 갑자기 풍우가 대작하며 안개가 뽀얗게 일어나 어쩔 수 없이 목적을 달치 못하고 그 못 경계의 활동사진만 박고 4일에 산정을 떠나 재작 7일에 혜산진에 무사히 귀환하였는데 내려오던 길에 중복에 있는 삼지(三池)를 측량할 때에 삼지부근에서 온천을 발견하였는데 온도는 섭씨 22도 5부라 한다. 이 온천이 나는 곳은 많은 산이 사방을 둘러싸고 가장 가까이 침봉이라는 산이 있어 그 풍경이 가장 아름다움으로 장래에는 고원별장지로 세계에 유명하게 되리라더라.(백두산 등산대 전보)




1926년 9월 21일자 4면




백두산 사진화보(1) 포태산 장군봉




1926년 9월 22일자 4면




백두산 사진화보(2) 허항령 천왕당




1926년 9월 23일자 4면




백두산 사진화보(3) 허항령상 노영




1926년 9월 24일자 4면




백두산 사진화보(4) 익갈나무 밀림




 1926년 9월 25일자 4면




백두산 사진화보(5) 무수한 자도목




1926년 9월 26일자 4면




백두산 사진화보(6) 임간(林間)의 소게(少憩)




1926년 9월 27일자 4면




백두산 사진화보(7) 천평(天坪)의 소흔(燒痕)




1926년 9월 29일자 4면




백두산 사진화보(8) 신무치의 열천(列泉)




1926년 9월 30일자 4면




백두산 사진화보(9) 밀림의 천평




1926년 10월 5일자 4면




백두산 사진화보(10) 대소(大小)연지봉




1926년 10월 6일자 4면




백두산 사진화보(11) 분수령(分水嶺) 정계비




1926년 10월 7일자 4면




백두산 사진화보(12) 천지




1926년 10월 8일자 4면




백두산 사진화보(13) 화구의 삭벽(削壁)




1926년 10월 10일자 4면




백두산 사진화보(14) 망천후(望天吼)




  최남선은 허항령에서 사당집 신주를 보고 “어쩌면 꼭 그래야 할 그것이 저리도 분명하고, 깨끗하게(그래 깨끗하게) 큰 글자로 깊이 새겨있느냐 말이야. 바로 뚜렷하게 ‘천왕(天王)’이라고! 내 평생 이때까지 생각한 일이 열이면 열이 다 불여의(不如意)하여 기대대로 된 일이라고는 거의 없다함이 가(可 )한데, 오직 한번 옥중에서 단군 문제의 기사(期死)적 연구를 행하여 대체의 견해를 세우고 단군이 이론상으로 ‘단굴’이란 말의 대음(對音)일 것을 추정하고서, 과연 실증이 있는지 없는지, 문자 전설에는 물론 없거니와…(중략)…이제 뜻밖에 여기서 다시 한번 똑같은 심경을 얻으매,  ‘천왕(天王)’ 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가 저절로 분용격발(噴湧激發)치 아니치 못하여 그것이 자꾸 절이 되어 나오는 것이었다.” (1926년 8월 28일자 1면)고 술회합니다.




“여기는 삼지(三池)라 하여 고래로 이름이 높이 들린 곳이니, 대개 대소(大小) 참차(參差)한 여러 늪이 느런히 놓인 가운데 셋이 가장 뚜렷한 고로 대수(大藪)를 들어서 이름한 것이라 하며, 실상 늪의 수로 말하면 시방도 넷 혹 다섯으로 볼 것이며, 오랜 전일(前日)에는 혹 더 많았을 것이 필연하니, 한번은 칠성지(七聖池)의 이름이 있음은 필시 일곱으로 보이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926년 9월 3일자 1면)




“오랜 전승을 거(據)하건대, 조선 인문의 창건자는 실로 이 백두산으로써 그 최초의 무대를 삼아서, 이른바 ‘홍익인간’의 희막(戱幕)을 개시하고, 그 극장을 이름하되 ‘신시(神市)’라 하였다한다. 이것이 단군의 탄강지요 조선국의 출발점이라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가장 기념에 치(値)하는 이 중대한 유적은 대개 어느 지점으로써 의(擬)하던 것일까?…(중략)…아무것보다 먼저 상기되어야할 이 중요한 문제가 이때까지 한각(閑却)되었음은 민족적 나산(懶散)도 극하다 할밖에 없다.” (1926년 9월 8일자 1면)




“천평은 조선역사의 요람기를 파묻은 큰 무덤이다. 행여 신성한 유적이 염루(染陋)한 후인의 손에 들어갈까 무서워서 천화(天火)의 폭발이 이를 회신(灰燼)만들고, 용암의 유피(流被)가 이를 석결(石結)해 놓은 건정(乾淨)한 고적지이다.…(중략)…시인이 나와야한다. 민족시인 역사시인 백두산시인 천평시인이 나와야한다. 그리하여 그 찬 재의 허물을 벗기고 그 밑에서 구원히 뜨거운 불길을 날리는 조선민족의 떡잎정신을 거양(擧揚) 규창(叫唱)하여야한다.” (1926년 9월 10일자 1면)




“바람이야말로 세다. 천지로서 나와서 천산을 취동(吹動)하는 것이매, 무론 글자 그대로의 천풍이다. 그렇지 않아도 신기(神氣)가 전국에 서리서리하여 심신이 한가지 아득해지는데, 천지를 들먹거리는 강풍이 각각 제 한 몸씩으로만 덤비매…(중략)…이내 지희극원(至希極願)을 이루어지라 하는 마음이 불기둥처럼 가슴을 버틴다. ‘어머니! 저올시다. 괘씸하지마는 잠깐이라도 거룩하신 얼굴을 내보여 주시옵소서. 온 것이 늦기는 하였습니다마는 멀기도 합니다. 제발 일분간이라도요’하고 연방 빌기 위하여 눈을 감았다가는 응했나하여 고대 다시 떴다.  영하 섭씨 5도니 6도니 하여 ‘추워추워’하는 소리가 이구에 동출하고, 화톳불을 질러야한다는 둥, 암석채집이라도 하자는 둥 떠들썩법석들을 하지마는, 내 발은 심은 것 같고, 내 눈은 잡아맨 것처럼 행여 터질까하는 앞만을 내다본다. 이 순간에는 천지가 부서져도 이 구멍으로 나는 빠져나갈 단단한 일념뿐이다.”(1926년 10월 20일자 1면)




“이렇게 잠시 예찬을 올리는 동안에도 천지의 신비한 활동은 일각도 정지하는 일이없다. 일점의 뿌연 기운이 수면에 오르기 무섭게 웅혼 장려한 신전의 광경이 금시에 꿈같이 사라지고 일선의 빤한 기운이 자욱한 속에서 움직이기 무섭게 밤이 가고 낮이 와서, 일괴의 혼돈이 문득 영위(靈威)한 대성용으로 환변(幻變)한다.…(중략)…천지의 생멸이란 본디부터 백두천왕의 일순임에 불과하는 것은 사람이란 버러지들은 바로 긴 시간으로나 여겨서,두꺼비 씨름에 머리악들을 쓰고, 그 중에도 학자라는 꼼지라기는 이것을 또 바로 큰 사변이나 여겨서, 오묘한 이치를 알겠다하여, 세세상전(歲歲相傳)하면서 수(數)를 벌인다, 표(表)를 꾸민다함이 우습다하자면 퍽 우스운 일이다.” (1927년 1월 6일자 4면)




“나는 이것을 신화라고도 아니하고 역사라고도 아니하고 단적(端的)하게 일컫되 신전(神典)이라 한다. 이것이 진실로 신화이기도 하고 역사이기도 하지마는, 그보다도 더 우리의 신성영귀(神聖靈貴)한 민족신앙의 경전이던 것이요, 우리의 박후고명한 인생이상의 표치(標幟)인 것이다. 우리의 삼세십방(三世十方)을 통한 위대성과 총명질(聰明質)을 표상해 놓은 용장상탑(龍藏象塔)인 것이다.” (1927년 1월 12일자 4면)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相) 선생은 ‘육당의 근업(近業) 백두산기(白頭山記)를 읽고’란 글을 5회 게재했습니다.




1927년 9월 8일자 3면




육당의 근업(近業) ‘백두산기(白頭山記)’를 읽고(1)




  기행문이라는 것! 이것은 인생의 기록이다. 넓게 말하면 역사나 과학이나 온갖 문학이 인생행정의 기행문이다.




1927년 9월 9일자 3면




육당의 근업(近業) ‘백두산기(白頭山記)’를 읽고(2)




이로부터 해(該) 독후감을 적어보려 하거니와, 나로써 가장 깊이 경복하고저하는 점은 저자의 그렇게도 많이 사용한 어휘다.…(중략)…육당은 시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시인이다. 시상인(詩想人)이다. 시상으로 사실을 만저거린 한 신선한 여행가라고도 할 것이다.




1927년 9월 10일자 3면 




육당의 근업(近業) ‘백두산기(白頭山記)’를 읽고(3)




  이리하여 보건대 사가(史家)인 저자의 면영(面影)이 또한 뚜렷이 시인으로 하여 보이는 것이며 사료에 공헌이 많으리라고 짐작하였던 것이 곧 전편의 시로 하여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1927년 9월 11일자 3면  




육당의 근업(近業) ‘백두산기(白頭山記)’를 읽고(4)




  백두산 근참기는 얼른 말할지라도 신화와 전설 사화(史話)와 인물담 그대로 곧 교과서 노릇을 할 수 있고 우리의 정신을 북돋움에 이바지됨이 많다할만한 책이라 아니할 수 없다.




1927년 9월 12일자 3면




육당의 근업(近業) ‘백두산기(白頭山記)’를 읽고(5)




백두산 하나를 백두산으로 아는 것보다 조선인의 백두산으로 아는 것은 이 저자의 영광이요 조선인의 다 같이 알바이다. 백두산은 조선의 백두산이요 육당의 ‘백두산 근참기’는 조선의 문헌이다.




“백두산 근참기의 서두에서는 ‘백두산은 동방 원리의 화유입니다. 동방 만물의 최대 의지(依支)요 동방 문화의 최요(最要) 핵심이요 동방 의식의 최고 연원입니다. 또한 백두산은 천산성악으로 신앙의 대상이요, 역사의 출발점이며, 문화의 일체 종자이고 동방 대중의 생명의 원적이었으며, 화복의 사명이고, 활동의 주축이었습니다’라고 썼다. 이것은 바로 백두산이 우리 민족의 영산일 뿐 아니라 동방 민족의 시원으로 친다고 단언한 것이다. 이 백두산 근참기가 발표됨으로써 3.1운동 후의 겨레의 역사 그리고 얼과 뜻을 더욱 고취하는 일이 되었다.” (산악인 손경석, ‘북한의 명산’, 서문당, 1999, 102~103쪽)




“지리산 금강산 백두산 산행은 최남선에게는 단군의 흔적을 검증하고 고신도(古神道)의 연원을 밝혀 ‘불함문화론’을 검증하는 작업의 일환이었다. 예를 들면 백두산 기행을 통해 최남선은 ‘동일한 단군의 자손’이라고 하여 민족의 시조로서 단군을 강조했다…(중략)…최남선은 ‘인류 발달상의 최대 사건은 단군조선을 말미암아 인류 양지(良知) 양능(良能)의 최초 우(又) 최대 발현을 짓는 조선 건설운동, 환국(桓國) 연장 계획의 성립이다’고 하여 단군과 단군조선에 관해 적극적인 의미 부여를 했다. 즉 1920년대 중반 그 스스로가 ‘종교적 순례’로 규정한 백두산 기행을 통해 단군을 민족의 기원 원천으로 상정하는 것으로 변화했다. 또한 최남선에게 국토 순례는 고대사 연구와 함께 ‘조선 정신’을 확인하는 작업의 일환이었다…(중략)…인격(人格) 내지는 신격(神格)적 존재화된 국토는 그것이 지닌 고유한 의식이 있는 것으로 형상화되었다. 다시 말해 금강산 백두산 기행을 통해 ‘조선 정신’은 ‘금강적 원리’ ‘백두산 원리’로 구체화된다…(중략)… ‘조선인에게 백두산 의식의 한 전환기를 만들고, 작게는 사사로이 적년(積年) 학구(學究)하는 바의 실험 임증(臨證)할 기회’로 삼고자 했다…(중략)… 따라서 1920년대 단군에 대해 근대사학적 방법론과 다른 ‘밝 도(道)’를 통한 접근을 했듯이, 이러한 인식은 최남선이 학습하고 소개했던 근대 지리학과는 상충되었다. 이러한 논리적 충돌에도 불구하고 아울러 이에 관한 전환에 관한 설명 없이 최남선은 ‘백두산 의식’ 등의 표현처럼 산천에 의식이 있다고 보았으며, 백두산 금강산 등은 정신적 영역에서의 자산으로 여겼다.” (류시현<柳時賢>, ‘최남선의 근대 인식과 조선학 연구’ , 고려대 박사학위논문, 2005년, 115~118쪽)




  이에 앞서 1925년 6월 동아일보 무산지국(茂山支局)에서 백두산 탐승단 조직을 추진했으나 남부지방에 일어난 수해 때문에 중단했습니다.




1925년 6월 19일자 3면




백두산 탐승단, 본사 무산지국(茂山支局) 주최 단원을 모집 중




1925년 7월 4일자 3면




백두산 탐승단원

사고(社告)

주최 동아일보 무산지국




1925년 7월 15일자 1면




영숭(靈崇)한 백두산 탐승, 제반 준비가 구체화



본사 무산지국 주최에서 백두산 탐승단을 조직한다함은 기보한 바이어니와 기후 계획은 착착 진척되어 좌기사항이 결정되었다고(무산)

◇사진반 = 백두산 승경과 기념사진을 촬영키 위하여 본 지국 사진반 기자 한정우(韓鼎禹)군이 동행.



1925년 7월 28일자 3면




본사 무산지국 주최의 백두산 탐승 연기




1925년 8월 8일자 3면




백두산 탐승 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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