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는 창간 후 첫 사업으로 단군 영정 현상공모를 한데 이어 민족의 영산(靈山) 백두산을 생각케하는 기획시리즈를 시작했습니다. 첫 기행은 창간호에 엑토르 말로 작 ‘집 없는 아이’의 일본 번역서 ‘오노가쓰미’(己が罪 – 내가 죄)를 번안, ‘부평초(浮萍草)’로 연재했던 우보 민태원(牛步 閔泰瑗) 사회부 기자이자 소설가가 나섰습니다.
아민족(我民族)의 발상지! 신화 전설의 백두산에
본사 특파원과 사진반 금일 상오 십시 남문 출발
‘4천여년의 역사를 가진 조선 시조를 내인 이 산은 과연 본사 특파원의 손을 거치어 무엇을 나타내려는가.’
1921년 8월 6일자 3면
조선 민족의 시조 단군이 탄강하고 조선 안에서는 제일 높은 산으로 산머리에는 사시를 두고 눈이 녹지 아니하는 백두산은 실로 조선 민족의 옛 역사의 발원지이요 일시 동아(東亞)의 천지에서 위엄을 떨치던 배달사람의 신비를 감추고 있는 산이라 금년 하기에 함경남도청에서 백두산 탐험대를 조직하매 본사에서는 다년 신문기자에 종사하던 민태원(閔泰瑗) 씨와 사진반 산고방결 양씨를 파견하여 서늘한 사진과 신비하고 재미있는 전설로 더위에 괴로워하는 독자를 위로코저 하는 바 양씨는 금일 오전 열시 이십분 차로 함흥을 향하여 떠나서 함흥서부터는 자동차로 혜산진까지 간 후 장쾌한 도보 탐험을 개시할 터이라 기사와 사진이 독자에게 어떠한 감흥을 줄 것은 독자의 판단에 맡기고 오직 정성을 다할 뿐이라 사천여년의 역사를 가진 조선 시조를 내인 이 산은 과연 본사 특파원의 손을 거치어 무엇을 나타내려는가.
민태원 기자의 백두산 등반은 우리말 신문기자로는 처음이었습니다.
“혜산진에서 백두산에 올라가 ‘백두산행’이란 기행문을 8월 20일부터(동아일보 8월 21일자를 뜻함 – 인용자 주) 17회에 걸쳐 연재했다. 민 기자는 이 기행문에서 우리나라 건국에 얽힌 단군설화를 소개하여 백두산에 대한 겨레의 역사의식을 깨우치기도 했다. ‘물빛이 쪽빛보다 더욱 푸르고 거울보다 더욱 고요한 천지’(靑於藍靜於鏡 – 인용자 주)로 표현한 글을 일제의 퍼런 서슬에 억눌린 민족에게 잊지 못할 감동을 심어주었다. 그만큼 백두산은 민족의 정신적 지주였다.” (산악인 손경석, ‘북한의 명산’, 서문당, 1999, 101~102쪽)
1921년 8월 21일자 1면
백두산행(북청에서)과 백두산 탐승(探勝) 화보(一) 함흥에서 북청가는 도중…수중(水中)을 행(行)하는 일행의 자동차
1921년 8월 21일자 3면
백두영봉(白頭靈峰)에 감격한 등산대
청어람정어경(靑於藍靜於鏡)한 성지(聖池)의 비경
일행은 작일 혜산진에 도착
개벽(開闢) 후 처음
천지의 오경(奧境)을 실사(實寫)
본사 특파원의 모험활동(冒險活動)
“(1921년 8월 16일) 상오 11시에 산꼭대기에 도착하매 천지(天池)의 물빛이 쪽보다도 더욱 푸르고 거울보다도 더욱 고요하여 창공에 배회하는 백운(白雲)의 그림자와 전후좌우에 삼엄하게 버텨선 고봉준령(高峰峻嶺)의 머리가 그 속에 비치어 그 아름다운 경치는 그릴 수가 없으며 그 장엄한 풍경은 오직 감격을 일으킬 뿐이었다. 이윽고 이때까지 고요하든 천지의 안에서는 천변만화의 조화가 이러나는 듯 하드니 비가 되고 구름이 일고 안개가 끼고 우박이 쏟아져서 경건(敬虔)한 생각을 일으키는 동시에 두려운 마음을 왈칵 나게 하였음으로 일행은 오랫동안 천지에 머무르지 못하게 되었다. 나(閔 特派員) 그들의 물러감을 매우 애석히 생각하는 동시에 사진반과 다른 두어 사람으로 더불어 비를 무릅쓰고 천지의 가로 차음 차츰 내려가매 천지가 다행히 회복되어 하늘이 금시에 맑아지는지라. 우리는 하늘에 감사를 드리고 이틈을 타서 천지의 사진을 박히기로 하였다. 백두산 천지 속에서 사진을 박힌 일은 본사 사진반으로서 백두산이 생긴 이후 처음이라 할 것이다. 산정에서 여섯 시간을 지난 후 밤 10시경에 월색을 밟으며 발을 돌이켰다. 이와 같이 천우신조하여 무사히 목적을 달한 일행은 그 이튿날부터 일사천리의 기세로 산을 내려 자동차에 몸을 싣고 20일 아침에 당지 혜산진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그동안 10여일에 매일 좋은 일기를 빌리신 하늘의 도움에 감사하며 다음에 주최자 편의 진력을 사례하는 바이다. 기자단은 이제 바로 이곳을 떠나 함흥을 향하는 중에 우선 소식만(20일 오전 7시 혜산진 특파원 발전).”
1921년 8월 22일자 1면
백두산행(북청에서)과 백두산 탐승 화보(二) 천험(天險) 함흥령을 등(登)하는 등반대 일행
1921년 8월 23일자 1면
백두산행(북청에서)과 백두산 탐승 화보(三) 등산대 일행의 통과한 북청 시가
1921년 8월 24일자 1면
백두산행(혜산진에서)과 백두산 탐승 화보(四) 혜산진의 등반대 일행 환영회
1921년 8월 26일자 1면
백두산행(혜산진에서)과 백두산 탐승 화보(五) 혜산진을 출발하는 등반대 일행
1921년 8월 27일자 1면
백두산행(포태리에서)과 백두산 탐승 화보(六) 청림동(靑林洞) 영림지청의 작업소
1921년 8월 28일자 1면
백두산 탐승 화보(七) 포태산리(胞胎山里)에서 포태산 장군봉을 망(望)함
1921년 8월 29일자 1면
백두산행(포태리에서)과 백두산 탐승 화보(八) 포태산록(胞胎山麓)의 밀림지대
“백두산 천지 속에서 사진을 박힌 일은 본사 사진반으로서 백두산이 생긴 이후 처음이라 할 것이다.” 백두산행 연재 첫날, 천지(天地) 개벽 후 처음 촬영했다고 밝힌 백두산 천지(天池) 사진은 1921년 8월 29일자 3면에 실렸습니다. 이날은 경술국치일이었는데 지면 맨 위에 가로로 크게 배치해 민족혼을 일깨웠습니다.
1921년 8월 29일자 3면
천고(千古)의 신비경(神秘鏡)인 천지(天地)의 전경(全境)
본사 특파 사진반의 고심 촬영한 사진
천지(天池)는 혹 용왕담(龍王潭)이라고 일컫는 백두산상의 큰 못이라. 신비 중의 신비로 천고에 깊이 감추어 있던 곳이니 그 깊이는 과연 얼마나 되는지를 측량할 수 없거니와 주위가 사십리요 그 외륜산(外輪山)의 주위는 실로 팔십리가 된다고 한다. 천인절벽이 사방에 둘러서 동편 쪽의 길목 하나만 막으면 나는 새도 오히려 그 안에 들기를 두려워할 것이며 천지의 물을 마시고 사는 백두산 상의 신령한 사슴들도 그 물을 마시려면 이른 아침에 떼를 지어 동편 쪽 길목으로 모여든다고 한다. 사람이 만일 청명한 날에 백두산을 오르면 절정에 발을 올려놓고 눈을 천지에 옮길 때에 안계가 황홀하고 가슴이 두근거리어 얼마동안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맑고 조용한 천지의 물은 구름의 형태와 일광의 반사로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는 연연한 각종의 푸른빛이 찬란하게 빛나며 주위로 일천삼사백척이나 되는 병풍같이 두른 외륜산의 채색석벽이 거꾸로 비추어 오색의 영롱한 모양은 그저 거룩하고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한번 변화가 일기 시작하면 흑쪽빛 같이 흑먹빛 같이 변화가 무궁하며 안개가 들이고 구름이 덮어 형체를 감추는 일도 종종할 뿐 아니라 어떠한 때에는 그 안으로 이상한 소리가 들리며 뇌성벽력과 우박눈비를 부르는 일도 종종하다고 한다.
1921년 8월 30일자 1면
백두산행(삼지연에서)과 백두산 탐승 화보(九) 허항령(虛項嶺) 상에 있는 국사당(國師堂)
1921년 8월 30일자 3면
만록총(萬綠叢) 중의 일점홍(一點紅)인 삼지연(三池淵)
1921년 8월 31일자 1면
백두산 탐승 화보(十) 천화(天火)에 소실된 대 삼림의 광경
1921년 9월 1일자 1면
백두산행(삼지연에서)과 백두산 탐승 화보(十一) 노영(露營) 준비 중의 등산대
1921년 9월 2일자 1면
백두산행(삼지연에서)과 백두산 탐승 화보(十二) 신신무치(新神武峙)의 폐허를 빗나이는 야화
1921년 9월 2일자 3면
백두산의 전경
1921년 9월 3일자 1면
백두산행(삼지연에서)과 백두산 탐승 화보(十三) 신신무치(舊神武峙)의 산신당(山神堂)
1921년 9월 4일자 1면
백두산행(무두봉에서)과 백두산 탐승 화보(十四) 무두봉(無頭峰) 상의 백설(白雪)
1921년 9월 5일자 1면
백두산행(백두산상에서)과 백두산 탐승 화보(十五) 백두산 하의 특수식물 돌죽
1921년 9월 6일자 1면
백두산행(백두산상에서)과 백두산 탐승 화보(十六) 무두봉( 無頭峰) 부근의 소태(蘇苔) 식물지대
1921년 9월 7일자 1면
백두산행(백두산상에서)과 백두산 탐승 화보(十七) 천지 동반(東畔)에 입(立)하야 서북방을 망(望)함
1921년 9월 8일자 1면
백두산행(귀로에서)과 백두산 탐승 화보(十八) 조선과 중국의 정계비(定界碑)
민태원은 “고어에 인자(仁者)는 요산(樂山)이라 한다. 나도 산을 즐긴다. 그러나 내가 인자로라고 말함은 아니다. 영웅은 호색도 하지만은 호색한이 다 영웅 아닌 것과 같이 인자는 요산하지만은 산을 즐긴다고 다 인자될 것은 아님으로이다 …(중략)…옷을 들고자 하면 옷깃을 들어야 바로 들릴 것이요, 물을 맑게 하고자하면 먼저 그 근원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와 같이 조선의 산수를 보고자하면 먼저 백두산을 보고 난 다음에 금강산을 보아야할 것이다. 백두산은 조선 산악의 조종이며 두뇌요, 금강산은 척추”라고 했습니다. (1921년 8월 22일자 1면)
“북청으로부터는 가옥의 건축도 다소 다르다. 제도(制度)는 대개 5량의 홑집이며 규모는 북진할수록 점점 고대(高大)하게 되어 소불하(少不下) 8간은 된다. 그리고 제일 행객의 주의를 끄는 것은 초가가 전무한 것과 옥상에 적력을 만재한 것이다. 이는 송피(松皮· 소나무껍질) 혹은 화피(樺皮 ·벚나무껍질)로써 집을 덮은 고로 풍진(風鎭)을 삼아 놓은 것이라 한다.” ( 1921년 8월 24일자 1면)
“허항령은 함경남북도의 경계이며 혜산진 백두산 간의 중앙이다…(중략)…염흔(焰痕·불탄 흔적)은 잔초(殘礎)에 상신(尙新)하고 잡초는 폐허에 췌췌(萃萃)하나 한갓 국사대천황(國師大天王)을 사(祠)한 일간 당우(堂宇)는 기후 포태동민의 힘으로 즉시 중건되어 엄연히 구시용(舊時容)을 보전한다…(중략)…일차 백두산록에 입하면 도처에서 국사당을 발견하나니 혹은 동구(洞口)에 혹은 영상(嶺上)에 그 수가 불소(不少)하나 특히 허항령상에 재한 자는 당우의 규모가 크며 진수(鎭守)의 구역이 또한 광대하여 멀리 대안 장백부에서도 건축비를 갹출한 기록이 있었다.” (1921년 9월 1일자 1면)
“천지의 경색이 춘하추동을 따라 각각 부동(不同)할 것은 물론이어니와 일일지내 조석지간에도 운우무박(雲雨霧雹)의 왕래가 무상하며, 청음명암(晴陰明暗)이 대체 교호하나니 천청일화(天晴日和)하며 수벽사명(水碧沙明)하여…(중략)…또한 일시(一時)라. 이는 오전 오후 6시간에 나의 경험한 바이어니와 고인(古人)의 기록과 거민(居民)의 소전(所傳)을 참고하면, 유시(有時)호(乎) 수중(水中)으로부터 고성(鼓聲)과 여한 음향을 발하면 홀연 지수(池水)가…(중략)…지척을 불변(不辨)하는 일도 있고 혹 야간이 되면 월광과 여한 이기(異氣)를 토(吐)하여 천제(天際)에 접하는 일도 있다고 한다.” (1921년 9월 6일자 1면)
“대각봉상에 약 4촌각의 기념주가 있으니 월전에 건립한 자라. 주면(柱面)에는 ‘대한독립군기념’의 7자를 각(刻)하였고 그 옆에는…(중략)…이날 경비대원 중의 1인은 이를 빼어 어깨에 메고 대각봉을 내려와 일행의 오찬장인 천지 동(東)에 놓고 일장(一場)의 화병(話柄)을 삼았다. 충천의 의기로 이마에 땀을 흘리며 갖다 세우던 그네들이야 어찌 이것이 1개월 이내에 경비대원의 점심반찬이 될 줄 뜻하였으리요. 세상사는 실로 기괴한 배합이 많은 것을 한번 웃겠다.”
정계비
“6시에 천지의 조망(眺望)을 사(辭)하고 회로(回路)에 취하니 마침 농무가 대작하여 지척을 난변(難辨)이라. 연지봉 낙맥의 유척을 수하(隨下)한지 10여분에 겨우 무선(霧線)을 탈출하였음으로 압강(鴨江)원두의 정계비를 찾아갔다. 비는 백두의 동남 10리 지(地)에 있으니 고(高)가 3척 여요, 광(廣)이 약 2척이 되는 소비(小碑)이며 비문은…(중략)…차처(此處)에 정계비를 입(立)함은 당시 조정의 만족한 성적(成績)이었을 것이다.” (1921년 9월 8일자 1면)
특파원 일행이 촬영한 백두산 사진은 독자들에게 환등기로 공개됐습니다.
1921년 8월 26일자 3면
1921년 8월 27일자 3면
금야(今夜)! 백두산 강연회
유익한 강연과 선명한 환등이 서로 합하야 이천리밧 백두산을 안저 구경하는 이긔회
아사(我社)의 수(手)에 최초로 전개되는 영산의 대 신비
조선 북편에 푸른 하늘을 꿰뚫어 외외히 서 있는 백두산! 이곳은 우리 배달민족이 발생한 거룩한 땅인 동시에 우리의 많은 신비와 많은 자랑을 감추고 있는 거룩한 산이다. 조선사람으로 누구나 이 성산의 신비를 한번 배관코자 아니할 자 있으랴? 그러나 오늘까지 이 거룩한 산위에 발자취를 인친 사람이 극히 희소함은 우리의 대단한 유감인 동시에 대단한 부끄러움이었다. 이번 본사 특파원 민태원 씨와 사진반이 친히 이 이 백두산의 거룩한 경치를 탐험하였음은 본사의 자랑인 동시에 우리 조선사람의 자랑이다. 민씨는 그의 날카로운 눈으로 이 성산의 모든 신비와 모든 자취와 모든 자랑을 역력히 탐험하였으며 사진반은 그의 독특한 기술로써 이 성산의 장절쾌절(壯絶快絶)한 모든 경치를 촬영하여 가지고 일전에 무사히 돌아왔다. 본사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금 27일 오후 7시 반에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백두산 강연회를 열게 되었다. 조선역사연구에 조예가 깊은 권덕규 씨의 조선역사와 백두산이라는 강연을 위시하여 민태원 씨의 이번 백두산을 탐험한 모험담과 감상담이 있을 터이며 다시 본사 사진반의 촬영한-아직도 세상에서 보지 못한 신기하고 장엄한 30매에 이르는 사진을 환등으로 보일 터인데 이야말로 앉아서 백두산을 잘 구경하는 동시에 백두산에 대한 지식을 잘 얻는 때이다. 입장자는 입장권을 가지고 오는 본지 독자에게만 한하되 금일 본지에 그 입장권을 박을 터인즉 비록 독자라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 만원이면 할 수 없이 입장을 사절할 형편이라 서울에 있는 독자제군은 이 기회를 잃지 말고 시간 전에 속히 오시기를 바라노라.
1921년 8월 29일자 3면
공개된 성산의 신비
권덕규 씨의 백두산 역사 강연
민태원 씨의 실사한 경치 셜명
대성황의 본사 주최 백두산 강연회
본사 주최의 백두산 강연회는 예정과 같이 재작일 오후 8시부터 종로 중앙청년회관에 열리었는데 조선민족에게 무한한 감흥을 일으키는 강연회이라 정각 전부터 물밀 듯 몰려오는 군중이 뒤를 이어 순식간에 회장안은 정결한 흰옷 입은 사람으로 만원이 되고 장내에 들어오지 못하는 수천의 군중은 닫은 문밖에 몰려서서 돌아가지 아니함으로 그 혼잡은 실로 형언할 수 없었다. 먼저 본사 주간 장덕수(張德秀)씨가 개회의 말을 베푼후 역사에 조예가 깊은 권덕규(權悳奎) 씨가 조선 역사와 백두산이란 문제로 그의 학식을 기울여 열변을 토하게 되었다. 강당이 떠나갈듯한 박수소리가 끝치매 수천의 군중은 일시에 감전된 것 같이 지키는 줄 모르게 침묵을 지키고 오직 더움을 못 이기어 부치는 수백의 부채만 흰나비와 같이 번득일 뿐이었다. 권덕규 씨는 먼저 어떠한 민족과 개인을 물론하고 모두 위대한 강산을 중심으로 일어난 실례를 들어 조선민족도 백두산 같은 웅대한 산 아래에서 근원이 발한 것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 조선인에게 너희는 영특한 민족이라는 교훈을 암시한 것이라하며 청중 속에서는 박수가 일어났다. 그 다음 단군이 탄생한 태백산이 백두산이란 말을 명쾌하게 증명한 후 은근히 우리 고대의 광영스러운 역사를 들어 무한한 감흥을 일으키고 동양의 모든 강한 나라가 이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말로 백두산의 더욱 거룩함을 말하다가 문득 강론의 칼날을 돌리어 중국사람들이 태산(泰山)으로 신령스러운 산의 대표를 삼고자하나 실상 백두산줄기가 내려가다가 산동반도가 되어 태산이라는 산을 이루었다는 말로 공자가 태산 같은 적은 산에 올라서서 천하를 적게 알았다는 말을 하여 우리 민족이 지리적으로 특수한 지위에 있음을 말하여 흥미가 도도한 중에 말을 마치고 그 다음 민태원(閔泰瑗) 씨가 백두산을 실지 탐사한 경험담을 시작하여 혹은 하늘을 찌르는 듯한 수림이 수 백리를 계속한 말과 높은 산의 기후관계로 평지에서는 금석을 태울 듯이 더웠던 팔월초순이 일한풍화하고 백화난만하더란 말을 하여 듣는 사람에게 연화세계 같은 선경을 연상케 하고 끝으로 백두산 위에 있는 천지(天池)의 거룩한 경치를 말하여 일천삼백 척 아래 보이는 팔십 리 주위의 못에 비치는 모든 기묘한 경치를 설명한 후 천변만화의 신성한 조화가 시시각각으로 일어나는 말로 끝을 마치고 20여 장의 환등으로 백두산의 장쾌한 실경을 구경시키다가 끝으로 천지의 전경이 나오매 관중 편에서 박수가 퍼부어 일어났었다. 이리하여 거룩하고 장쾌한 백두산 강연회는 전고에 없는 성황 속에서 마치었으나 다만 본 사원 일동이 한없이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는 장소의 관계로 다수한 관람자가 문밖에 서서 장시간 동안을 기다린 것이라. 관후한 독자는 그것이 본사의 허물로만 그리함이 아닌 것을 양해할 줄을 믿는 바이라.
“신문 사진에서도 특히 미지의 세계를 탐험한 생생한 현장 사진이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끌었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1920년대만해도 국내의 많은 지역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미지의 세계요 전설적인 존재였다…(중략)…백두산 탐험대가 촬영한 기록사진은 신문에 연재되는 한편, 슬라이드로 만들어 환등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직접 전달하는 백두산 강연회도 개최되었다. 8월 27일 종로 YMCA에서 열린 강연회에서는 권덕규(‘조선 역사와 백두산’)와 탐험대에 참가했던 민태원(‘백두산 등산담’)이 연사로 나섰다. 민족의 정신적 영산인 백두산의 역사적인 측면과 정상까지 탐험한 체험담에 대한 강연은 운집한 청중들을 압도했으며 백두산 강연회에는 수천 명의 군중이 모여들어 장내외에 정결한 흰 옷의 물결이 초만원을 이루었다…(중략)…1920년대는 환등이 민중의 계몽수단으로 적극 활용되던 때였다.” (최인진 전 동아일보 사진부장, ‘한국신문사진사’, 열화당, 1992, 102~1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