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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치호 일기’ 1931년 7월 13일 월요일


  최근 조선에서 발생한 화교 박해사건이 일본인들의 사주를 받아 일어났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사람들이 제시하는 정황 증거는 이렇다.


  (1) ‘조선일보’ 창춘지국장은 중국인들이 조선인 마을을 습격한 사건에 대해 자극적이고 과장된 기사를 송고(送稿)했다. (관동군이 사건을 확대하고자 일본영사관을 통해 ‘조선일보’ 창춘지국장 김이삼(金利三)에게 ‘만보산사건’에 대한 허위 자료를 제공했는데, 김이삼이 진상에 대한 확인 절차 없이 그대로 본사에 기사를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편역자 김상태 각주) 그런데 그는 밀정이라고 알려져 있다.


  (2) ‘조선일보’는 호외를 발행했지만, 동일인으로부터 똑같은 소리를 접한 ‘동아일보’는 호외를 발행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종로경찰서 형사가 동아일보사에 전화를 걸어 이토록 중대한 사건에 대해 호외를 발행하지 않은 이유를 추궁했다.


  (3) 서울의 경찰 당국은 조선인들에게 대표자회의의 개최를 허가해주지 않았다. 이 회의는 화교들에게 어떤 행패도 부려서는 안 된다고 조선인 주민들을 계도하기 위한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4) 의지만 있었더라면, 그토록 유능하고 막강한 경찰이 평양과 인천에서 발생한 난동을 못 막았을 리 없다. (‘윤치호 일기’, 김상태 편역, 역사비평사, 1988, 277~278쪽) 




       조선일보 1931년 7월 3일자 호외

 




  만주사변(1931년 9월 18일)이 발발하기 몇달 전, 만주 장춘 근교 만보산 지역에서 관개공사를 하던 조선인들과 중국 농민 사이에 마찰이 있었습니다. 만보산 지역에 보를 쌓고 수로를 파는 작업에 동원된 조선인들이 중국 농민의 땅을 침범하였다고 하여 시비가 생긴 것입니다. 이 때 만주 진출을 노리던 일제가 교묘하게 민족 감정을 부추겨 조선인들과 중국 농민 사이에 큰 충돌이 일어날 급박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무렵 고향을 떠나 만주로 간 조선인 이주민은 10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문제를 동아일보는 1931년 6월 5일자 2면에 아래와 같이 전했습니다.




1931년 6월 5일자 2면




36인을 마차 실어 방축

보 쌓는 것을 강제 구축

삼성보 재주 동포


 [장춘 특신] 길림성 장춘현 삼성보에 금년 봄부터 조선 농민 40여 호 2백여 명이 들어서 중국인을 중간에 세우고 황무지를 차득(借得)하여 보 쌓는 공사를 착수하여 불원간 파종을 하게 되었는데 장춘정부가 4월 30일 돌연 농민들에게 3일 안으로 퇴거를 강요하고 31일 아침 군경 2백여 명을 인솔하고 농민들을 위협하는 한편 농민을 공안국으로 소환하여 서약을 받고 또 농민 7호를 강제로 마차에 실어 내어다 버렸다고 한다.  


  이어 1931년 6월 24일자 2면에 속보를 전했습니다.




1931년 6월 24일자 2면




전장 가튼 만보산

부유(하루살이) 가튼 4백생령

중국 관헌의 폭압미테 그 장래가 불안

창검리에 안부는 여하


  지난 5월 29일에 일어난 길림성 만보산 동포 구축사건은 중국측 대표 장춘현 장마씨와 장춘령사 전대씨 간에 교섭이 진행 중이나 그간 재주 4백여 동포에 대한 중국 관헌의 박해는 이루 형용키 어렵다. 




  만주 진출을 노리던 일제는 이 때 “조선인이 중국인에게 맞아 죽었다”며 악의적 루머를 퍼트려 조선 내 각처에서 중국인을 습격, 살상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총독부 경무국의 발표에 따르면 중국인 사망자 1백명 부상자 수백, 그리고 조선인 사망자 1명 부상 약 1천, 진압 경관 경상자가 70여 명이나 됐습니다.(동아일보 1931년  7월  17일자  2면)




1931년  7월  17일자  2면




근래의 일대 한사(恨事)!

참사한 중국인이 백명

조선인 사망 일인 부상 약 천명

해금된 조선사건 진상


  근세 조선의 일대 불상사라고 할 조선인 중국인 충돌사건은 그간 민심의 격앙을 두려워하야 경무 당국의 금지로 자세한 내용의 보도를 하지 못하던바 16일에 경무국으로 부터 전부 해금되었다. 경무국의 발표에 의하건대 판명된 피해 정도는 중국인 측의 ▲ 사자(死者) 백명 ▲ 부상자 수백 그리고 조선인 측 ▲ 사자(死者) 1인 부상 약 천, 이밖에 진압하는 경관 측의 경상자도 약 70여 명이라 한다.




  이 엄청난 사태가 벌어지는 과정에서 동아일보는 신중하고 냉철한 보도 자세를 견지, 사태를 진정시키는 큰 역할을 해냈습니다.




1931년 7월 4일자 1면 횡설수설




  “중국 경내에 백만의 조선 동포가 존재한 것을 생각하고 또 조선인과 중국인은 친선해야 할 처지에 있는 것을 생각하여 민족 감정을 격발하는 언행이 없도록 주의함이 필요하다. 더구나 이러한 문제는 감정과 폭력으로 해결될 것이 아닐뿐더러 그것은 도리어 문제를 악화한다. 동포의 원려와 자중을 바란다.” 




1931년 7월 4일자 2면




중국 농민의 폭거

만보산 수로 파괴

조선농민 포위코 공포 위협

사태 따라 군대 출동?


 [장춘] 조선 농부들이 개간에 착수한 길림성 만보산 수전 2천 천지에 사용할 용수의 수로 개착문제로 중국 관헌과 상치 중에 있던 사건은 그후 중국 관헌의 표면 양해로 개착공사에 착수하였던바 중국 농민 약 5백명(그중에는 4, 50명의 군경도 섞이었다고함)은 이통하(伊通河)의 제언을 터쳐버리고 수로를 파괴하고 조선 농민을 포위, 공포를 발사하며 퇴거를 강박 중이다(다소의 부상자가 생기었다는 정보도 있다).




중국인 가(街)로 조선인 집중


 [인천지국 전화] 금3일 오전 3시경에 조선사람이 중국 사람의 음식점과 이발소 등을 습격한 사건이 있은 후 또다시 조선 사람 2, 3백명이 중국 사람 거리로 모여들기 시작한 까닭에 그 부근의 공기는 극히 음험하여졌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1년 7월 5일자 사설은 평소의 1단 제목을 2단으로 키워 사안의 중대함을 표시했습니다. 




1931년 7월 5일자 1면 사설




냉정한 태도를 취하라

만보산 사건에 대하여


  만보산 충돌사건을 단순하게 중국인의 조선 농민 압박이라고 떠들어대는 것은 생각이 깊지 못한 처사다. 좀더 냉정 침착하게 사태의 진상을 포착하고 그 이면에 잠재한 갖가지 미묘한 관계를 해석한 뒤에 판단을 내려야 한다. 백보를 양보하여 일의 비(非)가 중국측에 있다 하더라도 조선에 있는 중국인에게 보복적 폭행을 가하는 것은 민족적 금도의 결여를 폭로하는 것이다. 이번 만보산 문제는 단순한 조선 농민과 중국 관민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 경찰력까지 합세한 삼각 문제다. 이와 같이 미묘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이 사건에 대하여 가볍게 사태를 과장하고 항쟁을 확대케하는듯한 언사를 농함은 쌍방의 감정을 도발할 뿐으로 하등의 이익이 없는 일이다.




  동아일보는 즉각 서범석 특파원을 현지에 보내 사실을 확인한 결과, 사태의 진상이 과장 확대돼 전해졌음을 알게 됐습니다.  서 특파원이 현지에 가자 당시 지국장 김이삼(金利三·조선일보 지국장도 겸임)은 이 사건 보도에 동아일보가 소극적이라며 공박했습니다. 




1931년 7월 5일자 2면




군대 출동은 허보(虛報)

중국 폭민(暴民) 해산


◇일중(日中) 경관대의 충돌도 경미 〔봉천에서 특파원 서범석 발전〕

만보산 동포는 무사




1931년 7월 6일자 2면




  상해특파원 신언준은 서범석 특파원의 현지 확인 사실을 토대로 중국측 요로의 관계자들을 만났습니다.




일본 정부에 항의


국제연맹에 호소 【◇상해에서 특파원 신언준 발전】


만보산 문제와 중국측 방침


〔남경 본사 특파원 발전〕만보산사건에 대하여 남경 정부 외교부는 동북측의 상세한 보고를 기다리어 일본 정부에 항의를 제출할 터이라 한다. 중국 신문지의 여론은 일본인이 조선 사람들을 이용하여 만주에 세력을 부식한다고 배일열이 더욱 높아졌다. 이에 동북외교협회는 4일 선언을 발하여 국제련맹에 호소하야 정당한 해결을 도모하리라 한다.




1931년 7월 6일자 2면




재내(在內)의 동포는 은인자중하라

◇ 상해동포단체의 의견


〔남경 특전〕상해 재주 조선인의 각 단체의 의견은 이번 만보산 사건에 대하여 조선 내지의 동포들은 은인자중하야 보복적 행동과 같은 일은 될수있는대로 피하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라 한다. 




  ‘상해 재주 조선인의 각 단체’는 상해임시정부를 말합니다. 당시에는 그렇게 우회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어 7일자 사설은 이례적으로 순한글로 제작,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하는 세심한 배려를 했습니다.  


  “동포의 뜨거운 민족애와 굳센 민족의식을 이용하려는 검은 손이 여러 가지 탈을 쓰고 각 도시에 횡행하는 모양이니 선량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동포여, 삼가고 서로 경계하실 지어다.” 




1931년 7월 7일자 1면 사설




이천만 동포에게 고합니다

민족적 이해를 타산하여 허무한 선전에 속지 말라




만보산 이백명 동포는 안전하고 평안합니다. 지금 만주와 그밖의 중국 땅에 있는 우리 동포들은 무사하고 편안합니다. 중국 백성들은 지금 우리 동포들에게 손을 댄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만주 기타 중국에 있는 우리 동포들의 가장 간절한 소원은 “국내에 있는 동포들이 중국 사람들에게 폭행을 말아 달라”(작일 상해 특전 참조) 하는 것입니다. 동포여, 우리가 조선에 와 있는 중국사람 팔만명에게 하는 일은, 곧 중국에 있는 백만명 우리 동포에게 돌아옴을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즉시로 중국사람을 미워하고 그들에게 폭행을 가하는 일을 단연히 중지하십시오.




동포 여러분은 만보산에 있는 이백명 동포의 생명이 위경에 든 것처럼 생각하고, 또 어떤 악의를 가진 자의 생각인지는 모르거니와, 그 이백명 동포가 학살을 당한 것처럼 아는 이도 있는 모양이나, 이것은 전혀 무근지설입니다. 무뢰배의 유언비어입니다. 또 조선 안에서도 조선 동포가 중국인에게 학살을 당하였다는 풍설을 돌리는 자가 있다고 하거니와, 이것은 더구나 말도 되지 아니하는 허설입니다. 이 모양으로 무근한 유언비어를 돌려 이웃한 두 민족 사이에 틈을 내며 또 성군 작당하여 아무 죄도 없는 이웃나라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파괴하는 것은 진실로 민족을 해치는 폭민이오 난민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무리를 민족의 죄인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중국은 현재 백만의 조선 동포가 우접해 사는 나라요, 또 이 앞에도 그와 가장 밀접하고 친선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조선 민족 백년의 복리를 위한 것이어든 무책임하고 일을 좋아하는 자의 헛된 선전에 미혹하여 인천 · 경성 · 평양 등지의 대참극을 일으킨 것은 조선민족의 명예에 영원히 씻기 어려운 누명이 될뿐더러 중국에 있는 백만 동포의 목에 칼을 얹는 것이니 이런 통탄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동포여! 정신을 차려 앞뒷일을 헤아리십시오. 악의를 가진 무리의 헛된 선전을 믿어 여러분이 생명보다도 더 사랑하는 민족의 전도에 칼과 화약을 묻는 일을 하지 말으십시오.




비록 백보를 사양하여 만주에 있는 동포가 중국 사람들에게 폭행을 당하였다고 가정하더라도, 우리가 조선에 와있는 중국 사람들에게 보복함으로 조금도 이로움이 없을 뿐더러, 도리어 핍박받는 동포의 처지를 더욱 곤란하게 할 것이 아닙니까. 중국 땅에 있는 조선 동포가 핍박을 당한다는 소문을 듣고 우리가 이렇게 분개할진댄, 우리 조선 사람이 조선에 있는 중국 사람에게 폭행한 소문을 들으면 중국 사람들이 중국에 있는 조선 동포들에게 얼마나 분한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또 인도상으로 보더라도 호떡장수, 노동자 같은 중국 사람이 무슨 죄이길래 우리가 그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겠습니까. 이것은 도무지 불합리한 일이오 민족의 전도에 크게 해를 주는 일이니, 거듭 말하거니와 이러한 선전을 하고 폭동을 하는 이는 조선 민족의 적이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동포의 뜨거운 민족애와 굳센 민족의식을 이용하려는 검은 손이 여러 가지 탈을 쓰고 각 도시에 횡행하는 모양이니 선량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동포여! 삼가고 서로 경계하실지어다.


  이 사설은 동아일보 명(名) 사설 중 하나로 이혜복 대한언론인회 명예회장은 “일제강점하에서 그만한 내용을 활자화한 당시의 동아일보 필진의 용기에 머리가 숙여진다”고 했습니다. (‘대한언론인회보’ 2000년 4월 1일자 10쪽)




1931년 7월 7일자 2면




조선 농민과는 무관

문제는 상조권(商租權)

장학량씨 훈전내용 【상해에서 특파원 신언준 발전】

만보산 분규의 귀결


〔상해특파원 발전〕북평(北平)에서 온 전보에 의하면 만보산사건에 관하야 장학량(張學良)은 장작상(張作相)에 대하여 사건을 확대케하지 말도록 훈전을 발하고 이번 사건은 다못 조선 농민 사이의 분규가 아니요 실은 동지 상조권에 관한 문제이므로 일본의 요구를 절대로 거절할 터이라 한다. 그리고 지방적 해결을 할 수 없는 경우에는 중앙에 이관하여 교섭할 터이라 한다.




1931년 7월 7일자 2면




만보산은 평온

수로공사 태(殆) 완성

매몰된 것은 공사를 진행 중

재습(再襲)의 우려는 전무


〔봉천 5일 발전 련합〕만보산은 평온하게되었다. 공사도 진행에 착수하야 제언공사도 거의 준공되었으며 매몰되었던 수로공사 인부를 증원하여 급히 하는중이나 상당한 일자를 요할것 같다. 그리하여 목하의 형편은 아조 전일과 같이 평온 무사하게 되었으며 재습격과 같은 것은 예상도 되지않는다.




1931년 7월 7일자 2면




작야(昨夜) 평양에 폭동

중국인 상점 습격

오후 8시부터 철야단속

무근(無根)한 유언(流言)이 근인(近因)




1931년 7월 8일자 2면




괴 자동차 출몰

경찰은 정체 조사 중


  3천여명 군중 속에는 화불자동차 1대가 수십명 군중을 싣고 ○○이란 깃발을 들고다닌 일이 있었다. 부내의 자동차는 평양서에서 전부 징발하였음에 불구하고 이 화물자동차가 웬것이었던지 방금 수색 중이다. 




  “이 폭동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대목은 엄청난 인명 피해가 평양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이다. 1923년 평양의 화교 인구는 779명으로 서울의 4107명, 신의주의 3641명, 인천의 1774명에 비해 훨씬 적었다. 그런데 폭동이 가장 먼저 발생한 인천에서 화교가 피살된 것은 2명이고, 규모 면에서 가장 큰 반 중국인 시위가 있었던 서울에서는 중국인 사망자는 없이 조선인 1명이 살해당한 것에 비해 평양에서만 경무국 발표의 전국 사망자 100여 명 중 절대 다수인 94명(중국국민당 중앙선전부의 자료로는 평양에서만 216명)이 살해당한 것이다. 왜 전국적으로 발생한 반 중국인 폭동이 유독 평양에서만 집중적인 살상극으로 발전했을까? 전국에서 희생자가 고루 발생하였다면 모르지만, 유독 평양에서만 집중적으로 사망자가 발생하였다는 사실은 평양의 폭동에 ‘검은 손’이 작용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컸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즉 일본, 특히 만주의 관동군과 연결된 조선 주둔 일본군이 만주 침략을 앞두고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당시의 언론 역시 평양 시내의 모든 자동차가 관에 의해 징발된 상황에서 3천여 명의 군중 속을 한 대의 트럭이 백기를 달고 수십 명의 사람을 태우고 폭동을 선동하며 다닌 사실에 의문을 제기했다. 평양의 화교 지도자들은 평양에서의 참사를 ‘어떤 흑수(검은 손)가 군중심리를 이용한 것’으로 단정지었다.” ( ‘호떡집에 불지른 수치의 역사’ – 한겨레 21, 2001년 3월 13일 제350호, 한홍구 교수·한국현대사)




1931년 7월 9일자 1면 사설




조선 민족의 진의

각 단체연합 협의


  불분명한 풍설과 선전은 마침내 무모한 군중들이 무고한 재류중국민의 생명과 재산의 위협 동기를 지었다. 하등의 위협될만한 박해될만한 이유도 사실도 없이 이같이 무참한 참화를 당한 중국민의 정상은 실로 근래 희유의 불상사며 동정처이다.


  이날 1면 사설 바로 아래에는 ‘경고아조선 친애적 인씨(敬告我朝鮮 親愛的 人氏, 조선을 사랑하는 사람이 간곡히 고합니다 )’ 란 경성 화상(華商) 총회 대표 궁학정의 글을 사설 제목보다 더 큰, 2단 제목으로 하여 중국어 원문을 그대로 게재했습니다.


  이어 사태의 진정을 호소하는 보도는 계속됐습니다.


  당시 현지의 한  동포로부터 국내의 한 동포 앞으로 보내온 편지를 입수, 이를 7월 10일자 6면에 게재했는데 삭제당했습니다.  


  이 편지는 사건 발생의 원인을 ‘단순히 우리 농민 대 중국 군민의 문제가 아니다. 만보산은 일 중 로 합자로 개간하여 전답을 개척하며 조선 농민 2백여 명을 이주케 하여 관개수로의 공사에 종사케 하였는데 우리는 기업가의 지시에 의하여 흑백을 모르고 중국인의 토지를 침범하게 된 것’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일제는 이 편지 기사를 삭제했습니다.  




동아일보 1931년 7월 10일자 6면




  삭제된 지면




동아일보 1931년 7월 10일자 6면




  삭제되기 전 지면




<삭제된 내용>

만보산 R군의 편지를 받고 – 김석애(金石涯)


R형! 이 편지를 2천만 동포에게 일일이 할 수 없어서 형에게만 올리오니 만보산에서 수난하고 있는 2백만의 형제를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사옵거든 이 편지를 2천만 동포에게 책임지시고 전달하여 주소서. 활로를 찾아 정든 요람을 등지고 냉랭한 만주의 너른 벌에…(중략)…요번에 발생한 문제는 단순히 우리 농민 대 중국군민에 대한 문제가 아니외다. 만보산은 일 중 로의 민족의 합자로 개간하여 전답을 개척하려고 시작할 때 기업가들의 수단으로 조선 농민 2백명을 이주케하여 관개수로의 공사에 위선 종사케할 때 우리는 기업가의 지시에 의하여 흑백을 모르고 중국인의 토지를 침범하게 된 것이올시다. 그러면 우리를 습격한 중국인들이…(후략)




1931년 7월 12일자 1면 사설




문제는 금후로

재만동포 난관 해결책


  작금의 조선은 태풍일과의 감이 있다. 아직도 처처에 집단된 중국 동포들이 완전히 그 업에 안귀하지 못하였지마는 금일까지에 각 지방의 불안한 상황은 거의 제거될 듯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로써 일소된 것이 아니요 차라리 금후가 문제의 중심적 토론이 전개될 때라고 한다. 이 기회에 재만 조선인의 난관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임시로 조직된 협의기관을 개조 확대하여 일종의 반항구적 기관을 설치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1931년 7월 15일자 2면




양 민족은 원무악감(原無惡感)

한교(韓僑)는 특별보호

본사특파원, 王외교부장과 회담

오해는 풀고 상호 친선에


 〔상해특파원 13일 전보〕나(특파원 신언준)는 13일 외교부 출장소에서 왕(王) 외교부장을 회견하고 이번 사건에 대하여 그 내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한바 왕씨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중국 조선 양 민족은 원래부터 아무런 악감정이 없다. 이번 사건은 (中略) 우리 양 민족은 서로 오해를 풀고 친선관계를 유지해야만 되겠다. 그리하여 재만한교(조선인)에게는 특별한 보호를 하도록 하겠다.”




  만보산 사건으로 빚어진 조선인의 중국인 습격사태를 본보에서 적극 만류하며 진정시키고 피해자 돕기 모금운동을 벌인데 대하여 화상(華商)총회 주석은 감사장을 본사에 보내왔습니다.


화상(華商)총회 주석 본보에 감사장


금번 중국인 사건에 대하여 ‘층층미거저묵난명(層層美擧楮墨難名)’ (층층의 아름다운 일들을 먹으로 다 치하하기 어렵다)




1931년 8월 17일자 2면




  만보산사건에 대한 신중하고 냉철한 동아일보의 보도 태도에 대해 박성수 전 국사편찬위 편사실장은 “국제정세를 꿰뚫어 본 이 신문 제작은 비단 신문의 역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역사에도 크게 기록되어야 할 대목” 이라고 했습니다.


  아래는 관련 연구자들의 평가.


민두기(閔斗基), ‘만보산사건(1931년)과 한국 언론의 대응 – 상이한 민족주의적 시각’, ‘동양사학연구’ 65호(동양사학회, 1999.1), 157~172쪽 


  같은 날짜(7월 4일)의 하단에 있는, 동아일보의 대표적 칼럼인 ‘횡설수설’은 만보산사건에 대해 구조적 시각을 가질 것을 말하고 한국인의 냉정한 자세를 호소하면서 그 근거로 만보산사건은 구조적으로 보아야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이후의 동아일보의 만보산사건(중국인 배척폭동) 보도 태도의 선성(先聲)이었다…(중략)…더욱이 동아일보가 만보산지구(地區)의 한국인 농민이 소속된 장롱도전공사(長農稻田公司)가 한국 농민의 것이 아니고 일본의 기업가도 개입한 것이라는 문제 제기를 한 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다. 그러므로 국내에서 한국인과 중국인이 충돌하는 것은 ‘사태의 이해가 불충분한 맹목적 행동’이므로 중지되어야 한다고 냉정해야 할 이유를 분명하게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만보산사건에 있어 일본의 존재를 강조하는 것은 동아일보의 일관된 보도태도였으니 7월 6일자에는 남경(南京)에서의 신언준(申彦俊) 특파원 발(發) 기사를 싣고 있는데 그 표제는 ‘일본 정부에 항의/국제연맹에 호소/만보산 문제와 중국측 방침(方針)’으로 되어있고…(중략)… 다음날 7월 7일자에도 신언준이 발신한 장학량(張學良)의 장작상(張作相)에의 훈전(訓電)을 기사화하고 있는데 그 표제는 3단으로 뽑은 ‘조선 농민과 무관/문제는 상조권(商租權)/만보산 분규의 귀결’이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중일(中日)의 관계이지 한국인 농민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었다. 일본 측이 요구하는 상조권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장학량의 훈전을 다룬 이 기사의 표제 중 ‘조선 농민과 무관’은 특히 강조하기 위해 초호(初號) 활자로, ‘문제는 상조권’은 특호(特號)활자로 처리하고 있는 것도 동아일보의 뜻하는 바가 무언인가를 분명히 드러내주고 있다. 동아일보는 그밖에도 7월 5일자에 새로 급파된 서범석(徐範錫) 특파원의 발신을 3단 표제로 하여 싣고 있는데 ‘군대 출동은 허보(虛報)/중국 농민 해산/일중(日中) 경관대의 충돌도 경미/만보산 동포는 무사’로 되어있다. 이중 첫 줄은 초호활자로 둘째 줄은 그보다 더 큰 특호활자로 하였다. 만보산사태가 심각하다는 보도는 잘못된 것이었고 사태는 가라앉았으니 국내에서의 중국인 배척은 중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 인천에서의 폭행행위 보도도 사실만을 보도하였지 조선일보의 경우처럼 ‘격분(激憤)’ 운운의 표현은 찾아볼 수 없다. 7월 6일자의 동아일보에는 ‘남경(南京) 특전(特典)’이라 하여(신언준 특파원의 발신일 것이다) ‘재내(在內)의 동포는/은인자중하라/상해동포단체의 의견’이라는 표제의 짤막한 기사를 특호활자 2단의 박스기사로 처리하여 강조하고 있다.…(중략)…신언준과 동아일보는 상해임시정부의 무게와 신망을 가지고 한국인의 진정(鎭靜)을 호소하려고 한 것이다. 7월 7일자의 2면의 머릿기사는 ‘만보산은 평온/수로공사태(殆) 완성/매몰된 것은 공사를 진행중/무근(無根)한 유언(流言)이 근인(近因)’이라는 표제를 달아 폭동이 평양으로 비화했으며 이는 근거 없는 유언(流言)때문이라 하였다. 7월 7일자에는 제목을 2단으로 뽑은 사설 ‘이천만 동포에게 고합니다/민족적 이해를 타산(打算)하여 허무한 선전에 속지 말라’를 발표하였다. 대중 설득의 긴급성을 의식한 듯 다른 경우의 사설과는 달리 전문을 한글로만 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중국인 배척폭동이 한국인의 전체 의사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대외적으로 중국인을 상대하여 중국에서의 폭동이 재만동포(在滿同胞)에게 보복으로 반전(反轉)되지 않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지만, 국내의 폭동에 가담한, 또는 심정적으로 폭동에 동조하고 있는 한국인들에게도 필요한 일이었다. 만주에서의 중·일의 대립상황으로 보아 한국에서 중국인 배척폭동이 일어나고, 그리하여 만주에서 한국인에게 보복(報復) 폭동이 일어난다면 한국인 보호의 법권(法權)을 가졌다고 자임하는 일본의 모종(某種)세력이, 두 달 뒤(9·18사변)에 그러했던 것처럼, 만주에서 만주 침략을 위한 대규모 군사행동을 일으킬 구실로 삼을 수 있을 터였다. 이 같은 효과를 노려 일본의 어떤 세력이 한국에서의 폭동을 선동 조종할 가능성은 만주에서의 상황을 구조적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생각이 미치는 일이었다. 앞에 언급한, 폭동 진정을 일찍부터 강조해온 동아일보의 7월 7일자 사설이 폭동에 모종의 ‘검은 손’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고 한국인들에게 폭동에 가담함으로써 그 ‘검은 손’의 노리개가 되지 말라고 경고한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아일보의 태도는 이 점에서도 일관적이었다. 실제로 7월 8일자의 동아일보에는 평양에서의 폭동을 보도하면서 3천명의 폭동 군중 속을 한 대의 트럭이 수십 명의 사람을 태우고 ‘○○라는 깃발을 세우고’(원문대로) 돌아다녔는데 평양시내의 자동차는 이미 모두 징발된 터에 어떻게 이렇듯 트럭의 질주가 가능한가? 라고 하여 ‘검은 손’이 군중들 속을 횡행하고 다니는 것 같다는 암시를 하고 있다…(중략)…동아일보는 만보산사건의 첫 보도에 있어서는 조선일보에 뒤졌으나, 일관되게 재만(在滿) 한국농민 문제는 국권 회복을 표방하는 중국의 항일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민족적 대립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만보산에서의 한국 농민의 부상이 오보라는) 사실 보도를 함과 아울러 폭동은 일본을 의미하는 ‘검은 손’에게 조종되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는 논설(사설)을 통해 폭동 진정을 긴급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호소하였다. 이는 재만동포를 옹호해야 한다는 원칙론에 앞서 재만동포의 일부(만보산 같은 만철연선<滿鐵沿線> 지역 거주)가 일본의 만주 침략에 이용될 수 있다는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 한중(韓中) 간의 문제는 일본이라는 변수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는 구조적 시각의 산물이었다. 




박성수 전 국사편찬위 편사실장,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현대사’, 탐구당, 1982, 201쪽 


  지극히 제한된 여건 하에서 신문은 국권 없는 겨레의 민간 외교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1920년 극동을 순방 중인 미국 상·하 양원 위원단에 대해서 일본의 국권 강탈 실정을 알린 동아일보 특파원의 외교 활동, 1921년 하와이에서 개최된 만국기자대회에 참석한 김동성의 부회장 피선, 1925년 하와이에서 개최된 태평양회의에 송진우가 참가한 것 등이 그것이다. 특기할 것은 일제가 한(韓)·중(中) 이용하려던, 이른바 ‘만보산 사건’에 있어서의 민간지의 역할이었다. 당초 한·중의 농민 사이에 수로(水路)문제로 벌어진 이 분쟁은 일본이 한국의 대일 민족감정을 대중(對中) 적개심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선동함으로써 확대·악화되었으나, 동아일보가 그 속셈을 알아차려 민중의 냉정을 호소하고 화교 희생자를 위한 위문금을 거두어 중국 영사관에 보내주는 등 사태 수습에 앞장서서 나섰던 것이다. 그 뜻을 고맙게 알고 장개석 총통은 한·중 친선을 강조하는 기념품을 동아일보에 보내오기도 했다. 국제정세를 꿰뚫어 본 이 신문 제작은 비단 신문의 역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역사에도 크게 기록되어야 할 대목이다.  




안회균, 일제하 한국 언론의 해외특파원 활동에 관한 연구,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석사학위 논문, 1987년, 61~64쪽


  1931년 7월3일 장춘 근교 만보산 삼성보에서 한인 농민과 중국 농민간에 사소한 충돌이 있었는데 이것을 이용하여 일제가 엄청난 사태로 몰고 간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1931년 4월에 교포 180여명이 만보산 삼성보의 저습지를 개간하면서 송화강 지류를 끌어 수로공사와 제방축조공사를 벌였던 데서 비롯되었다. 공사가 진척됨에 따라 인접해있던 중국인들의 농토에 피해가 미치게 되어 중국 농민의 항의를 받게 되었다. 마침 중국 농민들이 수로공사의 중지를 요구하자 일껏 벌인 공사를 중지할 수도 없어서 서로 얼마간의 마찰이 있게 되었다. 이 때 일본영사관 경찰 60여 명이 느닷없이 나타나 작업을 계속하도록 우리 교포 편을 역성드는 ‘친절’을 베풀어 오히려 사태는 더욱 악화되고 큰 충돌을 빚게 된 것이다. 충돌사건이 있자 즉각 국내신문들은 이를 보도하고 자극적인 제하의 기사를 게재하여 지면을 흥분시켰다. 당시의 민간지들은 경쟁의식에서 서로 앞을 다투어 호외를 발행, 이를 대서특필했던 것. 이 보도가 있자 국내에서는 화교에 대한 보복적인 일대 박해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 피해 상황은 평양의 94명을 포함해 중국인 사망자가 100명, 부상자 수백을 헤아렸고 조선인은 사망자 1명에 부상자 약간이었다고 발표되었다(동아일보 1931년 7월17일). 만보산사건이 장춘지국을 통해 보도되었을 때 동아일보에서는 즉각 특파원을 보내기로 결정하여 당시 신의주 지국에 근무하던 서범석 기자를 현지로 급파했다. 서범석 특파원이 봉천에 도착했을 때의 상황은 국내에서 알려진 바와는 판이하였다. 서범석 특파원은 장춘에서 삼성보 개간공사는 3일 정오부터 다시 계속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자신은 도보로 만보산을 향해 출발하였다. 한편 상해의 신언준 특파원은 7월 6일 남경 정부가 일본 정부에 항의하고 국제연맹에 호소하여 정당한 해결을 도모할 것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보내왔고 상해에 있는 우리 교포들의 각 단체에서는 국내 동포들에게 은인자중해줄 것을 희망한다고 밝혔다(동아일보 1931년 7월 6일). 이에 동아일보에서는 7월 7일자 사설에서 “민족적 이해를 타산하여 허무한 선전에 속지 말라”고 하고 만보산의 200명 동포들은 물론 만주와 중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은 무사하니 국내에 있는 동포들이 중국 사람에게 폭행을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만보산의 동포들이 위경에 처한 것처럼 알거나 혹은 모두 학살당한 것처럼 알려지고 있는 것은 근거 없는 풍설일 뿐 아니라 이 같은 악의적 선전은 두 민족을 이간하고 살상파괴를 이끌려는 술책임을 강조하였다. 이후에도 상해의 신언준 특파원은 계속하여 상해재류 동포들의 성명을 보도하고 양 민족의 협력을 촉구하는 한편 13일에는 외교부 출장소에서 국민정부의 왕정연 외교부장과 회견하여 사건에 대한 진상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였는데, 왕 외교부장은 “중국과 조선 양 민족은 원래부터 아무런 악감정이 없었으므로 서로 오해를 풀고 친선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재만 한교는 특별히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였다(동아일보 1931년 7월 15일). 만보산사건에서 보인 (동아일보)특파원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당시 신문계에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갖고 있던 시사잡지의 평론가도 상당히 높이 평가하고 있다(壁 上生, ‘三新聞月評’, 혜성8호, 1931년 11월, 32~33쪽).     




壁上生, ‘三新聞月評’,  혜성8호, 1931년 11월, 32쪽


  “동아일보는 전 지면을 통하여 노성한 것 같이 보인다. 호적수인 조선일보를 연소기장(年少氣壯)한 청년이라 하면 동아일보는 중년 이상의 장년 같다.”




  만보산 사건 보도를 놓고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신중한  논의가 있었다고 김준연, 서범석, 주요한 선생이 전하고 있습니다.  


  “만보산사건은 만주 만보산에서 우리 한국인 농부와 중국사람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서 우리 동포가 박해를 당한 까닭에 조선 내에서 군중운동이 일어나서 다수의 중국 사람을 살해함으로부터 야기된 사건이다. 그 당시에 조선일보에서는 이 사건을 호외로 보도하고 대대적으로 선동 선전하였다. 그리하여 전북 삼례에서 호떡장수 중국인 1명을 살해함으로부터 점차 조선각지에 파급하게 되었다. 그 때에 평양에서만 중국인 200여 명(보도된 바에 의하면 200명이 아니라 100명임 – 편집자)이 살해되는 대불상사가 야기되었던 것이다. 이때에 고하(송진우 사장)는 동아일보에 침묵을 지키도록 명령하였다. 흥분된 군중들은 동아일보가 중국인에게 매수되었다고 비난하고 투석까지 하여 동아일보의 유리창을 깨뜨리기까지 하였다. 당시 부산 동아일보 지국장 강 씨는 서울로 장거리 전화를 걸어서 고하에게 힐문하고 침묵을 지키는 데 대하여 엄중히 항변하였다. 그랬더니 그저 덮어놓고 서울로 올라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강 씨는 서울로 와서 고하를 만났더니 이유를 순순히 설명하여 줌으로 납득하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고하는 이 만보산사건에 관하여 며칠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중국인을 박해하는 군중을 폭도난민이라고 지칭하여 양 민족 간의 고유의 친선관계를 지적하고 무도한 만행을 즉시 정지할 것을 요청하고 일면으로는 중국영사관을 방문하여 박해당한 중국인들을 위문하고 구호기관을 조직하여 이재민의 구호에 착수하게 하였다. 그리고 재등 총독이 다시 조선에 내도함에 고하는 그에게 엄중 담판하여 중국인 박해운동을 즉각 정지케 하였다. 내가 감옥에서 나온 후에 고하는 당시의 일을 회고하면서 내게 말씀하기를 ‘그 때에 조선 사람들이 감히 일본 사람 상점의 유리창 하나를 뿌수지 못하는 때가 아니겠오. 그런데 조선 사람들이 다수의 중국 사람을 살해하여도 일본 경찰이 간섭하지 않고 수수방관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소? 이런 사리를 판단하지 못하고 움직인다는 것은 참 딱한 일이 아니겠소. 뒤에 들은 바이지만 일본 군부에서는 이 운동을 일으켜서 한중(韓中) 양 민족 간에 충돌을 조장하여 한인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만주에 출병하려고 한 것이었다고 하오!’라고 하였다. 나는 얼마 전에도 현 평안북도 지사 백영엽(白永燁) 씨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만보산사건 때에 내가 산동성에 있었는데 그 때에 중국인들이 퍽 흥분하여 우리 한인들에게 보복적 조치를 취하려고 하는 기색도 보였다. 그러나 동아일보 사설을 번역하여 그들에게 갖다주고 중국 사람들을 진정시킨 일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중국 장개석 총통도 고하에게 대하여 퍽 고맙게 생각하였다고 한다. 민족적 과오가 무한히 확대될 것을 고하 송진우 씨가 방지하였다고 대서특필할 만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춘추필법으로 보아서도 타당한 일이라고 생각되는 바이다.” (김준연, ‘독립노선’, 시사시보사출판국, 1958년, 206~208쪽) 




  서범석(徐範錫)의 회고(동아일보 1970년 4월 1일자 창간특집 19면)


  그때를 말한다 – 송 사장 밀령 담배 종이에 적어, 장 총통이 ‘동아’에 감사패 보내


    “31년 7월 2일 길림성 만보산 지역에서 한국인 180 여명이 중국인 토지를 지나가는 수로 공사를 하게 되자, 주로 한전(閑田)이던 중국인들은 밭에 피해가 온다고 들고 일어나 중국 관헌마저 동원하여 충돌하였지요. 사실 사건은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었는데 장춘(신경)에 있던 동아와 조선 양지 겸임 특파원이던 김이삼(金利三)이 급전을 치고 중국인과 중국 관헌에 의해 습격을 받았다고 전하자 조선일보는 호외를 내는 등 대대적으로 이를 보도 했어요. 그러자 국내에서는 인천을 비롯 진남포 등 곳곳에서 중국인을 박해하는 등 한중간의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아일보에서는 당시 송진우 사장이 김씨의 전보를 받고 ‘이것은 한중간의 감정을 이간시키려는 일본의 침략적인 음모가 개재된 것일지도 모르는 것이니 신중히 해야 한다’고 판단, 간단하게 보도하고 국경 특파원인 나를 서울 본사로 불러들여 진상조사를 하라고 지시했어요.” 


  “당시 일본인 영향 하에 있던 그곳의 조선인회는 조선일보의 신 특파원은 측사처럼 환영하는 한편 나에게는 ‘민족의 공기라면서 재만동포가 당한 일을 묵살하다시피 하니 그게 민족의 대변지냐’고 심히 공박을 하더니 6, 7명이 달려들어 스토브 삽으로 나를 때리기까지 했어요. 그래서 나는 ‘이들이 이렇게 나올 때는 이 사건의 배후에는 한중간을 이간질시키려는 일본의 속셈이 있음이 틀림없구나’하는 생각이 더욱 굳어졌습니다….” 


  “장개석 정부에서는 왕영보 주일공사를 파견시켜 진상을 조사케 했어요. 그때 송 사장이 나를 불러 ‘이번 사건은 일본인들의 정략적인 음모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왕 공사에게 알려야한다’면서 이 뜻을 꼭 전하라는 밀령(?)을 내렸어요. 그러나 일본인의 감시가 심해 왕 공사에게 그 뜻을 전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사를 마치고 귀임 중 신의주를 통과하던 왕 공사의 열차에 탑승했다. 당시 외교관은 특별열차에 문이 달린 독방 객실을 사용했었다. 서씨는 담배를 싸는 얇은 종이에 한자로 우리 뜻을 적어 손에 말아 쥐고 노크 없이 객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깜짝 놀라는 왕 공사에게 ‘이것이 동아일보가 주는 것이오’ 하고 손에 쥐어주고는 얼른 나와 버렸다. 그때 기차는 선천 역을 지나고 있었다. “땀이 흐르는 것이 무선 스릴러 영화의 주인공같이도 느껴졌습니다.”


  이 같은 동아일보의 신중한 태도로 중국 측에서는 일본의 진의를 알았으며 동아일보에 특별한 호의를 갖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논설위원으로 있는 동안 특기할 사건은 만보산사건이다. 이것은 만주에서 농장을 경영하던 일본 지주들과 중국인 지주들의 싸움인데 표면으로는 일본인의 소작인으로 있던 한국 농민과 중국 지주의 소작인인 중국 농민과의 충돌로 나타나서 우리 농민들이 중국 농민들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이 신문에 게재되어 퍼져나가자 국내에서 보복행동으로 중국인 점포 습격, 방화, 살인에까지 번져나게 되었다. 한글 신문들이 재만 동포의 권익문제라는 각도에서 크게 보도함으로써 표면상으로는 보복 행동을 선도하는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 사건의 진전을 살펴보면서 처음에는 폭력을 폭력으로 대항하는데 의심을 품게 되었으나 여러 날 사태의 진전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일본 경찰이 폭력 행동 제지에 무관심한 것을 발견하고 이것이 계획적으로 한중 두 민족의 이간정책으로 이용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즉시 송(진우) 사장에게 나의 견해를 설명하고 감정적인 기사 경향과 폭동 중지를 권고하는 사설 게재를 진언했다. 송 사장은 첫째로 동포애라든지 민족감정에 입각하여 반대 논설을 싣기를 주저했고 둘째는 잘못되면 신문사가 폭도들에게 습격 파괴될 것을 염려하여 좀처럼 승낙하지를 않았다. 그러나 장시간 토의한 끝에 신문의 운명을 걸고라도 일본측의 이간정책에 말려들지 않아야 할 것으로 결론짓고 국민들의 이성회복을 호소하는 사설을 이틀 연달아 게재했다. 그렇다고 이 사건이 일본측의 이간정책이라는 뜻을 노골적으로 표시할 수는 없었고 순전히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폭동을 자제할 것을 호소했던 것이다. 다행히 경향 각지의 지도층 인사들이 동아 사설의 참뜻을 알아내고 앞장서서 자숙운동을 일으킴으로써 사태를 수습하게 되었다. 뒤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만주지방에서는 중국 관리 측과 일반 시민들이 한국 안에서 중국인에 대한 박해가 격심하다는 소식에 분개하여 만주에 있는 한국인에 대해서 보복 행동을 취할 형세에 있었는데 그곳에 사는 우리 교포 지도자들이 동아일보 사설을 증거로 삼아 중국 당국자와 교섭한 결과로 참극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한다.” (주요한, ‘만보산사건과 송 사장과 그 사설’, 언론비화 50편 – 원로기자들의 직필(直筆) 수기, 한국신문연구원, 1978, 116~118쪽)  




  “만주에서 조선 사람과 중국인이 물싸움을 벌인 만보산사건 때에는 연일 국내 신문들이 선동적으로 기사를 다뤄 화상이 피해를 많이 봤다. 이런 난동을 일경은 방관하다시피 하고 있었는데 논설위원이던 나는 송 사장에게 ‘시비는 나중에 가리기로 하고 우리 만주 동포가 다 죽을 지경이니 냉정을 되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냉정하게 쓰다가는 동아가 습격 당한다’고 반대론이 많았지만 편집회의에서 송 사장이 결단을 내려 ‘냉정을 찾으라’는 사설을 써 ‘살인방화를 왜 막지 않느냐’고 총독부에 항의했다. 후일담이지만 봉천에서 한국인 유지들이 모여 내가 쓴 사설을 펴놓고 ‘이 사건은 일본인이 한중의 이간질을 시켜놓고 질서유지자로 군림하려고 한 짓’이라는 결론을 내, 중국인들과 협상을 했다는 이야기다. 당시 사태조사를 위해 남경 국민정부 외교부장 왕정정(王正廷)이 우리나라에 와서 조선호텔로 인터뷰를 하러 갔더니 대뜸 하는 소리가 ‘이번 사건은 신문이 만든 것 아니냐’하는 말이었다.” (주요한 문집 – 새벽1, 요한기념사업회, 1982, 55~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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