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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해 임시정부 청사와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 1908∼1932) 의사 기념관에는 윤 의사의 훙커우(虹口)공원 폭탄투척거사를 알렸던 동아일보 호외 앞 뒷면의 동판이 전시돼 있습니다.




동아일보 1932년 4월 30일자 호외 <앞면>






<뒷 면>






  이 호외는 동아일보가 발행한 윤 의사 의거 관련 세번째 호외입니다. 동아일보는 이에 앞서 두 차례의 호외를 발행, 윤 의사 의거를 조선에 알렸습니다.




 의거 당일 몇 시간 뒤(1932년 4월 29일 오후) 발행한 동아일보 첫 호외






  백천(白川)사령관과 중광(重光)공사에게 수류탄을 투척


  천장절 축하식을 거행 중


  상해신공원에서


  상해 29일발 전통지급보(電通至急報) 본일 오전 11시반 신공원에서 천장절 축하식 ‘국가’ 합창 중 돌연 식대(式臺)상의 중광(重光)공사 급(及) 백천(白川) 군사령 등을 목표하고 수류탄을 투한 자가 잇섯다. 백천대장은 안면에, 중광공사는 부상한 곳이 어댄지 불명하나 혼도(昏倒)하게 공히 중상을 부하고 식장은 대혼란에 함(陷)하얏다.






의거 당일 저녁 다시 발행한 동아일보 두번째 호외 <앞 면>






  상해폭탄사건속보


  폭탄 현행 범인 조선인으로 판명


  윤봉길(尹奉吉), 이십오세


  연루자 조사 중


  폭탄 현행 범인은 조선인 윤봉길(25)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조선공산당원이라고 하며 목하 신분은 취조 중으로 연루자가 있는 모양이다.


  군사령부 발표에 의하면 폭탄 범인은 조선인 윤봉길(25세)로 신분과 연루자는 목하 조사 중이다.




<뒷 면>






  군사령부발표


  군사령부 발표에 의하면 백천(白川) 군사령관은 좌안(左顔), 대퇴부 등 전신 수개처에 파편을 바덧는대 모다 2주간 내지 5, 6주간에 전쾌할 정도이다….




  윤 의사의 거사는 세계 유수의 신문이 즉각 보도했는데 거사인이 누구인지 명기한 신문은 없었습니다.  거사인(擧事人)이 ‘조선인 윤봉길’이라고 밝힌 것은 동아일보가 발행한 두 번째 호외의 특종이었습니다. 동아일보는 상해 임시정부의 누군가로 부터 당시 사건의 전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동아일보는 두 차례 발행한 호외 내용을 종합한 세 번째 호외를 냈고 이것이 상해 임시정부청사 등에 전시돼있는 것입니다.


  4월 30일자 호외 2면에는 ‘▲ 29일 제 1, 2 호외 재록-지방 독자의 관계로 29일에 발행한 제1, 제2의 호외를 본호외(本號外)에 재록(再錄)하였습니다. (본 호외는 본지에 재록치 아니함)’이란 사고가 나와 있습니다.




  중앙일보(‘조선중앙일보’의 전신)는 의거 당일 저녁 발행한 4월 30일자 석간 1면에 관련 기사를 실었으나 기사는 두 줄이었습니다.




중앙일보 4월 30일자 석간 1면






  상하이에서 발행된 신문 조차 거사자를 몰랐던 시점, 동아일보는 거사인이 ‘조선인 윤봉길, 25세’라고 밝혔습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붕준 선생의 장녀 김효숙은 의거 소식을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김효숙,  ‘윤봉길 의사와 도산 선생’, 기러기 1966년 7월호) 




  “號外阿! 號外(호외입니다 호외)


  爆殺了日本鬼子(왜놈 백천대장을 폭살시켰다)


  白川大將 好痛快阿!(참! 통쾌하다)


  割할了眼晴(눈알을 빼서 멀게 하고)


  打斷了大腿(허벅다리를 분질러 놓았다)


  犯人是一個年靑的靑年(범인은 젊은 청년)


  現場被浦(현장에서 잡혔다)


  拿着령一個手彈(다른 한 개의 수류탄을 가졌다)




  신문 파는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에 전 시민은 눈을 휘둥그리며 신문장사 부르기에 겨를이 없었다. 신문 장사 아이들은 신바람이 나서 큰 소리로 외치며 이리 뛰고 저리 뛰어 제 세상이나 난 듯이 날뛰었다. 긴장과 초조에 사로 잡혔던 전 상해 시민은 호외를 읽고 후! 한숨을 내쉬며 쾌재를 연발했다. 전 시민이 환희에 차서 폭죽(경사때 터트리는)을 터트리면서 물 끓듯 하였다. 한교(韓僑)들은 곧 죽는대도 한이 없었다 폭탄을 던진 자가 누구인지 고마웠다. 장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옛말을 생각하며 통쾌했다. 사단의 병력으로도 해결하지 못한 것을 한 사람이 한 개의 폭탄으로 용감무쌍한 거사를 치렀다.”




  김구 선생의 기술.


  “오후 두세시경에 다음과 같은 신문 호외가 터져 나왔다. 홍구공원 일본인의 경축대 위에서 대량의 폭탄이 폭발하여 민단장 가와바다(河端)는 즉사하고, 시라카와(白川)대장, 시게미츠(重光)대사, 우에다(植田) 중장, 노무라(野村)중장 등 문무대관이 모두 중상 운운. 일본인 신문에서는 ‘중국인의 소행’이라고 하였으나, 그 다음날 각 신문에는 한결같이 윤봉길의 이름자를 큰 활자로 게재하였다.”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돌베개, 1997년, 337~338쪽)




  김상기 충남대 국사학과 교수(‘윤봉길의 상해의거에 대한 일본 언론의 보도’,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2, 2009, 11~12쪽)에 따르면 이 사건을 가장 먼저 일본 본토에 전한 것은 오사카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이었으나 거사자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고 합니다. 다음은 김 교수의 논문 내용.


  오사카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은 호외를 발행 자세한 상황을 보도하였는데, 이를 전재하면 다음과 같다.


  在上海皇軍의 諸星 다수 부상, 白川 野村 植田 장군 등


  (상해특전 29일발) 29일 상해의 신공원에서 관병식이 끝나고 관민축하회가 11시 반부터 시작되었다. 때마침 비가 내리던 중 군인대표, 거류민 일동이 밀려들어 村井총영사의 축사가 끝난 때 11시 40분 돌연 단상의 배후에서 수류탄을 던진 자가 있었다. 굉음과 함께 불꽃이 일어나 작열하였다. 단상에는 왼편부터 村井총영사, 白川대장, 野村중장, 重光공사,河端민단행정위원장의 순으로 서 있었는데 굉음과 함께 重光, 野村 양씨는 그곳에서 쓰러지고 白川대장은 안면에 피를 흘리며 단을 내려오는 것이 보인다. 野村, 重光양씨는 중상이고, 河端행정위원장도 중상이다. 앗! 큰일이 일어났구나 하는 참에 마침 엄숙한 기미가요의 합창이 끝날 때였다. 일시에 대회장은 혼란에 빠졌으며 범인을 붙잡아라며 대소동이 일어났다. 범인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중략)…






  4월 29일


  호외 1호


  ‘野村사령장관 重光공사 등 중상,상해신공원에서 怪支那人이 수류탄을 던짐’




  호외 2호


  ‘在上海皇軍의 諸星다수 부상,白川野村植田장군 등’


  ‘범인 2인을 체포’


  ‘범인 1명은 학생인가?’


  ‘내빈 모두 부상’


  ‘重光공사 부인의 놀램, 阪神岡本의 留守宅에서’  




  한시준 단국대 역사학과 교수(‘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의거에 대한 중국신문의 보도’,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2, 52~53쪽) 논문의 기술.


  4월 29일 첫 보도를 낸 상하이 시사신보(時事新報)는 체포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범인은 고려인 尹奉天으로 금년 25세이다.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헌병사령부로 압송되었다. 심문 시 尹은 태연하게 자신이 폭탄을 투척하였음을 시인하였다고 하며, 이외에도 몇 명의 한인이 혐의자로 체포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時事新報 1932년 4월 29일 ‘閱兵時天忽下雨同時飛來炸彈’) 時事新報는 석간신문이었다. 의거 당일 저녁에 발행되어 정확한 정보를 갖지 못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윤봉길의 이름도 ‘尹奉天’ 이라 하였고, 윤봉길 의사가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헌병대사령부를 압송되었다는 사실만 언급한 수준이었다.  


  당시 상하이에서는 거사자가 중국인이란 얘기가 많아 남경(南京)에서 발행되는 ‘중앙일보’는 1932년 4월 30일자 조간에서 외국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중국인과 무관하다고 한다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뉴욕타임스 1932년 4월 29일자

  BOMB AT SHANGHAI WOUNDS, 5 HIGH JAPANESE OFFICIALS; SHIRAKAWA AND UYEDA HIT

  “Believed a Korean”

 

  워싱턴포스트 1932년 4월 29일자

  FOUR JAPANESE OFFICIALS ARE BOMB VICTIMS

  “Thought to be Korean”

 

  로스앤젤레스타임스 1932년 4월 29일자

  BOMB HURTS JAPANESE

 

  뉴욕 헤럴드트리뷴 1932년 4월 29일자

  Bomb Hurts Five Japanese High Officials At Shanghai

  “Corean, Beaten by Mob”



더 타임스 1932년 4월 30일자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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