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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 67 : 이봉창 의사 의거 보도 ‘시비’

Posted by 신이 On 1월 - 5 - 2011

  일왕 히로히토를 제거하려 했던 이봉창 의사 의거.


  그는 1932년 1월 8일 오전 11시 44분경 도쿄 경시청 앞에서 육군 관병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일왕 일행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거사는 실패로 끝났지만 이 의사의 의거는 일제의 심장부를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지금도 그들이 하늘 같이 모시는 그들의 ‘천황’에게 폭탄을 던졌으니 어떻게 됐겠습니까?




  일왕에게 폭탄을 던지기 위해 일본으로 가기 나흘 전인 1931년 12월 13일 중국 상하이에서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이봉창 의사는 수류탄을 양손에 들고 선서문을 목에 건 채 환하게 웃으며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선서문은 거사를 앞둔 이봉창 의사가 자신의 비장한 각오와 결의를 맹세한 것으로 임시정부 김구 주석 앞에서 낭독되었습니다. 






 






  선서문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일원이 되야 적국의 수괴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 13년 12월 13일


  선서인 이봉창


  한인애국단 앞






  이 역사적인 사진은 당시 동아일보 상해특파원이던 신언준 선생이 거사 후 외국 언론사에 돌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버님은 정주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상해로 망명해 독립 운동가들의 추천으로 1929년 8월 동아일보 상해, 남경특파원이 됐다. 윤봉길, 이봉창 의사가 의거하기 전에 김구 선생 앞에서 폭탄 들고 비밀 선서하는 사진을 찍었는데, 이 사진을 외국 기자들에게 돌린 이가 아버님 신 특파원이다.” (신일철 전 고려대 교수, 2004년 8월 18일 면담 증언)  






  동아일보는 이봉창 의사 의거에 대한 일제 내무성 발표문을 호외로 발행했습니다. 






1932년 1월 9일자 호외 1면






  [호외] 불상사건에 대하야 내무성에서 공표


  범인은 즉시 체포




  [동경8일오후6시발지급연합] 내무성 오후 5시 30분 발표에 의하면 금일 오전 11시 30분에 천황폐하께옵서 관병식 환행하옵시는 길에 앵전문외 경시청 앞에서 수척탄 같은 것을 던진 자가 있었다. 어료차에는 이상없이 환어하시었다. 범인은 곧 체포되었는데 조선 경성 출생 이봉창(32)으로 일명 천산정일(淺山正一)이라고 하는 토공이다. 






1932년 1월 10일자 2면






  대불경사건 돌발


  어노부에 폭탄 투척


  폐하께옵서는 무사어환행


  궁상의 마차에 무지대의 손상


  범인은 경성生의 이봉창




  〔전통동경전보〕내무성 발표 – 천황폐하께옵서 육군관병식 행행으로부터 환행하시는 어도차에 로부가 앵전문 앞에 이르렀을 때에 어경위사고가 발생하였다. 그 개요는 다음과 같다.


  본일 오전 11시 44분경 로부가 국정구앵전정 경시청사 앞에 이르렀을 적에 봉배자 선내로부터 돌연 로부 제2량채의 궁내대신 승용의 마차에 ― 어료차 전방 약 18간에 수류탄과 같은 물건을 던진 자가 있어서 궁내대신 마차의 좌후부차륜 부근에 떨어지어 차체 바닥에 엄지손가락만한 손상 두셋을 나게 하였으나 어료차 기타에 이상이 없이 오전 11시 50분에 무사히 궁성에 환행하시었다. 범인은 경시청 경시 석삼훈부(石森勳夫) 순사 본전항길(本田恒吉) 산하정평(山下正平)과 헌병상등병 전합(田合) 헌병군조 내전(內田) 등이 체포하여 경시청에 인치, 방금 취조중이다. 그 성명 년령은 아래와 같다. 조선 경성생 이봉창(32) 






  아래는 같은 날 조선일보와 매일신보의 기사입니다.






조선일보 1932년 1월 10일자 2면






  천황폐하 환행도중


  노부에 폭탄투척


  8일 오전 동경 경시청 앞에서


  어료차 別無이상




  〔동경8일오후6시15분발지급보〓오후1시30분연착〕〓 내무성발표


  천황폐하께옵서 육군시관병식에 행행하옵섯다가 환행하옵시는 도중 로부가 앵전문전으로 지날 즈음에 어경위(御警衛) 사고가 발생하였었는데 그 사건 개요는 아래와 같다.


  8일 오전 11시 40분경 로부가 국정구앵전정 경시청 앞거리 모퉁이로 꺽어돌아갈때 봉배자선내에서 돌연 어료차로부터 앞으로 약 18간 되는 로부의 둘째차 궁내대신이 탄 차에 수류탄 같은 것을 던지었다 동대신 승용차의 왼편 뒷차륜 부근에 떨어져 동차체의 밑으로 엄지손만큼 파손된 곳이 두세곳 있었으나 어료차 기타에는 어이상이 없이 오전 11시 50분 무사 회궁성에 환어하옵시었다.






매일신보 1932년 1월 10일자 2면






  聖上還 어노부 향하여


  수척탄을 돌연 투척


  범인은 현장에서 즉각 포박


  폐하는 어무사 환행




  〔내무성8일오후5시30분발표〕〓 천황폐하께옵서 육군관병식에 행행하옵시었다가 환어하옵시던 도중에 로부가 앵전문외에 다으려하던차에 경위사고가 발생하였는데 그 대요(大要)는 다음과 같다.


  8일 오전 11시 44분경에 로부가 국정구앵전정 경시청 앞에 다으려하는 찰라에 봉배자선내로부터 돌연 로부에 대하여 2량째 되는 일목궁상이 승용한 마차에 수류탄 비슷한 것을 어떤 자가 던지었는데 궁상이 승용한 마차의 왼쪽 차량 부근에 떨어지며 동차체아래의 뒤에 크기 엄지손가락만한 파상을 입게 하였으나 황송하온 중에도 봉연과 기타에는 아무 어이상(御異狀)도 없었고 동 11시 50분경에 어무사히 궁성에 환어하옵시었다. 그리고 범인은 경시청형사 석삼훈부와 순사 본전항의 산하종평 하합 헌병상등병 내전헌병군조 등에게 체포되어 경시청에서 방금 취조를 받는 중인데 그 씨명과 년령은 다음과 같다. 조선 경성출생 토공 이봉창(32) 






  8개월여 뒤 재판이 진행되며 동아일보는 그 과정을 상세히 보도했으나 그 또한 엄격한 통제 하에 보도된 것이었습니다.   






1932년 9월 11일자 2면






  금년 1월 8일에 돌발한


  앵전문외 대역(大逆)사건


  범인은 경성 출생 이봉창


  게재금지 중 작석 기사 일부 해금


  16일 대심원에서 공판




  금년 1월 8일 오전 11시 44분 천황폐하께옵서 관병식에 행행하셨다가 환어하시는 길에 로부가 앵전문 부근에 이르렀을 때 폭발탄을 투척한 대불경사건은 그간 범인 이봉창을 동경지방재판소에서 취조하고 대역죄로 대심원에 예심을 청구하여 특별재판소에서 심리한 결과 16일 대역죄의 공판을 개정하기로 결정하였다. 






1932년 9월 17일자 2면






  大逆事件 犯人 李奉昌


  특별공판 금일 개정


  2백여 헌병, 경관 엄중경계리


  개정 6분에 방청 금지




  [동경16일발전통] 대역범인 리봉창에 관계된 대역죄의 특별공판은 16일 오전 9시부터 대심원 형사 대법정에서 심리되었다. 이날 법정의 내외의 경계는 비상하야 영전환내(永田丸內) 서장의 지휘하는 각도 선발의 경관 2백명이 오전 3시부터 출동하야 구내 경관휴게소에서 진을 치고 또 뒤를 이어 달려온 헌병 14명과 협의하야 경계 부서에 나섰다. 밤부터 오는 비가 계속되는 오전 2시에 재판소 문전에는 2, 30명의 방청인이 모여와 개문을 기다리었는데 오전 8시에 경관과 헌병의 엄중한 신체검사를 받고 90명 가량의 방청인이 겨우 입정하였으며 관청에서 온 특별방청인도 1백 20명에 미치었다. 8시 57분 피고 리봉창은 만정의 증오와 노염을 받으며 입정하고 뒤를 이어 제1부장, 중서 형서2부장, 지전 민사부장, 고연 민사5부장 등과 그 뒤를 이어 림 검사총장, 실추 차석검사 등이 입정하여 착석하고 오전 정9시에 화인 재판장이 개정을 선언하고 피고의 성명을 부르니 리봉창은 온순히 ‘네’하고 대답하였으며 ‘본적은’ 하고 물으니 ‘경성 금정 118번지’라고 대답하였다. 이때 시추 검사가 일어나 방청금지를 신청하였음으로 재판장은 한번 퇴정하여 2분간 합의하고 본건은 안녕질서를 문란케하는 것으로 인정함으로 공개를 금지한다고 선언하니 때는 오전 9시 6분 개정후 겨우 6분으로 불공개심리에 들었다.  






1932년 10월 1일자 2면






  櫻田門外 大逆犯人


  李奉昌에게 사형선고


  피고는 각오한 듯이 點頭


  今朝, 대심원에서 판결




  [동경30일발전보련합] 앵전문외 대역사건의 범인 조선 경성 출생 리봉창에 관한 사건 판결 언도 공판이 30일 오전 동경 대심원 형사 제1호 대법정에서 개정되었다. 대심원장 화인재판장은 나직한 목소리로 판결의 이유를 낭독한 후 피고에 대하여 엄숙히 “피고 리봉창을 사형에 처한다”고 선언하였다. 때는 오전 9시 15분 피고는 각오한 듯이 별로 안색도 변치안코 창백한 얼굴을 들어 고개를 끄덕이었다. 아침부터 나리는 가을비는 무거운 법정의 공기를 더욱 무겁게 하였다. 






  ‘아침부터 나리는 가을비는 무거운 법정의 공기를 더욱 무겁게 하였다.’


  이 한 줄의 표현이 말 못하는 당시 상황을 전하는 동아일보의 고뇌였고 의기(義氣)였습니다.




  그리고 열흘 뒤, 이봉창의 사형 집행 소식을 통신문대로 짤막하게 보도했습니다.  






1932년 10월 11일자 2면






  이봉창 사형 집행


  금10일 오전9시 2분




  [동경10일발전통] 대역범인 리봉창은 금 10일 오전 9시 2분 사형을 집행하였다.


  [동경10일발전연합] 지난 30일 대심원 화인 재판장으로부터 사형의 판결을 받은 대역범인 리봉창(32)의 사형은 10일 오전 9시 시곡형무소에서 대심원 검사대리 붕정 동경지방재판소 차석검사 좌등 동 형무소장 이전 대심원 서기 입회하에 사형을 집행하였다. 






  이봉창 의사 의거 보도를 두고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일제와 당시 조선의 형편을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당시는 일제의 발표를 그대로 실을 수 밖에 없는, 자유가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조범래(趙凡來) 독립기념관 학예연구관(‘ 한인애국단’,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27권 의열투쟁Ⅱ, 독립기념관, 2009)의 논문 중 관련 부분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내무성 발표를 국내의 각 신문이 보도하면서 매일신보는 발표문을 그대로 전재하였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이에 비해서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는 그것을 약간 축약하여 보도하고 있다. 내용상으로도 일본어 번역상 확연한 차이가 보이며, 같은 발표를 게재하면서 독자들이 받는 느낌에는 상당한 차이를 느낄 수 있게 하였다.  매일신보는 일왕에 대한 극존칭과 일본식 표현의 ‘어(御)’를 그대로 사용하며 내무성의 발표문을 옮겨 실었다. 그렇지만 다른 신문들은 내무성의 발표문을 게재하지만 내용을 축약하고 가능한 한 일본식 표현을 줄이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중앙일보는 1월 10일자 기사가 일제 경찰에 의해 차압당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사건의 개요만을 간략하게 게재하였다. 같은 내용을 게재하면서도 국내 신문에 차이가 나는 것은 내무성의 발표만을 그대로 보도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숨어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위와 같이 이봉창 의사의 의거에 대한 국내 신문의 보도 내용은 일제의 보도 통제로 상세한 내용을 게재할 수 없었고 일제가 발표한 내용을 축약하여 보도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용면에서는 신문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동아일보의 경우 처음부터 이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하여 호외를 4차례나 발행하였다. 그리고 거사의 주인공인 이봉창 의사의 사진과 살았던 집 사진을 같이 게재함으로써 은연중에 의거의 주인공이 한국인임을 알리고자 하였다. 중앙일보의 경우에도 이봉창 의사가 살았던 집 사진을 실음으로써 의거의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알리고자 한 의도가 분명하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일본 정부의 공식발표를 그대로 게재하였다. 매일신보의 경우 일제의 공식 보도를 상세히 보도는 하고 있으나 그 내용이 대부분 견양의 내각의 동향과 친일 세력의 동향에 대한 것이었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가 일어난 직후 국내 신문 보도는 대체로 동경발 전보를 그대로 게재하는 수준이었고 신문사 자체의 취재를 통해 기사화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의거 이후에도 국내 신문에 이봉창 의사와 관련된 직접적인 기사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여전히 보도통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봉창 의사에 대한 공판이 진행되고 사형이 집행되었는데도 이에 대한 기사는 매우 간단하게 처리되고 있었다. 이봉창 의사에 대한 공판과 사형에 관련된 기사는 의거 직후 신문보도와 마찬가지로 동경발 전보를 그대로 받아 보도하고 있다. 동아일보와  매일신보는 9월 16일 특별공판이 대심원 형사대법정에서 시작되었다고 9월 17일자와 18일자로 2일 연속 보도하였다. 기사의 전체적 내용은 대동소이하지만 다음과 같이 보도 자세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동아일보의 기사는 일제 당국이 발표한 자료를 그대로 보도하지 않고 이봉창 의사의 공판 자세 중 사실만을 기사로 작성하여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매일신보는 ‘대역의 죄를 회개한 듯’, ‘회오(悔悟)의 빛을 보이며’라는 내용을 삽입하여 이봉창 의사가 동경의거를 결행한 것을 뉘우치고 있는 것처럼 보도하고 있다.






  1932년 10월 10일 동경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사이타마현 우라와시의 우라와 형무소 묘지에 매장된 이봉창 의사의 유해는 1945년 해방을 맞으면서 귀국한 김구 선생의 요구로 조국에 돌아 왔습니다. 김구 선생은 일본에 있는 박렬(朴烈)에게 이봉창 의사를 비롯한 윤봉길 의사와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한국으로 봉환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박렬은 일본에서 천황암살 음모를 예비했다는 죄목으로 아키다 형무소에서 23년간 옥살이를 하다 해방으로 석방됐는데, 그는 출옥하자 해방과 함께 풀려난 애국지사들과 조직한 신조선건설동맹(新朝鮮建設同盟)을 통해 이들 의사들의 유해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동아일보는 1946년 4월 27일자에 이 의사의 유해 발굴과 수습 과정을 자세히 보도했습니다.






1946년 4월 27일자 2면






  英靈의 사무친 怨恨풀어


  三의사의 유골봉안


  조국의 독립을 기다리는 재일동포




  1932년 상해 신공원에서 왜장 백천대장을 폭살시키고 웃으며 총살의 수형을 받은 고 윤봉길 의사와 1932년 1월 8일 동경 앵전문 앞에서 일본 천황을 폭살시키려고 폭탄 두 개를 던져 한 개는 불발, 한 개는 터졌으나 말다리에 터져 목적을 달하지 못하고 원한의 사형을 받은 고 이봉창 의사와 1933년 3월 17일 상해 공동조계에서 왜적 유길공사(有吉公使)를 암살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를 당해 옥중 혼이 된 고 백정기 의사의 유골과 유품을 찾을 때의 극적 활동을 감개무량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재일동포는 2천 2백만(2백2십만의 오기-편집자 주)이었는데 해방 후 귀국한 게 약 백만이요 현재 돌아오지 못하고 멀리 조국의 정세를 염려하고 있는 게 백 2십만명 가량 된다. 이 사람들의 생활은 2홉 1작의 배급을 가지고 근근이 살아가나 일본 전체에 배급미가 쌀 부족으로 5월말경에는 배급이 없을 것으로 대단히 걱정이다. 더구나 우리 동포의 실직자가 반수 이상이나 되어서 하루 빨리 조국이 완전히 독립하야 귀국 후 건국대업에 참가할 날을 목이 마르게 기다리고 있다.




  그래 이 사람들을 참된 노선으로 지도하려고 조직된 것이 신조선건설동맹인데 이 동맹은 23년 만에 추전형무소를 출옥한 박렬 씨를 중심으로 민족단결 생활안정 등 여러가지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우선 전기 세 의사의 유골과 유품을 눈물로 찾은 이야기를 하자.




  우리는 제일 착수로 윤봉길 의사의 유골을 찾아 금택으로 갔다. 그러나 공동묘지라 알 수가 없어 며칠을 묵고 부근 왜놈들이 입을 합하여 모르겠다고 가르쳐주지 않기에 하는 수 없이 “그러면 이 부락의 묘를 전부 파보겠다”고 말하였더니 놀랐는지 우리가 자고 있는 밤중에 패를 꽂아 가르쳐주기에 기쁨에 넘친 우리는 한숨에 파본즉 목제 십자가와 자색 양복, 검정 구두, 중절모와 유골을 발견하였다.




  고 이봉창 의사는 포화형무소 묘지에 계신 것을 알고 사법대신을 만나 이야기하고 포화형무소에 가서 물은즉, 소장은 모른다고 회피한다. 그러면 최후수단을 쓰겠다고 강경하게 나섰더니 교무관을 불러 가르쳐 주도록 하여 겨우 모시게 되었고, 다시 장기(長崎)로 백정기 의사를 찾은 우리는 그곳 형무소 소장의 독장(獨葬)이 아니고 딴 시체와 합장(合葬)한 것 같다는 말에 놀랐다. 분개한 우리는 “한 나라의 의사를 이름 모를 추한 딴 시체와 합장하는 모욕이 어느 나라에 있느냐”고 끌어오르는 분노에 피를 억지로 참고 반문한즉 우리의 기세에 놀랐는지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매장 장부를 조사하더니 “독장입니다. 장소도 알겠소”하고 사과하며 가르쳐 주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옥사하신 백 의사의 유골을 이(李), 윤(尹) 양 의사와 같이 동경 육대(陸大) 우리 본부 사무소에 모시고 지난 2월 19일 간다공립강당에서 유골 봉환회를 엄숙하고 성대히 거행하고 요번 귀국에는 우선 윤의사의 유품 양복, 모자, 구두, 당시 윤의사의 사건을 기재한 신문의 복사진만을 모시고 왔다.






  이 의사를 비롯한 세 의사의 유해가 귀국한 지 한 달 후인 1946년 6월 15일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세 의사 추도회가 열렸습니다. 동아일보는 이 날의 추도회 광경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1946년 6월 17일자 2면






  3열사 유골 해방호 타시고


  3천만의 가슴속에 돌아오다




 〔부산지국 전화〕조국 광복에 커다란 봉화를 높이 들고 왜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한편 3천만 민족의 잠자는 혈관에 불을 질러놓은 고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3의사의 추도회가 부산 관민 유지 발기에 의해 서울서 내부한 민주의원 김구 총리 일행 임석하에 관민 학생 기타 사회단체 등 수만 군중이 모인 가운데 15일 정오 최비봉씨 사회로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에 앞서 김구 총리를 선두로 부산 남녀 중등학교 대표 4백 여명에게 인도된 유골이 시내 대창정 부립 유치원 유골 안치장에서 추도식장으로 입장하자 장내는 물은 부은 듯 엄숙한 가운데 유골은 소형 계단에 높이 안치되었다. 식은 국기배례, 애국가 합창, 독립기원의 묵상, 추도 주악식, 식사에 이어 백정기 의사의 전우로 남아 십수년간 형무소에서 신음하다 해방과 함께 석방되어 유골을 봉안하고 환국한 서상한씨가 3의사 약력의 낭독이 있은 다음, 이어서 각 단체 대표의 분향을 마치고 김구 총리의 훈화에 이어 김상순씨의 답사가 있은 다음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폐회하였다. 회가 끝난 다음 유골은 다시 봉안소에 안치하고 김구 총리 일행은 당일 동래에서 일박 후 부산발 해방호 열차로 유골을 봉인하고 출발하였다.






  다음날에는 유골이 서울역에 도착하여 태고사에 안치될 때까지의 과정을 보도했습니다.






1946년 6월 18일자 2면






  조기(弔旗) 따라 무언개선(無言凱旋)


  3의사 유골 태고사에 안치




  백포에 고이 싸여 잠드신 세 의사의 유해가 원한 많은 고국산천에 말없이 돌아온 감개도 새로운 16일… 이날은 하늘조차 무심치 않아 3열사의 장렬한 죽음을 조상(弔喪)하는 궂은 비가 아침부터 내렸다. 이날 아침 부산을 떠난 특급 조선 해방자 호에 세 의사들의 선배 김구 총리와 유족의 가슴에 안긴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의사의 유해는 동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무언의 개선을 하였다. 역 플랫폼에 인산(人山)을 이룬 봉영(奉迎)의 시민 김규식 박사를 비롯하여 원세훈, 함상훈, 조완구 씨 외 정당 요인, 각 단체, 신문사 대표 등이 도열한 가운데 3의사를 봉영하는 조기를 선두로 백포에 고이 싸인 유해는 생전의 의사들의 용모를 말하는 사진과 함께 전망차를 내려서 제1폼을 거쳐 역전 광장으로 향하였다. 이때 마침 쏟아지던 소낙비도 개이고 요란하던 전차 자동차 소리도 그치고 역전에 운집한 청년단, 소년군, 전평(全評) 등 각 단체는 조기를 높이 들고 일반 봉영자와 함께 머리를 숙인 채 감격과 비통의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소년군이 취주하는 주악 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조위의 일순 “아… 우리의 의사여 …” 어느덧 봉영자 가운데는 흑흑 느끼는 울음소리조차 들려왔다. 이리하여 봉영이 끝난 다음 3의사의 유해는 민주의원 봉영차 13호와 14호 두 대에 나뉘어 유족과 봉장위원과 함께 시내 수송정 태고사로 향하였다.






  다음은 동아일보에 보도된 이 의사의 국민장 모습입니다.






1946년 7월 7일자 2면






  조국광복에 바친 세 혈제(血祭)


  조기 아래 전시민이 애도


  3열사 유골 효창원 정역에 안장




  천고에 빛날 세 열사의 유혼이 고국에 돌아오시었다. 장할 손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세 분의 의기야말로 조국광복에 피로서 마친 혈사(血史)의 바탕인 것이다. 이제 세 분의 육신과 의로운 넓은 혁명의 원지(元志)와 더불어 순혈 어린 3천만 겨레의 가슴속에 안기여 6일 국민장으로서 시내 효창원 성지에 고이고이 잠들었다.




  엄숙한 국민장 의식


  김구 총리의 애끓는 제문 낭독




  이날의 장례를 조상하고자 맑게 개인 아침부터 수만 시민이 시내 태고사에 운집하였고 국민장의 행렬은 상오 10시 열사 봉장위원회의 지도를 받아 엄숙한 주악리에 효창원으로 향하였다. 태극기를 선두로 소년군의 악대, 각 정당단체 화환과 조기, 그 뒤에 무장 경찰대가 경호하고 이봉창 의사의 명정, 유영(遺影)을 든 남학생이 앞을 인도하고 여학생들이 뒤를 따르는 태극기로 싼 흰 영구차는 소리없이 굴러갔다. 뒤를 이어 윤 의사와 백 의사의 명정과 유영 영구도 모시었는데 연도에 늘어선 삼가 영구를 맞이하는 시민들의 가슴을 한층 더 짜내게 하는 것은 윤 의사의 십자가 사형가(死刑架)였다. 이리하여 행렬은 수만 시민의 봉배와 눈물 어린 감회 속에 안국정 사거리를 돌아 종로 남대문 앞을 지나 경성역을 거쳐 연병정으로 행하였다. 더욱이 동지의 유골을 받들어든 김구 총리의 얼굴에는 새로운 감회가 깊이깊이 우러나오는 듯 용산서 앞을 지나 금정에 이르니 이곳이 곧 이봉창 의사의 출생지다. 연고 깊은 이곳 장지인 효창원에 도착한 것은 하오 12시 40분이었다.






  한편, 이봉창 의사가 체포 후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김구 선생과의 관계를 끝까지 부인했다는 사실도 1994년 12월 동아일보의 보도를 통해 알려졌습니다. 이 의사는 “백정선(白貞善·김구 선생의 가명)은 알지만 김구는 모른다”고 끝까지 버텨 김구 선생을 주범으로 기소하려던 일본 경찰의 의도를 무산시켰습니다.






1994년 12월 15일자 1면






  의거 동기 – 항일 생애 62년 만에 햇빛


  “일왕 살해 미수 분통” 기개 안 굽혀


  학계 “독립운동사 귀중자료” 평가




  항일 독립투사 이봉창 의사가 1932년 1월 8일 동경에서 히로히토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으나 암살에 실패한 뒤 옥중에서 쓴 수기가 62년만에 일본 최고재판소 형사사건 서고에서 발견됐다. 또 이 의사가 의거 후 체포되어 재판이 끝날 때까지의 신문 및 재판기록과 관련 일 외교문서도 처음으로 확인됐다. 옥중수기와 관련 기록은 일왕 위해와 관련된 내용이라는 이유로 일 정부가 현재까지도 공식적으로는 공개하지 않고 있는데 한일근세사 연구가 최서면씨가 최근 하타노 아키라 전 일본 법무상의 특별 주선으로 서고를 조사, 발굴했다. 도요다마 형무소 용지 26쪽에 걸쳐 일문(日文)으로 쓰여진 수기는 이 의사가 일본에 건너가 온갖 차별을 받다가 2년동안 일본인 행세를 하며 가게점원 노릇을 한 끝에 차별이나 압박을 받아도 두려워하지 않고 조선인으로 생활하겠다고 결심,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뛰어드는 고뇌의 과정을 잘보여준다. 재판기록에 따르면 이 의사는 백정선(白貞善)이란 가명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김구 선생을 추적하기 위해 일 경찰과 판사가 김구 선생의 사진을 보여주며 끈질기게 추궁했는데도 “백정선은 알지만 김구는 모른다”고 일관되게 주장했고 “일왕 폭사가 목적이었으나 폭탄 위력이 부족해 목적 달성을 못한 것이 유감”이라고 당당히 진술하기도 했다. 일 외교사료에서는 32년 10월 10일 이 의사가 처형당한 직후 김구 선생이 이봉창 의거의 진상을 밝히면서 중국 통신사에 성명서 게재를 요청한 친필서한도 처음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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