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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년 12월 28일 오후 2시. 나석주(羅錫疇) 의사는 경성 한복판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이어 동양척식회사와 같은 건물 내 조선철도회사 동척사무소에 폭탄을 던지고 권총을 난사(亂射), 일경 등 일곱 명을 저격하고 자결했습니다.




                      

조선식산은행                                                                   동양척식회사

(산업은행 옛 본점, 현재 롯데백화점 본점 자리)            (내무부 옛 청사, 현재 외환은행 본점 자리)




  ‘근래 초유(初有)의 대사건(大事件)’을 당한 일제는 조선 내에서의 보도를 일체 금지했다가 사건 발생 17일이 지난 1927년 1월 13일에야 보도금지를 해제했습니다.


  동아일보는 보도 해제된 1월 13일 즉각 ‘백주(白晝) 돌발한 근래 초유(初有)의 대사건(大事件)’이라는 제하의 호외(4면 짜리)를 발행, 사건의 진상을 소상히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 호외에 일제 경찰이 발표하지 않은 내용이 담겼다며 삭제 압수를 당해 동아일보는 사상 초유의 ‘호외의 호외’를 다시 발행했습니다. 그리고 1월 14일자 본판 2면에 ‘호외의 호외’ 발행 사실을 알리는 사고(社告)를 실었습니다.




1927년 1월 13일자 ‘호외의 호외’ 1면


  백야 돌발한 근래 초유의 대사건


– ‘동척(東拓)’과 ‘식은(殖銀)’에 폭탄을 투척 권총을 난사하야 일거에 7명 저격, 작년 12월 28일 오후 2시 황금정(黃金町)의 일대 참극, 탈출한 범인은 가상( 街上)에서 자살


– 우선  ‘식은(殖銀)’에 일탄(一彈)!  돌발 직전에 수상한 중국인


– 제2차로  ‘동척(東拓)’ 돌입, 상하층(上下層)서 6명 저격, 폭탄에 실패하고 권총으로 출기불의(出其不意)의 맹렬한 사격


– 범인은 재령(載寧) 출생, 공범으로 이승충(李承忠) 지목, 계통(系統)은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 전후 거사 단신 독행(獨行), 35세의 나석주(羅錫疇)


– 가두(街頭)에서 경부(警部) 사격 다음은 자기 흉중(胸中), 자살하던 순간의 말못할 광경 앙천지(仰天地)한 범인의 최후


– 암담한 현장과 철통(鐵筒)가튼 경계, 피해자 중 세명은 필경 사망하고 범인도 총독부 의원에서 절명돼, 사건 발생과 당시의 시내


– 피해자 경과


– 피해자 명부(名簿)






‘호외의 호외’ 2면






– 편지로 본 나석주, 고향 떠나 동분서주 성공 업시 6개 년, 둘재로 가족에 대한 죄인, 죽마고우 최호준(崔皓俊) 씨에게


– 수해가 또 낫다하니 엇더케 살겟늬? 엇지되얏든 살아만나다고, 장남 응섭(應燮)에게 한 편지


– 상해 출발 지부셔 승선 중국인으로 변장 도인(到仁) 난열(爛熱)한 중국어와 마충대(馬忠大) 마중덕(馬中德) 두 일흠, 나석주의 침입 경로


– 경성서는 마중달(馬中達)로 동춘잔(同春棧)에 투숙, 27일 오후 10시에 투숙, 객도기(客到記)에 변명자서(變名自署)


– 여관 주인 증명, 여관 주인이 사태 증명


– 경찰 동원 만여명 통첩 조회 200여 차, 나석주를 수색한 경관의 연인수가 일만여명 5년 동안에 통첩과 조회가 2백여차나 되여, 부율면(北栗面) 주재소 안 순사(安 巡査) 수색 담




나석주는 죽마고우 최호준(崔皓俊)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스로를 ‘우형(愚兄)’ 이라 하고    ‘제1은 민족에 대한 죄인이요, 제2는 가족에 대한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고향 떠나 동분서주


성공없이 6년


둘째로 가족에 대한 죄인


죽마고우 최씨에게


나석주가 작년 5월 중국 천진에 있을때 그와 사이가 매우 가까운 사람으로 사리원 ○○ 김모집 사건에도 동지의 한 사람이었던 최호준에게 보낸 편지가 있는데 그 편지의 전문을 그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작년 2월 23일에 발신한 군의 ○○을 접하여 볼 때에 흉중에 희비가 교집하였음을 어찌다 기록하오랫가, 반갑소이다 반갑소이다, 우형(愚兄)은 이향(離鄕) 6여개 성상에 공연(空然) 동서분주하면서 아모 성공이 업시 지지왔소니 제1은 민족에 대한 죄인이요, 제2는 가족에 대한 죄인인줄을 지실하엿사오나 사회 환경이 불허하는데야 어찌하오, 그러나 어찌하였던 나의 ○○은 그대로 보존하여 있나이다.


각설하고


군의 대소 제택(諸宅)이 모두 안녕하신지 원문(願聞)이오며 ○○○은 5년전 분몌(分袂)이후 지우금(至于今) 미득음신(未得音信)이로이다. 간접으로 ○聞하니 노령(露領)에서 공산당원으로 행세를 한다던가요?


더 쓸 말이 없기에 이만 그칩니다.


5월 20일 우형(愚兄) 나석주 서(書) 





‘호외의 호외’ 3면 






– 사리원(沙里院) 사건을 필두로 6인대(六人隊)의 권총단(拳銃團), 황해도 일대를 전율케하얏든 나석주 관계의 과거 사건


– 경찰에 고발하라고 자진(自進)하야 권고, 협박 전후의 대담한 태도, 사리원 부호 협박사건


– 재거(再擧) 계획 동료들이 체포되자 또다시 계획해


– 안악(安岳) 부호 협박 여러 군데에서 운동금을 모집, 목선 타고 중국으로


– 은율군수(殷栗郡守) 살해 교묘히 현장을 탈출


– 보명건아운동장(普明健兒運動場) 지금은 동척(東拓)의 창고, 나석주의 모교 보명교(普明校)의 폐허와 당시의 교장 김정홍(金正洪) 씨 회고담


– 이승충(李承忠)의 허혼자(許婚者)라 독단(獨斷)하고 여학생을 힐란, 허덕거리는 각지 경찰


– 알기는 알지요 결혼 문제는 절대로 업슴니다, 평양 과차(過次) 최효신(崔孝信) 양 담(談)






‘호외의 호외’ 4면




– 독자로 출생하야 척신(隻身)으로 기세(棄世)까지 불평으로 일관한 나석주의 반생


– 나병헌(羅秉獻)의 독자 유신 초(維新初) 새 공부


– 경술년 불평과 결단한 간도(間島) 행


– 이동휘 부하로 무관학교 졸업


– 황해도를 무대, 기미(己未) 후 제(諸) 사건


– 가정부(假政府) 경호원 의열단에 참가


– 중국군 대대장 병인의용대원(丙寅義勇隊員)


– 형사의 간청에 성명만 대답, 정신을 차렷스나 아모 말도 안해 최후에 이르러 주소 성명만 대답, 임종하든 순간의 광경


– 안익훈(安益勳) 순사를 상경식혀 범인의 인상을 확정


– 검사 입회로 해부, 검사 입회로 소천외과의 집도, 3발 중 2발은 관통


– 체구가 장대 가경(可驚)할 사격 수단, 피해자의 상처로 보아 짐작, 총독부 의원 소천(小川) 외과장 담(談)


– 분상차(奔喪次)로 입경한 장남 본정서(本町署)에 유치, 휴대한 물품까지도 젼부 몰수 5일 만에 방면되여


– 부음과 함께 유족을 방문하고, 단칸 모옥(茅屋)에 비풍(悲風)이 삽삽(颯颯), 자수 노안(老眼)에 암루(暗淚)가 영영(零零), 울다 못하야 몸설음치는 유족의 광경, 재령에서 본사 평양특파원 崔容煥


– 흉보(凶報)를 접하고 부친은 잘 죽엇다 잘 죽엇셔 안해는 모든 희망이 물거품, 침통한 유족의 비애(寫)




1월 14일자 본지 2면 ‘호외의 호외’ 발행 사실을 알리는 사고(社告).


동아일보 1927년 1월 14일자 2면


호외의 호외 발행

전4면 = 금일 본지 첨부 배부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다시 권총으로 일곱명을 살상한후 자살까지 한 라석주사건에 대하여 작일 호외를 발행하였으나 여러 차례나 당국의 삭제를 당하고 다시 호외를 발행하여 시내에 배포하였으며 지방에는 금일 본지와 함께 배송하였삼 – 동아일보사




그리고 1면 사설 ‘경무국(警務局)의 당황(唐皇)’에서는 호외를 삭제하고 압수했던 그들의 처사를 통렬하게 비판했습니다.


사건발생 17일 후, 일본에서는 각 신문, 무전방송으로 사건의 진상이 상세히 보도된 지 15일이나 지나 해금하면서 범인의 약력, 사신(私信), 범인의 가족기사 등 당국의 발표 서류에 없는 것이 있다는 이유로 압수했으며 일문(日文)으로 된 당국 발표만 배부하고 조선역(譯) 발표 요구를 묵살했으며 제1차 호외 중 당국이 삭제하기를 요구하는 기사와 사진 전부를 출장한 종로서 경관의 입회하에 삭제하고 제2차 호외를 발행하였는데 사복경관은 편집국과 공장을 경계하고 ‘인쇄는 하더라도 허락 없이는 배달 못 한다’며 법률로 허락된 권리까지도 무시했다.




동아일보 1927년 1월 14일자 1면 사설






경무국의 당황


(一) 이번 동척폭탄사건 기사에 대하야 경무국은 분반(噴飯·입에 물었던 밥이 튀어 나옴)할 만한 당황을 하였다. 거(去) 12월28일 해(該) 사건이 일어난 뒤에 각 보도기관에 대하여 일체 게재금지의 명령을 발한 것은 연루자 수색상 용혹무괴(容或無怪·혹시 그러하더라도 괴이할 것이 없음)라 하더라도 진범인이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또 그 범인이 자기의 성명을 말할 뿐으로 자살하여 버린 이상 사건은 극히 단순명백함에 불구하고 사건발생 이래 17일을 경과한 후에 일본 내지(內地)에서는 각 신문은 물론이오 무전방송으로 일반 공중에게 사건의 진상이 상세히 보도된 지 반삭(半朔)이나 되어서 겨우 해금(解禁)한다는 것이 첫째 당황이오.


(二) 둘째 작조(昨朝) 11시 기사게재의 금(禁)을 해(解)함에 당하야 “당국이 발표하는 그대로 하되 만일 조금이라도 착위(錯違)함이 있으면 차압하리라”는 진무류(珍無類)한 엄명을 내리되 출입기자에게만 말한  것이 아니오 소관 경찰서로 하여금 전달케 하였다. 경무국이 기사 게재의 범위를 지정하는 것은 조선에서는 다반사(茶飯事)어니와 기사의 내용을 딕테이트한다는 것은 경찰 만능의 조선에서도 실로 초유의 사(事)였다. 아무리 주책없는 경무 당국이라도 이렇게 몰도리(沒道理)한 처치가 있으리라고는 믿지 못하였다. 이것은 실로 당황 중의 당황이라 할 것이다.


(三) 그러나 명령은 명령이다. 우리는 이를 순종할 밖에 없으므로 당국의 발표가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발표 당시에 경무국장은 분명히 “당국 발표의 정도(程度)”라고 말하였다. 정도(程度)라 함은 가장 당연한 말이므로 우리는 그 말을 믿고 당국 발표의 정도를 넘지 아니하는 한에서 해(該) 사건의 호외를 발행하였으나 당국 발표 서류에 없는 것이 있다는 이유로 압수를 당하였다. 그런데 발표 서류 외엣 것이라 하여 삭제를 명한 것 중에는 범인의 유족 일람표와 필적(自署) 사진까지도 포함되었다. 그 외에 금지 기사도 범인의 약력, 사신(私信), 범인의 가족기사 등이다. 만일 범인의 범죄 동기라든가 범인을 동정하고 추장하는 기사라든가 또는 범죄수색상 비밀히 할만한 관계가 있는 것이라면 용혹무괴어니와 그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까지 삭제하라 함은 다만 당국이 “당국 발표대로 꼭 그대로만 하라”하는 ○○하고도 부당한 명령을 묵수(墨守)하라는 치기(稚氣)에 불과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우리는 당국자 중에도 책임자인 경무국장의 “발표한 정도”라는 말을 믿고 하였음이라.


(四) 넷째로 경무 당국은 11시에 기사를 해금한다 하면서 일문(日文)으로 된 당국 발표를 동시에 일문신문과 조선문 신문에게 배부하였다. 일문신문은 발표 그대로만 문선하여 인쇄하면 그만이어니와 조선문 신문은 이것을 조선어로 번역할 시간이 있으니 도저히 기회균등이 되지 못할 것이 아닌가. 우리는 당국에 대하여 조선역(譯)의 발표를 요구하였으나 경무당국은 이에 대하여 일고(一顧)도 주지 아니하였다. 우리는 제1차 호외 중에서 당국이 삭제하기를 요구하는 기사와 사진 전부를 출장한 종로서 경관의 입회하에 삭제하고 제2차 호외를 발행하였다. 이날에 사복경관은 편집국과 공장을 경계하고 “인쇄는 하더라도 허락 없이는 배달 못한다” 하는 제2의 진명령(珍命令)을 내렸다. 법률로 허락함이 된 권리까지도 경무당국의 눈에는 초개(草芥)와 같다. 우리는 경무당국의 건재(健在)를 묻고 말란다.


그러나 이 ‘호외의 호외’도 일부 지방에서는 압수를 당하는 등 수난을 겪었습니다.


동아일보 1927년 1월 18일자 7면






이 대사건 이후 나석주 의사의 장남 나응섭(羅應燮·당시 21세)은 진남포(鎭南浦)를 거쳐 중국 청도(靑島)로 도피했으나 1927년 6월 22일 그곳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나응섭이 백운학(白雲鶴)으로 개명하여 상해(上海)로 탈출해 임시정부에 이 대사건을 보고하였다는 설(說)도 있습니다.






동아일보 1927년 6월 18일자 2면                       동아일보 1927년 6월 19일자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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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7년 6월 24일자 2면    






동아일보 1927년 6월 25일자 2면






동아일보 1927년 6월 26일자 2면






동아일보 1927년 7월 3일자 2면






나석주 의사의 의거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한 경북유림단(慶北儒林團) 수령(首領) 김창숙(金昌淑)이 계획한 무력운동(武力運動)의 일환이었음이 나중에 밝혀졌습니다.


동아일보는 1928년 4월 8일자에 이를 상세히 보도했습니다.


동아일보 1928년 4월 8일자 2면






나석주 의사의 이름이 동아일보에 처음 등장한 것은 동척 폭탄투척 의거가 있기 5개월 전인 1926년 7월 20일자였습니다.


동아일보 1926년 7월 20일자 2면


가정부(假政府)의 12명


모 계책으로 입경한다는 정보


최근 모처로부터 전하는 정보에 의하면 상해가정부원(上海假政府員) 나석주(羅錫疇) 외 12명은 고 순종효황제(純宗孝皇帝) 인산 날을 기회로 내지에 들어와 모 운동을 일으키려고 지난 5월 29일에 상해를 떠나 대련(大連)까지 왔다가 또다시 상해로 돌아가 있던 중에 이번 순종황제의 백일제(百日祭)의 망곡할 것을 기회하여 모 외국인 소유의 기선 한척을 얻어 타고 해로를 거쳐 경성으로 들어와 모모 운동을 하려는 정보가 있으므로 경찰당국에서는 방금 엄밀히 경찰을 하는 중이라더라




의거가 있기 한달 보름여 전인 11월 7일자에는 나석주 의사의 잠입설(潛入說)을 경찰이 허보(虛報)라고 선전한다는 기사를 실으면서 나석주 의사를 ‘많은 활동을 하는 모험적 청년’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동아일보 1926년 11월 7일자 2면


나석주 잠입설은


경찰이 허보라고 선전


중국 지부 방면으로부터 나석주(羅錫疇) 이승춘(李承春)의 2명이 조선 안에 잠입하였다는 정보는 당국에서 저간 각 방면으로 조사하여 본 결과 전연 허전인 것을 알게 되었다는데 전기 나석주는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출생으로 기미년 운동 이래 중국 방면으로 망명하여 이래 많은 활동을 하는 모험적 청년이라더라.











국가보훈처 포상자 공적조서(공적 개요)


1. 載寧 明信學校 2年 修業 後 농사에 종사하다가 23歲時에 間島로 가서 4년간 군사훈련을 하고 27세에 귀국 黃海道 兼二浦에서 상업을 경영하면서 敵情을 탐지함.


2. 29歲時 己未獨立運動이 일어나매 臨時政府의 군자금을 조달하고 決死隊를 조직하고 平山郡 上月面 駐在所 倭警 및 上月面長을 총살하였으며 安岳郡 某富豪를 사살한 후 上海로 가서 臨時政府 警務局 警護員을 거쳐 邯鄲軍官學校를 졸업하고 중국군대 장교로 복무함.


3. 1926년 4월 儒林 代表 金昌淑의 말에 감동되어 은행 및 東拓의 파괴를 결심하고


4. 12월 28일 오후 2시 서울 東拓에 가서 내외를 탐지한 후 殖産銀行으로 가서 貸付保鐵 책에 투탄하고 다시 東拓으로 와서 수위실에 있던 朝鮮副業協會 雜誌記者 高木吉江을 사살하였으며 또다시 이층으로 가서 土地改良部 技術課 次席 大森太次郞, 課長 陵田豊 및 社員 武智光을 쏘아 넘어뜨리고


5. 다시 朝鮮鐵道會社로 들어가 수위 松本과 龍山 천진堂時計店員 金井悅己에 각각 1발을 쏘아 치명상을 입히고 黃金町 쪽으로 피해가다가


6. 京畿道 警察部 田畑唯夫를 쏘아 즉사케 하니 마침내 그들은 騎馬隊까지 동원하였다가 力戰 끝에 自決함 (享年 3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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