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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4년 1월 5일 오후7시 일본 도쿄(東京) 한복판 황성(皇城) 정문 니주우바시(二重橋)에서  폭탄사건이 터져 일본을 경악(驚愕)케 했습니다.   일제는 이 사건에 대한 보도를 일체 금지했다가 3개월여 뒤 예심이 끝난 4월 24일에야 해금(解禁)했습니다.




  동아일보는 4월 25일자 2면에 니주우바시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金祉燮) 의사의 예심결정서를 거의 전면에 걸쳐 보도했습니다.




 동아일보 1924년 4월 25일자 2면 






  이중교(二重橋) 폭탄 범인은


  의열단원(義烈團員) 김지섭


  9월 1일 진재(震災)때 조선인 학살이 도화선으로


  일본 상하(上下)를 경악케 한 대사건 발표




  금년 1월 5일 오후 7시에 동경 이중교(二重橋) 앞에서 돌발한 폭탄사건은 일본의 상하를 경악케 한 대사건인바 당국에서 신문게재를 일체 금지하고 이래 동경지방재판소의 석전(石田) 검사와 평산(平山) 예심판사의 손으로 수사를 진행하던 중 일전에 예심이 결정되고 작일 오후 2시에 당국의 해금통지가 있기로 피고 김지섭 외 네명은 전부 유죄로 공판에 부친 예심결정서대로 보도하노라.




  이 날자 동아일보에 보도된 예심결정서에 따르면 김지섭 의사는 제국의회가 열리는 의사당에 폭탄을 던져 참석한 일본 고관들을 몰살할 예정이었으나 제국의회가 휴회되고 언제 개최될지 알 수 없게 되자 계획을 바꿔 침략의 상징인 황성에 폭탄을 던졌던 것입니다.




  1924년 9월 9일 첫 공판이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김지섭 의사는 “직업이 조선독립당원(朝鮮獨立黨員)과 혁명사원(革命社員)”이라고 밝혔습니다.




 동아일보1924년 9월 11일자 2면


  직업은   독립당원


  명쾌히 진술




  판사는 각 피고의 주소 씨명 연령 등을 묻고 직업을 물으매 김지섭은 “나의 직업은 조선독립당원과 혁명사원이오”하고 대답하매 재판장은 “독립당원이나 혁명사원은 생활을 목적한 직업은 아니지”하고 물었다. 이에 대하여 김지섭은 “나의 하는 일은 돈을 얻으려고 하는 일이 아니다”고 대답한 후 독립운동을 하게 된 동기를 물으매 “일본에게 모욕을 당한 때 매우 분개한 후로 처음에는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였으나 차차 생각하여 보매 독립운동에 몸과 목숨을 희생(犧牲)하여도 좋겠다고 생각하였다”고 대답하였다. 이리하여 피고 김지섭은 조선에 있어서 막사과공산당(莫斯科共産黨)과 의열단(義烈團) 등으로 교유(交遊)하고 독립운동에 분주하였으며 그 기금(基金)을 얻으려고 조선의 부호를 습격하였다는 사실에 이르러 조선총독부 판사(判事) 백윤화(白允和)씨로부터 일 만원을 받고자 한 사건에 대하여 “협박하여 빼앗은 것이 아니다” 답변하고 본년 1월에 폭발탄을 가지고 일본에 들어온 전말을 자세히 답변하였는데 그 후의 진술은 비밀을 요할 것이라 하여 방청금지(傍聽禁止)가 되었다.




  김지섭 의사의 병(病)으로 중지되었던 공판은 10월 11일 다시 속개되었습니다.


  김지섭 의사는 장문의 원고를 펼쳐들고 당당하게 ‘일본의 악정(惡政)을 통론(痛論)’했고 사형을 구형받았습니다.




 동아일보 1924년 10월 13일자 2면

 






  동아일보는 10월 13일자 1보에 이어 10월 14일, 15일자에 성낙숭 도쿄통신원의 특전(特電)으로 공판 상보(詳報)를 두 차례로 나눠 실었습니다.




 동아일보 1924년 10월 14일자 2면     

 






 동아일보 1924년 10월 15일자 2면

 






  10월 15일자 공판 상보에서 눈에 띄는 것은 김지섭 의사를 변호를 맡은 후세 다츠지(布施辰治)변호사가 무죄를 주장하며 진목대갈(瞋目大喝 · 두 눈을 부릅뜨고 큰 소리로 꾸짖음)하였다는 기사입니다.




  포시씨(布施氏) 진목대갈(瞋目大喝)


  ◇폭탄규칙위반에 사형은 절대로 없다고


  검사를 육박하여 무죄를 주장




  때는 마침 오후 2시 45분 장내는 말할 수 없이 긴장되었고 김지섭은 역시 조금도 슬픈 기색 없이 태연하였다. 검사가 피고들에게 전기와 같은 구형을 함에 대하여 포시(布施) 변호사는 노한 기색을 띠우고 분연히 일어나 “폭탄 규칙을 위반하였다”고 사형에 처한 일은 전무 후무한 일일 것이라고 논박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조선의 악정을 통론(痛論)한 후 이어서 황옥과 백윤화(白允和) 씨와의 전례를 들어가며 어디까지나 김지섭의 무죄를 주장한다는 통쾌한 변론이 있었다.




  세 번째 공판은 10월 16일에 열렸고 동아일보는 10월 17일에 1보를 전한 뒤 10월 18일자에 ‘김지섭의 운명?’ 이란 제목 아래 공판 상보를 실었습니다.


  김지섭 의사는 이날 격정적인 최후진술을 했습니다.




 동아일보 1924년 10월 18일자 2면


일본에 선전포고(宣傳布告)


◇죽기를 기약하였으니 사형도 좋다


◇내 양심은 결백하니 무죄라도 좋다


  정정당당한 최후의 진술




  포시(布施)씨의 변론이 마친 후 재판장으로부터 피고의 답변을 허하자 김지섭은 분연히 일어나 자기의 처지를 일장 설명한 후 “이 사건의 예심정(豫審廷)에서 판사는 나를 대하여 너희들이 지금 독립이 무엇이니 떠들고 있으나 만일 지금 독립을 시켜 준다고 하면 과연 너희가 독립하여 생활하여 갈 방도가 있느냐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일개 판사의 몸으로 우리 2천만 조선 민중을 모욕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검사가 나에게 사형을 구형한 것은 나로서는 극히 원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번 사건에 한 가지로 황옥에게 대한 밀정(密偵)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정 우스운 일이며 둘째로 나를 강도라고 지목하나 그것은 전후 사실을 짐작하여 보아도 알 것이다. 근본 나의 성질이 불같은 사람이라 그 날도 분김에 육혈포(六穴砲)를 뺀 것이오 백판사(白判事)의 일만 하더라도 나는 재판소에까지 갔었다. 그러나 나의 일에 대하여 방해하는 자가 있으면 물론 죽여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셋째로 이중교(二重橋) 사건이라고 하니 무슨 까닭으로 그것이 중요시 되느냐? 일본과 조선과는 정치 사상이 다르다”고 말하자 재판장의 주의를 받아 발언이 일시 중지되고 다시 “폭탄인즉 습기가 들어 결국 폭발되지 않고 말았으나 나는 처음부터 완전한 것이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법률의 정신은 내 정신과 일치한다. 즉 법률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생명 재산을 보호하는 것으로 목적함을 따라 나는 우리 조선 민중의 생명 재산을 위하여 그와 같은 행동을 취한 것으로 법률상 하등의 벌이 있을 까닭이 없다. 그 뿐 아니라 모든 나의 거조(擧措)가 다 불능이었고 조금도 실해가 없으므로 실상 나의 신상은 결백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형이나 무죄이나 두 가지 중에 얼른 판단하여 주기 바란다”고 말한 후 다시 계속하여 “우리조선의 독립선언은 일본에게 대한 선전포고(宣戰布告)이다. 그러므로 일본인은 나와 싸워 나는 일본인을 죽일 목적으로 건너왔으므로 일본인은 나를 죽이려고 할 것은 물론이다. 소위 군인의 훈장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죽인 표장―그렇다. 결국 우리 조선 민중은 굶어 죽고 맞아 죽고 하는 가운데 나 홀로 적국에 들어와서 사형을 받는다 하는 것은 진실로 넘치는 광영이다. 나는 결코 다른 형벌을 바라지 않는다. 먼저도 말한 바와 같이 아주 죽여주던지 그렇지 아니하면 무죄로 하여 주던지 그 두 가지 중에 결단하여 달라”고 유창히 답변을 마친 후 강개한 태도로 자리에 앉았다.






  김지섭 의사는 1924년 11월 6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동아일보 1924년 11월 7일자 2면






  공소(控訴·항소)를 한 김지섭 의사는 구류(拘留)기한을 넘겨 불법감금한데 대한 항의로 옥중에서 단식(斷食)을 벌였습니다.




 동아일보 1925년 1월 10일자 2면






  1925년 5월 13일에 열린 공소 공판에서 후세 등 3인의 변호인은 “니주우바시(二重橋)에 던져진 폭탄의 재감정(再鑑定)을 아무 이유없이 기각했다”는 이유로 재판장 기피신청을 냈습니다. 그러나 김지섭 의사는 “나는 조선 사람이니 일본 사람인 재판장이 어떠한 사람이 되던지 똑같을 것이니 기피신청을 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나는 아무 죄가 없으니 무죄를 선언하든지 제1심의 검사 구형대로 사형에 처하든지 하여 달라는 것”이라며 6월 8일 기피신청 기각신청을 제출하였습니다.




 동아일보 1925년 7월 1일자 2면






  동아일보는 7월 2, 3, 4, 5일자에 걸쳐 이들 변호인들의 재판장 기피신청 이유를 연재했습니다.




 동아일보 1925년 7월 2일자 2면  






동아일보 1925년 7월 3일자 2면






동아일보 1925년 7월 4일자 2면

  






동아일보 1925년 7월 5일자 2면






  그러나 7월 5일자에 실린 4회분이 당국의 기휘(忌諱)에 저촉되어 압수를 당하는 동시에 계속 게재도 금지되어 나머지 부분은 더 이상 실릴 수가 없었습니다. 




  동아일보는 그 대신 7월 6, 8, 9일자에 ‘김지섭 옥중기(獄中記)’를 세 차례에 나눠 게재했습니다.  ‘옥중기’는 동아일보 만의 보도였습니다.  김지섭 의사가 5월 13일 도쿄 공소원 제3호 법정에서 열린 두 번째 공소심을 마치고 옥중에 돌아가서 그날의 감상을 기록한 것이었습니다.


  동아일보는 옥중기 전문(前文)에서 “이는 동경특파원이 변호사로부터 얻은 귀중한 기사이니 독자 여러분은 뜻있게 보아 주시기를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동아일보 1925년 7월 6일자 2면 






  동아일보 1925년 7월 8일자 2면

 






 동아일보 1925년 7월 9일자 2면






  김지섭 옥중기(1)


  ◇ 오늘은 실로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좋은 봄날이다. 봄옷을 깨끗이 입고 술병을 차고 산위의 구름을 따르고 냇가로 서늘한 바람을 찾았으면 좋을 날이다. 오늘은 공소심(控訴審)의 제2회라고는 하나 1회라고도 할 수 있는 공판 날이다. 전회 공판 이래 하루같이 기다린 까닭인지 또는 오늘 가보면 대강 앞길이 보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탓인지 그렇지 않으면 매우 익어온 관계였는지 배암보다도 싫던 포승과 수갑이 그리 싫지가 않았고 귀신소리 같은 번호 부르는 소리도 예사스럽게 들렸으며 시커먼 죄수 자동차를 타도 전과 같이 그리 마음에 걸리지를 않았다. 철망 사이로 활동사진과 같이 지나가는 거리의 천태만상이 모두 진기하게 보였으며 그중에서 제일 눈에 띄는 큰 건축물이 적판이궁(赤坂離宮)이라고 간수에게서 들었을 순간에는 무심중 다시금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재판소 유치장에 도착하였을 때 전과 달리 수갑을 풀어 주지 않음으로 이상히 생각하고 담임 부장에게 물어본 즉 최근에는 안 벗겨 주기로 하였음으로 벗기지 않는 법이나 그대는 병인이니 특별히 벗겨 준다고 무슨 생각이나 하여 주는 것처럼 벗겨 준다. 그러나 나는 별로 반갑다고 생각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여들은 종래 나에게 하여온 짓이 아직 만족치 못하여 이렇게까지 구는가 하고 생각되었다. 한 시간쯤 되어 동경재판소에서도 제일 넓다는 공소원 제3호 법정에 끌려 들어가니 판검사석에서부터 방청석까지 파리 한 마리 없이 음산한 바람이 비를 몰아가는 광야와 같이 장내가 죽은 듯이 적적한 것이 옳지 이안에는 범치 못할 무서운 무엇이 잠겨 있는 듯이 나는 생각되었다. 조금 있다가  다른 피고인과 변호사와 다음에는·판검사가 순서로 각각 제자리에 착석하였다.


◇ 그중에 재판장이라는 사람은 전번 공판의 그것과는 명의만 같을 뿐이오 그밖에는 비슷한 점 하나도 없었고 비길 만한 특징조차 가지지 않은 사람이었다. 나이는 한 50쯤 되었을까? 어머니 배 밖에 나온 이래 한번도 웃어 본 기억이 없는 듯한 얼굴에 너무나 침착한 태도를 가지고 옆에 앉은 배석판사와 검사에게 의견을 물을 때에도 눈도 한번 돌리지 않고 기계적으로 턱만 좌우로 놀리기만 하여 아주 점잔을 뽐내었다. 전번 공판에 감하여 법정으로 빼이지 못할 사람 외에는 특별히 허가를 얻은 4, 5인의 방청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건은 치안에 방해될 염려가 있으므로 공개를 금함”이라고 언도를 하여 방청인을 내어보냈다.


◇ 재판장은 일본헌법에 의하여 천황의 명령으로 재판을 하는 특권을 가진 큰 인물이니…… 나와 다른 피고에 대한 사실심리를 할 때에는 아주 신중히 또는 정밀히 하는 듯이 필요한 것 이상의 사실을 캐어묻는 데는 배석판사들까지 매우 염증이 나는 듯이 하품을 할 듯한 얼굴을 보였다. 오후부터는 증거조사에 들어가 예에 의지하여 읽어 들리기도 하고 증거품을 들어 보이기도 하는 판에 그 사건이 일어날 당야의 이중교(二重橋) 전경을 박은 사진 몇 장이 새롭게 보이었다. 전번 공판에 나와 나의 종제(김완섭 변호사)가 신청한 증인 환문과 폭탄 재감정의 신청은 물론 오늘 각 변호사가 격렬한 성의로써 정당한 이유 밑에 신청한 폭탄의 재감정과 감정증인 기타의 증인환문의 신청도 판결은 내 머리 속에 이미 확정되어 있다고나 하리 만큼 조금도 주저치 않고 “필요가 없다고 인정해…”라는 한 말로써 모두 다 각하하여 버렸다.


◇ 이 순간에 법정을 음습한 공기는 그러한 일을 당치 못한 사람으로서는 몽상도 못하리 만큼 매우 험상스러웠다. 재판장의 얼굴에도 일종의 처잔한 표정이 나타났지만은 변호사 제씨는 마치 현숙무후한 처녀가 졸연히 사나이의 희롱을 당할 때처럼 얼굴에 열이 오른 듯이 보였다. 그러나 나는 감히 정면으로 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계속)






  김지섭 옥중기(2)


◇ 조금 있다가 송곡(松谷)씨의 발언으로 변호인들끼리 협의할 필요가 있으니 휴게를 구한다고 하면서 재판장의 대답은 어찌 했든 좋다는 듯이 변호사 제씨는 자리를 떠나 바깥으로 나가 버리고 말았다. 그들이 법정에서 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무의식적으로 법정을 한번 둘러보니 판검사는 물론 정정(廷丁)과 순사들까지 어느 사이에 다 빠져나가서 홀연히 불어오는 일진광풍에 흔적 없이 사라지는 구름장과 같이 자취를 숨기고 말았다. 단 두 명의 간수에게 자유의 구속을 당한 나 혼자가 텅 비인 방안에 혼자 남아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 과연 이 법정은 과연 크기는 큰 것을 알았다. 얼마 후에 무슨 신호나 있었는 듯이 나갔던 사람들이 다시 제자리에 도로 돌아왔음을 알았다.


◇ 처음에 완섭(完燮)군이 먼저 일어나 변호인은 피고를 위하여 “지금 판사 3인은 편협한 재판을 할 염려가 있어서 기피를 신청한다”고 하며 아직 그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송곡(松谷)씨가 이 기피 신청은 변호인들이 협의한 끝에 결정한 것으로 피고 김지섭뿐 아니고 피고 수도(秀島)군을 위하여서도 하는 말을 보탰다. 이때에 나는 내 주위의 사정에는 조금도 꺼리지 않고 양심의 명령하는 대로 병으로 인하여 특별히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피고 본인은 이 기피 신청이 필요치 않다고 인정하고 이에 반대하였다. 그 이유로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나는 재판소가 본건에 대한 태도에 의지하여 지금 판사에만 그렇다고 하지 않고 원래 전부가 편협하므로 이 신청에 대하여도 반드시


◇ 편협되지 않은 결정을 바랄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에 재판장은 나(김지섭)더러 그 결정은 다른 판사가 한다고 가르쳐준다. 아마 내가 그 판결까지 지금 재판장이 하는 줄로 믿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가르쳐 주니 고맙다고나 하여둘까? 어찌했든 다른 판사라는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그도 역시 일본인이고 본즉 한 길을 밟을 것은 분명하다. 다시 1보를 양하여 이 신청이 이유 있다고 결정된다고 가정하더라도 이번 판사는 없어지겠지마는 그 대신 판사는 확실히 정직하고 공정한 머리로써 본건을 처리하리라고는 믿을 수 있을런지? 어쨌든 편협한 재판을 한다는 것은 정한 이치인즉 결국 마찬가지라고 단언할 수있다는 까닭이었다.




◇ 원체 본건에 대하여 피고인 나에게 말을 하라면 이와 같다.


1. 제1행위 폭발물 취체 벌칙 제3조에 해당치 않는다고 믿는 나는 처음에 의론을 같이 하였을 뿐으로 사실 그 폭탄을 가지거나 수입치 않았던 까닭이다.


2. 제2의 행위 즉 강도죄로 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 그러냐하면 처음부터 그런 의사라든지 목적이 없었다는 것은 물론이오 그 당일 그 장소에서 한 언어와 행동 내지 교섭 전말은 물론 전부가 결단코 그렇치 않았던 까닭이다. 누가 무엇이라고 하든지 나의 양심과 사실이 증명하는 바이다.


3. 제3의 행위 즉 동 벌칙 제1조를 적용할 것이 못되니 이는 변호인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폭발 그것의 성능작용(性能作用)은 별 문제로 하고 동조(同條)에 설명한 바와 같은 목적도 아니었고 또 동조에 의미한 바 사용정도에 도달하지를 않았다. 다시 말하면 목적과 수단이 그 요소(要素)를 가지지 못하였다.


4. 제4의 행위 즉 선박침입을 가지고 논한다는 것은 더욱 기괴천만의 일이다. 본래 나는


◇ 당당하게 허가를 얻은 후 탔음으로 있던 곳이 어둡다든지 좁다든지 하는 것은 객선이 아니었으므로 당연한 것이어늘 이런데 있었다고 침입한 죄를 구성한다는 데는 하등 근거가 없다고 믿는다. (계속)






  김지섭 옥중기(3)


 ◇ 이상의 여러 가지 죄라는 조목이 일본 국법에 비쳐보더라도 똑똑 따져 어는 법률 어는 조에 들어가 맞는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뭉치여 동서고금의 실례(實例)의 의하여 한 반역사건으로 다스릴 수는 있을 것인가 한다. 이에 따라 이 처분방법으로도 역시 동서고금의 실례에 따라 두 가지 길이 있을 뿐이니 이를 설명하면 하나는 무조건 석방의 관대한 처분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이렇다 저렇다 귀찮은 재판수속을 밟지 않고 극히 간단히 교수대에 올려놓을 뿐인 것이다. 그런데 일본과 나 사이에는 일이 이렇게 되지 않고 제1심에서 검사가 나의 의견과 합치된 듯하여 피고 김지섭은


◇ 사형에 처하는 것이 상당하다고 청구하였음에 불구하고 밉살스러운 재판장은 그 구형대로 하면 피고 본인의 희망하는 바도 되어 오히려 쉬운 일일 터이므로 고통하다가 자멸(自滅)하여 버리게 징역을 시켜버리지 않으면 애수(*놓치기 아깝고 서운함)하다고 생각하여 이런 재판을 하지 않았는가? 이에 대하여 내가 한 공소는 결코 형벌이 가혹하다고 하여 좀 경하게 하여 달라는 의미가 아니라 검사의 부대 공소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과 혹은 무죄에 뜻을 두었음이다. 그런데 예기한 바와 같이 공소심에서 하는 모양이 1심을 복사한 것 같은 방식이다. 이로써 보면 증거신청을 각하하는 것도 괴로이 생각할 바가 못 되고 따라서 이 신청이 물론 통과되지 못할 것은 불을 보는 것보다도 분명한 것이다.


◇ 여기가 변호사가 신청한 기피신청과 나의 뜻과는 다른 것이다. 이러한 의견으로 내가 기피신청에 반대하는 뜻을 진술하자 포시(布施)변호사는 즉시 일어나 엄숙한 태도로 “지금 김군의 기피신청 반대는 결단코 지금 재판장을 신용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 변호사의 기피신청보다 몇 곱 이상으로 판사를 신용치 않는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므로 이 기피신청에 하등 영향이 미치지 않는 것이라”고 진술하고 또 산기(山崎)씨는 좀 재판장을 경홀히 보는 듯한 어조로 피고의 반대의견이 결코 변호인의 신청을 반대한다는 것이 아니라고 말을 보태니


◇ 재판장도 어쩔 줄 몰라 좀 주저하는 듯한 태도라 “어떤가”고 나를 향하여 물어보았다. 나는 물론 지금 판사를 신용한다는 의미로 한 것이 아닐뿐더러 아까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일본나라 재판관 전체를 신용치 못하겠다는 의미로써 한 것으로 이 신청도 결국은 쓸데없는 헛수고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더니 재판장은 그 뒤에 와 앉아있던 육법선생(六法先生)에게 의견을 묻고는 “그러면 이 신청을 받는다” 선언하고 폐정하여 버렸다. 나는 아까부터 좀 흥분되어 있었으므로 법정을 나올 때에 “재판에 맡길 수밖에 별 수 없군”이라고 하는 수도(秀島)군의 단념한 듯한 말에 “재판 그 까짓것이야 어찌 되었든 나는 내일부터 징역살이를 하겠다”고 나오는 대로 말을 하여 버리고


◇ 포시 변호사에게 될 수 있으면 근간에 또 한번 와달라고 부탁을 하고 완섭(完燮)군에게도 오늘 밤차로 떠나면 가서라도 편지장이라고 보내달라고 하였다. 유치장에 돌아왔을 때에 어느 집 시계인지 여섯시를 땡땡 쳤다. 한참동안 앉아 있다가 올 때와 같은 자동차를 타고 감옥으로 돌아왔다. 머리가 좀 아팠으므로 차중에서는 눈을 꼭 감고 있다가 다 왔다는 신호 소리에 눈이 띄여 다시 어스름한 병감으로 내 집에나 돌아온 듯이 안심하고 돌아왔다. 간호인이 상시와 같이 가져다가 준 빵을 그대로 두어두고 즉시 자리에 들었다. 낮의 일이 자연히 다시 생각되어 아직 가슴에 도는 불안의 물결이 자지를 않았다. 이 불안이라는 것은


◇ 변호사 제씨와 다른 피고에게 대하여 실례된 짓을 하지나 않았는가 하는 불안이다. 설사 좀 실례된 짓을 하였더라도 여러분은 용서하고 양해하여 주리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은연중 잠이 들고 말았다. (끝)




  도쿄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서 무기징역을 살던 김지섭 의사는 조선의 형무소로 이감(移監)시켜 줄 것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1926년 치바(千葉)형무소로 이감되었습니다. 그는 1927년 20년형으로 감형되었으나 이듬해 2월 옥중에서 뇌일혈로 순국(殉國)하였습니다. 그때 나이 43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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