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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 63 : 이 사람이 ‘김익상’ 특종보도

Posted by 신이 On 12월 - 10 - 2010

 1921년 9월 12일 오전 10시 20분 조선총독부에 폭탄이 던져졌습니다.




 총독부에 폭발탄!


 작일(昨日) 상오 10시 20분에


 총독부 비서과와 회계과 두곳에


 폭발탄 두개를 던지어 크게 소동


 회계과의 1개는 폭발




  작 12일 상오 10시 20분에 조선총독부에 폭발탄 두개를 던지었는데 비서과 분실(分室) 인사계실(人事係室)에 던진 한개는 영목속(鈴木屬)의 뺨을 스치고 책상 위에 떨어져서 폭발되지 아니하였으며 다시 회계과장실(會計課長室)에 던진 폭탄 한개는 유리창에 맞아서 즉시 폭발되어 유리창은 산산이 부서지고 마루에 떨어져서 주먹 하나가 들어갈 만한 구멍을 뚫었는데 범인은 즉시 종적을 감추었으므로 방금 엄탐중이요 폭발하는 소리가 돌연히 일어나자 총독부 안은 물 끓듯 하여 일장의 수라장을 이루었다더라. 







동아일보 1921년 9월 13일자 3면






  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사람은 그 다음해 3월말이 되어서야 밝혀졌습니다.


  1922년 3월 28일 오후 3시 반 상해(上海) 부두에서 다나카(田中) 대장을 폭탄으로 암살하려다가 현장에서 체포된 김익상(金益相) 의사였습니다.







동아일보 1922년 4월 1일자 7면






  작추(昨秋) 경성 모사건(京城 某事件)의


  범인도 자기라 하는 김익상


  전중 대장 암살범 3명 인도


  장차 장기(長崎)재판소로 호송




  상해(上海)에서 전중대장(田中大將)을 암살하려다가 체포된 조선사람 3명은 계속하여 취조 중이라는데 한 사람은 김익상(金益湘)(28)이라는 청년이요, 또 한 사람은 오름(吳凜)이라는 거짓 이름을 가진 이정룡(李正龍)(23)과「구일도」(18)라는 외국 이름을 가진 3명은 지난 28일 밤부터 엄중히 취조한 결과 다수의 폭발약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한 동시 그들은 조선독립당이라는 것을 자백하였으며, 그 중에 김익상은 목적하였던 전중 대장을 암살치 못한 것을 매우 통분히 여기는 모양이며 그는 10여 일 전에 길림성(吉林省)으로부터 상해로 왔고 현장에서 사용하던 폭발탄은 상해에서 제조한 행적이 있고 그들이 상해임시정부와 관계있는 모양인데 그뿐 아니라 김익상은 작년 9월에 경성에서 발생한 모 중대 사건의 범인도 자기라고 자백하였으며 그는 또 북경(北京)에 있는 정의철혈단(正義鐵血團)의 단원이라는 등 모든 것을 쾌활하게 일일이 자백하였으며 범인들은 29일 오후에 항무국(港務局) 경찰서(警察署)로부터 일본영사관 경찰로 인도되었다는데 경찰 당국에서는 그 범인들을 정치범으로 인정치 아니하고 다만 살인 미수로 하여 취체할 터인바 범인들은 사실을 일일이 자백하였으므로 예심도 한 달 후면 다 마칠 듯하고 범인들은 다시 장기지방재판소(長崎地方裁判所)로 압송이 될 모양이라더라. (상해)


(김익상의 자백은 자기가 작년 9월에 경성에서 발생한 모 중대 사건의 범인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믿을 수 없는 일이라 하겠더라)







동아일보 1922년 4월 5일자 3면






  김익상(金 益湘) 자백은 사실


  작추(昨秋) 경성 모 중대사건(京城 某 重大事件)의


  범인은 상해에서 잡힌 김익상


  그는 중국 북경에 있는 철혈단원




  3월 28일 하오 3시 반에 상해 부두에서 전중(田中) 대장을 폭발탄으로 암살하려다가 목적을 달치 못하고 현장에서 체포된 김익상과 오성륜(吳成崙) 2명을 취조한 결과 김익상은 작년 9월에 경성에서 발생한 모 중대사건의 범인도 자기라는 것을 자백하였다 함은 이미 보도한 바이어니와, 이제 김익상에 대하여 본사에서는 여러 가지로 탐지한 결과 그 진가의 단서를 발견하게 되어 이제 그 탐지한 바를 보도하면, 김익상은 당년 22,3세의 섬약한 체질을 가진 청년으로서 그는 북경(北京)에 있는 독립운동의 비밀결사 철혈단원으로 작년 9월경에 경성에 와서 시내 모처에 잠복하여 있다가 마침내 모 중대 사건을 일으킨 후 바로 몸을 빼어 기차로 국경을 넘어 북경으로 피신하였었는데 당국에서도 일찌기 김익상의 범행을 짐작하고 그를 체포코자 하였으나 이미 국경을 넘어간 사람을 어떻게 잡으리오. 공연한 헛수고만 하였을 뿐인데 이번에 전중 육군 대장이 필리핀(比律賓)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상해에 들린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10여일 전에 동지 오성륜으로 더불어 상해로 가서 거사를 한 것이라 하며 그는 본적지가 경기도 모군이라 하기도 하며, 일설에는 충청북도(忠淸北道) 옥천군(沃川郡)이라 하는데 평양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를 졸업하였으며 성질이 어려서부터 강인하고 대담하다더라.




  동아일보가 4월 6일자에서 김익상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 즉 그의 본가(本家)가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현 마포 공덕동)이며 그가 이제껏 살아온 이력이 어떠하다는 것을 상세히 보도해 김익상에 대한 조선인의 궁금증을 풀어준 것은 당시 사회부 유광렬 기자의 특종보도였습니다.







동아일보 1922년 4월 6일자 3면






   김익상(金益相)의 본가는


  시외(市外) 공덕리(孔德里)로 판명


  본사 기자의 고심 노력한 결과


  마침내 그의 집까지 발견하여




  3월 28일 오후 3시 반에 상해 부두에서 전중(田中) 대장에게 폭발탄을 던져 암살코자 하다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현장에서 체포된 김익상(金益相) 오성륜(吳成崙) 2명에 대하여 취조한 결과 그들은 북경에 있는 철혈단원으로, 김익상은 작년 9월에 경성에서 일어난 모 중대 사건의 범인인 것이 판명되었다 함은 작일 본지에 보도한 바이어니와 김익상의 본적은 어디이며 경력은 어떠하며 평소의 성행은 어떠한가 분분히 도착하는 상해 전문에 혹은 경기도 모군 사람이라기도 하고 혹은 충청북도(忠北) 옥천군(沃川郡)이라고도 하여 정확한 내력을 알 수 없던 바 본사가 극력 탐지한 바에 의하면 그는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용강면(龍江面) 공덕리(孔德里) 286번지 홍재수(洪在洙) 집에 있던 김익상이라 한다.






 연초(煙草) 직공 출신으로


 광성상회 봉천 지점으로 간 후


 3년 동안 소식조차 없었다고




  김익상은 당년 27세의 청년으로 어려서 사숙에서 한문을 공부하고 마포(麻浦)에 있던 삼호보성소학교(三湖普成小學校)에서 공부를 하다가 집안이 빈한하여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경성시내 모 철공장에 다니다가 3년 전에 교북동(橋北洞) 송광순(宋光順)이가 경영하는 연초회사 광성상회(廣盛商會)에 고용되어 일을 보다가, 재작년에 광성상회에서 중국 봉천(奉天)에 지점을 경영하게 되매 그곳 기관수(機關手)로 간 후 표연히 종적을 감추었는데 금번에 그 일을 행한 것이며 가정에는 부모도 없고 다만 처 송씨와 3살 먹은 딸이 있을 뿐이라 하며 키는 적고 얼굴은 검으며 성질이 매우 강렬하다는데 그가 거주하였다던 전기 홍재수의 집을 찾으니 60세 가량이나 된 홍재수는 말하되 “그 사람이 삼작년이 지난 7월부터 우리 곁방을 빌어서 살았는데 그후 봉천으로 간 후에 종적을 몰랐더니 의외에 4,5일전부터 용산경찰서 경관이 출장하여 여러가지 일을 조사하고 사흘 동안 파수까지 보다가 그만두었는데 김익상이가 체포되었다는 말은 신문에서 처음 보았읍니다. 그 사람의 가세는 매우 빈한하나 성질은 영악하다”고 말하더라.




  “3월에 철혈단원 김익상은 일본 군벌의 거두인 다나카(田中義)를 저격하였으나 다나카는 맞지 아니하고 미국 부인 스나이더 여사가 맞아 죽었다. 이때에 일본 경찰은 작년 9월에 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어느 날 일본 경찰이 수배한 문서를 흘끗 노려보고 그것이 서울 마포 공덕리 김익상임을 알았다. 곧 공덕리로 가서 김익상의 소년시대부터 해외에 나가기까지의 이력과 그의 성격을 자세히 기록하여 거의 사회면 전면을 뒤덮었다. 이날에 서울서 발행한 신문으로 우리말이나 일본어 신문에는 한 줄도 내지 못하여 스쿱이 되고 말았다. 그때에 20여 세이던 나로는 이러한 스쿱으로 신문의 한 면 전부를 뒤덮어서 수만 독자를 경도(驚倒)하게 한 일을 한 개의 자랑으로 여기던 것이 회상된다.” (유광렬, ‘기자반세기’, 서문당, 1969, 168쪽)






  김익상 의사는 1922년 5월 나가사키(長崎)로 이송되었습니다.







동아일보 1922년 5월 7일자 3면






  장기(長崎)에 착(着)한 김익상(金益相)


  형벌은 조금도 사양치 않는다


  태연자약히 조선독립을 주장




  지나간 3월 28일 상해에서 일본 전중(田中) 대장에게 폭발탄을 던지고 육혈포를 놓은 오성륜(吳成崙)(25) 김익상(金益相)(28) 등 2명 중 오상륜이는 2일 새벽 2시에 일본인 죄수 전중충일(田中忠一)과 공모 도주하고 김익상만 장기재판소로 호송 중이라 함은 작일에 이미 보도한 바이어니와, 오성륜과 같이 중대한 범인을 놓친 상해 일본 영사관에서는 크게 낭패하여 다액의 현상금을 걸고 각처로 엄밀히 수색중이나 아직 잡지 못하였으며 김익상은 일본 영사관 순사 삼포(杉浦)·대구보(大久保) 두 순사에게 경호되어 5일 오후 3시에 기선 산성환(山城丸)으로 문사(門司) 항구에 들어왔다가 즉시 장기(長崎)로 호송되었는데 김익상은 3일 동안 배를 타고 왔으나 조금도 피곤한 빛이 없이 원기가 매우 왕성하여 배 안에서 식사도 잘 하고 몸에는 검푸른 양복에 레인코우트를 입고 머리를 하이칼라로 갈라 붙였으나 손과 발에는 수갑과 족쇄를 채웠더라. 김익상은 태연자약하게 말하기를 “나는 2년 전에 경성에서 철공장 직공 노릇을 하였는데, 중간에 감동되는 바가 있어 철혈단(鐵血團)에 가입하여 각지로 돌아다니다가 금년 정월에 상해로 와서 일본의 동지에게 전중 대장이 상해로 온다는 말을 듣고 암살을 계획한 것이며 우리 동지는 3백 50명 가량인데 일본의 대관과 군인의 윗두목 가는 자를 암살 목적이라. 우리는 한국 국민의 행복을 위하여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바이니 이 일로 형벌을 당하게 되면 처음부터 달게 받을 셈을 잡고 한 일이라”고 뽐내며 말하는데 그의 죄명은 살인미수 강도 절도 건축물파괴 등의 여러가지이라더라. (문사 전보)






 
동아일보 1922년 5월 9일자 3면






  기염(氣焰) 만장(萬戈)의 김익상


  침식이 여상한데 순사도 놀라


  독립까지는 운동을 계속한다




  김익상은 호송되는 도중에 태연자약하게 양식과 우유를 먹고 밤에는 근심없이 잠을 자는 고로 호송하던 두 순사도 혀를 내어 둘렀으며 김익상은 차중에서 신문기자에게 말하기를 “내가 한번 그러한 일을 한 이상에는 어떠한 형벌이든지 사양치 아니할 터이며 나의 수령과 동지자는 말할 수 없으나 이후로 제2 김익상, 제3 김익상이가 뒤를 이어 나타나서 일본 대관 암살을 계획하되 어디까지든지 조선독립을 이루기까지는 그치지 아니할 터이라. 아무리 문화 정치(文化政治)를 한대야 그것을 찬성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며 나의 이번 일에 대하여는 조금도 뉘우침이 없다”고 호기 있게 말하였는데 그가 가입한 철혈단은 북경에 근거지를 두고 상해 하얼빈 블라디보스톡 등지에 널려 있는 단원이 약 3백 50명이요, 상해에는 고려 공산당(共産黨)이 있어서 서로 호응하여 암살을 계획하며 일변 폭탄을 제조하고 일변 육혈포를 사들이는 등 살기가 등등하다더라. (문사)




  동아일보 1922년 5월 20일자는 그 전해 9월에 벌어졌던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사건을 다시 조명하였습니다.







동아일보 1922년 5월 20일자 3면






  총독부(總督府) 폭탄범은


  상해의 폭탄범 김익상


  경성에서 폭탄을 던진 후


  상해에서 체포되기까지




  작년 9월 12일 오전 10시 20분경에 왜성대 총독부(倭城臺 總督府)에 폭발탄을 던져 회계과(會計課) 일부를 파괴하고 현장에서 범인은 교묘히 행적을 감추어 총독부를 비롯하여 각 관청에서는 사방으로 비상선을 늘이고 범인을 체포하기에 노력하였으나 드디어 체포치 못하였다 함은 당시에 자세히 보도한 바이어니와, 그 후 범인의 종적은 점점 묘연하여 경무국(警務局)은 물론이요 각 경찰부에서는 부하들을 동독(*감시하며 독촉하고 격려함)하여 일곱달 동안에 황임성(黃任性) 외에 다수한 혐의자를 각처에서 체포하여 온갖 수단을 다하여 취조하는 중에 혹은 자기가 진정한 범인이라 하여 자백한 사람도 많았으나 결국 진범인은 체포치 못하였던 바 금년 3월 28일 오후 3시에 상해 부두에서 전중 대장(田中 大將)이 상륙하는 것을 기다려 2명의 조선 사람이 별안간 전중 대장을 향하여 폭탄을 던지며 육혈포를 난사하였으나 전중 대장은 무사하고 범인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동 29일에 일본영사관 경찰서에 넘기어 취조한 결과 한 사람은 당시 본보에 중대 범인의 혐의자라고 자세히 보도되었던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 286번지 김익상(28)이요, 그외 사람은 함경북도(咸鏡北道) 은성군(隱城郡) 영와면(永瓦面)에서 출생한 사람으로서 간도(間島) 화룡현(和龍縣) 월신사(月新社)에 사는 오성륜(吳成崙)(25)으로 김익상은 전기와 같이 총독부에 폭발탄을 던진 사실을 자백하였고, 경성에서도 경기도 경찰부의 활동으로 김익상의 본집에 있는 그 아내와 아우를 잡아 취조한 결과 그가 진범임을 확실히 알고 경기도 경찰부에서는 금뢰경부(今瀨警部)를 즉시 상해에 파견하여 취조에 참가케 하여 예심을 마치고 김익상은 장기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공판을 하게 되었는데 본사에서는 사실이 발생한 후 일찍이 자세한 조사가 있어 될 수 있는 대로 자세히 보도는 하였으나 경찰당국에서 게재를 금지한 까닭에 유감이 있던 터이더니 작일 경무국에서는 간신히 게재 금지를 풀었더라.




  양차(兩次) 국경(國境)을 돌파하여


  교묘하고 민첩한 그의 활동




  원래 김익상은 시국에 불평을 품고 기회만 있으면 과격한 행동을 하려던 중 작년 6월경에 자기가 고용하고 있던 광성연초상회(廣成煙草商會)에서 봉천(奉天)으로 전근하게 된 것을 기회로 하여 상해(上海) 천진(天津) 등지로 돌아다니다가 북경으로 향하여 그곳에 있는 의열단(義烈團) 단장 김원봉(金元鳳)의 부하가 되어 상해임시정부와 연락하여 독립운동을 목적하다가 작년 9월 9일에 북경을 출발하여 폭탄 2개를 가지고 일본말을 잘하므로 일본 사람 같이 차리고 경성에 돌아와 동월 11일 밤에 자기의 아우 되는 고양군(高陽郡) 한지면(漢芝面) 이태원(梨泰院) 김준상(金俊相)의 집에서 자기의 처 송성녀(宋姓女)를 불러 자기는 조선독립을 위하여 명일 총독부에 폭발탄을 던질 터이라 하고 그 이튿날 12일 아침 일찍이 집을 떠나 총독부 통용문으로 들어가서 폭탄을 던진 것인데 첫 번에 던진 것이 폭발치 아니하고 둘째 번에 던진 폭발탄이 회계과에서 폭발함에 소리를 듣고 놀래어 순사 및 관리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고 김익상은 태연히 “아부나이, 아부나이”하며 뒷문으로 행적을 감추어 즉시 전기 자기의 아우 집으로 돌아와서 그 이튿날 평양(平壤)으로 몸을 피하고 그곳에서 다시 일본 의복으로 변장하고 국경을 벗어났다가 전중 대장에게 또 폭탄을 던진 것이라 하며 김익상은 조선으로 다시 호송될는지 아니 될는지는 장기에서 공판을 마친 다음이라야 확정된다더라.




  1922년 5월 19일 김익상 의사의 나가사키 지방재판소 예심이 종결되어 공판에 부치기로 확정되었습니다.


  동아일보는 5월 22일자에 예심결정서를 상세히 보도했습니다.







동아일보 1922년 5월 22일자 3면






  예심 결정서의 이유


  김익상의 범한 사실 3가지




  작년 9월 12일에 조선총독부에 폭발탄을 던지고 금년 3월 28일에 상해 부두에서 전중 대장(田中大將)에게 폭탄을 던진 김익상(28)은 상해에서 예심이 결정되어 지나간 19일 오전에 장기지방재판소에서 ‘절도(절盜) 폭발물취체규칙위반(爆發物取締規則違反) 건조물회기(建造物毁棄) 살인미수상해제령위반(殺人未遂傷害制令違反)이라는 긴 죄목으로 공판에 부치기로 발표되었음은 작일에 이미 보도한 바이어니와 그 예심 결정의 이유는 3가지로 나누어, 첫째 김익상은 대정 10년 봉천(奉天) 광성연초공사(廣盛煙草公司)의 기계 감독으로 근무하던 중 원적과 주소가 불명한 송모(宋某)와 공모하여 잎담배 6괴를 그 연초공사 창고 안에서 절취하여 남만창고(南滿倉庫)로 가져다 두고 광성연초공사 명의로 창하증권(倉荷證券)을 받아서 그 증권을 이용하여 그곳에서 운송 영업하는 모(某)에게 돈 3백원을 취한 후 전기 송모와 함께 천진으로 도주하였고, 둘째는 김익상이 조선독립을 이루기 위하여 작년 9월 12일 오전 10시 20분경에 경성 조선총독부 통용문으로부터 안으로 침입하여 2층으로 올라가서 감추어 가지고 간 폭탄을 먼저 비서과(秘書課)에 던졌으나 폭발치 아니하매 다시 다른 폭탄을 회계과(會計課)에 던지매 맹렬히 폭발되어 마루 위에 깊이가 5치나 되는 구멍을 뚫고 깨어진 조각은 마루 위와 그 근처 벽과 아래층으로 튀어 떨어져 마루 위에는 폭탄 조각으로 응접용(應接用) 탁자가 3곳이 상하고 유리창이 3개가 깨어지고 사면 벽과 문에 20여 개소나 스치고 지나간 자리가 있고 그 외에 사무에 쓰는 책상 2개와 의자 2개의 한 다리가 각각 파손되어 이같이 건조물을 깨트리고 도주한 사실이 있고, 셋째 김익상은 일찍 조선 독립을 뜻하고 그 목적을 이루는 유력한 수단은 일본의 대신과 대관을 죽이는데 있다고 항상 그 기회를 엿보던 중 마침 전중 대장이 대정 11년 3월 하순에 필리핀(比律賓)에서 돌아오는 길에 상해에서 내리는 줄 알고 그를 암살할 뜻을 결심하고 동지 오성륜(吳成崙) 양달호(梁達浩) 등과 함께 김약산(金若山) 파에게서 받은 폭탄 1개와 육혈포 1자루를 휴대하고 금년 3월 28일 오후 3시 30분에 상해 세관(稅關) 부두에서 전중 대장에게 폭발탄 1개를 던졌으나 폭발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목적을 달치 못하고 현장에서 북편으로 향하여 도주하는 중 피고를 쫓아오는 중국인 마차어자에 육혈포를 한번 놓아 그 사람의 넓적다리를 맞혀 대략 10일간 치료를 받을 상처를 내고 다시 구강로(九江路)로부터 사천로(四川路)로 도망하던 중 마침 피고를 체포코자 오는 영국인 톰슨의 가슴에 또 육혈포 1방을 쏴 맹관통창(盲貫統創)의 상처를 내어 대략 10일간의 치료를 받을 부상을 시킨 것이라 하였더라.




  동아일보는 김익상 의사의 본가와 그의 이력을 특종 보도한 유광렬 기자를 나가사키(長崎)에 특파해 공판을 지켜보게 했습니다.




  “김익상은 상해에서 일본영사 경찰에 잡히어 일본 나가사키로 가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사에서는 나를 나가사키에 특파하여 공판 방청기를 쓰게 하였다. 공판은 몇 번 연기가 되었으므로 나는 거의 2주일이나 그곳에서 묵고 있었다. 쌀 한가마에 6, 7원으로 물가가 싸던 그 때에 나는 7백원의 여비를 받아가지고 갔으니 사로서는 입사 이래 계속하여 많은 스쿱을 뽑는데 대한 상여도 겸하여 상당히 후대하는 여비였다. 나는 김익상의 자필사인을 얻기 위하여 일본말이나마 성경(聖經)을 들여보내고 그 자필 영수증을 받아서 자필사인이라고 본사에 보내는 위트를 보이던 것도 회상된다. 공판기는 장문의 신문 전보로 역시 그날의 사회면의 전면을 뒤덮던 생각이 난다.”  (유광렬, ‘기자반세기’, 서문당, 1969, 168쪽)




  유광렬 특파원이 처음 보내온 김익상 의사의 옥중 생활 모습은 6월 5일자 3면에 크게 실렸습니다.







동아일보 1922년 6월 5일자 3면






  청의(靑衣) 생활의 김익상


  푸른 옷을 입고 그물 뜨기로


  옥중의 답답한 세월을 보내


  장기(長崎)에서 본사 특파원 유광렬




  몸이 연초회사의 직공으로 마음 가운데 시국에 대한 불평을 품고 중국 각지로 방랑하다가 작년 9월 12일 백주에 조선총독부에 폭발탄을 던져 세상을 놀래이고 교묘한 수단으로 국경을 벗어나서 다시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금년 3월 28일 상해부두에서 일본 전 육군 대신 전중(田中) 대장에게 폭탄을 던진 김익상(金益相)은, 지나간 5월 6일에 상해로부터 장기(長崎)에 압송되어 현재 장기시 서북편 잡답한 시가를 눈앞에 둔 편연(片淵) 분감에 재감 중인데 피고의 근일 형편에 대하여 추본 분감장(秋本 分監長)은 말하되 “그는 이곳에 온 후로 매우 안심하고 있습니다. 식사는 처음 왔을 때에는 아침과 저녁만 감식을 먹고 점심은 자기 돈으로 사서 먹더니 지금은 돈이 떨어졌는지 하루 삼시 감옥밥을 받아먹게 되었으며 옷도 별로 차입하는 사람이 없고 이곳에 올 때에는 양복을 입었었으나 지금은 미결수의 푸른 옷을 입었으며 이곳에 온 지 한달이 가까와도 차입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읍니다. 심심하다고 낮에는 그물을 뜨고 있는데 매우 잘 뜨기로 그 전에 하여 본 일이 있느냐고 물으니까 그 전에 하여 본 일이 없다고 하는데 매우 교묘하게 하던걸이요. 무식한 사람으로 일본말도 잘하고 감옥 규칙도 잘 지키며 항상 얼굴에 웃음을 띠우고 쾌락한 모양으로 있으며 혼자 독방에 있으니까 이야기할 사람도 별로 없지마는 이때까지 무슨 말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한다. 기자는 다시 김익상의 처 송씨(宋水)와 동생 김모(金某)가 역시 연루자로 경성에서 체포되었는데 김익상이가 가족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느냐고 물은 즉 “글쎄요 그와 같이 잡힌 것을 이 감옥에 온 후에는 니가 알지도 못하였고 일러주지도 아니하였으니까 아마 모르겠지요. 하여간 이 감옥에 온 후로 편지라고는 최모(崔某)에게 한번 하는 것밖에 보지 못하였소.” 이로써 분감장과의 문답은 마치었다. 이 감옥에 온 후로 차입하는 사람이 없어서 아직 유죄로 결정도 되기 전에 의식을 모두 감옥 신세를 지지 아니하면 아니 되고 복역이 결정도 되기 전에 징역이나 다르지 않은 그물뜨기로 무료함을 잊는다는 몇 마디 말은 김익상의 신세가 얼마나 비참하고 그의 현재 심중이 얼마나 답답하다는 것을 큰 소리로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기자는 일본말로 번역된 신약전서 1권을 김익상이 감옥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차입하고 감옥 문을 나섰다. 감옥 바로 앞 편으로 보이는 풍두산(風頭山)과 아미산(峨嵋山)에는 녹음이 무르녹아 푸른 물이 흐르는 듯하다. 넘어가는 저녁 해가 가도 없는 바다 저편으로 숨고 3백년 옛 포구에 전등 빛만 찬란할 때에 멀리 고국 하늘을 생각하고 젊은 자객의 가슴에도 응당 무량한 감개가 떠돌겠지…….




  김익상 의사의 첫 공판은 1922년 6월 30일에 열렸습니다. 동아일보는 7월 1일자에 1보를 실고 7월 2일자에는 유광렬 특파원 기사로 사회면인 3면을 거의 통틀어 상세 보도했습니다.







동아일보 1922년 7월 2일자 3면






  7월 3일자에는 공판에 나선 김익상 의사의 사진까지 실었습니다.







동아일보 1922년 7월 3일자 3면






  1922년 9월 18일에 열린 두 번째 공판에서 김익상 의사는 사형(死刑)을 구형받았습니다.







동아일보 1922년 9월 20일자 3면






  1922년 11월 6일 나가사키 공소원(控訴院)에서 개정된 공소공판에서 김익상 의사는 사형을 언도받았고 김익상 의사는 상고를 하지 않아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동아일보 1922년 11월 7일자 3면                                           동아일보 1922년 11월 12일자 3면






  이에 대해 상해 임시정부는 일본 외무대신에게 항의서를 제출했습니다.







동아일보 1922년 11월 24일자 3면






  상해 가정부(假政府)의 항의


  김익상의 사형에 대하여


  외무대신에 항의를 제출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고 다시 상해에서 전중대장(田中大將)을 저격한 김익상에 대하여 장기공소원(長崎控訴院)에서 사형을 언도하였다 함은 이미 보도한 바이어니와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의 외교총장(外交總) 조용은(趙鏞殷)씨는 일본 외무대신 내천강재(內川康哉)씨에게 “김익상의 폭탄사건에 대하여 귀국 장기공소원에서 사형에 처하였으나 본 외교총장은 이에 대하여 한 말을 아니할 수 없다. 김익상으로 말하면 그의 탄환이 빗나가서 외국인의 생명을 상한 일은 있으나 이는 한국의 법률에 의하여 처리할 것이오 일본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서두를 내어가지고 다음에 일본과 한국은 역사적으로 화합할 수 없다는 말을 기록하고 형사정책(刑事政策)으로 보아도 사형은 좋지 못하다고 말하고 이번에 김익상을 사형에 처할지라도 이후에 또 무수한 김익상이가 생겨날 것이라는 의미의 항의서를 보내었다더라.







동아일보 1927년 2월 9일자 2면






  김익상 의사는 사형에서 무기징역, 다시 세차례에 걸친 감형으로 1936년 8월 2일 가고시마(鹿兒島)형무소에서 석방되어 고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후 감시하던 일제 고등경찰에 연행된 후 어디선가 살해되고 만 것인지 종적이 묘연해졌습니다.




  동아일보의 김익상 의사 의거 보도는 타 신문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습니다.  A신문은 나가사키(長崎) 공판에 대해서는 한 줄의 기사도 보도하지 않았고 다만 감형과 출옥소식만을 전했습니다. 총독부 기관지 B신문도 마찬가지로 나가사키 공판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않고 김익상 의사가 출옥해 귀국했다는 소식만을 전했습니다.




  김익상 의사의 공판이 열린 나가사키로 특파된 유광렬 기자는 “방청석에는 수명의 경관이 경계하며 장기현 순사교습소(巡査敎習所)의 교습생 60여 명이 방청도 있었으며 보통 방청석에는 조선인과 일본 청년이 입추의 여지도 없이 들어앉고 문밖에도 들어오지 못한 사람이 수십명이며 신문기자석에는 동경 대판의 각 큰 신문 통신원과 장기의 유수한 신문기자가 늘어앉아서 바삐 붓대를 놀리는데 조선에서 온 기자는 오직 한 사람뿐이다.” (동아일보 1922년 7월 2일자 3면)라고 썼습니다.




  국가보훈처에서 발간한 ‘독립운동사자료집11 : 의열투쟁사 자료집-김익상의 의거-’도 당시 동아일보 기사만을 원문 그대로 수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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