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를 특종 호외로 알린 동아일보가 보천보 전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청산리 대첩(1920년 10월 21~26일) 당시에는 그 소식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1920년 9월 25일자 사설 ‘제사 문제를 재론하노라’에서 일본 왕실의 상징인 경(鏡) 주옥(珠玉) 검(劒), 소위 ‘3종의 신기(神器)’를 우상이라고 모독하였다는 이유로 1차 무기정간(1920년 9월 25일~1921년 1월 10일, 속간호 발행은 2월 21일자)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김좌진 장군(1889.11.24~1930.1.24)과 관련된 기사는 속간 후인 1921년 3월 2일자 ‘소추풍령(小秋風嶺)에 재(在)한 대한총합부(大韓總合部) 내막, 총장은 서일이라하고 군무부장은 김좌진’ 보도 이후 계속해서 그의 존재를 조선에 알렸습니다.  


 


 


1921년 3월 2일자 3면


 




1923년 3월 29일자 3면






  김좌진을 대장(隊長)으로


  암살폭파계획진행


  임의폭탄까지 준비했다고






1923년 4월 21일자 3면






  군정(軍政), 적기(赤旗)의 대활동(大活動)


  김좌진의 귀순설은 젼혀 허설






1926년 9월 15일자 2면






  김좌진 부하 8명


  훈춘에서 활동


  각처에서 군자금을 모집




  지난 28일밤 훈춘 이도구 김화룡의 집에는 청룡안 방면에 근거를 둔 김좌진의 부하 8명이 들어가 현금 7백원을 받아가지고 갔다는데 그후에도 여러곳으로 다니며 군자금을 모집하였다더라.(간도) 






1926년 12월 28일자 2면






  齋藤총독 저격범


  참의부원 이병준 피착


  재작년 5월에 국경을 시찰하던 총독을


  저격한 참의부대 이소대당 리병준 피착


  재작년 국경에서 발생한 사건




  결사대 붕괴로 단독으로 결행


  一色軍 최양희 경찰에 잡혀


  김좌진의 부하로 활동




  재작년 5월에 재등총독이 처음으로 국경을 시찰하려고 비행정을 타고 압록강을 지나던 중 대안에서 어떠한 청년이 총을 발사하여 총독을 저격한 사실로 세상의 이목을 놀라게한 사건이 발생된 이후로 평북경찰부에서는 그당시 범인을 수색하였으나 범인의 종적이 묘연하던중 얼마 전에 상류만 가지고 엄중히 취조한 결과 의외에 총독저격사건이 드러났다는데 범인은 본적을 위원군 밀산면 송주동에 두고 중국 지방에 있으며 ○○단참의부 일중대 제2소대장 한권웅이라고 변성한 이병준이라더라.




  조선○○사령관 김좌진과 연락을 취하며 ○○운동을 하며 신민부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러시아의 후원아래 동양의 적화를 선전하던 최양희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잡혀 검사국으로 넘기었다더라.(신의주)






1927년 3월 10일자 2면






  哈爾賓 일본 경찰관


  新民府員 다수 검거


  합이빈에 있는 일본령사관 경찰대가


  중동연선에서 신민부의 근거지 습격


  수령 金佐鎭 등 수색중




  북만주중동철도 연선에 있는 조선인의 ○○계획에 대해 암암리에 조사를 하던 일본관헌은 특히 최근 3월 1일을 기하여 독립운동단체들이 활발히 움직일 것에 대비하여 중국관헌의 양해를 얻어 오길밀하, 해림, 일면파, 석두하자 등의 요처를 일일이 탐사한 결과 신민부 선전부장겸 신민보 주간 허모외 11명을 검거했는데 수령 김좌진 외 2, 3인의 간부는 그 때 마침 출타 중이어서 체포를 면했다더라. 






1927년 4월 17일자 2면






  駐滿 민족주의 단체


  통일운동을 획책


  만주에 있는 각단체가 통일운동 계획


  각단의 거두들이 모여서 협약 체결


  공산계 각단도 합동조직




  만주에 있는 대한통의부 신민부 등 각 민족주의 단체는 최근 통일운동을 계획하여 김좌진 김동삼등 거두 사이에 협약이 성립된 모양이라는데 조선안에 있는 공산계통 단체의 당원도 종래의 태도를 일변하여 단일운동단체를 조직하여 국제공산당의 원조를 받아 활동할 방침을 세운 모양이라는데 당국에서는 매우 중요시한다더라.






 1928년 1월 13일자 5면






  처처에 募捐하며


  혁신군 용정에 출현


  일본경찰에게 동지 8명이 피살된


  김좌진의 혁신군 4명이 용정에 출현


  日中경관 협력 수색중




  간도 용진에 권총을 휴대한 혁신군 모연대원 4명이 나타나 동리사람들을 모아놓고 군자금을 내라고 엄명하고 돌아갔는데 이들은 김좌진의 부하로 얼마전 혁신군 8명이 일본군과 충돌하여 6명이 피살된것을 보복하려고 보낸 것이라는데 이 소식을 들은 일중경관측에서는 비상선을 늘리고 그 자취를 엄탐중이라더라. 






1928년 2월 1일자 2면

 






  중국군대로 포위


  17호 대수색


  신민부 습격사건 상보


  공기 긴장한 哈市




  할빈에서 경찰의 습격을 받은 조선○○단 신민부는 본래 동빈현에 본부가 있었으나 작년 3월 습격을 받아 중동열도 석두하자로 옮겨 김좌진 유정근 등이 동지를 규합하여 맹렬한 활동을 하다 이번 음력정초에 한적하게 지내고 있던 중 일본경관 12명이 중국군대 32명의 응원을 받아 중앙집행위원장 김혁, 참모장 유정근등 10명이 체포된 것이다.






1928년 2월 4일자 2면

 






  합이빈으로 검거 호송된


  신민부 중요간부


  김좌진만 피신 무사






1928년 3월 22일자 2면






  新民府 본부 습격


  金爀 등 체포경로




  부원의 체포로 발각된 근거지


  해림에서 3백리 석두하 고려촌


  김좌진 출타후 슬허 대거 습격


  정초 6일효두 불의에 경관성




  북만주일대에 근거를 둔 신민부의 집행위원장 김혁과 동 경리부장 이정근 이외 열사람이 지난 음력 정월경 중국 중동선석두하에서 체포돼 길림일본영사관 경찰서의 취조를 받다가 지난 10일 신의주 경찰서로 호송됐는데 그 경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신민부는 정의부와 성격이 같은 ○○운동 단체로 그들의 근거지는 절대비밀에 부쳐 단원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고 또 오랫동안 일정한 곳에 머무르는 법이 없어 좀처럼 잡히지 않는데 조선안에 들어가 활동하던 6명이 잡힘으로 내부비밀이 경찰에 흘러들어갔다.






  같은날(1928. 3. 22) 신문 5면에서는 김좌진의 신민부가 일제의 탄압으로 인한 공백을 메우고 다시 활동을 개시해 밀산현에서 암중 비약하고 있다는 내용을 전했습니다.






1928년 3월 22일자 5면

 






  신민부 부서 정리


  三단과 合力활동


  군사위원장 김좌진 활동 개시


  밀산현에서 암중비약


  중동선석두하자참에 본부를 두었던 신민부는 지난번 합이빈 일본영사관 경찰서에 중요인물 김혁, 유정근등 십여인이 체포된후 자연히 각처로 헤어졌던바 최근 군사위원장 김좌진과 및 부하가 다시 활동을 시작하야 경리부장 유정근 대신에 새로히 최호(50)가 취임하고 길림참의부와 동빈혁혁신군과 협력하여 어떠한 운동을 일으키려고 혁신군간부 신희경 등은 목하 중동선 밀산현에 모이어 암중비약하는 중이라더라(합의빈)




  또한 동아일보는 일제의 괴뢰정부 수반이었던 장작림이 죽자 남경의 장개석 정부가 북경과 천진을 점령하고 정여림과 이혜경을 북만주에 파견, 이곳 상황에 밝은 조선 무장단체인 신민부의 우두머리 김좌진을 책임자로 임명한 내용을 비중있게 다뤘습니다.






1928년 6월 18일자 2면






  滿洲攪亂目的으로


  朝鮮人義勇隊組織?


  高級軍人을 特派 馬賊도 利用


  總指揮官은 新民府의 金佐鎭


  승승장구하는 중국의 남경정부는 최근 만주를 교란할 목적으로 마적 약2만과 조선인 각단체의 무장청년들을 다수 규합하여 국민동북의용대를 조직하고 암암리에 연락을 하여오던 신민부의 수령 김좌진을 신임하여 그를 의용대의 총지휘관으로 임명하였다한다.






1928년 7월 10일자 2면

 






  중동선 일대에 朴南波 활동


  중국혁명정부의 신임 받아


  혁명의용군을 지휘




  조선○○운동자 박남파는 중국혁명정부와 연락을 취해가지고 동삼성에 있는 조선○○단체를 조종하여 동삼성을 요란시키고자 많은 활동을 하여 혁명정부의 신임을 더욱 두터이 받아 김좌진이 거느리고 있는 ○○단의 일부인 중동선 혁명의용군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더라.






  이어 김좌진 장군의 동아혁명당 활동도 동아일보를 통해 알려졌습니다.






1928년 7월 17일자 2면






  2천 당원을 모집


  동아혁명당 활동


  남군과 연락해 동삼성 혁명계획


  총지휘자는 김좌진


  풍옥상 일파와 기맥을 통하여 남군의 보조를 받는 김좌진 일파 약 4백명으로 조직된 동아혁명당은 최근 간도 연길현을 중심으로 화룡현 왕청현 혼춘현 액목등지에서 약 2천여명의 당원을 모집하고 동3성 혁명을 계획 중 이라더라.






  1928년 8월 10일자 2면에는 만주의 장교들이 모여 김좌진을 위원장으로 하는 통일 ○○군을 조직하고 연락을 취하기 위해 잡지까지 발행키로 했다는 내용을 전했습니다.








 






  기관잡지도 발행


  통일○○군 조직


  신민부 군정회의를 중동선 모처에 열고


  북만 ○○단의 신활동


  북만주에 근거를 둔 신문부에서는 지난 6월 초순에 중앙군정위원회를 열고 각지에 흩어져있는 ○○군의 장교회를 열기로 되었던바 수일전 그들은 예정과 같이 중동선 ○○○참 부근 청림속에서 ○○자의장교 27명이 모여 군사통일기관으로 특히 ○○○○군을 조직하였다는데 군사위원장으로는 김좌진 정모 이모 황모 민모 등으로 기관연락으로 ‘올치’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원만 연락케 되었다더라.






  동아일보는 일제에 검거돼 예심을 받은 신민부 대원들의 모습도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1928년 10월 30일자 7면






  新民府執行委員長


  金爀 等 豫審終結


  합이빈에서 잡힌 신민부원 15명중


  1명은 감옥에서 죽고 5명 면소


  9名만 公判에 廻附




  海外風霜十年


  ○○爲해 活動


  중국 길림성에 본부를 두고 북만주일대를 세력범위에 넣어 조선○○운동을 계속해오는 신민부에 합이빈영사경찰이 검거의 그물을 던져 집행위원장 김혁등 15명을 검거하여 6개월만에 예심이 열렸는데 김혁은 홍범도 김좌진 이청천 등과 조선○○을 위해 홍범단 및 의용단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1928년 11월 3일자 2면






  新民府 首領 金佐鎭


  部下 3名과 潛入


  남조선 일대 경계 더욱 엄중


  各道警察部總活動




  경북경찰부


  수뇌자 밀의




  신민부 수령 김좌진은 자기 부하 3명을 데리고 ○○대를 조직하여 모종의 계획을 세운 후 조선 안으로 들어온 형적이 있다하여 전조선 각도 경찰부에서는 총 활동을 개시하였는데 특히 김좌진이 대구 방면으로 잠복한듯 하다하여 경북경찰부는 경찰부장과 대구서장 등이 구수 밀의한 한 일이 있다더라.






  동아일보가 일제 경찰의 움직임을 자주 신문에 쓴 것은 독립군에게 필요한 정보의 전달 수단이었다고 합니다.




 1928년 11월 8일자 2면





  경북경찰부


  돌연 대활동


  대구부내를 샅샅이 뒤져


  중대단서를 포착?


  ○○단원의 잠입이니 또 김좌진이 부하를 다리고 들어왔다는 등의 뒤를 이어 닥치는 정보에 경북경찰부 고등과에서와 대구서에서는 연일 비상한 경게와 수색을 아울러 서슬이 푸르게 계속하여오는 터인데 지난 6일에는 경찰부 고등과원의 총동원으로 대구서고등계원과 함께 부내 각방면에 뻐치어 자못 대활동을 하였다는데 활동하는 내용에 있어서는 물론 절대 비밀에 부치나듯는바 모종의 심상치 않은 단서를 얻은듯. 그러나 동일중의 활동은 별로 소득이 없는 모양이었다더라.【대구】






  1930년 1월 24일 김좌진 장군은 한 공산주의자에 의해 피살됐습니다. 이 소식은 뒤늦게 알려져 동아일보에선 2월 9일에야 피살설이 보도됐고 2월 13일 만주 한인들이 그의 부고를 공식적으로 낸 뒤에 확인 보도를 했습니다.






1930년 2월 9일자 2면


 




  신민부수령


  김좌진 피살설


  해림에서 청년에게


  사실眞假는 尙未判


  북만주에 근거를 둔 신민부의 두령 김좌진씨는 지난 1월 24일에 해림이라는 곳에서 김일성(金一星)이라는 청년에게 사살을 당하였다는 말이 있다는데 씨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일한합병에 불평을 품고 만주로 건너가서 다수한 청년동지를 규합하여 이래 광복운동에 노력하는 일방 군대를 조직하여 훈련을 시키는 등 여러가지 운동에 관계하던 사람으로서 근자에는 정책의 상위로 반대파가 있게되어 금번에 사살하였다는 청년은 전기 반대파의 청년이라고 전한다.






  동아일보는 김좌진 장군의 서거 확인 소식을 전하면서 전 지면에 걸쳐


  ‘칠십노모와 슬하엔 어린 자식뿐 가족의 의지할 곳도 업다-양자는 안성에 거주’


  ‘괴력과 대음대식 9척 신장의 거인 열 장정이 들지도 못하는 두껑을 혼자서 어렵지 안케 들고 노코해’


  ‘흉보듯고 악연실색 양자 김문한씨 평소성격은 매우 원만했다’ 등 관련 기사를 자세히 전했습니다.






1930년 2월 13일자 2면 






  兇報를 確傳하는


  白冶 金佐鎭計音


  北滿○○運動者의 巨頭


  四十二歲를 一期로 


  신민부 수령으로 남북만주에서 여러가지 활동을 하고있던 백야 김좌진씨가 1월 24일 오후 2시에 중동선산시역 부근 산중에서 김일성(金一星)이란 자에게 총살되었다는 풍설이 있다함은 기보한바어니와 금 12일에 이르러 시내 각처에 씨의 서거가 확실한 것을 증명하는 부고가 배달되었다. 부고의 내용에 씨가 서거한 원인에 대하여는 일언반구가 없음으로 일시 일본문신문이 선전한 것과 같이 과연 그 반대파의 손에 사살이 되었는지 혹은 그 이외에 무슨 복잡한 관계로 해를 입었는지는 아직 확실히 판명되지 아니하였으나 씨가 전후 20년 동안이나 남북만주로 돌아다니며 혹은 ○○군을 양성하기위하여 다수한 조선 청년을 모아 실제 훈련을 하고 혹은 이천여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북간도 방면에 넘나들며 혹은 신민부를 조직하여 십년을 하루같이 활동하여 오던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어니와 만부부당 지용과 발산의 힘을 가지고 때때 조선사람에게 ‘조선이 가진 만주의 장사’라는 느낌을 주던 씨도 42세의 파란 많은 역사를 이 세상에 남기고 눈쌓인 만주 벌판에 최후의 피를 흘리고 말았다. 




  光復團 組織


  新民府統率


  해외풍상은 십년이 넘엇다


  波瀾重疊한 그 一生


  그의 약력을 듣건대 씨는 원래 충남 홍성군 고도면 갈산리의 태생으로 어릴때 상경하여 전기 련건동 278번지의 2호 그의 백씨 김정진씨 집에 묵으면서 당시의 한국무관학교에 통학하여 17살때 그 학교를 졸업하고 그후 시내 오성학교의 학감으로 있다가 경술년 정변이 생기자 시국에 불평을 품고 박상진 등과 악수하여 광복단을 조직하여가지고 만주와 조선 사이로 래왕하면서 여러가지 활동을 하다가 필경 경찰에 잡히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철창 생활을 3년 동안 하고 나온후 시기를 엿보고 있다가 전 대동단 단장 전협 씨와 만나 결의형제를 하고 대동단을 만들어 얼마 간 활동을 하고 있다가 기미운동이 일어나던 전전해에 만주로 탈출하여 간도군정서에 중요한 지위를 가직 있다가 신민부를 조직하야 그 군사위원장 혹은 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2천의 부하를 통솔하고 활동하였고 최근에는 한족연합회에 가담 활동하였다고 한다.




  괴력과 대음대식


  9척 장신의 거인


  열장정이 들지도 못하는 뚜껑을


  혼자서 어렵지않게 들고 놓고해


  【長姪 김필한씨부인담】


  별항과 같이 김좌진씨의 흉보를 가지고 그의 백형 김경진씨의 양자 김필한씨를 그의 자택인 련건동으로 찾은즉 그는 없고 그의 안해 이씨가 대신 맞으며 왕방한 기자에게


  “…그이는(김좌진을 가르키는 말) 생기기도 몸이 뚱뚱하면서도 후리후리한 키가 구척장신인 거인인만큼 힘도 큰 장사이었습니다. 옛날 우리집에 ‘놋뚜껑’은 얼마나 무거웠던지 빈것이라도 칠팔명 장정이 들어야 땅김이라도 하는 것을 그이는 혼자서 힘들이지않고 물이 반독이나 들어있는 것을 능큼능큼 들곤 하였습니다. 그렇기때문에 먹는 것도 대음 대식이었습니다. 술도 그랬거니와 밥한두그릇은 맛이나 보고 고기근이란 량에 차지도 아니하였습니다” 운운   






  칠십노모와


  슬하엔 어린 자식뿐


  가족의 의지할 곳도 업다


  양자는 안성에 거주




  김좌진씨의 양자는 안성에 거주하고 있고 그의 가족은 지금 전부 길림성 모처에 있다 한다. 그의 70세 노모와 그의 아내, 그의 아우 김동진씨를 합하여 세식구가 있다 하며 김동진씨의 아들로 김좌진씨의 양자가 된 김문한씨는 목하 안성읍내 그의 외조모 오세선씨의 집에 있으며 김좌진씨의 백씨인 고 김경진씨의 가정은 지금 시내 연건동 278번지에 있는데 김경진씨도 수년 전에 별세하고 그의 장남 김필한씨의 가족이 산다고 하며 시외 모처에 씨의 서자 한사람이 있을 뿐이라는데 만주에 있는 그의 가족들은 의지할 곳도 없게 되었다 한다.






  흉보듯고 악연실색


  양자 김문한씨


  평소 성격은 매우 원만했다




  김좌진씨가 별세하였다는 흉보를 가지고 안성읍내 외조모 집에 묵고 있는 김좌진씨의 양자 김문한씨를 찾은즉, 김문한씨는 전혀 그런 소식을 못들었다는 기색으로 깜짝 놀라며 “내게는 아직 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편지가 오랫동안 오지않아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매우 궁금해하며 지내던 중입니다. 여하간 빨리 상경하여 좀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만은 어떤 자의 저격으로 그가 사망하였다고 하니 가친께서는 좀처럼 남에게 감정을 사시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반대파의 저격설은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김좌진 장군의 죽음에 대해 그의 장례식에서 낭독되었던 ‘고 김좌진 동지의 약력’은 “41세에 한족총연합회의 주석이 되었다가 음 12월 25일 하오 2시에 중동로 산시참 자택 앞에서 우해(遇害)하니 그 악한은 고려공산청년회의 일원이며 재중한인청년동맹원 박상실이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던 이강훈 전 광복회 회장은 <한국독립운동대사전> ‘김좌진’에서 “1930년 1월 24일 중동선 산시참 정미소에서 일제 무리와 합작한 흉한에게 저격을 받아 서거하였다. 하수인은 박상실이며 배후 지시자는 김봉환(金奉煥, 별칭 김일성)이다. 김봉환은 하얼빈 영사관 경찰의 사의에 보답하기 위해 대죄를 범한 것이다” 고 했습니다.(이강훈, 한국독립운동대사전, 1985, 도서출판 동아, 85~286쪽)




  그의 죽음에 대한 동아일보 1930년 2월 9일자 2면과 1930년 2월 13일자 2면 기사의 ‘김일성(金一星)’ 은 또다른 ‘김일성’, 김봉환(金奉煥)이었습니다.




  동아일보는 김좌진 장군의 죽음을 기려 2월 14~18일 4회에 걸쳐 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소개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4회는 민감한 내용이 담겼다는 이유로 기사의 절반이 삭제된 채 발행됐습니다.






1930년 2월 14일자 2면

  






  幼年부터 武藝絶人


  豪膽과 俠氣의 四十平生


  어릴때부터 아이모아 전쟁작난


  오십여호 노복도 자유해방 했다


  故 白冶 金佐鎭 種種揷話(1)


  불의의 暗彈에 최후의 피를 흘리고 파란중첩한 일생을 마친 고 백야 김좌진씨의 약력은 다사다난하던 최근 40년동안의 조선과 만주를 배경으로 그의 절인한 용력과 지략이 남긴 가지가지의 일화중에 자미있는 몇가지를 소개하여 보기로하자.


  홍성의 명문거족 김형규씨 둘째 아들


  그는 지금으로부터 42년 전에 충남 홍성군 고도면 상촌리 김형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명문거족으로 5대째 살아오던 99칸 집에서 태어난 그는 세살때 아버지인 김형규씨와 사별하고 동면 갈산리로 이주한 후…7세 8세 때에는 벌써 동리 아이들과 집안 하인들을 모아놓고 군대 교련을 하며 말타기 연습을 하여 부근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50여호 노복을 해방


  어린 거지를 보면 부모에게 꾸중을 들어가면서도 밥을 먹이고 옷을 입히고…집에다 고빙(雇聘)하여 두었던 한문선생의 말은 도무지 듣지도 않으며 ‘삼국지’ ‘수호지’ 선생이란 별호를 동리 아이들에게 듣던 그가 나이 15살에 이르자 부근 동리에 50여 호나 살고 있던 자기집 노복들을 불러다가 큰 잔치를 벌여주고 종문서를 내어주며 전부 자유의 몸을 만들어 버린 후 ‘손오병서’와 ‘육도삼략’을 배우고 검무를 배우기 시작하여 그가 17, 18세 되었을 때에는 벌써 이에 대항할 사람이 없게 되었다 한다. 비위에 틀리는 동무를 만날 때에는 호령 한마디로 굴복을 받을지언정 결코 주먹을 쓰는 일이 없었다 한다.




  말 위에서도 자유자재 뛰어난 검술


  그는 어릴 때부터 특히 말 타기와 검무에 능하여 말 위에서 서고 눕고 말 배에 붙어가는 등 자유자재로 몸을 하여 가지고…그가 말 타고 활을 들고는 동네 아이들에게 자기를 포위한 후 돌팔매질을 하게 하여 능히 그것을 받아내었다 한다.






1930년 2월 15일자 2면






  庚戌政變에 不平품고


  光復團 朴尙鎭과 關係


  밥은 통으로, 술은 대접으로 먹었으며


  탑동공원 뒷문도 무난히 뛰어 넘었다고


  故 白冶 金佐鎭 種種揷話(2)


  일대의 풍운아로 경성에 두각 노출


  홍성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서 당시의 풍운아들만 골라서 사귀던 김좌진씨는 뛰어난 무예와 호탕한 성격으로 여러 사람의 존경을 받게 되어 넓은 장안에 그의 존재가 날마다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무슨 물건을 살 때나 무슨 인력거를 탈 때에도 돈을 세어주는 일이 없고 주머니에 있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내어주어 곁에 있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술을 먹을 때에도 대접으로, 밥을 먹을 때에도 통으로 먹어야 만족하는 성질이었다 한다.…갈비 한 짝과 염통 하나를 동시에 먹어버리는 대식가였다고 한다.




  경술년 정변 후에 이창양행을 설립


  이렇게 남다른 용력을 가지고 남다른 체격을 가지고 남다른 인격과 지략을 가진 김좌진씨는 포부와 희망도 남과 달라서 경술년 정변이 일어나자 시국에 많은 불평을 품고 관수동에 있는 지금 대관원 자리에 이창양행이란 무역상을 만들어두고 북간도 신의주 등지에 지점 형식의 기관을 두어…기회를 엿보고 모종의 준비를 하고 있던 남북만주와 비밀 연락을 취하였다고 한다. ‘서족이기성명이이’라는 항우를 본받아 병서와 승마만 공부하던 그가 돈에는 별 뜻이 없었음에 이창양행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없어진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광복단 사건으로 3년간 옥중 신음


  광복단 사건으로 연전에 대구형무소에서 사형대의 이슬이 된 박상진과 깊은 관계를 맺고 그는 자금을 모집하고자 여러 가지 준비를 하다가 강도 미수라는 죄명하에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 동안 복역한 일이 있었는데 원체 힘이 세다는 소무을 듣고 형무소 당국에서도 그의 탈출을 겁내어 항상 두 손에 고랑을 채워 두었다. 그도 자기의 힘을 남이 아는 것을 재미없이 생각하였던 것인지 평시에는 아무 말도 없이 고랑을 차고 있었는데 여름밤에 잠을 자다가 갑자기 갑갑한 생각이 나서 고랑을 뚝 잡아떼어 버렸으므로 그 뒤부터는 김좌진에게 항상 고랑을 둘씩 채워두었다고 한다.




  경관대 포위중에 공원후문을 飛越


  그가 경찰에 잡힐 때면 형사를 둘러치고 날쌘 호랑이같이 달아나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한번은 형사 7, 8명이 손에 무기를 들고 탑골 뒷문 부근에서 그를 만나 체포코자 하였는데 그가 돌연히 몸을 날려 그 공원 뒤를 뛰어넘었으므로 포위하고 있던 형사들도 혀를 내어 두르는 일이 있었다 한다. 그가 감옥에서 나와 서울 형편을 살피다가 도저히 못 붙어있을 것을 알고 자기 친구에게 ‘남아실수난용지 지사투생경대시(男兒失手難容地 志士偸生更待時 · 남아가 태어나 실수하면 용납해주는 곳이 없으니 뜻있는 선비가 굳이 살려고 하는 것은 다시 때를 기다리려는 것이다)’란 글 한귀를 남기고 만주로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중략)


  그러나 넉넉하던 가산도 이리저리 하다 다 없애버리고 떠날 여비까지 없게 되었으므로 전라도 모처에 가서 돈 3천원을 변통하여 가지고 그의 활동의 대부분을 남겨놓은 만주로 향하여 떠났었다는데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생면부지의 남의 집에 들어가 인사도 없이 돈 3천원만 내라 함에 주인이 놀라 당신이 누군데 무엇에 쓰려하느냐고 물었다 한다. 그는 태연한 기색으로 강도가 돈을 달라는데 용도는 알아 무엇하며 성명은 물어 무엇 하느냐고 호통을 하였다. 주인이 무엇에 눌리었던지 그의 행동의 비범함에 맘이 놨던지 현금 3천원을 내어놓으매 그제야 그는 자기가 김좌진이란 것과 이 돈을 결코 헛되이 쓰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결의형제한 후 유유히 그 집을 나선 일도 있다 한다. 






1930년 2월 16일자 2면






  山營月下摩刀客


  鐵寨風外○馬人


  눈싸힌 북간도 벌판에서 혈전 계속


  밤에 잠 한잠 자지안흔 절륜의 정력


  故 白冶 金佐鎭 種種揷話(3)


  남아의 한번 실수에 몸부칠 곳이 없게 되었으나 구구한 생을 계속하는 것은 다른 날 때가 오기를 기다림이라는 간단한 글을 남기고 그가 두만강을 건너 조선을 탈출한 때는 지금으로부터 14년전인 1917년이었다. 세계대전의 총 결산으로 2년 뒤에 열릴 파리강화회의를 앞두고 해외에 있는 조선사람들 사이에 여러가지 비밀한 계획이 있을 때였으므로 조선 안에서 가지각색의 소문을 전하던 청년장사 김좌진씨가 북간도에 이르렀다는 소문은 각 방면에 곧 알려지게 되었다.(중략)


  좁은 조선을 벗어나 별천지에 이른 그는 우선 만주벌판에 흩어져있는 불평청년들과 관계를 맺어주기 위하여 혹은 만주로 혹은 시베리아 등지로 2년 동안이나 방랑생활을 계속하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뜻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은 물론이니 그가 전후 10여년 동안이나 2천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남북만주에 온건하여 있던 근거도 실상 이때에 장만한 것이라 한다.


  기미년 3·1운동이 일어나서 수많은 조선 청년들이 방랑의 길을 나서게 됨을 보고 그는 남의 땅에서 질서없이 돌아다니는 것은 오히려 재미없는 일이라고 하여 길림성 왕청현 십리평에 임시사관연습소를 설치하고 여러 청년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켰다. 그는 특히 고대병법에 통달하였으나 현대의 군사지식도 여러가지 책자를 사다가 독습을 한 결과 상당히 가지고 있었다고 하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인 1920년 겨울에 김좌진은 영성한 군대를 거느리고 북간도 등지를 넘나들며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유명한 청산리전쟁이었다.


  북간도 눈 위에 산채를 치고 스스로 북로군정서 총사령관이 되어 반 개월 동안의 혈전을 계속할 때 그는 거처와 식사를 하졸들과 꼭 같이 할뿐만 아니라 밤에는 잠 한 잠 자지않고 자기가 파수를 보았었다는데 그의 친척인 김홍진씨는 아직도 ‘산영월하 마도객 철색풍전 말마인’이란 당시의 그가 지은 시를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1930년 2월 18일자 2면

  






  國際共産黨도 聯絡


  實力養成의 屯兵田


  공사와 사사를 확연하게 구별하야


  우애깊은 동생도 잘못하면 엄벌해


  故 白冶 金佐鎭 種種揷話(4)


  청산리 사건 이후 김좌진은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길림성 해림 부근으로 근거지를 옮기고 신민부를 조직하여 군사교육을 계속하는 한편으로 조선 안에 부하를 보내어 군자금을 모집하고…세상을 놀라게 한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으며 김좌진 자신이 많은 부하를 거느리고 북경을 침입한다는 정보까지 있어서 평북경찰을 놀라게 한 일까지 있었다.(중략) 그는 특히 공사의 구분이 확연하여 그의 군대에는 자기 친아우인 김동진이 있었는데 사석에서 만날 때는 우애 깊고 인자한 형 노릇을 하나 한번 군대에서 군무를 집행하게 될 때에는 조금도 용서가 없어서 김동진에게 조그만 허물이 있어도 엄하게 벌을 주고 영창구류까지 시킨 일이 여러번 있었다 한다. 그러므로 그의 부하들은 그의 처사에 더욱 존경하여 복종하였다 하며 그도 그의 아우를 대할 때나 그의 노모를 대할 때에 이 정신을 항상 설명하였으므로 70이 넘은 그의 모친도 사랑하는 아들 김동진이 벌 받는 것에 불만을 말하는 일이 없었다 한다. 






  김좌진의 암살범 박상실은 그 이듬해 체포됐습니다.  






1931년 9월 11일자 2면






  고 김좌진씨 하수인


  박상실에 사형판결


  阿城縣 護路軍에게 逮捕되어


  執行次로 奉天에 押送


  모처에 도착한 정보에 의하면 작년 1월 24일 중국 중동선 산시역 부근에서 전 신민부 수령 백야 김좌진씨를 총살한 박상실(朴尙實)이 이번에 아성현 호로군 총사령부의 손에 체포되어 그곳 회심처에서 사형의 판결을 받고 수일 전에 형을 집행코저 봉천으로 압송되었다한다. 박상실은 원래 주중 한인청년동맹의 간부로 있었고 김좌진씨의 부하로 수년동안 지나다가 주의상 충돌로 김씨를 총살한 청년인바 지난번에 아성현 중국 관헌의 손에 조선인 공산당원 11명이 잡히는 통에 박상실도 체포되었었는데 ○○군 모험대장 고강산도 그때 잡히었다가 박상실의 얼굴을 알아보고 곧 동지에게 알리어 법정에 고발하여 사형을 받게 되었다 한다.






  이강훈 전 광복회 회장의 회고(‘동아 인연’ 70년, 동아일보 1990년 4월 1일자 14면, 창간 70주년 기념 인터뷰)


  “동아일보 사장이던 고하는 김좌진 장군에게 3백~4백 명 규모였던 독립군의 무기 구입과 훈련 등에 쓰도록 비밀리에 1만 원 가량 씩 네 차례나 군자금을 보내주었다. 동아일보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가 고하를 통해 보낸 것이지. 1만원이라면 그때 황소 1백 마리를 사고도 남을 돈이었으니 요즘 돈으로 수억 원 대의 큰돈이지. 이 옹은 이 자금을 세 차례는 천도교 계통을 통해 받았고 마지막에는 직접 받았다. 30년 1월 24일 김 장군께서 일제의 하수인에게 암살된 지 며칠 후 20대 청년이 동아일보 심부름을 왔다며 당시 김 장군의 대변인 역할을 하던 나를 찾아왔소. 돈 1만원과 함께 만장을 가져와 장례식 등 사후 문제를 해결하는데 요긴하게 썼지”  




 


  2002년 8월 13일 방영된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 제6회에는 아래와 같은 대목도 있습니다. 


  기 획: SBS 프로덕션


  책임프로듀서: 이현석


  극 본: 이환경


  연 출: 장형일   


  (전 략)


  인 촌: 홍명희 선생에게 얘기를 들었네. 우리는 백야 장군의 가족을 도울 의무가 있네. 그 분들이 있기 때문에 희망을 갖고 사는 게 아니겠나.


  최동열: 감사합니다, 선생님.


 


  인 촌: 감사라니…당치 않네. 목숨을 돌보지 않고 이 나라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는 백야 장군이 아니겠나. 조그만 정성을 보태는 것은 당연하네.


  최동열:… …


 


  인 촌: 우리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그리고 자네의 신문사는 비록 경쟁하는 처지지만 민족의 일에 대해서는 늘 뜻을 함께 해왔어.


  최동열: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


 


  인 촌: 백야 장군의 자제도 있다고 들었는데…


  최동열: 예. 두한이라고 하는 아이입니다. 일전에 그 아이의 생모가 고문으로 죽어갈 때 선생님께선 성금까지 내주신 적이 있습니다.


  인 촌: 그랬던가? 하여간 내 밑에 일러 놓겠네. 작은 집이라도 하나 장만해 드려야 할 게 아닌가. …그리고 그냥 머물 곳만 장만해 드려서야 되겠는가? 저들의 감시와 괴롭힘이 얼마나 크겠는가. 내…그 일도 한 번 생각해 보겠네.


  최동열: 고맙습니다, 선생님.


 


  인 촌: 허허허. 최동열 기자라구 했지?


  최동열: 예, 선생님.


  인 촌: 참 좋은 일을 하고 있구먼. 그래야지. 허허허.


 


  해설: 인촌 김성수. 암울한 일제 통치기를 민족의 계몽 운동을 위해 평생을 살아온 사람으로 교육과 언론, 그리고 민족 자본가로서 그 시대 지성의 대표적 인물의 한 사람이다.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한 이후, 동아일보사를 창립했으며 중앙학원과 지금의 고려대학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세웠고 경성방직과 호남에서의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민족의 의지를 일깨우는데 헌신해 온 선각자이다. 지금 그가 백야 김좌진의 가족을 위해 도움을 줄 것을 다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인 촌: 너무 염려하지 말고 그만 돌아가 보게나, 최 기자. 문제는 그 분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일 게야. 보다 근본적인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내 아무래도 경무국장을 좀 만나 보아야 겠구만.


  최동열: 그래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더 바랄게 무엇이겠습니까. 정말 고맙습니다, 선생님.


  인 촌: 허허허. 자네가 고마울 게 뭔가? 아무래도 자넨 백야 장군에 대해서 상당한 관심을 보이구 있구먼. 허허허.


 


  원노인: 예. 아니, 최기자님… 하루 종일 헤메고 다녔습니다. 역시 오늘도 찾지 못했습니다… 예? … 인촌 선생님을요? … 그래서요? … 예?


  최동열: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집도 마련해 주실 것 같고 또 두 분들의 신변도 안전하게 보살펴주실 것 같습니다.


  원노인: 이렇게 고마울 때가 있나요. 고맙습니다. 최 기자님.


 


  최동열: 내일이면 두한이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인촌 선생님은 큰 어른이십니다. 기대해 보시지요. 예, 그럼 내일 뵙기로 하지요. 저와 만나서 두한이를 기다리시기만 하면 됩니다. 만나실 수 있어요.


  원노인: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유태권: 일이 잘 되신 모양이군요.


  박 군: 제가 뭐라구 그랬어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될거라구 그랬잖아요.


  원노인: 그래. 다 잘 되어가는 것 같다. 최 기자 그 사람, 정말 고마운 사람이다.


 


  최동열: 선생님, 예비검속 동안 얼마나 불편하셨습니까?


  만해: 전혀 그렇지가 않았어. 오히려 마음이 가벼웠어.


  최동열:… …


  만해: 지금 이 순간에도 수 천, 수만의 사람들이 고문 받고 학대 받으면서 죽어가고 있어. 단지 내 나라가 없다는 그 이유 하나로 말이야. 그 고통 속에 조금이라도 동참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느냐.


  최동열: 과연 스님이십니다. 스님께서 도와주셔서 백야 장군의 가족도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만해: 허허허… 그거야 벽초와 인촌의 도움이지 어찌 내 덕이겠느냐.


  최동열: 그래도 스님께서 살펴주신 덕이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만해: 그래. 살다보면 더러 좋은 날도 있는 법이지.


  최동열: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스님.


  만해: 참, 네 놈 기사를 읽어보았어. 그 나석주라는 사람 말이야. 참으로 의인이더군.


  최동열: 예, 장열하게 죽었습니다. 너무도 의연해서 종로경찰서의 미와 경부도 질리는 모습이었습니다.


  만해: 그러니까 그런 큰일을 했지. 모두가 그 사람 같아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해.


  최동열: …


  만해: 우리 불교도 마찬가지야. 종교란 그 시대의 살아있는 영혼이야. 그런데 그 영혼이 왜색 불교에 빛이 바라고 있어. 우리 불교는 호국 불교야.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무찌른 것은 관군이 아니라 우리 승병들이었어. 부처님이신들 어찌 나라 없는 백성을 편케 해주실 수 있겠는가?


  최동열: 그러니까 스님 같은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만해: 허허허… 네 놈이 아부도 할 줄 아는구나.


  최동열: 아부가 아닙니다. 스님,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는 것 같습니다. 나석주 같은 사람의 용기와 스님 같은 분의 그 기개와, 그리고 벽초 홍명희 선생이나 인촌 김성수 선생의 투철한 민족의식이 살아있는 한 이 나라는 분명 희망이 있는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만해: 허허허허… 그래 거기다가 너 같은 젊은 지성들이 깨어 있는 한 앞날은 밝아. 하지만 희망이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거야.


  최동열: 명심하겠습니다 스님.


  만해: 좋은 소식이 또 한 가지 있을 것 같은데.


  최동열: 그렇습니까?


  만해: 민족의 지도자들이 모임을 갖자고 하는구나. 아주 큰 모임이 될 거야.


  최동열: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만해: 거국적인 모임이 될 거다. 민족주의, 사회주의가 모두 참여하는 유일 단체가 될 것이야. 이 나라를 이끌어갈 큰 모임이 될 것이야.


  최동열: 정말 반가운 소식입니다, 스님.


 (중 략) 


  원노인: 정말 올까요? 정말 이리로 올까요, 기자님?


  최동열: 틀림없습니다. 저는 사실 두한이가 거지가 되었을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관심 밖이었는데, 함께 다니는 그 아이들을 아주 오래 전부터 이곳을 지나쳐 갔습니다. 오늘도 틀림없이 올 거에요.


  원노인: 제발 그래야 되는데…


  최동열: 이곳은 식당이 많아서 꼭 지나가는 곳이지요. 제가 알기로는 오전에 한 번 저녁 무렵에 한 번 그렇게들 지나갑니다. 기다려 보시죠.


  원노인: 꼭 와야 되는데… 한 시간 넘게 기다렸는데…


 


  최동열: 백야 장군의 가족은 어찌 되었습니까?


  원노인: 아 예. 지금 곧 도착 하실 겁니다. 저희 가게에 함께 일하고 있는 박 군이란 아이가 마중을 나가 있습니다. 저는 두한이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최동열: 아, 예…


  원노인: 인촌 선생님은 정말 고마우신 분입니다. 벌써 삼청동에 벌써 집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연락을 받고 제가 가보았지요. 아주 아담한 집입니다.


  최동열: 그랬군요.


 


  (중 략)  


  조모: 이렇게 아담한 집을 장만해 주었으니 정말 고맙구나.


  오씨: 우리가 살기에는 적당하네요. 그렇죠 어머님?


  조모: 우리 두한이는 왜 아직도 안오는가? 이 할미가 온 것을 알고는 있나?


  박군: 그러믄요. 시방 올거에요. 안으로 들어가세요. 우선 급한대로 몇 가지 세간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조모: 고맙네. 원서방도 같이 오겠지?


  박군: 예, 할머니. 어서 들어가세요.


 


  (중 략) 


  국장: 최 기자! 일이 잘 됐다고?


  최동열: 예. 그 노인과 백야 장군의 아들이 만났습니다. 하하하, 정말 참으로 뿌듯했어요. 애가 완전히 거지 중에 상거지였어요.


  국장: 아버지는 천하를 호령하는 독립군 사령관인데, 그 아들은 거지였다니… 그게 바로 이시대의 비극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게 아니겠나? 참, 백야 장군의 가족은 어떻게 되었나? 경성에 도착했나?  


  최동열: 지금쯤 인촌 선생께서 마련해 주신 거처에 도착했을 겁니다.


  국장: 종로서에 미와 경부가 그들을 그냥 뇌둘까? 두한이라는 아이의 생모도 결국은 그 미와의 고문에 죽어간 게 아닌가?  


  최동열: 인촌 선생도 그 점을 걱정하시더군요. 그 일도 잘 풀릴 것 같습니다. 두고 봐야 알겠지만요.


  국장: 그래.  


 


  경무국장: 이거 인촌 선생님께 식사 대접을 다 대접받다니, 영광이올시다.


  인 촌: 허허허. 어인 말씀을? 그래도 명월관이라고 하면 장안에서 제일가는 요리 집입니다. 많이 드십시오.


  경무국장: 조선의 음식은 깔끔하고 푸짐합니다. 그래 요즘 동아일보는 잘 돼 갑니까?


  인 촌: 경무국 도서과에서 검열이 심해 애로가 많습니다.


  경무국장: 좋은 기사만 쓴다면야 검열이 무슨 문제겠습니까? 검열관의 보고를 들으니 조선의 신문들이 총독부에 상당히 비타협적이라고 합니다.


  인 촌: 신문이야 다소 정책에 거슬리는 점이 있더라도 바른 말을 써야 합니다. 그것은 곧 누적된 불만을 빨리 해소하는 길이기도 하지요. 안 그렇습니까, 경무국장님?


  경무국장: 글쎄올시다. 하지만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지…


  인 촌: 그 말씀 잘 하셨습니다. 실은 오늘 그 때문에 좀 뵙자고 한 겁니다. 그 조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경무국장: 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인 촌: 백야 김좌진에 관한 이야기올시다.


  경무국장: 백야라니요? 독립군 김좌진 말입니까?


  인 촌: 그렇습니다. 백야의 어머님과 부인이 경성으로 돌아왔습니다.


 


  경무국장: 아니, 그자들이…?


  인 촌: 그 사람들을 그냥 놔두십사하는 청을 드리고 싶습니다.


  경무국장: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자들은 대일본제국의 적입니다. 아주 큰 적이에요. 우리 일본군은 김좌진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치욕적인 상처를 받았어요.


  인 촌: 지난 번 백야의 두 번째 부인인 박계숙이라는 여인이 고문으로 죽었습니다.


  경무국장: 어흠. 음…


  인 촌: 대일본제국의 총독부 경무국이 김좌진이는 잡지 못하고 죄 없는 그의 둘째 부인을 고문으로 죽게 했다는 것은…


  경무국장: 글쎄 뭐… 그게 꼭 고문으로 죽었다고만 할 수 없는 것이고…


  인 촌: 그의 아들 김두한이라는 아이는 고아에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만주에서 그의 어머님과 부인이 왔는데… 그들마저 그렇게 된다면 조선 민중에게 엄청난 악영향이 미치게 될 것입니다.


  경무국장: 글쎄올시다. 이거야… 허… 날보고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요?


  인 촌: 조화지요. 화합 말입니다. 김좌진이는 밉지만 일본제국은 죄 없는 그의 가족들을 벌하지 않는다. 이것은 총독부의 넓은 관용과 큰 정책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떻습니까?


  경무국장: 인촌 선생! 담도 크시구려. 결과적으로 그러니까 경찰권을 갖고 있는 이 경무국장에게 독립군 가족을 살펴주라는 얘긴데…


  인 촌: 허허허. 소탐대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 것에 연연하다가 큰 것을 잃는다는 말이지요. 어떻습니까? 이럴 때 한 번 경무국장님의 대인다운 풍모를 보여 주시지요. 민심 수습에도 상당한 효과를 보실 겁니다.


  경무국장: 하하하하. 인촌 선생은 정말로 당하지 못하겠소. 민심 수습 차원이라니 할 말이 없구려. 헌데 일이 그렇게 된다면… 종로서의 미와 경부가 단단히 화를 내겠는걸. 안 그렇소? 인촌 선생?


  인 촌: … 아마 그렇겠지요.


 (후 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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