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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 61 : 동아일보 속의 김일성

Posted by 신이 On 12월 - 8 - 2010

  “1937년 6월 4일에 치러진 보천보 전투는 김일성이 지휘하는 약 100명의 항일유격대가 동원된 진공전투로서 규모는 크지 않았으나 그 파장은 매우 컸다. 당시 국내 언론들은 이례적으로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무기정간에서 막 풀려난 동아일보는 6월 5일자로 두 차례에 걸쳐 이 사건에 대한 호외를 발행할 정도로 이 사건에 관심을 보였다.” (이종석, ‘새로 쓴 현대 북한의 이해’, 역사비평사, 2000, 401쪽)






  1937년 6월 4일 늦은 밤에 일어난 보천보 전투를 동아일보는 바로 다음날 아침 호외로 전했습니다.

이어 이날 저녁, 호외(2)를 냈습니다.




  두 번째 호외에서는 “경관과 김일성 일파가 충돌되었는데 경관 측에서는 즉사 4명, 부상 12명 김일성 파에는 즉사 25명 부상 30명을 내이고 방금도 격전 중”이라는 ‘전과(戰果)’를 전했습니다. 






  “이곳에는 일본군은 주둔하지 않았고, 경찰주재소에 6∼7명의 경찰관이 근무할 뿐이었다. 국내의 지하조직을 통해 그날 저녁 주재소 경찰들이 다른 곳으로 발령을 받은 소장의 환송연을 벌여 술을 마시고 있을 것이라는 정보까지 파악하는 등, 마을의 사정을 손금 보듯 알고 있던 김일성 부대에 보천보 전투는 너무 일방적으로 쉽게 끝나 아쉬운 전투였다.”  (한홍구, ‘26살 김일성을 영웅으로 만든 보천보 전투… 전과 미미했지만 강력한 충격타를 날리다’, 한겨레 21, 2001년 11월 15일자)






  보천보 전투 발발 직후 경관 7명의 시체 호송 등 사건 속보와 함께 김일성 부대에 대한 소개 기사가 1937년 6월 8일자 석간(7일 저녁 배포) 1판에 실렸으나 다음 판부터 빠지고, 8일자 조간(8일 아침 배포)에 김일성 부대에 대한 소개 기사만이 다시 실립니다.







1937년 6월 8일자 조간 2면






  장백산림(長白密林)을 근거(根據)로


  국경선(國境線)에 출몰(出沒)


  【함흥】장백현 20도구의 밀림지대를 중심으로 하여 작년부터 동서로 신출귀몰하며 약탈 방화 협박 폭행을 감행하여 오던 공비 김일성(金日成) 일파와 또 평북대안의 밀림지대를 무대로 하여 수십 년간 활약하여오던 공비의 두목 최현(崔賢) 일파와 합류한 약 3백여명의 정예부대 중 약 백 명은 돌연 4일 밤 11시반경 심야를 타서 갑산군 보혜면 보전리로 침입하여 두 파로 나누어 일대는 보천보 주재소를 습격하는 동시 다른 일대는 각지와의 전화선을 절단하고 우편소 면사무소 삼림보호구사무소 등에 방화하는 일방 약 100 여 호의 촌락을 포위하고 약탈을 마음대로 하다가 한시간만에 대안으로 도추한 사건이 돌발하여 보천보 촌락의 천여 명 주민을 공포에 떨게 한 소위 제2 동흥사건을 일으키었다. 6일 정오까지에 쌍방의 전투 더욱 맹렬하야 경찰관 7명이 전사하고 6명이 총상을 입게 되었고 보천보의 피해만 본질적으로 5만원의 거액에 달하였다. 그러면 그들 공비군은 무슨 목적으로 함남의 땅을 습격하게 되었으며 압록강 연안의 제1선 경비가 철통같이 엄중한데도 백여명의 대부대가 경계망을 뚫고 압강을 넘어 조선에 들어온 경로는 대체 어떻게 되었던 것인가?  그들 공비는 최근에 이르러 장백현과 안도현의 하늘도 보이지 않는 밀림지대를 본거로 하여 활동을 개시하게 되었는데 원래 그들은 평북대안을 중심으로 하여 많은 활약을 하였으나 토비공작이 철저히 진행되어 오게 되었으므로 그곳에서 차츰 뒤로 밀려들어온 곳이 장백현과 안도현 지방이었다.   그리하여 김일성은 작년부터 비로소 활동을 하여오며 부하의 훈련 전범의 연구 등을 게을리 하지 않아 지금에 이르렀고 최현은 수십 년 이어 준비를 하여오던 자로 나이 50을 넘었는데 김일성을 어린 아이와 같은 취급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실력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어쨌든 최근에 이르러서 양두목이 서로 악수하여 동일한 보조를 취하여오는 터인데 지난 5월 하순 최현 일파 백육십 명이 함북지방으로부터 함남 갑산군을 거쳐 장백현 20도구 방면으로 건너간 일이 있어 그 당시 함남 함북 4백여 명 무장경찰대와 수비대 만주국군 삼림경찰대의 맹렬한 수사도 헛되이 돌아가게 하였거니와 그 후 비상경계망을 풀어 경계의 그물이 엷어진 틈을 타서 대안 재천리 즉 함남, 국경의 가림 산위 양(兩)주재소의 중간 험령을 넘어 제2선에 속하는 보천보를 습격하고는 유유히 대안 구우수로부터 23도구로 도주하였는데 그들이 금번 그와 같이 교묘한 방법을 쓰게 된 것은 낮부터 대안 재천리에 모두 집결하여 밤 되기를 기다려 백여 명은 강을 넘어 보천보로 들어가고 남북으로 일대씩 나누어 각각 가림 주재소와 산위 주재소를 행하여 사격하기로 하고 혜산서에서 응원부대가 오게 되면 길을 막고 야습을 할 계획을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보천보가 습격을 당하였다는 보고를 접한 혜산서에서는 급히 응원부대를 파견하여 위선 강안도로 일대를 경계하며 그들의 도주할 길을 막고자 하였으나 가림 주재소 대안에 수십 명의 공비가 잠복하여 일제히 응원경찰관에 사격을 가하여 진퇴를 곤란케 하고 또 산위 주재소 대안에서도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강안의 교통로를 막을 수 없게 하였으므로 보천보 습격부대는 유유히 길을 찾아 대안으로 도망하였던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번 내습한 김일성 일파의 부대에는 십여 명의 부녀가 있어 군복의 재봉 세탁 밥 짓는 것 등을 하고 있다 한다. 그리고 그들은 쏘비에트의 전법을 그대로 이용하여 교묘하게 하는 까닭에 작년에도 토벌군 일개련이 전멸당한 일도 있는 터인데 함남 경찰부에서는 미증유의 대사건을 경험하고 금후 더욱 강안 제일선의 경비를 튼튼히 할 터이라고 하는데 과거에 있어서도 대정 10년 (1921년) 9월에 함정, 동 10월에 회린, 동 11월에 운전 등을 습격당하였고 대정 11년(1922년)에는 6월에 함정, 동 7월에 포태, 동 9월에 령성 등지를 습격당하고 소화 8년(1933년) 8월에 하흥경수리, 금년 2월 2일에 나난보, 지난 5월 20일에 상흥경수리 등을 습격당하여 전후 17개년간에 아홉번이나 함남의 땅을 습격받았으나 아직 금번과 같은 거대한 피해와 살상을 당하기는 처음되는 사건이다.






  1937년 6월 9일자 석간 2면에는 “기자는 6월 5일 오전 11시 보천보사건의 현장을 가려고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압록강 상류를 구비 구비 감돌아 60리 길을 한 시간에 달렸다”로 시작하는 애잔한 현장 취재기사가 실렸습니다. 이 기사는 일제하 우리에게 ‘표현의 자유’가 막혀 있었음을 절감케 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취재기자의 처절한 고뇌와 비애가 군데군데 배어있습니다. 현장에 기자를 보내 당시 이 정도의 기사를 쓴 신문도 동아일보 밖에 없었습니다.







1937년 6월 9일자 석간 2면






  피습(被襲)된 보천보(普天堡)


  재습(再襲)의 공포에 떠는 주민


  남부여대(男負女戴)로 피난


  철옹성의 국경선에 처처(處處)의 참적(慘跡)




  기자는 6월 5일 오전 11시 보천보사건의 현장을 가려고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압록강 상류를 구비 구비 감돌아 60리 길을 한 시간에 달렸다.


  국경 제1선에는 5리 혹은 10리마다 주재소 一개소씩 두고 포대를 쌓고 토굴을 파놓고 국경수호에 만일을 다했건만 ―그래도 틈을 새어 달려들어 이번 사건을 일으키었다.


  보천보 가는 길 천수리대안 20도구(泉水里對岸 二十道溝)에도 작년 가을에 마적의 침해를 받어 방화를 당하던 곳이요 가림대안(佳林對岸)도 마적 때문에 전멸을 당하여 지금은 상전벽해의 감이 없지 않다.


  동승객의 말을 들으면 국경일대는 거의 마적단의 침해를 받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고 한다.


  압록강 건너로 눈을 돌리니 만주 – 그곳에 여름은 와서 싱싱한 녹음이 산야에 우거졌다. 산 깊고 물 깊은 그 속 -그 속이 마적단과 공비들이 활약하는 소굴이다.


  강 건너 만주 쪽에서 목숨을 달고 있는 동포의 농가촌락 – 그들은 생활고에 마지못해 사는 그들이어니 마적의 등살에 어찌 평안하기를 바라랴! 그래도 굴뚝에선 연기가 길게 나오고 초록 강변에는 송아지가 엄마를 부르는구나. 그리고 압록강물은 여전히 검푸른 그대로 굼실굼실 흐르면서 떼목군의 한가로운 노래만 – 오늘은 처량히도 들린다.


  공비에게 습격을 당한 보천보! 태풍일과후의 보천보! 보천면사무소 우편소 삼림보호구 학교 소방회관 이런 주요한 건물들이 전부 하룻밤 사이에 재가 되었다.


  먼저 주재소를 찾아 좌우를 둘러보니 가여웁게도 사무실은 총구멍이 벌의 집같이 구멍을 뚫어놓았다.


  김일성(金日成) 일파 백여명이 갑자기 습격을 했고 경관은 불과 4, 5인이었다.


  피살자는 두 사람. 그리고 비 오듯 하는 탄알 속에서 뜻밖에 인명의 피해는 적은 셈이다.


  면사무소, 그 자리에는 지금도 연기가 무럭무럭 나고 기둥과 들보가 탄 시커먼 숯덩이만 앙상하게 쌓였고 문서덩이가 그대로 타버려서 바람에 재가 날린다.






  이후에도 동아일보는 김일성 부대의 항일투쟁을 소상히 전했습니다. 물론 기사에는 ‘비적’ ‘공비’ ‘습격’ ‘탈취’ ‘방화’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독립운동을 폄하한 당시 신문들의 친일적 보도 태도라고 비판하는데,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지하신문이 아닌 이상 합법적으로 발행되는 신문으로서의 한계는 인정해야 한다. 더구나 우리 민중은 아무리 합법신문들이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재주가 있지 않았던가?” (한홍구, ‘26살 김일성을 영웅으로 만든 보천보 전투… 전과 미미했지만 강력한 충격타를 날리다’)






  1937년 6월 23일자 석간 2면




  불안(不安)한 장백일대(長白一帶)


  김일성계(金日成系) 삼백명(三百名)


  관방자(官房子)를 습격(襲擊)


  전분연맥등 식량탈거(奪去)


  【혜산진지국특전】지난 19일 오전 3시경 장백현 19도구 관방자(官房子)에는 김일성 일파 약 3백명이 나타나 전분과 연맥 등 식량 약 ○3석을 탈취해가지고 주민 15명에게 지어 가지고 자취를 감추었다.


  전기 관방자는 벌써 3회나 비적들의 습격을 당하여 주민의 태반은 떠나가고 지금은 대개 토막을 치고 농사를 짓고 있는데 비적들의 활동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하여 간다고 한다.







1937년 6월 30일자 석간 2면






  김일성 일파 이백명


  국경선 진출기도


  김일성 조국안(曹國安)파 합류하야


  대안을 엄중 경계중







1937년 7월 2일자 석간 2면






  함흥 신갈파(新乫坡) 대안에 김일성 일파 오백여명이 래습(來襲)


  함남군대출동격퇴







1937년 7월 11일자 석간 2면






  김일성일파 등 백여


  십팔도구에 출현


  칠명을 랍거 식량기타를 탈거


  압강일대 의연엄계






  1938년 4월 29일자 석간 2면




  김일성 일파의 습격


  나팔 불며 6도구 시가에 침입 사상, 납치 50여명


  26일밤 평북 후창경찰서 부흥주재소 대안 임강현 제 3구 6도구를 습격한 비적의 피해 상황에 대하여는 목하 상세취조중인데 27일밤까지에 판명된 것은 다음같다.


  비단은 동북항일군 제2군 제6사 김일성일파 약 5백 명을 경기 6정, 각자 소총 또는 권총을 소지한 유력비인 것이 판명, 그들은 6도구 시가지로 향하여 나팔을 불며 5반에 나누어 시가에 침입 약탈의 극을 다했다. 비단에 의한 손해는 즉사 일본내지인 2명(세무원) 만주인 1명(세무원)으로써 경찰유격 형사 3명 행방불명, 아마 비단에 납치된 모양이며…(후략)






  “당시 김일성은 1937년 10월 조국광복회 검거 사건 이후 장백에서의 대중적 기반을 상실하고, 1938년 들어 무송·임강·몽강 일대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었다.” (신주백, ‘김일성의 만주항일유격운동에 대한 연구’, 역사와현실, 역사비평사, 1994년 제12호)







1939년 4월 14일자 조간 2면






  백여명의 김일성 일파


  식료품, 촌민 납치


  -주재소원은 중과부적으로 일시는 귀환


  신갈파(新乫坡) 대안골 습격







1939년 5월 19일자 석간 2면






  김일성 일파 6백명


  월경습격의 태세 함남북 경비대 긴장







1940년 3월 13일자 조간 2면






  김일성 비적 일파


  경찰본부 습격 식량 다수 쿠리 1백명 납거




   “1940년 들어 그의 부대는 더욱 위기에 처했다. 비록 김일성이 지휘하는 부대가 1940년 3월 화룡현 홍기하의 일본인 목재소를 습격하고, 이어 안도현 대마륵구에서 마에다 중대를 섬멸하여 성가를 높였다고 하지만, 이미 제1로군은 뿔뿔이 흩어져 있었고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더욱이 2월 20일 제2방면군 참모장 임수산이 부하 10여 명과 함께 일제에 투항했다. 그는 임수산 공작대를 조직하여 나가시마 공작반과 함께 김일성 토벌에 앞장섰다.”  (신주백, ‘김일성의 만주항일유격운동에 대한 연구’, 역사와 현실, 역사비평사, 1994년 제12호)






  “결국 일제 토벌대의 주요 섬멸 목표가 되어 있던 김일성은 이두익, 전문섭, 강위룡, 이을설, 김정숙 등을 인솔하여 10월 23일에 소만국경을 넘어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의 보로시로프에 설치된 야영(일명 남야영)으로 이동하였다.” (이종석, ‘새로 쓴 현대 북한의 이해’, 402쪽)







            김일성              김정숙






  “김일성이 되기 전에 김성주였다 하는 사람도 있고, 좌파에서는 ‘김일성은 김일성이지 김성주가 뭐냐’ 하는 사람도 있고…같은 고향사람인데, 초등학교의 선후배예요. 내가 갔을 때 김일성은 졸업하고 떠났기 때문에 같이는 못 다녔고. 김일성이 김성주 때 그러니까 해방되고 얼마 안 돼 고향에 왔어요. 동네 어른들이 김성주가 왔는데 내일 아침 환영잔치가 있을테니까 한번 가자고 했어요. 김일성과 함께 조반을 먹었는데 동네 어른들이 ‘성주야, 해방됐으니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으냐’고 그래요. 그랬더니 김일성이 첫째는 친일파 숙청, 두 번째는 토지개혁이라고 다섯 가지를 얘기해요. 이야기를 듣다보니 저 사람만의 생각이 아니구나, 공산당 강령이구나 느낌이 들었어요. 공산당은 조직이 있으니 어떻게 접수한다는 것이 다 있었어요. 한국은 조직이 없어 이승만 박사가 정권 잡고 반공하자니까 일제시대 경찰력을 동원하지 않고는 할 수 없거든요. 그러니까 반공이 서서히 될 수밖에 없고…공산주의자들은 흑백이니까 중간이 없고 미국은 민주주의니까 중간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우물우물했거든요. 그때부터 시작해 좌파 사람들은 대한민국을 폄하할 때 친일파 숙청을 못해 정통성이 없어졌다하는데요. 과거사 정리, 친일파 문제를 지난 정부가 한 것은 그 연장선상에 있어요. 역사의 무대를 차지해야한다, 친일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하는 것을 부담으로 느껴왔지요…김일성이 20 전후해 공산당원이 됐지만 그 전까지 기독교 분위기에서 자랐어요. 어머니 강 씨가 크리스찬이고 그 외삼촌도 목사고요. 그래서 지금 김정일 위원장 보다 폭이 넓지 않았나 생각해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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