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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를 국내에 처음 알린 것은 1937년 6월 5일 동아일보가 두 차례 발행한 특종 호외(號外)였습니다.  ‘보천보 전투’는 만주 독립군의 활동이 사그라져가던 때 일제의 삼엄한 국경 경계를 뚫고 국내에 들어와 벌인 항일무장투쟁으로 역사적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습니다.  동아일보는 그 전날 벌어졌던 ‘보천보 전투’ 소식을 발 빠르게 다음날 바로 호외로 전했습니다. 




  “양일천 동아일보 혜산진 주재 기자가 정보를 입수하고 미리 기사를 써놓은 거야.”(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한겨레신문 2010년 5월 17일자 33면)    







동아일보 1937년 6월 5일자 호외






  함남 보천보를 습격


  우편소, 면소에 衝火


  昨夜 ○○2백여명이 돌연 來襲


  普校, 소방서에도 방화


【체신국 오전9시반 입전】4일 오후 10시 30분경 함남(咸南) 국경 보천보(普天堡) 우편소에 ○○2백여명이 습래하야 동 우편소를 포위 방화하고 계속하여 보천보 부근에 있는 면사무소와 보통학교 소방사무소 등을 습격 방화하였는데 부상자는 1명이다. 이 급보에 접한 혜산진(惠山鎭)우편국에서는 5일 오전 3시경 상천(常川) 체신서기외 공수(工手) 2명이 휴대전화기를 가지고 현지에 자동차로 급행하였는데 동 우편소장 이하 가족들은 모두 무사하다고 한다.




  함남 경찰부에서 출동


  김일성 일파○○○○로 판명


【함흥지국 전화】함남경찰부 입전에 의하면 지난 4일 오후 11시30분경 김일성(金一成) 일파와 최현(崔賢) 일파 3백여명은 국경 대안인 혜산진에서 동북으로 22키로 지점에 있는 보천보에 나타나 보통학교, 우편소, 면사무소, 소방서 등을 습격하고 방화를 하여 그중 우편소와 면사무소는 전소되었다는 바 그 통에 그들은 1명을 사상시키고 도주하였다. 이 급보를 접한 함남경찰부에서는 북촌(北村)고등과장이 부원 수십명을 대동하고 금야 11시에 현장으로 출동하리라 하는 바 아직 쌍방의 자세한 사상자는 판명되지 않았다 한다.






 
동아일보 6월 5일자 호외(제2)






  보천보 습격 속보


  추격 경관과 충돌


  兩方 사상 70명


  對岸 23道溝에서 交火


  (함흥지국전화) 보천보를 습격한 2백여명의 비적단과 추격 경관대는 드디어 충돌되었다.    금일 오후 1시경 압록강 대안 13키로 지점, 23도구에서 대천부대(大川部隊) 30여명 경관과 김일성 일파가 충돌되었는데 경관측에서는 즉사 4명, 부상 12명 김일성파에는 즉사 25명 부상 30명을 내이고 방금도 격전중이다.


  오후 3시 이 급보를 접한 함남경찰부에서는 길양(吉良)경찰부장이 북촌(北村)고등과장을 대동하고 자동차로 현장에 급행하였다.


  계속하여 사태가 위험하다는 보고가 있어서 경관대 70여명으로는 부족하므로 호인(好仁)경찰서 신갈파(新乫坡)경찰서 삼수(三水)경찰서에서 90명을 증발하여 응원출동케 하였다.






  혜산, 신갈파 호인 등


  3署 경관 총출동


  보천보를 습격한 김일성 일파는 곧 23도구(道溝)로 도주하였는데 이 급보를 접한 혜산진경찰서에서는 곧 근처 신갈파 경찰의 응원을 얻어 추격하였는데 대천부대에서도 31명 경관을 출동시켜 23도구에서 격전중이나 혜산진서에서는 무장경관 11명을 또 증원 파송하였다.






  동아일보는 이후 계속 ‘보천보 전투’ 소식을 대서특필했습니다.





동아일보 6월 6일자  2면(5일 석간)





 동아일보 6월 6일자 조간 2면





동아일보 6월 7일자  2면(6일 석간)  






  “보천보전투를 통해 김일성이 전국적인 인물로 떠오르는 데는 언론, 특히 동아일보의 공이 컸다. … 동아일보는 보천보 전투 사흘 전인 1937년 6월1일 복간되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무기정간을 당했다 풀려난 동아일보는 보천보 전투가 일어나자 신이 나서 두 차례나 호외를 발행해가며 연일 대서특필한 것이다. … 그런데 당시 유독 동아일보가 보천보전투를 대서특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동아일보의 혜산진 주재기자로 보천보 전투 보도에서 맹활약한 양일천(梁一泉)은 김일성의 조국광복회 조직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인물이었다. 양일천은 김일성이 국내로 조국광복회 조직을 확대할 때 손을 잡은 천도교 지도자 박인진(朴寅鎭)의 제자였다.” (한홍구, ‘대한민국사2’, 한겨레신문사, 155~156쪽)






  동아일보 6월 9일자 석간에는 양일천 기자의 보천보 현장 답사기(踏査記)가 사진과 함께 실렸습니다.







1937년 6월 9일자 2면(8일 석간)






  재습(再襲)의 공포에 떠는 주민


  남부여대(男負女戴)로 피난


  철옹성의 국경선에 처처(處處)의 참적(慘跡)


  기자는 6월 5일 오전 11시 보천보사건의 현장을 가려고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압록강 상류를 구비구비 감돌아 60리길을 한시간에 달렸다.


  국경 제1선에는 5리 혹은 10리마다 주재소 一개소씩 두고 포대를 쌓고 토굴을 파놓고 국경수호에 만일을 다했건만 ―그래도 틈을 새어 달려들어 이번 사건을 일으키었다.


   보천보 가는 길 천수리대안 20도구(泉水里對岸 二十道溝)에도 작년 가을에 마적의 침해를 받어 방화를 당하던 곳이요 가림대안(佳林對岸)도 마적 때문에 전멸을 당하여 지금은 상전벽해의 감이 없지 않다.


  동승객의 말을 들으면 국경일대는 거의 마적단의 침해를 받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고 한다.


  압록강 건너로 눈을 돌리니 만주 – 그곳에 여름은 와서 싱싱한 녹음이 산야에 우거졌다. 산 깊고 물 깊은 그 속 -그 속이 마적단과 공비들이 활약하는 소굴이다.


  강 건너 만주 쪽에서 목숨을 달고 있는 동포의 농가촌락 – 그들은 생활고에 마지못해 사는 그들이어니 마적의 등살에 어찌 평안하기를 바라랴! 그래도 굴뚝에선 연기가 길게 나오고 초록강변에는 송아지가 엄마를 부르는구나. 그리고 압록강물은 여전히 검푸른 그대로 굼실굼실 흐르면서 떼목군의 한가로운 노래만 – 오늘은 처량히도 들린다.


  공비에게 습격을 당한 보천보! 태풍일과후의 보천보! 보천면사무소 우편소 삼림보호구 학교 소방회관 이런 주요한 건물들이 전부 하룻밤 사이에 재가 되었다.


  먼저 주재소를 찾아 좌우를 둘러보니 가여웁게도 사무실은 총구멍이 벌의 집같이 구멍을 뚫어놓았다.


  김일성(金日成) 일파 백여명이 갑자기 습격을 했고 경관은 불과 4, 5인이었다.


  피살자는 두 사람. 그리고 비 오듯 하는 탄알 속에서 뜻밖에 인명의 피해는 적은 셈이다.


  면사무소, 그 자리에는 지금도 연기가 무럭무럭 나고 기둥과 들보가 탄 시커먼 숯덩이만 앙상하게 쌓였고 문서덩이가 그대로 타버려서 바람에 재가 날린다.


  더구나 면에는 궁민구제를 위한 대맥(大麥) 150여석이 역시 불에 타버리었다. 얼마나 처참한 광경이냐?


  그리고 그들은 시가 곳곳에 과격한 문구를 등사판으로 인쇄한 삐라를 뿌리었다.


【혜산진】갑산군 보천보에 마적습격 사건으로 가슴을 놀래인 주민들은 재차 습격할 것을 염려하여 이곳에선 마음놓고 못살겠다고 정처없이 남부여대하고 피란가는 주민이 길에 널리었다.






  동아일보의 ‘보천보 전투’ 보도에 맹활약을 한 양일천 기자는 삼천리 잡지 1937년 10월호에 ‘국경의 비적수괴(匪賊首魁) 김일성 회견기’ 기사도 썼습니다.


  이 기사는 김일성 부대에 끌려갔다 탈출한 장백현(長白縣) 동포 김정부(金鼎富), 정도익(鄭道益)씨의 경험담을 듣고 쓴 것으로 ‘김일성 회견’은 이의 일부입니다. 







 
양일천 기자




 

  金日成 會見 


  「마적 대장 金日成」이라 하면 국경 일대에선 너머나 알니엇고 新聞紙나 본 사람은 누구나 기억하리라.


  總師長이란 이름을 가지고 X에 가까운 滿人, 朝鮮人 부하를 이리저리 통제해 가며 습격 싸홈, 완강히 군대와 저항해 가며 산중 소굴을 지휘해 가는 그! 그는 과연 어떤 인간인고?


  金鼎富翁은 많은 흥미를 가지고 이 수수꺽기의 인간을 회견하였든 것이다.


  후리후리한 키, 우락부락한 말소리 음성을 보아 고향은 平安道인 듯. 예상보다 연령은 너머나 젊은 血氣方丈의 30미만의 청년. 그는 滿洲語에 정통, 어대까지 대장이란 標的이 없고, 복장, 食飮에까지 하졸과 한가지로 기거를 같이하며 甘苦를 같이 하는데 그 감화력과 포용력이 잇는 듯하게 보엇다.


  「老人님 추운데서 얼마나 걱정되십니까」 그는 먼저 이렇게 부드러운 말노 인사를 들이고는


  「某側의 정보에 의하면 老人님이 5만원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拉來한 것인데 其後 사실을 조사한 결과 무근의 설임을 알었읍니다. 老人님이 設使 기천 원의 전 재산을 우리에게 납부하는 것은 우리는 남의 돈을 빼았는 것이여서 즐겨하지 않읍니다. 그리나 우리는 우리 일이 잇스니 부득이 하지요… 」


  「이런 고생을 왜 시키느냐구요? 老人님 우리가 고생하는 걸 좀 체험하시여 甘苦를 아시라는 것입니다. 우리 젊은 몸이 따뜻한 자리 평안한 생활을 누가 싫여하겠오. 2, 3일식 보리죽도 못 얻어 먹어 가며 이 고생을 달게 하는 것은 다 그리되어 그리것이요. 나도 눈물도 있고 피도 있고 혼도 있는 인간이요. 그러나 이 추운 겨을을 우리는 이러케 도라다니는 구려」


  그는 생각든 바와는 좀 달느게 匪賊首魁답지 안케 音聲도 조용하고 태도도 우락부락하지 안엇다.


  그는 金翁을 여러 가지 말노 慰撫해가며 지금은 엄동이라 雪中에 寸步를 옴길 수 없고 새 봄에는 꼭 老人님을 還家시킬터이니 안심하라고 하고 부하 간수에게 특별 우대하기를 명하였다고 한다.


  金日成-匪賊首魁인 그는 골격이 여무러 보이고 말 잘하고 뱃심 있어 보이는 그! 나이에 비해서 풍상을 겪은 지라 老熱해 보이는 그! 그는 마적 대장이라 자칭함이 그럴듯하더라고 金翁은 여러 번 말하였다.


  과연 그는 滿洲 벌판이 좁다 하고 마적 대장으로 一生을 마칠 터인가. 그의 나이 아직 점거니 방향을 전환할 것인가 써! 將來如河?






  1998년 10월 김병관(金炳琯) 당시 회장 등 동아일보 방북단은 ‘보천보 전투’ 호외를 금판(金版)으로 만들어 북한에 전달했고 현재 묘향산 입구 국제친선전람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국제친선전람관에 전시된 ‘보천보 전투’ 호외 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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