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警世木鐸(경세목탁)’
‘세상을 깨우치는 목탁이 되라’
1945년 12월 1일자 동아일보 복간호(復刊號) 1면에 실린 김구 선생의 휘호입니다.
1940년 8월 10일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됐던 동아일보는 광복과 함께 5년 3개월여 만에 다시 태어났습니다.
동아일보 보다 1주일 앞서 1945년 11월 23일자 복간호를 낸 조선일보 11월 26일자 1면에는 ‘有志者 事竟成’(유지자 사경성·뜻을 가진 자는 일이 반드시 이뤄진다)이라는 휘호를 써주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동아일보와의 인연을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어머님에 대한 추억
“나는 상해에서 민국 6년(1924) 1월 1일 상처하였다. 처는 신(信)을 낳은 후 몸이 채 튼튼치 못하였을 때 영경방(永慶坊) 10호 2층에서 어머님께 세숫물을 버려 달라고 하기가 황송했는지 세숫대야를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다 실족하여 층계에서 굴렀다. 그 후 늑막염이 폐병이 되어서 홍구 서양인이 경영하는 폐병원에서 사망하였다. 내가 그곳에 못 가는 까닭에 보륭의원(普隆醫院)에서 최후 작별을 하였다. 김의한 부처가 방문하여 처의 임종을 봐주었고, 나는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하는 것만 들었다. 미주에서 상해에 온 유세관(柳世觀)이 입원 때와 장례식 때 많은 수고를 해주었다. 어머님은 세 살인 신(信)을 우유로 길렀는데, 밤에 잘 때는 어머님의 빈 젖을 물려 재웠다. 상해의 우리 생활은 극도로 곤란하였다. 그때 독립운동을 하는 우리 동지들은 취직자, 영업자들을 제하면 수십 명에 불과하였다. 어머님께서는 청년, 노인들이 굶주리는 것을 애석히 여기셨지만 구제할 방법이 없었다. 두 손자마저도 상해에서 키우기 힘들어 환국코자 하실 때, 어머님은 우리 집 뒤쪽 쓰레기통 안에 근처 채소상이 버린 배추 껍데기가 많은 것을 보고, 매일 저녁 밤 깊은 후 그런대로 먹을 만한 것을 골라 소금물에 담가두었다가 찬거리로 하기 위해 여러 항아리를 만들기도 하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해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워지자 어머님께서는 네 살이 채 안된 신(信)이를 데리고 길을 떠나셨고, 나는 인(仁)이를 데리고 여반로(呂班路) 단층집을 세내어 석오 이동녕 선생과 윤기섭, 조완구 등 몇 분 동지들과 함께 살며 어머님께서 담아두신 우거지김치를 오래 두고 먹었다. 어머님께서 본국으로 돌아가실 때 여비를 넉넉히 드리지 못해, 겨우 인천에 상륙하시자 여비가 떨어졌다. 떠나실 때 내가 그런 말씀을 드린 바 없건만, 어머님은 인천 동아일보 지국에 가서 사정을 말씀하셨다. 지국에서는 신문에 난 상해 소식을 보고 벌써 알았다면서 경성 갈 여비와 차표를 사서 드렸고, 경성에서 다시 동아일보사를 찾아가니 역시 사리원까지 보내드렸다고 했다.” (‘백범일지’,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 주해, 돌베개, 1997, 363~367쪽)
동아일보 1925년 11월 6일자 2면은 백범 모친의 귀국에 앞서 안타까운 사연을 전합니다.
죽어도 고국강산
기박한 생애에 남다른 뜻 가진
상해객창(客窓)의 김구 씨 모친
◇…상해임시정부 김구(金九) 씨의 모친 곽낙원(郭樂園, 67) 여사는 오늘날까지 아들과 함께 파란중첩한 생활을 하여오며 지금으로부터 약 4년 전에 그의 고향인 황해도 신천군을 떠나 며느리와 손자들을 데리고 아들 김구씨가 있는 상해로 건너와서 인정풍물이 모두 생소한 이역타관에서 하로가튼 분투의 생활을 하여 오던 중 지금으로 약 2년 전에는 같이 고생살이를 하여오든 그의 자부(子婦)인 김구 씨의 안해가 불행히 병마에 걸리어 이역강산에서 황천의 길을 먼저 떠나가게 되매 곽씨 부인은 타관에서 현숙하든 며느리를 잃어버리고 눈물 마를 날이 없시 오즉 죽은 며느리의 소생인 여섯 살된 손자와 두 살된 손자를 다리고 눈물로 세월을 지내다가
◇… 근일에는 다시 고국생각이 간절하다고 그 아들의 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고저 준비중이라는데 상해에 잇는 여러사람들이 고국에는 가까운 친척도 한사람 없는데 늙으신 이가 그대로 나아가면 어떻게 하느냐고 만류하나 도무지 듣지 아니하고 백골이나 고국강산에 묻히겠다고 하며 아주 상해를 떠나기로 작정하였다는데 아들의 만류함도 듣지 아니하야 할수가 업다 하며 그 부인은 조선에 나간대도 갈곳이 없으므로 그의 앞길이 매우 암담하다고 일반은 매우 근심하는 중이라. = 사진은 곽씨 부인과 그의 맏손자 (상해특신)
‘더욱 뜻을 이루지 못하고 표랑하는 남편을 두고 죽을 때에 그 부인의 눈이 어찌 차마 감기었으랴!’ 동아일보 1924년 2월 18일자 2면은 2월 13일 상해에서 있은 김구 선생의 부인 최준례 여사의 묘비제막식 소식도 전했습니다.
◇ 회포를 돕는 비석
이 사진은 향자 보도한 바와 같이 사회를 위하여 무한한 고초와 분투하는 남편을 만나서 남이 격지 못할 고생으로 간장을 녹이다가 몇 천리 밖인 다른 나라에서 이 세상을 떠난 김구 씨의 부인 최준례 여사의 무덤에 세운 빗돌이다. 이 비는 상해에 있는 동포들이 그의 사십 평생의 고적하고 가난한 경우를 불상이 여겨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털어 돈을 모아서 세운 것인데 조선어학자 김두봉 씨가 지은 순 조선문의 비문으로 썼고 이 빗돌 뒤에 있는 늙은 부인은 그의 시어머니 곽씨이요 모자 쓴 남자는 그 남편 김구씨요 오른편에 있는 아해는 큰아들 김인(5)이요 왼편에 있는 아해는 그 둘째 아들(김신)이다. 늙은 시모, 어린 자손, 더욱 뜻을 이루지 못하고 표랑하는 남편을 두고 죽을 때에 그 부인의 눈이 어찌 차마 감기었으랴! 쓸쓸한 타향에 가족을 두고 외로이 누운 그에게 이 빗돌만이 쓸쓸한 회모(懷慕)를 더욱 도을 뿐이다.
1924년 2월 13일 상해 최준례 여사 묘비에서 찍은 가족 사진.
왼쪽부터 둘째 아들 신(信), 백범, 모친 곽낙원 여사, 맏아들 인(仁).
묘비석에 ‘ㄹㄴㄴㄴ해’ 라고 적은 것은 한글학자 김두봉이 단기 4222년을 한글 자음에 대입해 풀어쓴 것.
동아일보 1922년 10월 15일자 3면에는 상해임시정부의 상벌령을 소개했습니다.
일본 관헌과 전사하면 일등상
싸우다가 달아난 자는 사형에
상해임시정부에서는 금번 아래와 같은 취지로 상벌령을 제정하여 각 독립단에 통고를 발하였다더라.
一, 대한독립군으로 조선 내지의 일본관청을 습격하다가 전사한 사람은 일등상패를 주고 유족에게는 계급을 보아 이천원 이하의 일시금을 줄 일이오.
二, 그러한 싸움에 부상을 당한 사람에게는 부상한 정도와 계급을 보아 이등상패나 또는 삼등상패를 주고 또 이천원 이하의 일시금을 줄 일.
三, 싸우는 중에 도망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외에 비겁한 행위를 하는 자에게는 상당한 태형을 가한다.
이외에 독립군으로 부녀자에게 폭행을 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규정이 있다더라(국경정보)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에 잠입해 비밀결사대로 활동하다 체포된 임정 관련자들의 소식들도 동아일보 지면에 연이어 전해졌습니다.
동아일보 1921년 5월 3일자 3면
향촌회원 검거
강서군에서 열명을 검거
강서군 성대면 성오리에 사는 김려련(金麗鍊)은 국민향촌회(國民鄕村會)라는 비밀결사의 두목이 되어 부하 9명을 지휘하여 상해임시정부와 비밀히 연락하며 비밀한 계획을 하던 중에 요사이 대동(大同)경찰서의 손에 두목이하 회원 전부가 체포되었다더라.(평양)
동아일보 1921년 7월 23일자 3면
박용만의 부하 체포
조선 내지에 수입하려던
폭탄 이십개와 함께 체포
이전 상해 임시정부의 외교총장으로 있던 박용만은 북경에서 다시 어떠한 계획을 하더니 최근에 이르러 최후 수단으로 한번 조선 전체를 뒤떠들 계획으로 북경에서 폭탄을 제조하여 평양 경성 대구 등지에 있는 대관을 암살하고 건물을 파괴하려고 먼저 청년 한명으로 하여금 안동현까지 폭탄을 보내었으나 국경의 경계가 엄중함으로 배를 타고 운반하려 한다는 정보를 들은 경무당국에서는 소관 경찰서로하여금 엄중히 경계케 하였던 중 지난 18일에 마침내 체포하였는데 과연 폭발탄 20개를 가졌다더라. (신의주)
김구 선생이 1932년 1월과 4월에 주도한 이봉창, 윤봉길의거는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동아일보 1932년 9월 11일자 2면
금년 1월 8일에 돌발한 앵전문 외 대역사건
범인은 경성 출생 이봉창
◇게재금지 중 작석 기사 일부 해금◇
16일 대심원에서 공판
금년 1월 8일 오전 11시 44분 천황폐하께옵서 관병식에 행행하셨다가 환어하시는 길에 로부가 앵전문 부근에 이르렀을때 로부에 향하여 폭발탄을 투척한 대불경사건은 그간 범인 리봉창(李奉昌)을 동경지방재판소 궁성 검사정 이하가 취조하고 대역죄로 대심원에 대하여 예심을 청구하여 이래 동경지방재판소에서 심리중이더니 7월 하순 예심을 종결하고 대심원에 회부하여 동법원 형사부 제4부 도전(島田) 재판장을 주심으로 하는 특별재판소에서 예심기록을 기초로 심리한 결과 8월 상순 그 사건을 공판에 부친다는 결정을 내려 一건 기록은 화인(和人) 대심원장을 재판장으로 하는 특별재판부에 넘어갔다. 화인 재판장은 림(林)검사총장이하 관계 당국과 최고협의회를 연결한 결과 오는 16일 오전 9시 대심원 형사 제1호 대법정에서 대역죄의 공판을 개정하기로 결정하였다. 특별변호인은 제택(○澤) 박사 산구정창(山口貞昌)의 二씨가 관선으로 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9월 9일 오전 10시에 준비공관 수속이 동경지방재판소에서 비공개리에 개정되었다.
검사 당국 취조에
범행사실 자백
【동경전보】범인 이봉창에 관한 취조는 동경검사국에서 현행법으로 범행 직후에 구류하고 궁성 검사정의 명령에 의하여 봉정 차석검사와 구산 석진 두 부장이 맡아 취조하였는데 봉정 차석검사의 취조에 대하여는 최초 다소의 흥분된 빛을 띠었었으나 검사의 냉정한 태도에 좀 안도한듯이 의의로 간단히 자백하고 사상범이 가지기 쉬운 오만한 태도는 없었다고 한다. (사진은 이봉창)
검사의 취조는 이와 같이 비교적 용이하게 진행되어 힘 안들게 검찰조서를 만들어 기 소장과 예심청구서를 첨부하여 예심에 보냈다. 예심정에서도 쉽사리 진행되어 종결을 보게 되었는데 예심 담임판사 추산(秋山) 판사는 그후 대분(大分) 재판소장으로 영전하였다.
범인은 1인뿐
공범, 연루 전무
범인은 이봉창 1인으로 공범 등 연루는 없다.
공판일은 좌익분자를 경계하기위하여 경시청에서 수백명의 경관을 동원하여 대심원 내외를 엄중경계하게 되었다. 재판은 상소를 허하지 않는 규정임으로 일심으로 한정될 터이며 공판은 공개하지 않을 터이라 한다.
◇ 이봉창 내력(來歷)
리봉창은 명치 24년 8월 10일 경성원정 二정목에서 호주 이진규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는데 이진규는 2년전 횡진에서 사망하였다. 11세에 용산 금정으로 이사하였는데 그때까지의 생활은 빈한한 살림살이가 아니었다고 한다. 효창원에 있던 천도교 경영의 문창학교에 입학하여 그 학교를 졸업하고 졸업 후에 일본 과자점에 직공으로 들어가 일하다가 대정 8년 19세 때 만철(만선철도)에 들어가 용산역에서 전철수 견습 노릇을 하다가 동 13년 4월 4일에 병으로 그만두고 그 해 말에 그 형을 따라 대판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상해로 건너가 있었다. (사진은 이봉창의 살던 집)
김구 선생의 이름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던 이봉창 의거 때와는 달리 윤봉길 의사의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 때는 김구 선생의 이름도 함께 등장합니다.
동아일보 1932년 5월 8일자 2면
상해 수류탄 사건 상보
영경(領警)과 헌병대 총동원
조선인 가택 대수색
불조계에 수사본부 두고 활동
김구 등 주요인 탈주
【상해발電通】육군 헌병대급 총사령관 경찰서에서는 29일밤까지 체포한 범인에 대하여 취조한 결과 범인의 계통에 관하여 어떤 확신을 얻은 모양으로 30일 오전 3시경에 수사본부를 불란서 조계에 있는 중광공사 관저에 옮기고 원전경부를 지휘자로 서원급 헌병대 일동을 총동원한 동시에 불란서 공부국 경관 약 50명의 응원을 얻어서 불란서 조계안에 있는 조선○○당 조선공산당 기타 조선인의 집들을 모조리 수색한 결과 용의자로 조선인 12명을 체포하였다. 이들을 먼저 불란서 조계경찰서에 인도하였다가 이튿날 오후 3시경에 그들의 시체를 전부 일본 총사령관 경찰로 옮기어 류치취조하는 중이다. 그러나 김구 등 거두들은 중국가남시(中國街南市)로 어느덧 도주한 모양임으로 계속하여 각 방면으로 협력 수색 중이라 한다.
이봉창, 윤봉길 의거는 가라앉았던 독립운동이 활기를 되찾는 도화선이 되었고, 나라 밖 애국지사들이 속속 임시정부에 모여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