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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 52 : 도산 안창호 선생과 동아일보(3)

Posted by 신이 On 10월 - 19 - 2010

  안창호가 예심에서 유죄로 인정되어 공판에 회부되었다는 소식과 예심에서 밝힌 그의 ‘범죄사실’은 10월 26일자에 자세히 보도되었습니다.






동아일보 1932년 10월 26일자 2면






  ‘안창호 공판 회부/ 산하(山下)재판장 담임/ 공판은 내월 하순경’, ‘「병치(病齒) 전부 완치/ 취조도 순조 진행」/   ◇증촌(增村) 예심판사 담(談)’ (10월 28일자)






  동아일보는 10월 28일, 29일 그리고 11월 1일자 세 차례에 걸쳐 예심결정서 전문을 게재했습니다.


  예심결정서는 안창호의 독립운동 발자취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심결정서(一)


  피고인은 평안남도 대동군(당시 평양군) 초리면 봉익리에서 농업을 해서 서당의 교사를 근(勤)하던 안흥국의 3남으로 생(生)하고 8세부터 수년간 서당교육을 수(受)하고 17세경 경성에 내(來)하여 미인(米人)경영에 계(係)한 기독교 소학교에 입학하고 초등교육을 마친 후 귀향하고 기경(其頃·그즈음) 충군(忠君)애국심을 가지고 경성에 설립된 독립협회에 가맹하여 기(其) 평양지부에 속했었으나 얼마 아니 되어 동 협회의 궤멸(潰滅)한 후는 스스로 평안남도 강서군 동진면 고일리에 점진학교라는 초등학교를 창립하고 자제의 훈도(薰陶)에 몰두하였으나 근(僅) 1년으로서 기(其) 경영을 타(他)에 양(讓)하고 22세경 교육학을 수득(修得)하고 겸하여 기독교를 강구(講究)할 목적으로 처 혜련을 반(伴)하고 도미하여 상항(桑港)에 이르러 미인(米人)의 가정에 고용되어 잡무에 종사하는 여가(餘暇·일이 없어 한가로운 시간) 동지(同地)의 공립소학교에 통학 2년후 생활의 안이 면학의 편의를 도(圖)하여『로스엔젤리스』로 가서 미인(米人)의 가정에 고용되고 한편으로 야학강습소에 통학하여 고학(苦學)을 계속하는 반면 조선인노동자로서 도미(渡米) 이주한 자 미증(彌增·두루 늘어남)하나 대개 교양을 결(缺)한 도배(徒輩)로서 왕왕 추태를 연(演)함과 여(如)한 감이 있어 유지상자(有志相諮)하여 종래의 친목회를 공립협회라 개칭하고 피고인은 선거(選擧)되어 동 협회의 이사가 되고 다시 상항(桑港)에 돌아와 동 협회 주최하에 동포이민의 지도 교화에 노력하고 기(其) 업적 낙관할 만하나 한국정부의 이민정책을 세우고 내외 상(相) 제휴하여 한인의 해외발전책을 강(講)한다는 소리가 공립협회에 높았던 그때 명치 38년 8월22일 일한(日韓) 양국간에 체결된 보호조약에 대해서는 미국재주(米國在住)의 조선인간에 반대론 비등하여 소연(騷然)하게 된 것으로써 명치 39년 초 경(頃) 피고인은 공립협회의 대표로서 한국정부의 이민정책 급(及) 보호조약에 대한 한국내의 실정을 조사하려는 사명을 대(帶)하고 귀국하였으나 안(案)에 상위(相違)되어 당시 한국내에서는 서상(敍上·위에 기술함)의 안건에 관해서는 국시여론(國是輿論)을 볼 만한 것이 없어 조연(躁然·시끄럽고 떠들썩함)한 상황이 됨으로써 피고인은 이 상태를 묵시(묵視)하기 어렵다 하여 각 지방을 순회하여 조선민족의 자립자존을 고조고취(高調鼓吹)하고 경(更)히 그 익년(翌年·다음해) 명치 40년 중 동지 이갑, 유동열, 이동휘, 전덕기, 이동녕, 양기탁 등과 공히 경성에 신민회(新民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스스로 집문원(執門員)인 역원(役員)으로 취임하고 평양에 대성학교를 창설하여 교장대리로 자제의 훈련에 종사하여 조선민족의 실력양성 자립자존을 기(期)하고 획책하고 있던 바 이등(伊藤) 전 총감 암살의 사건이 있어 당국의 취체(取締)가 엄중히 되어 조선내에서는 활동의 여지가 적음을 깨닫고 당시 친일파를 가장하고 정권쟁탈의 음모를 하는 최석하 일파의 종용을 일축하여 행동을 같이 아니함으로 기원(其怨)을 사서 신변에 위험을 감함에 지(至)함으로 명치 42년 춘(春) 경(頃) 조선을 탈출하여 만주에서 농촌을 개척 경영하여 범(範)을 시(示)하고 서서히 조선민족의 자립자존의 정신함양에 공헌하려 하여 북평(北平), 청도(靑島)를 편력하였으나 안주(安住)의 경지(境地)가 없어 동년 9월 초순경 포렴(浦鹽)에 도착하고 처음으로 일한병합의 사실을 지(知)하고 실로 실망낙담하였으나 동지(同地)에서도 드디어 기지(其志)를 신(伸)치 못하고 명치 44년 초 경(頃) 포렴을 출발하고 서비리아(西比利亞)『뉴-욕』을  거쳐서 소득없이『로스앤젤리스』로 돌아가 지내다가 대정 3년중『로스앤젤리스』에서 피고인은 강영소, 홍언, 송종익, 이일 기타와 함께 조선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 타일(他日)의 웅비를 기하려는 취지 하에 만 18세 이상의 재외 조선인 유지를 규합하여 흥사단(興士團)이라는 단체를 조직하고『뉴-욕』『시카코』상항(桑港) 묵서가(墨西加) 등에서 동 단원으로서 지방단우회(團友會)를 편성하고 활약한 후 대정 13년에 지(至)하여 지나(支那) 연해주 서비리아(西比利亞) 재주(在住)의 단원만을 포괄하여 특히 원동부(遠東部)를 신설하고 스스로 동 부의 위원장직에 취임하여 발전에 진탁(盡倬)하였으나 당시 구주전란(歐洲戰亂)도 종말에 근(近)하여 대정 7년(1918년) 1월 18일 미국 대통령『윌슨』에 의하여 제창된 평화강령 14칙 중 소위 민족자결의 원칙은 조선○○열망자들 실로 흥분시켜 재미 조선인은 조선○○의 날이 멀지 않았다 하여 상항(桑港) 소재의 ○○인국민회에서는 위원회를 개최하고 주(主)로서 피고인의 발안(發案)에 의하여 대정 7년 12월경 이승만 정한경을 대표로 선거하고 화성돈(華盛頓)에 파견한 동인(同人) 등의 수(手)에 의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조선○○의 청원서를 송부할 것을 결의하는 등 기(其) 대책을 광분한 바 있었으나 조선 내에서는 대정 8년 3월 1일 소위 조선○○만세소요사건의 발발한 바 있어 내외소연(內外騷然)한 그때 재호(在호)의 조선○○운동자간에 조선내 급(及) 해외각지의 대표를 망라하고 동지(同地)에 ○○운동을 통일할 조직을 결성하고 조선○○의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기획을 갖고 대정 8년 4월중 상해(上海) 불란서 조계(租界) 하비로(霞飛路) 협평리(協平里)에 전서(前敍·앞에 씀)의 목적하에 ○○○○○○정부되는 결사조직을 하였으나 피고인은 선거되어 재미○○국민회 대표로서 대정 8년 5월 25일 래호(來호)하고 추선(推選)되어 동 정부의 내무총장으로 취임한 재직중 ○○정부의 직제를 개정하고 우(又) 조선내외의 조선인과 ○○정부와의 정치적 연락을 획책하여 연통제(聯通制)라는 제도를 창정(創定)하고 기(其) 법규를 편찬하여 ○○운동에 자(資)하기 위하여 일한병합의 원인 기(其) 결과 병(병) 조선○○운동의 상황에 관한 자료를 수집 편찬하려고 사료(史料)편찬위원회를 설치하여 스스로 기(其) 위원장이 되고 혹은 국무총리의 대리를 겸임하고 혹은 전(轉)하여 노동총판(勞동總辦)이 된 외에 미인(米人) 신문기자 “페-포-”를 조선 내에 파견하여 각지 봉기하는 ○○운동의 상황을 비밀히 탐사하여 신문지상에 게재시켜서 실전(實傳)을 모(謀)하고 대정 9년 8월경 ○○정부를 대표해서 북평(北平)에 부(赴)하여 미국의원 동양시찰단원 “포-타-”와 회견하고 조선의 ○○에 대하여 미국의 동정을 애원하는 등 동 정부의 목적달성에 대하여 활약하였으나 당시 동 정부에 내홍(內訌)이 있고 또 재정이 극도로 핍박하여 활동이 여의치 않아 의연(依然) ○○정부에 유(留)하였으나 도저 소기의 목적을 달하기 난(難)함을 깨닫고 대정 10년말 ○○정부의 역원을 사임하여 동 정부와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예심결정서(二)


  그런데 선시(先是)하여 기(旣)히 대정 9년경 ○○정부의 존재에 혐언(慊焉)한 원세훈, 안병찬, 왕삼덕, 신숙, 박은식의 일파는 해외에 있는 조선○○운동을 통일하려는 야망의 하(下)에 각지의 대표를 상해에 초치하고 국민대표회의의 개최를 계획하여 주비(籌備)위원회라는 것을 설치하고 있었으나 기후(其後) 이동휘, 김규식, 남형유, 노백린의 반(反)이승만파는 ○○정부로부터 연몌(連袂·나란히 서서 함께 가거나 옴) 탈퇴하여 주비위원회파에 합류함에 지(至)하고 피고인도 예(豫)히 ○○운동단체의 통일을 기망(冀望·희망)하고 있을 때 기거(其擧)에 찬동하고 대정 11년경 상해 민국로(民國路) 기독교예배당인 침례당에 김동삼, 김이대, 원세훈, 왕삼덕, 피고인 등 각지의 대표 2백여명 참집(參集)하고 조선○○운동을 통제하기 위하여 각지의 ○○운동단체를 통일할 것의 의(議)가 결정되었지마는 다음으로 차(此)와 관련하여 현존의 ○○정부를 여하히 할 것이냐의 안건에 부(付)하여는 창조, 개조, 중립의 제설(諸說) 분규가 있었기 때문에 회의 결렬함에 지(至)하였으나 피고인은 조선민족의 실력양성에 필생의 노력을 경도(傾倒·기울여 속에 있는 것을 다 쏟음)함으로써 점진적으로 숙지(宿志·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온 뜻)의 관철을 기할 방책으로 나아가 소화 3년에 지(至)한 사이 지나(支那)본부로는 북평(北平) 부근의 서산(西山)일대 남경(南京)부근의 하촉(下蜀)일대 급(及) 만주로는 길림성(吉林省)의 송화강(松花江)연안 일대를 물색 답사하여 농촌 개척경영의 후보지역으로 하였으나 마침 병비(兵匪)의 전란에 방해되어 착수를 못한 바이다.


제일(第一), 선시(先是)에 피고인은 대정 13년 중 흥사단의 상황을 시찰하고 겸하여 전권(前卷)의 농촌경영의 소회를 동지에게 피력하여 의견을 고(敲)하고 차(此)의 자금의 조달을 위하여 한번 미국에 도(渡)하고 대정 15년 중 경(更)히 상해에 귀래(歸來)하는 당시 ○○정부는 재정상 극도의 궁핍에 함(陷·빠짐)하고 있음으로써 기(其) 위급을 구원하려 하여 동지 홍진, 여운형, 최창식 등과 상모(相謀·서로 모의함)하고 동년 7월중 상해 불란서조계 기독교 예배당 삼일당(三一堂)에 동지(同地) 재주(在住)의 조선인 백여명을 초치하고 피고인은 ○○정부 경제후원회 창설의 취지를 연술(演述)하여 동 회의 조직을 제안하고 만장의 찬동을 득한 후 진희창을 회장으로 추(推)하고 간사 급(及) 서기를 정하여 기구를 정(整)한 후 동 회를 조직하고 즉좌(卽座)에서 회원으로부터 의연금 합계 금 2백여원을 갹출케 하여 ○○정부의 재무위원에 교부함으로써 ○○정부의 목적 수행을 위한 행위를 했다.











  예심결정서(三)


  제이(第二), ○○민국○○정부는 드디어 침쇠(沈衰)의 극에 달하여 석일(昔日)의 면영(面影)이 없고 정부원 중에도 동 정부의 배경이 되어 조선○○운동을 사(事)로 하는 신단체의 조직을 획책하는 자 있고 더욱이 조선인 공산주의자로서 상해에 망명해온 자의 종(踵·걸음)을 접한 상황으로 기(其) 세력 적지 아니하여 소화 4년 동(冬) 경(頃) 상해 불란서조계 마랑로(馬浪路) 보경리(普慶里) 4호인 ○○민국○○정부의 사무소에서 민족주의자인 이동녕, 이시영, 김구, 조소앙, 김철, 조완구, 이유필, 최석순, 김붕준, 윤기섭, 옥성빈, 정태희, 안공근, 김갑, 박찬익 급(及) 피고인 등 집합 협의하고 조선의 ○○을 완성하여 민주공화국을 만들 것을 목적한 결사○○○○당을 조직하고 조소앙, 조완구 급(及) 피고인은 선발되어 당헌 기초위원이 되고 기후(其後) 1개월로서 전기(前記) ○○정부의 사무소에 전기 동지 재회하고 당헌 기초위원의 기안(起案)에 계(係)한 “일본 제국주의○○세력을 ○○하고 국토국헌(國土國憲)을 완전히 ○○하여 정치경제의 균등을 기본으로 하는 ○○○○○을 건설하고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이 평등한 지위에 입각하여 공존공영의 세계의 실현에 노력할 것을 목적함 一, 당내에 이사회 감사회인 기관을 설치하고 이사회에는 이사장 총무부, 재무부조사부,연구부선전부를 치(置)하고 감사회에는 감사원 3명을 치(置)함 一, 당원은 조선인으로서 본 당의 목적에 찬성한 자는 하인(何人)임을 불문하고 가입할 수 있음 一, 이사회에는 통상회, 임시회가 있고 통상회는 매월 제이(第二) 토요일에 개최하고 임시회 급(及) 감사회는 수시 개최할 것” 지(旨)의 초안을 가결하여 당헌을 정비하고 피고인은 추대되어 이사에 취임하고 소화 6년 9월경까지 그 지위에 유(留)하여 활동하다 제삼(第三), 소화 6년 7월중 중지나(中支那) 만주에서 소위 만보산사건이 발발하고 따라서 조선내 각지에는 소위 기(其) 보복사건 빈발하여 선지인(鮮支人)간의 감정 악화디는 동시 양자간의 감정을 융화하고 병(倂)하여 지나인(支那人)의 항일기분을 선(煽)케 하려고 재호(在호)교민단 주최 하에 동지(同地) 조선인단체의 대표를 망라하고 조선인 각 단체 연합회를 조직하기에 이르고 피고인은 흥사단 대표로서 하단(厦團)연합회에 출석하여 기(其) 방법을 강구하고 경(更)히 동년 9월중 만주에서 발발한 일지(日支)충돌사건을 계기로 해서 혹은 전기(前記) 연합회 주최 하에 개최된 상해 조선인대회 급(及) 재호(在호) 지나인(支那人)신문기자 초대회에서 피고인은 항일 선전 연설을 하고 혹은 스스로 항일사상의 고취를 내용으로 한 격문을 작성하여 지나(支那)국민당본부 급(及) 각 지부 병(竝) 유력한 사회단체에 송부하여 조선○○의 소지(素志)에 의하여 책모(策謀)에 노력할 때 소화 6년 11월 피고인 동서(同書) 주거에서 예(豫)히 동년 춘(春)경(頃)부터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제국의 ○○에서 ○○시킬 것을 목적하고 민족주의자를 기(其) 산하에 규합할 만한 통일있는 ○○○당의 조직을 제휴 획책하고 있던 권국빈의 방(訪)을 받아 서로 전기 결사의 조직에 대하여 협의를 진(進)하고 경(更)히 당시 동소(同所)에 동지 이동녕, 최동오, 조성환을 초치하여 피고인으로부터 우(右) 결사조직에 관한 전말을 구진(具陳·모든 것을 갖추어 자세히 진술함)하여 찬동을 득한 후 동 석상(席上) 권국빈의 제안에 좇아 해(該) 결사의 명칭을 ○○전선통일동맹을 하려고 협의 결정하고 이래(爾來) 피고인은 권국빈과 누차 회합하여 ○○전선통일동맹 상임위원회의 설치 등을 협정하고 우(又) 스스로 ○○전선통일동맹 간장(簡章)인 규약을 기안한 등 결사의 조직에 노력하였으나 권국빈 담당에 관한 결사조직에 요(要)할 자금의 조달이 불여의하여 임염(荏苒·차츰차츰 세월이 지나거나 일이 되어 감)H시를 대과(待過)하고 수(遂)히 결사조직의 목적을 수(遂)함에 지(至)치 못하게 된 것이다.


  이상 제일(第一)의 결사조직 급(及) 제이(第二)의 결사조직의 미수(未遂)는 범의(犯意)계속에 관한 것이다. 이상의 소위(所爲)중 제일(第一)의 ○○민국○○정부에 금원(金員)을 공여한 행위는 기(其) 행위 당시의 법령에 의하면 구(舊)치안유지법 제5조에 해당하고 현행 치안유지법에 의하면 동법 제1조 제1항 후단(後段)에 해당한 바 범죄후의 법률에 의하여 형(刑)의 변경 있는 때임으로써 형법 제6조 제10조에 의하여 기(其) 형(刑)을 비조(比照)함에 범죄시 법은 현행법에 비하여 기(其) 형(刑)이 경(輕)함으로 범죄시 법인 구(舊)치안유지법 제5조 소정의 형(刑)에 종(從)하여 소단(所斷)할 것. 제이(第二)의 결사조직의 소위(所爲)는 현행 치안유지법 제1조 제1항 전단(前段)에, 제삼(第三)의 결사조직 미수의 소위(所爲)는 현행 치안유지법 제1조 제1항 전단 제3항에 각각 해당한 바 이상 이죄(二罪)는 연속범 됨으로써 형법 제55조를 적용할 것. 차(此)와 제일(第一)의 우(右) 소위와는 병합죄 됨으로써 형법 제45조 제47조 제10조를 적용 처단할 범죄의 혐의 있음으로써 형상소송법 제312조에 의하여 공판에 부(付)할 결정을 할 것이라 함.


  우(右) 주문과 여(如)히 결정함.






  ‘안창호 공판은/ 내월 중순 개정’ (11월 25일자 2면)




  ‘사상사건 등/ 내월 공판기일/ 12월중 공판날자 결정/ 안창호 공판은 19일’ (11월 26일자 2면)




  ‘「나에게 변호는/ 절대 불필요」/ ◇도산 안창호 근황’ (12월 9일자 2면)






  12월 20일자(석간)는 겨울비가 내린 19일에 개정된 공판 소식을 사진과 함께 크게 다뤘습니다.






동아일보 1932년 12월 20일자(석간) 2면






  12월 20일자 조간은 석간에 채 보도하지 못한 속보를 전했습니다.






동아일보 1932년 12월 20일자(조간) 2면






  ‘도산 안창호/ 언도(言渡)는 명일(明日)’ (12월 26일자 2면)






  도산은 26일 재판에서 구형(求刑)대로 4년형을 언도(言渡)받았습니다.






동아일보 1932년 12월 27일자 2면






  ‘도산 안창호/ 공소권(控訴權) 포기/ 4년 징역을 복역하겠다고/『30년 운동이 징역4년』’ (12월 28일자 2면)






  해를 넘겨 1933년 4월 11일자 2면에는 ‘안창호 최근 소식’이라며 대전 감옥에서 친지에게 보낸 편지를 전문 소개했습니다.











  “내가 거월(去月) 28일에 이 대전형무소로 이전하였습니다. 당일 상오 반일간에 온화한 춘풍을 벗하여 근 30년간 그립던 남조선에 여행하는 동안에 쾌감 비감이 병발(竝發)하였습니다. 이곳에 와본즉 지방이 한전한데 처소가 정아(靜雅)하고 의복과 음식이 질소(質素)합니다. 또는―도덕적 감화의 공기가 있는 듯하오니 처음으로 당도한 나로 하여금 수도원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무엇으로든지 경성에 비하여 많이 나으니 나를 위하여 안심하소서. 나는 그간 식욕은 평일보다 여러 배가 증가하였으나 아직 소화력이 불충분하고 등에 신경통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체로 비하여 보면 건강도 전일보다 낫습니다. 조선상세지도 한권 사 보내시오. 금강산유기 백두산유기도 구송하소서. 4월2일 도산”






  ‘최근의 안도산/ 치통으로 방금 신음중’ (5월 25일자 2면)




  ‘은사감형(恩赦減刑)의 소식/ 전 조선 26형무소에서/ 대전 안창호 1년 감형’ (1934년 2월 13일자 2면)






  당초 4년형에서 1년이 감형된 안창호는 드디어 1935년 2월 10일 형기를 마치고 출옥했습니다.






동아일보 1935년 2월 11일자 2면






  출옥한 안창호는 바로 서울, 평양을 거쳐 고향인 강서군(江西郡)에 도착했습니다.






동아일보 1935년 2월 12일자 2면






동아일보 1935년 2월 13일자 2면






동아일보 1935년 2월 17일자 2면






  27년만의 귀향 후 안창호는 용강(龍岡)온천에서 정양(靜養)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안도산 용강에/ 상경 예정일자 변경’ (2월 18일자 2면)




  ‘안도산 경성에/ 당분간 경성에 체류하리라고/ 11일 오후 경성역 착(着)’ (3월 10일자 2면)






  3월 12일자 2면에는 ‘도산 안창호 작일 입경’ 사진을 크게 실었습니다.











  이후 일제의 감시 아래 국내 각지를 순회하며 강연 등을 하던 도산의 소식은 11월 18일자에야 전해집니다.


  조만식(曺晩植) 선생 등의 발기로 11월 30일 평양서 환영회를 연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아일보 11월 18일자 2면






  후속 보도는 없었지만 이 환영회는 총독부의 저지로 열리지 못했습니다.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수난의 민족을 위하여-도산 안창호의 생애’, 256쪽)




  동아일보 1936년 1월 1일자 2면은 ‘사담(私談)의 형식으로’ 도산이 밝힌 ‘조선의 사회교육’에 대한 의견을 게재했습니다.











  조선학회의 설립과


  농촌, 도제문고(徒弟文庫) 발행




  나로서 지금 어떠한 의견을 발표하기는 매우 곤란한 일이다. 첫째는 나의 발표한 의견이 그대로 실현될 가능성이 없고 따라서 나의 의견이 과연 조선현실에 적합한가 의문이다. 둘째로는 귀사(貴社)의 설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대답하여야 할 터인바 아직도 요양중에 있는 몸이라 충분히 생각할 머리를 갖지 못하였다. ―이렇게 말하기를 주저하시는 도산 안창호씨는 사담의 형식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일상 생각하기를 조선문화의 원동력이 될 최고기관을 하나 세웠으면 한다.


  (一) 그 기관 이름은 조선학원 혹은 조선학회라 하고 각계를 망라하여 구성할 것인데 특히 현재 교육계에 있는 분들이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 찬동하는 이라면 누구라도 참가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二) 그래서 귀사의 설문한 바의 농촌문고 또는 도제문고를 싼 값으로 발행하여 널리 읽히게 할 것이고 과거의 우리 찬연한 모든 문화를 연구 조사하여 책으로 만들어내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문화를 수립하는데 원동력이 되게 할 것이다. 과학은 물론, 문학, 미술, 음악 영화는 물론이오,『조선어사전』편찬까지도 이 기관에서 맡아 할 것이고 또한 발명에 뜻을 두었으나 돈이 없어 성공하지 못하는 청년에게는 보조를 하여 진흥시킬 것이다.


  (三) 이러한 큰 문화사업을 일으키자면 자금이 있어야 할 것인데 유지(有志)가 있어 이러한 문화사업에 투자를 한다면 첫째 중앙지대인 경성에 회관을 하나 건축하여 조선사람의 정신이 이를 목표로 하여 나아가게 하였으면 한다.


  이것은 내가 늘 추상적으로 생각하였을 뿐이오 구체적으로는 아직 생각하지 안하였다.






  도산은 ‘동우회 사건’으로 1937년 6월 평양에서 체포돼 다시 옥고를 치르고 있었습니다만 동아일보는 총독부의 압제로 전혀 도산의 소식을 전할 수 없었습니다.




  도산이 옥중에서 병을 얻어 경성제대 병원에 보석입원해 있을 때 인촌은 남모르게 병원비를 지원하였습니다. (이정희, ‘도산여록’, 흥사단출판부, 1986년, 268~269쪽)




  동아일보가 위 글 이후 2년2개월여 뒤 마지막으로 전한 것은 도산의 서거 소식이었습니다.






동아일보 1938년 3월 10일자 2면  






  일제는 헌병과 경찰을 풀어 문상과 장례를 철저하게 통제했고 망우리 묘지에 묘비조차 세우지 못하게 했습니다.






동아일보 1938년 3월 12일자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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