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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 51 : 도산 안창호 선생과 동아일보(2)

Posted by 신이 On 10월 - 19 - 2010

  동아일보 1926년 10월 13일자 3면에는 ‘내외명사의 가정’이란 시리즈 두 번째로 도산 안창호의 가정을 소개하는 기사가 크게 실렸습니다.











  ‘이십이 될락 말락 한 꽃 같은 나이에’ 남편 도산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 뒤 독립운동을 위해 ‘북으로 혹은 남으로’ 떠도는 도산에게 한 마디 원망도 없이 네 아이를 키우며 신산(辛酸)한 삶을 이어온 리씨부인을 조명한 것이었습니다.






  네 아희를 거느린 리씨부인


  구심참담의 생활  이십여년




  지금으로부터 이십삼년 전에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씨가 북으로 북으로 망명(亡命)의 길을 떠날 때에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길인 줄 짐작한 리씨부인은 이십이 될락 말락 한 꽃 같은 나이로 부모형제 일가친척 정들은 고국을 내어버리고 분연히 남편의 뒤를 따랐던 것입니다.


  ◇


  나라 일을 근심하기에 피곤한 안창호씨는 안해를 돌아볼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언어와 풍습이 다른 만리타향 미국(米國) 로산젤리스에 리씨부인을 머물게 한 후 혹은 북으로 혹은 남으로 혹은 서로 동지를 찾기에 분망한 남편은 일년에 한번도 돌아오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그러나 이 열정적 국사(熱情的 國士)를 남편으로서 특별히 존경하는 리씨부인은 십년이 하루같이 하등의 불평이 없었을 뿐 아니라 “집의 일은 걱정 말고 동포를 위하여 힘쓰시오”하는 진실로 거룩한 말로써 남편에게 안심과 힘을 주었다고 합니다.


  ◇


  리씨부인이 지금은 사십이세 벌써 고국을 떠난 지 이십여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에 아들형제 딸형제 사남매를 두었으니 이 사남매를 기르기에 리씨부인의 근고가 얼마나 큰 것을 보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복 아니 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리씨부인은 혹은 서양 사람의 집에 가서 빨래도 해주고 집안도 치어주어 들어오는 몇푼 수입으로 남편 없는 살림을 해나가면서 어린 아희를 길러나갔습니다.


  ◇


  어린 아희가 병이 나든지 리씨부인이 병이 난다든지 하여 일은 할 수 없고 일 아니하고는 당장 내일 살림이 어려울 때에 남편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건마는 당장 “오시오”하고 전보도 치고 싶지마는 “남편은 나라에 바친 몸이다”하고 다시 굳세게 결심을 하고 마음을 돌렸다고 합니다. 남편의 여러 동지들은 물질로 혹은 정신으로 이 가족을 도왔으나 동지라야 모두 적수공권이니 물질적으로 넉넉히 도울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


  기미년 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안창호씨는 가족을 미국에 두고 상해로 왔습니다. 이래 일곱 해 동안을 일년에 편지가 두어 장 있거나 말거나 한 상태로 리씨부인은 남편의 성공과 건강을 빌면서 아희들을 데리고 적적한 생활을 해내려 왔습니다. 이때에는 벌써 열서너 살 된 맏아들로부터 젖먹이까지 사남매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네 아희를 손수 벌어 먹이고 입혀 기르기에 리씨부인의 노력이 얼마나 컸던 것을 우리는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


  일곱 해만에 안창호씨는 공무(公務)를 가지고 미국에 건너갔을 때에 가족을 찾았으니 이때에는 어린 아희로 작별하였던 맏아들이 스물한 살이 되어 어머니와 동생을 벌어 먹이는 장정이었습니다. 한창 학교 다닐 나이에 학교도 못 다니고 어떤 큰 상점에 가서 “엘레베타”를 부리고 한달에 구십 달러를 받아 어머니를 봉양하고 동생들을 학교에 보낸다고 합니다. 동생들에게 “나는 학교에 못 다니지마는 나 대신으로 너희들이나 공부 잘해서 큰 사람이 되라”하고 이른다고 합니다. 이것을 아버지가 볼 때에 아무리 철석장부(鐵石丈夫)이기로 그 마음이 어떠하였으리오!






  안창호씨는 칠년만에 가족을 만나 낯도 익히기 전에 다시 상해로 떠났습니다.


  사진은 정면좌편이 안창호씨 후열 좌가 맏아들 우가 둘째아들 전면 중앙이 리씨부인  전면 좌우가 두 따님






  1927년 초 도산은 길림(吉林)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펼쳤고 강연회 도중 급거 체포되었습니다.






동아일보 1927년 1월 28일자 2면






동아일보 1927년 2월 23일자 2면






  이후 동아일보가 전한 도산의 소식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상해 3·1 기념/ 조선인 3백명이 모여/ ◇안창호씨 사회로’ (1928년 3월 13일자 2면)




  ‘도산 안창호씨/ 자친(慈親) 작일 별세’ (1930년 3월 1일자 2면)




  ‘상해 학우회/ 강연회 개최’ (1930년 11월 13일자 2면)






동아일보 1930년 12월 31일자 2면






  1929년 12월부터 1931년 8월까지 세계일주 여행을 한 인촌 김성수 선생은 여행 중 상해에 들러 도산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했다고 합니다. (구익균<具益均>, ‘새 역사의 여명에 서서’, 일월서각, 1994년, 127쪽 ·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 동아일보사, 1985년, 236~237쪽)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 의사가 상해에서 폭탄투척 의거를 일으킨 그날 오후 도산은 체포되었습니다.




  일본은 즉각 이 사건의 주모자로 상해 교민단장(僑民團長) 이유필(李裕弼)을 지목했고 마침 불란서 조계(租界)에 있던 그의 집을 방문한 도산을 이유필로 착각한 불란서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일본 경찰에 인도되었던 것입니다.




  안창호의 체포 소식을 동아일보는 5월 1일자 2면에 상세히 보도했습니다.






동아일보 1932년 5월 1일자 2면






  5월 8일자에는 ‘상해 수류탄사건 상보(詳報)’라는 제목 아래 다시 안창호의 검거 소식과 안창호의 경력을 밝히고 있습니다.






동아일보 1932년 5월 8일자 2면






  5월 20일자에는 ‘체포 이래 최초 소식’이라며 “미국 선교사 부인 두 사람이 안창호를 면회했는데 그는 무사하다고 대답했다.”고 전했습니다.






동아일보 5월 20일자 2면






  이후 “체포된 안창호 등은 조선으로 압송될 듯하다고 한다.”(5월 25일자 2면), ‘상해 법계(法界)에서 체포된/ 안창호 조선 호송/ 금일 경안환(慶安丸)으로 출범’(6월 3일자), ‘안창호 등 3명/ 금조(今朝)에 출발/ 군경 엄계리(嚴戒裏)에’(6월 4일자) 등으로 안창호의 국내 호송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는 안창호가 인천에 도착한 소식을 거의 한 면(面)에 걸쳐 보도했습니다.






동아일보 1932년 6월 8일자 2면






  다음날인 6월 9일자에는 ‘안창호 호송 광경’이란 사진 특집과 함께 안창호의 일대기(一代記)를 실었습니다.











  내외풍상(內外風霜) 40여년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내력(來歷)


  ◇변발소년(변髮少年)으로 정치에 투신◇


  각 방면 활동의 개략(槪略)




  도산은 본시 강서군 동진면 고일리(江西郡 東津面 古逸里) 태생이다. 16세까지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그해 즉 을미년(乙未年) 음력 8월에 멧산자 봇짐을 진 떠꺼머리 총각의 자태로 서울로 올라와 고『언더우드』목사가 세운 서당(지금 경신학교 전신)에 들어가 공부를 하였다. 때는 일청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종국되고 조선에는 박영효(朴泳孝)씨 등의 정부개혁이 실패되어 다시 일본에 망명하고 민비(閔妃)가 피시(*임금이 신하에게 죽임을 당함)되어 정국이 바야흐로 분란할 때이었다. 그때 그는 오래 학창에 머물러 있을 수 없음을 깨닫고 그 다음다음해인 정유(丁酉)에 자작성관(自作成冠)하고 평양에 내려가 지금 종로 공보터 안에 있는 쾌재정(快哉亭)에서 계천기원축하회(繼天紀元祝賀會)에서 연설을 한 것을 비롯하여 그의 참모격인 고 필대은(畢大殷)과 더불어 각처에 유세하고 또 그 고향인 강서에 교회와 점진(漸進)학교를 세웠다. 이 점진학교는 그가 세운 최초의 학교로 또 지금까지 현존한 유일한 학교이다.


  그가 유세하며 순회한 족적은 전 조선에 남지 않은 곳이 없는데 실상 구형태의 생활에 묻혀있는 조선사회에 교육, 산업, 정치적으로 신문명을 보급시킨 공로가 매우 컸었다.


  평양 부근 마산(馬山)의 자기회사와 평양 태극(太極)서관 등은 그가 설립한 산업장려의 실천기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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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금 31년 전 그가 23세 때 경성에서 지금 부인과 혼인하여 가지고 유학의 목적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 건너간 후 얼마 안 되어 개발회사(開發會社) 등에 미국으로 건너가는 사람이 한둘씩 늘었으나 민족적 통제기관이 없었음으로 건너오는 동포들이 타락의 구렁으로 빠지기가 쉬웠다. 이에 도산은 학업을 중지하고 다해야 50여명 밖에 되지 않는 동포를 모아 친목회(親睦會)의 산하(傘下)에 규합하여 생활향상에 노력하였으며 특별히 리강(李剛)씨와 협력하여 개발회사로부터 도미하는 동포의 지도와 직업소개에 몰두한 결과 미국인의 조선인에 대한 신용이 두터워졌다. 그 후『샌프랑씨스코』에 친목회를 개혁하여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조직하고 회관을 신축하며 주간으로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행하며 북미 각지에 지방회(地方會)를 창립하는 등 이로써 북미와 하와이 재주 조선인은 그 정치적 사회적 생활의 기초가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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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미동포의 생활이 안정되어 후고(*뒷날에 대한 근심)의 염려가 없이 되자 마침 로아전쟁이 막 끝나 고국의 시국이 불안하매 병오(丙午)년에 평양에 총총한 걸음으로 귀국하였다.


  평양에서 고 리종호(李鍾浩)씨 등의 후원을 얻어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세우고 6백여명 총준(*슬기롭고 영리하며 풍채가 빼어난 사람)을 양성하였으며 다시 자리가 잡힐 새가 없이 동구서치로 유세(遊說)를 하였다. 평양에선 그 열변에 감동한 기생들의 회개가 많았었으며 감화 받은 민중이 수없이 많아 신문화가 크게 보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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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성학교를 세우는 한편으로 고 리갑(李甲)씨 등과 더불어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서울에 세웠고 노백린, 리동휘, 리갑, 류동열, 양기탁, 리승훈, 윤치호, 안태국, 김동원, 리덕환(盧伯麟, 李東輝, 李甲, 柳東悅, 梁起鐸, 李昇薰, 尹致昊, 安泰國, 金東元, 李德煥)씨 등 여러 동지와 악수하여 여러 사업을 위하여 매진하였다.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표면단체로 청년학우회를 세웠다.




  그러다가 합방이 가까워지매 탈주하고 남은 동지들과 더불어 용산 일본헌병대에 구금되어 있다가 합방 한달 전인 황해도 구미포(九味浦)로 나아가 목선을 얻어타고 청도(靑島)로 해서 로령 해삼위(海參威)로 건너갔는데 그가 용산 헌병대에서 석방될 때 사내(寺內)통감은 안창호 내각을 조직케 할 의향을 가지고 고 정운복, 최석하(鄭雲復, 崔錫夏) 등이 알선하였으나 도산은 합방의 책임을 질 수가 없다고 고사하였다는 정계비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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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삼위에선 딴 길로 탈출한 리갑, 리종호씨 등과 장래를 협의하고 리갑, 리종호씨는 로령에 남고 도산은 서백리 철도로 독일 등을 거쳐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자기가 수년전에 부식(*힘이나 영향을 미치어 사상이나 세력 따위를 뿌리박게 함)한 사업을 힘쓰며 한편으론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하고 기미년(己未年) 5월에 상해로 건너와 지금까지 중국 각지와 미국으로 내왕하였었다.






  이후 동아일보는 경찰 취조에서 검사국 송국(送局), 예심(豫審)에 이르기까지 안창호의 소식을 낱낱이 전했습니다.






  ‘거금(踞金)23년전/ 조선 탈출의 경과/ ◇호한한 취조의 첫 머리◇ / 안창호 취조 제1일’, ‘취조 속행(速行)해도/ 3주일 이상/ 관계사항 복잡 다단으로/ 근 30년간 사적(史的)신문’, ‘서적 탐독’ (6월 10일자 2면)




  ‘해외정보 열람/ 서론적(序論的) 취조/ 본격적 취조 2,3일 후에/ 안창호 취조 제3일’ (6월 11일자 2면)




  ‘본격적 취조는/ 아직도 망연(茫然)/ 약을 지어서 다시 차입/ 안창호 취조 제4일’ (6월 12일자 2면)




  ‘안창호 취조/ 반부(半部)는 진행/ 의외로 신속하게 진행/ 국외계(國外係) 주임도 협의’ (6월 14일자 2면)




  ‘안창호 취조/ 작일(昨日)로 단락/ 같이 호송된 두 청년 취조 착수/ 21일에 송국 예정’ (6월 19일자 2면)




  ‘안창호 송국은/ 금월 말일경/ 가족 면회코 부탁하기를/ 변호와 차입 말라고’ (6월 21일자 2면)




  ‘안창호 사건/ 15일 송국/ 사실 취조는 벌써 끝났다/ 산적한 서류 등 정리’ (7월 7일자 2면)




  ‘의사가 출장/ 유치장서 치료/ 함석태 의사가 입치(入齒)에 전력/ 안창호의 최근 소식’ (7월 12일자 2면)




  ‘명일(明日) 조조(早朝)에 안창호 송국/ ◇상해서 잡혀온 이후로/ 경찰 취조 근(近) 40일’ (7월 15일자 2면)






  안창호의 송국 소식은 7월 16일자에 크게 보도했습니다.






동아일보 1932년 7월 16일자 2면






  ‘검사가 출장/ 안창호 취조/ 사상검사가 형무소에 가서/ 기소 여부는 25일에’ (7월 20일자 2면)




  ‘치안법 위반으로/ 안창호 예심 회부/ ◇제1예심계에서 심리’ (7월 26일자 2면)




  ‘안창호 사건/ 증촌(增村) 판사 담임/ 담임 판사가 변경이 되어/ ◇불일간(不日間) 취조 개시’ (7월 28일자 2면)




  ‘예심의 안창호/ 감옥에서 신음/【신경통과 소화불량 등】/ 노구로 염려되는 경과’ (7월 31일자 2면)




  ‘안창호 보석원(保釋願)/ 필경엔 불허’ (8월 9일자 2면)






  8월 31일자에는 ‘지친(知親)에게 보낸 옥중 소식’이라며 안창호의 편지를 원문대로 실었습니다.






동아일보 1932년 8월 31일자 2면






  “내가 구금된지 4개월에 이만큼 건강이 보전되는 것을 다행으로 압니다. 소화불량과 설사는 아직 완차(完差)하지 아니하나 치(齒)도 점점 아픈 것이 감하는 형편이오니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음식에 대하여는 잘 받아먹었습니다마는 50전 가액(價額)의 것은 불가하오니 금후로는 20전가(價)의 음식을 차입케 하소서. 우유는 내가 이곳에 직접 사서 먹습니다. 윤댁(尹宅) 음식이 다 깨끗하고 좋습니다. 이달 그믐날까지는 저녁에도 면보(*빵)를 먹게 하여 주소서.”






  ‘안창호 예심/ 불원간 종결/ 예심 취조는 대개 마쳤다/ 17일로 취조 일단락’ (9월 18일자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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