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D-story 50 : 도산 안창호 선생과 동아일보(1)

Posted by 신이 On 10월 - 19 - 2010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1878~1938) 선생은 동아일보 1925년 1월 23일자 1면을 통해  국내 동포들에게 메시지를 전합니다.




  ‘국내 동포에 드림 – 동아일보를 통하여’란 제목으로 연재된 이 글에서 도산은




  (一) 비관적인가, 낙관적인가 묻노니 여러분은 우리 전도(前途) 희망에 대하여 비관을 품으셨습니까, 낙관을 품으셨습니까.


  (二) 우리 민족 사회에 대하여 불평시(不平視) 하는가, 측은시(惻隱視) 하는가 묻노니 여러분은 우리 사회 현상에 대하여 불평시합니까, 측은시합니까.


  (三) 주인인가, 여인(旅人)인가 묻노니 여러분이시여 오늘 조선 사회에 주인 되는 이가 얼마나 됩니까 고 물으며




  비관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고, 주인 된 마음으로 옳은 일을 행할 것을 호소합니다.






  “얼마 전 고국으로부터 온 어떤 자매의 편지를 읽다가 ‘선생님 왜 더디 돌아옵니까. 고국의 산천초목까지도 당신의 빨리 돌아옴을 기다립니다’는 한 구절에 비상(非常)한 느낌이 격발(激發)돼 고(告)한다”는 이 글은 ‘민족적 경륜’ 파문으로 1924년 4월 동아일보를 떠난 춘원 이광수가 비밀리에 중국 북경에서 도산을 만나 구술 받아 동아일보에 전한 것입니다.




  도산은 동아일보를 ‘우리의 공공적(公共的) 기관’이라며 ‘전달될 만한 한도 안에 말씀으로 몇 가지를 들어 뭇 고(告)한다’고 했으나 일제의 게재금지 조치로 1월 26일자 4회분 전문이 깎인 채 나가며 중단됐습니다.






1925년 1월 23~26일자 1면







  국내동포에게 드림(一)


  동아일보를 통하여




  고국에 계신 부로(父老)와 형제자매들이여, 나는 자모(慈母)를 떠난 어린 아해(兒孩)가 그 자모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고국을 그리워합니다. 얼마 전에 고국으로부터 온 어떤 자매의 편지를 읽다가 “선생님 왜 더디 돌아옵니까. 고국의 산천초목까지도 당신의 빨리 돌아옴을 기다립니다” 한 구절을 읽을 때에도 비상(非常)한 느낌이 격발(激發)되었습니다. 더욱이 이때는 여러분 부로와 형제자매들이 비애와 고통을 받는 때이라.




  고국을 향하여 일어나는 생각을 스스로 억제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의 하시는 일을 직접으로 보고 여러분의 하시는 말씀을 직접으로 듣고자 하오며 또 나의 품은 뜻을 여러분께 직접으로 고(告)할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일찍 눈물로써 고국을 하직하고 떠나왔거니와 다시 웃음 속에서 고국강산을 대할 기회가 오기 전에는 결코 돌아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나는 여러분께 대하여 간접으로라도 고통 중에 슬퍼하시는 것을 위로하는 말씀과 그와 같은 간난(艱難) 중에서도 “선한 일”을 지어가심에 대하여 치사(致謝)하는 말씀도 드리고자 하며 또는 우리의 장래를 위하여 뭇 기도하고 고하기도 하고 싶으나 기회가 없었고 마침 우리의 공공적(公共的) 기관인 동아일보가 출현된 뒤에 그리로서 여러분께 말씀을 전할 뜻이 많았으나 내 마음에 있는 뜻을 써 보내더라도 여러분께 전달되지 못할 염려가 있음으로 여지껏 아무 말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에는 하고 싶은 뜻을 참지 못하여 전달될 만한 한도 안에 말씀으로 몇 가지를 들어 뭇 고합니다.




  (一) 비관적인가 낙관적인가 묻노니 여러분은 우리 전도(前途) 희망에 대하여 비관을 품으셨습니까 낙관을 품으셨습니까. 여러분이 만일 비관을 품으셨으면 무슨 때문이며 또한 낙관을 품었으면 무슨 때문입니까. 시세(時勢)와 경우(境遇)를 표진(標進)함 입니까. 나는 생각하기를 성공과 실패가 먼저 목적 여하에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세운 목적이 그른 것이면 언제든지 실패할 것이오 우리의 세운 목적이 옳은 것이면 언제든지 성공할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의 세운 목적이 옳은 줄로 확실히 믿으면 조금도 비관은 없을 것이오 낙관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역사를 의지하여 살피면 그른 목적을 세운 자가 일시일시 잠시적 성공은 있으나 결국은 실패하고야 말고 이와 반대로 옳은 목적을 세운 자가 일시일시로 잠시적 실패는 있으나 결국은 성공하고야 맙니다. 그러나 옳은 목적을 세운 사람이 실패하였다면 그 실패한 큰 원인이 자기의 세운 목적을 향하고 나가다가 어떠한 장애와 곤란이 생길 때에 그 목적에 대한 낙관이 없고 비관을 가진 것에 있는 것이외다. 목적에 대한 비관이라 함은 그 세운 목적을 무너졌다 함이외다. 자기가 세운 옳은 목적에 대하여 일시일시로 어떠한 장애와 실패가 오더라도 조금도 그 목적의 성공을 의심치 않고 낙관적으로 끝까지 붙들고 나아가는 자는 확실히 성공합니다. 이것은 인류의 역사를 바로 보는 자는 누구든지 다 알만한 것이외다.






  국내동포에게 드림(二)


  동아일보를 통하여




  그런데 이에 대하여 여러분께 고할 말씀은 옳은 목적을 성공하려면 간단없는 옳은 일을 하여야 되고 옳은 일을 하려면 옳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임을 깊이 생각하자 함이외다. 돌아보면 우리가 왜 이 지경에 처하였는가. 우리가 마땅히 행할 일을 행치 아니한 결과로 원치 않는 이 지경에 처하였습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우리는 옳은 목적을 세웠거니 하고 그 목적을 이룸에 합당한 옳은 일을 지성으로 지어나가지 않으면 그 목적을 세웠다 하는 것이 실지가 아니오 허위로 세운 것이기 때문에 실패할 것입니다. 옳은 일을 지성으로 지어나가는 사람은 곧 옳은 사람이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를 스스로 경계하고 여러분 형제자매에게 간절히 원하는 바는 옛날과 같이 옳은 일을 짓지 못할 만한 옳지 못한 사람의 지위에서 떠나서 옳은 일을 지을 만한 옳은 사람의 자격을 가지기에 먼저 노력할 것입니다. 지금에 우리가 우리의 희망점(點)을 향하고 나아가도 당시에 시세(時勢)와 경우(境遇)가 매우 곤란하다고 할 만 합니다마는 밝히 살펴보면 우리 앞에 있는 시세와 경우는 그리 곤란한 것도 아니외다. 그러나 나는 이 시세와 경우를 큰 문제로 삼지 않고 다만 우리 무리가 일체 분발하여 의로운 자의 자격으로 의로운 목적을 굳게 세우고 의로운 일을 꾸준히 지어나가면 성공이 있을 줄 확실히 믿는 때문에 비관은 없고 낙관뿐입니다. 우리 동포 중에 열사람 스무 사람이라도 진정한 의로운 자의 정신으로 목적을 향하고 나아가면 장래 천 사람, 만 사람이 같은 정신으로 같이 나아가 질 것을 믿습니다.




  (二) 우리 민족 사회에 대하여 불평시(不平視)하는가 측은시(惻隱視)하는가 묻노니 여러분은 우리 사회 현상에 대하여 불평시합니까 측은시합니까. 이것이 한번 물어볼만한 하고 생각할 만한 문제입니다. 내가 살피기까지는 우리 사람들은 각각 우리 사회에 대하여 불평시하는 도수(度數)가 날로 높아갑니다. 이것이 우리의 큰 위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조선사회 현상은 누구나 불평히 볼 만한 것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사람 중에 중학 이상 정도 되는 급(級)에 있는 이들은 불평시하는 맘이 더욱 많습니다. 지식 정도가 높아감으로 관찰력이 밝아져서 오늘 우리 사회의 더러운 것과 악한 것과 부족한 것의 여러 가지를 전보다 더 밝히 보므로 불평시하는 맘이 더욱 많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불평시하는 그 결과가 자기 민중을 무시하고 배척하게 됩니다. 그 민중이 각각 그 민중을 배척하면 멸망의 화(禍)를 벗을 수 없습니다. 이러므로 매우 위험하다고 함이외다.




  그런즉 우리는 사회에 대하여 불평시하는 생각이 동(動)하는 순간에 측은시하는 방향을 돌려야 되겠습니다. 어떻게 못나고 어떻게 악하고 어떻게 부패한 점을 보더라도 그것을 측은시하게 되면 건질 맘이 생기고 도와줄 맘이 생기어 민중을 위하여 희생적으로 세력(勢力)할 열정이 더욱 생깁니다. 어느 민족이든지 그 민중이 각각 그 민중을 붙들어주고 도와주고 건져줄 생각이 진정으로 발(發)하면 그 민중은 건져지고야 맙니다. 여러분이시여-우리가 우리 민족은 불평시할 만한 민족인데 우리가 억지로 측은시하자고 함인가. 아닙니다. 자기의 민족이 아무리 약하고 못나고 불미(不美)하게 보이더라도 사람의 천연(天然)한 정(情)으로 측은시하여 질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밖에 우리는 우리 민족의 경우를 위하여 또한 측은시할 만하외다. 지금에 우리 민족이 도덕변(道德邊)으로 지식으로 여러 가지 처사(處事)하는 것이 부족하다 하여 무시하는 이가 있으나 우리의 민족은 근본적으로 무시할 민족이 아닙니다.






  국내동포에게 드림(三)


  동아일보를 통하여




  우리 민족으로 말하면 아름다운 기질로 아름다운 산천에 생장(生長)하여 아름다운 역사의 교화로 살아온 민족이므로 근본이 우수한 민족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와 같이 일시 불행한 경우에 처하여 진 것은 다만 구미(歐美)의 문화를 남보다 늦게 수입한 까닭입니다. 일본으로 말하면 구미와 교통하는 “아시아” 첫 어구에 처하였으므로 구미와 먼저 교통이 되어 우리보다 신문화를 일찍 받게 되었고 중국으로 말하면 “아시아” 가운데 큰 폭원(幅圓)을 점령하였으므로 구미 각국이 중국과 교통하기를 먼저 주력한 까닭에 또한 신문화를 먼저 받게 되었으나 오직 우리는 그러한 경우에 처하지 아니하였고 동아(東亞)의 신문화가 처음으로 오는 당시에 정권을 잡았던 자들이 몽매(夢寐) 중에 있었으므로 신문화의 들어옴이 늦어졌습니다. 만일 우리 민족이 일본이나 중국의 구미(歐美)문화가 들어올 그 때에 같이 그 신문화를 받았다면 우리 민족이 일본 민족이나 중국 민족보다 훨씬 나았을 것입니다. 일본 민족은 해도적(海島的) 성질이 있고 중국 민족은 대륙적 성질이 있는데 우리 민족은 가장 발전하기에 합당한 반도적(半島的) 성질을 가진 민족입니다.




  근본 우수한 지위에 처한 우리 민족으로서 이와 같은 불행한 경우에 처하여 남들이 열등의 민족으로 오해함을 당함에 대하여 스스로 분하고 서로 측은히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즉 우리의 천연의 정을 맘과 또는 우리의 경우를 생각하고 불평시하는 맘을 측은시하는 방향으로 돌이켜 상호부조의 정신이 진발하면 우리 민족의 건져짐이 이에서 시작된다고 하옵니다. 그러므로 나는 더욱이 우리 청년 남녀에게 대하여 우리 민중을 향하여 노(怒)한 눈을 뜨고 저주하는 혀를 놀리지 않고 5년 전에 흐르던 뜨거운 눈물이 계속하여 흐르게 하기를 바랍니다.




  (三) 주인인가 여인(旅人)인가 묻노니 여러분이시여 오늘 조선 사회에 주인 되는 이가 얼마나 됩니까. 조선 사람은 물론 다 조선 사회의 주인인데 주인이 얼마나 되는가 하고 묻는 것이 한 이상스러운 말씀과 같습니다. 그러나 조선인 된 자는 누구든지 명의상 주인은 다 될 것이되 실상 주인다운 주인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느 집이든지 주인이 없으면 그 집이 무너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그 집을 점령하고 어느 민족 사회든지 그 사회에 주인이 없으면 그 사회는 패망하고 그 민족이 누릴 이권을 딴 사람이 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생각할 때에 먼저 우리 민족 사회에 주인이 있는가 없는가, 있다 하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을 생각지 아니할 수 없고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로부터 여러분은 각각 우리의 자신이 이 민족 사회에 참주인 인가 아닌가를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인이 아니면 여객(旅客)인데 주인과 여객을 무엇으로 구별할까. 그 민족사회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심이 있는 자는 주인이오 책임심이 없는 자는 여객입니다. 우리가 한 때에 우리 민족 사회를 위하여 뜨거운 눈물을 뿌리는 때도 있고 분(忿)한 말을 토하는 때도 있고 슬픈 눈물과 분한 말뿐 아니라 우리 민족을 위하여 몸을 위태한 곳에 던진 때도 있다 할지라도 이렇다고 주인인 줄로 자처하면 오해입니다. 지나가는 여객도 남의 집에 참변이 있는 것을 볼 때에 눈물을 흘리거나 분언(忿言)을 토하거나 그 집의 위급한 것을 구제키 위하여 투신(投身)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인이 아니오 객인 때문에 한때 그러고 말뿐 그 집에 대한 영원한 책임심은 없습니다. 내가 알고자 하고 또 요구하는 주인은 우리 민족 사회에 대하여 영원한 책임심을 진정으로 포(抱)한 주인입니다. 이상(以上)에 비관인가 낙관인가 질시 하는가 측은시 하는가 하는 이언(二言)은 우리 현상에 의하여 한번 말할 만하다 하여서 말하였거니와 이 역시 객관적인 여객에게나 대하여서 할 말이지 진정한 주인에게는 못할 말인 줄 압니다. 그 집안일이 잘되어 가거나 못되어 가거나 그 집의 일을 버리지 못하고 그 집 식구가 못났거나 잘났거나 그 식구를 버리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지식과 자본의 능력이 짧거나 자기의 믿는 능력대로 그 집의 형편을 의지하여 그 집의 유지하고 발전할 만한 계획과 방침을 세우고 자기 몸이 죽는 시간까지 그 집을 맡아가지고 노력하는 자가 참주인 입니다. 주인 된 자는 자기 집안일이 어려운 경우에 빠질수록 그 집에 대한 염려가 더욱 깊어져서 그 어려운 경우에서 건져낼 방침을 세우고야 맙니다. 이와 같이 자기 민족 사회가 어떠한 위난과 비운에 처하였든지 자기의 동족이 어떻게 못나고 잘못하든지 자기 민족을 위하여 하던 일이 몇 번 실패하였든지 그 민족 사회의 일을 분초간(分秒間)에라도 버리지 아니하고 또는 자기 자신의 능력이 족(足)하든지 부족하든지 다만 자기의 지성(至誠)으로 자기 민족사회의 처지와 경우를 의지하여 그 민족을 건지어낼 구체적 방법과 계획을 세우고 그 방침과 계획대로 자기의 몸이 죽는 데까지 노력하는 자가 그 민족 사회의 책임을 중히 알고 일하는 주인이외다.






  1925년 1월 26일자에 깎인 채로 연재가 중단된 도산의 글 ‘국내 동포에 드림 – 동아일보를 통하여’는 도산이 주도하여 발행한 잡지 ‘동광(東光)’ 창간호(1926년 5월호)에 ‘합동과 분리’라는 제목으로 이어져 게재됐습니다. 같은 해 6월호에는 1925년 1월 25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三) 주인인가 여인(旅人)인가 묻노니…’ 부분이 ‘당신은 주인입니까’ 라는 제목으로, 그리고 ‘합동과 분리’ 뒷부분이 ‘사람마다 가슴에 참을 모시어 공통적 신용을 세우자’란 제목으로 함께 게재되었습니다. 필명은 ‘산옹(山翁)’이었습니다.






  국내동포에게 드림(四)


  동아일보를 통하여




  내가 옛날 고국에 있을 때에 한 때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사회를 위하여 일한다는 자선 사업적 일꾼은 많이 보았으나, 영원한 책임을 지고 주인 노릇하는 일꾼은 드물게 보았으며 또 일종의 처세술로 체면을 차리는 행세거리 일꾼은 있었으나 자기의 민족사회의 일이 자기의 일인 줄 알고 실제로 일하는 일꾼은 귀하였습니다. 내가 생각하기는 지금 와서는 그 때 보다 주인 노릇하는 일꾼이 생긴 줄 압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수효가 많지 못한 듯 합니다. 한 집 일이나 한 사회 일의 성쇠흥망이 좋은 방침과 계획을 세우고 못 세우는 데 있고 실제 사업을 잘 진행하고 못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주인이 있는 뒤에야 문제지 만일 한 집이나 한 사회에 책임을 가진 주인이 없다고 하면 방침이나 사업이나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즉 어떤 민족사회의 근본 문제가 주인이 있고 없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살피어 내가 과연 주인이요 나밖에도 다른 주인이 또한 많다고 하면 다행이거니와 만일 주인이 없거나 있더라도 수효가 적을 줄로 보시면 다른 일을 하기 전에 내가 스스로 주인의 자격을 찾고 또한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주인의 자격을 갖게 하는 그 일부터 하여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과거에는 어찌하였든지 이 시간 이 경우에 임하여서는 주인 노릇할 정도 일어날 만하고 자각도 생길만 하다고 믿습니다.




  (四)오늘 우리 대한을 보면 합해야 되겠다, 하면서 어찌하여 합하지 아니하고 편당을 짓는가. 왜 싸움만 하는가 하고 서로 원망하고 서로 꾸짖는 소리가 대한 천지에 가득 찼으니 이것만 보더라도 우리 대한 사람은 합동적이 아니오, 분리적인 것을 알 것이오. 또 오늘날 대한사람은 합동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듯 합니다. 합동하면 흥하고 분리하면 망하며 합동하면 살고 분리하면 죽는다, 이 모양으로 합동이 필요하다는 이론도 사석이나 공석이나 신문이나 잡지에 많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대한사람은 합동해야 된다는 이론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 대한 민족의 개개인은 과연 합동의 필요를 진실하게 깨달았는가. 이것이 의문입니다. 남더러 합하지 않는다, 편당만 짓고 싸움만 한다고 원망하고 꾸짖는 그 사람들만 다 모이어서 합동하더라도 적어도 몇 백만 명은 되리라 믿습니다. 그러하거늘 아직도 그러한 단체가 실현된 것이 없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아마 아직도 합동을 원하기는 하지만은 합동하고 못하는 책임을 남에게만 미루고 각각 자신이 합동의 길을 위하여 노력하는 정도까지에는 이르지 못한 듯 합니다.


  내가 이제 합동에 대하여 말하자면 우리 사회가 과거에 거의 역사적으로 습관적으로 합동이 못되고 온 원인과 또 현시에 합동이 되지 못하는 모양이며 합동을 하려면 취하여야 할 방법을 들어서 말할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길어질 근심이 있으므로 현시 상태에 가장 필요하다고 믿는 몇 가지만 말하려 합니다.


  첫째는 전 민족이 공통적으로 같이 희망하고 이해할만한 조건을 세우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요구하는 합동은 민족적 감정으로 하는 합동이 아니요, 민족적 사업에 대한 합동이외다. 민족적 감정으로 하는 합동은 인류사회에 폐단을 주는 것이라 하여 깨뜨리어 없이 하려고 하는 이조차 있습니다.


  나는 네가 민족적 감정으로 된 합동을 요구하지 아니하고 민족적 사업을 중심으로 하는 합동을 요구한다 함은 민족적 감정을 기초로 이루어진 민족주의가 옳다, 옳지 않다 하는 것을 근거로 하는 말이 아니외다. 어느 민족이든지 ‘우리 민족’ ‘우리 민족’하고 부를 때에 벌써 민족적 감정을 기초로 한 합동은 천연적 습관적으로 있는 것이니, 합동하자 말자하고 더 말할 필요가 없고 우리가 요구하고 힘쓸 것을 민족의 공통한 생활과 사업을 위하여 하는 합동이외다.






  이에 앞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이름이 동아일보에 처음 등장한 것은 창간된 해인 1920년 9월 3일자 4면의 짤막한 기사에서였습니다.











  ‘각지 청년단체’란 제목 아래 황해도 서흥(瑞興)에서 창립된 ‘신성청년회(神聖靑年會)’를 소개한 이 기사는 “연사(演士) 안창호씨는 『청년의 시(時)』란 문제로 만장(滿場) 청중의 박수갈채를 획득하였는데…”라고 단지 ‘연사 안창호’라고만 밝혔습니다. 이때의 도산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 국무총리 서리를 거쳐 통합 임시정부의 노동국 총판(總辦)으로 있었으나 총독부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동아일보에 도산의 이름이 두 번째 등장한 것은 1921년 2월 23일자 3면.






동아일보 1921년 2월 23일자 3면






  이 기사는 “중국 안동현(安東縣)에 거주하는 리병규(李秉珪)가 군자금을 모집하라는 안창호의 부탁을 받고 경성에서 활동하다 붙잡혀 공판에 부쳐진다”는 것이지만 ‘안창호의 명령으로’라는 제목을 큰 활자로 앞세워 눈에 띄게 전하려 했습니다.




  이 즈음 임시정부는 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 사이의 독립운동 방략에 대한 견해 차이로 분열하자 도산은 1921년 5월 노동국 총판을 사임하고 국민대표회의를 추진합니다.




  동아일보는 도산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리동휘(李東輝) – 안창호의 비밀회의/ 북만주 모처에 모여/「우랑겔」과 연락코자’ (1921년 5월 26일자 3면)


  ‘독립당 대합동설(大合同說)/ 두목들이 상해에 모여 결의’ (6월 9일자 3면)


  ‘조선인 공산대회/ 내월 중순『일크스크』에서 개최’ (1922년 8월 21일자 3면)






  도산의 노력으로 1923년 1월 3일부터 6월 7일까지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동아일보 1923년 1월15일자 3면






1923년 1월31일자 3면






1923년 2월7일자 3면






  국민대표회의가 한창이던 1923년 3월 27일부터는 도산을 모델로 한 장편소설 ‘선도자(先導者)’가 동아일보에 연재됐습니다.  도산의 ‘실력배양론’을 따르던 이광수가 동아일보 입사(1923년 5월 16일) 전, 장백산인(長白山人)이라는 필명으로 쓴 것입니다.






1923년 3월 27일자 1면






  “세상 사람들이 그에게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말썽도 많거니와, 그것은 다 그의 참뜻을 모르는 말이 아니면 그의 참됨을 시기하여 짐짓 그를 헐려하는 이의 말이다. 나는 수십 년래 그의 친구 되는 한 사람으로 내 딴에는 그의 인격과 경력을 자세히 알거니와 그는 결코 세상에서 말하는 바와 같은 그러한 사람이 아니오, 진정한 애국자요, 참된 사람이요, 또 능히 민족을 지도하여갈 만한 식견과 인격을 구비한 지도자(「선도자」, 518쪽)라고 전제하였다. 「선도자」의 상편은 평양 교회 동촌에서 이항목이 태어난 때부터 서울에 와 선교사 집에 살면서 독립협회에 가담하고, 바야흐로 독립협회가 친일파 세력의 주구인 보부상에 의해 유린되던 시대까지를 다루었다. 말하자면 이항목의 소년 시대이다. 중편은, 결혼한 이항목이 미국 유학을 떠났다가 1907년에 귀국하여 신민회를 조직하던 일부터 시작된다. 여기서부터 이항목이라 부르지 않고 호칭이 ‘선생’으로 바뀐다. 중편은 상편보다 훨씬 박진력이 있고 사실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다분히 정치적이고 또한 시대적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다음 몇 대목은 어떤 소설도 감히 따를 수 없는 감동과 힘을 갖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선생이 추정 이갑, 남강 이승훈 등 9명과 함께 1907년 자하문 밖 세검정에 모여 승가사에 오르고 거기서 신민회 비밀 결사를 한 대목이며, 다른 하나는 선생이 1909년 안중근 의사에 의한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에 연루된 일과, 사세 부득하여 1910년 서강에서 배를 타고 개성으로 가서 고국을 떠나는 모습이다. 내용 자체가 원체 사실에 가깝고, 또 벌어진 사건들이 도산을 중심한 실제의 일들이고 그것이 모두 민족 독립 운동에 관한 것이어서 총독부는 이에 연재 중단을 명하였다.” (‘이광수와 그의 시대 2’, 김윤식, 솔, 1999, 108~109쪽)






1923년 7월 18일자 1면 선도자 중단 사고






  이 소설은 총독부의 탄압으로 111회(7월 17일)를 끝으로 중단됐지만 동아일보는 도산의 행적을 계속 전했습니다.






1923년 6월14일자 3면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는 아무런 결실 없이 끝나고 맙니다.




  그 후 동아일보가 전한 도산의 행적.






‘안창호씨 입호/ 이상농촌을 뒤에 두고’ (1923년 10월 20일자 3면)








‘내몽고 포두진(包頭鎭)에/ 신조선촌(新朝鮮村)을 경영/ 독립당 거두 안창호씨를 거쳐/ 개척 자금을 주선한다는 풍설’ (11월 28일자 3면)






‘안창호씨/ 미국으로 건너가’ (1924년 12월 25일자 2면)











댓글 없음 »

No comments yet.

RSS feed for comments on this post. TrackBack URL

Leave a comment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