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기미년 3월 1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 만세’ (3·1절 노래)


‘이 날은 대한민국 억만 년의 터다’ (제헌절 노래)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광복절 노래)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개천절 노래)




대한민국 4대 국경일 노래를 모두 작사한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1893.5.6~1950).


조선의 3대 천재 벽초 홍명희(碧初 洪命憙),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에 버금하는 위당 정인보 선생도 1924년 5월 15일 공식적으로 동아일보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일정시대 퇴사직원록






이후 정인보 선생은 동아일보에서 수많은 논설과 기사, 논문 등을 썼습니다.


당시 조선일보 기자였던 김을한 선생에 따르면 위당은 ‘아무래도 기자 같지는 않았다’ 고 합니다.




“내가 위당 선생을 알기는 1927년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 선생의 사회장 때인데 당시 나는 수행기자로서 한산 장지까지 갔었다. 갈 때에는 몰랐으나 돌아올 때 2등 찻간에서 보니까 베 두루마기에 패랭이를 쓰고 미투리를 신은 흡사히 상엿군 같은 사람이 하나 앉아 있는데 구자옥 씨(당시 청년회 총무)의 소개로 그가 연전 강사 정인보 선생임을 알았다. 바로 그 때에 열차 전무가 들어와서 검표를 하는데 위당 선생은 어디서 얻었는지 2등 패스(무임승차권)를 내어보이므로 차장은 암만해도 납득이 안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이리기웃 저리기웃하였다. 때가 꾀죄죄 묻은 베 두루마기에 집신 감발을 한 주제가 2등 패스가 아랑곳이 무엇이냐는 눈치였다. 거기다가 위당 선생은 일어는 한 마디도 못하였으므로 차장은 더욱 의심을 품고 위당 선생의 등을 밀어서 3등 찻간으로 내몰려는 시늉을 하였다. 자세히 보니 2등 패스는 동아일보사의 기자 패스였다. 신문사에서 잠시 그것을 빌린 모양인데 위당 선생은 어디로 보나 신문기자 같지는 않았으므로 차장이 말썽을 부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결국 여러 사람이 나서서 ‘이 분은 유명한 학자이며 신문사에 자주 기고를 하므로, 신문기자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역설해서 겨우 쫓겨나는 것만은 면하였다.” (‘그리운 사람들’, 삼중당, 1961, 71~72쪽)






1927년 3월 31일자 1면 사설 李商在 先生의 長逝










동아일보는 그가 연희전문 강단에도 섰기 때문에 촉탁기자로 겸임 발령 냈으나 위당 정인보 선생은 역시 기자라기보다 당대의 대학자요, 강골 선비였습니다. 그런 점을 높이 사 동아일보는 1940년 8월 강제폐간될 때가지 그의 학문적 열정을 쏟아내는 바탕을 마련해 주었고 이승만대통령은 삼고초려해 그를 초대 감사원장으로 모셔 갔습니다.






그가 동아일보에 남긴 글들은 중후하면서도 품위가 있습니다. 사설은 무기명이지만 문체 등으로 미뤄 후학들이 그의 글로 판정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황제 순종 서거(1926년 4월 25일) 사실이 전해지자 동아일보는 1926년 4월 27일자 호외를 발행했고 그 날자 본지 1면 사설 ‘대행애사(大行哀辭)’를 그가 썼습니다.




1926년 4월 27일자 1면


“그러나 바랄 때 느꺼울망정 계시거니 하는 생각이 느낌 속에 섞이어 그래도 위안이 있고 그래도 의의(依倚·의지함)가 있다가 이제 벌써 멀으신 용어(龍馭·임금의 죽음)를 향하여 2천만의 눈물을 마지막 뿌리게 되니 슬프다 인간의 비애가 이에서 지나는 것이 있을까? 생각이 깊을수록 설움이 깊고 설움이 깊을수록 언어가 그치이니 차라리 붓대를 꺾고 종이를 찢어 마음껏 쓰지 못할 비애를 그대로 감추고자 하나, 조금이라도 드러냄이 없고는 우리의 애정이 더욱 견디지 못함에야 어이랴?”











1926년 4월 27일자 동아일보 호외






이어 위당 선생은 ‘재궁(梓宮·순종의 관) 마저 가신다’ (1926년 6월 10일자 1면 사설)와 ‘유릉지문(裕陵誌問)’ (1926년 6월 10일자 1면)을 동아일보에 썼습니다.






“다만 우리의 앞길을 우리가 열어서 민복을 바라시던 성심(聖心)을 만일이라도 위로하여 드리려할 뿐이다. 슬프다. 우리의 눈물은 곧 대행의 눈물이시라. 이 눈물을 가져 방불(눈에 삼삼함)하온 의모(依慕)를 부칠 수 있다. 어찌 눈물에만이랴? 우리의 기쁨도 곧 대행(大行)의 기쁨이시니 눈물에 의모를 붙이던 것을 기쁨에 옮길 때가 언제일까?”




1926년 6월 10일자 1면 사설, 재궁(梓宮·순종의 관) 마저 가신다




1926년 6월 10일자 1면, 유릉지문(裕陵誌問)






‘유릉지문’은 제술관(製述官) 윤용구를 대신해 지었으나 다른 의견이 있어 돌에 새기지는 않았으며 한의사인 홍승초 선생이 항아리에 담아 땅속 깊이 묻어두었다가 광복 후에 꺼냈습니다. 이 글과 관련해 위당 선생의 셋째딸 정양완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아버지의 글은 어느 하나 데면데면 설렁설렁 쓴 것이 없다. 그 중에서도 ‘유릉지문’ – 망국의 황제의 지문을 쓸 때, 아버지의 느꺼움은 어떠하였을까?…(중략)…타고난 어짊과 슬기, 능력을 가지고도 때를 못만나 그 포부와 사랑을 펴지 못하는 임금의 쓰라린 사랑, 그를 오히려 측은해하는 온 백성의 사랑이 한바탕 통곡 속에 몸부림치게 하는 글이다.” (‘담원문록 하’, 태학사, 2006년, 537~538쪽)






‘유릉지문(裕陵誌問)’ 과 ‘교수 기자’ 위당의 모습에 대해 제자 민영규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짙은 회색의 무명 두루마기가 철을 따라서 옥색빛깔의 모시천으로 바뀌는 수는 있다. 검은 펠트 모자와 검은 천의 두툼한 신발, 도수가 짙은 검은 테 안경, 그리고 한 발 먼저 들려서 선생을 앞서 가던 지팡이, 이들은 모두 변하지 않는 부분들이다. 볼품없이 꼬여진 옷고름은 아무렇게나 고쳐 매곤 하시던 습관 때문이었다. 선생이 앉아 계시던 곳이면 교수실에서나 어디에서나 신문사 원고 용지가 눈에 띄었다. 그날그날의 송고에 쫓기시던 선생의 모습이었다.…(중략)…농암(조선후기의 문신 김창협의 호)을 강독하시면서 들려주시던 말씀 중에, 농암이 글을 초할 때면 문고리를 안으로 걸어 잠그고 스스로를 고립시켰다는 것인데, 선생 자신, 순종 인산 때 유릉지문(裕陵誌文·순종의 묘지문) 제술(製述)의 대역을 맡고 (이때 선생의 나이 서른넷이었다), 거실 문고리를 안에서 걸어 잠근 채 나흘이 되도록 열어주지 않아, 가족은 물론 난곡장을 당황케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난곡 이건방은 하곡 이하 강화소전(江華所傳)을 갓초갓초 선생께 전수하신 분이다. 삼십 유여 년의 사사추정(師事趨庭·스승의 가르침을 받음)이었다.” (담원 정인보전집 1권, 위당문존<文存>후서<後序>)




“선생의 경학은 민중적 경학이라. 어떠한 특수 문호의 고거(考據·자세히 살펴 증거로 삼음)하던 학문이 아니요 경학이면서 정법이라. 이로써 민국의 실익을 자(資)할만큼 실구실해하려는 공부이다.” (1934년 9월 14일자 1면, 유일한 정법가 정다산 선생 서론)






“‘얼’이 없으면 곧 사람이 아니다. 내 이제 삼가 고하노니 제가 남이 제가 아닌 것을 아는가? 이것이 곧 ‘얼’이다. 무엇을 한다하면 저로서 하고 무엇을 아니한다하면 저로서 아니하고…(중략)…‘저는 저로서’가 이른바 ‘얼’이니 여기 무슨 심오함이 있으며 무슨 미묘함이 있으랴?” (1935년 1월 3일자 석간 1면, 5천년간 조선의 얼)




위당은 입사 전인 1924년 2월 13일자 1면 사설 ‘영원(永遠)의 내홍(內訌)’을 통해 민족의식을 나타냅니다. 위당은 이 사설에서 조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수한 인물이나 단체가 있으면 그들을 내세우고 후원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형제적 우애로 돌아가자’는 부제가 붙은 이 사설은 제1절이 일제에 의해 삭제된 채 나갑니다.











“이처럼 정인보는 형제애와 단결심의 배양을 통한 대내적 화합과 민족의 사상과 문화의 발견을 통한 대외적 자주를 이룩할 것을 강조했다. 이는 한국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긍정적 자주적 태도를 드러낸 것으로서 양명학에 입각한 주체적 민족사관의 정립에 초석을 마련한 것이었다.” (오영섭 연세대 연구교수,‘한국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경인문화사, 2007년, 378쪽)




위당 선생은 민족의식이나 역사의식을 일깨우려는 동아일보의 사업에도 앞장 섰습니다.


1931년 5월 충남 아산군 이 충무공 묘소 위토(位土·제사 비용을 대기 위한 토지)의 경매 소식이 알려지자 위당 선생은 5월14일자 1면 사설 ‘민족적 수치’를 통해 “조선인이 조선의 정신을 가지고 왔다면 우리도 외국에서처럼 비각, 동상, 기념관, 도서관 등을 이미 마련했어야 할 터인데, 이제 그의 위토와 묘소마저 채귀(債鬼)의 손에 넘어갈 처지에 이르렀음은 민족적 수치에 그치지 않고 민족적 범죄”라고 규정한 뒤 “이 충무공의 경우뿐만 아니라 이것을 계기로 하여 우리는 일층 민족문화에 대한 숭앙심과 애착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동아일보 사사<社史> 331~332쪽 참조).




1931년 5월 14일자 1면 사설, 민족적 수치 – 채무에 시달린 충무공 묘소




위당 선생은 이후에도 이 충무공 유적 보존에 사설과 특집기사를 통해 힘을 보탰고 역사연구에 대한 성과물을 동아일보를 통해 쏟아냈습니다. 위당 선생이 1931년에 18종의 고서를 해제한 ‘조선고서해제’를 연재할 때 위당 선생 서재의 모습입니다.





1931년 3월 30일자 4면 서재풍경, 정인보 씨 서재 제1경 






조선고서해제를 쓰시는 정인보 씨의 서재는 대체 어떤지 구경할 수 없을까요.(성진 일 독자)


마침 봄날이라 활개를 훨훨 치며 서대문밖 교수의 책을 찾았지요.


컴컴 침침한 뒷방에 뗏장같이 된 오천여권의 누더기 책을 좌우에 성벽처럼 쌓고 별유천지를 이루었겠지요.


구태여 멀리까지 와서 교수의 서재를 구경하실 것은 없으십니다.


으스름 달밤에 옛 성터 밑으로 거닐거나 청태(靑苔)가 우거진 바위틈바구니에 가서 앉으면 그 실감이 있으리이다.


비록 누더기 되고 좀은 먹었으나 그 속에는 고조선에 빛나는 역사와 문화 그리고 온갖 우리의 실물이 들어있는 금광입니다.


이 광 속에서 작업하는 교수는 옛 보물을 찾기에 눈이 붉은 조선의 귀한 광부입니다.




위당 선생은 어린 시절 배운 양명학 개론서 ‘양명학연론’을 66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했습니다.





1933년 10월 17일자 석간 1면






이후 위당 선생은 기행문 ‘남유기신(南遊寄信)’을 1934년에 43회에 걸쳐 연재했고 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사상을 소개하는 글을 이해부터 집중적으로 발표합니다. 특히 이해 9월 6회 연재한 ‘유일한 정법가(政法家) 정다산 선생 서론’은 실학 연구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알린 효시로 꼽힙니다.




위당 선생의 역작 ‘오천년간의 조선의 얼’은 1935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158회, 1936년 1월 7일부터 8월 27일까지 282회, 2년간 무려 440회에 걸쳐 연재되다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중단됩니다.







1936년 8월 27일자 3면






“정인보가 동아일보에 연재한 ‘5천년의 얼’은 그것이 난해여서 독자가 문선공과 교정자와 필자의 3인이라는 평은 들었지만 무게 있는 글로 권위를 가진 것이었다.” (강영수 전 동아일보기자, 항일투쟁과 언론, ‘한국의 언론’, 문화공보부,1968년,112쪽)




“‘조선의 얼’은 일제식민사학자들의 한국사 왜곡과 일부 국내학자들의 비주체적인 역사연구에 대한 의분심에서 집필된 것이었다. 따라서 ‘양명학연론’과 ‘조선의 얼’을 통한 ‘얼’사관의 정립과 한국고대사 연구는 정인보의 반식민주의적 역사학의 골자를 이루고 있었다.” (오영섭 , ‘한국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 3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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