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조선의 3대 천재 중 제일 늦게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1890~1957)이 1925년 8월 1일 동아일보의 촉탁기자가 됩니다. 주필 겸 편집국장이었던 홍명희가 동아일보를 떠난 뒤 4개월 후, 그의 나이 35세. 홍명희가 떠나고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가 주필로 복귀했을 때입니다.  


  “육당을 안지는 또한 오래다. 동경으로, 중앙학교로, 광문회로, 그 뒤 군(君)은 ‘동명(東明)’잡지를 하다가 실패하였고, 시대일보를 하다가 실패하였다. 남들이 나무랄 때 나는 ‘선비가 사업을 하다가 섣불리 실패하기는 일수니, 이제는 사업에서 손때고, 서양 유학가라. 그래서 글을 우리 신문에 써주면 사빈(社賓)으로 생활비는 지불하마’ 하였다.” (송진우, 교우록<交友錄>, 삼천리 1935년 6월호, 55쪽)






일정시대 퇴사직원록






  ‘3·1 독립선언서’를 쓴 육당은 동아일보 창간 당시 민족대표 48인 중 1인으로 복역 중이었습니다. 


  “1920년 봄 박모(薄暮·땅거미)의 남대문 앞길에서 장덕준(張德俊)과 진학문(秦學文)이 얘기를 나누며 경성 역 쪽으로 걷고 있었다. 


  ‘이상협이 편집국장을 하려는데, 역시 내 아우(장덕수)가 적임자가 아닐까’


  ‘설산은 인격이나 지식이야 손색이 없지만 신문에 경험이 없어 안 돼. 육당 최남선이 나오면 그에게 맡기세’




  민족 지성의 집결체임을 자부하고 나선 ‘동아’는 창간 준비와 함께 편집국 간부진을 짤 때부터 3·1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있는 인사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최남선 현상윤 등의 인사들이 풀려나오면 이들에게 쉽사리 자리를 마련해 주어 함께 일 할 수 있도록 이상협이 사회, 정리, 장덕준이 조사, 통계 그리고 진학문이 정경, 학예부장을 각각 겸임토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편집국장 적임자에 대한 의견이 이같이 엇갈리자 주간제를 두고 장덕수가 주간, 신문 경험이 있던 이상협이 편집국장이 되었다.” (진학문, ‘반세기 쌓인 일화, 민족의 표현기관’, 동아일보 1970년 4월 1일 22면)






 






  창간 당시 복역 중이 아니었더라면 창간 멤버가 됐을 최남선이 1925년 8월 1일 촉탁기자로 뒤늦게 합류했지만 그에 관한 동정은 동아일보를 통해 끊임없이 전해졌습니다.





 1920년 6월 12일자 3면.  ‘손병희 등 47인의 안부’






  공판 전, 서대문감옥으로 찾아가 육당이 ‘불교에 관한 서적을 많이 읽고 자조론(自助論) 하권을 지어 탈고했다’는 근황을 전합니다. 육당이 일본책에서 중역한 ‘자조론’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사무엘 스마일즈가 쓴 책으로, 자본주의 근대와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9월 공판이 시작되기 전 초대 편집국장 하몽 이상협(何夢 李相協)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육당의 원고를 싣습니다.




 1920년 7월 25일 5면






  ‘아름다운 가정’이라는 ‘하몽생(何夢生)’의 기고문에는 “독립선언서를 지은 까닭으로 작년 삼월부터 옥중에 매인 몸”인 육당과 자신이 가정잡지를 발간하려고 육당이 쓴 글이라는 설명이 붙어있습니다.




  진학문은 2회에 걸쳐 기고한 ‘옥중에 계신 육당 형님께 보(報)하나이다 – 경성을 떠남에 임(臨)하여’ (1920년 8월 2~3일 1면)에서 1919년 2월 하순 얘기를 하며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3·1운동과 민족대표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합니다.











  재판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경성감옥으로 이감된 뒤에도 육당의 동정은 동아일보에 계속해서 보도됩니다. 특히 3·1운동 2주년인 1921년 3월 1일자 3면에는 어머니 강씨가 면회를 왔다 돌아간 직후 쓴 글이, ‘눈물을 자아내는 최남선의 편지’란 제목으로 소개됩니다.











  ‘입춘 추위의 찬 바람 머리에 안녕히 돌아가셨는지 돌쳐서시는 옷자락이 눈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떡꾹 아침이 아직도 세 밤을 격한 이 상서를 하감하옵실 때에는 도리어 몇 날을 지났사올지, 묵은 세배로 올리는 상서가 새해 문안도 되지 못하는 것이 지금 소자의 세월이올시다.’


  ‘(조카딸) 한경의 일은 참혹하기 이를 길 없습니다. 어제 밤 꿈에 울고 보채는 한경이를 제가 얼싸안고 달래서 이런저런 이야기함을 꾸었삽더니, 뜻밖에 말씀을 듣사오니 애연하기 지업삽내다.’


  ‘높은 담 너머로 떡 치는 소리 들리는 음력 십이월 이십팔일 낮.’




  (사진설명) 독립선언사건 관계자의 구금된 경성감옥(중앙) – 최린 박희도 오세창 최남선 권동진 오화영의 사진, 그 옆에 쓰인 글씨는 각기 그 사람들이 감옥으로부터 최근에 가족에게 부친 편지의 필적.






  1921년 10월 19일자 3면 육당의 가출옥 기사도 인상적입니다.






(사진설명) 기념할 옥문을 등지고 방면된 최남선 씨와 아래 사진은 좌편으로부터 최 씨의 모당 친형 최창선 씨, 최남선 씨 친제 최두선 씨의 4모자(작일 오후 경성감옥 문외에서)  


 




  이들 육당의 형제들은 창간기자 유광렬이 잡지 삼천리 ‘유명인사 3형제 행진곡’(1932년 3월호 53~54쪽)에 “황금정에서 문화기관 신문관을 경영하기에 그 재산 대부분을 기울였고 아우 최남선 씨의 문화사업을 후원”(최창선 씨) “신문관 창설 이래 10여년을 조선 신문화 개척에 힘쓴 공로자” “조선 사학계에 일두지를 드러냈고 대부분이 자습독학의 대성”(최남선 씨) “중앙학교의 교원으로 조도전대학을 제1번으로 졸업하고 조선에 돌아온 뒤 중앙교장을 역임하고 독일에서 철학을 공부”(최두선 씨)라고 소개할 정도로 명사였고 동생 최두선 씨는 해방 후 동아일보 사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육당이 출옥 후 자신이 창간한 시사주간지 ‘동명(東明)’의 간행사를 실은 곳도 동아일보 1922년 8월 24일 1면 광고란입니다.  육당은 이 글에서 3·1운동의 성과인 민족 자각을 완성하는 것이야말로 조선인의 과제라고 말합니다.




  시사주보(時事週報) 동명(東明)


  현하(現下)의 조선인은 오직 한 가지 직무가 허여(許與)되어 있습니다. 무엇인고 하니, 최근에 이르러 새삼스럽게 발견된 ‘민족’을 ‘일심일치(一心一致)’로 ‘완성’하는 일이외다. 일체의 보무(步武·위엄있게 걷는 걸음걸이)가 오직 이로부터 출발되어야 할 것과 일체의 희망이 도무지 이로써 실현될 것을 확신하는 오인(吾人)은 풍조야 여하(如何)하든지, 추향(趨向·대세에 끌려 따라감)이야 여하하든지, ‘민족완성’을 위하여 아직 동안 일체의 기회를 운용하며 일체의 정력을 집주(集注)하지 아니치 못합니다. 이로써 자려(自勵·스스로 힘씀)하고 이로써 근타(勤他)하여 무한한 생명 전개의 제 1보, 이상 실현의 제 1선 삼아 발견된 민족을 완성하려 하는 자외다.


  우리가 ‘민족’이라는 귀중한 ‘발견’을 이루기 위하여 어떻게 참담한 도정을 지냈습니까. 어떻게 거대한 희생을 바쳤습니까…(후략)


  ‘동명’ 동인 대표 최남선 근백(謹白)




  1923년 5월 11일자 3면 창간 1000호 기념 ‘현대인물투표 대환영의 신시험(新試驗), 재미있는 인물 투표의 시작’이란 제하의 기사가 투표결과가 삭제된 채 나갑니다. 











  투표결과는 삭제 당했지만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가 만든 압수 삭제 기사 모음집 ‘언문신문차압기사집록’ – 동아일보 편, 108쪽에 따르면 육당이 이승만, 최린, 안창호에 이어 4위를 차지했습니다. 




  “제1회 투표 결과 3표 이상 득표자는 다음과 같았다. 이승만(49), 최린(25), 안창호(22), 최남선(18), 서재필(17), 이춘재(12), 이상재(10), 이동휘(7), 여운형(6), 강일성(6), 이승훈(4), 김원봉(4), 윤상은(4), 신흥우(4), 김좌진(3)”






1925년 8월 10일자 2면






  ‘학계의 중진 육당 최남선 씨 – 낙산  일람각에서 독서, 영시로 소일, 시대일보로 죽을 쑨 육당’


  “조선에 외래교가 들어오기 전에도 조선은 야매한 민족이 아니었으니 반듯이 무슨 종교가 있으리라는 확신으로 약10년 전부터 그것을 연구하였는데 그것은 즉 ‘밝’이라는 ‘교’라고 합니다. 이 ‘밝’이라는 뜻은 광명이라는 뜻인데 광명의 대표가 즉 태양이라고 합니다…(중략)…시대일보가 그렇게 된 후로부터는 조선의 영산인 금강산…(중략)…약 한달 전에 돌아왔는데…(중략)…불서(佛書)도 많이 공부하는데 낙산 중복에 앉아있는 일람각에서 솔나무 소리로 벗을 삼으면서 몇 만권인지 아지 못할 썩어가다 시피하는 책 천지 속에서 만수향을 피워놓고 글을 왱왱 외고 있습니다.”






1925년 10월 3일자 2면




  ‘기미년운동과 조선의 사십팔인, 최근 소식의 편편(片片)’ 


  “육당 최남선 선생은 아직도 서른일곱이시라는 젊은 몸으로 일전에도 한번 소개한 바와 같이 동대문 안 양사골 낙산 밑에 계신데 산같이 쌓여있는 수 천 권 고금서적을 병풍으로 치시고 독서로 일과를 삼으시는데 선생은 항상 인과의 논리를 주장하시어 실력 있는 조선을 만들어야 된다고 여기에다 힘을 다하십니다. 그간 시대일보도 뜻과 같이 못되고 일시 세상에 좋지 못한 소문만 없지 않았지만은 조선을 위하여 애를 태우시는 정성은 해가 갈수록 더 깊어간답니다. 일람각에서 독서만 하시다가도 무엇이 부족한 듯이 책 구럭을 들고 도서관을 찾아가시는 것을 보면 어떻게 선생이 부러운지 모르겠습니다.”






1936년 효제동 시절 육당 가족.


뒷줄 좌로부터 사위 강건하(姜乾夏), 장남 한인(漢因), 차남 한웅(漢雄), 삼남 한검(漢儉).







댓글 없음 »

No comments yet.

RSS feed for comments on this post. TrackBack URL

Leave a comment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