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김동인(金東仁)의 글처럼 ‘춘원의 의자는 비워 두어서 후일 다시 나올 날을 기다리다’ 8개월여가 지난 1927년 9월 30일 편집국장직을 사임하고 편집고문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로부터도 1년 가까이 투병생활을 하다 1928년 9월 4~19일 「젊은 조선인의 소원」이라는 논문을 15회 게재하고 10월 5일~11월 9일「병창어(病窓語)」를 31회 연재합니다.  ‘병창어(病窓語)’란  ‘병실에 누워 창문을 바라보며 쓴 글’, 병상(病床)수필인데 그의 심사를 나타내는 그가 만든 말입니다. 




1928년 9월 4일자 3면







1928년 10월 5일자 3면 「병창어(病窓語)」







* 10. 5. (1) 녀름ㅅ밤 달


* 10. 6. (2) 조선의 하늘


* 10. 7. (3) 입추


* 10. 9. (4) 젊은 혼의 찬미가


* 10.10. (5) 이별행진곡


* 10.11, (6) 보살(菩薩)의 병(病)


* 10.12. (7) 사(死)


* 10.13. (8) 참회(1회)


* 10.14. (9) 참회(2회)


* 10.16. (10) 생명욕과 소유욕


* 10.17. (11) 맘의 편안


* 10.18. (12) 소아(小兒)(1회)


* 10.19. (13) 소아(小兒)(2회)


* 10.20. (14) 소아(小兒)(3회)


* 10.21. (15) 거지


* 10.23. (16) 응공(應供)


* 10.24. (17) 복전(福田)


* 10.25. (18) 주기


* 10.26. (19) 오동


* 10.27. (20) 병(病)과 추(秋)와 자연(1회)


* 10.28. (21) 병(病)과 추(秋)와 자연(2회)


* 10.29. (22) 병(病)과 추(秋)와 자연(3회)


* 10.30. (23) 병(病)과 추(秋)와 자연(4회)


* 10.31. (24) 병(病)과 추(秋)와 자연(5회)


* 11. 1. (25) 시조


* 11. 2. (26) 시조의 자연률(自然律)(1회)


* 11. 3. (27) 시조의 자연률(自然律)(2회)


* 11. 4. (28) 시조의 자연률(自然律)(3회)


* 11. 5. (29) 시조의 자연률(自然律)(4회)


* 11. 8. (30) 시조의 자연률(自然律)(5회)


* 11. 9. (31) 시조의 의적구성




– 11월 7일 「구경꾼의 감상」이종우(李鍾禹)씨 개인화전을 보고.




  1927년 1월 31일 16회로 소설 「유랑」을 중단한 지 1년 10개월만인 1928년 11월 30일「단종애사」를 연재하기 시작합니다(1929년 12월 11일까지 217회 연재).




1928년 11월 30일자 6면 「단종애사」첫 회







  그러나 1929년 2월 신장결핵(腎臟結核) 진단을 받고 5월 24일 좌편신장 절제수술을 받아 「단종애사」는 5월 11일자 8면에 128회를 연재한 뒤 3개월여(5월 12~8월 19일) 동안 쉬게 됩니다.


  그 사이 


– 7월 16~22일 「아프던 이야기」7회, 


– 7월 23~8월 1일 「문학에 대한 소견」10회를 쓰고




「단종애사」를 다시 연재하며


– 9월 24~28일 「사상(史上)의 로만스, 삼국시대 편 충신제상(忠臣堤上)」 사화(史話) 5회,


– 10월 28~30일「사상(史上)의 로만스, 삼국시대 편, 범 이야기 둘」3회, 


– 11월 10일 「밤송이」(白岳山人 명의의 시)


– 11월 13일 「밤마을 가는 길에」(白岳山人 명의의 시)를 게재하고


– 12월 11일 217회로 「단종애사」를 끝냅니다.




  “이 글을 쓸 때 어떤 날 춘원 자신이 「단종애사 만은 욕하지 말라」고 웃으면서 말한 일이 있느니 만치 춘원의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요 겸하여 이 작품이 동아일보에 연재되는 당시 누계(累計) 수천통의 투서(독자 편지라는 의미- 인용자 주)가 들어오니 만치 독자군(群)의 인기가 굉장하였던 작품이다.” (김동인, ‘춘원연구 9’, 삼천리 1935년 9월호)  




– 12월 14일  근독(近讀) 서평 2, 3. 님의 침묵, 안서시집(岸曙詩集), 노동독본.


 




1930년(38세)


– 1월 1일 「군상(群像)」3부작으로「혁명가의 아내」1부 연재 시작(이상범 화).


– 1월 5일 「새해맞이」


– 2월 1일 「복조리」  


– 2월  4일 「혁명가의 아내」1부 31회로 연재 완.


– 3월27일 군상(群像) 2부「사랑의 다각형」연재 시작(11월 2일까지 71회 연재).


– 4월 1~10일 창간10주년기념 축시 ‘10년사(詞)’ 7회 연재.


– 9월 2일 「군상(群像)」2부「사랑의 다각형」연재 완. 


– 9월20일  본사 주최 여자정구대회회가, 이광수 작사, 안기영(安基永) 작곡.






1930년 9월 20일자 7면


 




– 9월 25일~10월 1일「정의는 이긴다」(영화소설) 6회 게재.


-11월  1일 취체역  편집국장(2차).


-11월 9일 임용련 백남순씨 부처전 소인(素人) 인상기(평론)


-11월29일「군상(群像)」3부 「삼봉이네 집」연재 시작(1931년 4월 24일까지 84회 연재).




1931년(39세) 


– 1월 5일 「내가 소설을 추천한다면」(수필), 「조선어문연구」 연전(延專) 문과 연구집 제1집 (서평) 게재.


– 3월30일 「조선사화집」이은상 씨의 근저를 독(讀)하고 (서평).


– 4월24일 「삼봉이네 집」연재 완(84회).


– 5월  3일 「아비의 소원」(시).


– 5월 21일 충무공 유적순례 (기행문) 14회 게재(1931년 6월 10일까지).


– 5월 24일 충무공 고택을 찾아서 (시조).


– 6월 11일 고금도에서 충무공 유적 순례를 마치고.


– 6월26일 「이순신」연재 시작(1932년 4월 3일까지 178회 연재.


– 8월13~18일 「행주승전봉과 권율 도원수」기행문 4회 게재.


– 11월 11일「자장 3편(三篇)」자장, 저 산 넘어, 생쥐(시가)


– 11월 18일「우리 아기 자는 잠」(동요)


– 11월 27일「잃은 노래」(자장노래) (동요) 게재.


– 11월 28일 평화로운 잠 (자장가)


– 12월    1일「운동의 노래」 짓는 까닭(가요)


– 12월 17일「강용흘 씨의 초당」(상).


– 12월 18일「강용흘 씨의 초당」(하).


– 12월 신동아 「조선과 신미년(辛未年)」「잃어버린 댕기」(시화).




1932년(40세) 


– 1월 신동아 「가정」.


– 1월 3일 「모를 냅시다」(시).


– 2월 신동아 「청년에게 아뢰노라」(논문).


– 3월 신동아 「입학과 졸업」(시화).


– 4월   3일 「이순신」178회로 완.


– 4월 12일 「흙」연재 시작.


– 5월 13일 「진달래」(동시).


– 5월 17일  영화「트레이더혼」본 감상(평론). 


– 7월         단군 유적 답사.


– 9월 25일 연락선상에서 (서한)




  이광수는 당시 동아일보에서의 하루를  ‘이발 목욕할 여유가 없어서 곤란. 친구 방문은 거의 전폐. 이렇게 살아갑니다’ 고 묘사했습니다.




  “신문사에 가서는 동료들의 출석 상황을 보고 숙직부를 보고 서신 온 것을 보고 주요한 신문을 보고 소설을 한 회 쓰고 혹시 횡설수설을 쓰고 부득이하면 사설도 쓰고 공장에 몇 번 들락날락, 사장실에 몇 번 불리어가고 사설, 횡설수설, 기타 각 면의 주요 기사를 읽어 혹시 시비 들을 것이나 없나 혹시 압수당할 것이나 없나를 보고 각 면 대장을 보고. 내객 몇 분을 보고, 전화 몇 십 차 주고받고 그리고 전표에 도장을 몇 번 찍고 간혹 편집회의를 하고 간혹 동료의 불평을 듣고 간혹 경무국에 불리고. 그리고 윤전기가 돌아 신문이 제 시간(오후 4시20분 이전)에 나오는 것을 보고 나면 만족으로써 내 하루의 직업이 끝이 난다. 그리고는 곧 타기 싫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고, 일 있으면 동광사에 들르고. 집에 오면 대개 5시 반 전후. 내가 대문 여는 소리를 들으면 5세아, 6세 아가 ‘아빠!’ 하고 마루로 뛰어나와 매어달리고. 그리고 손 씻고 발 씻고 저녁 먹고 신문사에 압수, 삭제, 호외 등 사고가 있어 전화가 무시로 울지 아니하면 아이들과 노래하고 춤추고 말 되어 태워주고 그림 설명하다가 아홉시가 되면 5세아 자장가 불러 맡아 재우고 그리고 난 뒤가 내 시간이어서 신문도 보고 독서도 하고 공상도 하고 부처 간에 담화도 하고 원고도 쓰고, 11시 전후에 취침. 이발 목욕할 여유가 없어서 곤란. 친구 방문은 거의 전폐. 이렇게 살아갑니다(‘東光’ 1932년 11월호 35쪽 ‘나의 하로’)






1933년(41세) 


– 1월 1일 연두송(年頭頌) (시)


– 1월 1~11일 「문인좌담회」(좌담, 9회).


– 3월    5일 「노송당(老松堂) 일본행록」(신간평).


– 3월 26일   자장노래(박경호 곡) (동요)


– 4월 15~19일 「합포(合浦) 풍광」(기행문, 3회).


– 5월   2일 「위인의 날」, 민족적 위인의 날도 지키자 (시화).


– 5월 11일 「윤석중 군의 ‘잃어버린 댕기’」(서평).


– 5월 31일 「박경호 씨 피아노 시청기」(음악평).


– 7월 10일 「흙」271회로 연재 완.


– 7월 13일 「흙」을 끝내며




1933년 7월 13일자 석간 3면







– 8월 9~23일「만주에서」 기행문 5회 게재.


– 8월 28일 조선일보 부사장(8.29~1934.5.22).


  동아일보의 이광수가 조선일보로 간 것은 당시 큰 화제가 됐습니다. 




 이광수를 이해하는 입장에서 ‘이광수와 그의 시대 1, 2’(솔 출판사, 1999)를 쓴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광수와 그의 시대 2’ (209~219쪽)에서 이 일련의 변화, 이 시절 이광수가 가졌을 심정과 생각을 아래와 같이 분석하고 있습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 춘원의 직장과 가정의 모습은 이처럼(‘나의 하로’) 거의 완벽한 것이었다. 힘껏 당겨진 활처럼 그는 팽팽한 생태였다. 한참 일할 나이인 인생의 장년기에 바야흐로 이른 것이다. 친구를 만나 한담할 틈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는 신문인이자 동우회 기관지 ‘동광’의 주재자요, 소설가요, 아버지요, 남편이었다. 더구나 그의 직업은 다름 아닌 민족지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이었다. ‘이천만 가슴속에 풀린 자유혼/깨어라 소리치어 자유의 소리/나날이 새 힘자라 새는 날마다/영원히 외치도다 자유의 소리’(동아일보 옛 사가)도 춘원 자신이 지은 것이었다. 그는 1930년에서 1932년 사이에 가장 많은 글을 썼고 그 글의 종류와 범위 또한 매우 다양하였다. …(중략)… 춘원은 그의 생애의 커다란 절망을 앞둔 1932년의 시점에서도 ‘청년에게 아뢰노라’에서 이렇게 외쳤다. …(중략)… 춘원은 청년에게 이 절개 지키기를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중략)… ‘동광’ 종간호에는 학생에게 보내는 공개장(‘영웅이 되라’, 1933.12)을 실었다. 이렇게 대단한 신념을 지닌 동우회의 책임자 춘원이 절망을 체험하는 과정은 언제, 왜,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그것을 우리는, 첫째로 도산의 체포와 국내 수감(1933), 둘째로 ‘동아일보’에서 ‘조선일보’로 이적하는 과정(1934), 셋째로 차남 봉근의 죽음(1934)등 세 단계에서 분석해볼 수 있다. …(중략)… 둘째 단계를 우리는 동아일보에서 조선일보로 옮겨감에서 찾아낼 수 있다. 1933년에 춘원은 동광 편집을 하는 한편 만주를 여행하고(6월), 그리고 ‘흙’(7월)을 끝내었다. 9월엔 장녀 정란이 태어났다. 그가 조선일보로 옮긴 것은 이해 8월이었다. 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우리는 춘원 자신이 이에 관해 말해놓은 바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필요하다. 그만큼 이 대목은 춘원에겐 조심스러운 곳이었다. ‘내가 연전 동아일보를 나와서 조선일보로 간 것은 세상이 배신행위라고 비난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비록 내 내적 동기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변명은 되지 아니하는 것이다. 설사 내가 조선일보로 간 것이 부득이한 사정이 있고 또 공적 견지로 보아서 죄 될 것이 없다하더라도 내 은인에 대한 배신 행동임에 다름없는 것이다’ (‘다난한 반생의 도정’, 454쪽). 다른 곳에서 춘원은 16년 간 있던 동아일보를 떠난 이유로, ①동아일보는 이제 기초가 잡혀 자기의 힘을 필요로 하지 않음과 ②조선일보 사장 방응모와 편집국장 주요한, 그 밖의 여러 동지와의 관계를 들었다. …(중략)… 춘원은 조선일보 부사장(1933.8.29~1934.5.22) 및 편집국장(1933.9.14~1934.1.1)을 겸임한 것으로 되어있다(조선일보 50년사, 1970). 호남 중심의 동아일보와 서도 중심의 조선일보의 계보 속에서 서도인 춘원과 주요한이 어째 더 견디지 못했을까. 우리가 겨우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춘원과 주요한의 본업이 동우회였다는 사실에 관련된다. …(중략)… 배신자라는 비난을 들어가며 조선일보로 옮긴 내적 동기는 아마도 침체한 동우회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방도의 일환이었으리라. 이 명분이라면 춘원은 어떤 비난도 능히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이다. 조선일보의 부사장직을 가짐으로써 또 동지 주요한이 편집국장을 함으로써 그야말로 조선일보라는 대 사회적 공기를 배경으로 보다 적극적인 동우회 운동이 가능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도산까지 수감되어 복역하고 있는 마당이어서, 춘원은 최후의 도박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상 조선일보에 취임하고 보니, 사정은 썩 달랐다. 주요한은 이내 사표를 내고 얼마 후 화신산업으로 근무처를 옮겼다.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자 동사의 전무 취체 역을 역임한 주요한이 사임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요컨대 춘원이 조선일보에서 1년도 못되어 나와 버린 것은 사장과의 알력이라든가, 인화 문제, 실권 부여 문제 등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나 동우회 운동에 아무런 도움이 못 되었던 것이 큰 이유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만일 동우회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면 춘원은 어떤 악조건이나 수모도 참았을지 모른다. 도산의 징역으로 한 풀 꺾인 동우회 운동은 춘원의 동아일보로 부터의 이탈로 두 번째 풀이 꺾인 셈이었다.”




동아일보를 떠난 뒤 5년여 후 이광수는 인촌 선생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냅니다. 


仁村 恩兄鑑(인촌 은형감) 


오래 가물어 염려 많으실 듯하옵니다. 산거(山居)에는 벌써 칠칠하고 메뚜기 나는 소리 들리게 되었습니다. 뵈온지 벌써 일 년이 가까와옵니다…(중략)…산거에 일이 없어 고요히 생각하오매 오직 지난날의 잘못들만이 회한의 날카로운 칼날로 병든 심혼을 어이 옵니다. 모두 모래 위에 엎지른 물이라 다시 주어 담을 길 없아오매 더욱 고민만 크옵니다. 형의 넓으신 마음은 벌써 광수의 불신을 다 잊어버리셨겠지만 어쩌다 광수의 생각이 나시면 유쾌한 추억이 아니실 걸 생각하오면 이 마음 심히 괴롭습니다…(중략)…지난 48년간에 해온 일이 모두 덕을 잃고 복을 깎는 일이어서 형을 마음으로 사모하면서도 형을 가까이 할 인연이 항상 적사오며 은혜 높으신 형께 무엇을 드리고 싶은 마음 간절하오나 물(物)과 심(心)이 다 빈궁한 광수로써는 아무 드릴 것이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광수로써 오직 한 가지 일은 늘 중심에 형을 념(念)하여 건강과 복덕(福德) 원만하기를 빌고 사람을 대하여 형의 감덕을 찬양하는 것 뿐 이옵니다. 오늘, 날이 청명하고 새소리 청아하옵니다. 아무 일도 없으면서 형께 편지 드리고 싶어 이런 말씀 아룁니다. 이만. 1939년 6월 17일 弟 李光洙 拜上 (이광수전집 18권, 춘원 서간문, 366~367쪽) 


 


“춘원은 안 도산의 지시에 따라 서울의 ‘수양동맹회’와 평양에 역시 흥사단계인 ‘동우구락부’의 통합을 위해 활동, 이듬해인 1926년 1월 8일 ‘수양동우회’를 발족시켰다. 또한 5월에는 동아일보에 ‘마의태자’를 연재하고 종합지 ‘동광’을 주요한이 창간하자 그 일을 도왔다. 6월에는 신병의 재발로 경의전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 후 삼방, 석왕사 등을 여행한 후 11월에 동아일보사 편집국장에 취임했다. 이로부터 춘원과 동아일보는 김동인의 말대로 ‘굳게 맺아진’관계로 10년 동안 지속된다. 이 10년 동안에 춘원이 동아일보에 발표한 소설은 장편(未完은 제외)으로도「선도자」「재생」「춘향전」「마의태자」「단종애사」「혁명가의 아내」「이순신」「흙」등이다. 이 시기에 이렇게 다작을 발표한 사람은 없다. 그동안 춘원은 필화로 한번 퇴사(민족적 경륜사설 1924· 1), 신병으로 한번 퇴사(1927· 9) 도합 두 번 퇴직, 다시 복직을 했다. 또 이 기간 중에 춘원은 두 번 대수술을 받고 사경을 헤맸으며 (1차는 1925년· 3, 척추카리에스 수술, 2차는 1929 ·5, 우편신장절제수술) 거의 2년 동안을 병상에서 혹은 정양지에서 보냈다. 그런 가운데도 다작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광수전집 별권, 화보 평전 연보’, 삼중당, 1976년 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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