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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주목을 받으며 동아일보에 입사한 이광수가 11개월 여 만에 동아일보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민족적 경륜(民族的 經綸)’이란 글 때문이었습니다. ‘민족적 경륜’은 1924년 1월 2일자부터 6일자까지 5회에 걸쳐 게재된 본지의 사설입니다.


1924년 1월 2일자 1면 사설
  


1923년 5월 16일 촉탁기자로 동아일보에 들어와 5개월여의 수습(?)기간을 거쳐 12월 1일자로 정식 기자가 된 이광수가 정식 기자가 된 지 1개월여 지나 쓴 이 사설은 당시 적지 않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지금도 그 논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광수는 민족적 경륜 (2)에서 ‘우리는 조선 내에서 허(許)하는 범위 내에서 일대(一大)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여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고 했는데 ‘조선 내에서 허(許)하는 범위 내에서’라는 말은 곧 ‘일제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타협적 자세’라는 공격이었습니다.




1924년 1월 3일자 1면 사설









  문제가 된 ‘민족적 경륜(2) 정치적 결사와 운동’ (1924년 1월 3일자 1면) 제하의 사설 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사람은 정치적 동물이라’함은 너무 진부한 격언이다. 그러나 20세기의 금일에도 역시 사람은 정치적 동물이다. 인사(人事)의 모든 현상 중에 지금도 가장 인생의 흥미를 끄는 것이 정치인 것은 신문을 보면 알 것이오, 또 가장 높은 명성을 가진 자가 정치가인 것을 보아도 알 것이다. 자유의 사상이 보급될수록 정치는 민중화하여 농민이나 노동자까지도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게 된다. 이리하여 사람은 더욱 더욱 정치적 동물이 되는 것이다.


  2. 그런데 조선 민족은 지금 정치적 생활이 없다. 아마 2천만에 달하는 민족으로서 전혀 정치적 생활을 결한 자는 현재 세계 어느 구석을 찾아도 없을 것이요, 또 유사 이래의 모든 사기(史記)에도 없는 일이다. 실로 기괴한 일이다 할 것이다. 그런데 만근(輓近) 수십 년 래(來)로 조선 민족에게는 정치적 자유사상이 무서운 세력으로 침륜(浸淪)되어서 정치생활의 욕망이 옛날 독립한 국가 생활을 하던 때보다 치열하게 되었다. 이것은 가장 당연한 일이다.


  3. 그런데 왜 지금에 조선 민족에게는 정치적 생활이 없나. 그 대답은 가장 단순하다.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이래로 조선인에게는 모든 정치적 활동을 금지한 것이 제1 인(因)이오 병합 이래로 조선인은 일본의 통치권을 승인하는 조건 밑에서 하는 모든 정치적 활동, 즉 참정권 자치권의 운동 같은 것은 물론이요 일본 정부를 대수(對手)로 하는 독립운동조차도 원치 아니하는 강렬한 절개(節介)의식이 있었던 것이 제2 인(因)이다. 이 두 가지 원인으로 지금까지 하여온 정치적 운동은 전혀 일본을 적국시하는 운동 뿐 이었었다. 그럼으로 이런 종류의 정치운동은 해외에서나 (가능하지) 만일 국내에서 한다하면 비밀결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4. 그러나 우리는 무슨 방법으로나 조선 내에서 전 민족적인 정치운동을 하도록 신생면(新生面)을 타개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조선 내에서 허(許)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여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그러면 그 이유는 어디 있는가. 우리는 두 가지를 들려고 한다. 


  (1) 우리 당면의 민족적 권리와 이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2) 조선인을 정치적으로 훈련하고 단결하여 민족의 정치적 중심 세력을 작(作)하여서 장래 구원(久遠)한 정치운동의 기초를 성(成)하기 위하여


  5. 그러면 그 정치적 결사의 최고 또는 최후의 목적이 무엇인가. 다만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다. 그 정치적 결사가 생장(生長)하기를 기다려 그 결사 자신으로 하여금 모든 문제를 스스로 결정케 할 것이라고.


  6. 우리는 정치적 결사에 대하여 더 자세한 설명을 하기를 원치 아니한다. 그것은 이러한 결사를 몸소 경륜하는 실제 정치가의 두뇌와 수완에 일임할 수밖에 없으려니와 민족적 백년대계의 제1조로 정치적 대 결사를 조직하여야 한다는 것을 다시 역설하고 아울러 그것이 속히 실현되기를 시(視)하려한다.




  일련의 이광수의 행적, 즉 상해임시정부에서의 귀국(1921년 봄)→‘유랑조선청년 구제선도 건의(1921년 4월)→‘민족개조론’ 발표(천도교가 운영하는 잡지 ‘개벽’, 1922년 5월호)→‘민족적 경륜’ 연재가 이광수를 비롯한 점진적, 개량적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총독부의 회유와 원모(遠謀)에 의한 것이라는 비판적 시각이 당시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반면 ‘이광수를 위한 변명’(중앙M&B, 2000년)을 쓴 이중오는 결론 부분(292쪽)에서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너의 제언은 결국 또 다른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아니냐고. 나는 애써 부인하지 않겠다. 결국은 점진적 개량주의요 실력양성론임을. 아직도 이러한 제안이 사대주의 혹은 제국주의에 물든 조야한 논리요 발상이라고만 생각하겠는가”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1949년 2월 반민특위에 구속됐다 4월 병보석으로 풀려나 쓴 ‘나의 告白’(1950년, 춘추사/이광수 전집 제13권, 삼중당, 1962, 175~287쪽 재수록)에서 이광수는 이와 관련, 귀국 이유와 자신의 입장을 세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그 결론은 해외에서의 독립투쟁 보다 조선 내에서 조선의 힘을 기르는 민족운동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에게 흥사단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첫해(1919년) 가을인가 한다. 흥사단의 이론은 도산의 실천과 아울러서 깊이 내 마음을 끌었다. 흥사단의 주지를 들은 내 인상으로는 민족의 독립은 독립을 운동함으로 될 것이 아니요, 민족이 독립의 실력을 갖춤으로만 이뤄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민족의 실력을 기르는 길은 민족 각 개인의 실력을 기르고, 이러한 개인들이 단결함으로 독립의 힘을 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힘이 없고는 독립이 오게 할 수도 없거니와, 설사 남의 힘으로 또는 요행으로 독립이 오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오래 지닐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깨닫고 보니 나는 동포들이 많이 사는 속으로 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제 주권이 있는 나라의 혁명 운동은 국외에서 하는 것이 편하고, 제 주권이 없이 남의 식민지가 된 나라의 독립 운동은 국내에서 하여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중략)… 인도의 독립 운동을 보면 간디를 비롯하여 모두 국내에서 하고 있었고, 국내에서 하므로 대부분을 합법적으로 하고 있었다. 합법적으로 동지의 결속을 많이 하면 기회를 얻어서 각지에서 일제히 일어날 수가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독립 운동자들은 대개 해외로 나왔다 우리나라의 독립 운동자들은 대개 해외로 나왔다. 이것은 마치 민족을 일본의 손에 내어 맡겨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중략)… 해외에서만 독립 운동을 하는 것은 첫째로는 서·북간도와 아령의 교민 동포로 독립군을 조직하여서 국내로 들이치는 것, 둘째로는 국제 정세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실상 독립운동 지도자의 다수는 이것을 바라는 모양이었다. 나는 이것이 독립을 얻는 한 길은 될지언정 원 길이요, 바른 길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요행을 바라고 남의 도움을 기다리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보았다. 그러면 민족 독립 운동의 정로(正路)는 무엇인가. 그것은 민족 자체의 힘을 기르는 것이었다. 이리하여서 나는 ‘국민개업, 국민개학, 국민개병(國民皆業, 國民皆學, 國民皆兵)’이라는 긴 글 한 편을 지어 독립신문에 실리고는 그 신문사에서 손을 떼고, 국내로 뛰어 들어오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이 뜻을 안 도산에게 고하였으나 그는 반대하고 나더러 미국으로 가라고 하였다. 도산은 내가 국내에 들어가는 것이 민족 운동자로서의 명성을 떨어뜨리는 길이라고 말하였다. 명성을 돌아 볼 것이 아니나 명성이 떨어지면 민중이 따르지 아니하므로 일을 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명성은 아낄 것이라고 도산은 간곡하게 말하였다. 그러나 나는 내 명성이라는 것을 그다지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지 아니하였고, 조그마한 내 명성을 아낀다는 것도 한 사특한 생각이라고 결론하고, 도산 모르게 귀국할 결심을 하였다 …(중략)… 나는 상해에서도 3년이나 4년 징역을 각오하였고 징역 하는 동안에 그 세월을 어떻게 이용할 것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두었었기 때문에 인제 신지에 도달하였다는 안심도 생겨서 좀 편안히 누워서 자고 싶었다 …(중략)… 징역을 각오한 나로도 제 발로 서울까지 가라는 것이 기뻤다. 나는 그날 밤차로 서울에 왔다. 나는 그 후에도 종로서에 하루, 정주서에 하루 붙들려 갔으나 다 무사히 나왔다. 그때는 소위 재등 총독의 문화 정책으로 해외에서 독립운동자가 들어오면 내버려 두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을 다행하게 생각하는 대신 무섭게 생각하였다. 왜 그런고 하면, 나는 필시 세상의 비난을 받기 쉽겠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선일보에서 내가 귀순하고 돌아 왔다는 기사를 내인 것을 시초로 거의 모든 신문과 잡지에서 나를 독립 운동을 배반한 자라고 공격하였다. 내가 왜장 터 ‘마루야마’의 집에 와 있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고, 동경서는 이광수 매장 연설회가 열렸다고 보도되었다. 김성수·송진우·장덕수·최남선·홍명희·김기전 같은 친구들은 그래도 나를 찾아 주었다. 나는 두문불출하고 죄인으로 자처하면서 내 장래의 계획을 생각하고, 또 글을 쓰고 있었다. 이때에 내 나이 서른 이었다 …(중략)… 동아일보가 그 강령으로 2000만 조선 민족의 표현기관이라는 것을 내세울 정도의 언론 자유가 용인된 것이었다. 민족 운동은, 국내에서는 독립 운동에서 일보 후퇴하여 민족의 단위성을 유지하려는 것으로 실제의 전선을 삼았다. 다시 말하면 민족 독립을 싸서 감추고 조선 민족은 조선 민족이요, 다른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 즉 조선 민족은 일본 통치하에 있는 국민일지언정, 일본에 화할 민족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한계를 지키자는 것이었다. 이것이 곧 합법적 민족 운동의 한계선이었다. 언론이 이 한계를 자칫 넘어 서면 곧 탄압이 왔다. 이러한 미온적인 민족 운동의 원리는 3·1운동으로 흥분된 강렬한 민족의식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은 물론이었다. 가능한 최대한도라는 것은 노성한 사람이 이해할 것이요, 청년층이 알아듣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이때에 공산주의가 등장하였다. 혁명 초의 레닌 러시아는 약소민족의 친구라고 알려졌다. ‘나는 민족 해방의 방편으로 공산당에 참가하였다’ 한 김준연의 고백은 당시 좌익에 들어 간 다수 사람의 심경이었을 것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실망하고 우리 민족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없는 우리로서는 새로 일어나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국제 공산당에 민족 해방의 희망을 붙이기가 쉬운 일이었다. 게다가 한형권(韓馨權)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름으로 레닌 정부에서 얻어 온 돈 중의 수 십 만원이 서울에 들어 왔기 때문에 군자금이 풍부하였다. 그래서 청년총동맹·노동 총동맹 같은 좌익적인 단체들이 생기고 그 세력은 날로 늘었으며, 또 이러한 단체들은 정면으로 공산주의를 표방하지는 아니하고 민족주의자와 합작하는 태도를 취한 것이 민족의식이 강한 남녀들을 흡수하는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조선의 사상과 언론은 좌우로 갈려 버렸다. 화요회, 북풍회 등의 공산주의 단체가 나서고 신생활 같은 공산주의 잡지도 나왔다. 이에 대하여 동아일보는 대표적인 민족주의 언론 기관으로 기치가 선명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내가 쓴 것이 민족개조론이요, 상쟁의 세계에서 상애의 세계에, 조선의 과거와 현재, 미래 등이었다 …(중략)… 이 글들은 많은 반향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그중에도 민족개조론이 민족을 모욕한 것이라 하여 일부 독자의 분격을 산 모양이어서 칼을 가진 5, 6인 청년의 일단이 밤중에 내 처소를 찾아 와서 내가 상해에서 돌아 온 것과 민족개조론에서 민족을 모욕한 죄를 묻고, 나를 죽인다고 위협하였으나 폭행은 없었고 그 길로 개벽사를 습격하여 기물을 파괴하였다. 그러고는 나를 종학원(宗學院)의 교수로 고빙하였다 하여 최린의 집을 습격하였다. 이 글들 때문에 이광수 매장론은 글로, 말로 여러 곳에 나타났다. (‘나의 고백’ 중 발췌, 이광수전집 13권, 삼중당, 1962년, 247~252쪽)




  동아일보 사사 1권(229~232쪽)은 당시 상황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시 안창호는 ‘나가자 나가자 하기를 20년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하건마는 20년 후의 오늘날까지 나갈 힘이 없지 아니하냐. 나갈 준비를 하기를 20년을 하였으면, 지금은 나갈 힘이 생겼으리라. 지금부터 나갈 준비를 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나간다 하기만 하면 금후 20년에도 여전히 나갈 힘이 없으리라. 그러므로 지금은 나갈 때가 아니요, 나갈 준비를 할 때다’고 하여 거족적인 실력 배양이 급선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무렵 물산장려와 민립대학설립운동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좌절됐다. 직접적인 원인은 총독부의 방해에 있었으나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민족운동 자체의 취약성에 있었다. 민족운동의 새로운 국면을 열기 위하여서는 지도층의 단합이 필요했으나 공산주의운동이 활발해지고 있는데 비하여 민족주의자들은 위축되어 있었다. 조만식 송진우 최원순 신석우 안재홍 최린 이종린 이승훈 박승빈 서상오 김성수 등 16~17명이 모여 가칭 ‘연정회(硏政會)’를 만들었으나 사회주의 계열의 비판으로 좌절됐다. 사설 ‘민족적 경륜’이 나가자 사회주의 계열은 ‘조선에서 허하는 범위 내에서’라는 문구를 문제 삼아 공세를 폈다. 첫 반응을 보인 것은 도쿄유학생 학우회의 좌경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2월 20일 10여 개 단체의 대표들을 규합해 동아일보 배척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성토문을 작성해 본국으로 발송했다. 1월 29일 본보는 ‘정치적 결사와 운동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해명 사설을 실어 본지(本旨)는 결코 그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며, 이런 논란을 초래한 것은 그 표현의 오해에서 비롯되었을 뿐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논란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4월 20일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의 임시대회는 ‘반동세력 급(及) 방해자에 대한 건’에서 반동세력으로 각파유지연맹을 지목하며 ‘박멸하기를 기(期)하자’는 결의를 하는 한편 방해자로는 동아일보를 들어 공격하며 ‘성토강연’에 나서기로 했다. 본보는 4월 23일자 사설 ‘노농총동맹 결의 중 본사에 관한 것에 대하여’와 동일자 기사 ‘양 문제의 진상’을 게재하여 해명하였다. ‘노농임시대회에서 논의된 본사의 사설 문제와 명월관 사건’이란 부제의 기사에서 ‘우리는 그 후 1월 29일에 다시 사설로써 석명(釋明)함과 같이 이것은 결코 문구의 모호함이요 결코 우리의 의사가 변함이 아니다. 언론이 극단으로 부자유한 이 세상에 우리의 이론을 철저하고 해박하게 발표할 수 없음은 천하가 모두 인정한 바요, 또한 우리의 석명이란 것도 그 점에 있어서 우리의 가슴에 담은 것을 그대로 표명치 못해 유감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고 하여 언론의 부자유에서 오는 표현상의 문제로 본지(本旨)가 문구와는 다름을 거듭 해명하였다. 노농총동맹이 이 문제를 공격한 배후에는, 이 사설과 관련시켜 ‘연정회’라는 정치단체가 동아일보의 비호 아래 발기되었다는 억측이 제기된 데 큰 원인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 기사에서 ‘연정회’와 본보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뿐 아니라 연정회라는 것도 실상은 평소 친분이 있는 몇몇 사람이 송년회를 겸하여 모인 자리에서 조선 사람의 살길이 위급하다며 충심으로 우려한 나머지 의견을 교환한 데 불과하였고, 무슨 특별한 의도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음을 보도하였다. 보도내용은 ‘세상에 전하는 허다한 풍설은 허황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더구나 ‘식도원에 모여서 총독부 당국자의 양해를 구하였다는 등은 전연 허설’이라고 밝혔다. 또 ‘개인의 일로 베이징에 왕복한 이광수 씨에 대하여 안창호 씨와 연락을 취하려는 계획이 있었느니 하며 이와 같이 맹랑한 일을 가지고 소위 사설 문제와 연결하여 무슨 조직적인 계획이나 진행하는 것처럼 전하는 자가 있음은 실로 기괴한 일이라 우리는 노농총동맹의 조사위원이 조금 더 사실의 진상을 조사하지 않고 사실무근이나 오해에서 나온 일을 그릇 믿고 그와 같은 모임에서 발표한 것은 유감 된 일’이라고 끝을 맺고 있다.”




  <‘민족적 경륜’ (1)~(5)의 전문>


  민족적 경륜(1) 민족 백년대계의 요(要) (1924년 1월 2일자 1면 사설)


  1. 한 회사의 사업에 일종의 계획이 필요하다하면 한 민족의 사업에도 계획이 필요할 것이다. 만일 상업이나 공업을 경영하기 위하여 회사를 조직할 때에 명세한 계획서를 작성하지 아니하고 한다하면 누구나 이를 치자(痴者)의 일이라고 조소할 것이니 이 조소는 가장 마땅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조선 민족은 지금 이 조소받을 무계획 상태에 있는 것이다.


  2. ‘조선 민족의 장래에 대한 계획이 무엇이냐’ 하고 누가 우리에게 물을 때에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하랴. 가령 교육과 상업의 진흥으로써 목적을 삼노라고 대답한다하고 다시 아까 묻던 사람이 ‘그러면 너희는 교육은 어떤 방법으로 상업은 어떤 계획으로 진흥 하려느냐’ 고 할 때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갑(甲)의 조선인은 갑(甲)의 의견대로 대답하고, 을(乙)의 조선인은을(乙)의 의견대로 대답하려니와 비록 그 갑(甲)이나 을(乙)이 조선인 중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그네의 대답이 우리 조선 민족의 대답은 아니요, 오직 그네 개인의 대답이다. 대개 개인의 의견은 그대로는 결코 민족적 행위로 표현되지 못하고 오직 그 의견이 민족적 의견 즉, 그 민족의 중심, 단결의 의견이 된 뒤에야 비로소 민족적 행위 또는 행동으로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논래(論來)하면 아직까지 우리 민족에게는 민족적 계획이 없다 할 것이다. 각인(各人)의 의식 속에 산재한 목적과 계획은 있으려니와 그것이 아직 응집치를 못한 것이다. 운무(雲霧)요 체(體)를 성(成)치 못한 것이다.


  3. 그러면 그것이 응집하여 체(體)를 성(成)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작일 신년호에서도 주장한 바와 같이 오직 단결의 일로(一路)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가장 낡은 진리이거니와 진리는 영원히 새로운 것이다. 우리는 단결의 필요를 십 수 년래(來)로 논(論)하였고 또 단결하자는 의견도 그만큼 많이 역설하여 왔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까지도 추상적 이론이었고 실행 즉 구체화의 시기에 달(達)하지 못하였었다. 이 모양으로 가는 동안에 우리의 민심은 날로 환산(渙散)하고 우리의 민력(民力)은 날로 쇠미하여 갔다. 우리는 이러고 있을 수 없는 절박한 시기를 당(當)하였다. 더욱이 신년을 당(當)하여 과거를 회고하고 장래를 전망할 때에 위급의 감(感)과 시급히 무슨 운동을 해야겠다는 전율할 만한 내적 요구가 치열함을 자각한다. 진실로 이대로 갈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전 정력을 경주하여 차제에 민족 백년의 대계를 확립하고 그것이 확립되는 날부터 그 계획의 실현을 위하여 전 민족적 대 분발을 하여야 할 것이다. 진실로 우리 민족의 처지는 한 민족적 일생에 한번이나 조우(遭遇)할 것이요 두 번도 조우하지 못할 그러한 위기다. 이러한 위기를 어떻게 벗어나나 하는 것이 조선 민족의 민족적 일생이 결정될 최대 시련이라 할 것이다.


  4. 노숙한 인사들은 말하리라. 어디 무슨 일이 꼭 계획대로 되느냐고. 아무리 계획을 확립한다하더라도 어디 그대로 실현이 되느냐고. 또 과학적 지식을 가졌다고 하는 인사, 그 중에도 유물론자들은 말하리라. 사회현상도 물리현상과 같이 필연적인 자연의 철칙에게 정명론(定命論)적으로 지배를 받는 것이요 결코 미신적인 자유의지론자가 말하는 모양으로 인격적 의지로 좌우할 것이 아니라고. 이 양설이 다 과학적 인 듯하여 현대인의 신뢰를 끄는 유혹성(誘惑性)이 있거니와 이것은 역사를 관념의 발전만으로 예상할 수 있다는 헤켈파의 유심론과 같이 미신적이요 독단적이다. 다소간 사학과 사회학에 대한 정당한 이해가 있는 자면 심적 원인이 사회진화에 큰 요인임을 인식할 것이다. 더구나 사회진화의 정도가 유고(愈高:뛰어나고 높음)할수록 인격적 이상의 세력이 사회의 진화의 도정(途程)을 결정하는 힘이 유대(愈大)한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가 이제 민족적 백년대계를 획립(劃立)하여야 할 것은 모든 조건으로 보아 가장 합리하고 적절한 일이다. 이하 우리의 의견을 술(述)하자.




  민족적 경륜(2) 정치적 결사와 운동 (1924년 1월 3일자 1면 사설) 위에서 인용.


  민족적 경륜(3) 산업적 결사와 운동 (1924년 1월 4일자 1면 사설)


  1. ‘먹어야 산다’ 이것은 극히 평범한 말이어니와 동시에 극히 엄준(嚴峻)한 자연의 법칙이다. 유물론자는 위(胃)의 문제가 인생 문제의 전체라고 까지 말하거니와 비록 그것은 유심론적 경향에 대한 극단의 반동론이라 하더라도 또한 전통적으로 ‘먹을 것’을 무시하는 조선인에게는 정문(頂門:정수리)의 일침이 될 만한 자격제(刺激劑)다. ‘먹어야 살겠다. 그런데 먹을 것이 없다’ 이것이 연래(年來)로 점점 격렬의 도(度)를 가(加)하는 우리의 절망적 절규다.


  2. 그러면 어쩌나?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가장 많은 것 같다.


  첫째는 맨체스터 씨 자유주의니 산업의 발달은 오직 각 개인의 자유 경쟁에 일임할 것이오, 결코 국가 혹은 단체가 간섭하고 좌우할 바가 아니라함과 둘째는 보호주의라 할 만한 것이니 이것은 총독부의 정치가가 비 보호적이기 때문에 조선의 산업은 진흥될 수 없다는 의견의 형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두 편이 다 ‘어찌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는 일치한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만 ‘어찌할 수 없다’ 만으로 단념하고 있을 수 있을까?


  3. 한 경제적 단위를 성(成)한 지방이 산업이 유치한 시대에 있을 때는 보호정책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함은 이론과 사실(史實)이 같이 설명하는 바다. 그런데 금일의 조선은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산업의 유치(幼稚)시대, 유치시대라는 것보다도 발아(發芽)시대에 있는 것이다. 이 시기에 강한 보호정책을 써야할 것은 자명한 리(理)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일변은 일본과 조선간의 중요 관세가 이미 철폐되어 조선에서도 제조할 수 있는 조선인의 일용품이 제방을 결한 모양으로 조선으로 유주(流注)하고 타 일변으로는 조선인의 부력(富力)이 날로 고갈하여 대규모의 산업을 기획할 능력이 갈수록 쇠약하여간다. 이러한 경우를 당(當)하여 우리가 만일 적당한 대책을 립(立)하지 아니하면 불원(不遠)에 우리가 경제적으로 파멸할 것은 명약관화다.


  4. ‘그러나 이 제도 밑에서야 어찌할 수가 있나?’ 이러한 말은 도저히 허(許)할 수 없는 말이다. 용서할 수 없는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제도 밑에서 가능한 무슨 방책을 세우지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이 우리의 생존에 대한 의무다. 그러면 어찌하면 좋은가? 우리는 물산장려의 낡은 진리에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1) 소극적으로 보호관세의 대용 효력을 얻기 위하여 조선 물품사용 동맹자를 얻을 것.


  (2) 적극적으로 조선인의 일용품이요 또 조선에서 제조하기 가능한 산업기관을 일으킬 자금의 출자자를 얻기 위하여 일대 산업적 결사를 조직하여야 할 것이다.


  5. 조선의 산업은 이상에서 말한 산업적 대 결사의 힘이 아니고는 결단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비록 이것이 완만한 듯하더라도 그것이 유일한 길인 이상에는 그것을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대 결사의 성공한 예를 영국의 길드에서 보았거니와 조선은 특수한 처지에 있기 때문에 조선인이 크게 분발만하면 전 민족적 대 산업 결사를 조성하기가 곤란할지언정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물산장려운동이 진실로 이 정신으로 일어난 것이니 비록 무슨 사정으로 하여 아직 심히 위축 부진한 상태에 있다하더라도 언제든지 이 운동이 최초의 목적을 관철치 아니코는 말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되나? 이론만이지’ 하는 것이 우리가 흔히 듣는 비평이어니와 그것은 마땅히 이렇게 말 할 것이다. ‘그것이 쉽게야 되나, 조금 조금씩 생장(生長)함으로 되는 것이라’고.


  6. 이에 말하는 산업적 결사와 작일(昨日) 본란에 말한 정치적 결사와는 비록 그 공업의 성질이 상이하다하더라도 또한 그 사업을 할 자는 지도자 측으로 보기나 일반 민중으로 보기나 동일한 자(者)일 것이다. 그럼으로 이 두 가지 운동에 선후(先後) 완급(緩急)이 있을 것이 아니요 동시에 함으로 서로 기세(氣勢)를 보익(補益)할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우리가 장차 말하려는 교육적 대 결사도 또한 민족적 경륜의 하나이니 정치적 결사, 산업적 결사, 교육적 결사, 이 3종의 대 결사는 조선민족의 구활로(救活路)이오 백년대계의 삼위일체라 할 것이다.




  민족적 경륜(4) 교육적 결사와 운동 (1924년 1월 5일자 1면 사설)


  1. 교육이란 말은 너무 자주 들었기 때문에 ‘또 교육’하고 다 아는 말을 반복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다 아는 것 중에 정말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교육은 그 중에 가장 큰 하나이다. 사람들은 교육을 구두선(口頭禪) 모양으로 부르건만 그 진의의(眞意義)를 아는 이가 의외로 희소하고 그것을 위하여 전력을 다할 정성은 더욱 적은 것이다.


  2. 새들이 새끼에게 나는 법과 적을 피하는 법과 餌(이:먹이)를 포(捕)하는 법을 가르친다. 그 가르침이 얼마나 열심인지는 우리가 상도(想到)치 못할만한 정도라 한다. 짐승도 그러하다. 교육의 본의가 여기 있는 것이다. 적을 피하고 이(餌)를 포(捕)하는 법의 교육과 연습에. 그런데 조선 고대의 교육은 첫째 전 민중도 아니었거니와 둘째 피적포이(避敵捕餌:적을 피하고 먹이를 잡음))의 이용후생적도 아니었었고 다(多)부분 장식적이었으며 근년(近年)의 교육도 아직 이 구투(舊套)를 탈(脫)하지 못하였다. 대개 일반 민중이 아직도 구식적인 교육의 목적의 잘못됨과 교육의 진의를 깨닫지 못한 까닭이다.


  3. 교육이란 첫째 인(人)이 다 받아야 할 것이고 어떤 선택된 일소(一小) 계급만이 받으면 족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사는 것이란 만인이 다할 것이오 어떤 사람만이 남까지 대신하여 살 것이 아닌 것과 같다. 그런데 현재의 조선에서는 학령 아동만으로 취학률이 100분의 5, 6에 불과하고 일반 인민, 그 중에도 전 인구의 거의 100분에 90(약 1,900백만)을 점한 농민은 대부분 전혀 교육을 못 받은 형편이다. 환언하면 피적포이(避敵捕餌)의 술(術)을 겨우 견습할 뿐이고 과학적으로 배워보지 못하는 자들이다. 이것이 민족의 가장 근본적인 대(大) 문제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여타 문제-정치문제, 경제문제, 사회문제 등 모든 문제는 영영 해결이 안 될 것이다. 대개 이런 문제의 당사자는 저 민중인 까닭이다.


  4. 둘째 교육이란 피적포이술(避敵捕餌術)을 주로 할 것이다. 이 말이 구식 귀에는 심히 야비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인생생활의 중심인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따라서 교육의 중심문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영국의 스펜서도 그의 교육론에 역설하였다. 그러면 어떤 것이 피적술(避敵術)이고 어떤 것이 포이술(捕餌術)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적이 무엇인지 이(餌)가 무엇인지를 말하면 될 것이다. 인생의 적은 (1)기후 (2)수토(水土) (3)질병의 원인 (4)타(他) 동물이오, 인생의 이(餌)는 (1)음식물 (2)공기 (3)약품이다. 우리는 기후의 적을 막기 위하여 가옥과 난실법(暖室法) 급(及) 양실법(凉室法)을 시설하고 의복을 제조하며 수토(水土)의 적을 정복하기 위하여 상하수도며 식림(植林)의 설비를 하며 질병의 원인이 되는 제(諸)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위생 의료의 제(諸) 설비를 하며 그와 반대로 음식물을 얻기 위하여 착경(鑿耕: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 먹음)과 어렵(漁獵) 등의 업(業)을 하며 또 타 지방의 산물을 구입할 자금을 얻기 위하여 제종(諸種)의 공업 광업을 하는 것이며 또 질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화학적으로 약품을 제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에 말한 적을 피하고 이(餌)를 포(捕)하는 법이 어느 것이나 물리학, 화학, 동식물학, 천문학, 지질학 등 과학적 지식으로 안 되는 것이 없으니 구주 선진국이 우리보다 우월한 것은 이 과학적 지식이 그네만 못한 까닭이다.


  5. 이상에 말한 것은 이미 결정된 사실로 결코 실험의 증(證)을 기다리는 이론이 아니다. 그러면 어찌할까.


  6. 우리의 진로는 이상의 소론(所論)으로 이미 결정되었을 것이다. 즉 전 민중에게 과학적 지식을 보급하는 대 운동을 일으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운동은 민중 독물(讀物)의 간행과 민중(특히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강습소의 설치로 얻을 것이요, 또 이 일을 하려면 거기 필요한 자금과 인물을 얻기 위한 민중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대 결사를 조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 그 때다. 이러한 운동에 대한 자세한 계획은 여기서 말할 것도 아니거니와 이 결사를 전도(傳道)회사에 비기면 가장 상상하기 용이할 것이다. 전도회사가 만든 자금을 가지고 각 지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모양으로 이 결사에서는 각 농촌에 어문과 과학의 선교사를 파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근사(近似)할 것이다. 위에도 이 삼종(三鐘)의 결사와 운동이 조선민족 구제의 삼위일체적 방책인 것을 말하였거니와 이 교육운동은 어떤 의미로 보아 타 이종(二鐘)의 운동의 근저가 될 것이다. 이제 그 관계를 다시 고찰해 보자.




  민족적 경륜(5) 교육산업 정치의 관계 (1924년 1월 6일자 1면 사설)


  1. ‘어쩌나?’할 때도 아니요 ‘할 수 없다’ 할 때도 아니다. 더구나 ‘그저 어찌 되겠지’ 하고 우두커니 수수방관할 때도 아니고 더더구나 ‘어떤 영웅이 나올 테지’ 하고 정도령(鄭道令)을 고대하는 듯한 어리석음을 가질 때도 아니다. 우리는 지금 큰 소리로 ‘옳다, 이렇게 해야 한다. 하면 된다, 누구를 기다릴 것이 아니고 우리 민족 각자가 일어나 해야 한다’ 하고 일어날 때다. 금년도 작년처럼 보내랴. 도저히 그럴 수 없다. 우리는 큰 사업과 깊은 의미로 충만한 금년을 만들어야 한다.


  2. 우리는 이상 4회에 긍하여 정치적 결사와 산업적 결사와 교육적 결사가 조선 민족을 구제하는 삼위일체의 방책인 것을 말하였다. 그러나 이 세 가지의 관계가 어떠한지 다시 말하면 이 세 가지는 따로 따로 시기를 떼어서 할 것인가, 또는 동시에 할 것인가, 각각 전연(全然)히 독립적으로 할 것인가, 또는 밀접한 관계가 있도록 할 것인가, 이것은 실제에는 심히 중대한 문제다.


  3. 정치적 결사는 전 조선 민족의 중심 세력이 되기를 기약하여야 할 것이니 이 결사의 의견이 곧 조선 민족의 의견이요, 이 결사의 행동이 곧 조선 민족의 행동이 되기를 기약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 되려면 될 수 있는 대로 전 조선 각지에서 다수의 회원을 얻을 필요가 있고 다수의 회원을 얻으려면 부득이 농민에게로 가야 할 것이니, 대개 조선에서 일천 사백만은 농민인 까닭이다. 농민 중에서 많은 회원을 얻으려면 첫째 농민 중에 지식을 보급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일을 하는 것이 교육적 결사의 사명이다. 교육적 결사에서는 일변 과학적 지식을 보급하면서 타 일변 농촌 자치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생활의 방식을 가르쳐 정치 생활의 준비를 줄 것이다. 그럼으로 정치운동과 농민교육운동과는 서로 복배(腹背)가 되어 상조상응(相助相應)할 것이다.


  4. 산업적 결사도 그 최후의 목적은 전 조선 내의 모든 산업의 통어(統御)에 있을 것이니 그리하려면 거액의 자본이 필요하고 거액의 자본을 得하려면 수백만의 회원이 필요하고 수백만의 회원을 얻으려면 역시 농민에게로 가야 할 것이다. 아마 이 대(大) 산업조합의 기초는 도시의 주민보다 농촌의 주민에 있을 것이요 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산업적 결사를 위해서도 농민을 본위로 하는 교육적 결사는 중요한 보조기관이 되는 것이다. 교육적 결사는 과학적 지식을 보급할 때에 경제학적 지식도 보급할 것이요. 특히 농촌의 경제적 자치와 조선의 경제적 생활에 관하여 가르칠 바가 있을 것이니 각 농촌에는 반드시 대 산업조합의 지점이 있어 그 농촌의 경제생활의 중심이 될 것이다.


  5. 이 세 가지 사업 중에 가장 곤란할 듯한 것이 교육적 결사이거니와 이것도 결코 불가능은 아니다. 현재 지식계급의 청년 중에는 적당한 사업을 잡지 못하여 고민하는 이가 많으며 또 민중을 위한 헌신을 원하는 이가 많으니 상당한 방법과 자력(資力)만 얻으면 수백인의 민중교육자를 얻기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요. 가령 이백인의 민중교사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매년 2만 원 가량의 수입만 있으면 할 도리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없어 못한다면 너무도 민족적 수치가 아닌가.


  6. 이 세 가지 사업은 동시에 일으킬 것이니 동일한 최고 간부의 지도하에 분업적으로 하는 것도 좋거니와 사업 자체는 절연(截然)히 독립하는 것이 좋을 것이요. 특히 정치적 결사 이외의 것은 절대적 색채를 띠지 않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대개 정치적 색채를 띠면 종종(種種)의 위험이 반(伴)하는 까닭이다.


  7. 조선인으로 누구인들 조선인의 운명을 근심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 또 조선인의 운명을 근심하는 이는 반드시 조선인의 생도(生途)를 궁구(窮究)할 것이다. 그러하거늘 지금 외지에 조선의 민중적 경륜이 확립하지 못하여 전(全)민족이 거취를 찾지 못함은 심히 개탄할 일이다. 이에 우리는 우리의 확언하는 바를 피력하는 것이니 이것이 기회가 되어 민족적 경륜에 관한 열렬하고 심각한 토구(討究)가 생기고 아울러 금년 내로 경륜에서 나오는 제(諸) 사업이 서(緖)에 취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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