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홍명희, 최남선, 이광수 선생을 조선의 3대 천재라고 합니다.


  언제, 누가, 어디서 그런 말을 처음 사용했는지는 불분명하나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 ‘少年’에 세 사람의 글이 실리면서 ‘조선 삼재(三才)’ 즉 조선의 세 천재라는 칭호가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강영주, ‘벽초 홍명희 평전’, 사계절, 2004년, 71쪽)


  최남선이 발행한 ‘少年’지 ‘편집실 통기’에 “홍명희와 이광수가 앞으로 잡지 발행에 참여하게 되어 ‘少年’의 앞길은 광명”이라고 한 것이 1910년 3월호이니 이때 홍명희 22세, 최남선은 20세, 이광수 18세였습니다. 


  류시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에 따르면 “양건식(梁建植)은 홍명희를 ‘동경 유학생 중 3재자(三才子)의 1인’ (1924. 2, ‘文人印象互記’, ‘개벽’ 44, 103면)이라고 했으며, 신형철(申瑩澈)은 홍명희, 최남선, 이광수를 ‘동경 3재(東京 三才)’라고 불렀으며(1928. 2, ‘명사제씨(名士諸氏) 만나기 전 생각과 만난 후의 인상’, ‘별건곤’ 11, 64면), 현상윤은 이들을 ‘조선 3재(朝鮮 三才)’ (1941. 8, ‘홍명희 – 현기당 대담’, ‘조광’ 7~8, 104면)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東京 三才를 통해본 한말 일제 초 조선의 지성계’, 한국인물사연구 10호, 2008년 9월호)




  이 조선의 ‘세 천재’가 모두 동아일보에 한때 몸담았습니다. 


  제일 먼저 동아일보와 인연을 맺은 사람은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   그는 1923년 5월 16일 ‘촉탁기자’로 발령받아 12월 1일자로 ‘임(任) 기자’가 됐고 1926년과 29년 두 차례에 걸쳐 4년 6개월 여를 편집국장으로 재임했습니다.  그리고 13편의 소설을 동아일보에 연재했고 1926년 동아일보의 옛 사가(社歌)도 그가 지었으며 그의 두번째 부인이자 조선 최초의 여의사 허영숙(許英肅)은  동아일보 학예부장으로 1년 3개월간(1925년 12월~1927년 3월) 그와 함께 근무하는 진기록을 남겼습니다. 


  “내가 상해에서 돌아와서 나 스스로 작정한 3년 칩거를 치르고 나서 나는 동아일보 기자로 들어갔다. 맡은 것은 논설과 소설이었다. 동아일보 입사 전 나는 경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또는 불교학원, 보성전문, 종학원 등에서 철학 심리학 같은 것을 강의하여서 밥을 벌었었다. 동아일보에 들어가서부터는 일정한 수입도 생기는 내 뜻에 맞는 일자리도 생겼으나…” (이광수, ‘나의 고백’, 이광수 전집 13, 삼중당, 1963, 253쪽) 




  그의 입사는 송진우 당시 동아일보 사장과 인촌 선생의 권유로 이뤄졌습니다. 


  “‘개벽’에서도 내 글이 실리지 못하게 되어서 나는 완전히 문필권에서 축출을 당한 셈이 되었다. 이러는 동안에 틈틈이 쓴 것이 ‘가실(嘉實)’이라는 단편소설이다. 이것은 삼국사를 읽다가 얻은 감흥을 제재로 한 것이어서 ‘하나님 전 상서, 아버님 전 상서’(수필 ‘감사와 사죄’, ‘백조’ 제2호 게재 – 인용자 주)와 함께 어디 발표할 가망도 없으면서 쓴 것들 중에 하나다. 이때 아마 송 고하(宋 古下)라고 기억되는데 소설 쓴 것이 있거든 동아일보에 하나 게재하라는 말을 하였다. 고하는 물론 동아일보 사장이었다. 이 말은 언론계에서 완전히 축출된 나에게는 비할 데 없이 고마운 말이었다. 그래서 ‘가실’을 동아일보에 보냈더니, 그것이 며칠 동안 연재가 되었다. 이것은 아마 고하가 나를 세상에 다시 끌어내어주려는 호의에서 오래 생각한 끝에 나온 것이다. 이것이 내가 동아일보에 글을 쓰게 된 시초다. 그리고는 얼마 아니 하여 하루는 인촌 김성수 씨와 함께 고하가 내 집을 찾아서 입사를 권하게 되었다. 나도 오직 감격으로 이에 응하였다. 그들은 매장된 나를 무덤 속에서 끌어내는 것이요. 그 밖에 아무 요구도 없는 것이었다.” (이광수, ‘다난한 반생의 도정’, ‘조광’ 1936년 6월호, 120~121쪽. 이광수 전집 14, 삼중당, 1962, 403쪽) 




  동아일보 입사 경위가 위와 같은데 어떤 사람들은 얼토당토 않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이광수는 1922년 총독부의 주선으로 수당만도 한 달에 300엔의 엄청난 돈을 받고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들어갔다(저자 주 – ‘일제침략하 한국 36년사’ 제6권, 1921년 5월 16일 귀국, 李光洙가 총독과 처음 만난 것은 1922년 9월 30일 밤이었다. 재등실일기, 9월 30일 대목). 1922년 가을 쯤의 300엔이라는 돈의 가치를 설명한다면 대충 이렇다. 찬거리로 5전(錢)을 내면 푸줏간에서 150g 정도의 작은 쇠고기 덩이를 주었다니까 600g 1근에 20전 정도. 지금의 쇠고기 값을 600g에 3천원으로 잡으면 300엔=450만원이라는 숫치가 나온다. 한편 1929년 쯤 보통 기자 봉급이 30엔=위의 계산대로 하면 45만원, 좀 나은 데가 50엔=75만원, 파격적인 대우의 부장 급이 100엔=150만원이었다니까 옛날에는 없던 지금의 보너스제도를 참작하면 300엔=450만원이라는 돈의 가치 대비는 거의 걸맞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姜東鎭, ‘日帝의 韓國侵略政策史 – 1920년대를 중심으로’, 한길사, 1980, 394~395쪽)  


  “이광수는 1922년 총독부 주선으로 월 300엔의 월급을 받고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들어가고…” (김민철, ‘기억을 둘러싼 투쟁 – 친일 문제와 과거 청산 운동’, 서울, 아세아문화사, 2006, 122쪽)




  이들 글의 근거는 김정명이 펴낸 ‘명치백년사총서-조선독립운동’ 제2권입니다. 




  김정명 편, ‘명치백년사 총서 – 조선독립운동’ 제2권(원서방, 동경, 1967 – 번역 2020위)


  (1쪽) 머리말 중


  부록 ‘조선민족운동연감 1919년~1932년’은 상해 일본총영사관 경찰부 제2과가 1932년 4월 30일에 상해 프랑스 조계에 있던 대한교민단 사무소에서 압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동 교민단이 보관하고 있던 문헌에 의해 작성한 것으로써 이것에 의해 임시정부의 관계단체와 운동 경과를 알 수 있다. 


  (181쪽) 부록 조선민족운동연감


  일러두기 


  본 연감은 소화7년(1932년) 4월 29일 천장절 당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참칭(僭稱·분수에 넘치는 칭호를 스스로 이름)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한국독립당의 지휘에 의해 야기된 불상사건(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말함 – 인용자 주) 다음날 수사를 위해 상해 프랑스 조계 당국과 협력하여 동 조계 내용의 장소 수 곳을 급습했을 때 동 조계 마랑로 보경리 제4호 대한교민단 사무소에서 압수한 참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동 교민단이 보관하고 있던 많은 문서를 건건마다 편집자의 주관을 일절 가미하지 않고 요점을 적출해 아래와 같은 방법에 의해 편집한 것이다. 


  1. 발생사항을 연도별로 분류하고 또한 발생월일 순으로 기술함


  1. 위 기술에 해당되지 않는 사항은 연도별로 그 외로 부기함


  1. 참조한 증거물건번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동 교민단 압수목록의 번호로서 말미에  본 압수목록 그림을 첨부함 


  (273쪽) 5.15 鮮內 이광수가 총독부의 알선에 의해 동아일보에 입사하다. 수당 월 3백원이라고(李光洙は總督府の斡旋により東亞日報へ入社す手當月三百圓なりと). 3년도 제7호 






김정명 편, 명치백년사 총서 273쪽








국사편찬위 편, ‘일제침략하 한국 36년사’ 제6권, 183쪽






  국사편찬위원회 편,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제6권’(서울, 국사편찬위원회, 1971) 183쪽은 김정명의 자료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에 불과한 것으로 새로운 자료거나 또다른 자료는 아닙니다.




  (1921년 5월) 15일


  이광수가 조선총독부 알선으로 동아일보에 입사하다. 월수당 300원을 받다.(조선독립운동 제2권 민족주의 운동편)






  그러나 이는 부정확한 자료입니다.


  우선 입사 연도가 ‘민국 3년도’(1921년)나 1922년이 아니라 1923년 5월 16일이며


  급여는 ‘수당만도 한 달에 300엔의 엄청난 돈’이 아니라 ‘본봉 120엔, 수당 30엔’이었습니다.


  본사가 보관하고 있는 ‘일정시대 퇴사직원록(日政時代 退社職員錄)’ 중 ‘이광수’의 인사기록에


  대정 12년(1923년) 5월 16일 취임(就任) 촉탁(囑託)기자


                                       12월   1일 임(任) 기자 본봉 120엔 수당 30엔이라고 분명히 기록돼 있습니다.





  강동진은 “1929년 쯤 보통 기자 봉급이 30엔=위의 계산대로 하면 45만원, 좀 나은 데가 50엔=75만원, 파격적인 대우의 부장 급이 100엔=150만원이었다니까 옛날에는 없던 지금의 보너스제도를 참작하면 300엔=450만원이라는 돈의 가치 대비는 거의 걸맞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고 했으나 동아일보는 1920년 창간 당시 처우가 아래 표와 같았다는 점, 그리고 이미 문명(文名)을 날리던 이광수가 31살의 나이로 뒤늦게 입사한 것을 고려할 때 월급 120엔과 수당 30엔은 그렇게 파격적인 대우도 아니었습니다.




  이광수는 그 후 1926년 11월 8일 편집국장이 됐을 때도 월급이 150엔이었습니다. 


창간 당시 동아일보 사원들의 처우(사사 1권 114쪽)


직 책 보 수(원) 비 고
주 간 120 외 수당 30원
국 장 100 편집국장 수당 30원
사진반 100
부 장 80~70
논설반 80~70
기 자 80~60 전속화가 80원

기자 70~60원
서 기 70~30
과 장 60 외 수당 10원
공무사원 60~16
평사원 50~30
신사(信使)·소제부(掃除夫) 25~20
급 사 일급 50전



  또 ‘총독부의 주선으로 동아일보에 입사했다’는 강동진과 김민철의 기술 역시 ‘수당 30엔’을 ‘수당 300엔’이라고 잘못 기록하고 있는 자료를 검증 없이 잘못 인용한 것처럼 잘못된 것입니다.  


  동아일보가 이들의 주장처럼 ‘총독부의 주선을 받아들여’ 그를 입사시켰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동아일보는 아마 그때 더 이상 ‘민족지’이기를 포기한 것으로 그 증세는 지면 곳곳에 나타나 이미 그 시대에 동아일보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달라졌을 것이고 비판의 기록들이 쏟아져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위 자료는 날짜별로 있었던 상해임시정부의 일, 예를 들면


  (273쪽) 5.7 (上海) 任國務院秘書長


                  (外務總長代理次長) 申翼熙


                  任交通總長 孫貞道


와 같은 기록과


  (273쪽) 5.15 鮮內 이광수가 총독부의 알선에 의해 동아일보에 입사하다. 수당 월 3백원이라고. 3년도 제7호


 와 같은 조선 내 사건, 보고, 동정, 이런 저런 이야기 등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5.15 선내(鮮內) 이광수가 총독부의 알선에 의해 동아일보에 입사하다’는 기록은 이 문서의 단 한줄 외 그 어느 곳에도 없는 것입니다.


  임정 측의 자료가 위와 같이 잘못 기록되게 된 경위를 알 수는 없으나 동경유학생들의 1919년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했던 이광수가 이를 세계 각국에 알리기 위해 2·8 독립선언 전 상해로 가 그곳에서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상해임시정부 기관지 ‘獨立新聞’을 창간, 발행하다 갑자기 귀국하면서 온갖 비난, 오해, 억측이 생겼는데 그때 나온 헛소문 중 하나를 출처 없이 그냥 적어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이광수가 입사 후 쓴 글 ‘민족적 경륜’(1924년 1월 2일자부터 6일자까지 5회 연재)이 큰 파문을 불러 일으켰을 때 상해임시정부의 기관지 ‘獨立新聞’ (1924년 4월 26일자 사설) 에서 이를 뒤늦게 비판하면서도 그들이 가지고 있던 위 문서의 내용을 인용하지 않은 것은 상해임시정부 스스로도 그 기록이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보여집니다.  


  “귀국한 춘원은 두 가지 면에서 오해를 받아 비난을 받았다. 애인 허영숙이 상해에 올 때 가지고 있던 여권은 총독부 고등계의 악명 높던 미와(三輪) 경부(警部)의 신원보증으로 발급이 됐다는 것과 도산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모두 만류를 했는데도 아무도 모르게 기차를 타고 북경을 거쳐 신의주로 들어 왔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상한 것은 신의주에 도착했을 때 그는 압송되어 투옥된 게 아니라 형사들에 의해 임의동행 형식으로 서울로 들어 왔다는 것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당자인 춘원은 진위를 밝히지 않고 허영숙과 결혼했다. 민족 배반자라는 매도의 소리가 높았다. 그런 중에 춘원은 다시 필화사건에 휩쓸리게 되었다. 당시의 종합지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집필하게 되었는데, 주지는 우리는 열등민족이기 때문에 개조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씌어져 그렇잖아도 나빠져 있던 독자들의 비위를 거스르게 되었다. 허영숙을 통해 총독부에 매수되어 돌아오더니 민족성까지 모독하며 일제에게 동조한다 하여 물의가 일어나 개벽사는 부서지고 숭삼동(崇三洞) 춘원 집은 돌팔매질을 당하여 유리창이 박살났다. 이 사건으로 춘원은 피신하여 두문불출하게 되었고 문필 권에서도 제외되었을 뿐 아니라 거의 매장되다시피 했다.”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 동아일보사, 1985, 189~191쪽)




  문필권에서 조차 외면한  조선의 인재(人材) 이광수를  동아일보가 안은 것입니다.


  이광수의 기술처럼 “이는 나를 세상에 다시 끌어내어주려는 호의에서 오래 생각한 끝에 나온 것… 나도 오직 감격으로 이에 응하였다. 그들은 매장된 나를 무덤 속에서 끌어내는 것이요. 그 밖에 아무 요구도 없는 것” 이었습니다. (이광수, ‘다난한 반생의 도정’, ‘조광’ 1936년 6월호. 이광수 전집 14, 삼중당, 1962, 403~404쪽) 




  다음은 이광수의 입사 관련 기록(‘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  189~190쪽, 동아일보사, 1985)


  그 후 춘원이 곤경에 빠져 사회적으로 매장이 되어 거의 버려진 상태에 있을 때 구원의 손길을 뻗혀 다시 재기를 하도록 만들어 준 은인도 인촌이었다. 춘원은 와세다 대학 재학 중인 1917년 매일신보에 우리 신문학 사상 최초의 장편소설인 ‘無情’을 발표하여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작가가 되었다. 文名을 얻은 그는 1919년 2월 8일, 동경에서 일어난 28독립선언 때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영문으로 번역된 선언서를 임시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상해로 탈출했다. 상해에 들어간 그는 도산 안창호를 만나 그의 사상에 크게 공명하고 도산을 도와 임정의 일을 보았다. 그는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주필을 맡았다. 그로부터 2년 뒤 연인이던 허영숙이 상해를 찾아와 설득하여 허영숙을 따라 본국으로 돌아 왔다…(중략)…이 사건으로 춘원은 피신하여 두문불출하게 되었고 문필권에서도 제외되었을 뿐 아니라 거의 매장되다시피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보고 제일 딱하게 여긴 이는 인촌이었다. 일년 쯤 지나서 인촌은 고하에게 춘원 문제를 상의했다.


  “어떻게 구출해 줄 방도가 없을까?”

  “안 돼, 개벽사에 돌멩이가 날아간 지 일 년도 안 됐는데 그 사람이 또 나서보게 이번엔 우리 신문이 돌팔매 당할걸세.”

  “전후 과실이야 어떻든 그 재능이 아까운 사람이란 말여. 어찌 사람이 실수 않고 사는가? 그 실수, 다시 되풀이하지 않고 나라 위해 헌신하면 되는 거 아녀? 과(過)없는 사람 어딨는가? 과보다 공(功)이 많으면 되는 거지? 다시 그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어 보세. 좋은 방도가 없을까?”


  처음에는 고개를 흔들던 고하도 인촌의 진지한 제의에 마침내 동감을 표시했다. 춘원을 동아일보로 데려오기 위해서는 그의 글을 발표하여 여론의 추세를 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춘원은 ‘가실(嘉實)’이란 단편을 Y생(生)이란 익명으로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그리하여 춘원은 동아일보의 객원기자가 되었고 미구에는 편집국장이 되어 그의 회상대로 그의 생애 중 가장 바쁘고 보람 있는 기간을 보내게 됐다.


  위 책 187~189쪽은 이광수와 인촌 선생과의 관계를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춘원(이광수)은 인촌보다 한 살이 아래였다…(중략)…인촌이 춘원을 알게 된 것은 동경 유학시절이 아니고 인촌이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중앙학교 인수를 서두르고 있을 때였다. 민세(民世) 안재홍과 권덕규(權悳奎)가 인촌에게 소개했던 것이다…(중략)…평북 정주가 고향인 춘원은 소년시절에 조실부모하고 고아나 다름없이 되어 서울에 온 다음 14세에 일진회의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동경유학을 갔지만 나라가 망하는 바람에 학비가 끊겨 대성중학교를 다니다가 귀국, 얼마 후에 다시 도일(渡日)하여 명치학원 중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향리에 돌아와 이승훈 밑에서 오산학교 교원을 했다. 그 후 상해 시베리아 등을 방랑하다가 서울에 올라와 최남선의 신문관을 자주 들리곤 했는데 동료들 사이에서는 수재로 평판이 나 있었다. 춘원을 계동 댁에서 만난 인촌은 대뜸 학업을 계속해 보는 것이 어떠냐고 제의했다.


  “글쎄요”

  “동경 있을 적에 벽초(홍명희) 형으로부터 형의 말씀은 많이 들었소. 대단한 수재라고 말이요. 오늘날의 우리나라는 올바로 배운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형 같은 분이 더 배워서 나라를 위해 일을 해야 헙니다.”

  “말씀은 고맙고 십분 이해하겠습니다만”

  “학비 염려는 마시요. 학교를 해 보겠다고 해서 요즘 궁색하기는 하지만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공부를 계속해 보시오.”


 ‘이광수전집 별권 화보, 평전, 연보’ (삼중당, 1976년 중판, 103쪽, 동경유학시절-2차 중)의 기록.


 “‘명계관’은 발끈 뒤집혔다. 영숙이 조금만 늦게 왔던들 춘원은 이미 저승의 사람이 됐을런지도 모른다. 응급치료로 겨우 의식을 회복한 춘원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듯. ‘나는 이대로 죽소. 김성수씨에게 연락해 주오’하더라는 것이다. 영숙은 즉시 우체국으로 달려가 인촌 김성수에게 지급전보를 쳤다. 인촌은 춘원에게 매달 3십원씩의 학비를 보내 준 후원자였고 죽음을 목전에 둔 춘원이 연락할 데란 그곳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인촌으로부터 녹용대보탕(鹿茸大補湯) 백첩과 입원비 5십원이 온 것은 그로부터 삼일 뒤였다.”(‘춘원 이광수’ 박계주 곽학송 공저)





댓글 없음 »

No comments yet.

RSS feed for comments on this post. TrackBack URL

Leave a comment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