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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1879. 11. 14~1953. 9. 13)




  일본판 ‘쉰들러’로 불리는 후세(布施) 변호사가 동아일보 지면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23년 8월 1일자 3면 1단 기사였습니다.


  포시(布施) 씨 의열단 변호


 이왕부터 조선 사람에게는 동정이 만타


 “금번에 온 포시(布施) 씨는 동경에서 유력한 변호사로 조선 사람에게 많은 동정을 가진 이로서 4년 전 동경서 독립운동사건으로 아홉 사람이 입옥되었을 때와 최근에 세상의 이목을 놀라게 하였던 김익상(金益相)사건에도 무료로 변호를 하였고 또 오는 의열단(義烈團)사건의 공판 때에도 변호한다더라.”


  1923년 8월 1일자 3면


  ‘4년 전 동경의 독립운동사건’이란 1919년 동경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을 말하는데 후세 변호사는 이 사건으로 법정에 서게 된 최팔용 백관수 윤창석 김도연 서춘 김철수 송계백 김상덕 이종근 등 9명의 무료변론을 맡았습니다.


  “이렇게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 학생들의 태도에 동정을 했음인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의 떳떳한 태도에 감명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일본 법조계에서도 저명한 화정탁장(花井卓藏), 제택청명, 포시진치(布施辰治), 금정가행(今井嘉幸) 씨 등 일본인 변호사들까지 무료변론에 임하여 무죄를 주장하는가하면 관대한 처분이 있기를 주장했었다. 변호사들의 주장은 ‘학생들의 신분으로 자기 나라의 독립을 부르짖은 것이 어찌하여 일본 법률의 내란죄에 해당되겠느냐’하는 것이었으며 ‘민족자결의 사조가 팽창함에 비추어 학생들의 주장은 정당한 것이니 죄 할 수없는 것이 아니냐’고 열변을 토하자 담당판사들도 우리들에 내란죄를 적용하지 못하고 ‘출판법 위반’이라는 죄명만 해당시켜서 최팔용 백관수 윤창석 씨와 나에게는 9개월의 금고형을 언도했으며 나머지는 7개월의 실형을 언도하였다.” (김도연,  ‘나의 인생백서’, 경우출판사, 1967년, 81~82쪽)


  ‘김익상 사건’은 1921년 9월 12일 백주에 총독부에 폭탄을 던진데 이어 1922년 3월 28일 상해 부두에서 다나카(田中)대장을 저격한 사건. 동아일보는 이 두 사건의 주역이 ‘김익상(金益相)’이란 사실을 특종 보도했습니다(D-Story 20, 무학의 文士 유광렬 선생 편 참조).


  “3월에 철혈단원 김익상은 일본 군벌의 거두인 다나카(田中)를 저격하였으나 다나카는 맞지 아니하고 미국 부인 스나이더 여사가 맞아 죽었다. 이때에 일본 경찰은 작년 9월에 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어느 날 일본 경찰이 수배한 문서를 흘끗 노려보고 그것이 서울 마포 공덕리 김익상임을 알았다. 곧 공덕리로 가서 김익상의 소년시대부터 해외에 나가기까지의 이력과 그의 성격을 자세히 기록하여 거의 사회면 전면을 뒤덮었다. 이날에 서울서 발행한 신문으로 우리말이나 일본어 신문에는 한 줄도 내지 못하여 스쿱이 되고 말았다.”


  “김익상은 상해에서 일본영사 경찰에 잡히어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가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사(社)에서는 나를 나가사키에 특파하여 공판 방청기를 쓰게 하였다. 공판은 몇 번 연기가 되었으므로 나는 거의 2주일이나 그곳에서 묵고 있었다. 쌀 한 가마에 6, 7원으로 물가가 싸던 그때에 나는 7백여 원의 여비를 받아가지고 갔으니 사로서는 입사 이래 계속하여 많은 스쿱을 뽑는 데 대한 상여도 겸하여 상당히 후대하는 여비였다. 나는 김익상의 자필사인을 얻기 위하여 일본말이나마 성경을 들여보내고 그 자필 영수증을 받아서 자필사인이라고 본사에 보내는 위트를 보이던 것도 회상된다. 공판기는 장문의 신문 전보로 역시 그날 사회면의 전면을 뒤덮던 생각이 난다.” (유광렬, ‘기자반세기’, 서문당, 1969, 168쪽)


  ‘김익상 사건’에 대한 동아일보의 끈질긴 후속 보도는 타지를 압도했습니다. (‘김익상 사건’ 보도에 대해서는 후술할 예정입니다)


  동아일보 1922년 7월 2일자 3면에 따르면 ‘만원(滿員)의 방청석, 조선 기자는 1명뿐’이라는 제하의 기사에 “방청석에는 수명의 경관이 경계하며 장기(長崎)현 순사교습소 교습생 60여 명이 방청을 하였으며 보통 방청석에는 조선인과 일본 청년이 입추의 여지도 없이 들어 안고, 문밖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이 수십 명이며 신문 기자석에는 동경, 대판의 각 큰 신문 통신원과 장기(長崎)의 유수한 신문기자가 늘어앉아서 바삐 붓대를 놀리는데 조선에서 온 기자는 오직 한 사람뿐이다”고 합니다. 한 사람 뿐이었던 그가 동아일보의 유광렬 기자였습니다.


  1922년 7월 2일자 3면


  8월 7일 첫 공판을 앞두고 후세 변호사가 조선에 와 변호하려던 ‘의열단 사건’은 김시현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이 관공서를 폭파하려고 무기를 중국에서 수하물로 위장해 반입하려다 1923년 3월 15일 검거된 독립운동 사상 최대 규모의 무기반입 사건이었습니다.


  의열단 사건 재판에 맞춰 조선에 온 후세 변호사는 조선인 유학생 단체인 북성회가 주관하고 동아일보사가 후원한 ‘하기순회강연회’를 가졌습니다.


  “북성회 회원들은 일본 내에서의 후세의 활약상을 높이 평가하고 그를 조선에 초청하여 조선문제를 국제적으로 여론화시키려 했을 것이다. 조선 내 11 단체 60여명은 서울역에 단체 깃발을 내거는 등 강연단을 환영하였다.” (이규수,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후세 다쓰지(布施辰治)의 한국 인식’, 한국근현대사연구 2003년 여름호, 418쪽)


  그에 관한 기사는 1923년 8월 3일자 1면과 3면에 상세히 보도됐습니다.


  1923년 8월 3일자 1면, ‘신인(新人)의 조선인상(朝鮮印象)’ 제하의 사설은 후세 변호사의 조선 방문 감상 중 “정거장과 열차 내에서 일본인이 조선인에게 무엇을 청하든지 명령할 시에는 어조(語調)부터 하대를 한다” “부산에서부터 경성으로 오도록 도중의 정거장과 경성의 훌륭한 가옥을 보며 조선은 비상히 발달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과연 그 훌륭한 가옥은 조선인을 위하야 생기었으며 조선인의 이용에 공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다수한 조선인에게 유익을 끼치지 못한다하면 금일의 조선 계발(啓發)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인을 위하여는 차라리 슬퍼할 현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고한 말 등이 조선인적 감정으로 조선을 본 점이라며 일본 위정자의 오산(誤算)을 지적했습니다.


  <사설 전문>


  인간은 외계에 접촉할 제(際)에 반드시 감정이 반하는 고로 동일한 사물을 관찰할지라도 관찰하는 인격에 수(隧)하야 인상(印像)되는바가 천차만별이라고 하리라. 어찌 조선을 보는 사람에게 한(限)하리오. 영국을 보는 사람이나 미국을 보는 사람이 모두 그러하리니 조선을 보고 그네들이 받은 인상과 감상이 각각 동일하지 아니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연이나 세상에 어떠한 사물을 물론하고 진실한 이해를 득하기 위하야 그 사물에 대할 시에는 무엇보다도 그 대상물에 자기를 투입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다 – 즉 자기의 주관을 포기하고 그 접촉물인 객관적 존재에 융화하여 가지고 보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다. 자타(自他)의 지위를 전도하야 가지고 역지(易地)하야 객관을 주관화하며 대상에게 동정을 가지고 관(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조건이다. 과거에 기허(幾許·얼마)인이 최근 조선인의 조선을 보았는지 생각건대 결코 소수가 아닐 것이다. 개중 순진한 인간성에서 조선을 주관화하야 가지고 조선인이 되여 조선을 본 자가 과연 있었는가. 오인(吾人)은 과문의 소이인지 알지 못하거니와 아직 듣지 못하였노라. 그네들의 감상담이나 인상기는 거개가 일본인 감정의 조선관이 아니면 미국인 감정의 조선관이오 영인(英人)이나 독인(獨人)의 조선관이니 특별히 감심(感心)할 바 없었다. 실로 조선인적 감정으로 보는 조선을 솔직하게 발표한 자가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연이나 오인은 금번 포시(布施) 씨가 조선을 보고 발표한 감상담 중에는 극히 소부분(少部分)이지만은 조선인적 감정으로 조선을 본 점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정거장과 열차 내에서 일본인이 조선인에게 무엇을 청하든지 명령할 시에는 어조(語調)부터 하대를 한다” “부산에서부터 경성으로 오도록 도중의 정거장과 경성의 훌륭한 가옥을 보며 조선은 비상히 발달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과연 그 훌륭한 가옥은 조선인을 위하야 생기었으며 조선인의 이용에 공하는 것인지 의문이올시다” “다수한 조선인에게 유익을 끼치지 못한다하면 금일의 조선 계발(啓發)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인을 위하여는 차라리 슬퍼할 현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고 운운하였다. 혹자는 차언(此言·이말)을 주의자(主義者)의 언(言)이라 하야 경솔히 판단할는지도 미지(未知)하거니와 오인은 이 간단한 담화 중에 씨의 공정한 관찰을 긍정하노라. 상사(常事)로 조선인은 그다지 격렬한 자극을 느끼지 아니하는 일이지만은 인간성에 각성한 인사가 일본인이 조선인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고 경탄하는 것은 추호도 의아할 바가 아니다. 혹자 일본인은 자기 자신은 그러한 태도를 지(持)한 경험이 없다고 하야 변명코자할는지도 알지 못하나 사실 그것은 부인하지 못할 ○○한 사실이다. 가옥으로 미루어서 조선인의 경제적 생활과 그 비애를 간파한 것은 평범한 사실에서 대국을 판단한 것이니 씨의 엄정한 인격의 소치라고 아니할 수 없다. 현대 조선인의 참상을 체험하여온 조선인 자신 이외에 타인이 차(此)를 능히 직감할 수 있으리오 만은 여하간 사소한 차(此) 사실이 소위 조선의 정치적 공적(功績) 전부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하야도 과언이 아니다.   거대한 2, 3 층 양옥이 시가(市街)에 즐비하나 그것이 은행이나 상점임을 막론하고 조선인의 행복과 여하한 관계가 있는가. 오히려 조선인의 유익(有益)과 배치되는 경향에 있지 아니한가. 매년 예산에 경찰비가 3분지 1에 해당하는 총독부 정치가 그 표어와 같이 조선인의 행복을 위하야 과연 합리적 실적이 있는가, 없는가 생각이 차(此)에 지(至)하면 언론(言論)이 과격하여질 뿐이니 ○○하거니와 오직 오인(吾人)은 공정(公正)한 인사와 같이 진실한 동양의 평화를 위하야 일본 위정자의 오산(誤算)에 대하여 분개할 뿐이로다.


  1923년 8월 3일자 1면 사설


  1923년 8월 3일자 3면


  단상의 연사와 통역보다 연단 가운데 떡 버티고 앉은  ‘임석 경관’의 모습에 앵글을 맞춘 것이 인상적입니다.



  표면의 개발은 기실(其實), 조선 민족의 행복은 아니라는 것을 느꼈소.


  입경(入京)한 포시진치 씨 담(布施辰治氏談)


  내가 이번 조선에 온 것은 가장 주린 자는 가장 절실하게 먹을 것을 구한다는 것과 같이 가장 비참한 생활을 한다는 조선 민족 사이에 와서 보면 인간생활이 개조되지 아니하면 아니 될 리상에 대하여도 조선민족에게 들을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함과 또는 궁한 뒤에 동한다는 세음으로 가장 궁경에 빠진 조선에 와서 조선 사람과 만나보는 것은 가장 의미가 깊으리라고 생각한 까닭입니다.


  곧 조선의 경치를 구경하러온 것이 아니라 참된 조선 사람의 기분과 접촉하고자한 것이 주요한 목적입니다. 그럼으로 부산서 경성까지 왔지만은 아직 조선에 대한 감상을 말할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조선에 대한 정치 문제 같은 것은 조선의 역사가 길고 파란이 많은 터인즉 더구나 잠깐 보기만하고서 이러니저러니 말할 것이 못 되겠지요. 그러나 정거장이나 열차 안에서만 볼지라도 일본 사람이 조선 사람에게 대하야 무엇을 부탁한다거나 명령할 때에 보통 해라를 쓰는 것이 귀에 거슬렸습니다. 종래에 훗닥하면 손찌검을 하던 버릇으로 보면 입으로만 명령하는 것도 얼마큼 개량된 일이라고 생각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일본 사람끼리 무엇을 부탁하거나 명령할 때에는 서로 친절한 말씨를 쓰면서 조선 사람에게 한하여서는 조금도 경의를 갖지 아니한 태도를 가진다는 태도는 심히 유쾌치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것도 필경은 합병된 조선과 합병한 일본과의 관계가 피차에 한태 뭉쳐진 것이 아니라 역시 한편은 가져서는 아니 될 자랑거리를 자랑하는 것과 한편은 가져야할 인격을 부득이 내버리게 되였다는 좋지 못한 관계로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어디까지든지 참된 사람의 사람다운 량해를 이러한 사소한 관계에까지라도 나타내기를 바랍니다. 다음에 느낀 것은 경성에 와서 시내의 훌륭한 집을 보고 종로에서도 정거장 같은 데에는 훌륭한 집이 있는 것을 보는 한편으로 연로에 아직도 게딱지같은 초가집이 있는 것을 보면 그것만 보기에는 참 조선의 발전이며 계발된 증거인거 같기도 하나 그 훌륭한 집과 편리한 설비가 과연 정말 조선 사람을 위하야 설비된 것이냐 하는 것은 다시 한번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요컨대 유산계급의 전용물이요 무산계급으로 말하면 도리어 그 전만도 못한 뒷골목으로 쫓겨 들어간 것이 진정한 사실입니다. 곧 조선에서도 발전이라든지 개발이란 것은 전부가 일부의 특권계급을 유익케 함에 그치고 다수자에게 대하여는 조금도 행복 된 일이 없다하면 지금까지에 조선이 개발되었다는 것은 도리어 조선민족을 위하야 슬퍼할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더 자세한 말씀은 이 다음 기회가 또 있겠지요.






  기마순사(騎馬巡査)까지 출동(出動)한 북성회 강연


  북성회에서는 재작일일 오후 팔시에 시내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강연회를 개최한다함은 이미 보도한 바이거니와 그 강연회는 예정과 같이 일일 오후 팔시 반부터 천도교당 안에서 열리었다. 청중은 무려 칠팔백 명에 달하였는데 일본 사람의 청강자와 사복순사도 많이 있었고 장외에는 기마순사가 가끔 순행할 뿐 아니라 장내 단상에는 종로경찰서 고등계 주임 삼륜(三輪) 경부이하 다수한 형사가 늘어 앉아 연사의 말을 일일이 필기(筆記)하는 등 경찰당국의 경계는 자못 엄중하였다. ‘현 사회의 중병’이라는 문제로 김종범 씨의 강연과 ‘해방운동의 의의’라는 문제로 북원룡웅(北原龍雄) 씨의 강연은 임석하였던 경관에게 중지를 당하였고 다음에 ‘인간생활(人間生活)의 개조운동(改造運動)과 조선민족(朝鮮民族)의 사명(使命)’이라는 문제에 김찬(金燦) 씨의 통역으로 포시진치(布施辰治) 씨의 강연이 있었는데 씨는 벽두에 “지금 말하든 연사들의 언론 압박을 당한 것을 보면 나도 역시 중지처분을 당할는지 알 수 없으나 언론의 압박을 당하는 것은 공공의 안녕질서를 문란케 하는데 있는 것임으로 질서문란이 아닌 이상에는 압박을 못할 뿐 아니라 임석한 경관도 조선인민의 행복을 위하야 있는 것임으로 내가 조선민족의 행복을 위해서 말하는 것을 결코 압박하지 못할 것”이라고 연해 비꼬면서 말을 시작하였으며 그리고 “현금(現今) 조선 문제는 조선에 대한 조선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 조선 문제”라는 말을 하는 중 경관은 ‘주의’를 보냈다. 이에 씨는 다시 말을 이어 ”지금 경관의 주의가 있음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을 이에 그치나 임석한 경관이 이 자리에 언론을 압박할지라도 세계적 언론은 절대로 압박하지 못할 것“이라고 뜨끔한 한 마디로 뒤를 누르고 말을 마친 후 ‘청년과 역사적 사명’이라는 문제로 정우영(鄭又影) 씨의 강연이 있은 후 동 십일 시에 무사히 산회하였다.


  후세변호사의 장남이 쓴 전기 ‘어느 변호사의 생애’(이와나미 출판사, 1963년) 58쪽은  “강연에서 사기(史記)에 나오는 말인 ‘덕(德)을 의지하는 자는 번영하고, 힘을 의지하는 자는 망한다’는 말 등을 인용해 총독부의 탄압정치를 풍자하여 비상한 반향이 있었다. 어느 회장(會場)에서 통역이 F씨(인용자 주 – 후세 변호사)에 ‘지금 저 사람이 이렇게 말했으므로 박수’라고 속삭였다. 다음에 F씨가 연단에 서서 ‘앞의 변사(弁士)의 얘기에 의하면 여차여차 하지만…’이라고 얘기한 것이 통역되면, 청중은 얼굴을 마주보며 ‘F선생은 조선어를 안다’하고 뒤에 통역이 감탄의 그 중얼댐을 F씨를 위해 일본어로 반복하면, F씨는 젊은이처럼 유쾌해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인간생활(人間生活)의 개조운동(改造運動)과 조선민족(朝鮮民族)의 사명(使命)’이란 후세 변호사의 강연 전문은 동아일보 1923년 8월 5일자 일요판 1면에 특집으로 게재됐는데 이를 정준영(鄭畯泳) 역사교훈실천운동연합 대표가 찾아 ‘월간중앙’ 2008년 8월호 (152~155쪽)에 아래와 같이 전재했습니다.


  나는 동경(東京)에서 여러 조선인과 널리 친밀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번 북성회 주최 강연회에 초청받아, 오늘밤 강연회가 성황인 것을 기분 좋게 생각합니다. 동경에서 멀리 조선을 생각하다 처음으로 조선에 와 보니 감개가 깊습니다.


  만일 내게 언론을 허락한다면 저의 감격을 여러분께 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번 연단에 서서 언론 자유의 범위가 비상히 좁은 것을 생각하면, 과연 내가 나의 감격을 여러분에게 옮길 자유가 있는가를 걱정합니다.

 


 여러분은 내가 말한 것과 같이, 내가 이곳에서 직접 감격한 일을 여러분의 감격에 전할 것을 바라겠지만, 더욱 이 자리에서 이렇게 자유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의 행복을 위하여 말할 것이오니, 이곳에 와 앉아 있는 경관도 여러분의 행복을 생각할 줄 알기에, 나의 언론은 허락될 줄 압니다.


  나는 현재의 정치를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차라리 현재 정치를 초월하여 2천만 조선 민중 내지 16억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말하려 합니다. 우리는 조선 문제를 조선 안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평화상의 조선 문제로 논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조선 문제의 언론을 압박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세계평화를 압박하는 자입니다.


  여러 가지 말할 것이 있었으나, 현재 압박 하에서 도저히 다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경관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시간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조선에 온 감상을 말하려고 합니다. 조선에 와보니, 제가 동경에 있을 때 조선에 대한 감상이 나를 속인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일행에 대하여 여러 방면의 의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선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평화상의 조선 문제를 위하여 왔음을 알아주십시오.


 이곳에서 소감을 말하겠습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조선에 오고 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나의 마음이 좁아서 그랬는지 모르나, 조선은 일청전쟁 때부터 비상히 동요하는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만물은 움직이고 소리가 납니다. 그러나 만물의 움직임은, 움직이기 위하여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편안하기 위하여 움직이는 것입니다.


  만물이 소리 내는 것은, 소리를 내기 위하여 내는 것이 아니라 불평이 있어서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조선이 이와 같이 격동함은 적당한 행복을 얻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극히 목이 마른 자가 물을 찾는 것과 같이 조선인이 극히 동요함은 극히 불평한 자의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러나 조선에 와서 보닌 조선민족은 조선을 ○○하여 행복을 바라는 듯합니다. (경관의 주의)


  나는 경관의 주의를 받기 전에 주의에 주의를 더하여 말하겠습니다. 극히 목이 마른 자는 땅 아래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맑은 물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귀중한 자유를 잃었을 때 그 자유를 잃기 이전보다 더 바라게 됩니다.


 우리는 손발이 결박되면 괴롭습니다. 그러나 손발이 결박된 때의 느낌과 목이 결박된 때의 느낌은 다를 줄 압니다.  


 내가 사치하다가 사치하지 못하게 됐을 때 사치를 제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치 이외의 생활을 제재하면 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어떤 직업에 있게 되면 생활은 안정되나 제재를 받습니다. 그러나 직업을 나눠 너는 이 직업을 하여라 저 직업을 하여라하고 제재를 가하면 이 때는 자유를 잃은 때보다 더 괴롭습니다. 그러나 직업을 빼앗고 빼앗기는 중에도 직업만 있으면 불편한 중에도 참습니다. (연사는 다시)


 나는 조선 문제를 논하려 함이 아니라 인생생활법칙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먹을 것을 빼앗겼을 때에는 더욱 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일본의 수평운동사건에 대한 원인으로 일례를 들겠습니다.


 나고야지방 재판소에서 수평사의 관련자인 수평사위원 남모에 대하여 재판장은 “수평운동이 어떤 이유로 일어났는가”하고 물었더니 남모는 대답하기를 “예전부터 가축을 도살하고 피혁제조에 종사하여 일반 사람에게 모욕을 받았으니 이러한 이유만으로 수평운동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자본주의의 발달로 이러한 직종의 피혁제조회사가 생겨 직업을 빼앗겼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 사실로써 자유를 빼앗긴 때와 먹을 것을 빼앗긴 때와 어떻게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지 생각했습니다.


 나의 이 강연 순서는 자유를 빼앗긴 사람이 자유를 빼앗는 자로부터 자유를 찾으려는 것을 말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경관과 헌병의 주의에 의하여 생략하고, 문제를 바꾸어 말하겠습니다.


 ‘프롤레타리아’는 의심이 많다고 유산계급은 말합니다. 자유를 빼앗긴 사람은 의심이 있다고 지배계급은 말합니다. 나는 자유를 빼앗긴 때 일을 조선 문제로써 직접 말하지 않겠습니다.


 여러 가지 주의가 있으므로 비유로 대신하려 합니다.

 어두우면 간절히 광명을 바랍니다. 그러다 광명을 찾지 못하면 무서워합니다. 일본 속담에 “두려움이 암귀를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두운 가운데 광명을 찾다 못 찾으면 무서워 떨고, 따라서 없는 귀신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어둠에 떠는 사람에게 귀신이 나타나도록 광명을 주지 않고 제재하는 것은 너무 잔혹한 일입니다.


 이때 광명을 주는 것이 암중 전율을 면하게 하는 한 방법으로 생각합니다. 만일 이와 같이 어둠 속에서 전율하는 사람에게 광명을 주지 않는 사람은 사람으로 형체는 있으나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프롤레타리아’에게 의심이 많다고 약소민족인 조선인에게 “의심이 있다”고 함은 암중에 광명이 없는 전율과 같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비밀을 배척하는 사람입니다. 윗사람의 비밀이든 아랫사람 비밀이든 모두 배척합니다. 내가 할 말을 구체적으로 하면 여러분이 알기 쉬울 터이나, 비밀을 배척한다고 스스로 말하며 할 말을 감추고 다 공개하지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나는 모릅니다.


 나는 이제 멀리서 조선을 바라보던 감상과, 조선에 와서 접한 감상을 말하겠습니다. 또 조선에 온 이유는 “건강한 때를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일본도 건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꽉 막혀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조선인의 건강상태는 다른 건강한 사람보다 더 건강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개인이 건강하게 살려면 다른 병든 사람을 찾아보고 자신이 병에 걸릴 원인을 예방해야합니다. 이것이 건강한 사람이 취해야할 순서입니다. 관헌이 주의를 주기 전에 미리 주의하여야 하기에 이에 대한 말은 생략하겠습니다.


  동경에서 항상 조선에 오고 싶은 생각을 가졌다가 이번 북성회의 초청을 받아 조선에 왔습니다. 내가 조선에 온 목적과 경로에 대하여는 비밀이 없음을 알아주십시오. 이제부터 조선에 온 경위와 목적에 대하여 말하겠습니다.


  나는 사회운동을 위하여 힘을 쓰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어디든 갈 만한 곳은 가겠습니다. 나의 믿는바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말하고자 모든 사람을 위하여 왔습니다.


  조선에는 여러 가지 사상이 흘러, 이해를 달리하는 사람이 있는 줄 압니다. 나는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어떤 일부의 사람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진리를 말하기 위하여 왔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것과 같이, 나는 나의 믿는 바를 말하려 합니다.


  나는 무슨 계획을 위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말하려 합니다.  


  내 강연에 대해 어떤 방면에서는 반대를 하고, 동시에 어떤 방면에서는 찬성을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조선 문제를 많이 말하려 하지 아니하나, 조선만을 위한 조선 문제가 아니요, 세계의 조선 문제로 이야기하려 합니다. 세계 개조 문제가 해결되는 동시에 조선 문제도 해결될 줄 압니다.


  듣는 바에 의하면 조선에서는 정치 문제는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사람이 사람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 합니다. 조선사람의 행복을 말하는 동시에, 16억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말하려 합니다.


  여러분! 조선 사람은 세계 인류의 일원으로 공헌하십시오. 만일 이 강연 후 나를 압박하면, 조선 문제만의 압박이 아니요, 세계 인류의 평화를 위해 압박하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언론의 자유는 없다 할지라도, 세계 언론에는 자유가 있으리라 하고 안심하려 합니다.


  1923년 8월 5일자 일요판 1면 


  이어 동아일보는 의열단사건 공판을 연일 그야말로 대서특필했습니다.




  1923년 8월 8일자 3면




  입추의 여지없는 방청석


  정말 송곳 꽂을 틈도 없을 지경


  방청석에는 피고의 가족 외 남녀 방청자 1백여 인이 가득히 차서 땀을 흘리며 방청을 하고 간간히 나부끼는 흰 부채가 나비같이 날 뿐이다. 사건이 조선 천지를 진동할 만큼 방청자가 많았으나 방청권의 관계로 그대로 돌아간 사람이 많았으며 경기도 경찰부에서도 경관의 방청자가 많았고 재판장 뒤에는 다른 사건에 보기 드문 판사 방청자 검사정 방청까지 있었다. 법정 내외는 수명의 경관이 엄중 경계하고 방청석에는 이 사건을 맡은 일본인과 조선인 변호사 열한명과 금번 일본서 온 사회주의자 변호사 포시(布施)씨도 얼굴을 나타내었다.


  1923년 8월 9일자 3면 




  ‘의열단사건’ 보도에 대해서는 ‘김익상의거’와 같이 다른 편에서 기술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후세변호사의 활동만을 소개하겠습니다.


  1923년 8월 8일자 3면




  휼계(譎計)로 포박함은 정치도덕에 위반이라고 포시진치(布施辰治) 씨 대갈(大喝)


  백상, 마야, 김우영 제씨를 증인으로 불러달라고 신청


  심리가 마치매 포시(布施) 변호사는 재판소에서 “사건을 명백히 하기 위하야 전 백상(白上) 경찰부당 현 마야(馬野) 경찰부당 안동현 부영사 김우영 백윤화 백운영을 증인으로 불러 물어 달라 하고 그 이유를 말하되 조선독립운동의 옳으냐 그르냐는 문제는 별 문제이고 다만 이와 같은 사건의 범인을 체포하기 위하야 백상 경찰부장이 일부러 경관을 공산당에 가입케 하야 희생적 정신을 가지고는 사람들을 속여서 잡으려는 것은 정치도덕상으로 가마니 볼 수 없는 터이라고 대갈하고 이어서 재판장은 세상의 의혹을 풀고 재판소의 권위를 보이기 위하야 신청할 증인을 일일이 당 법정으로 불러 물어 달라 하였고…(중략)…평산검사는 다른 증인신청은 모두 불필요로 인정한다하고 포시변호사가 신청한 김두형(金斗炯)은 예심정에서부터 찾아서 물어보려고 하였으나 어디있는지 몰랐는데 찾을 수가 있으면 불러 물어도 좋겠다하매 포시씨는 재판소에서 찾아줄 줄 알고 신청하였다하니 검사는 재판소에서도 찾겠지만은 변호사편에서 찾아 보라하니 포시씨는 물론 협력하여 찾아보마하고 강세형변호사는 찾을 수가 있다하고 방청석으로 가서 물어보니 방청석에서도 아는 사람이 없나 이내 피고석에서 황옥은 무슨 법리가 있든지 ‘김두형은 예심정에서부터 부르려다 못불렀으니 부를 것이 없다”하였다.


  후세 변호사는 지방순회강연 때문에 2회 공판정에는 나가지 못하고 변론 요지와 위문 전보를 김시현에게 보냈습니다.


  1923년 8월 12일 3면




  포시(布施) 변호사의 전보(電報)


  이번 사건을 변호하려던 포시진치(布施辰治) 씨는 지방 순강 중 사정에 의하여 출정하지 못하고 김해(金海)에서 다음과 같은 변론의 요지를 이인(李仁) 변호사에게 전보로 보내었더라.


  “친히 변호하러 가지 못하고 그 변론의 요지를 보냅니다. 독립운동의 시비는 잠깐 그만 두고 사실상 독립을 배경으로 한 본 사건의 진상 여하와 판결의 결과 여하는 일반 주목의 초점이 될 것이다. 그것은 본건이 조선 민족의 가슴에 깊이 잠긴 독립운동의 사상 대책이 교활한 결과 형사대책(刑事對策)에 불과한 스파이 연극의 폭로이라 피고들이 법정에서 어떤 사람으로부터 ‘불령선인’이라는 말을 들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조선인을 위하여 초월한 인격, 독립의 사상 대책을 기대하며 권위를 위하여 독립운동을 용서하여 죄인으로 인정함보다도 피고들이 조금도 사심 없는 그들의 태도를 양해하고 공정한 판결을 구하노라.”


  김시현에게 위문 전보를 보내


  포시진치(布施辰治) 씨가 이인(李仁) 변호사에게 변론 요지의 전보를 보내었다 함은 별항과 같거니와 동(同) 씨는 다시 피고 김시현(金始顯)에게 위문의 전보를 보내어 “모든 일을 운명에 맡기고 심기 자약하여 평안히 있으라. 감옥 안에 있으나 바깥에 있으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는 전보를 보냈으며, 그 외 재판장에게도 공정한 재판을 바란다는 전보를 보냈는데 일반 변호사들은 생각하여 이인 씨가 감사의 답전을 보낸다더라.


  1923년 8월 4일 있은 광주 강연 관련 기사는 일주일이나 지난 8월 11일자 4면에 “간간 경관의 주의도 있었으나 무사히 마쳤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동아일보 1923년 8월 11일자 4면




  그러나 8월 10, 11일에 있은 김해 강연은  10일의 포시진치(布施辰治)  ‘조선 청년에 고함’을 제외하고 모두가 중지되었음을 8월 18일자 4면에서 아래와 같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無非中止(무비중지)   중지 아닌 것이 없었다. 


  (10일)


  ‘해방의 의의’ 백무(白武) 군, 중지(中止)


  ‘사회조직의 변천’ 김종범(金鍾範) 군, 중지(中止)


  ‘민중문화의 제창’ 정우영(鄭又影) 군, 중지(中止)


  ‘조선 청년에 고함’ 포시진치(布施辰治) 군




  (11일)


  ‘세계대세 상으로 본 조선 문제’, 포시진치(布施辰治) 군, 중지(中止)


  ‘농민운동의 의의’, 김종범(金鍾範) 군, 중지(中止)


   ‘무산청념에 고함’, 백무(白武) 군, 중지(中止)


  ‘형평운동에 대하여’, 정우영(鄭又影) 군, 중지(中止)


  1923년 8월 18일자 4면












댓글 한 개 »

  1. I really wish there were more aritecls like this on the web.

    Comment by Jeanette — 2011/07/09 @ 6:0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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