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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나기 무네요시’ (柳宗悅, 1889~1961)  




  동아일보 1920년 4월 12일~18일자 2면에 6회에 걸쳐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글이 연재됐습니다. 


  창간 후 처음당한 일제의 기사 삭제 조치가 이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조선에 관한 글이었습니다.



 


  ‘朝鮮人을 想함’ (一)    동양대학 철학과 교수 유종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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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0년 4월 12일자 2면







  「굴원(窟院· 동굴 안) 경주 석불사 석굴암의 불상을 본 것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행복스러운 순간적 추억이다.…오직 그 신광(晨光·아침 햇살)으로 비치어보는 피녀(彼女· 관음의 조각)의 횡안(橫顔· 옆모습)은, 실로 지금도 나의 호흡을 빼앗는다.… 」


  이것이 이 논문을 쓴, 젊은 신비주의자가 조선의 미술을 찬탄하고 동경하는 첫 말이다. 씨가 나와 더불어 종일 담화한 화제가, 조선 예원(藝苑)의 장래를 송영(頌榮)하는 이외에, 아무것도 없던 것을 보아도, 씨가 얼마나 조선 민족의 예술적 천분(天分)이 풍부함을 기꺼워하는 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고려자기의 곡선미! 이것은 곧 조선 민족성의 상징이다… 내가 조선의 예술을 통하야, 그 민족성의 데리케이트한 조선인을 상각(想覺)할 제, 나는 무한한 온정을 느낀다.…』


  씨의 일언일구(一言一句)가 사교적 식사(飾辭)거나, 수단적 교언(巧言)이라고, 누가 훼기(毁譏)하리요. 이것은 진리에 살겠다는 자(者)면, 능히 간파할 수 있는 것이다. 씨의 내외 양면의 생활을 일규(一窺· 살펴 본)한 자면 용이하게 승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씨에 대하야, 좀 더 명료한 소개는 후일에 양(讓)하고, 우선 이 논문을 역재(譯載)함으로써 독자 제위의 공정한 비판을 희망하는 바이다. (霽生- 염상섭)


  여(余· 나)는 조선에 관하여 충분한 예비지식은 없으나 만일 다소간 있다할 지경이면 4년 전에 약 1개월간 조선 각지를 순력(巡歷)한 것과, 출발하기 전에 2,3권의 조선 역사를 통독한 것과, 또 연래(年來)로 조선의 예술에 대하야 심후(深厚)한 흠모의 정을 가졌던 것, 이 두세 가지 사실 뿐이다.


  함으로 이 같은 사소한 근거를 가지고는 도저히 조선에 관하여 논담(論談)할 수 없을지 모르나 참을 수 없는 애정(哀情)이, 나로 하여금 일편(一篇)을 쓰게 한 것이다. 나에게는 이전부터 조선에 대한 나의 심정을 피력하려는 열망이 있었더니, 이번에 불행한 사실이 야기한 결과 드디어 이러한 기회를 나에게 준 것이다.


  여(余)는 금번 사건(作春의 독립운동)에 대하여 적지 않은 주의를 환기한 동시에, 일본의 식자들이 어떠한 태도로 어떻게 논평하는가를 더욱 유의(留意)하여 보았다. 그러나 그 결과, 조선에 대하여 경험 있고 지식 있는 인사들의 사상이 거의 전부가 아무 현명함과 심절(深切)함이 없을 뿐 온정조차 없음을 볼 때, 나는 인방인(隣邦人)을 위하여 동정의 눈물을 흘린 때가 많았다.


  여(余)는 이상(以上)에도 말하였거니와 조선에 대하여 아무 지식도 없지마는 다행히 그 예술에 표현된, 조선인의 심중요구(心中要求)를 맛보기 때문에, 충분한 애정을 느끼는 바이다. 대저 일국의 국민으로서 타국을 가장 심각히 이해케 하는 길은, 과학이나 정치상 지식이 아니라, 종교와 예술적인 내면의 이해라고 생각한다. 환언하면 경제와 법률상 지식이 오인(吾人)으로 하여금 타국에 마음을 끄는 것이 아니라 진순(眞純)한 애정에서 우러나오는 이해가 가장 깊이 그 국정(國情)을 내면적으로 맛보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일본에 小泉八雲(라푸카에이오 하안, 이탈리아인으로 일본에 귀화한 문학자)이가 일본에 내도(來渡)한 것을 기적례(其適例· 그 적합한 예)라 한다. 실상 금일까지, ‘하안’ 만치 일본을 내면으로 맛본 자는 없을 것이다. 외국인의 일본에 관한 저서가 기백권이 있으나, ‘하안’의 저서같이 미화(美華)하고 예리하고, 온정에 충만한 자는 없을 것이다. 씨는 실로 어떠한 일부의 일본인보다도 일본을 일층 더 이해하는 예술가이었다. 예술은 실로 예민한 직관적 이해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이지만, 과학이나 정치라는 것은 독단과 이기주의에 빠지는 불순한 이해다. (요미우리신문 所載)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이 글에서 당시 일본인으로서는 드물게 조선에 대한 일본의 역사적 죄행(罪行)을 지적하고 조선인의 심사(心思)를 이해하는 양식(良識)을 보였습니다.




  … 약한 피등(彼等· 그들)을 또 괴롭게 한 것은, 실로 우리의 선조이었다. 역사가는 언필칭 ‘조선정벌’은, 일국의 용감한 기록이라 하나, 그것은 다만 고대의 무사가 그들의 정복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야, 무의미하게 계획한 죄행이었다. 여(余)는 여차(如此· 이러)한 원정을 일국(一國)의 명예스로운 사실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더구나 금일의 고(古)예술 즉 건축과 미술품이 거의 폐퇴하고 파괴된 것은 그 대부분이 실로 왜구의 죄행이었다. 지나(支那· 중국)는 조선에 종교와 예술을 주었으나, 그것을 거의 파괴한 자는 우리들의 무사(武士)이었다.


  … 국가는 짧으나, 예술은 장구(長久)하다.… 승리하는 것은 그들의 미(美)요, 우리의 칼날은 아니다. (이상 4월 13일자 2회)


  … 유혈에까지 이르는 폭행을 사람은 어느 때든지 피해야 할 것이나, 차(此· 이)와 동시에 압박으로써 사람에게 함구(緘口)를 강요하는 우를 중복(重復)하야서는 아니 될 것이다. 여사(如斯· 이러함)히 하야 일즉이 어디든지 진정한 평화와 우정을 재래(齎來· 가져옴)한 일은 없다. 칼날의 힘은 결코 현량(賢良)한 힘을 낳지 못한다.


  … 여(余)는 조선의 예술 ― 특히 그 요소라고 할 만한 선(線· Line)의 미(美)는 실로 피등(彼等· 그들)이 애(愛)에 주린 심정의 ‘심볼(상징)’이라고 생각한다. 곱고 길고 길게 건 조선의 선은, 실로 심중을 연면(連綿)히 허소(許訴)하는 심정의 그 자체다. 그들의 원한도, 그들의 기망(祈望)도, 그들의 갈구도, 그들의 혈누(血淚)도, 모두 그 선을 따라서 흐르는 것 같다. 불상을 묘상(描想)하거나, 도기를 택하여 보아도, 오인(吾人)은 이 조선 ‘선’에 접촉할 수가 있다. 눈물을 못 이기면서, 처량히 허소하는 애달픈 기쁨, 모두 이 선에 의지하야 발현(發顯)된다. 그들은 그 고적(孤寂)한 심중, 그 무엇을 바라고 기다리는 고민초조의 정(情)을, 미려하고도 개절(凱切· 알맞고 적절함)히, 그 유장(悠長)한 선에 포함케 한 것이다. 강대하고 태연(泰然)한 지나(支那)형의 미와, 조선 선과는 실로 볼만한 대비라 하겠다. 그들은 미(美)로써 고적에 허소하고, 고적에 미를 포함케 한 것이다. (이상 4월 14일자 3회)


  … 조선의 전인민이 골수에 느끼는 바는, 끝없는 원한이다. 반항이다. 증오이다. 분리(分離)다. 피등(彼等)이 일본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자연이요, 공경할 수 있다는 것은 예외다. 사람은 애(愛)의 앞에서는 순종하는 것이나, 억압에 대하여는 완강한 것이다. 일본은 어떠한 길로써 인방인(隣邦人)에 접근하려 하는가. 평화가 그 희망일진대, 무슨 까닭으로 치우(穉愚· 어리고 어리석음)를 중복하여 억압의 길을 택하는가. (4월 17일자 5회)


  … 조선인 제군이여. 설사 아국(我國)의 모든 식자(識者)가 제군을 매도하고 또 제군을 괴롭게 할지라도, 피등 중에 이 일문(一文)을 초(草)한 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또 여(余)뿐만이 아니라, 나의 사랑하는 모든 나의 지인은 같은 애정을 제군에게 대하여 느낀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그리하여 아국(我國)이 정당한 인도를 밟지 아니한다는 명료한 반성이 우리 동지 간에 있는 것을 알아주기 바라는 바이다. 여(余)는 짧은 일문(一文)으로 하여금 적어도 제군에게 대한 여(余)의 정을 피력할 수 있으면, 여(余)에게는 적지 않은 환희라 하는 바이다. (4월 18일자 6회)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연재 글 중 4회분(1920년 4월 15일자 2면)은 일부가 삭제돼 깎인 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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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0년 4월 15일자 2면








  삭제된 것은 ‘역사를 가르치지 않으며, 외국어를 피하고, 주로 일본어로 일본의 도덕이나 그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본의 황실주의를 중심으로 그들의 사상마저 바꾸려는 것이었다. 새로운 교육에 전혀 친근감을 갖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조선인은 자신들에게 약탈자로 보이는 자를 가장 존경하라는 말을 듣는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기이하고 모순에 찬 소리로 들릴 것이다.’ 라는 부분이었습니다.




  그 다음 날자(1920년 4월 16일) 동아일보는 같은 면(2면)에 ‘당국의 기휘(忌諱· 게재 금지)에 촉(觸· 부딪혀)하야…’ 일부 기사를 삭제하고 배포하느라 배달이 지연됐음을 독자에게 알렸습니다. 



  ‘작춘(作春· 지난해 봄)의 불행한 사건(3·1독립운동)’을 보고 아픔 속에서 썼다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글은 일본 요미우리신문 1919년 5월 20일~24일자 7면에 ‘조선인을 생각함’이라는 제목으로 5회 연재된 것입니다.





  이 글은 게이오의숙(慶應義塾) 유학 중 동아일보 창간기자가 된 염상섭(廉尙燮)이 번역해 실었습니다. 3·1독립운동 소식을 듣고 1인 명의의 ‘3·19 조선독립선언서’를 작성, 배포하다 체포되기도 했던 염상섭은 3·1독립운동이 강제 진압된 직후 요미우리신문에 게재된 야나기 무네요시의 글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그 이듬해 4월 창간된 동아일보에 입사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를 번역해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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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을 생각하다’ 첫 회를 실은 1919년 5월 20일자 요미우리 신문 7면







  ‘조선인을 想함’이 적지 않은 반응을 불러일으키자 동아일보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부부를 조선에 초청하며 1920년 4월 19, 20일자 2면에 잇따라 그의 글 ‘朝鮮 벗에게 呈하는 書’를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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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0년 4월 19일자 2면







  야나기는 이 두 편의 글에서 “나는 지금 제군의 운명을 생각하며 또 이 세상의 부자연한 형세를 회상한다.…국가와 국가와는 항상 전쟁의 준비를 부지런히 하나, 그러나 인정에 배반되는 이러한 세력이, 어찌 영원한 평화나 행복을 가져올까.…오랫동안 서로 교대되는 무력과 위압 때문에, 어디까지든지 인정을 유린당한 조선의 역사를 생각할 때, 나는 솟아나오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다.…조선은 지금 적막(寂寞)히 고통 받고 있다. 파문(巴紋 태극무늬)의 기(旗)는 높이 떨치지 못하고, 봄은 오나 이화(李花)는 영원히 그 봉오리를 봉(封)하였다.…어느 때든지 국가가 진리에 쫒지 못하고, 진리가 국가에 순응하여 변화된다. 이러하기 때문에 부자연한 세력이, 백주(白晝)에 횡행하는 것이다.…일본이 만일 정직한 일본이 되고자 할진대, 이러한 행위를 고침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느 때든지, 국가를 진리에까지 끌어올리기를 절망(切望)하는 바이다.… 나는 목격자는 아니나, 여러 가지 참혹한 사건이 제군 간에 발생한 사실을 들을 때, 나의 마음은 저리고, 그것을 묵묵히 참지 않을 수 없는 제군의 운명에 대하여, 나는 무엇이라고 하여야 좋을지 모르겠다. 나는 심중으로 용서하시라고 빌면서,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만일 일본이 부정할진대, 어느 때든지 일본에서, 제군을 위하여 편들고 나서는 자가 있을 것이다. 진정한 일본은 결코 포학(暴虐)을 행하고자는 아니한다. 적어도 미래의 일본은 인도(人道)의 옹호자가 되기를 절망(切望)한다’고. 제군은 이러한 소리를 믿어주실까.”라며 일제의 만행에 대해 조선 민족에게 사죄했습니다.




  두 번째로 소개된 야나기의 글 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1920년 4월 19일자


  나의 아는, 또 아직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여러분 조선의 벗에게, 진심으로 이 서한을 드린다. 지금 나에게, 이렇게 하라는 명(命)이 있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 나가서, 참을 수 없는 이 심중을 제군에게 말씀하려 함이요 또 제군은 이러한 말을 들어주실 줄 믿는 바이다. 만일 이 문(文)을 통하여, 두 마음이 상촉(相觸)할 수 있을 지경이면, 그것은 얼마나, 나의 기꺼움일까. 제군도 그 적막한 침묵을, 나의 앞에서는 깨뜨려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사람은 언제든지 심중을 서로 토설(吐說)할만한 친구를 구하는 것이다. 더구나 제군 간에는 애(愛)를 심저(心底)로부터 갈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같이 생각할 때, 어찌 나는 이 방문을 아니하리오. 제군도 이 서한을 손에 들고, 나에게 대답하기를 주저치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리하리라고 믿는 터이다.


  나는 요사이 웬일인지 조선에만 정신이 팔렸다. 왜 그런가는, 나도 설명할 수 없다. 어디에 정(情)을 설명할 수 있는 충분한 말이 있을까. 제군의 심사(心事)와 고적함을 살필 때, 나는 알 수 없는 눈물을 금치 못한다.


  나는 지금 제군의 운명을 생각하며 또 이 세상의 부자연한 형세를 회상한다. 세상에는 있을 수 없는 사건이 목전에 현출(現出)될 때, 나의 마음은 평화를 얻을 수 없다. 내 마음이 제군에게 향할 때, 나도 같이 제군의 고통을 받는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부르는 것같이 생각될 때, 나는 그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내 마음으로부터, 사람의 애(愛)를 깨워주는 것이다. 애정은 지금 나를 힘세게 제군에게 유인한다. 아 아, 나는 잠자코 있을 수는 없다. 어찌하여 제군에게, 가까이함이 그를손가. 친한 정(情)이 피 속에 끓어오를 때, 마음은 마음에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가. 될 수 있으면, 나는 이 ‘손’ 까지 라도, 내놓아 악수하고 싶다. 이러한 일은, 이 세상의 자연한 요구라고 제군도 믿어주실 것이다.


  사람은 세상에 나오면서,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증오와 쟁투가, 사람의 본지(本旨)일 이치가 없다. 다만 여러 가지 불순한 동기 때문에 국가와 국가는 분열하고, 마음과 마음은 떨어져가고, 부자연한 세력이 추한 지배에 거만을 부리는 것이다. 그러나 능히 영속할 수 있는 부자연의 세력이, 어디 있으랴.


  모든 마음은 자연에 돌아가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자연에 돌아가면, 애(愛)는 더욱이 번창하여, 우리 사이에 통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무엇인지 부자연한 힘이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이다.


  ‘너희들 서로 사랑하라’고 성교(聖敎)는 일렀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이 생기기 전부터 이 세상에 나면서부터, 인정은 ‘상애(相愛)하고 싶다’고 애(愛)를 구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연한 인정대로 살 수 있으면 이 세상은 얼마나 따뜻할까. 이 세상에 진실로 귀한 것은, 권력도 아니요, 지식도 아닌, 일편(一片)의 인정이라고 늘 생각한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인정의 생활은 유린되어, 금력과 무력이, 이 세상을 지탱하는 양주(梁柱· 기둥)가 된다고들 생각한다. 이러한 형세는 마치 ‘서로를 미워하라’고 까지 하는 것같이 보인다. 국가와 국가와는 항상 전쟁의 준비를 부지런히 하나, 그러나 인정에 배반되는 이러한 세력이, 어찌 영원한 평화나 행복을 가져올까. 오직 이같이 부자연한 것이 미만(彌滿)하기 때문에 마음과 마음이 본의는 아니건만, 분열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서로 교대되는 무력과 위압 때문에, 어디까지든지 인정을 유린당한 조선의 역사를 생각할 때, 나는 솟아나오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다.




  1920년 4월 20일자


  조선은 지금 적막(寂寞)히 고통 받고 있다. 파문(巴紋· 태극무늬)의 기(旗)는 높이 떨치지 못하고, 봄은 오나 이화(李花)는 영원히 그 봉오리를 봉(封)하였다. 고유의 문화는 나날이 멀리 태생한 고향으로부터 스러져간다. 허다(許多)의 탁월한 문명의 사적은, 오직 과거의 고사(古史)로만 일컫는다. 노상에 지나가는 자의 머리는 앞으로 떨어지고, 고통과 원한이, 그 미간에 나타난다. 이야기하는 목소리조차, 지금은 그 소리가 낮고, 백성은 일광(日光)을 싫어해서, 검은 그늘에 모여드는 것 같다.


  어떠한 세력이 제군을 이렇게 하게 하는가 나는 제군의 심신이 얼마나 암담한 기분에 함(陷)하여 있는가를 살피지 않을 수가 없다. 제군에게는 아마 혈누(血淚)가 있을 것이다. 사람은 왠만한 고통은 참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愛)의 자유가 없는 데는 아무리 하여도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어찌 제군 뿐 이리요. 이 세상에 이러한 것을 추구하느라고 그 고향까지 버리고 역의에 방황한 자가 얼마나 많을까. 모든 사람은 자유스러운 공기를 구하고 인정의 따뜻한 맛을 사모한다. 이것저것을 생각할 때 억제할 수 없는 동정을 제군에게 느낀다. 일즉이 어떠한 나라에 정(情)으로 행하는 정치가 있었던가. 애(愛)를 가진 무력이 있었던가. 쟁투에는 도덕이 없고, 전쟁에는 어떠한 때든지 종교가 없는 것이니. 이것은 진리를 아는 인민에게는 고통일 것이다. 나는 일본이 언제든지, 정당하고 따뜻한 일본이 되기를 바란다. 만일 무정한 행위를 자랑하는 일이 있을 지경이면 그때의 일본은 종교의 일본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금일은 불행히 국제관계가, 아직 도덕의 역(域)에 도달치 못하였으니, 더구나 그 간에 종교적 애(愛)가 있을 까닭이 있으리요. 모든 부정과 죄악이 간혹 국가의 이름으로서 변호치 않는가. 어느 때든지 국가가 진리에 쫒지 못하고, 진리가 국가에 순응하여 변화된다. 이러하기 때문에 부자연한 세력이, 백주(白晝)에 횡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대개 그 죄를 의심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은 피할 수 없는 불완전한 세태라고 하여, 어느 때든지 간과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로 인하여, 고통 받는 인민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일국의 치욕이요, 또 인류에게 주는 모욕일 것이다. 일본이 만일 정직한 일본이 되고자 할진대, 이러한 행위를 고침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느 때든지, 국가를 진리에까지 끌어올리기를 절망(切望)하는 바이다.


  나는 그것이 자기 자신의 행위는 아닐지라도, 일본이 부정(不正)하였다고 생각할 때, 일본에서 태어난 자의 한사람으로서, 이에 그 죄를 제군에게 사죄하려 한다. 나는 심중으로 신에게 향하여 그 죄를 용서하십사고 빌지 않을 수가 없다. 일본이 신(神)의 나라에서, 죄 깊은 자로 인정되는 것은, 나의 참을 수 없는 바이다. 나는 일본의 영예를 위하여서도, 우리는 자기의 고국을 종교로써 깊게 하려 한다.


  나는 목격자는 아니나, 여러 가지 참혹한 사건이 제군 간에 발생한 사실을 들을 때, 나의 마음은 저리고, 그것을 묵묵히 참지 않을 수 없는 제군의 운명에 대하여, 나는 무엇이라고 하여야 좋을지 모르겠다. 나는 심중으로 용서하시라고 빌면서,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만일 일본이 부정할진대, 어느 때든지 일본에서, 제군을 위하여 편들고 나서는 자가 있을 것이다. 진정한 일본은 결코 포학(暴虐)을 행하고자는 아니한다. 적어도 미래의 일본은 인도(人道)의 옹호자가 되기를 절망(切望)한다’고. 제군은 이러한 소리를 믿어주실까.


  요사이는 제군과 우리 사이가 나날이 벌어져간다. 근접하려는 인정이, 이별을 원하는 증오에 돌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부자연한 일인가. 어떤 자의 마음이든지, 이에 나와서, 이러한 증오를 자연(自然)한 애(愛)에 다시 돌아가게 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 ‘힘’의 일본이 이러한 화합을 재래(齎來· 가져옴)치 못할 것은, 나의 아는 바이다. 그러나 정(情)의 일본은, 그것을 할 수가 없을까. 강력의 위압이 아니요 오직 눈물 많은 인정만이 세상에 평화를 재래케 한다.




  이 글은 일제의 게재금지조치를 받아 2회 연재하고 중단됐습니다.




  동아일보는 1920년 5월 4일 야나기 무네요시의 부인 야나기 가네코(柳兼子)의 개인음악회를 열었습니다. 동경음악대학 출신의 앨토 성악가인 가네코(兼子)의 독창회는 서양음악이 조선에 들어온 이후 열린 첫 개인음악회였고 동아일보가 단군영정(影幀) 공모에 이어 처음으로 주최한 문화행사이기도 했습니다. 독창회는 1300여 명의 청중이 쇄도하는 대성황을 이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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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0년 5월 1일자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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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0년 5월 4일자 3면







  유겸자(柳兼子) 부인 독창음악회


  음악계에 우수한 신원직 씨 후원


  유겸자 부인은 과일(過日) 본지에 그 문장을 소개한 동양대학 교수 유종열 씨의 부인으로 세계적 성악가 중 저명한 1인이요 일본 여류음악계의 최고 권위이라 금차(今次) 아반도(我半島)에 음악 사상의 보급을 도모하며 문화사업의 진흥에 공헌할 독지(篤志)로 부군이 조선에 만유(漫遊)하는 기회에 동반 입경하야 본사의 주최 하에 일대 독창회를 개(開)하게 된 바 당일의 전 수입은 부인의 희망을 종(從)하야 조선의 문화사업에 제공할 계획이라 우리에게 진실히 동정하는 차(此) 천재의 대음악가를 경성에 영(迎)함은 실로 반도 악단의 일 행복이로다. 강호유지(江湖有志)는 행(幸)히 차거(此擧)를 찬조하시옵소서.


  일시 5월 4일(화요) 오후 7시


  처소 경성종로중앙기독교청년회관


  입장료


  1등 2원


  2등 1원 50전


  3등 1원


  주최 동아일보사




  독창회의 수입은 야나기 부부의 희망에 따라 조선의 문화사업에 쓰기로 했습니다. 이후 이들 부부는 ‘조선민족미술관’ 건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다시 조선으로 와 무네요시는 YMCA에서 강연회를, 가네코는 천도교 강당에서 독창회를 동아일보 주최로 개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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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1년 6월 3일자 3면







  청(聽)하라 시인의 절규를


  본사 주최 류종열씨 강연은


  금일 하오 네 시 청년회에서


  기다리고 고대하던 류겸자 부인의 독창회도 어느덧 명일 밤으로 임박되었다. 미리부터 날녀나아가는 회원증의 청구하는 현상을 보아서는 과연 우리 사업을 남의 손에 맡기는 것도 미안한대 한 줄의 동정조차 업스랴하는 일반의 의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본사에서는 이번 음악회를 열게 된 원인이 되는 조선민족미술관 사업의 취지를 선전키위하야 이 사업의 주인공이 되는 동양대학교수이며 가장 조선과 조선 사람을 잘 이해하여 마음의 친구가 되기를 기약하는 류종열씨를 청하여 금삼일 하오 네 시부터 시내 중앙기독교 청년회에서 민족과 예술의 관계라는 문제로써 일장 강연이 있겠는데 강연의 내용은 물론 조선민족의 영화롭던 옛역사로부터 역사상에 찬란히 빛나던 예술의 정수를 들어서 우리 민족과 예술에 부탁할 바를 가장 아름다운 말과 뜨거운 정성을 가지고 부르짖을 것이라. 특히 씨가 정성을 다하여 조선 친구에게 부르짖는 소리를 널리 느낌 많은 청년에게 들리기 위하여 입장료를 받지 않게 되였음으로 비록 강연을 하는 시간은 하오 네 시이나 세시가량 하여서 오지 않으면 도저히 들어설 자리도 없을 터이니 일반은 아무쪼록 일찍이 와서 모처럼 듣는 뜻 깊고 느낌 많은 젊은 예술가의 뜨거운 부르짖음을 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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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1년 6월 4일자 3면







  금일 미술관을 위하야


  천도교회당의 柳兼子 부인 독창회


  민족미술관의 건설과 우리의 책임


  시민의 체면이 달린 금일의 음악회




  ◎ 독창회는 금일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하는 자금을 보조하기 위하야 본사의 주최로 여는 류겸자 부인의 독창음악회는 금일 오후 여덟시부터 경운동 천도교회당에서 열게 되었습니다


  ◎ 민족미술관은


  순전한 참마음으로 조선을 사랑하는 동양대학교수 류종열씨가 날로 흩어져 없어지는 조선의 미술품을 모아서 진열관을 만들어 이것을 조선 민족에게 바치려하는 아름다운 일이올시다


  ◎ 우리의 큰 책임


  그러함으로 아무 욕심 없이 다만 조선을 사랑하며 조선미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미술품을 우리의 손에 보존하게 하여주는 이 일에 우리는 큰 책임이 있나이다


  ◎ 우리 주인 체면


  물론 류종열 씨는 사회에 대하여 원조를 강청하는 것은 아니지마는 주인 된 우리의 체면으로 남의 일 보듯 가만히 있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올시다 이것이 큰 책임이올시다


  ◎ 음악회의 본지


  그리함으로 이 미술관에 대하여 다소간 보조를 하려는 마음으로 류겸자 부인을 정하여 그 수입의 전부를 기부하려고 하게 된 일인즉 누구든지 여기는 찬성하실 것이올시다


  ◎ 제 일등 성악가


  류겸자 부인은 현금 일본에 제일일 뿐 아니라 세계에 유명한 성악가인데 이번에 그 남편의 사업을 도웁기 위하여 조선에 왔으며 권뎐미네고라는 미인 음악가도 찬조합니다


  ◎ 일거양득의 일


  그럼으로 이번 음악회에 가는 일은 아직 조선에서 용이히 얻어듣지 못하는 고등 음악을 듣는 좋은 기회가 될 뿐 아니라 미술관을 위하여 우리의 책임을 행하는 일이올시다


  ◎ 부끄럽지 않게


  우리는 우리 시민 제군과 함께 우리 민족미술관에 대하여 우리가 냉담하지 아니한 일을 이번 기회에 보이고저 하나이다 너무나 부끄럽지 않게 하려는 뜻을 짐작하시오


  ◎ 회관과 회원증


  회관은 천도교회에서 경운동의 교회당을 무료로 빌렸으며 회원증도 본보에 기재한 여러 곳에서 호의로 수응하며 당일 회장 문전에서도 수응하니 미리미리 준비하시오


  ◎ 오시오 오시오


  어느 편으로 보든지 이번 음악회에는 오시오 유지하신 여러분은 조선 사람의 체면을 보전하는 의미로 오시오 금일 오후 여덟시 천도교회당의 류겸자 부인 독창회에 오시오




  민족의 생명은 예술에


 자기는 오직 시작뿐이라고


  류종열씨는 일행의 차중 감상


  반도 인사의 고대하던 동양대학 교수 유종렬 씨와 그의 부인인 류겸자 부인과 전전령자(前田嶺子) 양은 재작일 오후 일곱 시 오십분에 남대문에 도착하는 급행열차로 경성에 도착하였다. 기자는 일행을 맞고자 영등포 정거장까지 출영하였었다.


  첫여름의 넘어가는 햇빛이 눈빛 같은 휘장을 걷히어 들이비치는 차실에서 류종열씨는 조용히 입을 열어


  ‘과연 지금 조선 사람들은 너무도 자기들의 설움이 깊고 원한이 많아서 예술 같은 것을 돌아볼 사이가 없는 듯 합니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도 지금으로부터 몇 해 후에는 자기네가 만든 미술품의 헛허지는 것을 충심으로 애석할 때가 있을 터이올시다. 조선 사람은 실로 세계에 자랑할만한 예술의 천재를 가지었습니다. 지금 조선 사람이 자기들의 고독한 회포와 아픈 가슴을 남에게 하소연하자 하면 정치상 언론으로 발표하는 것도 좋지만은 그 진정을 예술로 발표하는 것이 더 효력이 있을 줄로 생각하옵니다. 또 지금도 교육용어에 대하여 총독부와 자각한 조선청년과의 사이에 격렬한 정론이 있다가 결국 조선어가 채용되지 못하였다는 말을 들었으나 실상 조선사람 중에서 위대한 예술가가 있어서 세계를 지배할만한 예술가가 난다 하면 자연 전 세계 사람이 조선말을 배우고자 할 것이외다. 금번의 미술관을 설립하는 동기로 말하면 아무쪼록 그 특색 있는 조선인의 미술품을 모아서 조선인의 성명을 세계에 빛내고자 함이외다. 그런고로 이것을 지금 시작은 내가 하였지마는 금후에 조선사람 중에서 열심으로 이를 찬성하여 경영하실 분이 있으면 언제든지 바칠 터이올시다. 나는 하루라도 속히 이 미술관이 조선유지의 손으로 경영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조선미술의 특색은 모두 선(線)에 있는데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적적한 정이 표현되였습니다.’


  하고 말하는데 얌전하고 친절한 류겸자 부인은 몇 번이나 머리를 숙이며 “해마다 와서 조선의 여러 양반에게 폐를 많이 끼쳐서”하는 애정이 듬뿍 담긴 말로 인사를 하고 옆에 앉은 전전량은 방년 십칠 세의 꽃같이 고운 처녀이라 수줍은 웃음을 머금고 “아무 것도 모르면서 와서…”하고 머리를 숙이다가 다시 흰 옷입은 조선인에 대한 느낌을 물으매 “마음속으로 항상 한번 와보기를 원하다가 부산에서 내리어 눈빛 같은 흰 옷입은 조선부인을 보고 어떻게 좋은지 모르겠어요.”하고 다시 고개를 숙이는데 기차는 어느덧 한강철교에 당도하였다. 넓으나 넓은 여의도 저편에 넘어가는 붉은 해가 산머리에 걸리고 쪽물같이 푸른 한강 물 위에 작은 어선이 시름없이 떠나는 것을 보고 일행은 일시에 “아아- 아름다웁다!”하는 감탄을 마지아니하는 중에 남대문정거장에 도착하여 본사 사원이외 다수한 명사의 출영을 받고 자동차로 조선호텔로 향하였더라.




  동아일보는 이들 부부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세세히 보도하면서 “주인된 우리의 체면으로 남의 일 보듯 가만히 있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며 조선 사회의 적극 참여를 호소했습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 방문에서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위해 광화문을 철거하려 한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귀국해 ‘장차 잃게 된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여’라는 글을 동아일보 1922년 8월 24~28일자 1면에 5회 연재했습니다.




  그는 “이 일편(一篇)은 잃어버려서는 아니 될 한 예술을 잃어버리게 되는 운명에 대한 애석(愛惜)의 문자(文字)이다.…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너의 생명이 조석(朝夕)에 절박하였다. … 아!! 광화문이여, 사랑하는 벗이여. 뜻 아닌 죽음의 운명을 당하고 얼마나 무참히 생각하는가?…단순하고 단엄(端嚴)한 그 자태에는 의지의 미가 표현되어있지 아니한가? …아! 동포여, 동양의 순수한 건축을 경애하라! …이것은 이조 건축의 대표이며 모범이며 정신이로다. … 정치는 예술에 대하여 무염치한 행동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예술을 침해하는 힘을 삼갈지어다. 예술을 옹호하는 것이 위대한 정치가의 할 일 아니냐. 우방을 위하여, 예술을 위하여, 역사를 위하여, 도시를 위하여, 더구나 그 중에 민족을 위하여 저 경복궁을 구원하라! 그것이 우리의 우의상 정당한 행위가 아닌가? 예술은 공리(功利)의 관계를 초월한 자(者)이다. … 그 문이 없어서는 아니 될 위치에 존재하였으나 지금은 도리어 있어서는 아니 될 위치에 서게 되었다.… 너를 가져가는 그 사람까지도 그날이 오지 아니하면 그것을 알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용서하여다오. 나는 죄 있는 여러 사람을 대신하여 사죄하려고 한다. 나는 그 까닭에 지금 사죄의 붓을 든 것이다.”며 조선 왕궁과 그 정문인 광화문을 철거하려는 일제의 정책은 잘못된 것이라고 질타했습니다.



 동아일보의 연재 글(1회) 속에는 없으나(사전 검열에서 삭제된 것으로 추정됨- 인용자 주) 일본 월간지 ‘가이조(改造)’ 1922년 9월호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제목이 독자에게 생생한 틀 잡힌 모습을 상기시키지 못한다면 아무쪼록 다음과 같이 상상해 주기 바란다. 가령 지금 조선이 부흥하고 일본이 쇠약하여 마침내 조선에 합병됨으로써 궁성이 폐허가 되고, 그 자리에 대신 저 양풍(洋風)의 일본총독부 건물이 세워지고 저 푸른 연못 넘어 멀리 보이는 흰 벽의 에도성(江戶城)이 헐리는 모습을 상상해 주기 바란다. 아니, 이미 그 끌 소리 들을 날이 임박했다고 상상해 주기 바란다. 나는 저 에도를 기념할만한 일본 고유 건축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장차 일케된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야 (一)    柳宗悅(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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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2년 8월 24일자 1면(1회)







  동아일보 1922년 8월 24일자 1면(1회)


  이 편(篇)을 공개할 시기가 성숙된 것같이 나는 생각한다. 장차 행하려는 동양 고건축의 무익한 파괴에 대하여 나는 가슴을 짜내는 듯한 아픈 생각을 느낀다. 조선의 수부(首府)인 경성에 경복궁을 찾아보지 못한 여러 사람들은 왕궁의 정문인 저 장대한 광화문이 장차 파괴될 일에 대하여 알지 못하겠기로 신경(神經)에 아무 느낌과 생각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독자가 동양을 사랑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의 소유자인 것을 믿고 싶다. 가령 조선이라는 것이 직접의 주의(注意)를 여러 많은 사람에게 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점차 인멸하여가는 동양의 고예술을 위하여 이 편(篇)을 정성껏 읽어주기를 바란다. 이 일편(一篇)은 잃어버려서는 아니 될 한 예술을 잃어버리게 되는 운명에 대한 애석(愛惜)의 문자(文字)이다. 그리하고 그 예술의 작자(作者)인 민족이 목전에 그 예술의 파괴를 당하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나의 동정코자 하는 애달픈 감정의 피력이다.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너의 생명이 조석(朝夕)에 절박하였다. 네가 이 세상에 있다는 기억이 냉랭한 망각 가운데 장사(葬事)되어 버리려한다. 아! 어찌하면 좋을까? 나의 생각은 혼란하여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하겠다. 혹독한 끌과 무정한 철퇴가 너의 몸을 조금씩 파괴하기 시작할 날이 멀지 아니하였다. 이것을 생각하고 가슴을 쓰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그러나 너를 구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불행히 너를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너를 불쌍히 여겨주지 아니하는 사람뿐이다.


  아직 이 세상은 모순의 시대이다. 문 앞에 서서 너를 쳐다볼 때 누가 그 위력의 미(美)를 부인할 자 있으랴? 그러나 이제 너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려는 자는 반역의 죄를 받을 것이다. 너를 자세히 아는 사람은 발언의 자유를 가지지 못하였으며 또는 너를 산출한 민족 사이에서도 불행히 발언의 권리를 가지지 못하였다. 그러하여 그곳에 있는 여러 사람은 어둡고 쓰린 무정한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너를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며 이후 세월이 지나갈수록 너를 애모하는 마음이 점점 깊어갈 것도 나의 확신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모의 애(愛)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없는 세상이다. 아니 이러한 애(愛)를 죽이라고 강제하는 세상이다. 아!! 생각할수록 괴로운 아픔이 가슴을 누른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니 이야말로 답답하고 아프지 아니한가? 아무나 말하기를 주저하리라. 그러나 침묵 가운데 너를 파묻어버리는 것은 나로는 차마 견디기 어려운 비참한 일이다. 이 까닭에 나는 말할 수 없는 여러 사람을 대신하여 네가 죽는 이 때에 한번 너의 존재를 이 세상에 의식케 하려고 나는 이 편(篇)을 쓰는 것이다.


  그러나 네가 있는 장소에서 일천(一千) ‘마일’ 이상이나 떠나있는 내가 홀로 침묵을 깨치고 소리를 친다 할지라도 어둠의 힘과 강한 형세로부터 너를 구원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시비를 논단(論斷)하는 이 말을 결코 무의미한 말이라고 생각지 말아주기를 바란다. 이를 쓰는 것이 나에게 대하여는 한 가지 큰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너의 운명을 다시 회복하도록 보증하여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에게 대한 존경과 정애(情愛)가 이 세상에 없다고는 생각하지 말라! 너의 미(美)와 력(力)과 운명을 이해하는 사람은 실로 적지 아니할 것이다. 만약 그 수가 적다고 할지라도 너는 그 적은 사람의 정애(情愛)라도 받아주겠지? 어쨌든 너의 죽음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음을 생각하여다오.


  나는 이 현세(現世)에서 장차 떨어지려는 너의 운명을 회복하여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영(靈)의 세계에서는 너를 불멸의 자(者)로 만들지 아니하고는 마지아니하겠다. 실제 너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해낼 수 있는 자유는 나에게 없으나 이 문자(文字)가운데서 너를 불멸케 하는 자유는 나에게 있다. 아! 나는 이에서 너의 이름과 자태와 영(靈)을 결코 스러지지 아니할 깊은 힘으로 잘 명각(銘刻)하겠다. 마치 너를 출산한 민족이 저 견고한 화강암 우에 끌을 깊이 파서 기념할 영원의 조각을 새긴 것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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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2년 8월 25일자 1면(2회)







  동아일보 1922년 8월 25일자 1면(2회)


  광화문이여, 너의 존재는 얼마 아니하여 없어지리라. 그러나 없어져서는 아니 될 너의 존재를 위하여 나는 이 글을 쓴다. 그리하고 나는 농후(濃厚)하고 선명한 먹으로써 이 글쓰기를 게을리 아니한다. 지상(地上)에 있는 시선에서는 너의 자태가 없어진다고 할지라도 나의 쓰는 이 문자(文字)는 지상의 어느 곳을 물론하고 널리 전파되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너를 근저(根抵) 깊게 기념하기 위하여 이 적은 추도문을 공중 앞에 보내는 것이다.


  아!! 광화문이여, 사랑하는 벗이여. 뜻 아닌 죽음의 운명을 당하고 얼마나 무참히 생각하는가? 나는 너가 맛보지 아니하면 어찌할 수 없는 괴로움과 쓰림을 생각하고 적지 아니한 동정을 보내고저 하노라. 아! 불쌍한 너의 영(靈)이여! 만약 네가 갈 곳이 없으면 나 있는 곳으로 와주며 네가 죽은 후에는 이 문자중에 길이 살았다고 누구든지 이 문자를 읽고 너를 생각하여줄 자가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의 존재가 한번 다시 여러 독자의 따뜻한 의식 가운데에서 애모의 기억을 일으킬 날이 기어이 올 것이다. 그러나 여러 많은 사람은 너에게 대하여 침묵을 지키고 말하지 말라는 무서운 제재를 받고 있다. 그 까닭에 나는 그러한 사람을 대신하여 발언의 자유를 지금 택하려고 한다.


  아!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웅대하도다. 너의 자태 지금부터 오십유여(五十有餘)년전 옛적에 너의 왕국 중에 가장 굳센 힘을 가진 섭정 대원군이 그의 주저치 아니하는 강한 의지에 의하여 왕궁을 잘 지키라는 의미로 남면(南面)한 훌륭한 장소에 굳은 기초를 정한 것이다. 이곳으로부터 조선이 존재한다는 거룩한 사명을 다하고 있는 여러 많은 건축이 전면좌우(前面左右)에 연락(連絡)하여 있으며 광대한 도성(都城)의 대로를 직선으로 하여 한성(漢城)을 지키는 숭례문과 서로 호응하여 있으며 그리하고 북에는 남산의 요위(繞圍)가 있어서 이 황문(皇門)은 과연 위엄 있는 위치를 태연히 점령하였다. 이러하여 3개의 궐문(闕門)을 중앙에 두르고 거대하고 견고한 화강암으로 높이 축조하였으며 그 위에 전통을 잘 지키는 중층(重層)의 건물을 용립(聳立)케 하였다. 여러 가지로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문(門)은 좌우로 균등의 고탑(高塔)을 연(延)하였으며 그 위에는 각루(角樓)가 아름다운 자세를 보전하고 있다. 앙견(仰見)하는 자로 뉘가 그 자약(自若)의 미(美)에 대하여 놀라지 아니할 자가 있으랴? 이것은 과연 일국(一國)의 최대한 왕궁을 지킴에 적당한 정문(正門)의 자세이다.


  독자여! 이것은 이조 말기의 작품이라고 업수히 여기지 말라! 그리하고 완려(婉麗)하고 우아하고 정치(精緻)한 미(美)를 얻어볼 수가 없다고 냉랭한 생각을 가지지 말라! 도리어 이조 말기에서라도 이러한 위대한 작품을 낸 것을 감탄치 아니하면 아니 된다. 단순하고 단엄(端嚴)한 그 자태에는 의지의 미가 표현되어있지 아니한가? 불교의 고려조는 먼 과거로 흘러가고 지금은 유교의 이조말이 아닌가? 지(地)의 교훈에서 양육된 사람은 대지에 누울 견고하고 안전한 미(美)를 가지지 아니하면 안 된다. 광화문에 대하여는 이조의 미의 권화(權化)를 목전에 느낄 것이다.


  보아라! 광화문이 어떻게 단순하게 태연히 땅에 서있는 것을. 문(門)을 지나는 자마다 모두 그 권위에 놀랄 것이다. 실로 한 왕조의 위엄을 보이기 위하여 건설한 적호(適好)의 기념비이다.


  여러 많은 사람은 이미 저 문전(門前) 광장에 무수히 쌓아놓은 거대한 재료가 화염에 쌓이어 경복궁 재건의 기도가 수포에 돌아가게 되었던 것을 기억하리라. 비상한 노고와 막대한 비용이 덧없는 일편(一片)의 회신(灰燼· 잿더미)으로 돌아가 일반시민이 뜻하지 아니하였던 재화(災禍)에 그만 의지가 약하여진 때에 그러한 변사(變事)를 일고(一顧)도 아니하고 곧 그 실행을 재촉한 대원군의 의지의 강한 것을 생각할 것이다. 실로 금일의 저 광화문은 그 불요불절(不橈不折)의 정신의 대담한 피력이다.


  그는 그가 죽은지 겨우 이십여 년 후에 그의 의지로 지어놓은 이 견고한 문이 이처럼 빨리 와괴(瓦壞· 깨지고 부서짐)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나도 예술적 의식이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 대하여 이러한 무참한 파괴가 백주(白晝)에 감행되리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다행히 이것이 오문(誤聞· 잘못 들음)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시간은 지체 없이 달려와서 파괴되려는 그 무서운 광경이 내 눈앞에 떠오른다. 그러면 이 검은 형세를 제지할 힘은 어디를 가든지 얻지 못할 것인가? 아! 동포여, 동양의 순수한 건축을 경애하라! 이에 필적할만한 건물을 우리는 세우지 못할 것이 아니냐? 오늘날 생활에 소용이 없다고 할지라도 마음대로 버려서는 아니 되겠다. 예술은 공리(功利)의 관계를 초월한 자(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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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2년 8월 26일자 1면(3회)







  동아일보 1922년 8월 26일자 1면(3회)


  미(美)가 있는 자는 길이 보존하여라. 더구나 순 동양식의 예술은 우리의 영예를 위하여 깊이 사랑하라! 여러 가지 사정에 있어서 그러한 예술을 수호하는 것은 조선(祖先)에 대한 추모이오 예술에 대한 이해인 것을 깊이 각오(覺悟)하라! 저 광화문은 비록 근대의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동양에서 그렇게 많지 못한 훌륭한 건축이다. 조선에서 다섯 개의 우수한 문을 택한다고 하면 저 광화문은 반드시 그 가운데 하나인 작품이다. 작품의 양이 많지 못하고 역시 그 수가 매우 적은 조선에서는 더구나 중요한 건축의 하나가 아닌가? 저 광화문이 주도(主都)의 미를 장식하고 있는 한 요소인 것은 누구나 모두 부인할 자가 없을 것이다. 그 주문(主門)이 없어진 때에 경복궁에 무슨 힘이 있으며 경복궁을 잃어버린 때에 한성(漢城)에 무슨 면목이 있으랴? 저 왕궁보다 더욱 정확한 형식과 더욱 위대한 규모를 가진 건축은 조선 안에서는 어디를 가든지 찾아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이조 건축의 대표이며 모범이며 정신이로다.


  정치는 예술에 대하여 어디까지든지 무염치한 행동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예술을 침해하는 힘을 삼갈지어다. 도리어 예술을 옹호하는 것이 위대한 정치가의 할 일이 아니냐. 우방을 위하여 예술을 위하여 역사를 위하여 도시를 위하여 더구나 그 중에 민족을 위하여 저 경복궁을 구원하라! 그것이 우리의 우의상 정당한 행위가 아닌가?


  특히 조선이라는 것을 생각게 하는 제(諸) 관아(官衙)를 좌우에 이끌고 용립(聳立)한 북한산을 배경으로 하여 멀리서 대황로(大皇路)를 밟으며 광화문을 바라보는 광경은 참말 잊어버릴 수 없는 위대한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니냐? 자연과의 배치를 깊이 고찰하여 잘 계획한 그 건축에는 이중(二重)의 미가 있도다. 자연은 건축을 지키고 건축은 자연을 장식하지 않았는가? 사람은 함부로 그 사이에 있는 유기적 관계를 깨뜨려서는 아니 된다. 그러나 어찌하랴? 지금은 천연과 인공(人工)과의 좋은 조화가 이해 없는 자로 인하여 파괴되려는 것을. 이것이 만약 꿈에 불과하다면 다행하겠다. 그러나 그것이 무서운 현실인 것을 어찌하랴?


  마음을 고요히 하여 십여 년 옛적을 생각하여 보라! 위대한 광경에 마음이 끌리어 문 앞에 가까이 나갈 때 사람은 알지 못하게 그 장엄한 미에 마음을 빼앗길 것이다. 이리하여 중문(中門)으로 들어가 금천교(錦川橋)를 건너가면 앞에는 장대한 근정전(勤政殿)이 용립하고 뒤에는 강녕전(康寧殿)과 경회루(慶會樓)의 기와가 물결치는 모양으로 서로 중첩(重疊)하여 있다. 다시 비원(秘苑)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혹은 녹색으로 혹은 적색으로 몸을 장식한 십여 개의 건물이 혹은 그 아래 연화(蓮花)를 피우고 혹은 그 위에 송지(松枝)를 뒤덮어 각각 보기 좋은 장소를 택하여 있다.


  동(東)에는 건춘문(建春門) 서(西)에는 영추문(迎秋門) 북에는 신무문(神武門) 그리하고 남면(南面)의 정문(正門)을 이름하여 사람들은 광화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연(整然)한 조직(組織)있는 광경은 두 번 다시 이 세상에서 보지 못할 것이다. 이조의 대표적 건축인 강녕전과 교태전(交泰殿)은 이미 다른 곳으로 이전이 되고 변형이 되어 지금은 다만 온돌에서 나오는 연기만이 적은 산 옆에서 고요히 떠오르고 있을 뿐이다. 중요한 최대의 건축인 근정전을 문 앞에서 우러러볼 날은 두 번 우리에게 오지 아니할 것이다.


  곧 얼마 아니하여 그러한 동양의 건축과 아무 관계없는 방대한 양풍(洋風)의 건축이 곧 장차 완성될 총독부의 건축이 지금 그 준공을 급히 하고 있지 아니한가? 아! 이미 전 날에는 자연의 배경을 고찰하고 건축과 건축의 관계를 숙고하여 모든 점에 균등의 미를 포함케 하여 순 동양의 예술을 보유하려고 한 노력이 지금에 이르러는 전연(全然)히 파괴가 되고 방기(放棄)가 되고 무시가 되었으며 이에 대신하여 아무 창조의 미를 가지지 못한 양풍(洋風)의 건축이 돌연히 이 신성한 지경(地境)을 침범한 것이다.


  이리하여 광화문에 연속된 흥례문(興禮門)은 이미 자취도 없어졌으며 저 금천교(錦川橋)와 또 그 아래로 보이던 석조(石彫)의 괴물은 무참히 파괴를 당하여 지금은 다만 그 석편(石片)등이 풀 속에 흩어져 있을 뿐이다. 저 위대한 경회루는 이후에도 잔존(殘存)하겠지마는 그것은 다만 유연(遊宴· 연회)의 용(用)으로만 공급될 것이다. 이리하여 남는 광화문은 그 위치에 서 있을만한 의의를 참혹히 잃어버릴 것이다. 이 전(前) 날에는 그 문이 없어서는 아니 될 위치에 존재하였으나 지금은 도리어 있어서는 아니 될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것은 그 건물을 사용하는 자가 변한 까닭이 아니고 무엇이랴? 누구든지 저 양풍(洋風)의 건축이 광화문의 존재를 무시하고 설계된 것인 것은 부인할 자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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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2년 8월 27일자 1면(4회)







  동아일보 1922년 8월 27일자 1면(4회)


  현대의 동양, 주마등과 같이 모든 것이 격변하여가는 현대 조선에서는 저 광화문이야말로 참말 귀중한 유작품이 아닌가? 이 까닭에 그 파괴가 무익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지를 숨길 수 없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실현되려는 파괴에 대하여 아!! 우리는 무슨 말을 하랴? 저 광화문이 파괴를 당하고 그 대신에 무엇이 건설되겠는가? 우리는 위대한 자를 무익한 노력으로써 파괴하고 그 대신에 왜소한 문을 세우게 되는 날을 어쩔 수 없이 기다리게 되었다. 아!! 그러면 여러 사람은 눈물을 흘릴까? 그만 미쳐버릴까? 어떠한 기술로라도 저 광화문보다 더 장엄하고 더 거대하고 더 아름다운 문을 세우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광화문과 장차 세울 문(門)과를 마음에 그리고 어느 문이 우월할까를 선택하여보라! 그 선택함에는 일순간의 시간이라도 요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파괴가 기탄(忌憚)없이 감행됨에야 무슨 말을 하면 좋을 것인가? 여러 사람은 결코 스러지지 아니할 하나의 기억이 스러지라고 강제하는 날이 시시각각으로 가까워 옴을 알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스러지지 아니할 기억이 이 문자(文字)로써 여러 사람의 가슴에 인(印)박힐 수가 있을런지?


  어찌하여 저 광화문이 파괴를 당한다는 생각을 우리에게 주었는가? 아!! 어찌하여 그 파괴되는 문을 구원할 수 없으리만치 그처럼 비참한 경우에 빠진 자기(自己)가 되었는가? 우리에게 그것은 변해(辯解)할만한 변해다운 변해가 있을까? 우리가 이러한 파괴를 마음대로 하는 것은 우리의 우의상 정당한 일일까? 또는 이 건축에 대한 정당한 이해일까? 우리는 그 파괴를 시인할만한 적극적 이유 어디를 가든지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아! 우리는 공연히 대답할 수 없는 대답을 바라서는 아니 된다. 그러나 파괴하는 그 사람은 대답하려고도 아니하고 파괴를 마음대로 행하고 있다. 아! 시간은 주저 없이 광화문의 사형을 우리에게 고하고 있도다.


  재흥(再興)된 후로부터 겨우 오십 여년의 성상(星霜)을 지났을 뿐이다. 그것이 어떻게 조성되었으며 누가 지었으며 또는 어떻게 완성되었는가는 지금도 오히려 새로운 추억이 아니냐? 그리하고 오히려 그러한 사실을 목격한 사람이 지금도 남아있는 이때에 이러한 파괴를 감행하여 그러한 기억을 추가케 하는 것은 그들에게 대하여 너무도 무정하고 무참한 행위가 아닌가?


  나는 이러한 사정을 생각하고 파괴를 피하여 이전을 계획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면 이 자비스러운 처치로써 어떠한 운명을 광화문이 받을까? 다행히 죽음은 이로 인하여 면한다 할지라도 문이 가지고 있던 의의는 그만 반(半) 남아 죽어버리는 것이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문이오 딴 곳의 문이 아니다. 저 위치와 저 배경과 저 좌우의 벽을 제하고는 광화문에 얼마나 가치와 생명이 있을까를 생각하여 보라! 형체는 남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못 추상적의 생명 없는 형체가 아니냐.


  특히 자연과 건축과의 관계와 조화를 생각한 고인(古人)의 주의를 무시하고 그것이 얼마나한 의의를 가지게 될 것인가? 아!! 그러면서 다시 저를 사(死)에서 구원할 수는 없을까? 저의 존재와 가치를 시인하고 보호하려는 사람은 없는가? 저는 아직 젊도다. 육체는 완연히 견고하지 아니한가! 때 아닌 죽음을 저에게 재촉하는 죄는 그 책임을 누가 지려는가!


  아?! 광화문이여 너는 얼마나 적막히 생각하는가? 너의 많은 여러 벗들은 이미 너보다 먼저 죽어버렸다. 도성(都城)의 서방(西方)을 장식하고 있던 돈의문(敦義門, 서대문)과 소의문(昭義門, 서소문)의 양문은 벌써 시민의 눈에서 자취를 잃어버린 지가 오래였다. 선년(先年)에 내가 혜화문(惠化門, 동소문)을 방문하였을 때 그 문은 보호자가 없는 까닭에 그 가련한 모양은 풍우(風雨)에 쓰러져 버릴 듯이 보였다.


  너의 존귀한 형제인 숭례문(崇禮門)은 성벽에서 고립이 되었으며 또는 보잘것없는 철갑(鐵匣)으로 겨우 몸을 보전하고 있다. 사랑하여주는 주인이 없는 너는 얼마나 그 짧은 운명을 애달피 생각하는가? 죽지 아니할 네가 죽지 않으면 아니 될 이 세상을 얼마나 부자연하게 저주하고 원망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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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2년 8월 28일자 1면(5회)







  동아일보 1922년 8월 28일자 1면(5회)


  아아!! 문 앞에 안치된 두 개의 큰 석사(石獅· 돌사자상)여. 너는 오랫동안 잘 왕궁의 정문을 수호하였다. 추울 때나 더운 때나 어느 때를 물론하고 그 자태를 변치 않고 너에게 가까이 오는 자의 마음에 마다 위대한 권위로써 임하였다. 그리하고 문에 상당한 위엄과 확실로써 궁전에 더할 수 없는 미(美)를 첨부하였다.


  너는 지금도 묵묵히 전면을 바라보고 있으나 장차 네 주인의 신상에 내릴 운명을 위하여 너는 걱정하지 아니하는가? 아! 너는 자세히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너의 주인은 이미 임종의 상(床)위에 누워있는 것이다. 그리하고 너도 영원히 동(動)하지 아니하겠다는 그 장소로부터 장차 동(動)하게 될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아!! 그러면 너는 장차 어디로 가게 되려는가?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아니 너를 가져가는 그 사람까지도 그날이 오지 아니하면 그것을 알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용서하여다오. 나는 죄 있는 여러 사람을 대신하여 사죄하려고 한다. 나는 그 까닭에 지금 사죄의 붓을 든 것이다. 

  혹은 더운 여름철이나 또는 하늘 위에 눈송이 날릴 때이나 그러하고 석모(夕暮)의 반월(半月)이 청백(靑白)의 빛을 누상(樓上)에 던질 때나 그 어느 때를 물론하고 나는 몇 번이나 여러 가지 생각을 마음에 그리고 그 문을 쳐다보았는지 알지 못한다. 지금도 그 거대한 모양이 아름아름 내 눈앞에 떠오른다. 그런데 저 광화문이 이 세상에서 없어진다고 어떻게 생각할 수가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괴로운 현실임에야 어찌하랴? 누구든지 그 문을 파괴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할 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떠한 사정으로 인하여 너를 이러한 비참한 파탄의 정도까지 인도하게 되었는가?


  나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에 말한 그 말을 생각한다. ‘여러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하는 이 말을. 만약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안다고 하면 아니 될 일을 하고 있는 그 우열(愚劣)한 죄를 짓지 아니할 것이다.


  광화문이여. 장수할 너의 운명이 단명(短命)에 마치고 마는 것을 너는 얼마나 괴로이 생각하고 얼마나 적막히 생각하는가? 나는 네가 아직 건전(健全)하여 있는 그 동안에 다시 바다를 건너 너를 찾아가려 한다. 너는 나를 고대하여다오! 그러나 나는 그 전에 시간을 이용하여 차(此) 일편(一篇)을 쓰는 것이다. 너를 산출한 너의 친한 민족들은 지금 말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 까닭에 그러한 사람들을 대신하여 너를 애석히 생각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너의 생전에 말하여 두고 싶다. 그 까닭에 나는 이 말을 기록하여 공중 앞에 보내는 것이다. 이로써 너의 존재가 다시 한번 의식 깊게 여러 사람에게 반성을 준다고 하면 나는 얼마나 기뻐하랴? 그리하고 내가 기록하는 이 문자로써 그 의식을 영원히 계속케 한다면 너도 얼마나 기뻐할 것이냐? 그러면 이것이 나의 기쁨이 아니고 무엇이랴? (1922년 7월 4일 동경에서)




  이 글을 연재하기에 앞서 동아일보는 1921년 5월 24일자 3면에서 광화문의 철거문제를 처음 제기했습니다.




  “경복궁 대궐 안에 지금 짓고 있는 총독부청사의 공사가 끝나면 오랫동안 많은 역사를 가진 고대의 건축물인 광화문을 헐어버린다는 말이 세상에 있어 애석해 하는 사람이 많은 모양인데 이에 대하여 건축과장 암정장삼랑(岩井長三郞)은 ‘총독부 공사를 대정(大正) 십삼 년 (1924년)까지 끝낼 계획이므로 어떻게든 내년 안에는 결정하겠습니다. 광화문을 헐어버린다는 말은 공연한 헛소문이올시다. 어디로든지 옮겨야 할 터인데 위치 문제가 결말이 안 난 것이올시다. 항간에는 그 건축물은 건축학리상(建築學理上)으로 옮길 수 없다는 말이 있으나 결단코 그럴 이치는 없고 돈이 많이 들 뿐이올시다. 총독부의 방침으로는 결단코 헐어버리는 일은 없을 터이요. 장차 좋은 곳으로 옮길 터’라고 말하더라.”






                                                               동아일보 1921년 5월 24일자 3면14









  야나기 무네요시와 같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광화문을 철거하려던 총독부의 계획은 변경되어 1927년 9월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옆으로 이전, 광화문의 모습은 보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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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춘문 북쪽으로 옮기기 위해 해체 작업 중인 광화문







  야나기 무네요시는 27살 때인 1916년 조선에 처음 왔습니다. 21살 때 한 골동품 가게에서 조선의 항아리를 본 그는 ‘조선 예술의 아름다움’에 심취해 일생동안 20차례 넘게 조선을 방문하면서 조선의 미(美)를 세상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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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해인사 석탑 앞에서 야나기 무네요시







  문화적 기억- 야나기 무네요시가 발견한 조선 그리고 일본(일민미술관, 2006년, 15~18쪽)


  마무라 교코(三村京子, 일본민예관 국제부 수석)


  “일본민예관의 창설자 야나기 무네요시는 1914년 9월 그 유명한 청화모깎기초화문표주박형병(染付面取草花文瓢型甁)과 만났다. 조선시대의 도자기는 야나기에게 이후의 ‘민예(民藝)’, 즉 ‘쓰임(用)의 미’의 기준을 가르쳐 주었다. 사건의 발단은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가 로댕의 조각을 보기 위해 조선도자기 몇 점을 가지고 야나기의 집을 처음 방문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이를 본 야나기는 조선 공예의 아름다움을 ‘미의 본질’이라 말할 정도로 감격했다. 그때까지 야나기와 시라카바(白樺) 동인들이 서양에서 구하려 했던 것과 동일한 정신이 동양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의 장인들이 만든 일상적 물건 속에 미와 생활이 일치한 참다운 아름다움이 있다고 확신하게 되는데, 이 사건이 결과적으로 야나기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었다.


  1916년 8월 야나기는 조선을 처음 여행하게 되는데, 이 때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을 방문했다. 종교철학자인 야나기는 이 석조상들을 통해 다시 한번 동양 종교가 낳은 조형미의 우수성에 감명을 받고, 조선 민족의 예술적 자질을 높이 평가했다.


  …(중략) 동아일보는 1920년 4월 1일 창간되었다. 창간된 지 2주가 못되어 야나기의 ‘조선인을 생각한다’가 동아일보에 연재되기 시작한다. ‘나는 지금 조선 사람들의 운명을 되돌아보면서 다시 이 세상의 부자연스러운 기운을 생각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 일어나고 있다.’


  야나기와 동아일보사는 문화의 예지야말로 칼의 힘을 압도한다고 확신하였으며 이를 실현하고자 노력한 정의감과 용기의 소유자들이었다.”


  …(중략) 1920년 말, 야나기는 아사카와 다쿠미와 함께 조선민족미술관을 구상하고, 다음해 1월에 취의서를 잡지 ‘시라카바’에 발표한다. 기부한 사람 중에는 일본인 뿐 만 아니라 동경에 살았던 독립운동가 백남훈, 김준연, 백관수 등도 있었다. 야나기와 가네코는 자금 마련을 위해 1921년 5월 31일 재차 조선을 방문하여 강연회와 음악회를 열었다. 약 2개월간의 조선체재 기간 중 동아일보사의 장덕수, 기독교 지도자 조만식 등의 협력은 빼놓을 수 없다.


  1924년 4월 야나기는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경성(현재 서울)의 경복궁 안에 아시아 최초의 공예미술관인 조선민족미술관을 열었다. 조선의 미는 조선에 있어야 한다는 야나기의 신념이 관철되었던 것이다.


  …(중략) 야나기 무네요시는 특히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마음깊이 경애하고 그것이 일본인에게 널리 친숙해져서 한국인의 자신감과 긍지가 되도록 평생 노력했다. 그 결과 1984년 야나기 사후 23년,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한국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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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가 처음 접한 청화모깎기초화문표주박형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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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 무네요시와 부인 나카지마 가네코(中鳥兼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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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의 야나기 무네요시





















2 Comments »

  1. 뒤늦게 선생님의 덧글을 봐 수정이 늦었습니다. 소중한 지적, 감사합니다.

    Comment by 신이 — 2010/03/09 @ 4:25 오후

  2.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런데 야나기 무네요시의 글 연재분 4회 게재일이 4월 15일인대, ’12일’로 잘못 적혀 있네요.

    Comment by 오해 — 2010/10/02 @ 9:2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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